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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佛敎 99권 4월호, 28쪽, 1934. 4.
자력갱생自力更生과 불교佛敎
- 신흥정신운동新興精神運動에 대해서 -
이희익李喜益
머 리 말
현재 여러 국난 속에서 사상思想의 퇴폐頹廢는 가장 우려해야 할 일이다. 하루하루 많은 변화를 초래하고, 경제⋅교육⋅도덕⋅종교 모두 크게 각성해야 할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상 국난이 의회에서 절규되어 정부를 경고하고, 또 지금 교화敎化 총동원이 제창되어 머지않아 그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선각우국先覺憂國의 지사志士가 이러한 일에 분투함은 실로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상 선도先導에는 먼저 그 기반을 견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기반은 종교에 기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실은 대체로 식자識者의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날 각종 사상이 어지럽게 침입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정세에, 소위 동양의 사상에 배치된 것이 침입하여 민중은 하등의 비판을 행하지 않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다.
정부는 외래 사상의 전파에 힘써 주의하고 있다. 경찰권, 사법권으로 그 사상의 일부분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권력으로 공간公刊의 도서圖書, 공개 연설 등을 엄격히 주의시키고 적당한 제재를 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충분한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상은 무형無形이다. 무형의 사상은 유형有形의 시설에 의해 지배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어떤 방법으로 발표된 것의 일부분을 처치할 수 있는 데에 지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더구나 조선朝鮮은 특수한 환경에 있는 곳으로 내지內地[일본]와는 다른 점이 많다.
우리는 몸소 비판력을 기르고 동양의 고유한 근본사상을 파악해서 발전해 온 새로운 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해 매진해야 한다.
사회의 발전은 물질物質, 정신精神 이 두 방면이 서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본래 국민의 사상 문제는 이론보다도 실제적인 것이다. 실제의 사상 훈련에 직접 관계되는 것은 교육⋅종교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적대적인 상황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조선의 어느 불교단체는 오랫동안 중등학교를 경영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불교에 대해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다. 타인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는 종교라면 스스로 중지中止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종교단체조차 이러한 모습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조선은 과거 5백 년 동안 역사적 종교인 불교를 배척排斥하고 그 관계자를 방치 혹은 약화시켰다. 그 때문에 민중이 선조先祖의 수양신앙修養信仰을 모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민중은 무종교無宗敎이면서 그 생활 상태는 바로 바람 앞의 나뭇가지와 같다. 여기저기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어두운 길에서 어두운 길을 밟아나가며 사악邪惡한 사상에 빠져 일생 불행으로 끝나버린다. 실로 불쌍한 마음이 든다.
1. 자력갱생自力更生
우리는 항상 눈앞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인내忍耐로 참아내고 아울러 스스로 살아날 방도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궁지窮地에서 활로活路를 모색하고 종래의 생활양식을 청산함으로써 개선하여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새로이 추진해 나가야 할 방도를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불합리한 인습因習, 현재 생활에 만연한 허영일락虛榮逸樂의 폐습弊習을 제거함으로써 그 유혹을 이겨내고 그 안한安閑함을 배척하여 희망의 신천지新天地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근본 뜻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력갱생에 대한 의의를 이와 같이 잘 풀어서 혹은 이를 항구적恒久的으로 실행할 수 있다면 진실로 다행이지만 그중에는 그것을 곡해曲解하는 일도 있을 것이므로 ‘자력갱생’에 대해 재차 살펴보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자력갱생이란 말은 보기에 따라서, 듣기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고 생각한다. 종래 학교나 가정에서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한다.’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별반 색다른 말이 없다면 역시 특별한 자극을 주는 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조급한 무리들은 어느 정도 궁핍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자를 정부가 구제하지 않고 자신의 빚은 자신이 갚으라고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한 푼도 빌려줄 수 없다던가, 인간의 협력 ‘상호부조’를 얻을 수 없게 된다고 하는 데서 ‘폭력집단’과 같은 고통스러운 상태의 비상수단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항산恒産이 없는 자는 항심恒心이 없고 소인小人은 궁해지면 사리事理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자력갱신은 완력腕力이냐 재력財力이냐 라고 하는 식으로 지력智力도 재력도 없는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협력을 의지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완력으로 갱생하려고해도 지금과 같은 불황시대에는 팔을 휘두를 장소가 없을 휘두를아닌가닌가닌래서는 자력갱생도 어차피 구호口號뿐으로 실적두를올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각 농촌에서는 비상한 자렸갱생행하고 있는 모습에서 진실로 기쁨을 감당할 수 없을 바이다. 그러나 신념적 신앙른다.토대가 없을 휘두를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일시적 피상적 고식적인 정도에서 끝난다는 점은 과거 많은 경험으로 볼 때 불을 보듯 분명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나칠 정도로 편협하게 자력주의自力主義를 고취하면 개인주의적 이기주의利己主義에 떨어지며 결국에는 배타주의에 경도되어 계급투쟁을 오히려 격화시키는 결과가 되기 쉽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자력갱생을 하는 데에는 먼저 자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자력은 어떤 일인가를 진실로 인식한 위에서가 아니라면 바로 과오에 빠지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나와 사회, 나와 가정, 나와 조상 및 자손이라는 관계에서, 환언換言하면 나와 나를 둘러싼 자연환경 및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를 충분히 인정한 위에서가 아니라면 진실한 내가 또는 자력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2.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대일경소大日經疏에는 ‘나의 공덕력功德力으로 말미암아, 여래가지력如來加持力으로 말미암아, 법계평등력法界平等力으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곧 능히 부사의업不思議業을 달성하게 된다.’라고 한 대로 불교에서는 단순한 자력도 인정하지 않고 또 단순한 타력도 인정치 않는데 필경 자력自力과 타력他力과 법계法界, 이 세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아마도 자력, 자신의 생활은 사회의 힘과 자연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하루도 지탱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의 생활 요소인 의식衣食 기타 일체의 모든 일 어느 하나라도 사회의 힘, 자연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즉, 자기의 존재는 크게 천지天地의 은혜, 사회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통감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존재는 사회현상과는 불리불즉不離不卽의 연대적 관계를 갖는 것임은 물론이지만 이 상호적 입장을 명료히 함에는 각자가 자기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터득해서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정진精進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비로소 분명分明해지게 되는 것이다.
