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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을 꿈꾸는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통권 67호)
예 수 사 랑 • 가 족 사 랑
11권 3호 2010. 3. 1.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35년만의 기도응답
이번 설날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아버님이 교회를 출석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로 80이 되신 아버님, 여전히 교회를 다니는 것은 멀리 있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목사인데도 아들 집을 방문할 때에만 마지못해 교회를 나갈 뿐 교회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님이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두 번을 출석하셨습니다. 두 번째 출석할 때는 고향교회를 방문한 제가 모시고 나갔습니다. 교회를 나가기로 결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이것이 사실인가 꿈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교회를 나가셨을 때에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현실로 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75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제가 신학대학원 1학년 때인 1983년에 처음으로 교회를 나갔습니다. 불신의 가정에서 혼자 신학공부를 하는 아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나간 것이 어머님의 예수님께 붙잡힘이었습니다. 늘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어머님을 보면서 감사했지만 그렇지 않은 아버님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속에 안타까움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목회하는 아들을 바라볼 때도 아들이 세상적으로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했다면 아버님의 관심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섬기는 교회를 보더라도 초라하게 보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생활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 번 복음을 권면했지만 아버님은 냉담하셨고 때로 편지글로 복음을 권면하면 죽고 싶다는 극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CCC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 복음화에 힘을 쏟고 있는 둘째 아들 은섭이가 할아버지를 전도하겠다고 고향을 찾아 권면했지만 손자의 권면에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아버지였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이제 가장 귀한 영혼이 나이 80세에 주님께로 돌아왔으니 하늘 아버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제가 지난번에 50일 국토순례여행을 하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했는데 주님께서 응답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는데 10년 만에 아들이 주님께 돌아와서 모니카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님은 35년 만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님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면서 낙심도 많이 했는데 낙심한 저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면서 응답해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희 아버님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왔습니다. 끈질긴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끈질긴 기도가 승리합니다.
저희 고향 마을을 위해서 기도해왔는데 저희 집을 중심으로 10가정이 있는데 이 중에서 7가정이 교회를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출발하지만 때가 되면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할 때도 있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들의 힘입니다. 기도는 우리들의 안식입니다. 기도는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어떤 시인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고 했습니다. 봄부터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땀을 흘렸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국화꽃은 늦봄에도 여름철에도 초가을에도 피지를 않았습니다. 늦가을이 시작될 때에 국화꽃은 비로소 피었습니다.
우리들은 때로는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늦봄에, 여름철에, 이른 가을철에 실망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실망하고 주변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스스로 무너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화꽃의 결실은 늦은 가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때로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기다림이라고 답할 때도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복음에 반응이 없는 아버님을 향해 저는 나름대로 사랑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아버님 앞에 서면 늘 몸이 굳어지지만 딱딱한 아버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떠나는 아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시울이 불거지는 아버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육신의 아버님에게 긍휼을 베푸셨네요!”
김영근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1) ***
2010년 3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3월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아침과 저녁으로 쌀쌀하지만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새 학기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같은 학교에서 한 학년이 올라가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처음으로 유치원에 보내는 엄마들을 아파트 입구에서 볼 때마다 그 아이들의 유치원생활과 성장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와 함께 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포함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됩니다. 사랑을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의 실천자가 됩니다.
1. 기도시간
매일 오전 6시, 낮 12시, 저녁 9시에 개인이나 혹은 그룹별로 1회 10분 이상씩 하면 좋습니다. 시간 여건상 하루 세 번이 불편하면 편리한 시간에 한두 번을 선택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10분 이상씩 하기를 권면합니다.
2. 중보기도참여자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기를 원하는 누구나(개인, 교회, 기관별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기도하기를 원하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3. 기도의 대상
중보기도참여자가 사는 <시, 군, 구>에 있는 가정들을 대상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살고 있어서 저의 기도대상은 <남양주시>의 가정들입니다.
4. 기도의 제목
1)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구성원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거절의 아픔을 겪는 지체들이 나를 수용하시는 주님을 경험케 하소서!
셋째,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넷째,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주변을 보게 하옵소서!
다섯째, 가족들의 생각이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여섯째, 가족들의 언어가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축복의 언어로 바뀌게 하소서!
일곱째, 가정의 신맛(미움, 정죄, 음란)이 단맛(사랑, 격려, 순결)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덟째, 이웃을 향한 적대감이 환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소서!
아홉째, 성도들이 바리새인들의 마음(교만)이 세리의 마음(겸손)으로 변하게 하소서!
열 번째, 가족식구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떠나가고 주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옵소서!
열한 번째, 식구들이 사탄과 과거와 세상과 탐욕의 묶임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열두 번째, 식구들이 예수님을 닮은 상처를 경험한 진정한 치유자로 살게 하소서!
2) 특별기도제목
첫째, 지진과 해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칠레에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주옵소서!
둘째, 북한 땅에서 굶주림과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가족들에게 치유를 허락하소서!
셋째, 새 학기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주님의 용기와 격려를 주소서!
넷째, 기후의 재앙으로부터 이 지구촌을 회복시켜주시고 자연과 친화하게 하소서!
기적을 만들어보세요
김진선(밥상공동체 사무국장)
지난 1월 22일 밥상공동체에서는 조용한 우리만의 행사가 있었다. 2010년 새해를 맞이하는 신년하례식정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우리 밥상을 이용하시는 저소득 어르신, 거리노숙인, 쪽방생활자분들과 밥상공동체의 이사님들, 봉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가 비록 남에게 도움받는 사람들이지만 2010년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는 다짐이었다. 그 첫 단추로 강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아이티를 위해 기도하고 모금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주일 전부터 ‘모금을 할꺼니까 준비하시라’고 여러 차례 공지를 해드렸다.
