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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21 원문보기 글쓴이: 우또라
기행시집
밍글라바 미얀마 ( 합동 미얀마 기행시집 )
-2015년 5월 13명의 시인들이 미얀마를 다녀오다
원로부터 신예까지 열세 명의 시인이 모여 미얀마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관광안내서에 나와 있는 코스에 충실하지만은 않았다. 미얀마 사람들 그들의 삶 깊은 곳에 배인 흔적을 찾아 다녔다. 책을 펼치면 비록 생활전선에 내몰렸지만 천진함이 가득한 아이들과 한가로이 거니는 미얀마의 개, 목이 긴 여인들, 커다란 호수 속에 삶을 담그고 견디는 사공, 그가 외다리로 젓는 노의 삐걱이는 소리와 직접 마주하는 듯하다.
오탁번, 허형만, 이명수, 최영규, 박분필, 김지헌, 이영식, 강영은, 안차애, 박수현, 한영숙, 정재분, 이서화 시인의 엔솔로지 <밍글라바 미얀마>는 예순다섯 편의 시와 화보가 곁들여져 생생한 미얀마의 정서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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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1967년 중앙일보(시)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벙어리 장갑』 『우리동네』 『시집보내다』 등
- ohtakbon@hanmail.net
금빛 메주덩이
물안개 자욱한 인레Inlay 호수에서
부레옥잠 밭을 부치는 인따Intha 족은
1년에 한번씩
금불상 다섯 분을
금시조金翅鳥 배로 모시고
호수 끝 낭쉐Nyaungshwe까지 퍼레이드 한다
오래 전 축제 때
배가 뒤집혀
금불상들이 그만 호수에 풍덩 빠졌는데
금불상 하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죄를 지은 사람들이
호수 한가운데 배가 뒤집힌 자리에
금빛 탑을 세웠다
적막한 시간이 지나가고
호수 물이 불어난 어느 해 어느 날
잃어버렸던 금불상 하나를
금빛 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발로 쪽배를 젓던 사람이 건져 올렸다
쪽배를 타고
호수 물이랑 건너
파웅도우 파야Phaungdawoo Paya를 찾아간다
호수에 풍덩 빠졌던
금불상 앞에 합장을 한다
몇 백년 동안 어리석은 중생들이
금박金箔으로 개금改金을 하고 또 해서
이제는 이목구비 다 없어진
잘 뜬 금빛 메주덩이 같은
금불상 다섯 분이
옹기옹기 앉아 있다
폐허는 아름답다
인레Inlay호수 건너 인떼인Inthein 유적지
허물어진 수많은 불탑 사이로
폐허의 고즈넉한 정적이 흐른다
기울어진 불탑 위에는
나무와 풀이 멋대로 자라고
떨어져 내린 벽돌 위에서
삐쩍 마른 들개가 뒷다리를 든다
염불이고 잿밥이고
다 귀찮다 귀찮다 하며
귀 떨어지고 코 떨어진
부처님들이 손을 홰홰 내젓는다
아침 공양 점심공양 다 거르고
뉘엿뉘엿 해는 저무는데
탁발 나갈 낌새 영 없다
영겁의 낮잠을 잔다
허물어진 불탑 사이로
언뜻 비추는 노을빛 하늘
스마트폰 찰칵 소리에
부처님 잠꼬대하듯
툭 떨어지는 벽돌 하나
드나나나
만달레이Mandalay 아마라푸라Amarapura
타웅타만TaungThaMan 호수를 가로지르는
1.2km나 되는 우베인U-Bein 다리
몇 백년 된 거먕빛 티크teak가
치악산 똬리굴 침목枕木처럼 컴컴하다
다리 위에 서면
흘러가는 시간이 아주 잘 보인다
많은 연인들이 이 다리 위에서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슬픔도
이룰 수 있는 사랑의 기쁨도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는 법!
우베인 다리 위에서
만달레이 왕궁의 공주님과
하룻밤 풋사랑이나 나눌까
속으로 사뭇 켕기면
관광비자 보여주면서
마지막 키스 나누고 줄행랑?
허허, 그것 참!
컴컴한
내 몸뚱이
드나나나 도둑놈이다
맨발
미얀마Myanmar 파고다Pagoda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바간Bagan과 만달레이Mandalay에서는
다 잘 견뎠는데
양곤Yangon은 폭염이 대단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보드가야Buddha Gaya에서 뵙고
머리카락 여덟 개를 얻어 와서 모셨다는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맨발로 들어가다가
스무 걸음도 채 못 가서
앗, 뜨거! 소리쳤다
대리석 바닥이 프라이 팬 같았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발바닥이 따가웠다
순례를 포기하고 그늘로 숨었다
그 순간
파고다 맨 꼭대기에서
4351개의 다이아몬드와
2317개의 루비와 사파이어가
누리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책
쿠토도 파야Kuthodaw Paya에는
불경을 새긴 729개의 비석을 안고 있는
흰 석탑들이 북극곰처럼 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상에서 가장 큰 책!
2400명의 스님들이
6개월에 걸쳐서 만들었다나
축제 때 하나하나 독송했다나
이 어마어마한 석장경石藏經!
미얀마 사람들
참 무지막지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얼마나 좋아?
석굴암 부처님 얼마나 의젓해?
별을 손짓해 부를 수 있는
아담한 첨성대는 또 어떻고?
미얀마 사람들
참 미련하기는!
흉을 보다가
나는 금세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얀마가
동남아의 작은 미개국인 줄 알았다
한반도의 세 배가 되는 국토
인구 6천만 명
135개 소수민족이 사는 나라
석가모니가 열반하기 전부터
부처님을 섬겨온
불국토佛國土라는 걸 정말 몰랐다
값싼 책이나 읽으며
우쭐대는 나
에라, 지옥에나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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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 시집 『그늘이라는 말』 『불타는 얼음』『가벼운 빗방울』 등
- hhmpoet@hanmail.net
맨발
미얀마에서는 파고다에 들어설 때마다
신발을 벗어야 한다
미얀마에서는 부처님 앞에서
맨발이어야 한다
맨발처럼 가장 낮은 마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상의 고독, 지상의 슬픔도
모두 맨발보다 더 위에 떠도는 것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공처럼 구부려야
따가운 지상과 입 맞추는 맨발이 보이느니
맨발은 자신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존재임을 안다
맨발은 자신이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가장 순수한 영혼임을 안다
부레옥잠
부레옥잠 보랏빛 꽃이
그토록 고혹적인 건
인레호수에서 처음이다
보라, 보라, 보라
물 위로 기다란 목만 내놓고
날 기다렸다는 듯
눈 흘기는 저 은근한 속살
잘못 빨려들었다간 영영
떠나 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보랏빛 부레옥잠
다이아몬드꽃
내세來世보다
현세現世가 더 아름답다고
육신肉身이 빠져나간 불탑들 사이로
불꽃처럼 벌겋게 타오르는 꽃
미얀마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이라고
햇볕을 반짝반짝 닦아 윤기 내는 꽃
쉐 인떼인 유적지에서
허물어져가는 파고다
정수리를 뚫고
아카시아 꽃 하얗게
적멸에 든 한낮
이미 흙이 되었거나
지금 흙으로 무너져 내리는
파고다 그 어느 곳에도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나도 온 일 없고
오직 천년의 고요
천년의 바람
수상마을
어부가 한 발로 노를 젓는
인레호수 인따족 수상마을엔
홀짝! 한 잔 하고 싶은 카페가 있고
하룻밤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싶은 호텔도 있고
대나무 부력으로 떠있는 쭌묘 농장에서는
쪽빛 하늘 닮은 청포도 익어가고
석양 햇살에 토마토 붉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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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 1975년 《심상》 으로 등단
