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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한 ‘사이’
―이태관, 『사이에서 서성이다』(문학의전당, 2010)에 대하여
남기택
1.
이태관은 착한 시를 쓰는 시인이다. 등단(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사상』 신인상) 이래 두 번째 시집을 상재하고 있으니, 요즘 같은 속도주의 세태에 비하자면 과작인 편이기도 하다. 그가 첫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2003)에서 보인 세계는 표제 그대로 기억의 색채라는 관념을 추체험한 구체적 형상들이다. 그 색감을 형성하는 데에 상처와 죽음이라는 근원적 기제가 존재하였고, 거기에 재생의 이미지가 연동됨으로써 이루는 중층적 감각이었다. 그리하여 첫 시집의 상당 부분은 가족사의 상처와 그에 대한 애도로 할애된다. 부모에 대한 기억과 생의 희구(“말없이 지켜보는 아이의 눈동자 속,/ 아, 그 속에서 웃고 계시는 그리운 아버지”, 「집안 내력」), 여행을 통한 상처의 재생(“이곳이 섬이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나는 그물에 갇혀 허우적대는/ 등 푸른 생선 하나”, 「섬」) 등속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억의 질감과 패턴을 구성했던 이태관 시가 『사이에서 서성이다』의 두 번째 전기를 맞는다.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많은 시편들이 ‘자연’을 관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착한 시성이라는 수사의 주된 근거이기도 한 이러한 양상은 단지 소재적인 정황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개의 작품들이 자연적 물성을 좇아 생의 의미를 천착하는 의도적 방식으로 주조된다. 시집을 여는 서두를 본다.
조롱박 위를 구르던 바람이 어느새
창문을 넘었나 보다
며칠째 펼쳐놓은 책갈피 위를 뒹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듯 살며시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파리 날다
넘어지는 한 세계 위에 앉아
가만히 세상의 뼈를 읽는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마음이 가 닿는 그 틈,
파리 날다
휘둘린 파리채에 제 몸을 낮춘다
한 세계의 문이 닫힌다
―「파리 날다」 전문
이 작품은 파리의 시선을 통해 세계의 비의를 그린다. 조롱박과 바람 따위는 파리의 세상을 기동하는 배경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한다. 이들 대상이 서로 관계하는 사이, 감각과 정서 간의 간극 등이 파리의 비상 속에 각인된다. 그 사이는 “세상의 뼈”가 포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미 파리의 행위 자체가 ‘사이’의 질감으로 묘사되고 있다. “파리 날다”는 수사가 그것이다. 즉 표제에서나 “그 사이 파리 날다”와 같이 사이의 순간에 비상하는 행위를 종결 어미로써 표현하는 듯 읽히는가 하면, “파리 날다/ 휘둘린 파리채에”의 경우 연결 어미가 생략된 채 진행중인 상태의 전환을 나타내는 듯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비의의 세계는 파리채가 휘둘리는 찰나에 소멸되지만, 사이를 기록하는 언어는 여실히 남아 여운을 전한다. 여기서 “세상의 뼈”가 상징하는 것이 감각될 수 없는 자연의 형해이자 형용하기 곤란한 생의 거처라는 점이 주목된다. 눈과 마음이 결합된 시선이 세상의 뼈라는 실체를 체현한다. 삶의 각성을 전달하는 매개로서의 자연이란 이러한 방식을 가리킨다.
2.
‘사이’는 이번 시집의 표제이자 쟁점이 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사유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시는 표제작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앞선 「파리 날다」와 대비하여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간이다.
늦은 저녁 알밥을 먹으러 간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알콩달콩 살라던 예식장이
장례식장으로 바뀌어 있다
삶과 죽음 사이는 얼마나 되나
달궈진 뚝배기에 알이 익는다
씨앗 품어 줄 땅에 허리 조아리듯
밥상 위에 조배한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소금물에 절여지지 않지
초례청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었나
장례식장 앞, 머리 흰 노인
마음보다 먼저 몸이 허물어지고 있다
반짝, 달이 빛난다
그러는 잠시
앰뷸런스 사이렌 울리며 지나가고
알이 터진다
갈라진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 몸이 부화하기 시작한다
―「사이에서 서성이다」 전문
「파리 날다」에서 파리가 날아든 사이의 시간을 천착하고 있다면, 「사이에서 서성이다」는 ‘사이’ 자체를 전면에 내세워 여러 겹으로 기록한다. 우선 “늦은 저녁 알밥을 먹으러 간다”는 일상적 사건이 “갈라진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 몸이 부화하기 시작”하는 환각의 체험으로 전이되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 안에는 “예식장이/ 장례식장으로” 변한 사이와 “삶과 죽음”을 사유하는 사이가 중첩된다. ‘알’이라는 소재는 들뢰즈 식으로 ‘기관화되지 않은 신체’를 환기하며 사이의 사유를 적절하게 매개하고 있다. 알을 포함하여 이 작품의 사이사이에 배치된 자연 이미지들은 삶과 죽음 간 새로운 신체가 태동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이태관 시에서 존재의 비의와 생의 가치를 성찰하는 주요한 매개는 자연, 즉 기호화되지 않는 자연의 내적 원리 자체인 것이다. 무수한 배경들, 소재들, 시적 동기들이 자연으로부터 태동한다.