사실 행사란 것이 항상 어떤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우리는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 밥상가족들이 남을 돕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고 밖에서 우리를 보는 눈들을 향해 생활이 어렵다고 나눌 수 없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행사 당일, 평소보다는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자리를 채웠다. 식순이 진행되고 모금시간이 되었다. 한줄 한줄 경건한 음악에 맞추어 모금에 참여하는 야위고 거친 손들..., 할머니 한 분이 내 귀에 대고 조그마하게 속삭인다. ‘내가 며칠을 열심히 주웠는데 팔아보니 삼천 원 밖에 안되네 민망해서 우짜지?’ 나는 잠시 진행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뜬금없이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역을 맡은 모건 프리먼이 한 대사가 있다.
“스프를 가르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네, 그건 단순한 마술에 불과하지 직장이 두 개인 싱글맘이 아이의 축구연습에까지 시간을 쪼개서 신경쓴다는 것이 기적이지 사람들은 내게(하나님) 뭔가 중요한 걸 해주길 원하지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그들 스스로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라네. 기적이 보고싶나? 그러면 기적이 되게.”
우리가 모금 행사를 하던 그날 나는 영화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가 기적을 바란 적은 없지만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 뭐랄까. ‘아! 이 자리에 이 분들과 함께 있는 나는 행복하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이게 그 영화에서 말한 바로 ‘그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모으는 이 돈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브루스 올마이티의 후속작인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하나님)은 또 이런 질문을 남긴다.
“제가 하나 물어보도록 하죠.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뿅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때론 매일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감사하기도 하고 때론 매번 나오는 잔소리에도 꿋꿋한 그 변함없는 모습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밥상을 이용하는 이 분들이 변화되어 발전되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이 날 받은 것이 이런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닌지 내가 우리 밥상에서 우리 밥상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지 큰 행운이다. 우리 밥상식구들과 함께 할 2010년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날이었다.
이 날 우리 어르신들이 모아주신 돈은 25만 8천원이었다. 이 돈은 함께 했던 자원봉사자와 유관인사들이 모아준 85만원과 함께 대한적십자 강원도지사에 전달됐다.
(기독공보에서 펴옴)
<강화도 동쪽 해변에 설치된 팔랑개비를 국토 순례여행중에 찍었다. 멀리 바다건너 보이는 산은 경기도 김포시 해변가의 산이다.>
하루살이 메뚜기신세
서정오 목사(동숭교회)
어느 날 하루살이가 메뚜기를 만났습니다. 한참을 재미있게 지내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인사했습니다. “하루살이야, 그러면 내일 또 만나자.” 그 때, 하루살이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내일이 뭐니?” 하루살이는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후 하루살이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하늘을 나는 참새를 만나 며칠을 놀았는데 친구 참새가 인사를 했습니다. “메뚜기야, 그러면, 내년에 다시 만나자.” 이번엔 메뚜기가 어리둥절해서 물었습니다. “내년이 뭐니?” 이 메뚜기는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추운 겨울바람에 메뚜기는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인생에 대한 깊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을 아무리 멋지게 살았다 할지라도 더 이상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올해를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다하더라도 한 겨울 지나고 아름다운 새 봄을 맞을 수 없는 메뚜기의 삶은 결국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에 대한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비극입니다.
세상에 영생을 약속받았으면서도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약속받았으면서도 그 약속을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거부하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일도, 내년도, 저 영원한 미래에 대한 꿈도 다 잊어버린 채, 오직 오늘의 현실 속에 자신들의 전부를 묻어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메뚜기보다는 며칠 더 살지는 모릅니다. 참새보다는 몇 년 더 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몇 년 후에는 똑같이 한줌 흙으로 끝나버릴 육의 생명에만 집착해 가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결국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왕은 전도서 3장 1절 이하에서 고백했습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떠나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목을 매고 살지 마십시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더 가치 있는 것들에 시간과 재물과 인생을 지혜롭게 투자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기독공보에서 펴옴)
주민 등록도 없던 노숙아, 사장되다
최종호 사장 이아기
아버지는 막일을 했다. 이삿짐 날라서 번 일당을 들고 서울역 쪽방촌을 터벅터벅 걸어오곤 했다. 아버지가 숨졌을 때 그는 일곱 살이었다.혼자 남은 어머니가 빚쟁이를 피해 달아났다. 또래들이 초등학교에 갈 때 그는 남대문시장 옷공장에서 실밥을 뜯었다. 옷공장의 오락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아홉 살부터 열한 살까지 그는 광양 친척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서울에서 돈 버는 누나에게 드문드문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누나 목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누나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몹시 앓았다.
가출했다. 친척이 하루 몇 백 원씩 주는 용돈을 모아 2만원이 됐을 때 기차표를 샀다. 서울역 쪽방촌에 돌아와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어머니는 외대역 뒤 반지하 방에 시각장애인 의붓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의붓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손톱깎이를 팔았다. 1년 반 뒤 어머니가 또 달아났다.
그는 먹을 것을 훔쳐 경찰서에 불려갔다가 서울시립아동상담치료센터에 인계됐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수녀 9명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형사는 수녀들에게 "얘는 주민등록도 없다"고 했다. 2000년 겨울이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역삼동 성당에서 자활 공동체 기업‘쎈뽈나우리’의 최종호 대표와 김보애 수녀가 동료들과 함께 자체 개발한 황토 소금을 판매하고 있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최종호(23)씨는 심리치료 도구를 판매하는 연 매출 3억 원의 자활 공동체 기업 '쌘뽈나우리'의 사장이 됐다. 작년 말엔 구운 소금 판매로 사업을 확장했다. 최씨는 "전부 엄마(센터장 김보애 수녀) 덕분"이라고 했다.