- 시집 『울기 좋은 곳을 안다』 『風馬 룽다』 『바람코지에 두고 간다 』 등
- lms4528@hanmail.net
밍글라바, 쉐다곤
아직도 발바닥에선 불이 납니다
수천 파고다 중에 고작 수십을 돌아
마지막 황금사원 쉐다곤 맨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40도 불볕에 달구어진 타일 바닥을 맨발로 걷기란
수행修行 아닌 고행苦行입니다
아이들은 따나카 분칠을 하고
쉐다곤 부처는 황금 세례를 받고
나는 내 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100미터 첨탑 황금 끝엔
텅빈 5월 하늘이 걸려있습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내 몸속을 수만 걸음 걸어
일주일 만에 여기까지 왔기에
발바닥에 불이 나는 뜨거움을 알았기에
맨발이 내 발임을 알았기에
아리고 쓰린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밍글라바, 쉐다곤”
행만이로行萬里路
나를 넘어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동기창董其昌이 타이른다
살아있는 너를 만나려면
만리를 여행하라
서역西域 만리 미얀마에 떠 있다
광활한 바간 들녘 달빛 사이로
정체불명의 비행물체 하나 내려앉는다
수 천 불탑과 황금 사원이
걸어온다
맨발의 아난다阿難陀가 걸어온다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등굽은 노승의 나직한 독경 소리만
잠든 이라와디 강을 쓰다듬는다
내 몸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맨발의 아난다여
만리를 걸어서 내게 다시 왔다
몽유와夢遊臥
몽유와夢遊臥는
몽유와Monywa에 있다
팔베개 베고 누워 놀기만 해도
부처가 되는 나라
하릴없이 꿈만 꾸어도
저절로 가볍게 부처가 되는 나라
몽유와라고 부르면
몽유아가 지워지고
꿈만 남는 나라
몽유와Monywa에는
몽유아가 없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꿈속에서 길을 잃은 사내가
몽유와, 몽유와 하며
꿈속에 남아있는 몸을 빠져 나가고 있다
서천西天 꽃밭에 가다
유민流民은 유민이어서 인레 호수 부레옥잠 물길에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쉐 인떼인Shwe Inntain 천 년 쯤 되었을까
사람 수만큼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지었을 것이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서역 서천 꽃밭이 여기다
꺾인 첨탑 위 봄꽃들 둥지를 틀었다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 혼살이꽃
백골의 부처 몸을 헤집고 솟아난 생불꽃, 환생꽃
모든 몸에서 생겨남과 스러짐이 맞물려 꽃들은 피고진다
천 년 생명의 기호다
백골의 춤사위다
허공에 꽃을 뿌렸다
누군가의 꽃이 미리 피어 있을 것이다
밍군 아이들
아이들이 몰려온다 열세 명이다 우리 편도 열셋이다
어디서 열세 살 아이들 열세 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긴 강둑을 달려와 손가락으로 짝을 고른다
우리는 이렇게 찍혀 모르는 짝이 되었다
열세 살 미미가 뱃전에서 손을 내민다 손잡고 한 편이
되어 밍군대탑에서 밍군종까지 한나절 옛 마을을 돌았다
봄소풍이 얼마만인가 미소 짓는 밍군 아이들은 무하무니
부처를 닮았다
밍군종이 울린다
다시 이라와디 강을 거슬러 가야한다 3달러를 손에 쥐어 주었다
3달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미미는 배가 멀어져 가는 것을 강둑에 앉아 오래 바라보고 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너희는 나의 과거다
3달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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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규
-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6인 합동시집 』 『아침시집 』 『나를 오른다 』
- choibm@empal.com
너도 나비
1.
카라반caravan 중에 머물렀던
고도 4,300미터의 마지막 고원마을-팅그리Tingri
움막만 한 돌집 옆으로 순무 몇 줄 심어놓은
채마밭에서 만난 배추나비
“저요?”
“하얀 날개를 가진 배추나비죠!”
“세상이 얼마나 넓고 높다고요!”
말대꾸를 하는 듯 조금 과장돼 보이는 날갯짓
너무도 까마득해 끝이 안 보이는 티벳의 고원
그 한 귀퉁이
작은 돌집 옆 채마밭을
허둥대는 몸짓으로 날고 있는
저 배추나비.
2.
누군가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뒤편 어딘가
저 멀고 높은 곳의 눈빛이
목덜미를 쓱 훑고 지나갔다.
초오유*
방석만한 뒷마당 돌 위에 앉아 초오유를 생각한다. 여기로 그때의 초오유를 불러 살피고 만지고 안겨 그것을 멋지게 옮겨보려 애를 쓴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있다- 시인의 하루. 초오유의 하루.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 지나와 버린 그곳 초오유.
백색의 거대한 장막帳幕처럼 하늘을 가리며 나타났던 초오유Cho Oyu 8,201m. 그 앞에 허리를 굽혀 엎드린 7,000미터 급의 거봉들. 야크의 등짐마냥 흰 눈을 지고 있는 그들의 능선은 마치 털을 세운 짐승처럼 위협하듯 깎아지른 설벽으로 빙하를 에워싸고 있었지.
몇 장의 사진과 지도를 펼쳐놓고 며칠엔 어느 지점에, 어느 고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오르자고 떠들어대었던 철없음이 굳어버린 입이 되어 통회痛悔의 울음을 쏟았지-그를 올려다보며. 태초의 백색. 그 만년설의 장막 뒤로 자신을 감춘 초오유는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고 다가올 수 없다고 소리가 아닌 절대 침묵으로 쉼 없이 호령하고 있었지.
쓰러져버렸던 마음. 그래도 더듬더듬 무슨 소리든 내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내 뒤에 기대어 서 있었지. 그때 나는 그곳 그 어디에다가도 나를 내려놓을 수 없었지.
몇 줄 안 되는 인간의 말로는 전할 수도, 써낼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지.
*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북서쪽 2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8,201m 높이의 봉우리. 히말라야 8000m급 14좌중 6번째로 초(Cho)는‘신성 또는 정령’, 오(O)는 여성의 어미(語尾)이며, 유(Yu)는 터키옥(玉)을 뜻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초오유를 ‘터키옥의 여신女神’이라 말한다. 또한 ‘신의 머리’‘강한 통치자’‘큰 산’등으로 해석되어 서티벳 라마승들은 ‘거대한 머리’의 뜻으로 여긴다.
꿈
깜빡 잠들어 꿈속에서 만난 우리 집 뒤 운길산.
낮달이 山자락에 걸터앉아 참 편안하다. 한 사나흘 무작정 비를 맞았는지, 푸른 속살 내어줄 듯 지척이다.
건너편 초오유샤우*에서 쏟아져 내리며 우르릉거리는 눈사태 소리에 놀라 깨었다. 잠시 후 텐트까지 흔들어 대던 차가운 바람이 눈물이 고인 눈을 쓱 닦고 지나갔다. 죽은 나를 만나기라도 한 듯 떠밀려 나가는 기운에 눈이 크게 떠졌다.
열린 텐트의 틈새로 늘 쳐다보았던 순백의 그곳이, 세상에 없는 색으로 투명해지며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아니 틀림없이 먼 길을 떠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화들짝 놀라 쫓겨난 하루.
*‘초오유의 모자(帽子)’라는 뜻이며 초오유(8,201m) 주변의 7000미터 급 봉우리중 하나.
심정*
피가 섞인 콧물이 흐른다. 침을 삼키려면 터져버릴 것 같은 목울대, 온몸을 웅크린 오소리 꼴이 되어서는 주위를 살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핏덩이가 섞인 가래를 한 움큼씩 뱉어낸다. 허기로 숨 쉴 기력조차 없지만 막상 밥알은 단 한 톨도 목구멍 속으로 삼킬 수 없다. 누가 내 머릿속에서 맷돌질을 하는지 틈 없이 덤벼드는 두통. 아, 모든 게 자근자근 나를 무두질해대며 하산! 그만 하산하라고, 후들거리는 허벅지로 겨우 버티고 서있는 나를 밀어 바람 앞에 세운다.
