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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 이 註) 본문내용이 다소 깁니다. 이 내용은 병인양요를 바라보는 프랑스측 시각을 군더더기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했고, 기존에 발표된 난해한 문장과 오역(誤譯)부분은 바로 잡았습니다.
또 이해가 쉬운 글로 리라이팅(re-writing) 하거나 문맥의 재편집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병인양요 관련자료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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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조선을
'하찮은 미개국'으로 여겼다
1866년 10월, 한반도 강화도에서
프랑스침략군와 조선수비군 사이에 벌어졌던 국제 국지전 병인양요 - 전쟁당사국 조선과 프랑스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서로가 아전인수격으로 남긴 전쟁관련 기록은 하늘과 땅 만큼의 간극(間極)을 드러낸다. 프랑스는 조선을 불법침입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신부를 학살한 대한 정당한 무력응징"을 했으며, 조선조정은 "우리 국법을 우리 땅에서 적용했는데 서양오랑캐가 방약무인하게 무력을 휘둘렀다"며 분개한다. 상대국을 자기 잣대로만 해석하고, 서로를 살상한 이 비극(悲劇)은 차라리 한편의 희극(喜劇)이라해도 좋았다.
19세기 중반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제국이 지구촌의 위계질서를 장악했다. 그들이 독점한 첨단 무력(武力)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문호개방'이란 명목으로 목줄을 죄었다. 서구 핵심열강의 하나이던 프랑스도 "지구는 우리가 돌린다"는 자만감에 빠졌던 시절이다. 이런 세상물정과는 담을 쌓고, 당시 조선은 오로지 중국이라는 '껍데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저울질 했다. 병인년 가을, 그 끔찍했던 프랑스군의 조선반도 무력 테러와 유린(蹂躪)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프랑스가 기록했던 병인양요를 간추려본다.
▲ 프랑스측 기록물 reference
A : 병인양요 참전 해군장교 후보생 앙리 쥐베르(Henri Zuber)의 '조선원정기'
B : 병인양요 당시 베이징(北京)주재 프랑스 공사관소속 의사였던 마르텡(C.H. Martin)이
1883년 발행된 '스팍타퉤르 밀리테르'(Spectateur Militaire; 군사견문기)잡지에 기고한 논문 '1866 조선원정'
C : 기타 프랑스측 참전장교의 에세이성 참전기록 등.
■ 프랑스측 기록요약
▲ 1차 한강침공
1866년 9월12일 로즈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함대소속 군함들이 중국의 즈푸(芝罘)항과 마주하고있는
작은 섬 쿵퉁(崆峒)에 집결해 군수품을 보충하고 마지막 점검을 시작, 9월18일 보세(Bocet)함장이 지휘하는
프리모게함 등 3척이 조선으로 출항했다. 다음날 한국의 남양만 깊숙한 곳에서 정박했다.
20일 데롤레드함은 리델신부와 그를 수행하는 한국인 천주교신자 몇명을 태우고 한강으로 떠났다.
현지인이 승선한 탓에 레롤레드함은 몇시간만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21일 저녁,
데롤레드함은 매우 귀중한 정보를 수집하고 돌아왔다.
9월22일, 데롤레드함이 물길안내를 맡고 전함3척은 강화도를 향해 북쪽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몰려 온
조선인들이 산꼭대기에 모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전함의 괴력에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스스로 세상물정과 담쌓고 고립돼 살아가면서 자기생각만 옳다고여기는 이 나라 백성들은, 유럽의 첨단과학이
만든 기선이 느닷없이 그들앞에 나타나자 야릇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기함인 프리모게함이 인천 앞바다 작약도 부근에서 모래톱(沙洲)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수심이 15m나 돼 안전하다고 생각돼 정박했는데, 썰물로 물이 빠지자 수심이 4m에 불과해
전함바닥이 모래톱에 닿은 것이다. 간만의 차이가 11m나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파손부위는 용골 바깥쪽으로 대수롭지않은 사고였지만, 일단 한강측량을 위한 답사는 중단됐다.
기함은 숲이 우거진 매력적인 섬 작약도 해변에 정박해 있어야 했다.
9월25일, 전함 타르디프와 데롤레드가 조선인들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한양에서 가까운 한강의
나루(양화진)에 닿았다. 사상처음으로, 극동아시아에서 3번째가는 나라 조선의 수도가까이에
유럽 선박이 정박한 것이다. 우리 전함이 다시 목적지(서강)로 항해할 때 조선군의 작은 배들이
우리 진로를 방해하므로 함포를 발사해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
서강에서 한양까지는 불과 3km밖에 안 됐다.
함포발사 후, 신을 조선의 민사(民事)담당 관리라고 소개한 사람이 도저히 공문서로는
느껴지지않는 편지한장을 데룰레드함으로 가져왔다. 그 서한에는 조선조정은 물론 백성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 잘 드러나 있었다. 서한을 번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이 보잘것 없는 작은 나라의 강산을 구경했으니 이젠 부디 돌아가시오.
그러면 우리 백성이 기뻐할 것이오. 그대들이 제발 우리나라에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않고 돌아가 준다면,
우리가 품었던 의심도 풀 것이요, 그것이 우리를 더 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오.
천번 만번 거듭요청하오니, 그대들은 우리의 청을 받아주리라 믿는 바이오"
우리는 그 관리에게 "단지 며칠간 정박하여 수심을 측정한 뒤 한강을 떠나겠다"고 안심시켰다.
한편 작약도해변에 좌초해있던 기함 프리모게함에는 커다란 조선 범선 한척이 접근해왔다.
그 범선은 전형적인 중국범선 모양이었는데, 중국배들이 모두 그렇듯 우아한 멋은 커녕 조잡하기
이를데 없는 배였고 그 범선 안에는 허리가 굽은 늙은 관리와 40명의 인근주민 남자들이 타고있었다.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일단 우리 기함에 승선하도록 허가했으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우리는 나름대로 방비를 갖추었다. 승선한 주민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함포와 밧줄, 나침판 등을 살폈고 돛대(마스터)굵기에 놀라 넋이나간 듯 했다. 기함 함장은 중국인 요리사의
한자 필담 통역을 거쳐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늙은 관리는 우리가 왜 조선에 왔는지 굳이 알고싶어 했다.
우리는 "며칠 후 이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는 월식(月蝕)을 보러왔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관리는 믿지않는 눈치였다. 그를 안심시키고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
선박내부를 모두 구경시켜 주었지만, 끝내 의심을 풀지않는 모습이었다.
관리는 기계에 관심이 많아서 "이 기계들을 운용하려면 남자 몇명이 필요한가"
물었고, 우리는 자상하게 설명했지만 증기기관(蒸氣機關)을 이해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부터 매일 조선인들이 기함을 찾아왔다. 우리가 그들을 해치지않는다는 것을 알자
처음의 소심한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무식하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행동은 거칠고 조심성없고 아주 불결했다. 품위와 예의를 갖춘 일본인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고, 아첨에 능한 중국사람들과도 달랐다.
조선인들은 그러나 외국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우리 전함을 방문하고 난 뒤 커다란 부채와 황소를 선물했는데, 값을 지불하려하자 한사코 거절했다.
우리는 선물받은 황소를 배에 싣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다.
며칠 뒤 수도 한양의 코앞인 한강 서강(西江)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대담한 정찰과
성공적으로 심측량을 마친 두 척의 우리 전함이 작약도로 귀환했다. 그동안 모래톱에 걸려 좌초해있던
기함 프리모게함과 합류, 우리 함대 3척은 무사히 중국 즈푸를 향해 출항할 수 있었다.
▲ 2차 강화도침공
1. 갑곶이 해변 상륙과 프랑스군 진지구축
즈푸항으로 귀환한지 일주일만인 10월3일, 프랑스극동함대 소속 전함 7척이 '조선원정'에 나섰다.
다음날 전함 3척이 먼저 작약도에 도착, 정박하면서 강화해협진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루동안의 준비를 마치고 해군상륙병을 태운 4척의 종선을 전함 꽁무니에서 끌고 강화해협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흰옷을 입은 조선인들이 언덕위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며 불안해했다.
함대는 한강하구와 인접한 강화도 갑곶이 해변에 정박, 상륙군을 육지로 보냈다.