센터에 오기 전 몇 달 간 최씨는 어린 노숙자였다. 들어와서도 첫 1년은 툭 하면 가출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최씨에게 김 수녀는 꾸준히 '일'을 맡겼다. 꿩 우리 관리, 운동장 청소를 시켰다. 잘하면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는 "칭찬받으면서 조금씩 내가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김 수녀 앞에서 많이 울었다. 마음껏 울 수 있는 사람이 생기자 사는 게 덜 무서웠다. 2006년 최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국제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 김 수녀가 "플래카드 걸자"고 흥분했다.
김 수녀는 그해 쌘뽈나우리를 설립했다. 김 수녀는 "제 몫 하는 성인이 되려면 18~27세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데 나라의 보호는 18세에 끝난다"고 했다. 수녀들이 애써 취직시켜도 아이들은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번번이 그만뒀다. '○○가 노숙하더라' '교도소에 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김 수녀는 "그런 날은 가슴이 아파 밤새 못 잤다"고 했다.
김 수녀는 자립 대책으로 쌘뽈나우리를 세웠다. 최씨가 대표가 됐다. 회사 수익에 수녀회 기금을 보태 1억3500만 원 짜리 전세 아파트(102㎡·31평)를 얻었다. 최씨를 포함해 20~36살 청년 11명이 이 집에 함께 살며 쌘뽈나우리에서 일한다. 회사 수익으로 학비와 공동 생활비를 대고, 월급(110만~350만원)은 김 수녀가 청년들 이름으로 적금 붓는다.
작년 말 경기도 여주의 옹기 장인이 옹기에 소금 굽는 기법을 '재능 기부' 해주었다. 카이스트 분석결과 미네랄이 풍부했다. 대진대 미대 교수가 무료로 판매 용기를 디자인해줬다.
이들은 주말마다 성당을 돌며 소금 좌판을 편다. 김 수녀가 앞장서서 "소금 사세요!"를 외친다. 수익금 일부는 더 불우한 계층에 기부한다. 김 수녀는 "받지만 말고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최씨가 센터에 들어온 뒤, 최씨의 어머니는 간간이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2007년 여름 의정부 골목길에서 쓰러졌다. 암 말기였다. 119 대원들이 최씨에게 연락했다. 서울 성가복지병원으로 옮기는 구급차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울었다.
일주일 뒤 새벽 2시 어머니는 혼자 숨졌다. 김 수녀와 최씨가 갔을 때 그녀는 아직 따뜻했다. 김 수녀가 말했다. "틀림없이 네 말을 들으실 수 있을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꼭 해라." 최씨가 떨리는 입술을 뗐다. "엄마, 다 털어버리고 천국에 가. 누나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해."
지난 일요일(2월 28일) 역삼동성당에서 소금을 팔던 최씨는 "돈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자동차 좋아하는 동생을 정비학원에 보내주고 싶어요. 요리 잘하는 형한테 빵집도 내주고 싶어요. 다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그걸 이루게 도울 거예요." <조선일보 & Chosun.com에서 펴옴>
최일도목사의 행복편지
다 알면서도
아이와 숨바꼭질을 할 때에는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숨은 곳이 뻔히 보여도
단번에 찾으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숨바꼭질의 기본이지요.
보여도 안보이는 척, 알아도 모른 척
주위를 맴돌고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잠시라도 헤매어야
아이는 숨바꼭질의 진수를 맛보며 행복을 노래합니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지요.
천진난만한 아이의 기쁨을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눈높이를 같이하며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서지요.
세월이 갈수록 알아도 모른 척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상대방이 알아차릴 때까지 오랜 세월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인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허물이 보여도 덮어주는 것이 그에게나 모두에게나 유익하며
특히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임이
날이 갈수록 깊이깊이 깨달아집니다.
일백 번 넘어지더라도 반복적인 실수를 거듭할지라도
알면서도 모른 척 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뼈 속까지 전달이 되고 공감이 됩니다.
스스로 깨달아 알 때까지 깨닫고 돌이켜 돌아올 때까지
오래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허물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 꼭 감아주시는 그 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알아도 모른 척 해 주시며
그 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 알면서도...
행복하소서.
김영근의 국토순례여행(15) - 1월 4일2)
군산에서 익산으로
군산의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실 나는 찜질방문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찜질방은 이제 보통사람들의 휴식공간이자 친교공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나도 이곳은 남여가 함께 머무는 공간이 많아서 혼탁하지 않을까도 염려했지만 이곳은 상당히 건전한 모임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종종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들어오지만 어느 곳에서나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장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해장국을 잘 한다는 집에서 맛있는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이 목사님은 나의 손위의 처남인 김건목사(합동측 갈현교회 담임목사)와 총신대 신대원의 기숙사에서 한 룸을 사용했다고 하셨습니다. 참 인연이 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이 좁다는 말이 적당하겠지요. 눈이 제법 많이 와서 익산까지 걸어서 가겠느냐고 염려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선 군산시청에 가서 인터넷을 하면서 그 동안 까페글도 정리했습니다. 군산시청은 새롭게 발전하는 군산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활발하게 움직였습니다. 등산복의 차림의 이방인이 군산시청에서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으니 우리들의 인터넷문화는 세계적인 수준급인 것 같습니다.ㅣ
새만금간척지 개발에 관한 찬반의견은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군산이 목회지인 이 목사님은 새만금사업은 꼭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만금사업은 이곳 주민들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실되는 갯벌은 새만금 방조제의 바다쪽으로 다시 생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서로가 다른 견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익산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이 걷기에는 편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진눈깨비도 내렸고 추웠지만 걷기 시작하면 힘이 납니다. 걷기에 벌써 이력이 생긴 것입니다.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까 걸으면 힘도 생기고 기쁨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보국토순례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기야 예수님도 형제들과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걷는 자는 행복합니다.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걷기가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군산중앙교회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습니다. 기도했습니다, “ 저곳에 드리는 예배를 축복해주세요. 저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주님의 축복의 통로를 열어주십시오.” 요즘에는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종종 비판의 소리를 들을 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건물의 위용이 아니라 섬김으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명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터넷 토론마당에 들어가 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폄하하는 글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증오심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전달된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꾸는 선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하지는 않고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기름유출로 오염된 태안바다를 살리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국교회의 자원봉사자들입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태안바다 살리기에 참석자들의 약 80%정도가 교회계통에서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스컴은 이러한 기독교의 선한 활동의 보도에는 인색하고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을 들어내는데 적극적인 것 같아 매스컴의 보도태도에 대해 아쉬울 때도 많습니다.
