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자 註
조선원정 미국군이 '원시무기'라며 한없이 업신여겼던 조선의 주력무기 '화승총' . 그러나 화승총을 쥔 강화도방어 조선군은 라이플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미국 침략군에 맞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군은 "조선 땅에서 적군에게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 손가락 물집이 잡히도록 화승총 실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미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강화 조선군의 화승총 투혼(鬪魂)에 경외감까지 드러내며,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병사들마저 생겨났다. 미함대와 미군이 전쟁에서 승리 했음에도 '조건없는 강화도철수'를 결정하기까지는, 화승총에 담긴 강화도수비 조선군의 옹골찬 정신(精神)이 한 몫을 했다.
1871년 강화도의 한미전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한 조선측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 거의 유일하다. 여기에는 조선조정에 보고된 각종 정보보고와 고종임금의 하교(下敎; 가르침) 그리고 중신들과의 어전회의 기록이 남아있다.
강화도전쟁의 빌미가 됐던 1866년의 대동강 제너럴셔먼호 화공 학살사건에서 1871년 광성보전투에 이르기까지, 실록에 기록된 관련내용들을 발췌해 여기에 소개한다. 옛스러운 어투와 어려운 단어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필자의 해설을 곁들이거나 쉬운 말로 고치는 의역(意譯)과정을 거쳤다.
|
■ 조선왕조실록(고종임금편)과 '신미양요'
▲ 1898년 미국인 화가 허버트 보스(Hubert Vos)가
그린 고종임금(1852-1919, 재위기간 1863-1907)의
유화작품 어진(御眞; 임금님 초상화)
1. 전쟁의 발단 : '제네럴셔먼호' 화공(火攻)사건
* 1866년 7월11일(날짜는 음력) - 제너럴셔먼호, 평양의 대동강 신장포구까지 진입
이양선(異樣船) 1척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정박. 평양서윤(平壤庶尹; 평양부의 종4품 관리)이
술시(戌時; 오후7시-9시 사이)쯤 그곳에 가니, 이양선은 이미 평양부의 신장포구(新場浦口)로 옮긴 뒤였음.
* 7월12일-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통상을 요구함
평양서윤이 진시(辰時; 오전7시-9시 사이)에 신장포구에 가서 문정(問情; 정황을 물음)하니, 자신들은 서양인으로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말고 딴 목적은 없다고 함. 서윤은 “무역은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며, 지방관 마음대로
허가해 주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대답함.
선원중 한 사람인 토마스(崔蘭軒; Thomas, Robert Jermain)는 “조선은 왜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는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종교다” 라고 했다. 서윤은 “그 종교는 우리나라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들어와 마음대로
포교하고 우리 백성들이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대답해 줌. 토마스는 또 “프랑스의 큰 배가 이미 한양에 갔는데
(1866년 한강 양화진 침공사건), 우리 선박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했다.
서윤은 “큰 배가 수도에 갔다고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없다. 당신 배는 언제쯤 철수할 거냐?”고 묻자
서양인들은 대답대신 머리만 끄덕였다. 서양인들은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얻은 식량과 찬거리로 며칠을 버텼는데,
쌀과 고기, 계란(鷄卵)과 시목(柴木; 나무땔감) 등을 도와주기 바랍니다” 요청을 해 와 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너그럽게 대하는 게 도리여서 “쌀과 고기 등을 공급해 주었다”고 했다.
12일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사이)경 6명이 작고 푸른색 배(제너럴셔먼호에 싣고다닌 소형보트로 추정)를 타고
물깊이 탐지를 위해 대동강 상류까지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 때 쯤 되돌아 옴.
* 7월13일- 제너럴셔먼호, 만경대 아래 정박
인시(寅時; 오전3시-5시 사이)에 이양선이 출발해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 닿아 정박.
* 7월18일- 제너럴셔먼호, 선내에 조선군 억류 구금
평양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 조정에 올리는 상황보고)에 따르면, 7월18일 큰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7월19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사이) 쯤 6명(鳴)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중군(巡營中軍; 평양지방편제 조선군)은 감시를 위해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라 감. 그때 서양인들이 갑자기 다가서더니 우리군사가 탄 배를 끌어갔고 배 안에 억류함. 평양부 서윤(庶尹)이
그들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 깨닫도록 타이름)하였지만, 끝내 군사를 돌려보내지 않음.
* 7월19일- 제너럴셔먼호, 함포사격으로 조선군과 교전
사시(巳時; 오전9시-11시 사이) 쯤 이양선이 출발해 대동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
큰 대포, 함포를 의미)와 조총을 마구 쏘아 댐. 황강정(黃江亭) 앞에 배가 닿자 이양선은 그곳에 정박함. 그 후
서양인 5명이 작은 푸른빛 배를 타고 물 깊이 탐지를 위해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그때 평양성안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라”며 소리 높여 외침.
그러자 서양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대답했고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돌을 마구 던졌다.
또 대동강변에 있던 조선군 장교와 나졸들이 활이나 총을 쏘아대는 등 조선군의 위세를 과시함. 그러자 서양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 정박하였음. 7월19일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사이) 쯤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 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 돌아왔다.
* 7월25일- 평양시민 공격으로 7명 피살, 부상 5명 발생
평안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 조정에 올리는 현장보고서)내용.
“평양 방수성(防水城)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 조선사람 7인(人)이 피살되고
부상자가 5인이나 됐습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너그럽게 대하고 좋은 뜻으로 타이르고 식량도 넉넉히 주어
도왔는데, 갈수록 더욱더 포악한 짓을 자행했습니다"라고 보고.
박슈수는 또 “처음에는 중군(中軍)을 잡아 억류하고, 나중에는 백성들에게도 상해를 입혔으니 저대로 날뛰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모두 무찔려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했다. 고종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했다.
* 7월27일- 성난 평양군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지르고 선원 모두를 때려죽임
평안감사 박규수의 장계.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미쳐 날뛰면서 포와 총을 쏘아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火攻; 불지르는 공격)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崔蘭軒; Thomas, Robert Jermain)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江岸)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달려들어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중군(兼中軍)인 철산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했다.
* 8월8일- 불탄 제너럴셔먼호를 뜯어 고철 등을 수거함
평안 감사 박규수의 장계.