강화도 지방관리인 듯한 사람이 나타나서 애원하는 몸짓으로 상륙을 막으려했지만,
우리의 상륙작전은 조선측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갑곶이 마을주민들은 집이며 가축, 재산을 모두 내동이치고 달아났다.
상륙군이 갑곶이 마을을 점령하고 진지터를 잡은뒤 얼마안있어 장정 열두어명에 둘러싸인
가마꾼 행렬이 진지입구에 도착했다. 가마와 행렬은 로즈제독에게 안내됐다.
그때서야 가마에서 내린 늙은 지방관리가 다짜고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지방관을 돌려보냈다. 때마침 억수같은 비가 퍼부었다.
상륙군이 기거하려 차지한 민가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러웠다.
그런 더러운 집을 사람이 살 수 있게 어느정도 정리하고나서야 짐을 풀었다.
갑곶이마을은 사방이 무덤천지였다. 논이나 밭의 경계가 되는 둔덕이 구불구불한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화덕의 불기가 방바닥 아래를 지나는 가옥의 온돌난방구조도 눈길을 끌었다.
(이상 A기록 발췌요약)
강화해협 쪽으로 항진 중에 조선의 상선을 몇 척 만났는데, 조선인 선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물살을 역류하여 빨리 나아가는 유럽군함들을 감탄하면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전쟁의 무대에서 멀어지는 걸
틀림없이 다행으로 여긴 그 조선인들은 프랑스군함의 반대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해 갔다.
곧 우리는 상륙하기로 된 장소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갑곶이 마을이었는데 요새가 하나있었고
섬입구에 쌓은 큰 성벽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서울에서 강화읍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였기 때문이다.
마을은 산 밑의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산 위에 요새(강화산성)가 있었다.
산성의 문은 약간 마을 안쪽에 있었다. 강화읍으로 가기 위해선 산속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우리 상륙군은 전함에 묶여있던 밧줄을 풀고, 보트의 노를 일제히 힘껏 저어서 해변을 향해 돌격했다.
상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우리를 쳐다보며 공포에 질려 마구 도망가는 이 마을 사람들을 군함에서 볼 수 있었다.
몇몇 사람은 아이를 등에 업고 도망치다가 얼마안가 포기하기도 했다.
상륙부대는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공격이 시작됐다. 요새를 빼앗았으나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산비탈에 있던 몇몇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 목숨만 살려달라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정중한 인사를 했다.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집들을 둘러보았으나, 조선군은 한명도 없었고 몇몇 노인과 병든 아이들만 눈에 띄었다.
조선군은 겁에 질린 나머지 양민으로 가장하기 위해 군복과 포졸의 상징인 꿩 깃털 등을 내던져
여기저기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단 한발의 총도 발포되지 않고 상륙작전이 끝났다.
상륙작전을 마치고 로즈 제독은 뭍으로 올라와 마을과 주변의 야산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각 분대가 밤을 지새기 위한 대비지침을 알려주었다. 병사들은 주민들이 버리고 간 집과 절 안을
최대한 깨끗이 정리하고 포진했다. 그리고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정지하라는 고함과 명령도 이해하지 못하는 조선사람들에게 보초들이 쏜 몇 발의 총성을 제외하곤
상륙의 첫날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주민들은 급히 버리고 간 자기 집 안에 놔두고 왔던 물건을 다시 가져가기 위해,
혹은 이웃집의 필요한 물건들을 찾기 위해 한 밤중에 슬그머니 기어들어 왔다. 프랑스병사들은 그들을
적진상황을 살피는 염탄꾼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첫날밤은 총성없이 지났다.
그 다음날 로즈 제독은 병사들에게 "조선사람들에게 지난 밤처럼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전하라" 지시했다.
이날 강화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관리가 찾아와 담판을 요구했다. 그를 데룰레드함으로 안내했다.
제독은 그 관리에게 위엄을 보이기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휘장은 모두 치장하고 맞이했다.
조선관리는 "당신들은 무엇을 하러 온 것이냐?"고 물었다. 제독은 "조선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존경받을 만한 프랑스 신부들을 조선정부가 살해했기 때문이며 조선조정에 암살행위 해명을 요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조선관리는 "우리가 프랑스신부를 처형한 것은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며 "신부들은 불법입국하여 국법을 어기고
몰래 포교활동을 했으며, 신분을 숨기기려고 조선인 행세(* 당시 리델신부 등은 조선인들에게 친숙히 다가서기
위해 조선인 복장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를 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는게 마땅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조선조정은 이전에도 7-8건의 외국인선교사 처형 사례가 있었는데, 이 나라 법전에 그런 규정이 있는 것 같았다.
이교도들은 오로지 사형에만 처할 뿐, 약한 종류의 징벌은 하지 않았다.
조선의 폭군은 그런 국법으로 자신들의 체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제독은 지방관리의 말을 가로막으며 "보름 전에 두 척의 프랑스군함이 이 섬 근처를 지나쳤을 때(* 1차 한강침공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 배들을 향해 조선군이 발포를 했소" 라고 따졌다. 그러자 조선관리는
"나이어려 철없는 병사가 그런 행동을 했소만, 그건 그렇고 당신들에 관한 문제인데 당신네들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밖에 없소. 그건 바로 한시라도 빨리 강화도를 떠나는 것이오. 이런 불법침략을 계속하면
하늘이 노하여 당신들에게 벌을 내리게 될 것이오"라며 따지고 들었다.
조선관리가 너무 불손했기 때문에 로즈 제독은 "입을 다물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당신 나라에선 휴전교섭 사절로 파견된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또한 체포도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대답했는데 그 침착성과 냉정함이 감탄스러웠다.
협상 권한은 없고 단지 조선측 주장만 되풀이하는 지방관리는 되돌려보냈다.
그를 증기선 보트에 하선시켜 해안까지 돌려보냈는데 데룰레드함의 웅장함과 특히 증기선보트의 증기기관에
감탄하면서 가마꾼이 드는 가마의자에 앉았다. 증기선이 역류 물쌀을 가르고 화살처럼 순식간에
물가에 닿았다. 이 작은 배가 그를 기쁘게 한 것 같았다.
해군의 도즈리정찰대장에게 분견대(分遣隊)를 이끌고 갑곶마을과 강화읍 성벽아래까지 정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강화도 곳곳에는 무기고와 군수품들이 가득 비축돼있다. 강화도는 조선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운데 하나로,
협곡이나 산속 등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에 요새(산성)를 구축했다.
강화해협의 양안에도 요새가 늘어섰고, 3개의 야산 사이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강화읍은 높고 튼튼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곳에다 조선군은 대포, 소총, 화약 등의 군수물자를 쌓아 놓았다.
강화도를 지배하는 유수는 강화읍의 유수부 경내에 처소를 갖고 있으며, 읍내를 내려다보는
높은 성벽의 안쪽 요새화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즈리 정찰대장은 로즈 제독에게 정찰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강화유수의 처소를 찾지 못한 채,
그 지역 전체를 돌아다녔다. 그는 강화읍의 여러 성문가운데 한 성문 근처에 다다랐고 거기서 많은
군기(軍旗)와 조선군, 유수도 보았다. 정찰대장이 그 성문 가까이 지나쳤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조선군들이
분견대를 향해 사격하려는 행동을 취했다. 정찰대장은 사격솜씨가 뛰어난 병사 한 사람에게 성벽 위에 서있던
기수(旗手) 저격하게 했는데, 실탄이 발사되자 깃발이 한쪽으로 쓰러졌고 반대편으로 기수가 쓰러지는게 보였다.
(그럼에도 나중에 조선군들은 한 사람도 총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쨌던 강화성 교전에서 조선군은 완전히 패했다. 조선군들은 모두 도망을 쳐 목숨을 구하려했다.
정찰대장은 "나는 그 순간 강화읍을 점령할 수도 있었고, 사실 점령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안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단지 정찰하라는 명령만 받았기 때문에 거기서 되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이상 C기록 발췌요약)
2. 강화성 공격, 강화읍 점령
10월16일 프랑스군은 강화부성(강화읍을 두른 성곽)을 점령했다. 조선군이 우리를 겁주려고 성벽 곳곳에
울긋불긋한 깃발을 꽂아놨지만, 프랑스군은 개의치않았고 조선군 몇명을 사살했다.