도로표지판이 새만금방조제로 가는 이정표를 보여줍니다. 논란이 많았던 새만금간척지공사는 이제 물막이 공사를 모두 마쳤으니까 이 일에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빌었습니다. 전라북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는 공사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연의 원형을 인간의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것은 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야면을 지나면서 찐빵집이 한 곳이 있어서 이곳에서 찐빵을 먹었습니다. 찐빵 맛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만두도 맛이 있지만 찐빵은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만두하고 찐빵이 있을 때에 만두를 먹으면 나는 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게 찐빵보다는 만두는 선택합니다. 음식에 대한 입맛이 다른 것입니다. 찐빵집 주인은 취미가 배낭여행이군요 하면서 추운 겨울에 배낭여행을 하는 길손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순박하게 생긴 시골 찐빵집 주인의 얼굴은 인생의 경륜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여전히 성실하게 만두와 찐빵을 쪄서 팔면서 살아오셨네요.
익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약 8km 정도 남겨둔 곳에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간판이 보이는데 원불교도시답게 원광대학교와 원광대병원의 표시판이 보입니다. 원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기독교에 대한 통일교의 위치라고 합니다. 자생적인 한국판 불교라고 말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원으로 통한다는 정도의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어두워지면 걷기가 불편해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젊은 기사분이 아주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습니다.
익산으로 갑니다. 한 때 익산이라는 지명은 생소했습니다. 지명이 이리에서 익산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전북 남원에서 이리로 가는 열차를 타는데 이리라는 지명이 없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당황했는데 이 때에 이리가 익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바꿔놓고 보니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리하면 늑대를 연상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익산역에서 한국화약의 폭발사고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지요. 익산역근처의 많은 집과 가게들이 파괴되었고 익산역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파졌으니까요. 그 후 익산역은 새로운 역사로 단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익산역전에서 내려서 아침용으로 빵과 두유를 사서 찜질방의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안내받은 찜질방은 그렇게 편리한 곳은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찜질방은 없는지 물었더니 멀리 떨어진 곳을 안내했습니다. 먼 곳에 있다고 하기에 얼마나 먼 곳이냐고 물었더니 걸으면 20분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20분 걷기는 나에는 약소한 걷기가 되어서 걷기로 했습니다. 밤거리를 걸어가니까 익산시의 이곳저곳 골목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걸었던 곳에는 자동차부속품들의 가게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기름때와 자동차부품으로 복잡한 거리여서 깨끗한 곳은 아니었지만 익산시민의 삶의 터전이어서 그런지 지나가는 길손에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귀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했던 바울선생님의 교훈이 생각났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잘못된 재림사상에 빠져서 일하지 않고 재림을 기다리니까 일상적인 일에 충실하라는 바울선생님의 간절한 권면이었습니다. 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이곳 찜질방은 여행객들이 묵기에는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서 누웠는데 그곳은 밝은 불이 비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앉아서 말씀을 읽은 모습이 사람들의 보기에는 조금은 어색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려면 집에서 읽지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성경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나에게는 이곳이 집이랍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성경을 읽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때로는 남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대중들의 흐름에 맡긴 체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은 그런 것 같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나름대로의 뚜렷함이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장에 가면 같이 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장에 가고 필요없는 경우에는 장에 가지를 말아야하지요. 이곳 찜질방에 머무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빌었습니다.
국토순례여행(16) - 1월 5일
봉동에서 만난 신학동기생 목사님
눈이 많이 내려서 걷기가 매우 불편했지만 봉동읍으로 향했습니다. 이곳 익산에서 출발해서 삼례읍을 거쳐서 봉동읍으로 갑니다. 약 6시간 정도 걷는 거리입니다. 출발은 좀 늦었습니다. 눈덮인 길을 걷기는 힘이 들었지만 걸으면 힘이 났습니다. 익산을 벗어나는데 아파트 앞에 세워진 가로수가 인상적이었고 그 나무위에의 높은 위치에 새집이 있었습니다.
눈덮인 걸을 걷기가 미안했습니다. 순백의 대지위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습니다. 멀리 산야가 들어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산야입니다. 황목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까지 왔는가 묻고 차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환영은 감사하지만 그냥 힘이 eke는 대로 걷겠다고 했지요. 항상 걷기를 시작할 때는 유혹이 옵니다. 오늘만 차를 타볼까, 아니면 버스를 타다가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우선 무조건 걷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가 됩니다.