오후 4시, 한낮도 훨씬 지났는데 햇살은 여전하다. 저 기세라면 어제 내린 폭설도 농담처럼 가볍게 녹일 것이고, 바람은 다시 구름을 불러 모아 하늘을 잘게 부숴놓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반복되는 폭설은 오한을 불러온다. 나는 고소용 방한복에 팔과 다리를 겨우 겨우 끼워 넣으며 오늘이 며칠이더라,
환청처럼 보이는 멀리, 빙하 아래쪽으로 소용돌이치며 흩어지는 내가 보인다.
*심정(心旌): 마음의 깃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산란한 상태.
야크Yak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을
저 다리, 저 무릎
무너지며 흘러내리는
파석破石의 모레인Moraine*지대
깍아지른 급사면에
사선斜線을 그으며 전진하는 야크Yak
삶과 죽음을 함께 담보하는
고산高山의 영역과
외눈박이에 어리석은 인간들을 연결하는
3000미터 아래의 저지대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짐승
저 특별한 짐꾼
저 특별한 구도자求道者
가끔 하늘을 볼 뿐
가끔 커다란 머리를 흔들어 털 뿐
할 말은 있지만
어금니를 물어 입을 닫은
묵언의 정진精進
그들의 주먹만 한 까만 눈동자에 담겨있는
알 수 없는 경계 밖 그 곳으로
외눈박이 인간들을
인도引導해 간다.
* 빙하에 의해 운반되어 쌓인 퇴석구(堆石丘) 즉 돌, 모래, 흙들이 거대한 강처럼 형성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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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분필
- 1996년 《시와시학》에서 시집출간으로 문학 활동시작
- 시집: 『창포 잎이 바람에 흔들리다』『산고양이를 보다』 등
- punpil@hanmail
파웅도우 불상
혼돈입니까
눈부신 황금이 일곱 개의 구멍을 다 막아버렸습니다
혼돈에서 출발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간
금박 한 겹 지문 한 겹 쌓일 때 마다
부처님의 침묵은 한 치 한 치 깊어져 눈이 필요 없고
그리고 코와 귀와 입의 역할이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드디어는 호수 속에 가만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셨지요
잠용 물용簪龍 勿龍한 사십 년의 세월
마침내 앉은 채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은 하늘 쪽으로 땅은 땅 쪽으로 더 멀리 밀고
범속한 생활의 영역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넉넉한 사랑방 한 자리를 내 주셨습니다
부처님 턱 아래 느긋하게 누워 귀 닫고 잠 공양에 든 여인도,
길목마다 헤매다 지친 흰 견공 두 분의 딱지 진 피부도
가늠 할길 없는 깊이의 침묵에 드셨습니다
금가루를 보슬보슬 하늘에 날려 올리는 파고다와
수면 위로 빛을 쏘아대는 수많은 물별들의 한낮
반짝임을 둘러싼 호수의 시간이 고요하고 매끈합니다
만달레이 우베인 다리
따웅타반 호수를 가로지르는 우베인 다리는 마하간디용
수도원에서 호수건너편으로 스님들이 탁발공양을 가는 길이다
길은 방향이다
그리고 운명이다
운명이 우베인 다리에 올라서면 비껴갈 수 없음을 알게 한다
높이 떠있는 외길로 가야한다
방향을 외면하면 순식간에 내 던져질 수도 있는 궁금증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거나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
이 길은 운명이 옆길로 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들판의 빛깔과 석양의 향기가 배어있는 명물목교
파트너인 시간이 내 손을 잡고 다리 위로 이끈다
내 안에 억눌렸던 내가 모르는 힘들이 발밑에서
출렁출렁 나를 설레게 하는 긍정이기도 하다
200년 동안이나 수많은 사람의 다리가 되어준
또 되어줄, 티크목 다리는 썩을 수 없는 불심이다
인레호수 부레옥잠
먼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물 냄새의 방향이었다
해발875m에 위치한 산정호수
수직선과 수평선이 교차하는 인레호수에
꽃을 가득 떠받들고 무리지어 떠 있는 부레옥잠
호수의 강력한 시적 무늬였다
반짝, 호수 위에 뜨는 물별까지
방금 호수의 한 귀퉁이에 도입된 나도 수필 같은 무늬로 떠 있다
만남에서 만남으로 끝나는 무늬들
아픔을 모르는 꽃은 저리 숨 막히게 아름다울 수 없지
마침내 노숙의 바닥에 떨어진 최초의 한 잎이
뿌리내릴 손바닥 하나의 길이와 넓이를 구하기까지는
넓고 넓은 인레호수 위를 한없이 떠돌았을 것이다
환지통의 밤을 절뚝거리며 건너고 또 건넜을 것이다
별 하나도 가스기둥이 폭발하면서 탄생된다
폭발한 가스가 다시 합치면 또 다른 별이 숙명처럼 태어나지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배처럼
현세의 문을 열면 내세의 문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참과 거짓이 하나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내세라는 세계
갑자기 구름이 녹아 줄기찬 빗줄기를 쏟아 붓는다
튼실한 빗줄기로 기우뚱대는 몸을 묶는다
밍군파고다의 소녀
무너지고 있는 미완성의 파고다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한
풋풋한 풋 싹, 소녀가 그립다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바퀴살같이 달려온
소녀가 1달러짜리로 나를 찍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소녀의 1달러가 되어있었다
쌓다만 밍군사원 허물어진 영광의 층계를 오를 때
제법 익숙한 코리아 언어로
‘조심하세요’
옆구리를 받쳐주며 반짝거리던 소녀의 눈동자가 그립다
탑 꼭지에서
‘저기는사자상’
‘저기는밍군종’
‘저기는사자눈알’가리키던 까만 팔과
종알거리던 하얀 잇속이 모두 1달러의 영상이었다
나비 핀이라도 사가지고 올 걸
성근 빗이라도 챙겨 올 걸
소녀는 나의 1달러였고 나는 소녀의 1달러였던
짧은 다큐멘터리는 종영되었지만, 째깍째깍
소녀는 계속 다른 다큐를 찍고 있을 것이다
인떼인 유적지에서
무언가에 묶여있던 끈을 풀고 날아온 여기
인떼인 유적지
여기인가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변하는 곳으로 가 보라했던 곳
생각을 멈춰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생명의 저 건너편, 세상 밖의 세계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된 일이듯
여기 당신의 손금을 박은 탑이 허물어지고 있다
실금간 밥그릇이 조금씩 갈라지듯
차츰차츰 윤곽은 육탈되고 형해만 남은
탑 위에는 뭐가 있을까
혼자자란 초록줄기가 한 계단씩 기어오른다
사방에 펼쳐진 풍경을 잠시 바라보고
줄기들이 다시 한발 한발 기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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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헌
-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황금빛 가창 오리떼 』 『 배롱나무 사원』 등
- kim2850@hanmail.net
소녀
요요는 열두 살 미얀마 소녀
밍군 섬에서 관광객들에게 부채 따위를 팔며
밥을 구한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에게 간택된 나는
어느 소수민족 부족장의 애첩이라도 된 양
그녀를 거느리고 밍군 탑을 오른다
손가락 두 개를 펴고 2달러를 부르던 아이들은
저마다 주군을 모시듯 한사람씩 달라붙어
부채도 부쳐주고 신발도 맡아준다
깃털처럼 가볍고 작은 몸으로
거침없이 이 세계를 건너가는
꽃 같은, 부처 같은 아이들
순진무구의 적빈赤貧이 나를 깨운다
폭우
수상마을을 빠져나오기 시작할 무렵 이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시간에 처박힌 채
역설적으로
가장 한가로운 순간을 즐기고 있었고
오래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속수무책 비를 맞으며
호수의 수면을 사선으로 때리는 빗줄기가
그 시절 유리창을 두드려대던 비가 되어
지금 여기가 인레이호수인지 어릴 적 교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방금 전 만났던 빠다웅족 여인들처럼 목에다 친친