“평양부(平壤府) 방수성(防水城) 앞 여울에 정박해 있던 이양선(異樣船) 1척과 그 기계들과 잡다한 물건들을 몰수하여
함께 불태워버린 다음, 배에 장치한 것들이나 무기 같은 철물이 녹쓸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적간(摘奸; 샅샅이 뒤짐)하여
감영의 무기고에 거두어들여 앞으로의 일에 보태쓰도록 하였습니다. 창고에 입고시킨 수량은 대완구(大碗口; 큰 대포)와
소완구(小碗口; 작은 대포) 각 2좌(坐), 대완구환(大碗口丸; 큰 포탄) 3개, 철로 만든 닻 2개, 크고 작은 철사고리로
연결한 쇠고리줄 162파(把; 1파는 약 1.8m), 서양철 1,300근(斤; 1근은 375g), 장철(長鐵; 쇠막대) 2,250근,
잡철(雜鐵) 2,145근입니다.” 했다.
2. 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의 시말(始末)
▶ 제1차 강화도침공
* 1871년 4월3일(날짜는 음력) - 미국함대 5척 남양만에 정박
수원유수(水原留守) 신석희(申錫禧)가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사이) 쯤 이양선(異樣船) 5척이
서해안 풍도(楓島; 현재의 경기도 안산 앞바다) 뒷바다 북쪽 남양(南陽) 경계에 정박했습니다” 보고.
* 4월5일 - 함대 4척이 남쪽바다의 배리도 안쪽에서 정박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사이) 쯤에 이양선 4척이 남쪽 바다 배리도(排李島) 안에 정박. 배리도는 풍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조선수군이 따로 감시한 섬이었음. 영리한 장교를 차출해 풍도와 배리도 두 곳에 파견해 감시를 계속함.
* 4월7일 - 미국함대 5척 인천남방 팔미도 부근에 출현
영종방어사(永宗防禦使)가 “미시(未時; 오후1시-3시 사이)에 이양선(異樣船)이 닻을 올려 팔미도(八尾島) 동남쪽
남양(南陽) 경계의 연흥도(延興島) 앞나루 방향으로 내려갔으나, 먼지바람에 가려 정확한 정박지는 불명입니다” 보고.
* 4월8일 - 미국함대와 조선관리의 첫 만남, 건빵 등을 선물받았으나 되돌려 줌
삼군부(三軍府; 오늘날의 국방부)에서 용매진(龍媒鎭)에 포군(砲軍) 40명을 배치함. 영종방어사(永宗防禦使)가
“오시(午時; 오전11시-오후1시 사이) 쯤 이양선(異樣船) 작은 배 4척이 동쪽과 서쪽 물깊이를 쟀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본영(本營; 영종진) 관할구역 마지막 경계지점인 물류도(勿溜島; 작약도) 뒷바다를 지나
부평(富平; 현재의 인천앞바다) 경계에 정박했는데, 영종진과의 거리는 7리(里; 약2.75km)입니다.” 보고.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는 “남양부사(南陽府使) 신철구(申轍求)의 첩보(牒報)를 받고 상황을 알아보려
화량첨사(花粱僉使)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자 바다 가운데서 세찬 바람이 일어 항해가 불가해 제부도(濟扶島)로
물러나 정박했는데, 양선(洋船)의 종선(從船; 큰 배에서 보낸 보트) 3척(隻)이 다가오기에 손을 흔들어 불렀더니
종선이 잠깐 멎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글을 써서 보였더니 그들 서너 사람이 배에서 육지로
뛰어내렸습니다. 또 글을 써서,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물었더니, 그들은 웃으면서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또 언제 우리나라 지역에 왔으며, 배는 몇 척인가? 물어보니, 그들이 서양글자를 써서 보여주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무엇을 그리고 또 손을 들어 큰 배가 있는 곳을 가리켰는데 함께 가서
대화하자는 모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연합(鉛盒; 납으로 만든 상자) 1개(箇)와 소도(小刀; 주머니칼) 1병(柄; 자루),
건병(乾餠; 말린 떡, 건빵) 1탁(橐; 전대 주머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환급(還給; 도로 돌려줌)하였더니
건빵 주머니는 받지 않고 그냥 큰 배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사람들 얼굴모양은 눈이 움푹하고 콧마루는 높으며 눈썹과 머리털은 누르스름하고 옷은 모두 검은 색깔로 확실히
서양사람이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일 다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보고.
* 4월9일 - 미국함대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원한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힘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의 추가보고.
"사시(巳時; 오전9시-11시 사이)에 조수(潮水; 물때)를 이용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와 화량첨사(花梁僉使)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지만 양선(洋船)이 정박한 곳에 가기도 전에 사나운 바람이 불어 되돌아 옴. 양선의 종선(從船; 보트)
3척(隻)이 바람을 무릅쓰고 왔으므로 급히 가보니 서양사람 3명(名)이 뛰어내림. 그 중 한 사람은 얼굴로나 말씨로 보아
틀림없는 조선사람이었음. 다음은 그를 문정(問情; 구두 탐문)한 내용임.
- “당신들은 어느나라 사람이고 왜 여기에 왔는가?”글로 써서 물었더니
“글을 몰라서 글로 답변할 수 없다”라며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고는
“혹시 중국말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어서 “없다”고 대답하니
“장사(무역)하러 여기에 왔으니 사람을 죽이는 사단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대답.
- 또 “배는 몇 척이냐?”고 물었더니
“5척”이라고 했으며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으니 “며칠 내 북쪽으로 간다.”고 대답함.
이어서 “돼지, 닭, 계란, 물고기를 살 수 있느냐?” 물어서 “없다.”고 대답함.
- 더 이상 질문을 하였으나 그들은 뿌리치고 타고 온 종선에 올라 타 양선으로 돌아감. 대화하는 사이 잠시 살펴보니,
3척의 배 안에는 서양사람 47명이 있었음. 무리들이 바닷가를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매우 걱정되어
방어대책에 대하여 특별히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고, 그들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라고 보고.
- 편지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음.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 전권공사)은 미국의 중국주재대사로서 조선과의 통상수교 전권공사로 위임받은
프레데릭 로(Frederick F. Low)이며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흠차대인과 제독대인<提督大人; 미 해군제독 로저스(John RodgersⅡ)>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 4월10 - 미국의 협상제안에 조선조정은 대책마련에 골몰
- 의정부(議政府; 행정최고기구)에서 임금께 제안.