강화읍에는 1만5천-2만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높이 4-5m의 강화성이 8km에 걸쳐 감싸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점령하고 읍내로 진입하자 주민 대부분이 도망갔고 단 한명의 여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에는 도망갈 힘조차 없어보이는 백발 노인들만 남아있었다.
초가집 민가는 좁고 더럽고 초라했지만, 유수부나 동헌 등 관청건물은 기와집에다 영국식 정원까지 딸린
위엄있는 건축물이었다. 동헌 아래 몇 채의 건물은 정부가 관리하는 물품창고였는데, 거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들이 보관돼 있었다. 불랑기대포와 화승총, 창, 도끼, 활, 갑옷 등
엄청난 무기류와 화약, 정부 전매품들로 여겨지는 초, 인두 그리고 한 건물(외규장각)에는 엄청난 책과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가 보관돼 있었다. 그 책들은 이제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이상 A기록 발췌요약)
10월15일 도즈리의 분견대가 사전정찰을 마친 다음날, 우리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던 강화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10월16일 아침 7시경 로즈 제독이 직접 지휘하여 모든 부대가 강화성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강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로 상당히 넓고 잘 닦여져 있었는데 발 맞추어 행진하는
프랑스군의 행렬은 장엄했다.
갑곶이 해변에서 강화읍까지는 약 3-4km정도였다. 성벽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
제독은 정찰대를 먼저 보냈다. 접근임무를 맡은 정찰대 4명이 성벽에 접근했다. 그동안 병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각자 공격태세를 갖추고 성벽과 협곡구조를 살피며 천천히 전진했다.
우리는 접근정찰조가 성벽을 장악하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에 칼을 차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드샤반 대위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여러분 성문 안으로 들어와도 됩니다. 성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리를 쳤다. 제독은 전진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프랑스병사들은 "황제 만세!" 를 계속 외치며 돌격했다. 나머지 부대도 곧 큰 성문(강화산성의 동문)까지 닿았다.
동문은 잠겨있었으나 성벽 위로 타넘어간 병사들에 의해 쉽게 열 수 있었다. 성문입구는 화강암으로 돼있었고
양 문짝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그 위에 쇠붙이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양 문짝을 부숴 넘어뜨리고
강화읍이 우리의 공격으로 점령됐음을 보여주기 돌로 쌓아 놓은 성벽일부를 허물어뜨렸다.
곧바로 우리는 성 안으로 전진했고 그때 반대편 길로 달아나던 마지막 도망자들을 볼 수 있었다.
민가에는 신분이 낮은 듯한 몇몇 주민들만 집을 지키려 남아 있었다.
우리는 첫번째로 붙잡은 주민(남자)에게 "유수의 처소와 관청건물이 어디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꺼이 대답했고 직접 분견대를 인도했다. 그러자 우리 부대 뒤로는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조선인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민가는 어디건 문이 잠겨있었다. 그러나 워낙 형편없는 문이어서 슬쩍 밀기만하면 열렸다.
열 수 없는 문은 조선사람들이 열심히 도와주어 담장을 뛰어넘거나 직접 문의 빗장을 따 주기도 했다.
강화읍에는 군인들과 포졸, 관리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유수관저에서 유수(혹은 고급관리)로 여겨지는
사람은 마구 달아났다. 우리가 유수의 처소에 들어갔을 땐 호랑이가죽이 깔려 있었고 침구로 사용한 듯한 자리가
방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강화읍 풍경, 민가와 관청의 이모저모
강화읍 점령은 완수했다. 우리는 그곳에 포진했다.
곧 관가의 모든 건물과 창고들을 프랑스군이 일일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날 찾아낸 모든 것을
상세히 기술하자면, 너무나 길어 질 것이다. 단지 식량만은 소량밖에 없었는데, 관가 창고에서 찾아낸 보리
몇 포대가 전부였다. 시기적으로 강화도는 벼를 추수하는 때였고 온 들판은 볏단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가 강화읍 안에서 찾아낸 주요한 물건 목록은 이렇다.
화승총, 검, 활, 화살, 화살통, 투구, 갑옷, 어깨 끈, 철제 혹은 동(銅)제 중국식 불랑기(佛狼機) 대포들,
쇠로 만든 동그란 포탄, 납으로 된 탄환, 나무상자에 들어있는 다량의 화약 등 무기종류로만 가득 찬
여러 창고를 수색했다. 강화도 섬 안에는 화약고가 여러 곳에 있었는데 모두 폭파시켰다.
관가 창고 안에는 면, 흰 대마천, 모시, 삼배 등의 천들과 조선에 매우 풍부한 닥나무로 만든 종이(한지)가 많았다.
한지는 조선인들이 기름에 적셔 우비로 만들 정도로 질긴데, 여러 종류와 규격의 종이와 함께 포장용 천 등이 있었다.
특히 보라색으로 염색돼 아주 견고하게 무두질된 쇠가죽(조선인들은 사람가죽 같다고 했다)과 은괴(銀塊; 은 덩어리)와
구리, 납, 명반(明礬, alum; 황산알루미늄칼륨) 등의 광석도 있었다.
서가(외규장각) 안에는 2절지 사이즈의 여러 권으로 된 왕실 기록서들, 공자의 저서들, 의학서적 등과
4절지 사이즈의 60권으로 된 조선역사서 등이 있었는데 모두 수천 권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책들의
뛰어난 인쇄술과 제본기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책 표지에 금(金)으로 글자를 쓴
수많은 책들이 정교하게 경첩과 걸쇠로 제본되고 구리로 된 쇠불이 장식을 책들을 보며 놀라고 말았다.
이 책들은 비단천으로 싸여있고 붉고 금빛나는 나무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잘 정리된 왕실도서관이었다
그외 자그만 가구들은 재료가 좋아 보임에도 블구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사기그릇, 놋그릇 화로들과
쇠를 주조해 만들거나 구리를 두들겨 만든 여러 종류의 그릇들, 놋대야 등이 있었다.
강화읍의 성벽, 관청, 거리까지 수많은 깃발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조선군이 외적을 겁주기 위해
이 깃발들을 꽂아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조선군들은 도망치면서 이 깃발들을 버려두었는데
프랑스군인들이 파리에 있는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기념관에 보내기 위해 깃발가운데 멋진 것들을 골라
상당한 양을 수거해왔다. (이상 C기록 발췌요약)
강화읍내 한복판에는 광장이 있고 그 끝에 지붕을 덮은 시장이 있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들이
이리저리 뒤얽혀 있으며 골목을 따라 똑 같이 생긴 오두막 민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주목할 점은 상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도시처럼 활기차고 알록달록한 간판을 붙여놓은 곳도 없고
일본처럼 굵직한 글자로 뒤덮은 천조각이 펄럭이는 가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거리가 전체적으로 암울하고
모든 집들의 대문이 똑 같아 외국인이 처음 온다면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 뻔했다.
민가들은 너무 초라하고 더럽고 파손된 것들이 많아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집안을 들어서면
바깥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확실히 다른 활기가 넘쳐났다. 상점과 수작업 공방들, 번듯한 주거공간이
있었는데특히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은 깔끔하게 정돈됐는데 칠기 가구, 고운 돗자리, 그림 병풍,
장신구, 포마드(머리기름)와 화장품 분통, 심지어는 가체(가발)도 있었다. 조선의 여성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강화에는 이렇다할 산업시설이 없었고 무명을 짜는 베틀만 몇 개 발견했는데 그걸로는
모든 사람들이 옷을 제대로 해 입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강화읍 민가의 집집마다 놋그릇이 있었는데,
색깔도 아주 매혹적이고 두들기면 비할데 없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가장 가난한 집에서도
놋그릇이 있었다. 놋그릇은 크기가 매우 큰 것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사발종류였다.
조선에 이런 희귀한 놋그릇이 널려있다는 것은 귀한 구리광산이 지천에 깔려있고, 원시적인 채광기술로도
놋쇠를 값싸게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광물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돼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조선이 유럽과 통상을 하게된다면 광물자원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이상 A기록 발췌요약)
극동의 나라(중국,일본,한국) 민가를 방문하면서 우리가 놀라지않을 수 없고
또 자존심 상하는 노릇 가운데 하나는 그들 나라의 아무리 가난한 집을 뒤지더라도 집안에 책이 꼭 있다는 것이다.
