요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텔레비전에서 잊지 못할 첫 사랑이나 혹은 스승을 찾아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며 그 때를 다시 되돌려 보고 싶은 심정으로 그동안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사람을 찾아갑니다.
몇 해 전 어린 시절에 죽고 못 살았던 교회 친구들을 30여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살던 집에서 이사 간 후 연락이 끊겨 만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온 것입니다. 보고 싶어 수소문 끝에 제가 사는 곳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연락한 것입니다. 만나기로 한 그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옛날 그 시절의 추억들이 잔잔한 영상으로 다시 떠올랐습니다. 골목에서 축구하다 남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도망가다 잡혀 의리를 지키느라 서로 자기가 깼다고 주인에게 우긴 일, 성탄 이브날의 성극 공연에서의 실수, 그리고 새벽송을 돌던 일, 주일 새벽이면 음치이면서도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가 함께 찬송을 하며 환자를 위로하던 일, 돈이 없어 버스표로 떡볶기를 사먹던 일 그리고 집까지 걸어서 간 일, 가난한 친구 집을 돕자고 나무로 된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팔던 일, 그리고 그 판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불량배에게 빼앗긴 일, 강원도 간현으로 중고등부 수련회에 가서 남의 집 옥수수를 서리한 일, 그러나 서리하는 것을 보고도 허허 웃기만 했던 시골 아저씨의 너털웃음 등 잊지 못할 추억들이 밤을 지새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 중에는 한 때는 가슴 속에만 몰래 간직했던 예쁜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이튿날 저녁에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어느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곧 어색하였습니다. 서로 분위기를 맞추느라 옛날 추억을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는 왔습니다만 왠지 어색하였습니다. 그저 옛날 이야기를 한 것뿐이지 옛날 그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기쁨 보다는 어색함이 앞섰습니다. 그리곤 어제 밤을 설치던 설레임과 부픈 기대는 사라졌습니다. 물론 한 때 몰래 마음에 두었던 여학생의 그 예쁜 얼굴이 세월에 깍여 버려 아줌마가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그 의미는 그 때, 그 곳에서의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그 곳, 그 사람과의 시간은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때, 그 곳,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 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이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셀 수 없이 많은 순간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지금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나 남자가 수많은 여자나 남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듯이, 내 자식이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일 수 없듯이, 오직 이 사람 또는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그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이 또는 그 사람입니다. 사람의 만남은 이렇듯 유일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 연인을 떠나보낸 친구에게 세상에 남자가 혹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떨쳐버리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아픔입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하나 더 나면 되지 하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시간도, 그 어떤 장소도 바꾸어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때, 그 곳, 그리고 유일한 그 사람과의 만남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유일한 내가 유일한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소중한 사랑의 만남인데 나이가 들면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만나기도 전에 우리는 구별하고 차별합니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한국인과 외국인, 호남사람과 영남사람,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지위가 놓은 사람과 낮은 사람, 거기다가 만나기도 전에 우리 편, 제네 편을 가릅니다.
그 옛날의 사랑이 그리워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 어린아이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때 까지만 해도 친구에게 고향이 경상도냐, 전라도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잘 사는 친군지, 못 사는 친구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지위가 무엇인지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젠 구별하고 차별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몹쓸 어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구별과 차별 속에서 너무나 쉽게 나 자신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 옛날 뜨거운 가슴의 저는 사라졌습니다.
빈틈없이 짜여진 이 세상의 구별 체계들 앞에서 너무나 쉽게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어느 편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단 속에 묻혀 버려 나 자신은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 뿐인 나이고 오직 하나 뿐인 당신을 만나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나와 당신은 수천, 수 만개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나와 당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롬 4:1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비 유대인, 할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할례를 받은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유대인의 율법과 사고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할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의 표시로 그들은 난 지 팔일 만에 남자의 성기의 포피를 벗깁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요, 선택받은 백성이요, 의로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먼 옛날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할례 대신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 교회의 직분을 갖게 됩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기도 합니다. 오래 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봉사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우리는 구원 받은 의로운 사람입니까? 10년, 20년, 30년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 봉사를 하고 직분이 있어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입니까? 쉽게 말하면 오래 동안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봉사했던 그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갖고 지키는 유대인, 특별히 율법 중에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되어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된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에 대해 그들의 믿음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을 들어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이하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지적합니다. 여기서 행위란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의 행위란 예배를 잘 드리고 율법을 잘 지키고, 특히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유대인의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사람은 유대인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만이 선택 받은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입니다.
