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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스크랩 38.천동설과 지동설
임광자 추천 0 조회 157 08.11.18 20: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8. 천문학(天文學)과 항해술(航海術)의 발달. 그리고 지리지식의 확대(1)              이길상

 

가. 천문학의 발달

 

(1)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天動說)

 

땅은 평평하게 고정되어 있고, 태양을 위시한 천체가 지구를중심으로 돌아가는데,

 

태양이 땅밑을 돌아 동쪽으로 솟아오르면 낮이 되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서 땅 밑으로 들어가면 밤이 된다.

 

이른바 이런 천동설(天動說)을지금 어느 곳에서 이야기한다면, 매우 무식하다는 말을 듣거나 심하면 바보나 정신이상자로취급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수 세기 전만 해도 세상 사람들, 이를테면 학자건, 건달이건, 이름 높은 승려건 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

 

이런 천동설을 이론적으로 세운 것이 2세기경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그리스 천문학자, 그가 쓴 천문학 저술이 너무나 훌륭하다고 생각한 이슬람의 천문학자들은 아랍어에서 "최대의 서(書)"라는 의미를 가진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이름을 이 책에 붙여주었다.

 

그는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 두고 천동설(天動說)을 지지하는 이유를 진술하고, 계산에 필요한 "현(弦)의 표(表)"를 만들었으며,기하학적 모형을 써서 해와 달의 위치, 일식·월식, 5행성(五行星)의 위치와 각종천문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루었고, 별의 광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특히 1000개가넘는 항성의 황경황위표(黃經黃緯表)라는 것도 만들었다.

 

이런 알마게스트가 13세기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었는데, 이는 점성술(占星術)이 유럽인들의 관심을 불어 일으키면서 높이 평가를 받았고, 다시 스콜라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서에 일치하는 것으로 인정한 뒤 로마 공교회(카톨릭교회)의 공인을 받아 카톨릭의 우주관이되었다.

 

그러다가 15세기 중엽 활판인쇄술의 발달로 일반에게도 널리 소개되었고, 때 맞추어 일기 시작한 원양항법(遠洋航法)으로서 천문항법이 확립되자 갑자기 시대적인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항해에서 사용해 본 결과 실제와 맞지 않는사실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의심들 가운데


첫째로 이 설에 의하면 태양과 달을 포함해서 5개의 혹성(惑星/수성, 금성, 화성,목성, 토성)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公轉)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7개의 천체 중 어느 것이 가깝고 어느 것이 먼지, 이런 거리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힌 것이 없고,


둘째로 태양과 달 외의 다른 5개의 혹성 중에서 역행(逆行)하는 것은 화성, 목성, 토성 3개 뿐인데 그 이유 또한 밝히지 못했으며,


셋째 태양이 지구보다 몇 백 배 더 크다는 것은 프톨레마아오스 자신 뿐만 아니라 누구도 알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큰 태양이 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으며,


넷째로 천구전체가 하루에 한번씩 동쪽에서 서쪽으로 돈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한 권위가 높아질수록 그 의심 또한 높아졌고, 그래서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심스럽게 지동설(地動說)의 견해가 나오기도 했으나 알마게스트에서 제시된 수리적인 이론체계와 로마 공교회의 권위 등에 눌려 누구도 선뜻 말을 하지 못하였다.

 

알마게스트에서 밝히고 있는 천동설을 비판하고 그 잘못을 지적 하려면, 이에 상응하는 지동설에 대한 수리적인 혹은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하여 새로운 천문지식을 내 놓아야 하는데 아직 까지 그런 단계에는 들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그러다가 이것이 16세기 중엽 사제(司祭) 출신의 한 폴란드 천문학자에 의해서 지동설의 수리적인 이론체계가 제시되면서, 1000년 이상 온갖 찬사를 받았던 천동설은 하나의 옛 추억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지동설이라는 것이 그냥 지구가 돈다라고 하면 굉징히 간단한데, 여기에 수리적인 계산이 어떻고, 황도와 기울기, 거리 측정의 복잡한 계산 등이 병행되면 다시 어안이 벙벙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천문학의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천문학을 풀어 보면 대략 이런 것이다.