극동의 나라들에는 문맹이 거의 없고 멸시받는다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프랑스에는 멸시받을 사람이 넘쳐난다.
강화읍 남쪽 높다란 언덕위에는 한 관리( * 강화유수일 것으로 추정)의 저택이 있었는데 그 집터의
훌륭한 조망권과 집 내부의 호사스러움은 나의 관심을 끌었다. 비단과 모피를 비롯해
칠기와 청동으로 만든 가재도구들과 도자기들,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동양의 보물들로 그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민들은 그렇게 초라하게 살고있음에도
관리만 이렇듯 으리으리 하게 갖추고 살다니,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조선사람들을 한 사람도 프로로 잡지 않고 죽이지 않자,
이곳 주민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 우리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로즈 제독은 강화읍 주민들에게
발표한 성명을 통해 "프랑스군은 조선 백성과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조선정부와
전쟁하려는 것이며, 그래서 민가와 민간소유물은 건드리지 않을테니 주민은 두려워말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평상시 하던 일에 몰두하고 추수를 할 수도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다음날에는 도망갔던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군과 친하게 지내려 했고 "프랑스군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군은 강화읍 치안유지를 위해 주민가운데 우두머리를 뽑아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자 우두머리로 뽑힌
남자는 겁에 질려 가족을 데리고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군이 떠난 후 오랑캐들에게 복종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프랑스군의 약탈과 부녀자 겁탈의 연속
로즈 제독이 강화읍 주민에게 약속한 "민간재물 존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인들은
제독 몰래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하는 횡포가 온 읍내의 일상이 되었고 강화읍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매우 참담한 사건이었는데, 주민들이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려도 제독은 믿으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들을 거짓말쟁이 취급을 했다.
강화읍 점령후 매일처럼 민간약탈이 발생했는데, 어느 날 참모진을 대동한 로즈 제독이 큰 길을 건너고 있는데
조선인이 나타나 약탈을 그만두라고 하소연을 늘어놓고 "당신 눈으로 직접 약탈현장을 확인하라"고 하자
제독은 "그건 당신의 착각이요. 민간약탈을 자행하는 사람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조선사람들이오" 했다.
그러자 조선인은 "아닙니다. 제독의 부하 프랑스인들이 약탈하고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 현장으로 안내할께요" 했다.
제독은 그 조선남자를 따라 한 민가에 들어섰다. 그때 프랑스군 3명이 상자 속에 물건을 꺼내려고 막 큰 돌덩이로
상자를 부수던 중이었다. 온 집안과 마루에는 옷 궤짝에서 나온 옷가지와 갖가지 궤짝 조각들, 깨진 찻잔들과
대접과 접시들이 산산조각나 뒹굴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광격이었다. 제독은 대부분의 강화읍 민가가 이런 약탈에
시달린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붙잡은 프랑스군 3명에게 벌을 내린 뒤,
그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내쫒았다. 제독이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부하들의 약탈행위는 그 후에도 계속됐다.
프랑스군의 지속적인 약탈행위는 강화읍 주민들의 가슴 속에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었다.
밤이면 약탈에 나선 프랑스군을 막으려 싸움이 벌어졌고 조선사람들이 다쳤다(3명이라고 한다.)
소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집집마다 담궈놓은 막걸리의 불쾌한 냄새였는데, 막걸리를 잘못 건드려 쏟은
프랑스군이 오히려 불쾌하다며 조선인 주민들을 해코지했던 것이다.
약탈에 혈안이 된 프랑스 군인들은 자신들의 개인 노획물을 하나라도 더 챙기기위해 귀중품이 들어있음직한
상자들은 여지없이 부수고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한번은 초상집에 들어가 관의 널빤지를 부숴뜨려
그 안에 든 시체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까지 강화읍 주민은 증언했다.
또 한 여자는 밤새 프랑스군의 윤간에 시달리고 폭행을 당한 나머지, 다음날 아침에 시체가 돼
버려져 있었다고 주민들이 증언했다.
프랑스군에 협조적이던 강화 읍민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인들은 "유럽 군함이 와서 조선의 폭군을 제거하고 우리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 때문에 생존자체가 불투명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죽게됐으니 기왕 죽을 바에는
나라를 지키다가 죽겠다"고 했다.
그동안 프랑스군의 일부는 진지구축작업을 했고 일부는 약탈하러 갔고, 요리사 차림의 병사들은 가마솥을 지켰다.
장작은 풍부했다. 배추, 무, 닭, 돼지고기, 쇠고기 등 부족한게 하나도 없었다. 프랑스인은 종종 이런 식품재료를
조선민간인들로부터 구입했으나, 약탈해 오는 일도 있었다. 제독은 닭을 훔쳐온 병사들에게 벌을 내렸다.
은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발견했을 땐 제독이 미처 그 사실을 보고받기도 전에 상당수 은덩어리는 사라져 버렸다.
제독은 부하들의 불법과 약탈행위를 몹시 싫어했으므로 고민이 깊어만 갔다. 아무리 통제해도 안되는 부하들의
약탈행위라면 차라리 강화읍 전체를 송두리채 약탈하도록 그냥 놔두는 편이 더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점령기간이 연장되면서 로즈 제독의 식탁에 오르는 먹을 거리는 점점 초라하게 변했다.
그러나 약탈에 익숙해진 병사들의 식탁은 언제나 풍성했다.
조선사람들도 프랑스군의 약탈행위에 결코 뒤지지않았다. 읍내를 돌아다니며 민가를 털던 조선 사람들가운데
횃불로 불을 놓고 다니는 조선인 한 사람을 붙잡기도 했다. 그를 군법회의에 넘겼으며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3일 후 비밀리에 마을 근처로 끌고가 총살했다.
장기화된 점령, 강화도 가을풍경에 반한 프랑스군
장교들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장교들은 "조선군의 무장이 하잘 것 없으므로 프랑스군 정도의 무력이라면
충분히 한양을 공격하고 점령할 수 있다"며 1차원정 때처럼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많았다.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우리의 무력을 충분히 과시했기 때문에 분명히
조선정부가 교섭하러 올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로즈 제독은 "기다리자"는 장교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아아, 슬프다! 이 같은 연약성. 이런 망설임이 나중에 프랑스의 명예에 치명타를 입힐 줄 누가 알았을까.
프랑스병력 일부는 갑곶이 마을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강화읍에 포진했다. 그리고 요새를 쌓는 일과
참호를 만드는데 모든 인력을 동원했다. 우리는 조선을 공격하려 왔는데, 강화도점령에 성공하자 요새에 틀어박혀
어느듯 방어태세에 몰두하는 뒤바뀐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강화도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치가 아름답고 계절의 변화가 있으며 풍요롭다는 것이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하나같이 이 지방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경탄했다. 병사들은 가끔 "얼마나 기후가 좋은가!
참 풍요로운 나라야! 프랑스가 안남(베트남)을 정복하는 대신 이곳에 자리를 잡았었더라면!" 했다.
따분한 점령지생활의 기분전환을 위해 프랑스군은 섬 안을 두루 구경 다녔다.
(이상 C기록 발췌요약)
우리는 근무시간 외에는 보통 사냥하는데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강화주민들은 총으로 쏘아 잡은 새나 짐승은 먹지않아서 사냥감이 섬 곳곳에 넘쳐났다.
꿩, 거위, 야생오리, 상오리, 물떼새, 산비둘기 등이 잇달아 우리의 식탁에 올랐는데 이런 호화로운
식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야산에 털 달린 산짐승은 흔치 않았는데, 산토끼도 한마리 구경하지 못했다.
나는 강화도에서의 그 즐거운 소풍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리라. 날씨는 날마다 그럴 수 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공기는 습기가 살짝 묻어있고 찬란한 햇빛이 논밭과 숲으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햇빛에 잠긴 숲이 바람에 일렁이면 노란 낙엽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런 뛰어난 풍광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사실 없었다.
오두막집은 모두가 비슷비슷했고 거기에 사는 원주민 역시 닮아있었다.
