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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재 목사
1951년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뿌리 깊은 유교 집안에 시집와 남편 구원을 위해 교회 화장실 청소를 마다하지 않으시던 어머니에게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서울 예고와 총신대 강사를 지냈다. 결혼하기 전까지 교회 반주자로 10여 년 동안 봉사했다.
여러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믿는 집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으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마음의 병뿐 아니라 육신의 병도 앓게 되었다. 결혼 생활 5년 만에 이혼을 각오하고 가출했으나, 가출한 기도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삶이 변화되었다. 교양과 엘리트 의식으로 꽁꽁 얽매여 있던 삶을 벗어던지고 영혼 구원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평신도 큐티 사역자의 길로 들어섰다. 삶의 저 수치스러운 밑바닥까지 함께 나누고 고백하는 독특한 큐티 나눔으로 김양재식 말씀 마니아를 많이 만들어 냈다. 말씀대로 절절히 들어맞는 에스겔 선지자의 삶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들교회’를 섬기고 있다. 우리들교회는 개척한 지 6년도 안되어 출석성도가 4,000명이 넘었는데, 이는 한 사람, 한 가정을 살리려고 할 때 많은 사람을 살리는 부흥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서로는 《복 있는 사람은》,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큐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절대 순종》, 《절대 복음》, 《새 말씀, 새 부대, 새 노래》가 있다.
김양재 목사는 한국 교회에 큐티 사역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 목사는 큐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오랫동안 평신도 사역자로서 국내외에서 큐티를 안내하고, 큐티 모임을 인도해 왔다. 한 두 사람으로 시작한 큐티 모임은 1,000명 이상 모이는 큰 모임으로 성장했다. 큐티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말씀 묵상 운동이 한국 교회 안에서 체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2000년 7월 17일에 큐티선교회(QTM)를 창설했다. 김 목사는 큐티 사역을 하면서 신학의 필요성을 느껴 신학 수업을 받았고, 2002년 10월에 우리들교회를 개척해 김 목사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2003년 6월 15일에 휘문고등학교에서 창립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적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에게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 목사의 영향력은 큐티 모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으로 권위가 부여된 리더십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목사라는 직분이나 어떤 직책 때문에 권위가 주어진 게 아니라, 큐티 안내자로서 목마른 영혼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중에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을 신앙 공동체가 경험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부여하는 권위가 김 목사 사역의 현장에서 나타난 것이다.
* 말씀의 세계와 자신의 현실이 만나는 큐티
20세기 대표적인 영성가 토머스 머턴은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라는 책에서 시편으로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선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미 시편의 어느 부분의 의미를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편의 의미를 살고 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시편만큼 인간의 희망과 갈망, 슬픔과 기쁨을 진실하게 표현한 노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의미를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자신에게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깊고 완전한 말씀 묵상은 바로 말씀의 세계와 자신의 현실이 만나는 데 있다.
김양재 목사의 큐티에 대한 안내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유만 언급한다면, 그것은 바로 큐티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체적으로 말씀의 세계와 자신의 현실이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말씀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 만나는 깊은 영적 체험을 실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가? 김 목사가 어떻게 큐티를 안내하는가, 어떤 목적과 원리로 큐티를 가르치고 큐티에서 무엇을 강조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다.