유대 랍비들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 '이웃'은 다른 사람 아닌 유대인만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은 원수처럼 여기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속에 이런 것은 없을까요? 교회 밖에 있는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사람들로 여기는 우리가 아닙니까요?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기에, 신앙의 연조가 오래기에, 교회 일을 많이 했기에, 집사, 권사, 장로, 목사가 되었기에 의롭고 구원받은 사람일까요?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가 아니라 원수일까요?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의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심지어는 직분을 얻는 것으로 은연중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자기 행위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의, 심각한 병입니다. 성경책 끼고 세례 받고 교회에 왔다 갔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세례를 받아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얻고 봉사를 많이 하고 선교 활동,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천국 문 입구에서 줄을 서서 잘 들어가는데 목사들과 신부들은 못들어 가게 하더랍니다. 화가 난 그들은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는데...." 그러자 천사가 "여보쇼, 교인들은 돈을 내면서 예수를 믿었지만 당신들은 돈을 받으면서 예수를 믿었소. 그러니까 맨 뒤에 들어가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일, 착한 일 많이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 받고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모두가 존경하는 아브라함을 들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나이는 99세입니다. 창 17:24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창 15:6이 말하는 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3절에서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0세입니다. 그러니까 할례 받기 훨씬 전 그러니까 29년 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이 먼저였습니다.
그렇다면 행위가 아닌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행위가 믿음이란 말과 상충되는 말로, 행위와 믿음이 서로 대립되는 말로 쓰였을까요? 그 설명을 사도 바울은 본문 4절과 5절에서 비유로 상세히 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러분, 어떻습니까? 일을 해서 받는 것을 빚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한 대가요, 삯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빚입니다. 그렇듯이 죄를 지은 경건치 못한 사람이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없어, 대신 어떤 사람이 대신 치러 주었다면 그것은 빚이요, 은혜일 것입니다.
저마다 잘못에 대해 그 잘못에 그만한 책임을 지면 된다고 말은 쉽게 합니다. 혹 도둑질을 하여 물질적인 것 자체는 돌려놓을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쉽게 돌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일해서 도로 갖다 놔야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일을 해서 갚았습니다. 그리고 훔친 돈을 아버지 지갑에 다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금전으로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지불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괴로운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말합니다.
"얘야, 나는 정말 너에게 실망스럽다. 훔친 돈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버지 돈을 훔쳤습니다. 용서해주세요.'이렇게 말할 수 없었니? 돈을 다시 갖다 놓았다고 모든 것이 정상이 되니? 우리 관계가 돈만 거래하면 되는 관계니? 아버지인 내가 아들과 이런 관계 밖에 안되니 참으로 서글프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바로 그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이기에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그 자녀와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두 번 씩이나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버렸습니다. 친자식을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않고 여종을 통해 다른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돌아왔습니다. 그 때마다 자손의 번창과 땅을 약속 받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믿음의 관계였습니다. 언제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이든, 그것이 실패든, 좌절이든, 잘못이든 돌아와 용서 받을 수 있고 다시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허물이 있고, 무슨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아버지이기에 돌아올 수 있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순례를 계속합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는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용납하고 다시 의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뻔뻔하지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본문 7절 이하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시편 32:1, 2절의 시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언제나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불법을 사하십니다. 그 죄를 가리십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십니다. 돌아오면 사함을 받을 수 있고 미래를 향한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된 믿음의 관계를 압니다.
문제는 돌아오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시고 새 삶을 약속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할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교인이건 아니건, 교회에서 무슨 봉사를 했건 안했건, 교회 안의 사람이건, 교회 밖 세상 사람이건 이 믿음이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 의인 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싶은 죄인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고, 우리에게 미래의 새 약속을 주심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집단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유일한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돌아오는 우리 각자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삶의 새로운 미래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 각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용납하는 훈련를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유를 불문하고 돌아오는 모든 사람을 용납하시고 의롭다 하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유일한 사람으로 소중히 여기며,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었건 얼마 되지 않았건, 교회 봉사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늙었건 젊었건, 직분이 무엇이건, 가진 것이 있건 없건, 사회적인 지위가 높건 낮건, 서로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존재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샘 식구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 아닌 천호동 43-61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바로 이 곳에서, 바로 이 시간에 첫 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 안에서 만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만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각자 유일한 존재로, 아들과 딸로 만났듯이, 우리도 서로를 둘도 없는, 그 어느 누구에 의해 바뀌어 질 수 없는 존재로 만나야 합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만나야 합니다. 유일한 당신이 유일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행복한, 내가 행복하기에 당신이 행복한 존재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유일한 행복으로 만나야 합니다. 주 안에서 서로를 믿는 행복한 믿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오늘 3월의 첫 주일 아침, 행복한 믿음으로 새 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행복한 믿음의 씨앗을 서로에게 심어 추수할 미래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행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