“이양선(異樣船)이 조선 근해에 머문지 벌써 여러 날이 됩니다. 9일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장계(狀啓)를 보니,
남양부사(南陽府使)가 가서 사유를 물어보려고 합니다”라며 “그 곡절을 상세히 물어야하니 사역원(司譯院)에서
통역업무에 밝은 역관(譯官; 통역관) 몇 사람을 선정하여 보내겠습니다” 하니 고종임금이 윤허하였다.
-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인천부사(仁川府使)의 첩보(牒報)에 따르면, 오늘 진시(辰時; 오전7시-9시사이)에
미국 배가 팔미도(八尾島)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작은 배 4척이 일제히 인천부 경계지역 바다로 오므로 부사가 언덕에
올라 살펴보니 인천과 안산(安山) 경계에서 수심을 재고 있었다고 하며, 사나운 바람과 파도에도 거침없이 오가는 것을
보아 매우 심상치 않다”고 보고.
또 “그들의 배 5척(隻)이 오늘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사이)에도 부평(富平; 현재의 인천) 경계의
호도(虎島; 영종도부근 작은 섬) 앞바다에 그대로 정박하고 있는데, 이범선(二帆船; 돛대가 둘)이 2척이고
삼범선(三帆船; 돛대가 셋) 3척이며, 삼범선이 제일 컸다고 합니다.
- 배에 대해서 의주(義州)사람들이 목격한 바 있는데, 내부는 4층으로 만들고 층마다 15칸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4장(丈; 약 12m)이나 된다고 합니다.”라고 보고.
- 의주통사(義州通事) 3인(人)이 본읍(本邑)의 아전 김진성(金振聲)과 함께 문정(問情; 정황을 물음)한 다음 그들이
답변한 사연과 받아온 물건 이름은 모두 책으로 만들어 올려 보내며, 물건은 문정관(問情官; 문정담당관)이 직접
운현궁(雲峴宮)에 바쳤고, 통보해온 책은 별지(別紙)에 베껴서 밀봉하여 올려 보냅니다.“보고.
- 책의 내용는 대략 다음과 같음.
“서양 배는 미국 군주가 전권공사로 파견(欽差)한 대사를 태우고 왔으며 조선조정과 중요한 문제를 협상하려고 함.
미국의 전권공사는 반드시 조선조정의 높은 신분을 가진 관리와만 협상할 것으로 깊이 믿고 있음. 조선측 관리가
파견돼오면 미국 전권공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해 줄 생각임. 그것 때문에 여러 날 동안 선박에 머물면서
조선조정에서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음. 며칠내 모선(母船)에 딸린 배들을 바다위쪽으로 보내 바다형세를
조사하여 큰 배가 올라갈 수 있겠는지를 판단하려 합니다. 해안가 백성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놀라지 않게 하시고,
피차간 예의로써 서로 대우할 것을 바라며 미국은 절대로 조선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사단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4월12일 - 미국전함의 크기에 놀란 영종방어사의 보고
영종방어사(永宗防禦使)의 보고.
“오늘 미시(未時; 오후1시-3시 사이)쯤 양선(洋船) 5척(隻)이 일제히 닻을 올리고 올라와 영종진 본영(本營) 경계를
지날 때 자세히 살펴보니, 맨 앞에 선 이범선(二帆船) 1척은 길이가 거의 40파(把; 약 72m)에 가까웠고 그 다음 이범선은
전날 다니던 그 배였으며 세 번째 삼범선은 길이가 50파(약 90m)에 가까울 듯 했습니다. 물위로 드러난 좌우
삼판(杉板; 삼나무 널판, 배의 갑판)의 높이는 4장(丈; 12m) 가량 되었습니다.
네 번째의 삼범선은 세 번째의 삼범선과 거의 같았으며, 다섯 번째의 삼범선은 길이와 물위에 드러난 높이가 네 번째
배보다 약간 길고 높았는데, 배 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그 길이를 자세히 살필 수 없었습니다. 배의 돛 사이에는
층층으로 깃발과 북을 매달았는데 바람에 흔들거렸습니다. 맨 앞의 배는 부평부(富平府)의 끝 경계선인 호도(虎島)
앞바다에 정박했고, 나머지 양선 3척은 일정한 간격으로 정박하였으며 5번째 배는 본영 경계의 끝 경계선인
물류도(勿溜島; 작약도)와 부평부의 첫 경계에 정박했습니다. 첫 배로부터 다섯 번째 배가 정박한 곳까지의 사이는
불과 2리(약 786m)쯤 되었습니다. 5번째 배가 닻을 내릴 때 한방의 대포소리가 났습니다."
* 4월12일 - 강화도방어 조선군 무력증강과 미전함의 1차 강화해협 침공
- 삼군부(三軍府; 오늘날의 국방부) 보고.
“양선(洋船)이 강화도(江華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하였는데 그 의도를 모르겠지만, 방어에 더욱 더
주의를 할 것입니다. 강화도에 군사와 군량을 더 보내야 되는데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보군(步軍) 2초(二哨; 250명),
화약 1,000근(斤), 쇠뇌(手弩弓; 철제 석궁) 10장(張)과 화살 300지(枝), 별파진(別破陣; 화약무기를 다루는 군대조직)
300명(名)을 보내고, 금위영(禁衛營)에서 보병 1초(125명), 화약 1,000근, 쇠뇌 10장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지,
별파진 10명을 보내며 어영청(御營廳; 조선 5군영가운데 하나)에서 보병 1초, 화약 1천근, 쇠뇌 10장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개, 별파진 10명을 보내고, 총융청(總戎廳; 5군영가운데 하나)에서 아병(牙兵; 본영의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 1초,
불랑기(佛狠機; 16세기 유럽에서 전래된 후장식 대포) 30문과 거기에 딸린 탄환 2,000개(箇), 대포 3좌(坐),
화약 1,000근을 내려보내며 4개 영(營)의 보군 각각 1초는 새로 임명된 중군에게 맡기고 훈련도감의 보군 1초는
새로 임명된 판관에게 맡겨 곧 출발시키되 단단히 통솔하여 임기응변하도록 하며, 군량 1,000석(石)은 호조(戶曹)
창고에 있는 미(米)에서 획송(劃送; 기획발송)하되 주교사(舟橋司; 한강에 배다리를 만드는 부대)에서 배로 운반” 함을
보고하니 고종임금이 윤허.