김양재 목사가 말씀 묵상을 실천하고 가르침에 있어서 강조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100%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세리처럼 항상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겸비하게 말씀 묵상에 임하는 자세다. 둘째는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것이다. 김 목사가 강조하는 신앙적 고백은 택한 자에게 있어서 고난이 자신의 죄를 보게 하고 하나님을 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셋째,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라는 것이다. 큐티를 통해 행복이 아닌 참된 경건을 회복하라고 도전한다. 이것은 외적 경건이나 종교적 열심을 넘어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기 발견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넷째, “하나님은 무조건 옳으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곳에 임재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는 자세와 마음으로 큐티에 임함을 말한다. 이것은 김 목사가 내린 큐티의 정의를 통해 명백해 드러난다. 김 목사는 큐티에 대해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차례대로 읽어가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자신의 역사가 되고 자신의 삶에 적용되는가”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다. 김양재 목사가 큐티를 가르치면서도 다른 큐티 안내자들처럼 큐티의 방법이나 기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김 목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어떤 자세로 설 것인지에 대해 많은 기술을 말하고 있다
* 상처받은 사람들 중에 일어나 외치는 설교자
김 목사의 설교는 기존의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설교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신학적이고 조직적인 설교들보다 훨씬 쉽고 듣기가 편하다는 특징이 있다. 김 목사의 설교에는 여성 목회자로서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배어 있다. 또 일반적인 전달식 성경 공부나 설교는 주로 정보나 통찰을 주는 데 반해, 큐티식 설교는 자신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말씀에 부딪힌 반향을 청중들과 함께 나눈다. 김 목사의 설교는 개인의 살아 있는 하나님 체험을 청중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여성 목회자인 김 목사가 여성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 면에서 탁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성 설교자들이 한국 교회 강단에서 보여준 설교나 설교에 대한 접근과 매우 다른 점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또한 김 목사는 철저히 청중들의 입장에서 설교를 한다. 청중들이 갖고 있는 고난과 아픔, 혼란, 다양한 문제, 질문 등을 설교자인 김 목사 자신도 똑같이 갖고 있다. 어떤 면에선 청중들의 상황보다 더욱 아래로 내려갔던 자의 자리에서 설교를 한다. 따라서 청중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문제와 어려운 현실을 대면하고, 그 난제를 풀어 가는 데 필요한 영적 도움을 말씀을 통해 어렵지 않게 체험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 목회자인 김양재 목사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여성들의 아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예전에도 여성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여성의 문제에 대해 깨우치는 강의나 설교를 했지만, 그것이 한국 여성 기독교인들에게 충분히 이해되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큐티(큐티식 설교)
김 목사는 매일 실천하는 말씀 묵상을 통해 변화해 가는 삶을 강조한다. “날마다 말씀을 조금씩 씹어 먹어서”(겔 3:3) 소화시켜 새로운 조직으로 변해 가듯이, 새로운 존재로 자라고자 하는 것이 큐티의 목적이다. 어거스틴이 강조한 것처럼, 사소한 말씀일지라도 행동으로 옮길 때 그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는다는 깊은 이해의 수준을 김양재 목사도 강조한다.
김 목사의 큐티식 설교는 성경 본문을 한 절씩 풀어주고 그 깨달음을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구성한다. 주 중에 묵상했던 말씀 중에 하나를 집어내 그것을 공동체와 나누는 형식으로 전한다. 이렇게 한 절씩 읽고 풀이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연구한 후 적용함을 뜻한다. 김 목사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 말씀에 대해 문자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을 강조하면서 말씀 묵상과 통독을 병행할 것과 성경 전체의 틀 안에서 본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김 목사의 설교나 큐티의 적용에선 문자주의적 적용은 부정적인 문자주의에서 보이는 어떤 왜곡된 가르침에 얽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가 많음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하나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헌신하려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비춰 자신의 삶과 모든 인간 관계를 해석해 건강한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 성장을 위한 제언
첫째, 본문 해석과 적용의 상관 관계에 대한 문제다. 김양재 목사의 큐티식 설교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적용을 다루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큐티에서 적용은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고, 논리를 넘어서는 적용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듣고 청중들이 그 말씀에 대해 다양하게 적용하는 설교인 경우에 보다 철저하게 본문의 전체 흐름과 본질적 의미 및 숨겨진 뜻을 찾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의 흐름 안에서 그 본문의 위치와 삶의 자리를 분명히 하면서 적용하고 체험한 경험이나 체득한 깨달음을 조심스럽게 설교를 통해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지적에는 세상의 어떤 설교자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큐티 자체의 성격이 개인적인 적용이 매우 강조되는 훈련이고 김 목사의 큐티식 설교도 개인적 체험과 적용을 많이 사용해 설교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설교가 더욱 건강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도전을 주기 위해 이 부분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김양재 목사의 핵심적 가르침 중에 하나인 “하나님은 무조건 옳으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성도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이다. 