우리들 인생도 종종 이런 생각 저런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면서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돌다리는 건너야 하는 것이지 안전한지 두드려보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돌다리의 안전점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생은 모험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폴 투르니에 라는 스위스출신의 세계적인 상담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가정의학과 내과계통의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의사일 보다는 심리상담가로 큰 영향력을 끼쳤던 분입니다. 이 분이 처음으로 책을 한 권을 썼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출판관계를 상담해보니까 여러 가지 책들이 홍수처럼 나와 있는데 굳이 그런 책을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이 만약 그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책 출판을 그만 두었다면 상담계통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는 출판을 강행했고 그 후에 그는 세계적인 상담학자가 되었어요. 한국에도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 중에 한 분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썼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감명깊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한국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지나갑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은 언제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요. 대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땅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우리 조상들이 땀을 흘리고 가꾸고 자식을 기르고 이웃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그들의 숨소리와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논에 물을 대느라고 서로 싸움질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익산으로 전주로 서울로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자식들 장가도 보내고 시집도 보냈겠지요. 어떤 사람은 지주였고 어떤 사람은 소작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자영농이었습니다. 지나갔던 역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삼례읍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우석대학교가 있었습니다. 우석대학교가 전주에 있는 줄 알았는데 삼례읍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오뎅과 붕어빵을 파는 집이 있어 길손이 들려서 오뎅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천원에 두 개짜리가 있고 네 개짜리가 있는데 네 개짜리를 먹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줌마는 자기 나름대로의 오뎅국물에 들인 정성을 이야기하면서 오뎅국물이 일품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뎅국물이 맛이 있었습니다. 붕어빵도 검은쌀 붕어빵입니다. 암에도 좋고요, 정력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길을 떠난 나그네에게 정력이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붕어빵 아주머니에게 속으로 화이팅을 외쳐드렸습니다. 언제 보아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 일이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보일지 몰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귀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 일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붕어빵을 사려고 왔던 60대 정도에 해당되는 아주머니는 살기가 힘들어 적금도 모두 해약했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사는 것보다는 절약을 할 수는 없지만 여유있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자신의 결론이라고 합니다.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너무 어렵고 찌들려 살면 인간의 품성자체도 많이 왜곡된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습니다. 이 붕어빵 장수도 길손에게 행운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초들의 마음씀씀이가 착하고 좋군요. "아주머니,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멀리 눈덮인 산야가 들어왔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환경입니다. 자연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은 탐욕으로 저것을 마구 개발해서 몸살을 앓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기후재앙이 인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인간들은 좀 더 편리하게 살려고 큰 차, 큰 집, 좀 더 시원하게, 좀 더 따뜻하게 살려고 하다가 석탄, 기름을 함부로 남용하고 지구촌에 있는 거대한 삼림들을 마구 남벌해서 기후재앙이 오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인도양과 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들이 없어지는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으니까 홍수, 냉해, 지진, 가뭄, 사막화, 해일 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탐욕을 채우기 위한 이용물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가장 좋은 인간의 벗인 자연을 학대했으니 그 벗으로부터 인간들이 당해야 하는 대가도 가혹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우리들이 참된 벗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가다가 동학농민길이라는 길이 인상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고부군수 조병학의 학정에 반대한 농민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군을 형성해서 관군과 전쟁을 벌여서 한 때는 승승장구하다가 나중에는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비록 실패한 농민전쟁이었지만 억울한 민초들의 인권을 찾기 위한 매우 가치있는 투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냥 참는 것이 능수는 아닙니다. 불의에 맞서서 항거하는 일이 아름답습니다. 비록 싸우다가 얻어터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악한 세력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향한 횃불을 들어야 합니다.
동학은 원래 최재우의 인내천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이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주권재민사상이고 백성들을 하늘처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2대 강령중의 하나인 이웃사랑과 맥이 통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불의에 대한 투쟁이 이 땅에 민주화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2차 대전 후에 가장 성공적인 역사로 평가를 받는 한국의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러한 모태는 저 들판에서 땀을 흘렸던 민초들의 성실함이었고 불의에 항거했던 동학혁명전사들의 피흘림이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봉동읍을 4km 정도 남겨놓고서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독이 조금은 밀려오는 것같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가게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아들고 길손의 피곤함을 달랬습니다. 삼백 원의 행복이 이런 것이지요. 삼백 원에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삼천 원이 삼만 원이 주지 못하는 행복이 이런 것입니다. 걷다보면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입니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저녁마다 잠자리를 염려해야 하는 길손이다 보니 저녁에 고정된 잠자리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렇기에 노숙자들의 삶이라는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노숙을 하는 분들도 있는 것같습니다. 이들 중에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인생에서 실패해서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스스로 집을 나와서 노숙을 선택한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집보다는 자신들이 불편하지만 부담이 없는 노숙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나그네의 상념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버스를 타고 봉동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봉상교회까지 갔습니다. 읍단위에 있는 교회이지만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회입니다. 필자가 가족치유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사역을 하고 있을 때 황갑순목사님은 광주서석교회에서 시무하실 때에 초청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번 여행에서 꼭 만나고 싶어서 익산에서 전주로 가는 길을 바로 택하지 않고 봉동읍을 통해서 전주로 가기로 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자 마중을 나왔습니다.
반가운 만남을 갖고 왕궁온천탕을 갔습니다. 이번에는 목욕은 원함도 없이 합니다. 어젯밤에도 목욕을 했고 아침에도 목욕을 했는데 저녁에 또 목욕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팔자가 늘어진 사람입니다. 물론 찜질방에서 저녁목욕과 아침목욕은 저의 숙소인 찜질방에서 통과의례이기도 합니다. 이 번 목욕은 친구목사님의 환대입니다. 왕궁온천탕은 시설과 물도 좋고 장소도 넓고 모든 것이 넉넉했습니다. 여행길에 피로를 풀도록 한 황목사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그렇지요, 이번에 만났다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는지 내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천국으로 귀천하는 동기들도 벌써 여러 명이 있습니다. 황목사님과 함께 장신대 신대원에 35세의 나이로 79기로 입학했던 네 명의 동기들 중에 한 명이었던 고 이윤민 목사님은 벌써 오래 전에 귀천을 했습니다. 그 사모님이 남편의 뒤를 따라서 여전도사님으로 목양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딸이 시집을 가게 되어서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면서 다른 네 명의 동기목사중의 한 분인 허명목사님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나도 이윤민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기숙사에서 있을 때에 종종 우리 방에 놀러오기도 했었지요. 늘 너털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 목사님, 노량진교회에서 섬기다가 목사안수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소천을 했습니다. 짧고 굵게 살다가 가셨지요. 물론 멀지 않아 우리들도 님의 뒤를 따라 갈 것입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동안 우리들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의 남의 생애에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빌었습니다.