찬바람 새어드는 지하도
허리 굽혀
태양을 구걸하는 모자를 본다
고개 숙인 어미의 젖가슴 움켜쥔
아이 얼굴이 초승달이다
파리한 형광등 아래
뿌리 돋아날까
엉겅퀴의 손마디가
허공을 움켜쥐고 있다
(중략)
무덤을 가슴에 품은 모자
텅 빈 대합실을 가로지른다
그 그림자에 밟혀 불현듯
허방다릴 놓았다
가슴에 스미는 통증,
누가 볼 새라
나뒹군 모자를 서둘러 집어 쓰고
벽화 속을 빠져 나온다
가야 할 길이 아득한 밤이다
―「벽화」 부분
이 작품은 자연의 내면으로부터 벗어나 인생의 부면에 집중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태관 시의 표현들은 비교적 언어의 지시적 의미망에 충실한 반면 긴장된 배치를 통해 시적 운산을 추구하는 편이다. 그에 비하자면 「벽화」는 비교적 상징적인 구조를 지닌 작품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읽히는 이 작품은 지하도에서 마주친 구걸하는 모자에 관한 인상기로 보인다. 특유의 연민 어린 시선에서 출발하여 자아를 반성하는 과정으로의 이행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가슴에 품은 모자”의 이미지는 “가슴에 스미는 통증”을 낳고, 이는 또 다른 ‘사이’(“가야 할 길이 아득한 밤”)를 계기한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그림자’의 비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태관 시에서 그림자는 존재의 의미를 상징하는 대표적 장치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 그림자는 어둠의 심연으로 자아를 인도하는 “태양을 구걸하는 모자”를 상징한다. 모자 자체라기보다 그로 인한 인식적 전환의 무게를 상징하는 공감각일 것이다.
제목 밑에는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깊은 물을 건널 때 어깨에 무거운 돌을 걸머지고 건넌다. 거센 물살 아래서 허방다리를 놓지 않도록 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라는 제사가 붙는다. 결국 슬픈 모자의 이미지는 시적 자아의 부유하는 일상에 불현듯 찾아들어 그 중심을 잡아주는 ‘무거운 돌’로 각인된다. 자연의 소재로부터 벗어나지만 항용 자연의 원리로 생의 의미를 체현하는 이태관 시의 방식이 이런 식으로도 확인된다. 이 슬픈 모자의 이야기는 「모녀」에서 단란한 모녀의 산행으로 윤색되는데, 돌의 무게중심이 오히려 텅 빈 가벼움으로 치환(“속을 비운 것들이 홀씨를 만든다// 숲이 헐거워져 가고 있다”)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게의 구심이 공광(空曠)의 원심으로 통하는 형국이다.
바로 그때, 나는 보았네 살아있는 나무라야 바람에 허리 굽힌다는 것을 바람이 세차도 죽은 나뭇가지는 결코 제 몸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을 영혼이 빠져나간 나무는 다만 온몸이 소리통 되어 울 뿐,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씩 허리 굽혀가며 사는 것임을 알았네 지나온 길 잊지 않기 위해 얼굴에 주름살 하나 새기며
―「바람 속을 거닐다」 부분
이제 알겠다
수많은 빗살 몸에 새기고 나서야
바다에 가까워졌음을
바람의 뼈도
조금씩 낡아가도 있다
―「생」 부분
양보를 미덕으로 살았지
햇살을 가까이 하기엔 산의 그늘이 너무 커
움치고 뛰기엔 힘에 겨웠다
중용이란 흑도 백도 될 수 없다는 것
가을 깊어지면
한방에서 나앉았던 식구들
한때를 추억하며 한 몸을 이룰 것이다
붉은 무덤 하나 이룰 것이다
서리 내린 아침,
까맣게 타는 엄니의 젖가슴 사이
저 푸른 핏덩이는 어쩌나
―「삶」 부분
환원될 수 없는 다양성 자체가 자연의 품속에 존재한다. 이태관 시의 철학으로 볼 때 과학의 원리는 지극히 일면적인 것이다. 광대무변한 존재의 순간을 체현하고자 하는 이태관 시는 그 깊은 추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낮은 시어의 자세를 취한다. 정직한 시편들이 대개 그러할 터인데, 「바람 속을 거닐다」는 이태관 시의 낮은 삶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씩 허리를 굽혀가며 사는 것”이라는 경구가 자연이 남긴 명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밖에 「생」이나 「삶」 등은 표제 자체가 이태관 시의 메인 모티프를 전조한다. 기타 생활의 시편들에는 반복적으로 부모, 아내, 자식 등 가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장 솔직한 생 혹은 삶의 범주일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는 이에 관한 연대기를 기획하려는 본격적 시도이기도 하다. 제각각 그 나름대로의 지극한 상처를, 아련한 추억을, 종요로운 가치를, 필연적인 수사를 지닌 이태관 시의 편린들이다.