응축된 언어를 새겨 넣듯 때로는 폭우 속에
우리의 전 생애를 던져 놓을 때도 있었다
전장의 총알받이가 된 듯 배는 흔들렸고
생의 물결에 흔들리며 표류하다가
어느 기항지를 배회하거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던 밤처럼 세찬 빗줄기가
꾸역꾸역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낸다
백두산 천지
장엄 벼랑을 오른다
불의 가슴으로 물을 품은 채
장군봉, 천문봉, 용문봉 봉우리 봉우리
아득히 먼 옛날부터 초원을 내달려온
근육질의 백두봉우리들
큰 바람이 산맥을 한번 휘돌더니 남녁으로 휘장을 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어여 오너라
가슴 열어 젖 물리는 어미처럼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압록과 두만으로 뿌리 뻗고 있구나
숨을 골고루 나누고 있었구나
수 만 년 사스레 나무는
쓰러질 듯 어깨동무하며 이 땅 지켜왔구나
두메자운, 담자리꽃, 금매화, 하늘매발톱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라리 아라리요
뿌리내리고 있었구나
신의 눈동자, 천지天地로부터
태초의 두루마리에 이 땅의 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있었구나
하늘이 땅이 인간이 모두 하나 되어 있구나
노랑 만병초
백두산의 야생화들은 생체시계가 독특하다
일 년에 딱 3개월
그 짧은 순간 일생을 살아내야 하기에
벼락 치는 순식간 또는
융단 같은 7월의 재바른 햇살에
재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
자식하나 세상에 떨궈놓고
신랑은 전쟁터에 나가
평생을 수절 과부로 살아 온 조선 여인네들
병자년에 끌려간 이 땅의
처녀들, 백성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변 땅에 흩어져 살 듯
옹기종기 키재기 하며
백두 초원에 뿌리 내리고 있다
스스로 피었다 지는 것들 끼리
시절 좋은 고국 땅 뒤로하고 척박오지에서
세상과 정면승부 하고 있다
맨드라미차를 마시며
귀농한 친구로부터 맨드라미차를 얻어왔다
바싹 말린 맨드라미 꽃차를 따뜻한 물에 우려내자
찻잔에 소란스런 붉음이 우러나더니
빨간 벼슬이 우르르 병아리들을 몰고 와
수선스럽게 방안을 어지럽힌다
그저 맨드라미 차가 궁금했을 뿐인데
들판에 지천으로 널린 쇠무릎이 무릎 관절에 좋다든가
목련과 연꽃을 줄긋기 한다든가
모든 존재는 홀로 고독하기에
조물주가 어떤 깊은 생각으로
이 세상 같이 건너가라고 짝을 지워준 걸까
아님 숨은그림찾기 하라고 힌트를 준 것일까
우연히 은행나무의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야
이 기시감을 알아챘다
난자를 만나기 위해 전 속력으로 헤엄치는 수컷,
정자꼬리가 꼭 그렇더라는 것
생명의 기원은 물에서부터 시작됐고
맨드라미 차는 그 인연의 일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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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휴』 『희망온도』 『공갈빵이 먹고 싶다』
- lys-poem@hanmail.net
탑
내 안에서 찾으려는 게 무엇입니까
불토의 상징처럼 서 있는
내 몸속은 흙벽돌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노역의 땀방울 배어 있는 세상의 흙이며
돌덩이일 뿐입니다
독경으로 감싸고 황금으로 덧칠한다고
도피안到彼岸의 다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대도, 두 손 모으고 허리 굽히고
깨진 무릎을 내려놓으려 하십니까
건너보니 그 자리…
내 귀에 흘러들어오는 당신의 나직한 읊조림과
마음자리가 너무 지극해서
나는 돌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오늘도 탑의 나라 기표로 서 있습니다
탑돌이
남들은 배와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들은 흙벽돌을 찍어 날랐다
남들은 화약과 대포를 만드는데 그들은 파고다를 세웠다
남들은 재물을 꼭꼭 숨겨 두는데 그들은 탑의 몸피에 황금을 덧발랐다
남들은 위성 쏘아 올려 지구를 도는데 그들은 오직 탑을 돌았다
보리수 저 언덕에 닿은 그들의 한 생애가 맨손이고 맨발이다
탑의 숲을 거닐다
천불천탑
탑의 숲 거닐다가
무너진 탑신 사이 거미줄을 보았다
파고다 왕국 세워놓고
탑 뒤에 숨은 시간
흙으로 모래로 가버린 사람들
초록초록
푸른 탑을 쌓기 시작한다
정토의 풀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부처와 놀다
그늘이 모인 부처좌상 앞에
나는 벌렁 누웠다
코앞에는 황금대탑 쉐다곤이 하늘 찌를 듯 서 있다
미얀마 대낮 불볕 속
섭씨 45도의 찜통더위를 뚫고 왔다지만
부처 앞에 눕는 것은
시건방지고 버릇없는 노릇이겠다
뒤가 켕겨서 일어나려는데
짹짹! 참새 한 마리
부처님 머리위에 물똥을 냅다 갈긴다
녀석이 그러든 말든
빙긋 흐르는 미소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석공
돌 속에서 부처를 꺼내다
돌 속에서 연꽃을 꺼내다
부처를 연꽃을 꺼내들고
돌이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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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마고의 항아리』등
- kiroro1956@hanmail.net
선셋 포인트
쉐산도 파고다 베란다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네 지는 해가 솟는 해 같아 조금 전 보다 환한 낯짝이 되네
산 너머 이글거리는 태양은 들판은 불태우는 불사조, 땅거미에 물든 새가 돌아올 것 같아 걸음을 서두르네
내 발자국이 조족지혈의 희미한 핏자국을 읽어 낸다면 천 년 전의 저녁이 되살아날까, 피 묻은 벽돌 속에서 어제를 꺼낸 구름이 폐허를 양각하네
땅의 목덜미에서 돋아나는 풀숲이 축축해질 때까지 벽돌을 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내, 벽돌을 머리에 이고 가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계집
깃털에 담긴 잉크가 계단을 물들일 때 천년이 돌아왔네 완벽한 어스름에 잠겨 있길 좋아하는 개처럼 내 속에 남아 있는 어떤 슬픔이 뭉클했네
탑과 사원을 짓는 일이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랑이라면 ‘해가 지면 다시 뜨는 그런 사랑은 아냐, 어둠에도 체온으로 느껴지는 그런 사랑이야’*
벽돌을 만지다 일생이 저문 바간bagan의 들판, 해가 지거나 해가 뜨거나 이름은 아무래도 좋았네 흔하디흔한 들꽃처럼 내가 거기 있었으므로,
*조하문의 노래 ‘사랑하는 우리’에서 빌려옴
여행의 방식
어차피 우리는 헤어지잖니, 사원의 무덤 같은 쉐 인떼인*을 내려오며 너는 말했다
나는 왜, 밤의 휴식처럼 잘 차려진 길을 원했을까, 너의 농담을 저녁에 멈춘 발걸음 정도로 생각했을까,
붉은 벽돌의 파편을 끌어안은 뿌리들이 강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맨발처럼 동동 거렸다 흙의 밀도로 꽉 차 있었지만 저렇게 가엾은 나무를 본적이 없다
네가 무너진다면 나는 이곳의 나무가 되고 싶어, 천 개가 넘는 탑이 쏟아지는 이유를 너는 웃으며 설명했지만
미끄러운 강둑에서 내 팔을 부축하는 네 말을 듣는 동안 가냘픈 팔다리를 들어 올리는 나무들의 노고는 무릎이 아픈 나와 만나서는 안 될 인연 같았다
쑥밭이 된 사원의 종탑에선 티가 흔들렸다 티에 매달린 종소리가 바늘처럼 쏟아졌다 말똥 냄새 나는 그 오래된 길을 빠오족 사람들이 소를 몰거나 나무를 지고 지나갔다
태양 볕에 달구어진 저녁의 온도처럼 팔을 붙잡고 있는 체온은 여전했지만
포장하지 않은 길처럼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여행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보트가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인뗑의 수로가 끝날 때까지 헤어지자는 말도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으리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 거처'*를 정했으므로 두고 온 발가락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리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때 폐허의 유적이 다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헤어지잖니,
