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文)씨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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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
문다성(文多省) |
시조 유래 |
시조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慈悲王 : 제20대)때의 사람으로 문다성의 출생에 대한 전설(傳設)이 전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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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현(南平縣 : 현 전남 나주군 남평면)에 동쪽 장자지(長者池)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있다.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2월에 군주(郡主)가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올라가 보니 돌로된 함안에 피부가 옥설(玉雪)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군주가 데려다 키웠는데 5살에 글을 저절로 깨우치고 무략이 뛰어나며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등 총기가 있어 성(姓)을 문(文)이라고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고 했다(돌로된 함에 '문'자가 새겨져있어 성을 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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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500년(지증왕1년)에 중시아랑이 되고, 540년(진흥왕1년)에 대국사, 577년 (진지왕2년)에 대아랑 대국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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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미터쯤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생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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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전남 나주군 남평면 덕용산 능사동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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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못가에 있는 장연서원에서 매년 음력 9월에 향사한다. |
창성 유래 |
본관은 남평(南平) 단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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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는 남평 ·단성(丹城) ·안동(安東) ·영산(靈山) ·보령(保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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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善山) ·강릉(江陵) ·하양(河陽) ·감천(甘泉) ·정선(旌善) ·장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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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淵) 외에도 도합 132본이 있으나 모두 대종인 남평문씨의 분파이고,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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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씨의 세거지(世居地)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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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의 시조는 신라 자비왕 때 사람인 다성(多省)이다. |
지 명 |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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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는 전남의 중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전남의 타 시군에 비해 행정구역 변경이 잦은 편이다. 청동기시대부터 현전하는 많은 지석묘의 유적으로 보아 서남해지방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고 마한시대에는 대형 옹관고분 유적 . 유물로 보아 마한의 지배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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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점령하여 나주라 개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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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일시 이곳에서 피난한 인연이 있어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나주목사는 진을 두고 영암 ·영광의 2군과, 함평 ·고창 ·광산 ·장성 ·진원 ·무장 ·남평 ·무안의 8현을 관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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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면리제가 정비되면서 나주목은 38개 면과 현 신안군 일대 30여개 이상의 도서를 관할 하는 목사고을로 많은 호구와 전결을 보유하고 교통으로 청암도와 조은으로 영산창을 가진 큰 고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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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고종 32)에 지방제도 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구분하면서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다. 이듬해에 다시 전국 행정구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나주부가 폐지되고 나주목이 나주군이 되어 전남의 1등군이 되고, 전남의 행정중심이 광주로 옮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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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는 4개면이 함평군으로 각각 이속되어 모두 10개면이 영암군 . 무안군 . 함평군으로 이속되어 나주군은 30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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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행정구획 개편으로 나주군내 30개면이 14개면으로 통합되고, 이때에 남평군지역이 나주군에 병합되면서 남평군 12개면이 5개면으로 통합되어 나주군은 합계 19개면으로 개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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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7월에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31년 11월에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16면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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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15일에는 삼도면 ·평동면 ·본량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어 2읍 13면이 되었고, 1981년 7월 1일에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되었으며, 나주군은 여타 13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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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이르러 금성시는 유서깊은 이름인 나주시로 다시 개칭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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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나주군과 나주시가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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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과소동 통폐합에 따라 5개동을 축소 조정하여 1읍 12면 6개동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남평읍과 세지 ·왕곡 ·반남 ·공산 ·동강 ·다시 ·문평 ·노안 ·금천 ·산포 ·다도 ·봉황의 12개면과 송월 ·영강 ·금남 ·성북 ·영산 ·이창의 6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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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소개 |
고려조에서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중흥조 文翼(시호敬節公)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3년) 좌·우찬성대부(左·右贊成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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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의 아들 文公仁(평장사), 文公裕(예,병부상서,시호敬靖公), 文公元(평장사), 文可觀(조계종대선사) 등 4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 중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문공유는 예종(睿宗)과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일세의 명필로 묘향산 보현사에 創寺碑文을 남겨 그의 글씨가 비석으로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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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유의 아들 문극겸(克謙 :시호忠肅公)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한 賢相으로 이름이 높았고, 의종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이되어 환자 백선연(白善淵)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황주판관,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의 상주로 합문지후로 전임, 전중내급사로 승진되었다. 문극겸은 의종때 왕에게 여색을 멀리하고 政事를 바로 펼 것을 간하다가 왕이 이를 듣지 않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지금도 충남 공주 유구역사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문극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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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의종24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앞서 좌정언으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의종 역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자 우승선, 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해내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의 자문을 받았고, 용호대장군을 겸임, 후에 상장군까지 겸하여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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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대부소경, 예부시랑, 추밀원 부사, 태자태보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가되고, 1187년(명종17년) 권판상서 이부사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사후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남 합천에 그를 추모하는 송호서원이 있다. 그의 아들이 高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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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반인에게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 옷감 혁명을 일으킨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 :시호忠宣公)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16년) 강성현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1360년(공민왕9년) 문과에 급제하고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을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12년)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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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 황제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월남)에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인 목화씨룰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옷감혁명을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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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공민왕(恭愍王) 때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러 하였으나 끝까지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왕명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왜군들이 문익점이 살았던 마을을 효자마을이라 하여 공경하면서 피해갔다고 한다. 사후에 江城君에 봉해졌고, 조선조 세종 22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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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점의 아들 中庸·中誠·中實·中晋·中啓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첬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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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氏중에는 고려말 공민왕때 판도판서 벼슬을 지내고 江城伯에 봉해진 文得俊을 시조로 분관, 본관을 江城으로 하는 또 하나의 집안이 있으며 高麗史, 國朝榜目등 일부 문헌에는 문익점이 江城人으로 기록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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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고려조의 인물로는 12公徒의 하나인 정헌공도(貞獻公徒)를 양성한 학자 正,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진 文達漢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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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에 남평문씨의 일파는 濟州로 이주하여 제주 토착성인 高氏와 손잡고 연합왕조를 형성한 독특한 역사적 기록도 있다. 