 

(2)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 / 1473 ~1543)의 지동설(地動說)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비수아강 근처 토루인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코프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카스티냐의 왕 알폰소 10세(1252 ~ 1284)때 만들어진 알폰소항성목록 사이에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문학의 지식을 좀 더 넓히기 위해 1496년 외삼촌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 유학, 볼로냐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공부한 다음, 다시 그리스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고, 귀국 후에는 모국의 프라우엔부르크성당 평의원을 맡기도 하였으며(1497), 그 후 약 1년간 로마로 건너가 그곳에 체류(滯留)하면서 수학·천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고, 다시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에 입학, 의학과 교회법을 배우고 1506년 두 가지 모두 학위를 받아 귀국해서는 의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1512년 외삼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프라우엔부르크성당의 신부로 취임하였고, 그때부터 교회 옥상에 별을 관측하는 장소를 만들고 스스로 만든 측각기(測角器)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그가 지동설(地動說)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 "천구 회전론"(De revolutionibusorbium coelestium)이 1525∼30년 사이에 집필을 마쳤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동설의 주장이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출판을 주저하고있다가, 원고가 그의 제자인 독일 태생의 레티쿠스의 손을 거쳐 뉘른베르크 활판인쇄소로 넘어간 것은 1542년이며, 이 책의 인쇄견본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전달된 것은 이듬해인 1543년 5월 24일 목요일,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였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에서는 당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말틴 루터 등의 반대로 출판되지 못하고, 결국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이 지동설의 전거(典據)가 되어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의 후계자로 이어지면서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은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두 가지 큰 공적은 혹성의 거리를 처음으로 밝혔고, 혹성의 역행 현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태양계의 모습이 현재 알고 있는 태양계와는 다르다는 점인데, 그는 행성의 궤도를 원으로 보고,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주전원(周轉圓)을사용했으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증거는 하나도 밝히지 못했지만, 신체적으로 그는 지독한 근시(近視)였다고 하며, 아직 망원경이 없던 시절에 사제로서 이단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천문학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도주전원(epicycle :周轉圓)이란 프톨레마이오스가 천구상에서 행성들의 역행과 순행을 설명하기 위해만든 행성의 운동궤도를 말 한다.

 

오른 쪽의 그림에서 처럼 행성들은 각각 일정한 크기의 원(주전원이라 함)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돌고 이것의 중심은 이심원이라는 원궤도를 따라 일정하게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행성들의 운동은 그림에서 점선으로 나타난 것이 되고, 지구는 이심원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구에서 바라본 행성들의 운동이 천구상에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항성(恒星)이 아니고, 항성인 태양의 혹성(행성)으로 다른 행성들과 같이 태양을 공전하는 것을 밝혔지만, 공전궤도가 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의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케플러(Kepler, Johannes /1571 ~ 1630)와 갈릴레이(Galilei, Galileo/1564 ~1642)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기는 하나, 그가 풀지 못했던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결정적인 과제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이룩될 수 있었고, 수학적인 복잡한 그의 저서가 당시의 일반인에게는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16세기 말 도미니코 교단수도사 브루노(Bruno, Giordano/1548~1600.2.17)라는 자가 지동설을 떠들고 다니다가, 로마교회로부터 사설(邪說)로 몰리게 되어 체포령이 내리자 스위스, 독일, 영국,프랑스 등지로 도망다녔으나, 결국 잡혀서 이단심문을 받고, 7년간 옥살이를 한 뒤1600년 2월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Campo de piori) 광장에서 화형(火刑)을 당했는데,이것은 지동설을 지지한 사람들의 앞날이 순탄하지 못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때 로마 교회의 사정은 루터의 종교개혁(1517)후, 무려 18년간 트리엔트종교회의(1545 ~ 1563)를 열고, 권위 회복을 위한 여러 방안들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학문 탄압이 효과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이른바 금서목록(禁書目錄)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 선정 작업을 시작하였고(1546) 다시 보충목록을 만들어(1572) 이단심문소를 통해서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지동설에 대한 지지자가 늘어나자 로마 공교회에서는1616년 2월
①태양은 우주의 중심에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②지구는 우주의 중심에있지도 않고 꼼짝 않는 것도 아니다. 지구는 날마다 자전하고 있다.라고 하는 두개의 명제(命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①은 부조리해서 철학적으로는허위, 신학적으로는 이단(異端).
②의 명제도 철학적으로는 허위, 신학적으로는 신앙상의과오(過誤)라고 판정하였는데, 태양은 우주에 중심에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가는 이단으로 몰리고, 이단으로 몰리면 화형의 순서가 기다리는 살얼음판과 같은 무서운 분위기에 지동설은 서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에서는 요한네스 케플러가 묵묵히 지동설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그는 원래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나(1591) 신학에 곧 싫증을 느끼고,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점성술사가 되고자 했었고 실제로 점성술사가 되어 많은 활약을 했었다.