이 고백은 신앙인들이 궁극적으로 붙들고 살아야 하는 진리이지만, 이런 고백을 붙들기 위해 우리의 무의식과 내면의 어둠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표현하는 자비의 공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무조건 옳으십니다”라는 진리가 우리의 진정한 신앙 고백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때로 규범의 날개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 묵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따라서 그 문제로 씨름하며 투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앞으로 전진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 멈추기도 하고 ‘못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큐티를 나누는 가운데 부차적으로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적 자유가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런 연약한 우리의 모습까지 모두 포용하시는 절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은 옳습니다”라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는 규범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통해 “과연 하나님은 옳으십니다”라는 고백이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터져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김 목사의 사역 차원에서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해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를 알아차리고 인격 대 인격으로서 씨름하도록 초대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그럴 경우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씀을 규범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전통적 말씀 묵상인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에선 실천에 앞서 ‘관상’(contemplation)의 경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녹아져 그 말씀에 잠기고 말씀과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영적 경험을 말한다. 이것은 말씀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충분히 쉼을 얻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충분히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김양재 목사의 설교에서 적용에 대한 강조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전과 힘을 준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 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성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소외시킬 위험성이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셋째, 김양재 목사가 언급하는 ‘무서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어떻게 ‘정화’(refine)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김 목사는 ‘무서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하고 깨달은 신앙 고백이고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김 목사가 말하는 ‘무서운 하나님’의 존재는 결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억압하거나 어떤 힘 및 횡포를 인간에게 행사하려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인정함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비천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고, 어떤 죄악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개입하시는 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세상에서 깨어지고 실패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끄실 수도 있다. 주님의 인자가 하나님 속에, 두려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에 대한 가장 온전한 표현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이미지는 유교 문화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통 속에서 형성된 엄한 아버지 상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영적 현실을 고려할 때, 김 목사가 우리를 보호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이미지뿐 아니라 보다 여성적이고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도 표현될 수 있다면,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훨씬 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고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가면서
김양재 목사는 설교자로서 참으로 귀한 영적 경험을 통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이 귀한 체험들을 바탕으로 목회자요, 설교자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김 목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의 삶이 만나도록 도전한다. 또한 설교자이기에 앞서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나가는 사역자이다. 무엇보다 큐티와 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지금 김양재 목사는 우리들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 주목받는 영적 안내자로 부름을 받고 있다. 이 부름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선 평신도 사역자로서 영향력을 미쳤던 김 목사가 목회자로서, 나아가 설교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요소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김양재 목사의 큐티 사역과 우리들교회의 사역이 계속 건강하게 성장하여 한국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변화가 이뤄지는 놀라운 역사가 더욱 많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 장신대 실천신학교수 오방식 -
오묘한 사건을 해석하는 지혜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지내다 결혼한 자매가 있다. 결혼으로 독립을 해서 자신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 친정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어머니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울며불며 전화를 걸어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이사까지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행려병자로 병원에 실려 가는 바람에 경찰에서 보호자를 추적하게 되고,결국 자매에게 아버지를 모셔가라는 연락이 왔다. 더 이상 도울 마음도 여유도 없어진 자매는 그런 아버지를 찾아가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남동생도 있는데 출가한 딸인 자신이 왜 친정의 어려움을 책임져야 하는지, 그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아무리 기도를 해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6~7).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그 뜻을 깨닫기 힘든 오묘한 사건이 찾아온다. ‘내가 선택해서 그런 부모를 만난 것도 아닌데’ ‘나는 아들도 아닌데’ ‘나 살기도 힘이 드는데…’ ‘왜?’ 내가 희생하고 섬겨야하는지 알 수 없는 힘든 환경이 계속 된다. 그럴 때 세상 지식과 처세술은 이렇게 처방을 내릴 것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인연을 끊어야지. 그 아버지 때문에 시댁 식구들한테도 창피하고 무슨 망신이람. 휴대폰 번호를 다시 바꾸고 아예 다른 사람 명의로 해버려.” 마찬가지로 결혼생활이 힘들면 “참지 말고 이혼해.”, 직장생활이 힘들면 “당장 그만둬.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고생을 해.”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해석이고 처방이다.