高氏는 星主, 文氏는 王子의 작위를 세습하며 독립정권을 유지하다 조선초 본토에 귀속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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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개국후 남평문씨는 일부를 제외하고 중앙정계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선조들이 이씨왕조에 충성을 거부했으니 가문의 쇠퇴는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 같다. 총 51명의 문과급제자를 냈으나 두드러진 인물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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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文緯世(익점의 9세손,목사)가 용담 현감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장수 文弘獻(지평), 文緯(현감), 文德敎(좌랑), 文益顯(정랑)등은 의병을 모아 구국의 대열에서 싸웠다. 광해군 때 廣州牧使를 지낸 文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文載道,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文基浩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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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文彬(세종,판중추원사), 文天奉(한성판윤), 文尙行(태종,예조참의), 文敬仝(명종,사성), 文瑾(숙종,참판), 文益成(지평), 文敏(판통례문사), 文勵(대사간), 文致(文原君)등이 그 중 알려진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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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의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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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들면서 文氏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침묵에 반발하듯 약진의 기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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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임시정부 교통장관을 지냈던 文昌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호남 의병장으로 항일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활약하다 대구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문태서장군, 재미교포 항일단체인 大同保國會 회장을 지낸 文護穆,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文一平, 우리나라 최초의 「새국어사전」을 펴낸 文世榮등은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후의 격동기를 의롭게 살다간 의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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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남평문씨는 정계, 학계, 언론계, 재계, 종교계, 군등 각계에서 다수의 장,차관 및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판검사, 군장성, 종교지도자(文鮮明,통일교교주)등을 배출하는등 후손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
계 파 |
중시조 경절공 익을 1세로 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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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경정공 공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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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충숙공 극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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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에 이르러 후식의 후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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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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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공파(익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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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납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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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질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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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안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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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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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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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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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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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혜공파-8세 판도판서 간혜공 근의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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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평군파-9세 순평부원군 달한의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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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혜공파는 그 후 9세 세린의 후손이 광릉등 14개파로 분파되고 11세 여충의 후손이 대현,이토례,남계,밀양 4개파로 분파되었다. 12세에 이르러 찬의 후손이 창원파로, 노의 후손이 고품,죽죽,오동골,창후,팔심,가남,장서,율원,오곡 9개파로 분파되고, 13세에 이르러 경화의 후손이 고성,고성심묘 2개파, 경지의 후손이 대지파(대병면 대지리)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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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이르러 사미 경충의 큰아들 완의 후손이 회동파(대병면 회양리 도롱골)이고, 둘째아들 영의 후손이 지금의 역평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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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평파의 파조 영의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사미 경충이요, 할아버지는 성균관진사 규이고, 증조부는 홍문관교리 여영이며, 고조부는 진이요, 5대조는 전농판서 세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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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 익창과 익신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익창은 임진왜란때 곽준과 조종도와 더불어 창의하여 함양의 황석산성을 지키다 순절하였다. 록권에는 1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우 익신은 통정대부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교류하였다고 충무공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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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평파의 가문에서는 익신을 기준으로 종중으로 삼고 후대의 자손들을 기준으로 소중으로 나누어 각종 제사나 시사를 지내는 중심으로 하였다. |
인 구 |
문씨는 1960년 국세조사 당시 40,419가구, 228,820명, 1975년에는 62,027가구로 집계되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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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88,932가구, 375,765명이며,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32,811 가구에 426,927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23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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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는 118,491가구에 380,530명으로 전체 본관 순위는 21위이며,성씨네 순위는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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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본관을 달리하는 본관이 17개의 본관이 나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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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 본관은 인구수가 1000명이상인 본관만을 나타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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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하건데 이들 본관은 파명을 잘못 나타낸 것으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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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참고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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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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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 문(文) 씨는 1,367 가구에 4,382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3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571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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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문(文) 씨는 1,493 가구에 4,646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2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554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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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 문(文) 씨는 542 가구에 1,67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0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984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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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文) 씨는 844 가구에 2,609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5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761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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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문(文) 씨는 457 가구에 1,337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4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152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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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문(文) 씨는 313 가구에 1,04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6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363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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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文) 씨는 765 가구에 2,537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6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772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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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문(文) 씨는 465 가구에 1,559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1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038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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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 문(文) 씨는 437 가구에 1,462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2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089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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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문(文) 씨는 481 가구에 1,689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9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975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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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문(文) 씨는 405 가구에 1,144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5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276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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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문(文) 