 

당시의 훌륭한 점성술사가 되면 제후나 국왕으로부터 높은 보수와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占星曆)의 편수를 위촉받아 다음해 천체력을 발간하고, 1596년 우주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케플러는 위대한 점성가인 동시에 천체관측가였던 그의 스승 브라헤(Brahe. Tycho/1546 ~ 1601)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궁정수학자가 되어, 브라헤가 남긴 관측자료에 의해 화성(火星) 궤도의 형상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20 여가지의 가설을 세우고 차례로 계산해 본 결과 화성궤도가 태양을 초점으로 한 타원이란 점을 발견하고, 이 법칙은 다른 혹성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面積速度)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전시켰고, 1619년 우주의 조화(De Harmonices Mundi)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런 작업이 대수표(對數表)의 도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경이에 가까울 정도였고 1629년 로그를 사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TabulaeRudolphinae)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30년 전쟁(1618 ~ 1648)으로 서방 왕권에 유린된 피폐된 독일에서그의 이런 업적도 일반의 관심을 끌 수 없었고, 발렌슈타인 후작의 전속 점성술사가 되어 슐레지엔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으나(1628), 전쟁에 회생된 많은 사람들의 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60세의 나이에 기근에 시달리다가 굶어죽었다(1630. 11. 15)

 

케플러가 독일에서 종교전쟁에 휘말리면서도 지동설을 꾸준히 연구했던 때를 같이하여 이탈리아에서는 피렌체 시민계급 출신의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유리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을 때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였고, 15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로 돌아가 아버지 친구이자 토스카나궁정 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이때 습작(習作)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15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배율 30배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그는 이 배율 30배의 망원경을 하늘에 대고, 달 표면에는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우리가 사는 지구의 표면과 같다는 것, 초승달일 때 달의 어두운 부분이 까맣게 보이는 것은 지구의 반사(反射)작용 때문이고, 망원경으로 본 혹성은 원판상(圓板狀)이고, 항성(恒星)은 육안(肉眼)으로 본 것과 같다는 것, 목성에는 4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 등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런 사실을 로마교황청이 모를 리 없었고, 알면서 그냥 지나갈 일도 아니기 때문에 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이단심문소로 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고(제1차 재판).

 

1618년 하늘에서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本性)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렸다가,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黃金計量者)라는 책으로 16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수학문자(數學文字)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數量的)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던 것이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e copernicaon)를 1632년 2월에 발간, 1차 재판에서 받은 이단 요소에 저촉되지 않기 위해 천동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우회적으로 지동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며, 갈릴레이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1633년 l월에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이 1616년에 발표된 금령(禁令)에 저촉여부를 따지는것으로 정작 지동설이 옳은가 그런가 하는 사실 규명이나 과학적인 논거를 찾는 것이아니 였기에 갈릴레이가 고발되었을 때 이미 그는 금령을 위반했다는 올가미에 걸렸고 재판의 결과는 당연히 패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갈릴레이에게는"브루노와 같은 화형 아니면 지동설 취소"라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어려움이 처했다. 결국 갈릴레이가 선택한 것은 지동설 취소.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이 때 그의 나이 70. 학자적인 소신을 굽히고 화형을 면하였지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랑하는 장녀와 시력마저 잃게 된  실의 속에서도, 마지막 정열을 연구와 저술에 몰두 "두 개의 신과학(新科學)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을 종교적 구속이 없는 신교국가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公的)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어서,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의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定式化)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封建諸侯)의 전속학자가 되었다는 것 등, 실리와 명분, 참과 거짓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인간다운 면은많은 사람들의 흥미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것들이 그를 소재로 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을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단심문에서 심문관이 지구는 도는가?라는 질문에 돌지않는다는 대답을 하고 무죄로 석방, 문을 나서면서 "이 순간에도 지구는 돈다"라고 그가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문학작품에서 가필윤색 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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