-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의 보고.
"통진부사(通津府使) 보고에 따르면 좀 작은 이양선(異樣船) 2척(隻)이 4척의 종선(從船; 작은 보트)을 거느리고
오늘 미시(未時; 오후1시-3시 사이)쯤 곧바로 손돌목(孫石項; 강화 광성보아래 물굽이 진 곳)쪽으로 향했으므로
광성진(廣城津)에서 먼저 대포를 쏘았습니다. 부사가 이어서 약속한대로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니,
그 배들도 대포소리를 듣고 대포를 마구 쏘면서 거침없이 손돌목을 지나갔습니다. 요해지(要害地; 군사요새)로는
손돌목 만한 데가 없고 방어대책도 미리 세웠지만 초기에 격침시키지 못하고 놓쳐버렸으니 군사작전상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4월15일 - 인천지역 경계강화와 1차 교전 후속보고
- 삼군부(三軍府) 보고.
“인천(仁川)은 양선(洋船)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직접 통하는 길이므로 여기에 군사를 더 늘여 방어하고 계엄상태도
한층 더 엄하게 해야합니다.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사 1초(哨; 125명)와 수어영(守禦營; 성을 지키는 군대조직)의
별파진(別破陣; 화기부대) 50명(名)을 인천부사(仁川府使) 구완식(具完植)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서울 군영에게는 삼군부에서 비밀 계(啓; 작전명령서)로 군사를 동원시키며, 지방 군영들에게는 비밀리에
병부(兵符; 군대동원 나무표찰)를 발송하고 거행할 것입니다. 화약 1,000근(斤)과 탄환 1만 5,000개는 각 군영의
보유분으로 분배하려 합니다.” 하자 고종임금이 “병부를 발송할 필요없고 비밀 보고서만 가지고 삼군부에서
조용히 군사를 동원시키라”고 하교.
-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의 보고.
“통진부사(通津府使) 보고에 따르면, 저들 배들이 광성진(廣城津)에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성(城)을 향해
대포를 수없이 마구 쏘았으며 곧 모든 배가 도로 내려가다 손돌목(孫石項)에 이르러 또 대포와 조총을 쏘아댔는데
탄환이 빗발치듯하였습니다. 덕포(德浦)의 포군(砲軍) 오삼록(吳三祿)이 대포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그 배들은 차츰 내려가더니 전과 다름없이 호도(虎島; 인천 영종도 인근의 섬) 앞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보고.
* 4월16일 - 어재연장군 광성보도착, 진지투입
- 진무사(鎭撫使; 해상경비부대 진무영 대장) 정기원(鄭岐源)의 보고.
“이양선(異樣船) 이범선(二帆船) 2척(隻)과 작은 배 4척이 항산도(項山島; 인천앞바다 남쪽의 섬으로 추정)로
물러간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馳啓; 후속보고)하였는데, 중군(中軍) 이봉억(李鳳億)의 치보에 의하면
지난 14일 술시(戌時; 오후7시-9시 사이)경 이양선이 우리측 검문도 받지않고 손돌목(孫石項)으로 불시침입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불법침입이므로 부득이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일제히 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탄환이 소낙비 쏟아지는 듯하였는데 이양선에 명중한 탄환수는 알 수 없으나 배의 판자가 서너 조각
파손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배를 나포하려 할 무렵에 이양선은 대포를 쏘면서 곧 퇴각했는데,
아마도 겁이 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양선이 항산도(項山島)로 곧바로 내려갔다가 도로
응도(鷹島; 영종, 용유도의 인근 매섬)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보고.
- 정기원은 또 "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위경군(衛京軍; 수도방위군)을 거느리고 16일 광성보(廣城堡)에 도착하여
진지로 나갔습니다." 보고
* 4월17일 - 수도권일대 경계강화, 대원군의 미국함대 친서발송
- 삼군부(三軍府)의 보고.
“남양부(南陽府; 인천아래 남양만)에 별포군(別砲軍; 화포, 조총편제부대) 100명(名),
장단부(長湍府; 황해도 장산곶인근)에 별포무사(別砲武士) 200명, 고양군(高陽郡)에 포수(砲手) 70명,
가평군(加平郡)에 포군(砲軍) 20명, 양천현(陽川縣; 한강하구 김포군 동부, 지금의 서울 양천구 인근)에
포수(砲手) 43명, 문경현(聞慶縣; 경상북도 북부)에 포군 50명을 설치하였습니다.”
* 4월17일 대원군이 진무사를 통해 미국함대에 보낸 친서(요약)
"굳이 협상할 필요가 뭐 있나, 각 나라가 서로간 예의를 지키고 잘 살아가면 될 것 아닌가?"
▲ 고종임금님의 아버지로, 당시 미성년인 임금을 대신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올해 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 외교공문)을 보내왔는데 미국사신의 편지도 포함돼있어 조선조정에서 이미 의논하고 그 회답을 자문 으로 보내며 귀 대인(미국의 로우 전권공사)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미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나다고 들었고, 전권공사도 사리에 밝아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먼 바다 건너서 조선까지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상하는 일은 없었다지만, 누군들 의심하고 괴이쩍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침입 못하게 하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이니 처지를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 귀선(貴船; 미국함대)이 우리 강화해협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서로간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서로간에 호의로 대하자고 이미 말해놓고서, 한바탕 이런 사단이 생겼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나서 조선 경기도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입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방비가 임무인 신하들이 어찌 가만히 손놓고 있겠습니까?
지난번 강화도 조선군 선제포격은 괴이하게 생각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조선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副本; 원본을 복사한 참고자료)을 보내니 전후사정을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조선이 외국과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500년간 조종(祖宗; 모든 임금)이 지켜온 확고한 법이며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청나라 황제도 이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귀국(미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어떤 일이나 문제를 막론하고 애초부터 협상할 문제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가 서로 만나고 그 일 때문에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넓은 천지에서 모든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고 모두가 자기나름의 생활을 이루어갑니다. 동방이나 서양 국가들은 각기 자기나라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본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않고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대인(전권공사)이 어찌 이런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느라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며,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나마 여행에 필요한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이 땅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
* 4월 22일 - 미국측 회신, 고위관리 파견을 재차 요구
대원군의 친서에 대한 미국측 회답.