나무는 제 덩치만큼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람이 나무의 촉수를 흔들면
뿌리 또한 땅의 맨살을 간질이고 있는 것이다
그 웃음소리 바람 되는
나무 밑에 들었을 때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어둠의 그림자만이 어른거렸다
말들이 잘려 나가고
나뭇잎의 크기만큼
내 몸이 재단되었다
사라지고 없었다
오래전 그 길을 갔던 이들처럼
나는 두려움에
나무의 그림자를 버렸다
나무 밑을 나서자
한 무더기 추억이 따라 나섰다
머리에 흰 빛이 돌았다
죽음은
그림자를 거두는 일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자
모든 그림자는 하늘로 가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 전문
장마라는 자연현상을 이토록 철학적으로 시화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장마」만을 두고 보자면 지극히 사변적인 작품이지만, 이태관 시의 주조를 전제한다면 이만한 개연과 구조적 성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라는 소재가 자연의 대표적 기제라는 점은 하나의 원형에 가깝다(1연). 예의 그림자의 장치가 작동하고,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화자는 형해를 잃는다(2연). 나무를 벗어남은 추억만을 남기는 현실이요(3연), 모든 그림자를 지우는 장마 앞에서 죽음을 사유한다(4연). 죽음에 관한 사유가 장마의 도래를 연상하는 요인은 그림자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나무 아래 어둠의 그림자를 통해 언어와 신체의 소멸을 감각한 후이기에 종연의 죽음은 단지 적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곧 나무와의 삶을 전제하는 일련의 의미망 속에 든다. 여기서 장마는 나무와 바람과 ‘나’ 사이에 연결된 관계의 선을 체현하는 기제가 된다. 생사에 관한 지극한 체험과 사유를 장마로 표상하는 과정의 미적 거리는 남다른 감상의 수준을 제공하고 있다.
3.
이제, 모두에서 전제한 이태관의 ‘착한 시’로서의 수월성을 생각해 본다. 미적 자율성이라는 장르적 운명을 지니고 태동한 현대시는 다양한 형식으로 예술적 지평을 확대해 왔다. 다양성이라는 것이 범주적 의미로 내재되어 있기에 어떤 형식이든지 그것은 고유한 우주적 질서를 형성한다. 하나의 점일지라도 삼라만상이 운집한 좌표이다. 시라는 단형 서정의 언어구성물이 지니는 장르적 특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태관 시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시작의 지평이 그릴 좌표는 어떤 형상인가. 이에 대한 사유는 개별 텍스트를 넘어 이태관 시세계를 판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이 정직하고 종요로운 서정으로 남다른 시적 지평을 형성하고 있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특히 그 시세계는 ‘동일성의 시학’으로 읽힐 전형적인 양상을 지닌다. 한편 시작의 성패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다양하다. 이태관 시로부터 미적 모더니티의 풍요로운 외장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독자로서 아쉬운 일이다. 이는 형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용의 문제에 가깝다.
쥐불 피어오르는 논둑
곁불 쬐는 사내들을 배경으로
어둠은 언 발에 오줌 스미듯
그렇게 다가온다
휘어진 길들이
온전한 제 모습 드러내는 겨울은
잘 다려진 와이셔츠 깃처럼 날렵하다
언 땅에 코 처박고 우두커니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포클레인
향교의 문은 열리지 않고, 간혹
등산객만이 흙먼지 일며 지난다
살아 있기는 한 겐가
봄 오면 여린 싹 솟을까
추녀 끝 고드름이
잠시 차의 불빛에 반짝 두 눈 치켜뜨는
앓아누운 노인의 기침소리도 반가운
교촌리의 밤
―「겨울, 교촌리」 전문
이 작품은 이태관 시가 처한 현실과 발생론적 구조를 드러내는 대표적 작품일 것이다. 그의 삶 자체가 충남 논산의 호젓한 마을로 규정됨을 분명한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다. 문득 도시의 일상적 소재가 점묘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생은 “교촌리의 밤”으로 귀속된다. 이처럼 이태관 시에는 생의 운신을 좌우하며 절대선으로 존재하는 ‘교촌리’가 있다.
푸코 식으로 보면 담론의 물적 기반은 그로부터 생산된 텍스트를 결정짓는다. 이태관 시의 장소성은 매우 구체적이고 진솔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극단적일 만큼 일방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태관의 시적 궤적은 천성을 따라 지속되리라 본다. 이태관 시의 경험 지평이 보다 넓은 ‘사이’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록 탁상머리의 공론일 수 있겠으나, 독자로서의 진정성 어린 바람이기도 하다. 무릇 시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문학마당』 2010년 가을호)
약력)
남기택
1970년 대전출생.
2007년 『현대시』 등단(평론).
저서 『근대의 두 얼굴, 김수영과 신동엽』 등. 현재 『문학마당』, 『시인광장』 편집위원.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