처음 갑곶에 상륙할 때는 공포에 질려 도망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추수하던 그들 앞으로 지나갈 때면 항상 우리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고,
어느 민가에 들어가도 집주인은 지나칠 정도로 각별한 예의를 표했고 감과 함께 냉수를 대접했다.
사실, 강화원주민들은 프랑스군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자기나라 관리들에게도 늘 이런 식으로
무릎을 꿇어야했기 때문에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만, 우리에게까지 이런 비굴한 행동을
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조정과의 갈등
10월18일, 한양 조정에서 파견한 고위관리하나가 국왕의 공식서한을 가지고와서 로즈 제독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조선국왕의 개인적인 입장만 변론하고 있었다. ( * 필자 註; 이 공한은 국왕이 보낸 것이 아니었고
조선조정이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의
총책임자 순무천총 양헌수가 보낸 침략군 성토 격문이었다)
"프랑스 선교사의 처형은 하늘의 뜻과 국법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조선은 예로부터 이웃나라와 친하게 지냈고
헐벗고 가난한 자나 멀리서 온 외국인을 따뜻하게 배려했다. 그런데 너희나라는 강화도가 마치 너희 땅인 것처럼
제멋대로 점령하고 눌러 살고있으니 가증스럽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멋대로 왔다갔다해도
먼나라에서 왔다며 적대행위도 않았고 오히려 소나 닭을 보내주었다. 너희들은 지금 대병력을 이끌고 마치 하늘의
심판을 내리는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있다. 조선의 조정으로 들어오라. 와서 우리와 대면하고
전투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철수 할 것인지 결정하자. 퇴각하여 달아나지 마라, 너희들은 머리를 숙이고
조선임금의 명을 받을지어다! 음력 9월11일"
대원군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1차 한강침공때 조선군은 프랑스함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또 프랑스군은 아니지만, 얼마전 평양 대동강에 스쿠너선(외륜증기선)을 타고갔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은 모두 조선군에 의해 학살당했는데, 대원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국왕의 공식서한을 가져온 젊은 관리는 세련되고 맵시있는 비단관복 차림이었는데,
그러나 프랑스군 어린 수병에게 함부로 막 대하는 걸로 보아서 조선사람들은 역시나 지위고위를 막론하고
버릇없이 무례하기는 매 한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 * 필자 註; 이 무관은 양헌수 순무천총의 격문을
소지하고 전달한 지홍관이었다)
로즈 제독은 답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학살한 프랑스 선교사는 매우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몇해전 중국에서 이와 비슷한
악행을 저질러 대국 프랑스가 토벌을 하니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일을 너희들은 잊었는가?
우리는 이미 조선을 응징하기로 결정했으니 우리 말을 잘 들으면 용서를 해 줄 것이다. 조속히
전권을 가진 고위관리를 우리에게 보내 조선의 잘못을 사과하고 향후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장정(章程; 협약)을 맺으라. 그러지 않으면 일정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란과 재난을 안겨 줄 것이다"
조선조정의 관리가 로즈 제독의 회답을 가지고 간 뒤, 프랑스군은 조선군과 몇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상 A기록 발췌요약)
그러는 동안 조선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협상을 시작하게 되면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대원군은 저항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로즈 제독은 자신의 이름으로 서신 한 통을 대원군에게 보냈다.
이 서신에서 제독은 "대원군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을 담당한
군수들을 체포해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양반가문 출신의 권복조라는 조선인 천주교신자가 붙잡혔다. 대원군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강화도의 유럽인들을 만나러 가라! 만일 네가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권복조는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계속 강요하여 끝내 권복조가
프랑스군 진지로 찾아왔다.
권복조는 프랑스군에게 "여기서 무엇들 하고 있습니까? 서울까지 올라가든가 아니면 이곳을 떠나세요.
여기서는 결코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그는 군함을 철수시키기 위해 대원군이 자신을 보낸 경위를 설명했고,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오게됐다며 설명했다. 로즈 제독은 권복조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목이 잘릴 것"이라 말했을 때 제독은 더욱 믿으려하지 않았다.
로즈 제독은 "권복조를 이곳에 남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인 교우는 "안됩니다. 내가 여기에 남으면
사람들이 저를 반역자로 여길 것이며, 제 아내와 자식들은 사형당할 것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 나만 살자고
여기에 남을 수는 없습니다" 대답하고는 떠나버렸다. 그 뒤 우리는 권복조가 정말로 살해당했고
그의 형제와 전 가족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조선조정은 한번도 전갈이나 회신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동안 강화도에선 모든 것이 평온했다.
소고기, 닭고기, 채소 등 프랑스 병사들은 먹을 것을 풍부하게 찾아냈다. 프랑스인들이 한양침공을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후, 8월에 조선의 북서지방 중심도시 평양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미국의
스쿠너(schooner; 소형범선)급 민간상선 제널러 셔먼(The General Sherman)호 선원들의 학살소식을 한 조선인 교우를
통해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3. 통진의 문수산성에서 조선군과 교전
프랑스군함들이 정박하던 갑곶진과 강화해협을 사이에두고 마주 보고 있던 육지에
조선군대가 주둔하여 프랑스군 동태를 살펴보고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박한 군함들 바로 가까이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에 요새가 하나 있었는데, 이 성벽(문수산성) 이 가려져 보호하고있는 마을(통진)이 있었다.
그 마을 위쪽 산꼭대기의 자그마한 사찰은 관측소 구실을 했다. 우리의 군함들이 정박한 곳에서 아주 가까운
이 요새가 매우 위험한 존재임을 로즈 제독에게 여러차례 알렸고, 로즈 제독은 마지 못해 정찰명령을 내렸다.
10월18일 오전 7시에 증기선 보트가 끄는 소형보트에 병사를 싣고, 문짝없이 열려 있던 이 성문과 마주보는
해변으로 상륙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건넜다. 성벽 아래 물가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성문과 성벽으로부터 일제히
화승총 사격이 시작됐다. 첫 번째 발포 때 프랑스군 두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부상당했다. 기습당한 프랑스 군은
즉시 반격을 가하면서 육지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조선군 몇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도망치게 놔둔 뒤
순식간에 통진마을을 점령했다. 제독은 "마을을 불사르고 성곽 일부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정은 여기서 멈추고 우리는 다시 갑곶으로 돌아왔다.
부상당한 프랑스 수병은 얼마 안가 사망했다. 문수산성에서 전사한 3명의 사체는 갑곶이마을 야산에 묻었다.
그리고 제독은 연설을 통해 "이 용감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것"을 약속했다. 이 연설은 프랑스군에게
새로운 활기를 부여했다. 그런데 눈에 띄지도 않는 조선 군인을 어디서 찾을 것이며, 강화도를 떠나 길도 잘모르는
조선본토 내륙에서 모험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수 밖에 없었다.
4. 정족산성 전투에서의 쓰라린 패전
곧 기회가 왔다. 프랑스군 진지에는 제독의 공문서나 성명서를 번역하고 작성하는 비서역할을
맡았던 조선인 교우가 4명 있었는데, 별다른 일이 없자 한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사실 이들을 부양하는데
투입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던 차에 제독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어느날 저녁 이 교우는 떠났는데 육지로 나가는 나룻배가 없어 다음날 아침 되돌아왔다. 그날 저녁 이 교우는
강화도 남쪽 손돌목(광성보 해변) 나루터로 가기위해 떠났다. 그런데 현지주민들이 육지로 건너가지 말라고했다.
할 수 없이 그날밤을 묵기위해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주인 노인이 그에게 "오늘밤 3백명의 호랑이, 꿩사냥꾼들이
육지에서 강화도 전등사(정족산성)에 잠복하러 들어오며 다음날엔 5백명이 또 넘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프랑스군은 태평스럽게 강화도 온 섬을 무리지어 소풍을 다니고 있다니 얼마나 위험한가.
교우는 서둘러 갑곶 프랑스진지에 돌아가 조선포수들의 강화도 잠입사실을 알렸다. 로즈 제독은 조선인 교우들을
통해 "전등사가 조선군의 요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로즈 제독은 "멋진 일이 벌어지겠군! 우리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조선군을 찾았지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는데, 이제야말로 소규모의 멋진 원정전투를 벌일 수 있겠군!"했다.
바로 그날,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이번 겨울을 나기로 결심하면서 빵굽는 화덕을 완성했다.