<중국인 총판두(總辦杜; 번역담당관) 덕수(德綏)가 작성>
“며칠 전 대원군이 파견하여 미국측에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은
군주(미국 대통령)가 파견한 제헌(提憲; 로 전권공사)에게 전했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의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조선조정이 미국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있어
우의있는 협상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미국 배를 공격한 것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비호하고 변경을 방어하는 신하의 직책으로서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미국 전권공사는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 점을 바로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모두가 바라는 대로 고위관리를 파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측은 서두르지 않고 기일을 늦춰가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조선조정에서 3, 4일 이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뒷일은 전적으로 우리 제헌이 처리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합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며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은 돌려보냅니다.”
▶ 제2차 강화도침공(광성보전투)
* 4월23일 - 광성보 함락 보고
- 진무사(鎭撫使; 해안경비 진무영 대장) 정기원(鄭岐源)의 보고.
“통진(通津)에서 적(미국 상륙군)의 괴수가 북쪽으로 강화 대모산(大母山)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육지로
대포를 실어다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마구 쏘아대고 소총도 일제히 사격해댔습니다. 미시(未時; 오후1시-3시 사이)에는
적의 괴수가 광성진(廣城津)으로 꺾어 들어가 성과 돈대(墩臺)를 포위하였습니다. 광성진에서도 일제히 조총을
쏘아대어 한바탕 혼전을 벌였는데, 한참 뒤 광성진은 붕괴되고 적들이 광성진의 위아래 돈대를 점령했습니다.
덕진(德津)에 정박하던 적선(賊船; 미국전함)도 광성진을 향하여 기동하므로 손돌목(孫石項) 남성두(南星頭)에서
연이어 대포를 쏘니 적선도 닻을 내리고 대포를 무수히 난발하여 손돌목 성이 거의 파괴됐습니다. 적들은
광선진을 탈취하고 그곳 진사(鎭舍; 진영본부 건물)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벙거지(조선시대 군모)를 실어갔습니다.
그리고 손돌목을 내려다보니 성안에서도 대포를 쏘았습니다. 바다와 육지로 공격해오니 소수의 군사가
서로 의지하여 무기를 사용할 곳이 없었고, 좌우가 이미 서로 의탁할 형편이 안되는 조건에서 막아낼 길이 전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덕포진(德浦鎭; 광성보 맞은편 김포반도에 위치)에다 진지를 옮겼습니다.” 보고.
-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치계(馳啓; 후속보고).
“심부(沁府; 강화유수부)의 해상과 육지에 대한 비상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서북면(西北面)의
별부료군(別付料軍; 특별급료를 주는 군사) 70명에게 활과 화살을 주고, 해당 병방승지(兵房承旨; 승정원의 병무승지)가
지휘하여 즉시 내려오도록 하며, 별초군(別抄軍) 1초(哨; 125명)는 초관(哨官)이 지휘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싸움터로
나가게 하고, 군향미(軍餉米; 군량미) 1,000석(石)을 급히 태창(太倉)에서 내려보낼 것”이라며 “강화에 내려보낼 별초군
1초를 방금 선발했는데 나머지 1초의 군사들도 모두 의기충천하여 앞을 다투어 지원하므로 막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도 다 함께 동원시키려 합니다”하자 고종임금이 윤허했다.
* 4월25일 - 고종임금, 척화비를 세우다
- 경연(經筵; 정례 약식국무회의)에서 고종과 우의정이 척화를 논의(요약).
고종임금 : “양이(洋夷)들이 우리 영토를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 : “이 오랑캐들은 원래가 사나운데 그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미칠 듯 날뛰는 행세로 말미암아 조선군에게는 계속 불리한 형편만 보고되니
더욱 통분할 노릇입니다.”
고종임금 : “이 오랑캐들이 무슨 화친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동방예의지국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짐승같은 놈들과 화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이런 식으로 몇 년이 계속된다 해도 단연코 화친은
거절하고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다는 규율을 시행하라.”
우의정 홍순목 :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종의 불순한 기운이 온 세상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조선만이 유독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은 바로 예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병인년(1866) 이후 조선이 서양 놈들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비록
오랑캐들이 침범하고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해도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제구실을 하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구실 하겠습니까?
이번에 임금님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타고난 떳떳한
의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불순한 것을 배척하는 임금님의 큰 의리에 대해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적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고종임금 :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 승정원에서 적어 반포하는 사항)에 낼 것이다.”
* 이날 이후 서울 종로(鐘路)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 적었다.
-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
“양이(洋夷)들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날뛰고 광성진(廣城鎭)이 이미 함락됐으니 이후 강화일대가 대단히 우려됩니다.
경기중군(京畿中軍) 김선필(金善弼)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차하(差下; 벼슬을 내림)하여 오늘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지에 나가게 해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는 전술이 좋겠습니다” 했다.
- 진무사 정기원은 또 “적병들이 광성진(廣城鎭)을 함락하고 초지포(草芝浦) 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곳 첨사(僉使) 이렴(李濂)이 야밤에 습격하자 놈들이 퇴각하였습니다.” 보고.
* 4월25일 - 손돌목돈대의 처참한 모습 보고
- 진무사 정기원이 미군함대 철수뒤 광성보모습 정황보고.
“25일 적들이 물러간 다음 휘하 군관(軍官)을 파견하여 찰주소(札住所)의 광진(廣津) 보루에 달려가 자세히 조사했더니,
보루는 텅 비었고 흙 참호는 모두 무너져 즉시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흙을 파냈더니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魚在淳), 대솔군관(帶率軍官) 이현학(李玄鶴), 겸종(傔從) 임지팽(林之彭), 본영(本營)의 천총(千總)
김현경(金鉉暻)이 피를 흘리고 참호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시체들은 몸과 머리가 썩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성진 별장(廣城津別將) 박치성(朴致誠)의 시체는 밀물때 염하강변에서 드러났는데 인신(印信; 군인 인식표)을
차고 있어서 수거해 바칩니다. 별무사(別撫士) 유예준(劉禮俊)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했는데, 포로가 됐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별무사 이학성(李學成)의 전투상황 보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 중군(中軍; 어재연장군)은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김현경은 손에 환도(還刀)를 잡고 이쪽저쪽 휘둘러대며 적을 죽이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별무사 유예준은 중군 가까이 바싹 붙어 다니다 총에 맞았고, 어영청(御營廳)
초관(哨官) 유풍로(柳豐魯)가 앞장서서 사기를 돋궜으며, 이현학이 큰소리로 적을 꾸짖는 것을 목격했습니다만
저도 적들한테 부상 당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해가 진 뒤에야 간신히 빠져 돌아왔습니다.