하지만 나는 행려병자 아버지를 찾아가야 하는지 묻는 자매에게 “당장 가서 모셔오라.”고 권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헌신에 하나님께서 자매를 특별히 뽑아주셨다고, 그래서 자매야 말로 온 집안의 축복의 통로라고 말해주었다. 힘든 환경과 싫은 사람을 버리고, 떠나고, 외면하는 것이 살 길이 아니라 그들을 품고 가는 것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구원의 길이라고 거듭 권면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라
그 길이 힘든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자매와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딸 넷 중에 막내로 태어났는데 고등학교 때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대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친정 일을 내 일로 여기며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성경을 보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누구도 섬기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묘한 일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학식과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에게 전문적인 학식이 있어서 누군가를 상담하고 권하는 자가 된 것이 아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성경을 보고 성경 한 절이라도 삶에 적용하라고 권했을 때, 이혼하려던 부부가 합쳐지고 상처로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고 살아난 간증이 있으면 어떤 오묘한 것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된다.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훈계를 멸시치 않고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나와 가정을 살리는 생명의 지혜를 부어주신다.
내 인생의 복구전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로 봉사를 하던 분이 휴가 때 한 차례의 실수로 불륜을 저질렀다. 한 번의 실수였지만 부부간에 신뢰가 깨어지고,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힘든 복구전(復舊戰)을 치르게 됐다. 애초에 잘 깨어서 유혹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면 좋았겠지만 장담할 인생이 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그 실패로 인해 깨어진 상태에서 회복되기 위한 복구전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복구전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수 8:18~19)
출애굽이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믿음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이 그 다음 아이와의 전투에서는 패배를 경험한다. 전리품에 손을 댄 아간의 탐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신 것이다. 전쟁의 실패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는데(수7:5) 하나님은 아이와의 두 번째 전투, 복구전을 명하신다. 그리고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단창을 들고 군사들을 지휘하라고 하신다.
여호수아가 긴 창도 아닌 단창을 들고 지휘하는데,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요만한 단창 하나가 잘 보였을까?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열망으로 긴장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창이 보일 것이다. 복구전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잘 깨어있어야 한다. 유혹과의 싸움, 내 욕심과의 싸움에서 가정이 깨어지고 신뢰가 깨어졌다면 이제는 더 바짝 깨어서 지도자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우리는 다 복구가 필요한 인생들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도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겪는 성공과 승리와 패배와 징계와 배반, 모든 것은 인생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우리의 삶의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통해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걸 알 게 되는 것이 회복의 지름길이다.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실패를 했더라도 그 때마다 하나님께 자백하고 깨어있으면 힘든 복구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더디 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반드시 회복시키신다. 힘든 싸움에서도 언제나 내 죄를 회개하며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하던 자들까지도 성문을 열고 따라오는 은혜를 주신다.(8:17) 나의 승리와 회복으로 가정과 직장, 공동체를 살리며 모두가 구원의 반열에 오르게 하신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동창회에 다녀와서는 마음이 우울해졌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자신보다 공부도 못 했고, 인물도 못했던 친구가 있는데 오랜만에 동창 모임에 나타나서는 좋은 집과 좋은 차와 좋은 옷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부간의 금실도 좋은 것 같고, 아이들도 공부를 잘해서 명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인으로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너나 잘 믿어라' 할 것 같아서 입을 떼지 못했다. ‘저렇게 아쉬운 것 없고 모든 것을 가진 친구에게 복음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씁쓸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1:7)
인류가 세운 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평가되는 나라가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였다. 강한 군사력과 정비된 도로, 발전된 법률을 갖추고, 식민지 출신을 그 지역의 왕으로 세우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히브리 민족보다 여성 차별이 없는 민주화된 나라였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이 미국 시민권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그 시대에는 모두가 로마의 시민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로마에 무슨 복음이, 더 이상의 무슨 기쁜 소식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로마에도 복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죽음을 각오한 사도로 스스로 자처한 이유는 강대국 로마에도 절실하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다지도 자랑하던 로마 시민권과 자랑하던 학식으로 예수님 잘 믿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권세와 학벌과 능력으로 나도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라도 진정 필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많이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죄로 인한 고통이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한다. 내 죄를 깨닫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를 체험하면 무엇을 하든 구원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을 누릴 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던 내 지식과 능력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임 받게 된다.