겨울을 이곳에서 나는 문제는 프랑스 본국 나폴레옹3세 폐하가 보내오는 다음 번 서신에 따라 최종결정되는데,
제독은 파리로부터의 그 명령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또 강화읍에서부터 갑곶의 함대 정박지까지 커다란 청동종을 운반하는 작업을 했다.
(* 필자 註; 강화동종은 강화성 남문 종각에 매달려 있었다) 로즈 제독은 이 종에 특히 매력을 느껴 전리품으로
프랑스에 꼭 가져가고 싶어 했다. 썰매같은 운반용구를 만들어 그 위에 동종을 싣고 끌어서 운반했다.
이미 상당한 거리를 끌고 왔기 때문에 물가까지 옮겨서 배에 싣는데는 하루정도만 더 작업하면 충분했다.
선적작업은 다음날 30여명의 조선인의 도움과 협조까지 받아 실시하기로 계획했다.
그날 저녁 "내일아침 전등사 조선군을 정찰하는 원정대가 출발한다"는 로즈 제독의 명령이 떨어졌다.
11월10일 아침 6시에서 7시사이 갑곶진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전등사까지 행군해 진격하기로 했다.
해군대령 올리비에 장이 전등사 원정대의 지휘를 맡았다. 1백60명의 해군소총병 부대와 지휘 장교들은
소풍다녀오는 기분으로 바람쐬고 눈요기나 할 겸 전등사로 가기로 했다.
원래는 2문의 야포를 끌고 가기로 했는데, 야포 지원사격까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출발당인 거추장스런 야포견인은 없던 일로 해버렸다. 원정 부대원들은 하루분 식량을 갖고 오전 7시경 출발했다.
강화읍 성벽 밑을 통과하면서, 원정대는 도즈리 지휘관의 정찰분견대를 만났는데 그들은 전등사원정을 모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지치지않게 행진도중 쉬엄쉬엄 휴식을 취해가며 꽤 폭이 넓을 길을 따라 이동해갔다.
행군도중 강화도주민들은 별로 만나지 못했으나 마주친 사람마다 도망치거나 아무런 말도 하지않으려 했다.
한 주막 주인에게 전등사 상황을 물었더니 "어제만해도 절에 군인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모르겠습니다" 했다.
마침내 전등사로 올라가는 좁을 길을 접어들자 정족산성 성벽이 보였고, 절로 가파른 길을 따라
상당수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정문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성벽이 펼쳐진
산을 돌아야만 했다. 정족산성까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오전 10시쯤 지휘관이 "점심을 먹자"며 행군을 멈추라고 했다.
지휘관은 "잠시만 참아라, 곧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했다.
그때 드라살르가 지휘하는 선발대를 먼저 산성쪽으로 보냈다. 선발대는 산으로 가는 오른쪽 오솔길로 들어선 뒤
곧바로 협곡으로 사라졌다. 점심식사후 본대는 계속 전진했다. 잠시 후 산모퉁이에 이르자 성곽 정문을 볼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길이 정문에까지 이어졌다. 성문은 열려 있었는데, 오래된 요새들이 다 그렇듯 문짝마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바로 몇 발짝 앞으로 군인복장은 아니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인 한 명이
얼핏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를 추격하러 나섰다.
추격임무를 맡았던 병사들은 "그 조선사람이 마치 땅속으로 숨어 버린 것 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산지가 많은 조선의 사람들은 잘 달리고 산을 오르내리는데 매우 재빨랐는데, 특히 사냥꾼들이 더 민첩했다.
성문까지 상당한 거리를 두었을때 정찰나간 선발대를 기다릴 겸 본대는 행진을 멈추었다.
선발대는 협곡으로 들어간 뒤 다른 지점으로 성벽에 접근했다. 절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문 너머를 주시했으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그 안에 조선군이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성벽 가까이에서 마치 허수아비같은 한두 사람만의 머리가 보였는데 공격신호를 내리려 우리를 살피는
지휘관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조선군의 나팔소리가 들렸고, 프랑스군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접근조 몇 사람이 앞장 서 나갔다. 나머지 대원들은 밀집종대로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강화도 갑곶이 해변에
처음 상륙할 때나 강화성을 점령할 때처럼 이번에도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없이 입성할 수 있을 것으로 쉽게
생각해 미리 대비하는 것에 소홀했고 전략적인 면에서도 준비가 소홀했다.
조선군 일제사격, 프랑스군의 처참한 패퇴
선발대로 나갔던 접근조가 성문에서 불과 몇 m 안 되는 곳에 있었고, 본대의 선두가 성문과 약 30m 거리를 두고
잠시 쉬면서 점심식사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갑자기 정족산성 성벽 전체에서 조선군 화승총의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아주 맹렬한 기세의 사격이었다. 갑작스런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은 주춤하다 곧 전열을 가다듬고 사방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몸을 숨길 곳이 전혀 없어 조선군의 사격권에 완전노출됐으니 얼마나
불리한 지경인가. 반면에 성곽 뒤에 숨어 감시구를 통해 사격하는 조선군은 머리꼭지만 간신히 보였다.
프랑스군이 맨 처음 취한 동작은 화승총 사거리 밖으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지휘관들의 명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 각자는 본능적으로 성벽으로부터 멀리 도망갔다. 우리의 반격 사격은 사실상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지휘관 드투아르는 부하 소총수들을 짚더미 뒤로 숨게 해 조선인들의 총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짚더미 뒤에서 프랑스군은 36명이나 되는 많은 부상자들을 나르는 병사를 엄호사격했다.
조선군의 사격은 계속됐고 그들은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러 밖으로 나오려했으나 지휘관이 반대하는 듯 했다.
프랑스군도 조선군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성곽 쪽으로 총격을 가했다. 그 순간 맹수에게 집중사격하듯
화승총 사격수들이 일제사격을 퍼붓는 사이를 뚫고 성벽옆 산길에서 급히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가 "프랑스군이다" 외쳤다. 그를 엄호하러 병사 몇명이 앞으로 나갔다. 몇 분이 흘렀다. 얼마 후
엄호하러 뛰쳐나간 병사 라게르의 양팔에 들려서 나타난 프랑스군은 선발대 지휘관 드 라살르였는데, 그는 선발대보다
앞서 나갔던 탓에 집중사격을 받아 목숨이 위독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부상자들은 조선군 총과 포탄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성문과 마주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다 한사람씩 후송했다.
올리비에 대령은 전 부대원을 이 언덕에 집합시켰다. 성벽 위에 서서 거칠게 고함지르는 조선군들이 보였는데,
그 고함소리는 승전가였다. 조선군은 자신들의 승리에 기뻐하며 취해 있었고 그토록 쉽게 이긴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들을 주시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프랑스군의 36명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줄 군의관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모두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점심을 먹지 못했다. 장교들의 식량은 무기와 짐꾸러미를 노새의 등에다 실었는데,
그 노새는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적진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갑곶 프랑스군 야영기지로 복귀해야 하는데 모두가 지쳐 걸을 수 없는 상태이니
부상자들을 또 어떻게 이송한단 말인가! 지휘관은 매우 불안 해 했다. 여러 가지 궁여지책이 나왔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왔던 큰 길을 따라 되돌아가는 것 뿐이었다.
우리는 들 것을 몇 개 만들었고 타고 갈 짐승(노새)들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총소리에 놀란 노새들은
사람 손에 잡히려 들지 않았다. 노새들은 병사들의 빈 수통도 지고 있었는데, 노새가 달그락 거리는 빈 수통소리를
내며 적진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노새를 사살키로 했다. 여러 방 총을 쏘아댔으나 노새는
더욱 미친 듯 날뛰며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노새가 놀랍게도 제독이 있는 갑곶 야영기지까지 달려가
정족산성 전투의 패전소식을 전해주게 된다.
부상자호송을 돕게 들판에서 일하는 조선인을 몇 명 붙들려고 했으나,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모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강화읍 근처에 도착하면서 언뜻 보았던 사람들도 달아나버려 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던 모든 채비를 마치고 우리는 진지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약 12명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선두에서 걷기 시작했다.
36명의 부상자들과 그들을 부축하는 50여명이 선발대의 뒤를 따랐다.