중군 형제(어재연, 어재순)의 시체는 장리(將吏; 군관급 관리)를 보내 염습해서 영구(靈柩; 시신)를 본고장으로
운구하는 예식을 각별히 돌보도록 하였으며, 전사한 장수와 병졸들의 이름은 그가 말한 대로 성책(成冊; 책에 이름을 올림)
해서 올려보냅니다. 중군 어재연의 겸종 김덕원(金德源)이 칼날을 무릅쓰고 도장을 주어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
- 광성보전투의 조선군 전사자 53명, 부상자 24명으로 집계.
* 손돌목돈대 그때와 지금(복원 뒤)의 모습 비교
▲ 1871년 6월11일 정오경. 미군의 공격으로 함락된 직후의 손돌목돈대 모습. 함포사격으로 폐허가
된 진지내부는 '흰옷'입은 조선군 전사 사체로 덮혀있다. 사진 중앙 두개의 나무말뚝 사이로 어재연
장군 지휘소임을 알렸던 대형 수자기(帥字旗)로 여겨지는 천이 찢겨진 채 옆으로 널려있다. 미군측
기록에는 점령당시 "미 해병이 수자기를 하강하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게양했다"고 설명하고 있어,
사진 속의 천조각이 수자기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휘장막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 현재의 손돌목돈대 모습. 1871년 한미전쟁때 완전파괴된 채 형체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됐다가,
2004년 발굴작업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원형복원했다.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임금 5년(1679)에 처음
축조됐는데, 원래는 돈대내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흙성벽 외부로 뚫린 3개 포좌가 있었다고 한다.
돈대 내부면적은 778m²(약236평)이며 외부석축 성곽길이 총 108m의 '동그란' 모양이다. * 그러나,
복원된 현재의 손돌목돈대는 원래의 위치와 다른 곳에 세워졌다는 반론이 제기되고있다.
* 4월26일 - 광성보관련 후속조치 보고
- 의정부(議政府) 보고.
“양이(洋夷)들이 광성(廣城)을 침범할 때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었는데,
수신(守臣; 수령)은 이미 중군을 대신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니, 어재연은 절개를 지키다 전사한 것 같습니다.
사실로 확인되면 조정에서 응당 구휼(救恤; 금품으로 보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재연의 아들
어병수(魚秉琇)가 지금 수성찰방(輸城察訪; 6진의 하나인 청진에서 역마를 관장하던 종6품 외관직)에 있으니,
인정과 사리로 보아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해조(該曹; 해당관청)가 구전(口傳; 3품이하 당하관 임명시 이조나 병조에서 인물을 천거하면 임금이 구두로
승인하던 제도)으로 차대(差代; 사람을 뽑아 결원보충)하여 당일로 내려 보내 제 때에 교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보고하자 고종임금은 윤허.
- 영종방어사(永宗防禦使)의 전황보고.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사이)쯤 조선군 일범소선(一帆小船; 돛대 하나인 작은 배)이 저들의 배에 붙잡혔고
그를 탐지하기 위해 군교(軍校)와 군사를 선발하여 급히 저들의 배 근처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술시(戌時; 오후7시-9시 사이) 쯤 군교와 군사들이 탄 배는 강화부(江華府)의 별무사도령장(別撫使都領將;
훈련도감에서 활쏘는 기병대를 이끈 지휘관) 유예준(劉禮俊)과 무사(武士) 이도현(李道賢)·황만용(黃萬用)·
조일록(曺一祿)·고사달(高士達)·김동진(金東辰), 어영청(御營廳)의 군사 김대길(金大吉)·김우현(金禹賢),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사 차인식(車仁植) 등 9명(名)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모두 불러들이니, 유예준은 오른 다리에 탄환을 맞아 몸은 비록 살아있지만 거의 죽은 목숨이며 이도현 등 7명도
어깨와 다리 등에 탄환을 맞았습니다. 조일록은 오른팔이 절반 잘라졌고 차인식은 탄환에 맞지는 않았지만 매를 맞아
들것에 실려왔습니다. 그 정상을 자세히 물어보니 유예준이 아뢰기를, 광성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탄환에 맞아
쓰러졌는데 저놈들이 큰 배에 붙잡아다가 여러 배들에 조리(여기저기 끌고다님)를 돌린 다음에야 놓아주어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돌아왔다고 합니다.
별무사 이산석(李山石)은 25일에 전사했는데 저들이 끌어다가 부평(富平) 경계에 묻었습니다.
조일록(曺一祿)은 맞은 탄환이 아직 팔에 박혀있었는데 저들이 약으로 코를 막아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은(銀) 칼로 팔을 잘라버리자 조금 뒤에 다시 소생하였습니다. 어영청의 별무사 문계안(文啓安), 전 초군(前哨軍)
이대길(李大吉), 강화부의 김의도(金宜道)·엄원철(嚴元哲)·최국길(崔國吉) 등 5명은 아직도 배안에 갇혀 있어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적의 배 안에는 조선사람 서너명이 섞여있었는데 그들을 불렀더니 머리를 저으며 오지 않았고,
다만 열 대 여섯살쯤 되보이는 아이가 포로가 된 사람들 이름을 적어왔습니다. 배 안에 있는 적의 군사는
거의 1,000명에 가까왔으며, 탄환에 맞은 저놈들 시체 3구가 한곳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밖에 배안의 다른 형편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귀환한 조선군사 9명은 그들이 원하는 진영으로 보내겠습니다.” 했다.
* 4월27일 - 군사기율 재정비 교시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
“초지포(草芝浦)와 덕진(德津)을 잃어버리고 불태운 것만 해도 이미 잘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지
못함인데, 광성보(廣城堡)에서 군사와 장수를 잃었으니 더욱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보고하니,
고종임금은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이길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저 고약하고 흉악한 놈들이 지금은 약간 퇴각했지만 눈앞의 방어는 여전히 소홀할 수 없다.
나라의 보위를 책임 진 사람으로 더욱더 스스로 힘쓸 것이며 명령을 받들지 않는 군사는 먼저 처단하고 나서
후에 보고함으로써 군율을 엄하게 하라.” 고 하교.