로마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신다. 우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로마인에게도, 지식인에게도, 재벌에게도, 박사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만이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며, 복음만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가 나서라도 돌아오라고
지방의 어느 자매에게서 메일이 왔다. 안 믿는 남편과 결혼한 자매는 남편 한 사람 전도하려고 오랜 수고를 했다고 한다. 신앙생활을 같이 못하는 것도 힘이 든데, 남편이 살갑게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형편도 어려워서 마음이 지쳐있었다. 게다가 가족모임에 가서 동서를 보고 오는 날은 더 속이 상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신은 매사가 어려운데 안 믿는 동서는 남편에게도 사랑을 받고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속으로 ‘동서는 하나님을 모르잖아. 하나님과 상관없이 잘 사는 걸 부러워하면 안 되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얼마 전 깜짝 놀랄 소식이 들렸다. 동서가 드디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 기쁘다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자매의 마음이 어땠을까? ‘할렐루야!’하면서 마냥 기쁘고 감사했을까? 가족 중에 동서 한 사람이라도 믿게 된 것이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자매의 마음이 슬펐다고 한다. 특별한 고난도 없이 믿음까지 가진 동서를 보며 시기도 나고 낙심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 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10:19)
자매의 솔직한 고백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기 나게 하시고 노엽게 하신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 오래 수고했다고 하지만 자매의 마음에는 ‘남편이 교회에 나가면 나한테 더 잘해주겠지.’하는 인간적인 기대가 있었다. 구원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남편의 구원이 더뎌지더라도 다른 시댁 식구들을 열심히 전도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그저 남편이 예수 믿어서 하는 일도 잘 되고, 동서처럼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자리 잡았다.
그 마음을 어서 돌이키라고,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고 오직 구원만을 원하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동서를 통해 시기가 나게 하시고 노엽게 하셨다.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닌 애정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롬10:21)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이스라엘을 향해 있다. 때로 내 욕심 때문에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고 기다리신다. 내 모든 것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의 연약한 점을 이용해 때로는 달래시고, 시기 나게 하시고, 노엽게도 하시는 것이다. 더디 이루어지는 남편의 구원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동서도 모두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남편에게만 향해 있던 관심을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보라고, 동서와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시댁의 구원을 위해 쓰임 받으라고 허락하신 일이다.
두 자매의 헌신을 통해 다른 식구들에게도 종일 손을 벌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기도드린다. 온 식구가 믿음으로 하나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곧 들려오기를 기대하며 기도드린다.
말이 통하는 부부
몇 년 전 외국에서 <남녀의 차이>라는 책이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책을 받아본 사람들은 금세 어리둥절해졌다.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글씨가 인쇄되지 않은 백지만 계속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파본인줄 알고 교환을 요청했는데 거기에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남자는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도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남녀가 그토록 서로를 모르는데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일까? 서로를 모른 채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데,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이겠는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주신 언어는 ‘복종의 언어’다. 남자가 우월하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남편에게 약점이 있고 아쉬운 면이 있을지라도 남편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아내로서 마땅한 일이다. 가정에서 왕처럼 대접받을 때 남편들은 비로소 아내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처럼, 아내의 복종의 언어는 남편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남편과 중매로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처음 선을 보고 나서 남편은 내가 착하고 명랑해 보여서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남편이 자신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그 성격을 잘 받아줄 것 같은 나를 택했다는 걸 알게 됐다. 본인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으로 나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 그 약점이 아니었으면 나는 결혼도 못했을 것이고(?) 시집살이 고난 끝에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도 놓칠 뻔했다. 거듭나기 전에는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분이 풀리지 않는 남편의 약점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남편의 약점이야말로 나를 구원으로 인도한 축복의 통로였다.