목욕을 한 뒤에 황목사님은 제법 비싼 고깃집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한우등심집으로 가서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안내해준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모텔방에서 텔레비전의 채널을 오랜만에 이것저것 돌려보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대전에서 목회하는 강종인목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행길에 한 번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무안에서 증도가는 길에 동행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 여행길에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까지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봉상교회를 축복해주시고 황갑순목사의 목양사역과 가정을 축복해주시고 완주군의 모든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김영근의 국토순례여행(17): 1월 6일
정감어린 향토문화가 담긴 전주로
아침식사로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습니다. 주로 아침에 집에서는 미숫가루를 곁들인 우유와 시리얼과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는데 여행 중에는 콩나물 해장국을 주로 먹게 되었습니다. 호남지방은 음식은 정갈하고 맛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타지역의 음식이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음식은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분들의 손맛은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침식사 후에 봉상교회에서 관리하는 청소년문화의 집을 관람했습니다. 구경한 뒤에 이곳에서 카페글을 올리면서 직원들의 도움으로 사진을 올리는 기술도 배우고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오후에 봉동읍에서 전주로 향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는 눈이 많이 녹았습니다. 길을 안내해준 분이 만경강을 따라 전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시도하려고 하다가 길이 멀어서 그만 두었습니다. 만경강에는 작은 돌다리가 놓여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돌다리 건너가는 이야기를 했는데 돌다리라니 참으로 신기한 것같습니다.
봉동에서 전주가는 길에 호남고속도로를 만납니다. 전주가는 길에 많은 차량이 다니지만 갓길이 넓어서 걷기에는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옛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인생이란 관계입니다. 한 인격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인생의 멋이란 역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우리들의 인격이 더욱 성숙되고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같습니다.
전주역에서 백제로를 통해서 이광익목사님이 섬기는 비전교회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예배시간관계로 저녁 6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피곤해서 조금은 휴식을 취할겸 오뎅집에 들려서 오뎅을 사먹었습니다. 삼례읍에서 천원에 네 개 하던 것이 이곳에서는 천원에 세 개였습니다.
전주시내는 깨끗하고 길은 넓었습니다. 늘 차를 타고 다녔던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넓은 전주 시내를 이렇게 걸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행운을 만났습니다. 전주 안디옥교회를 본 것입니다.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었던 곳인데 이렇게 전주 시내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만나다니요, 이것은 행운 중의 행운입니다. 깡통교회이지만 가장 열정적으로 선교를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예산을 주로 선교와 구제와 봉사에 활용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의 문이 열려 있어서 양철로 된 둥그런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예배당 안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롯데백화점을 지나서 우회전으로 하라는 친구의 말을 따라 가는데 가는 길이 멀어서 택시를 탔습니다. 비용이 2200원이 나왔는데 그냥 잔돈을 드렸습니다. 전주비전교회의 이광익목사님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전주 시내에서 기존교회를 섬기다가 새로 개척해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길손에게 말씀 증거를 부탁해서 말씀을 증거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광익목사님의 섬김에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유명하다는 음식점에서 콩나물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고 전북노회 노회회관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곳은 노회에서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은퇴한 교역자들의 예배장소로 모이는 은목교회도 있었고 4층에는 게스트 룸이 있었어요. 숙소를 준비한 분이 밀감을 준비해서 밀감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이 노회회관을 드나드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빌었습니다.
국토순례여행(18) - 1월 7일
옥정호반의 아름다운 예수공동체
오이석목사님을 만나는 것은 연인을 만나는 것같은 설레임이 있습니다. 옥정호(운암호)근처에서 흙벽돌집을 짓고서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12년 전에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정이 처음에 갔을 때는 비닐하우스로 집을 짓고 살았지요.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집에도 부엌도 거실도 화장실도 나름대로 시설이 갖춰진 집이었습니다. 주님과 순수한 교제를 열망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나에게는 늘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광익목사님과 아침식사를 한 뒤에 오이석목사님이 머무는 거처로 향했습니다. 오늘 도보여행은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옛 국도 27번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국도 27번은 전주에서 출발해서 전남 벌교까지 이어지는 왕복 2차선 도로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전주 교도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전주교도소는 가족 중에 처남 한 분이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수감되었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는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있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 전주까지 먼 길을 갔었노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수감되어있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는 80년 대 초반의 시절은 매우 암울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도 한국이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피와 눈물을 흘렸던 님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교도소 앞을 지나면서 높은 담장을 바라보면서 저 담장이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갈라놓는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 저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그들의 삶에 새로운 축복의 통로가 열려지게 하옵소서! 저들의 가족들에게도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감격적인 만남을 허락하여주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저 교도소 안이 빈교도소가 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들의 치유와 재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7번 지방국도는 걷기에 참 좋은 도로였습니다. 가까이 있는 겨울 논밭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근처의 민가들을 바라보면서 민초들의 삶의 향기를 맡습니다. 추운 날씨지만 걸으면 땀이 나고 힘이 솟아납니다. 운동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나면서 본인이 속한 소속교단의 교회인 문정교회의 간판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구호가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가는 길에 들꽃 교회가 있어서 이름이 참 특이했습니다. 피곤도 풀 겸 해서 그 교회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잠시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은 기독교장로회에 속한 교회여서 한겨레신문사에 발행한 잡지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자유와 회복과 상생의 공동체라는 교회의 표어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입구에는 하늘과 땅과 이웃이라는 표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삶을 나누겠다는 교회의 구호에 걸맞게 들꽃 도서관이 있었고 함께 차를 마시는 공간도 있어서 두 곳의 문을 열어보았지만 문은 잠겨있었습니다.