* 4월28일 - 고종임금이 전사자 및 전공자들을 포상함
고종임금이 광성보전투 전사자에게 관직을 추증(追贈; 전사자 명예승급)하고 표창하며 교시함.
“중군(中軍) 이하의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에 대해서는 이번 장계(狀啓)에서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충성과 용맹이 마치 그 사람들을 직접 보는 듯하다. 몸소 칼날을 무릅쓰고 흉악한 적들을
죽이다가 적들의 공격이 집중되는 바람에 결국 목숨을 바치고 말았으니, 그 빛나는 큰 절개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군사들이 마음을 고무시킬 만하다.
그러므로 진무 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에게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지 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추증(追贈)하고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는 논의)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 국왕이나 사대부의 사후에 공덕을 기리기위해 내리는 호)를 의정(議定)하게 하라.
장례에 필요한 물자는 호조(戶曹)에서 넉넉히 보내주고, 녹봉은 대상(大祥;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제급(題給; 공적의 등급을 매김)하도록 하라. 정려(旌閭; 귀감이 되게 세우는 충신문)를 세워주는 은전과
제사를 지내주는 절차는 각 해사(該司; 해당관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전사자의 아들은 거상 기간이 끝나면 각별히 수용(收用; 관직등용)하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있을 경우에
음직(蔭職; 추천관직)에 조용(調用; 조정배치)하라. 어재연장군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은 명령을 받은 신하도
아니며 관리로서의 직책도 없었지만,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적들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와 드높은 충성과 의리가 평소에 수양하여 온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추증하고, 시신을 고향에 가져다 장사지내는데 필요한 물품을 또한
호조로 하여금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며, 정려를 세우는 일과 제사를 지내주는 일을 일체로 시행하라.
어영청 초관(御營廳哨官) 유풍로(柳豐魯)는 앞장서서 기세를 돋구었고 일신은 생각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특별히 좌승지(左承旨)로 추증하라. 대솔(帶率) 군관인 출신(出身) 이현학(李玄鶴)은 큰소리로
적을 꾸짖으며 굴함없이 의리를 지켰다. 특별히 3품직에 추증하라. 천총(千總)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현경(金鉉暻)과
광성 별장(廣城別將) 절충 장군 박치성(朴致誠)은 죽음을 달게 여기며 적을 증오하는 큰 의리를 지켰으니
모두 상당과(相當窠; 적당한 관직)에 추증하라.
전사한 군사와 중군의 겸종(傔從)들은 본영으로 하여금 각별히 돌봐주어 잘 묻어주게 하고, 처자들을 찾아보는 동시에
더욱 돌보아 주어라. 나루터에 제단을 쌓고 귀신을 널리 불러 제사지냄으로써 저승에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영혼을 위로하라. 부상당하고 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을 넉넉히 주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하여 치료함으로써
조정에서 불쌍히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그 밖에 공적을 세운 사람들도 모두 본영으로 하여금
후하게 포상(褒賞)하게 하라.”
- 의정부(議政府)의 건의.
“어영청 초관(御營廳哨官) 유풍로(柳豐魯)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 뛰어난 절개는 참으로 빛납니다.
듣건대, 90세 되는 노모(老母)가 있고 집안 살림도 가난한데, 전 우후(前虞候) 유재로(柳在魯)가 그를 따라
싸움터에 나갔다고 합니다. 울진(蔚珍)에 지금 자리가 났으니 특별히 차하(差下; 벼슬을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정성껏 봉양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윤허하였다.
* 4월30일 - 고종임금이 참전 군사들을 위로함
고종임금이 서양군 침입에 맞서 싸운 강화도와 각 고을 군사들을 위로.
“흉악한 적들이 날뛰는 바람에 중군(中軍)을 비롯한 군관(軍官)과 군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데 대해서는
방금 구휼(救恤; 도와주어서 구함)의 은전을 베풀었다. 그런데 부상을 당한 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치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심도(沁都; 강화도)와 각 읍진(邑鎭)에 비상 방어를 하느라고 많은 장교와 군사들이
풍찬노숙(風餐露宿; 야영과 길거리 잠) 생활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아픈 사람은 없는지, 밤낮으로 이 한 가지
생각에 몹시 걱정스러워 마음이 불안하다.
경기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각별히 호궤(犒饋; 음식제공)를 후하게 제급(題給; 보급)하게 하고,
그 물력(物力; 물자동원량)은 공전(公錢; 나라예산)으로 회감(會減; 지급)하라.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어
이 전교내용을 일일이 전하고 각별히 잘 위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각처(各處; 정부관청)에서 징병(徵兵; 병사를 모집함)하여 진을 설치하되,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요언(妖言; 요사스런 언행)으로 대중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각 주장(主將; 단위부대장)들은 반드시
군사 법률을 적용해 상과 벌을 분명히 하도록 선전관들이 함께 전하라.” 하교.
* 5월5일 - 고종임금이 강화도방어군을 걱정함
고종임금의 하교.
“강화도에 위로하러 갔던 선전관(宣傳官)이 돌아와 보고한 것을 들으니, 각처(各處)에 있는 군관(軍官)과 군사들이
모두 탈이 없다고 하는데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가뭄 피해가 심한 이때에 달포나 방어하다가 혹 병이라도
나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 때문에 침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내하(內下; 궐에서 하사한)한 각종 약품을
무부(武府; 군사부처)에서 골고루 나누어 내려보냄으로써 치료에 대비하게 하라.”
* 5월17일 - 중국에 신미양요관련 자문(咨文; 사건통보 공식외교문서) 보냄
의정부에서 미국 병선이 더욱 소란을 피운 사실에 대해 중국 북경에 자문을 보낼 것을 건의.