복종과 사랑의 언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남편 친구의 재혼 소식을 들은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그 친구는 6년이 걸렸지만 당신은 1년도 못 채우고 재혼하겠지?” 그럴 때 남편이 “무슨 소리, 당신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건강하게 오래 살아줘.”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1년씩이나 갈게 뭐 있냐. 난 6개월 안에 새장가 간다!”
아내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잠을 못자고 슬퍼하지만 남자들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무심한 말로 아내를 괴롭게 하고 상처를 주기 십상이다. 남자들이 여자의 언어 체계를 이해하고 ‘사랑의 언어’를 쓰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에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교된다(엡 5:25). 최선을 다해 상대방의 입장이 돼주는 성육신의 사랑, 아내를 위해 죽어지는 십자가 사랑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복종의 언어도, 사랑의 언어도 표현할 수 없다. 부부가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언어를 사용할 때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복종과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다. 달콤한 표현이나 미사여구가 없어도 아내는 남편을 인정하고, 남편은 아내를 용납하는 태도를 보일 때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내게 파송된 가족
우리들교회 청년예배에는 ‘적용’ 시간이 있다. 설교가 끝난 후 몇 사람이 올라와서 그날 들은 말씀으로 나눔을 하는 시간이다. 어떤 친구는 은혜를 받아서 눈물로 죄를 고백하고, 또 어떤 친구는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기도 한다. 가끔 내내 조느라고 한 마디도 못 들었다는 친구도 있다. 내용이야 어떻든 젊은 청년들의 솔직한 나눔이 예배를 살아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몇 주 전에는 앳된 얼굴의 자매가 적용을 하면서 술 마시고 난폭한 행동을 하는 오빠 때문에 힘든 이야기를 했다. 오빠가 뒤집어엎은 상을 묵묵히 치우는 엄마를 보며 엄마도 밉고 싫었다고 한다. 그동안 오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는데, 인내하기도 사랑하기도 어렵다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4:37)
예수님께서는 믿는 예루살렘을 향해 안타깝게 말씀하신다. 안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믿는 우리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라고 하신다.
가족은 구원을 위해 묶어주신 하나님의 공동체다. 영혼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남편과 아내로, 부모자식으로, 형제로 파송해주셨다.
자매는 동네에서 유명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동네에서 유명한 사고뭉치 오빠와 사는 것이 저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말씀을 들으면서 오빠도 피해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힘들게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폭력과 가난으로 인해 몇 년 동안 자매를 데리고 가출했던 어머니, 그 힘든 동안을 아버지의 폭력을 받아내며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오빠, 어머니와 다시 합친 후에도 늘 무시하고 대드는 여동생으로 인해 오빠가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아직은 연약하지만 자매의 눈물과 기도가 있어 그 가정이 회복될 것을 믿는다. 주님의 날개 아래, 자매와 온 식구들이 하나로 모이는 날이 곧 올 것을 믿는다.
온 식구를 괴롭히고 문제만 일으키는 가족이라도 주님은 그들을 주님의 날개 아래 모으기 원하신다. 주님이 모으시는 가족을 내가 돌로 치고 내어 쫓아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모으시는 가족을 이혼으로, 원망과 따돌림으로 흩어서는 안 된다. 구원을 위해 나를 그 집안에 파송하셨다. 구원을 위해 술 마시고, 때리고, 망하고, 병든 식구를 나에게 파송해주셨다. 나와 내 가족의 구원을 위해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우리를 묶어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부르시며 주님의 자녀를 모으시려는 안타까움이 먼저 내 식구들에게 공감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힘든 한 사람을 섬기며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이웃과 민족과 세계를 향한 사명으로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실 것이다.