구이면은 완주군에 속합니다. 봉동읍도 완주군에 속하는데 원래 완주군에서 전주라는 큰 도시가 빠져나가고 나서 전주시가 빠져나간 남쪽지역은 구이면으로 남아있게 된 것 같았습니다. 구이면소재지에 가니까 모악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산에도 오르고 싶었지만 나그네에게는 힘도 시간도 넉넉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요, 보고 싶은 곳을 모두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는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인생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한 음식점에 들려서 청국장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값이 4천원인데 매우 맛이 있었습니다. 한우값이 매우 싸서 고기를 얼마치 샀습니다. 걷는 길이 피곤했습니다. 자동차전용도로는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직선길인데 기존의 27번 지방국도는 지역의 동네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로여서 거리가 멀었습니다. 추워서 그런지 소변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몸도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지나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원래 운암호(옥정호)까지 걷고 싶었지만 얼마 남겨놓고서 자신이 없어서 버스를 탄 것입니다. 그렇지요.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에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염려가 되었던지 오이석목사님은 계속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모악산의 정경이 아름답게 들어왔습니다. 눈덮인 모악산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가까운 산과 먼 산이 어울려져서 기울어지는 태양과 함께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오이석목사님은 일도 있어서 강진까지 나왔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오겠다는 것입니다. 듣던 중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내가 탓던 버스는 운암호까지 가는 버스가 아니어서 다른 버스를 타야한다고 해서 버스에서 내려서 걷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희망이 생겼지요. 님이 마중을 나온다고 했으니까 행복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계속 걷노라니까 오이석목사님이 나왔습니다. 차를 탔습니다. 순식간에 운암호를 지나고 강진면소재지까지 갔습니다. 걸어가면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약 십오 분에 걸쳐서 가는 것을 보니까 정말 차라는 것이 편리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옥정호가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옥정호의 물은 순창과 곡성과 구례를 거쳐서 전남 광양시와 경남 하동군 사이를 통과해서 남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가장 물이 깨끗하다는 섬진강 상류에 세워진 댐입니다. 원래는 운암호였는데 호수 이름이 옥정호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물의 일부는 대형송수관을 통해서 칠보면 쪽으로 빼어서 칠보수력발전을 일으키면서 서해안 쪽으로 물길을 돌려서 넓은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도 합니다.
강진면소재지에서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가날픈 여인으로 생각했던 사모님은 오이석목사님의 동지가 되어서 집을 짓고 다양한 사업을 할 때에 동역자로서 힘든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네 자녀를 시골에서 건강하게 키우면서 마음에 평강과 기쁨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신실한 주님의 딸이었습니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남편인 오목사님과 결혼해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들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새내기 신부인 며느리에게 "아가야, 너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겠느냐?"하는 질문에 "저도 아직 공동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필자는 미국유학을 가느라고 준비하면서 짐을 가지고 봉천동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신혼살림을 하는 오목사님 댁에서 하루를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오목사님과 처음 만남은 내가 경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에서 엄천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에 가까운 모실교회에서 신학 중에 휴학을 하고서 전도사로 부임해서 그 때부터 꾸준하게 교제하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왔습니다. 오목사님의 공동체를 향하는 도로는 큰 도로와는 달리 눈이 많이 녹지를 않았습니다. 집 가까이에 도착했지만 가파른 언덕 때문에 차가 집 마당까지는 올라갈 수가 없어서 아래에 차를 두고 걸어 올랐습니다. 내가 떠나있던 동안에 많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우선 살고 있는 흙벽돌집이 세워졌고 황토방도 만들어졌고 야외 화장실도 만들었고 또 황토방의 공사가 진행되다가 겨울이어서 중단된 건물도 있었습니다. 집입구에는 곶감을 깎아서 많이 매달아 놓았습니다.
노모인 권사님에게 큰 절을 올리려고 했는데 목사님의 절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인사만 했습니다. 87세인 어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의사소통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렇지만 몸은 건강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치매가 시작이 되어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이 평범힌 목회의 길이 아닌 특수한 사역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느라고 눈물샘이 많이 말랐다고 합니다.
저녁을 정갈하게 준비해서 맛있게 먹고 그 동안 삶의 편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 동안에 있었던 가정 내의 여러 아픔들을 이야기했고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같은 목양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제는 공동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안식과 영적인 쉼을 얻을 수 있는 나눔 공동체와 전원교회를 지향하는 예배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목사님 부부는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다양한 삶을 시도했습니다. 치이즈도 만들어보고요, 산양도 키워보고, 사슴도 키웠고 다양한 먹거리도 만들어보았고요, 매실차도 만들어보았고 청북장도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부부가 신앙의 내공을 열심히 쌓아왔습니다. 힘든 일이지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당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신실한 몸부림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막내딸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이 가정의 행복의 원천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요. 막내딸 때문에 이 가정에는 빈둥지 증후군이 늦게 오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가정의 진정한 행복은 자녀 양육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지만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입니다. 옛 조상들도 가정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담장 밖을 흘러나와야지 그 가정에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지요, 빈둥지 증후군은 우리 가정에 여러 해 전에 벌써 시작이 되었지요. 종종 자녀를 기르면서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기를 때가 힘은 들지만 그 때가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행복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이석 목사님의 가정과 이 신앙공동체를 축복해주세요, 이 공동체를 드나드는 모든 심령들에게 주님의 생명과 평안과 행복이 넘치게 하여주옵소서!"