*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줄거움'에서
기린 여인
목이 길수록 미인이라 생각하는 빠다웅족 여인들은
놋쇠로 된 고리를 치렁치렁 목에 건다
결혼 적령기에 다다르면 25개의 고리가 25센치미터의 목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데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매듯 고리를 걸었다고
길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40센치미터의 높이에 얼굴을 올려놓은 절대 가인의 목이
전설처럼 존재 한다
모가지만 붙어 있으면 산목숨이라고,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위치에
쇠고리를 거는 여인들
맹수 같은 사내에게 한번 쯤 물려 죽고 싶은 목의 감정을
숨겨왔던 그것은 목줄을 쥐는 사물이 된다
반짝이는 목걸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아무런 감정도 일말의 표정도 없는 사물의 힘으로
나는 내 목을 치장해왔다
족쇄 밖으로 빠져나온 당신의 목덜미는 안전합니까,
관광객이 들락거리는 문전에 앉아
광이 날 때까지 고리를 닦는 기린 여인들의 무심한 눈동자가
목의 위치를 더듬을 때
쇄골과 갈비뼈를 드러낸 감정은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여자라는 고리를 빼는 순간
화려하게 빛나는 감정을 지탱해줄 목줄이 없어 휘청거리는
나는 울음을 숨긴 동물이 된다
안목에 대하여
아라한에서 가져왔다는 불상 5개,
내 눈에는 비대칭형의 커다란 금덩어리로 보이는데
번쩍번쩍 빛나는 괴물로만 보이는데
사람들이 달라붙어 금박지를 붙이고 있다
아니, 금을 버리고 있다
내세에는 부처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금을 버리는 공덕을 쌓고 있다
월천공덕越川功德, 구난공덕救難功德, 걸립공덕乞粒功德, 활인공덕活人功德,
많고 많은 공덕 중에
돈 안 들고 힘 안 드는 마음 공덕을 나는 으뜸으로 치는데
이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종이 짝처럼 버리는 그들은 이미
황금부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
실상도 증거도 없는 마음이나 나눠주는 나는
부처되긴 그른 사람,
부처 보는 안목마저 나를 버렸으니
개금蓋金하지 못할 마음을 지닌 나는
죽어도 부처되지 못할 사람,
안목이란 내 눈이 다가가지 못하는 밀엄 세계일까,
버리고 버린 금이 쌓여
새끼 손가락만한 부처를 키웠다는 팡도우 사원,
금을 금으로만 보는 허욕의 제단 앞에 무릎 끓은 나는 한낱
인간이 되고 싶은 돌덩이에 불과한지 몰라,
동토고원
설산에서 흘러내린 눈길은 산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간 사람의 길 같아서 눈에 빠진 사람의 머리께처럼 우리는 아침부터 희다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에게 버림받은 눈들이 첩첩 나려 둥글고 환한 지평선 때 묻지 않은 안구에 길을 묻는 우리는 밤에도 희다
분홍빛 귓불에 불을 밝힌 기다란 이야기가 깜빡깜빡 졸다 깨어나는 구간을 지날 때에도 어스름에 파묻힌 우리는 여전히 희다
흰 입김이 피어나는 행간에 고개 수그린 검정말 무리는 검다 한 끼의 먹이를 찾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순례하는 말없음표들은 멀리서도 검다
검다는 건 비루한 생의 가장 긍정적인 모습, 목덜미가 물어뜯긴 말처럼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우리의 눈은 희고 사시사철 눈 내리는 그들의 눈은 검어
잠든 몇 마리의 검정말을 깨우고 달아나는 전신주의 줄처럼 빠르게 스쳐가는 동토고원은 검고도 희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바닥을 지닌 눈은 책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지금 기차가 유목한 지상의 가장 먼 미간을 읽는 중
눈이 눈물을 밀어내는 새벽까지 우리는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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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차애
-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불꽃나무 한 그루』 『치명적 그늘』 등
- annie925 @hanmail.net
인레 호수의 금강마을
인레 강의 하구는 호수의 초입
비빌 언덕을 버린 사람들이
울음통을 넓히듯
물위에 들숨의 방을 만들기 시작했겠다.
물결이 놀다가는 방, 물그림자가 스며드는 방
민물고래 몇 마리도 때때로 주둥이를 들이미는 방
첩첩의 몸속에 쟁여둔 제일 넓고 제일 많은 부력의 방들
부레옥잠 분홍 꽃이 지천으로 떠오를 때
몽夢, 환幻, 포泡, 영影의 방들을 어림 빚어서 마을하나 낳았다
계면조의 물 꿈으로 서까래를 올린 곳
노을빛 환幻으로 기둥을 세운 집
물거품 웃음으로 처마를 들인 마을
서늘한 물그림자로 뜰 안 터가 넉넉한 곳
물 위의 수상 마을은
내내 흔들려서 흔들리지 않는다
색들인 적 없어서 빛바래지 않는다
측량하고 철근 박지 않아서
몇 생전의 바람이거나 소낙비도 가볍게 다녀갔다
무량겁無量劫을 알아서 작아진 인레 호수에서
내가 들인 부유浮遊 방들을 방생하듯 한 채씩 풀어놓았다
내 방인지 물의 방인지
무진장 물결들은 반야의 꽃처럼 내내 반짝이고 있다
바간, 시간의 얼굴
미얀마 바간 평원의 오천여 불탑들은 숫자들로 남아 있다가
마음 내킬 때 슬쩍슬쩍 내생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풍문이다
숫자들은 얼굴을 가지지 않아서 참 착하다
고단한, 다정한, 민감한, 측은한, 발칙한, 정직한
벌벌 떠는, 얄미운, 사랑스런, 간절한, 비굴한……
표정들을 가지지 않아서 언제라도 어디에라도 가닿는다
세상의 모든 소낙비들이 얼굴을 흩고서야 옳아진 것처럼
불탑들은 시간의 주름에 제 얼굴을 묻고서야 자유로워졌다
바람의 얼굴이 되었다
노을의 풍경이 되었다
부겐베리아 바삭한 꽃잎의 구조가 되었다가
꾸벅꾸벅 조는 시간의 흔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숫자는 떠났고 또 어떤 숫자는 남았다
정류소에 닿은 버스가 몇은 내려주고 또 몇은 태워가듯
떠난 사랑도 반성하지 않고 남은 내력도 우울하지 않다
끝내 있을 것처럼 떠나가고 처음부터 떠날 것처럼 남아있기도 한다
가장 공空한 시간의 노을색色이 가장 깊다
고요경을 읽을 때의 바람소리 가장 크다
구름이 잠시 얼굴 없는 탑을 지었다가 천천히 허물고 있다
황금색
모든 색깔의 끝은 황금빛이다
후렴뿐인 노래처럼
한 가지 얼굴로 몇 천 년을 고여 있다
짙은 녹색, 연두녹색, 빙하 호수 녹색, 세작 차 빛 녹색, 유월오동나무 빛 녹색……
수십 수만의 고유체들과 연대하는 녹색과 분홍과 노랑은 말랑하다
미끈미끈한 촉수 내밀거나 팡팡 터져 신경 튀어 오르는,
부지런한 천수천안을 가졌다
파웅도우 사원의 다섯 부처님들은 쉼 없는 황금 공양으로 목하 비만증이다
어질고 밝은 눈빛도 개금불사蓋金佛事로 가려졌다
덕스러운 코도 입도 이마도 한 결 같이 두루 뭉실 아랫배 같아져서
중생에게 내 밀 손이 없다
쉐다곤 파고다의 100미터 황금 탑신에 갇힌 부처님 머리카락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다시금 올올이 휘날리고 싶을 것이다
꽉 막힌 절대의 빛은섞이지 않는다, 번지지 않는다, 스며들지도 않는다
황금빛 동맥경화에 걸린 부처들 곁에선
삐걱삐걱 퇴행성 관절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론지 두어 벌로 한 생을 가볍게 펄럭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밀봉의 황금빛에 부딪쳤다 흘러내리고 있다
부처님도 화두 깨치듯
황금빛,
문득 깨치고 싶은 얼굴이다
사랑의 방식
닳아서 쓸리는 것들은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는 경사 때문이다
왜 늘 홀림은 쏠림으로 나타날까
갸우뚱한 열시 오십 분의 얼굴 표정을 하고
좌편향이 취향이라면
경추 5번 6번의 협착증은 현상이다
다리를 외로 꼰 채 왼손으로 턱을 괴고 앉는 것
그래서 먼 별 같은 생각만 하는 것이 오랜 편향이라면
직립의 하방경직성 피로증후군은 현상이다
구두 뒤축이 한쪽으로만 닳는 것은 불구의 현상이다
시간이 여기를 지그시 눌러 사랑하는 압착의 방식은
납작납작한 박수근의 그림처럼 봉재선의 한쪽 결만 도드라진다.