조선인의 추격을 저지하며, 프랑스군의 퇴각 엄호임무를 맡은 후위대는 나머지 60여명으로 구성됐다.
이런 몰골로 귀환하는 꼴이란 매우 참담하고 비통했다. 병사들 모두가 가장 애통한 표정을 지었다.
길바닥에 흩어진 부상자 이송을 돕게 선발대 병사들도 거들었다. 후위대와는 3km의 거리가 벌어졌다.
중상을 입은 장교호송에 어려움이 많았고 후위대는 곳곳의 요새에 포진한 조선군을 경계하느라 천천히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군을 만날까 매우 두려웠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순간에 조선군의 공격을 받았다면
프랑스군은 심각한 피해을 입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프랑스군의 소총위력을 알고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로즈 제독은 진지 안에 있었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총성이 들렸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졌음을 추측했고
오래지않아 아침에 원정대와 함께 떠나보낸 노새가운데 한마리가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아 피범벅이 된 채
진지로 돌아오는 걸 보았다. 걱정된 나머지 참모진을 데리고 제독은 길을 떠났다. 그래서 파견대의 선발대 병사와
만나게됐으며 참담한 패전사실을 전해들었다. 제독은 부상자들에게 일일이 위로의 말을 건냈다.
자신이 아끼던 장교들 몇몇이 부상당한 것을 알고는 매우 가슴아파했다.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병사들이 조금씩 야영기지에 도착했다. 얼마 뒤 강화읍을 지키던 도즈리 분견대와 함께
다음날 설욕전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진지내에 돌았다. 모두가 설욕전을 원했고 자원 참가하려 했다.
장난감같은 화승총에 당한 치욕의 패배를 설욕하는 일은 그만큼 절박하게 여겨졌다.
몇몇 장교들은 설욕전이 매우 쉽다고 주장하며 전등사원정 실패는 전략부재와 경솔한 지휘때문이었다고 했다.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은 "우리를 도살장에 몰아 넣었다!"며 분개했다. 도망친 패잔병의 변명 밖에 안됐다.
어떤 병사는 "나에게 160명의 프랑스군을 줘 보라지! 한 명도 잃지않고 조선군을 전멸시킬 자신이 있어!" 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화승총보다 훨씬 멀리나가는 소총이 있다"며 적당한 거리에 자리만 잡으면 조선군 화승총은
무용지물이어서 우리를 맞힐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어!" 했다.
프랑스군이 평가한 조선군과 '강화 화승총' (A기록 발췌)
"강화도 점령시 몇 차례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조선군은 훈련이 잘 돼있고 민첩했으며 어느정도 용맹성도 갖췄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몇 차례의 교전을 통해 강화무기고에서 대량으로 발견한 활이나 투창, 곤봉같은 재래식 무기는 조선군이 더 이상 사용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됐다. 조선군의 무기는 모두 화승총 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화 화승총은 사격시 거총(擧銃)이 매우 힘들다. 개머리판이 너무 작아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조선군 화승총 사격수가 편하게 조준사격을 잘 하려면 총신 버팀대 같은 보조기구나 가슴팍을 보호하는 장구가 필요하다. 야전에서는 동료병사 어깨 위에 총대를 얹어야 사격이 가능할 정도다.
사실 조선군의 포(砲)는 그다지 두려운 무기가 아니다. 어쩌다 포탄이 목표물에 명중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다.
조선군 병사가운데 몇 명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붉은 깃털장식을 한 쇠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짠 팔받이와 넓적다리 가리개를 착용했다. 삶은 가죽판 두 겹을 포개 굵은 못으로 꿰매 안을 댄 커다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런 갑옷으로는 화승총 탄환이면 몰라도 프랑스군의 총알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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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패배했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 사냥꾼의 강화화승총 매복공격에 무참히 당한 프랑스 해군병사들.
부상병들을 이끌고 갑곶진지로 귀환한 160명의 병사들 모두는 "꼭 설욕, 복수전을 가져야 한다"고 별렸고
로즈 제독이 꼭 설욕명령을 내릴것이란 기대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그날저녁 로즈 제독은 강화읍에 파견나가있는 도즐리 지휘관인솔 분견대에게 청천벽력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강화도를 떠날 준비를 하라. 강화읍내 프랑스진지를 포기하고, 강화읍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의
모든 것을 불질러 없애버리고 내일새벽 부대전원은 우리 군함이 정박해있는 갑곶이해변으로 철수하라"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갑곶이 프랑스진지의 병사들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병사들은 하나같이 아연실색,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제독의 명령이니 따라야 한다.
우리는 패배했다. 위대한 나폴레옹3세 황제의 대국 프랑스가 조선에 패해 도둑고양이처럼 새벽도망을 치다니!
출항시간은 11월11일 새벽6시로 결정됐다.
출항이라기보다 패주(敗走)가 옳았다. 그동안 한달 넘게 머물렀던 갑곶이 마을 프랑스주둔지에는
진행중이던 진지구축, 병사들의 월동대비 주거지(민가개조)가 미완성인 채 남아있었다. 그 뿐 아니다.
맛있는 빵을 병사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프랑스식 화덕(오븐)을 새로 만든지 며칠 만에, 두 번 밖에 빵을 구워보지
못하고 그곳에 버려두고 떠나야 했다. 그것들의 모습이 프랑스군의 눈에 밟혔지만, 어쨌건 그들은 떠나야만 했다.
강화동종, 구사일생으로 강화도에 살아남다
출항직전 로즈 제독은 전함이 과적으로 좌초하지 않게 "꼭 필요한 군수품만 싣고 나머지는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 때문에 강화읍으로부터 어렵게 갑곶이 해변까지 옮겼던 상당수의 노획, 수탈물은 배에 싣지 못했다.
로즈 제독이 탐냈던 강화동종은 프랑스군 진지 해변까지 운반을 완료해 곧바로 전함에 싣기만 하면 됐는데
아깝게도 그냥 그곳에 둘 수 밖에 없었다. 강화도민은 그들의 강화동종을 되찾게 돼 승리의 증거처럼 여길 것이며
새벽에 도망간 프랑스군을 조롱하는 상징처럼 생각하며 얼마나 의기양양해 할 것인가? 프랑스군 철수대열은
길 한 가운데를 버티고있는 강화동종을 피해 두 갈레로 쪼개져 전함에 올랐다.
프랑스의 마지막 수병들이 갑곶이 마을을 떠나자, 군함들이 출발도 않았는데 자신의 집을 무단점거하여
프랑스군인들이 개조해놓은 곳으로 주민들이 속속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고쳐놓은 집안 꼴을 보고난뒤
아연실색해하는 현지주민 모습이 전함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작약도에서의 씁쓸한 '조선원정 해단식'
군함이 강화도를 출발하자 주민들이 해안에 늘어서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살이 빠른 강화해협 남쪽의
좁은 수로에 접어들자 해협 양쪽 연안으로부터 조선군의 집중 화포공격을 받았다. 요새와 숲속에 숨은 조선인은
전함을 향해 사격을 해댔는데, 총탄이 전함에까지 날아왔다. 좁은 수로를 빠져나올 때까지 사격전은 계속됐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환호하며 조선사람들이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은 프랑스군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저녁에도 외적을 겁주기 위해 또 승전을 기리는 기쁨의 표시인 조선인이 피운 횃불로 온 해안이 빛났다.
강화 갑곶이를 철수한 두 척의 포함과 두 척의 수송함(통신선)은 인천 앞바다 작약도에 정박중이던 기함 게리에르과
소형구축함 프리모게와 합류했다. 여기서 프랑스함대 모두는 조선침공을 포기, 떠날 준비를 하게됐다.
▲ 작약도(芍藥島). 인천 월미도 북쪽 3km에 위치한 면적 22,000평(0.0729㎢)의 섬.
작약꽃 봉우리처럼 생겼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안선길이 1.2km, 정상높이 57m.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본거지로 삼았는데, 프랑스군은 멀쩡한 우리의
섬이름을 무시하고 '부아제'(Boisee; 울창한 숲이라는 뜻)란 자기식 이름을 지었다.
19세기 당시 '세계원정'에 나선 프랑스는 꼴 같잖은 국수주의(國粹主義)에 찌들어
그들의 발길이 닿는 외국 어느 곳이던 '프랑스이름'을 명명하고 다녔다.