국토순례여행(19) - 1월 8일
명품음식의 고향 순창에서 곡성으로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되지 않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지만 떠나야 합니다. 이곳 공동체를 떠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 가정을 위해서 기도했고 오목사님은 이 떠나는 길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집 앞에서도 찍었고 곶감건조대 앞에서도 찍었습니다.
오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서 강진면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회문산 앞을 지났습니다. 저기가 그 유명한 남부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945년부터 1955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회문산에서 시작한 남부군은 지리산쪽으로 중심거점을 옮기면서 국군과 경찰군과 싸우면서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누가 옳고 그런지는 따지기 전에 이것은 민족의 비극이었고 이데오르기의 차이가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왜 같은 민족이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서로를 향해서 적대감을 품고 총을 겨누면서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생각하면 끔찍한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더불어 살아야하고 사랑해야하는 민족 공동체가 미움과 분노와 증오의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민족이 성숙하는 귀한 모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이데오르기의 차이점은 여전히 적대감으로 남아서 지금도 이 땅의 아픔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는 분명히 이 민족을 선하게 인도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체포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제사장의 병사인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쓴 사람이 칼로 망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칼을 버리고 그 살상의 무기인 칼로 농사용 도구인 보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순창읍내에 와서 순청읍내의 이곳저곳을 걸었습니다. 작은 읍내를 걷는 재미가 솔솔 했습니다. 순창고추장, 순창된장, 순창청북장 등의 먹거리로 유명한 곳이 이곳입니다. 읍내의 이곳저곳을 보면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마음 속에 새겨보았습니다. 점심식사를 오이석목사님과 함께 유명하다는 순대집에서 했습니다. 한 그릇이 오천인데 정말 맛도 좋았고 양도 많았어요.
점심을 먹고 나서 순창읍에서 전남 곡성군 입면에 있는 마삼교회를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출발이 늦어서 전남 옥과면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가는 길이 너무나 유쾌했습니다. 조용한 마을도 좋았고 넓은 평야도 인상적었습니다. 27번 기존도로 옆에는 27번 자동차 전용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전남 경계선까지는 걷기로 했습니다. 좀 피곤해서 주님께 기도하면서 어떻게 걷는 것이 효과적일까를 생각했습니다. 10분을 먼저 말씀을 보면서 쉰 다음에 50분을 걷기로 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장과 2장을 읽었습니다. 말씀이 주는 의미와 기쁨이 솔솔 시작되었습니다. 무리하게 많이 걷는 것보다는 10분 동안 말씀을 읽으면서 얻은 능력이 나머지 50분 걷기에 힘을 준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50분을 걸으면서 주님은 다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너의 사랑을 표현하라. 사랑표현은 그들을 위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주 오는 차를 위한 손 흔듦은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비는 것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흔드는데 몇몇 분들이 함께 손을 흔들면서 반응했고 또 한편으로 경적을 울리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 땅을 위해 중보기도가 힘있게 시작되었습니다. 주님, 전북을 축복해주시고 순창군을 축복해주세요. 이 지역에 있는 가정들을 축복해주세요. 참으로 힘있는 걷기였어요. 행복한 걷기였어요. 멀리서 눈덮인 아름다운 산야가 들어옵니다. 이 자연을 저 산야를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지요.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의미있고 보람있게 살게 하셨네요.
전북과 전남의 경계지점에서 어떤 분이 차를 세워놓고 나를 향해서 오는 것 같았습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어서 저 사람이 누군가를 몰랐지만 아마 신봉호목사님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목사님이 차를 그곳에 세워놓고 나를 기다렸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목양의 삶을 살아가는 신봉호목사님은 전남 곡성군 입면 마전리에 있는 마삼교회를 섬기고 있었어요. 신목사님은 한남대 학제 신학대학원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목사님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어떤 사이일까요? 스승과 제자는 함께 길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배우면서 함께 순례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교회에 도착해서 담양읍에 가서 사우나를 하면서 피로를 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걸어온 나그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이 목욕이라고 신목사님은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길손을 섬기는 모습이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가정에는 자녀가 세 명입니다. 너무나 귀하지요. 믿음으로 잘 자라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육환경이 무엇일까를 종종 생각합니다. 그것은 좋은 학원도 아니고 실력 있는 선생님도 아니고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녁을 먹고 목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를 정리하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주님, 신봉호목사님의 가정과 목양사역을 축복해 주세요.
이 교회가 이 지역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이 임하게 하여 주세요.
【가족치유상담센터이야기】
<옥정호근처에 있는 황토돌집에서 필자와 오이석목사 >
금번 국토순례여행을 2월 6일에 포항호미곶에서 접었습니다. 경북과 강원도를 남겨두었습니다. 설날도 있고 새롭게 생겨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완성품을 만들지 못하고 중간에 쉬게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만났던 모든 분들이 감사했습니다. 여행 중에 더욱 주님 사랑하게 되었고요, 대한민국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은 길 떠난 나그네에게 사랑을 주었습니다.
월간쪽지 예수사랑, 가족사랑 2010년 3월호를 발행했습니다. 새 봄에 여러분 더욱 행복하세요. 때로는 어려운 시간도 지나게 되지만 주님과 더불어 여행하는 기븜이 있기를 빕니다. 혼자는 외롭지만 주님과 함께 길가는 여행길은 결코 외롭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의 좋은 길 벗 김영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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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치유상담센터/대표: 김영근(010-3290-1007) 070-7648-3007
경기 남양주 금곡동776 신도브래뉴@102-1304호/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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