주님을 찾는 한 사람
아버지가 엄마의 몸에 칼을 긋고 눈에 소금물을 뿌리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자매가 있다. 아버지의 잔인한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엄마는 자매가 열 살 때 집을 나가버렸고, 엄마의 가출 후 혼자 폭력과 생활고를 겪어내야 했다. 자라면서 얻은 상처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는데 스물아홉 살에 착해 보이는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남편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던 자매는 더 이상 불행한 삶을 견딜 수 없어 이혼을 선택했다. 자매에게 가정은 고통과 불행의 장소일 뿐이다. 기억 어디에서도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 8:1~2).
기독교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은퇴하고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말도 못하고, 걸음도 못 걷고, 밥도 혼자 못 먹는 장애우를 돌보면서 나우웬은 평안을 맛보았다고 한다. 지체 장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들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연인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기막힌 가르침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을 것 같은 그 사람, 늘 도와주고 받아줘야 하는 그 사람을 섬기며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 설교를 듣고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열광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한 문둥병자를 보신다. 허다한 무리 중에 힘든 한 사람의 원함을 듣는 것이 예수님의 자리다.?
낮은 자리로
아버지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한 자매는 생활을 위해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집사님 가정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난생 처음 따뜻한 가정을 맛보며 집사님을 따라 교회에 왔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듣는 성경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들으면서 자매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던 엄마와 자신을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겪은 고난으로 십자가가 저절로 이해되고 그 엄청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새가족 모임에서 만난 자매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평생 불행하게 산 줄 알았는데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알고 나니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고난의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당한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야 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자매의 고백으로 각자 힘든 사정과 갈등을 안고 왔던 사람들도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허다한 무리가 있어도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처럼 힘든 한 사람의 애통과 눈물과 간절함이 우리를 살아나게 한다. 많이 배우고 교양 있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진 허다한 무리보다 환난 당한 자 한 사람이 우리에게 기쁨과 안식을 준다. 고난 있는 한 사람이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적용하면서 갈 때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새 봄에 입는 새 사람
기독교 방송에 설교 영상이 나가면서 ‘주일마다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전에는 깨끗하고 단정하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방송에 나가는 것을 보니 어떤 옷은 색깔이 부담스럽고, 어떤 옷은 움직임이 불편해 보이고, 괜찮은 옷이 있어도 매주 똑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고… 여러 모로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예배에 합당한 옷차림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무슨 옷을 입는가에 따라서 몸가짐이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에 올 때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옷으로 단정하게 차려 입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이나 앞이 훤히 파인 옷차림으로 예배를 드리러 온다면 다른 사람들의 예배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으라고 하시는 옷은 ‘새 사람’의 옷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 옷,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생명의 옷이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먼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나의 옛사람은 인정받는 것과 칭찬의 노예였다. 모태신앙으로 주일예배에 빠지는 법이 없고, 10년 넘게 교회 반주자로 섬기고, 시집을 가서도 착한 며느리, 착한 아내 소리가 듣고 싶어서 속병이 생길 정도로 애를 썼었다.
그런데 시집살이 5년 만에 주님을 만나고 무겁던 옛 사람을 벗게 되었다. 인정받기 위한 맹종의 행위를 버리고 구원을 위한 순종으로 새 사람을 입은 것이다.?
‘처럼’과 ‘같이’의 인생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구원의 새 사람을 입은 우리는 ‘처럼’과 ‘같이’의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살아야 하는 신분이다. 상처와 열등감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왕자, 공주로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자존감을 회복한 사람은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를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새 사람을 입은 자의 삶이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되 잊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용서는 하되 잊지 말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되 사랑까지 하라고 하신다. 내 힘으로는 아무도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 용서와 사랑의 모델이 되어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자‘처럼’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 날마다 사랑의 띠로 마음과 생각을 여미며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진정한 새 봄이 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