뼈와 뼈 사이는 한 쪽이 접히면 맞은편이 부풀리는
아코디언의 자세로 통증을 깊이 울린다.
천칭저울이 평형을 이룬 적은 없다
내가 기우는 사이 네가 울었거나
네가 기울어진 한 편으로 내 상처가 꽈리처럼 부풀었다
매혹이 끌림을 쓸고 가는 기우뚱한 사랑의 방식은
사시의 눈알을 뽑아 한쪽 벽에 걸어두고
오래 사랑한 그 때문이었다
오디션
-노래의 배치
맛있다고 냠냠냠 떠먹는 그릭 요거트처럼
쭉쭉 찢어서 줄기 채 걸쳐 먹는 김치 빛 어스름처럼
걸칠 육체를 찾아 백년쯤 떠도는 유령처럼
형체도 없는 미각이 잉잉 거린다
간절하게 입맛을 다시며
잡을 수 없는 데시빌은 간지러워
어긋나는 공기방울들은 사과 맛 반, 키위 맛 반
인어공주는 혀를 잃고서야 소울 풍 노래를 완성했지
반음이 늦어지거나 반음이 낮아지는 얼굴을 하고
당신은 헐렁한 집시 라인의 춤을 춰
난 할리우드 스타일로 우리라고 부르는 부류의 노래를 부를게
스윙과 재즈 사이에서 뚝뚝 끊기는 선들
막다른 골목에서야 음표들은 비눗방울처럼 날아오르지
어제는 블루를 배경으로 잠잠히 투명했으니
오늘은 소리의 윤곽을 뭉텅뭉텅 뜯어내며
크레셴도
성대는 닫히고 두 귀는 깔깔거리는 기관의 동물이 되어
달려, 핀 볼 같이 반짝이는 얼굴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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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2003년 『시안(詩眼)』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등
-hyunbee7@hanmail.net
흔들리는 기억
부레옥잠이 깔려있었어 외발노 젓는 소리에 여섯 장의 꽃잎들이 물안개처럼 번지는 산 위의 바다 인레, 바람부레를 매단 연보라 청보라들이 밍글라바 밍글라바 속삭였지 뱃전 사이 환히 부푼 꽃들이 호야불을 켜 들고 황톳빛 물살을 밀었어 누군가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지 목이 긴 빠다웅족 여자가 베틀에서 한 올씩 실을 고르고 있었어 그 옛날 부레옥잠빛에 취한 여자들은 호수의 정령에게 일생 보라의 숭배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지 그때부터 여자들은 놋쇠 고리를 겹겹이 목에 끼워야 했어 베틀에서 천을 끊어낼 때마다 사웅가욱 열여섯 줄 뜯는 소리 울려나고 언약의 표식들은 여자들의 가는 목과 늑골을 짓눌렀어
보라와 몇 생을 함께 나눈 여자들 몸엔 괴사한 어둠이 차올랐어 꽃의 울음이 박음질된 보라들의 눈시울을 뒤돌아보다, 나 몇 계절 이 물가에서 서럽게 서성일 것 같아
입적入寂
파고다들의 숲에 들었다
얼굴을 버린 대신
파고다들은 팔을 얻었다
엘로티크 잎사귀손가락을 흔들어
연신 바람의 향방을 가리킨다
무너지고 뒤틀린 탑의 기단에는
아직 새뜻한 종소리 쏟아지는데
탑신 속 어둠은 오래전 육탈되어
차안과 피안의 그늘을 허물었다
어느 장엄한 왕국이 거느렸던
황금빛 채색화였을까
누더기 적막을 가장자리로 두른
이 수굿한 풍경은,
열반涅槃
미얀마의 개들은 잠자려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오뉴월 개팔자’란 말도 무색하게 사원 불탑 밑에서 한쪽 귀를 납작 땅바닥에 붙이고 잠만 잡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도 백태 낀 혀를 내밀거나 귀를 세우지 않습니다 뼈가 다 드러난 목덜미를 들고 흘낏 쳐다보다 다시 잠에 빠져듭니다 마치 수행할 경전인 듯, 꿈속에서 열반에 이르는 무슨 비책이라도 전수 받는 듯 오후 두 시의 잠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폭염아래 자신이 개란 사실도 지워갈 목사리 벗은 저 잠은 내 잠속에 끼어든 편두통과 고소공포증보다 가벼울 것입니다 다음 생엔 미얀마의 개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내 욕망의 경전을 베고 사원 뒤편 벽돌처럼 구르는 잠의 발등을 핥고 또 핥을 것입니다
부겐베리아
이곳에선 부겐베리아꽃도 공손히 손 받들어 탑을 쌓는다 목이 달아난 부처대신 늙은 나무는 허물어진 불탑 앞에서 선홍빛 법문을 한 단 한 단 피워 올린다 처음 이곳에다 탑을 세웠다는 당신, 반듯한 이마 허공에다 대고 밤마다 천불천탑을 기도하더니 몰약 같은 묘비명 저 꽃판에다 철필로 아로새겨 놓고 떠났을까 유리궁 연대기속 뜨겁던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탑 그림자만 길게 꽃그늘 아래 눕는다
꽃이 뿜어낸 저 숨찬 선홍은 빨강이 농익어 무너진 색, 툭툭 핏줄 불거진 열망 같아 다가서기 두려운 색, 천년 동안 황량한 폐허 한 구석을 들끓게 하는 당신의 단단한 말씀이 긴 머리에 론지 다소곳 여민 채 그 옛날 언약 같은 꽃탑을 아슬아슬 올린다
얼음 판화
대기권 너머 몇 광년을 달려온 저 위험한 착지,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육각형 프랙탈들이 비행기창에 가득하다 만화방창, 정교하고 규칙적인 꽃눈을 틔워 낸 얼음꽃들 후, 입김을 불어본다 김이 닿기도 전 저쪽에서 스륵 방울져 내린다 얼음눈물이라, 느닷없이 당신을 울게 만들었던 옛 기억에 소스라치며 손가락을 뗀다 얼마나 오래 저 무늬는 결빙과 승화를 넘나들며 서로를 끌어안았을까 묽어진 슬픔의 한쪽이 스러지며 맑고 짭짤한 코흐곡선을 그린다 인공눈물로만 울 수 있는 핏발선 내 눈 속에 희디흰 눈꽃들이 피었다 눈부시다 잠깐 다녀간 매몰찬 그리움이 350,000피트 상공에서 다시 얼어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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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숙
- 2004년 《문학선》으로 등단
- 시집 『푸른 눈』
- chibohan@hanmail.net
아, 쉐지곤 파고다에는
수참새 한 마리,
말랑말랑한 대낮의 황금 햇살
슬쩍 물고 와
법당 안,
쪼르륵쪼르륵 종일 개금을 붙인다.