씨는 118,491 가구에 380,530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21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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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 문(文) 씨는 565 가구에 1,861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8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914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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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文) 씨는 340 가구에 1,037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7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369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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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문(文) 씨는 463 가구에 1,43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3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1103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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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 문(文) 씨는 743 가구에 2,687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4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748 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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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문(文) 씨는 612 가구에 2,194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7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836 위이다. |
집 성 촌 |
호남의 명산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마을,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남평문씨 일문이 「용강에 붉게 타는 노을」「월출산의 자욱한 안개」「토끼동산 허리의 보름달」등 아름다운 산수속에 4백여년 가풍을 이어온 유서깊은 동네다. 마을전체 350여 가구중 300가구가 남평문씨다. 아마도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의 규모 큰 동성부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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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남평문씨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조선 단종조에 直長벼슬을 지냈던 文孟和, 1454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세조의 패륜에 분개하여 벼슬자리를 훌훌 떨쳐 버리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월출산 기슭 영암으로 이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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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리의 入鄕祖는 그의 후손인 愛松堂 文益顯, 金長生 문하에서 수업한 호남의 名孺였던 문익현은 임진란때 영암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그 선봉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그를 吏曹正郞에 제수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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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蓮 文益周(태인현감)는 이 마을이 낳은 전설적인 효자. 그는 부친상을 당했을 때 묘곁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묘를 지켰는데 하늘이 감복했는지 어느날 그의 집 연못에 핀 紅蓮이 白蓮으로 변했다 한다. 지금도 이 마을 文氏들은 그가 살았던 옛집을 白蓮堂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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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집성촌으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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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옥구군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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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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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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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군 공덕면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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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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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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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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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군 일원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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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 |
남평(文) 성남종친회 031-743-9140 경기 성남시 중원구 은행2동 |
주소입력 |
남평(文) 남평문씨대종회 02-498-9339 서울 성동구 군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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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순평군파부산종친회 051-631-7547 부산-동-범일2-660...(11/5(2층)남평문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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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종친회 051-513-2400 부산-금정-부곡3-23...(종친회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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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사천시종친회 055-854-2760 경남-사천-사천-수석-277...(사천프라자내(주)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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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여수종친회 061-681-7729 전남-여수-신기-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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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제주도두수파종친회 064-746-5959 제주-제주-연-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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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동래성안파종중회 055-384-3684 경남-양산-동-법기-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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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여수종친회 061-681-7729 전남-여수-신기-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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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사천시종친회 055-854-2760 경남-사천-사천-수석-277...(사천프라자내(주)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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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대구 문씨 종친회 053-752-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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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 순질공파 치화문중 031-418-7732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834-9 301호 mksb@nownuri.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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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사헌공파종회 062-521-7716 광주-동-산수-541...(풍년회관3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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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의안공파 062-225-6686 광주-동-학운-768...(태화맨션상가2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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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남평문씨참의공파종중 062-224-4619 광주-동-금-28-2(5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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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 부산종친회 051-324-5501 부산시 동래구 부곡3동 moon051@hihom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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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경숙공종중영성제 061-372-7711 전남-화순-춘양-양곡-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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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대종회 02-3409-2220 광진-군자-46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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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종친회 041-841-7912 충남-공주-유구-추계-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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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文) 남평문씨회지파수도제종중 055-931-0765 경남-합천-율곡-와-395 |
기 타 |
항렬표 - 각 분파별로 상이할 수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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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 호(鎬)현(鉉)흠(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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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 제(濟)승(承)홍(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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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 식(植)모(模)상(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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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 희(熙)형(炯)병(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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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 주(周)기(基)균(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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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 종(鍾)용(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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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 - 영(泳)수(洙)흡(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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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 동(東)학(學)환(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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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 노(魯)섭(燮)훈(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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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 - 재(在)시(時)규(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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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 선(銑)일(鎰)석(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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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 택(澤)태(泰)해(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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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 - 표(杓)근(根)목(穆) |
첫댓글 남평문가는 고려시대에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하여 번성하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이성계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정계에서 퇴출되어 가문이 쇠락하게 되었다,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훌륭한 인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