로즈 제독은 초조했다. 자신의 결정으로 무력침공작전을 펼치고도 실패한 사안을 본국 프랑스 외무부장관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염려때문이었다. 프랑스에 보낸 강화도 점령 보고서가 외무부로 부터 어떤 내용의
답장을 받았는지 통신함 라플라스함을 중국 즈푸의 프람스 극동함대 본부에 보냈는데,
그 배가 다시 작약도에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작약도에서 사나흘을 정박하는 동안 군함들은 수로의 해도를 작성하며 보냈다. 마침내 라플라스함이 도착했고
함께 떠났던 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도 되돌아왔다. 프랑스 외무부장관이 보낸 답신의 내용은 "그동안 강화도에서
로즈 제독이 행한 군사행동은 잘 한 것으로 판단되오만, 조선에서의 모든 군사행위에 프랑스정부는 개입시키지
말기 바랍니다"는 내용을 받았다. 국제적으로 프랑스정부가 비난받기를 원치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선교사들은 "프랑스가 조선을 응징하겠다고 공언해놓고 무력시위도 실패로 끝나자 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가
나날이 더욱 심해지고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로즈 제독은 선교사들을 달래며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조선을 응징했습니다.
이제 중국으로 돌아가서 좀 더 많은 병력을 대동하고 내년 봄에 다시한번 조선원정을 단행하려고 계획중입니다.
지금 조선을 철수하는 것도 프랑스정부의 지침이 아니며 전적으로 제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했다.
아니, 제독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게 고작 그것 밖에 안 된단 말인가. 또 프랑스정부의 입장은 그게 뭔가.
너무나 조심스럽고 무사안일한 태도다. 조선원정은 처음부터 프랑스정부가 결정하고 프랑스국민의 세금으로
군자금을 대주어 전쟁선포까지 했던 것인데, 이렇게 수치스런 패주를 하고보니 프랑스 외무부는 "정부개입 사실을
부인하라" 발뺌이나 하고 로즈 제독은 "내년 봄에 다시 설욕전을 펼치겠다"는 두루뭉수리로 조선원정의 실패를
흐지브지 결말짓고 말았다. 아, 슬프다 프랑스정부는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강화도를 급작스레 철수하게 된 배경은 누가 보아도 정족산성 전투패배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로즈 제독은 본국 외무부의 훈령을 받기도 전에 정족산성 전투가 끝난 다음날 새벽 서둘러 강화도를 철수했으며,
작약도에 프랑스함대 전부를 집결시켜 급기야는 한반도에서 완전철수하는 준비를 하게했던 것이다.
11월20일. 프랑스의 조선원정군 함대를 총지휘했던 로즈 제독은 장교들을 모두 소집, 조선원정군을 공식해산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로즈 제독은 "그동안 목숨바쳐 조선원정에 참여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모든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우리는 강화도에서 추운 겨울을 날 수 없기때문에 부득히 철수하게 됐다"고 했지만
그 말에 동의하는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떠날 때부터 본국 프랑스에서 관심과 화제가 됐던 조선원정이 결과적으로는 참전병사들 모두에게 얼마나
쓰디 쓴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말었던가! 프랑스군 모두는 조선에 참패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독의 입에 발린 치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장교는 별로 많지 않았다. 몇몇 병사는 이런 말까지 했다.
"제독은 항상 예의 바르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프랑스기를 반기(* 弔旗; 국가의 치욕스런 날에 게양하는 국기)로
게양해야 하고, 제독을 상징하는 깃발 대신 차라리 상장(* 喪帳; 초상집에 내거는 휘장)을 내거는 편이 더 낫다.
제독은 얼음이 어는 계절이 왔다는 것을 귀환구실로 내세웠지만, 그러나 우리가 떠날 때 강화도에는 얼음이
전혀 얼지 않았다" (이상 C기록 발췌요약)
남은 것은 "프랑스의 치욕"
극동아시아의 모든 해양국가들이 유럽의 무력에 굴복하면서 잇따라 세계교역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만이, 조선을 통상으로 이끌어내려던 여러 나라들의 시도에 맞서며
지금까지 저항해왔다.
프랑스는 1866년 나폴레온3세 집권 후반기에 조선을 원정한 적이 있으나 그 결과는 실패로 이어졌다.
(이상 B기록 발췌요약)
11월22일, 프랑스 극동함대는 조선해안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각 군함은 중국과 일본의 소속기지로 귀환했다.
우리는 조선원정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조금도 거두지 못했다. 한편 우리 함대의 퇴각과 동시에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배가(倍加)되었고 조선정부는 유럽국가와의 침입을 비롯한 타협은 물론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엄금한다는 선언문을 내렸다.(* 대원군의 척화비)
순수하고 고상한 종교(천주교)의 이름으로 피를 쏟는 보복전을 펼치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더군다나 종교는 속칭 '무력'이라 불리는 이 슬프고도 의심스러운 힘을 보복수단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된다.
조국 프랑스에 바라는 바가 하나 있다.우리에게는 아직 탐험되지 않은 나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우리는 공상가들의 공연한 미련따위는 한 쪽으로 제쳐놓고, 허황하고 명분없는 짓은 그만두고
나날이 뻗아나가는 유럽국가들의 실리추구 통상 움직임에 보다 큰 몫을 차지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상 A기록 발췌요약)
로즈 제독이 조선원정 철수를 결정한 뒤 장교들은 "조선을 이런 식으로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인지 아시느냐?"고 지적했다. 로즈 제독은 이에 대해
"우리가 조선에 원정 온 것은 프랑스인을 학살한 조선정부를 응징하러 온 것이지, 천주교인이어서가 아니었소.
그들이 양초나 비누를 파는 프랑스 상인이었다해도 그건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소" 했다.
오! 그건 아니다. 조선 교우들이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프랑스군을 도왔던 이유는 모두 프랑스를 위해서였다.
프랑스란 나라가 조선을 점령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사항인 천주교를 마음껏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천주교국가인 프랑스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무신론의 나라, 배교자(背敎者; 자신의 종교를 배반한 사람)의 나라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선교우들은 프랑스군을 위해 결코 그같은 헌신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사꾼 프랑스사람을 위해서는
더욱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교우들은 오로지 너그럽고 정의로운 '천주교나라 프랑스'를 믿었다.
결국 프랑스인들은 조선 천주교우들의 신의를 배반하고 기만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천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고 단지 '점령군'으로 머물고자 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국력도 보잘 것 없고 단순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조선민족에 의해 프랑스기가 모욕당했다.
영광스런 프랑스 삼색기는 그들의 짚신발에 밟히고, 화승총부대에 까지 패배하여 찢기고, 수치스럽게 진흙바닥에
굴러다니는 꼴을 보아야 했다다. 이 얼마나 모욕적인가!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이번 조선원정을 결코 대외적으로 떠벌이지 않으려하고,
보고서에서 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군의 수치는 원정군의 가슴에만 남은 것이 아니다.
병인양요의 결과로 조선에서의 유럽인 천주교도 학살을 더욱 '합법성'을 획득하게 됐다.
프랑스가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조선인들이 무장여부를 떠나 서양오랑캐를
만나는 즉시 학살한다 해도 그건 정당한 '전쟁행위'의 결과이고 조선의 정당방어권이 된다. 참으로 수치스럽다.
대국 프랑스의 정예군과 맞서 조선이 거둔 승리는 그동안 지구촌을 호령하던 유럽국가의 위신을 한순간에
추락시키고 말았다. 유럽의 위신은 조선에서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실추되었다. 중국인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하찮은 조선인이 어떻게 유럽인을 자기나라에 발 붙이지 못하게 막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대중국(大中國)의 백성인 우리는 유럽인을 쫓아내거나 다시 못오게 막지 못했으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군!"
(이상 C기록 발췌요약)
1866년 강화도 한불(韓佛)전쟁 - 프랑스의 기록. 끝
* 본문내용은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사전허락없는 무단전재나 임의복사를 엄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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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1840년대 이후로 작열탄과 탄피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에게 사거리 1km의 구식 총통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당시 서양이 선교사를 보내는 이유는 전쟁을 위한 구실같습니다.(인디언들처럼 순순히 받아들여도 침공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