유독 볼륨 있는
한 부처의 힙 라인에
별나게 콕-콕콕 공덕을 쌓고 있는,
저 찬란한 아랫도리는 내세의 언제쯤일까.
간다마빤으로 피어나다
아웅산 묘소 옆
17명 명단 앞에 우리는 시계를 거꾸로 감았다.
알 수 없는 폭발음이 들리고
수류탄 파편들이
순간 멍게 여드름으로 벌겋게 박혀있다.
마하무니불탑 개금 붙이듯 싯누런 시간들은
이국땅에서 겹겹이 수십 년,
개금과 개금改金 사이를
해독할 수 없었던 X파일들이
오늘, 선명한 사진 한 장으로 인화되고 있다.
2015년 5월 13일 오후 6시 00분발
오탁번 외 절기시회 전사들은
그렇게 경건히 예를 올리고 있다.
저리 한 몸이었던 적 있었던가.
폭발물 잔해더미 속에서도
먼 길 찾아온 객客 고즈넉이 반기는
검은 꽃숭어리들,
미얀마 뙤약볕,
꽃대마다 뉘엿뉘엿
각혈한 핏물들이 날 것으로 피어오른다.
복날,
아난다 사원 불상 앞
거기, 비루먹은 개
혓바닥 길게 빼물고
똥 묻은 발바닥 천연덕스레 허공에 걸치고 있다
희멀건 배 드러내고
바람 솔솔 드나드는 통로를 독점해
게슴츠레 졸고 있다.
먼발치서 그윽이 웃고만 있는
붓다.
발
한여름 대낮,
방방곡곡 사원마다
남녀노소
공덕 쌓고 가는 길.
침 튀기며 파안대소하는
대문니 빠진
발가락과 발가락들
땅불에 자글자글 살 누린내 난다
메르스로 피폭된
대한민국의 6월,
열상 맨발로 공덕을 쌓고 돌아온.
우리는 지극히
안녕!
바닥론論
퍼붓던 지난 겨울눈들이
하늘의 바닥이었다는 걸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두꺼운 밑바닥을 다 쓸어내고 나면
뻥 뚫린 파란 구멍이 보였어
얼굴 깊이 묻고 엎드려 소리치면
빈 항아리 울음소리 같은 게 웅웅 귓전을 때렸어
하늘이 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누군가에게 속을 내보인다는 것
갈비뼈 한 대 뚝 떼어준 시린 옆구리 같았을.
새 발짝 하나 찍히지 않은 흰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누군가 들뜬 마음으로 환호를 질러댔어
또다시 눈이 내렸어
하늘 바닥은 어느새 콱 막혀 있었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거리와 골목은 눈 천지로 푹신거렸어
사람들도 슬슬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어
나도 어느 틈에 눈으로 뭉쳐진 돌멩이가 되어 있었어
자동차도 아파트도 거대한 흰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어
그들은 하늘의 두꺼운 바닥을 더욱더 견고하게 다지고
이제 저 속은 더욱더 깊어졌어
하늘을 삽질할 때마다 삽날에 돌멩이가 걸려 나왔어
나도 걸려 나오고
내 아는 누군가도 삽날에 이마가 찍혔어
이젠 쟁글쟁글한 하늘이라고,
그런데 그 두꺼운 바닥이 지금 새고 있어
점점 침몰하는 중이야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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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분
- 2005년 《시안》 으로 등단
- 시집 『그대를 듣는다』 등
- chrom21@hanmail.net
고수레
눈두덩이 붉다 주먹만 하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여름 내내 피고 지는 목백일홍처럼
첫 황사가 불 때부터 싹수를 보이더니
여름이 다되도록 졌다 폈다한다
용서하지 않은 죄가 밑거름이 된 것일까
만든 삼시울이라 폭로하고 싶은 걸까
불가사의의 응전으로 알약을 삼켰는데
참패다, 빤하다 다시 올라온다
잘못 바른 아이 쉐도우처럼
미얀마에 가면,
수그러들 거라는 기대감의 뿌리는
어디다 흡기를 대고 수액을 빨고 있나
탁발승들의 붉은 가사를
화살로 내리꽂히는 햇빛을
피부과 레이저광선쯤으로 여긴 걸까
죄든 독이든 녹일 거라고
게 껍질처럼 뻣뻣해진 눈두덩이
경옥고 병을 깨뜨렸다
여행은 수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기조항을 어겼다는 걸 알게 함인가요?
탑승 댓 시간을 앞두고
‘깨지다’ 동사에 ‘만약’이란 부사가
불온하게도 힘 자랑 한다
마음에 안 들면 병이 나던 여인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숫한 때가 있었다
그럴 것까진 없는데 어느 결에 그녀를 추종하는 몸,
체기가 땅거미처럼 피어오르는 공항대합실
명치에서 자란 그림자를 포박하여 바늘로 딴다
뽑은 한 방울 피를 허공에 먹인다
우화의 꿈
내일은 푸른 구름 뒤에 숨은 달, 나는 내일을 사랑하였네 내일은 별이 총총 뜨고 어렴풋하여 더욱 사랑하였네 코끝에 전해오는 내일은 캄캄한 한밤에도 공기가 맑디맑다는 걸 나는 알았네
무엇보다도 구불구불한 뇌腦와 구불구불한 창자가 사랑하였을 것이네 내일의 나라는 오늘을 잡아먹으며 창대해졌고 오늘은 늘 벗은 발로 걸어야 했네 이따금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귀를 씻으며 심약한 오늘의 몸뚱이를 붙들며 울고 말았네
흙이든 대리석이든 불판처럼 달궈져서 맨발은 뛸 수밖에 없네 화급히 뛰어 내일에게로 갈 수밖에 없을 테지 오늘이 내일의 이마와 부딪히는 자정이면 늘 반전이 일어났지 새로운 숫자로 갈아입은 내일은 정색을 하였네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어디가고 내일만 있는 걸까 눈 뜨고 나는 숨바꼭질 하네 아! 장독대, 어머니의 장독대 정화수 그릇에 든 달, 여기 사라수의 뿌리를 적시는 만달레이 이라와디 강에도 떴네
탁발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는 내게로 오지 않았네
열 살 소년이 다가와 부겐베리아 표정을 지었네
꽃은 늘 감동적이고
물낯에 비친 탑의 상층부가 스스로 신비로워지듯
강변아이들도 저절로 터득하였을 것이네
성별이 다르면 호의적일 수 있다는 그런,
탑의 열망은 크레바스처럼 군데군데 벌어져
소년이 내민 손을 잡아야 했네
‘예뻐요’ 불안이 스치는 남자의 시선으로 말했네
흙길을 레드 카펫인양 걸으며
팔걸이를 해주는 남자의 몸짓으로 이끌었네
둥치가 굵은 나무에 핀 꽃이 내려다보고 있었네
허물어져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탑의 사연은 길고
폭염을 헤집고 불어오는 바람에게
원 달러를 받았네
인레 호수
-Prayer
낡은 카누를 타고 저 멀리 소실점까지 가야 했네
보석이 비처럼 쏟아져 무릎까지 찼다는 곳은 아닐 것이네
물살을 가르는 모터의 속력만큼 바람이 일었을 것이나
물 위에 떠있다는 건 손바닥의 운명선을 달리는 일
그때 내가 듣던 음악은 ‘기도’였다네
곡이 끝나고 이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잠깐 동안
나의 호흡도 멈추었을 것이네
자동으로 재생이 되지 않는다면
기도가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숱한 반복이라면
매번 재생버튼을 눌러야 목숨이 연장된다면
기도가 고기 잡는 어부의 하루치 노동이라면
불상을 잃어버린 곳의 표식 탑은 높았네
스콜이 한 차례 다녀가고 해는 기울어
호숫가사람들이 풍경 속으로 젖어드네
어딘가에서 종소리 울릴 듯하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 노을이 눈부셨을 것이네
노 젓는 발과 물질하는 손, 그것은 제의 같았네
흙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제 물에 피는 옥잠화조차
물비늘을 햇빛으로 닦아 윤을 내는
호수의 저녁이 기도를 닮아 희디 희었네
생리통
암벽을 타다 온 날은
버스가 급커브를 돌 때 한곳으로 쏠리듯
새총에 조준된 돌멩이 날아가듯
튕겨져 네게로 날아간다
애초에 향방 없이
애초에 과녁 없이
물수제비를 뜨다가 가라앉는 돌멩이다
발 디딜 때마다
체중을 지탱할 돌출부를 찾아
있는 힘껏 몸을 밀어 올리라는 수직의 요구,
낭떠러지 아래 수평은 태평스러운데
수평을 벗어난 만치나
수평으로 되돌아가는 건 위험하다
암벽을 타다 온 날은
사연이 사라진 사랑이 노래가 되듯
슬픔은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듯
앙상하니 네게로 가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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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
- 2008년 《시로 여는 세상》 으로 등단
- ssesie7@hanmail.net
발바닥 경전經典
발바닥은 사람의 몸에서
가장 평평한 곳
평평해서 이곳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승려들의 붉은 장삼 아래로 보이는 맨발
발등은 검고 발바닥은 희다.