“양이(洋夷)들이 소요를 일으킨 데 대하여 중국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은 근래의 규례이지만, 이번 사태 전말에
대해서도 자세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들로 하여금 자문을 짓도록 하고, 별도로 자문을 가지고 갈
관리를 사역원(司譯院)으로 하여금 차출(差出)하여 속히 들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미국 병선(美國兵船)이 소요을 일으킨 상황을 진술한 자문의 대략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박영보(朴永輔)와 강화 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 등 관리들이 금년 4월11일에
올린 장계(狀啓)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이기조(李基祖)의 첩정(牒呈)에, ‘이번달 3일
이국선(異國船) 5척이 서남쪽으로부터 부평부의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고 글을 보내왔는데, 자칭 미국 군주가
흠차(欽差; 전권임명한)한 대신과 수군제독(水軍提督)이라고 하고, 협상할 일이 있으므로 고관(高官)을 만나볼 것을
요구하면서 결코 해칠 의도는 없으니 놀라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의정부(議政府)에다 3품의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온 수고를 위문하며, 협상할 내용을 대략
알아보도록 칙하(飭下; 명령하달)하였습니다. 의정부의 장계와 차송관(差送官)의 문보(文報) 내용에,
‘문안 총판(文案總辦) 두덕수(杜德綏)라는 자가 나와서 응접사(應接使)에게 하는 말이 이 관리들은 직품이 낮으므로
자기네 나라 공사와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서 거절하고 들여놓지 않았으며, 다시 더 말하지도 않고 항구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 박영보와 진무사 정기원 등이 올린 치계(馳啓)를 계속하여 받아 보니, ‘이범선(二帆船) 미국배 2척이
손돌목(孫石項)으로 들이닥쳤는데, 여기는 우리나라 수역내의 항구로서 중요한 요새지입니다. 병인년(1866)의 난리를
거친 다음부터 군사를 늘리고 방비를 더 엄하게 해서 설사 우리나라의 관청이나 개인의 배라고 하더라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를 실은 이국선이 우리나라에 통지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형편에서 절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물목을 지키던 장수와 군사들이 포를 쏘아대며 막으니
그들의 배는 곧 물러가서 부평(지금의 인천) 해상에 정박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그림자를 보고 형태를 살피며, 나타난 형적을 가지고 사실을 논한 것은 천하의 응당한 이치로써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배가 왔을 때 먼저 밀봉한 편지를 띄우고, 이어 글을 보내오면서
걸핏하면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생각은 없다.’, ‘놀라지 말라.’느니 하였는데
갖은 말로 가장하는 내용이 다 이러한 말들이고, 예의로써 접대해달라는 것이 특히 그들의 요구였습니다.
상대방이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내가 호의로 응하며, 상대방이 예의를 갖추어 대하면 내가 예의로써 접대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나라 간의 일반적인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을 표방하면서도 어찌하여
군사를 싣고 오며 예의로써 접대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어찌하여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생각에 벌써 요새지에는 반드시 방어가 심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뜻은 없다.’는
등의 갖은 말을 잔뜩 늘어놓음으로써 실로 우리의 방비를 완화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감히 들어오자는
간사한 속임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남의 나라를 짓밟고 멸시하며 무인지경과 같이 보았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화목하자는 것이 이러하며, 예의로 사귀자는 것이 이렇겠습니까? 그 의도는 사건을 일으키자는데 있으며,
그 계책은 오로지 강제로 조약을 맺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월 24일에 계속해서 올린 강화 진무사 정기원의 치계에, ‘미국배가 다시 항구로 들어와서 광성진(廣城津)을 습격하고
함락하였는데,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힘껏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고, 사망한 군사가 매우 많습니다.
적병은 초지포(草芝浦)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변진(邊鎭) 이렴(李濂)이 밤을 이용하여 습격해서야
그들을 퇴각시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받은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치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적의 군사가 성과 보루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불지르고 약탈하여 털끝만큼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또 정찰해보니 그놈들의 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다 나라를 배반한 간악한 무리들로서 길안내를 해가지고 온 자들이었습니다. 놀라움과 격분을
금하지 못하여 편지를 보내어 꾸짖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인천 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구완식(具完植)의 첩정에, ‘이연귀(李蓮龜)와 이균학(李筠鶴)은 원래 예수교의
두목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데, 그들의 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살피는 것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엄격히 신문하니, 그들의 배에 들어가서 기꺼이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사실을 남김없이 실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둘러 효수(梟首; 목을 잘라 장대에 매달아 놓음)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였으며,
부평(지금의 인천) 등 고을에 엄격히 명하여 그 놈들의 배와 다시는 복잡하게 편지질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올해 5월 14일에 계속해서 올린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차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배에서는 한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조정에다 전달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봉투에 쓴 글은 자못 헷갈리는 것 같으니 어찌 이 나라의 신하로서 이것을 감히 위에다 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거절해 버렸는데도 그들은 오히려 끈질기게 굴면서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하였는데, 그들이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서
전달하겠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달 7일에 그들의 배 1척이 먼바다 쪽으로
갔다가 13일 날 다시 돌아와 정박하였는데, 그 배가 가고 온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16일에 올린 치보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의 첩정에, ‘정박하고 있던 여러 미국배들이 본부(本府)에다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 동시에 닻을 올리고 먼바다 쪽으로 가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미국전함들이 우리나라에 정박한 것을 조사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40여 일입니다. 그들이 지방의 관리,
통역들과 서면으로 논쟁한 것과 떠날 즈음에 남겨둔 편지를 비롯한 상황을 다 진술하게 되는 지금,
귀(중국 북경) 예부(禮部)에서 이해하도록 갖추어 보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번에 초록한 것들을 모아서
함께 첨부해 올리니 진상을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화목을 빙자하여 감언이설로 접어들지만 속에는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실로 간사하고
음흉한 계책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 까닭은 반드시 높은 관리가 서둘러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요충지에서 충돌을 일으켜놓고도 저들이 도리어 애써 방어하였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오만하고 이와 같이 포악한 놈들입니다. 더구나 나라를 배반한 비적 무리들을 숨겨두고 수도로 들어올
길잡이로까지 삼았습니다.
도대체 이와 같이 하고도 스스로 화목을 부르짖으며 예의로 접대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우리의 불신임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이 우리가 틀림없이 화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조선을 떠나면서 그들이 편지를 남겨 공연히 성을 내며 마구 으름장을 놓은 것은, 저들이 불순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이러한 불만과 원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거짓말을 꾸며 비방함으로써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을 일으키게 하여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가 멀리서 온 사람들을 후하게 접대하지 않는다고 잘못 의심을
사게 한다면 그것도 매우 수치스러운 노릇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그 나라 공사가 이해관계를 똑똑히 알게 하고 양측에 다 유익한 점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하며, 다시는 사단을 일으키지 말고 각기 아무 일없이 편안히 지내도록 해줄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하였다.
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끝
* 본문내용은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사전허락없이 무단전재 및 임의복사를 엄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