폭염 아래 쉐다곤 파고다의 대리석 바닥은 신이 내려 준 아랫목이다. 사원을 걸을 때는 누구나 맨발이라야 한다. 아랫목에서 누군들 신발을 신겠는가. 뜨거운 바닥 위를 걷는 종종 걸음은 불립문자不立文字다. 문맹으로 경전을 읽으라는 부처의 배려다.
신발을 벗어놓고 다닌 며칠
발바닥의 깨달음이란 때로 민둥머리의 깨달음을 앞지른다.
발바닥 고행,
맨발은 불경不輕이 아닌 불경佛經
마치 배고픈 부처가 가난한 중생에게
발바닥이라도 내 놓아라!
궁핍한 탁발 같은 맨발들
부처가 앉아있는 반석 같은 흰 발바닥
발걸음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그늘의 뒤축이 보인다.
기다릴게요
기다린다는 말은
아주 먼 과거에서 온 듯한 말이다
미래까지 따라오지 않고
거기서 기다린다는 말
어느 시간에 등 기대고 서서
저녁땅거미를 발로 지우고 있다는 말
기다리는 기슭이 있다
출렁거린 마음이 닿는 곳은 모두 고마운 곳이다
몇 번의 생 이전에
내가 떠났던 일이 있을 것 같은 밍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여자 아이 하나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남루한 배를 맞이한다
곁에 바짝 붙어 부채를 부쳐주며 졸졸 따라다닌다
웃는 얼굴에
흰 웃음이다
밍군파고다에 들어갈 때
내 신발을 들고 서툰 한국말로
여기서 기다릴게요.
아이에게 신발 맡겨 놓고
기다린다는 말 입구에 세워 놓는다
맨발로 얼마나 먼 시간을 걸어야 하나
잠시 사원을 돌다 나왔을 뿐인데
아직도 내 신발을 들고 있는 아이.
그새 신발은 작아졌거나 낡았을 것이다
맨발이라는 말은 믿지 못할 말
나는 맨발을 믿지 않는다
기다린다고 했는데 혼자 온 듯하다
섞이는 저녁
지명들은 어떤 윤회로 섞이는 것 같다
미얀마 양곤에는
한강공원 수영장 광나루 340
정안 휴게소 환승 차량
용호동에서 성북고개 22
수유리와 미아리를 오고가는 버스가 지나간다
이 한글 행선지들은 중고의 윤회다
목적지 없이 행선지만 떠도는 일이
무더운 순례인 듯
차가 흙구덩이를 지날 때마다
부처의 말들처럼 덜컹거린다
때때로 목적지들은
저녁과 저녁을 오고 간다
언젠가 수유리행 막차를 타고
두근거리는 일이
시공을 건너와 잠시 울렁거진다.
덜컹거리는 길은 가득하던 것들이
사라졌거나 비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두근거리다 못해
덜컹거리며 걸었던 길들이 지금은
편편하고 무료한 길이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노선이
지명을 찾아 떠돌고 있듯
저녁과 저녁들이 섞이고 있다
이끼들의 정교함
쓸모없는 주변이 모이면
쌓이는 곳이 되고 쌓이면 탑이 된다.
가령, 지구의 나무들을 모두 탑이라 치면
나무들은 숲을 쌓고
산이 된 일이다.
밭에서 주워낸 돌로 탑을 쌓은
아버지의 염원에 파릇한 이끼가 한창이다
이끼들은 참 정교하다
헐렁하게 쌓인 돌들을 하나로 이어 붙인다
그렇지만 깨져 흩어진 돌이
한 무더기로 다시 모인다 해도 바위가 되지는 못한다
오합지졸이 한데 뭉쳐진 사이
잠시 한눈판 천지의 궁금증이다
시작은 미약하고 끝은 무더기가 되었지만
그냥 모아두면 무더기가 되고
그 틈을 메우면 탑이 된다
끝이 좁아지지 않는 탑은 없다
아버지는 어떤 소로小路의 끝에다
바르르 떠는 꼭짓점을 찍고 싶었을까
미얀마에서는 내세를 위해 탑을 쌓았다는데
아버지의 척박한 경작이 고단한 탑 쌓는 일이었다면
자식은 빈 옥수수 대궁마냥
휘청거리는 빈 탑이겠다
곡식은 가벼워서 마냥 쌓이지 못한다
수십 년 씨 뿌리고 거둬들이는 빈 밭
소출 늘리려 골라낸 저 사소한 틈틈이들 쌓여
무더기의 시간이 지나
이끼들만 정교한 탑 하나 남았다.
시차 속에서
감탄사와 구름을 지나왔을 뿐인데
높은 곳으로 이륙했다 다시
낮은 곳으로 착륙했을 뿐인데
전혀 낯선 시차 속에 있었다
황산에 도착한 날 짐을 풀면서
밤새 폭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새해,
어지러운 시간을 지나온 것도
독주를 마시며 취하는 것도
딱 한 시간의 시간 안에 있었다
섣달 그믐날에 피는 꽃이 있다는 이야기
요란한 소리와 연기만 피우고
사라지고 마는 꽃이 있었다는 목격
거리의 상점 앞마다 온통
붉은 꽃잎이 떨어져있다
시차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 시간을 지나왔거나 한 시간
뒤를 돌아갔거나 했을 뿐인데
숨을 쉴 때마다 중국술 냄새가 났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흥정을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꺼져 간 그믐밤도
시차 속으로 사라졌다
똑같은 얼굴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얼굴들과 내 얼굴이
딱 한 시간 시차로 달랐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