3. 사상의 동향
오늘날 조선청년의 사상은 실로 가엾다. 과도기에 있어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자기마음대로 이중삼중 생활을 하고, 목면의 일본옷이 수입양복으로 바뀌고, 짚신이 한 켤레 서양가죽신으로 되고, 논밭을 팔아 동경東京에 유학留學을 한다. 하숙에 틀어박혀 여름에는 맥주나 마시고, 겨울에는 당구장에 출입하는 것을 일과로 삼지 않았는지? 그곳에서 얼마 안되는 부모의 재산을 모두 쓰고 결국 일가족이 길가를 헤매는 것이 오늘날 조선민중의 모습이다. 사회의 조직을 편승해보기도 하고 자본가를 원망하며 불평불만에 전념하고 있다. 세계가 모두 불황인 오늘날이기 때문에 실업자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바다.
요컨대 우리는 먼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력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즉,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고 부처나 신령神靈에게 빈다고 결코 들어주지 않는다. ‘이부자리의 크기를 생각해서 발을 뻗는다.’고 하는 것은 신분에 맞게 해야 한다는 훈화訓話다. 어쨌든 조선민중은 수천 년 전보다 부처의 가르침 또는 공자⋅맹자의 가르침과 같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교육받아 왔다. 그런데 오늘날은 무종교 민족으로서 신앙심도 본래부터 부족한 것인양 이해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토대적 신념 신앙이 없기 때문에 외래의 사악한 사상에 부화뇌동附和雷動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의 동맹휴교를 고찰함에 순진해야할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일본에서 보는 것 같은 학생 분위기 없이 일부 책동자에 의해 좌우의 요구처럼, 단순히 자기의 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당사자를 곤란케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운동도 매우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요컨대 국가사회에 있어서도 가장 중대한 임무를 맡아야 하는 학원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 젊은 학생들이다. 합병 이후 조선에 있어서 학교교육방침이 일본과 거의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황실 중심으로 일본의 정신문화를 주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실익에서 동맹휴학보다 적화운동赤化運動이 치열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울러 바람 앞에 낙엽처럼 언제나 동요하고 있고 일관된 정신적 무엇인가가 없다.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가정적으로나 또는 사회적으로나 전체를 흔드는 모든 생활에 불안을 초지超知하고 무주無柱한 무뢰無賴한 것이다.
4. 불교佛敎와 제교섭諸交涉
불교란 일부의 신자 혹은 소수의 스님들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우리 일상생활에 직접 관계있는 것인가? 대개 예로부터 불교를 설하는 대다수는 심오한 교리敎理를 내세워 학리적學理的 연구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듣는 이의 이목을 높고 먼 경지로 나아가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 일반 민중에게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혹 일부 학자가 그 교리를 연구해야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 교리를 인간생활의 실제에 응용하고 이것을 도덕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이란 점을 잊고 있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불교를 국민교육으로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 오늘날 불교가 흥하지 않는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조선은 과거 5백 년 간 불교만큼 천淺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승려僧侶를 살해하고 그 가해자에게 살인죄의 형벌을 가하지 않았던 시대조차 있었던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최근 이런 점에 관심 있는 지식인 가운데에는 이따금 불교의 실천론實踐論을 부르짖으며 큰소리로 질타叱咤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말하는 것이 고승대덕高僧大德의 행적의 일단을 말하는 정도로 그치고 저 교리의 심오하고 철저함을 말하여 인간도덕의 실제에 응용해야 할 방침을 제시하고 있지 않는 점은 조금 만족스럽지 못한 생각이 든다.
왕생론往生論을 고조시켜 실제 사회의 일상생활에는 하등 필요 없는 듯한 이야기 방식으로 은거자隱居者⋅노파老婆⋅불구자不具者가 독점해온 사후死後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동경憧憬해서 예배하고 염불해 온 것이다. 그래서 원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으며 오히려 유해한 것같이 생각하였다. 상당한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이같이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교육가敎育家는 물론 특히 실업가實業家에게 있어서 심한 것 같다.
5. 상업과 종교
오늘날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의 극치에 있어서 실업가⋅자본가의 종교에 대한 곡해曲解는 불가피한 현상이라 생각되면서도 경제난⋅사상난에 처한 오늘날 종교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냉정하게 살펴보고 싶다.
상업의 정의는 유무상통함에 있다.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중개가 상인이며 이 세 사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제조자가 없으면 수요자의 불편은 어떤 것일까. 또 상인⋅수요자가 없으면 제조자의 존재조차 없어진다. 이와 같이 세 사람이 맞물려서 서로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오늘날 ‘서로’란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일반이 불안 속에 있다. 이 서로란 말은 보살행菩薩行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며 행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의 ‘自利利他’란 자신을 이롭게 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굳이 불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본래 인간 본질의 정신이지만 자본주의資本主義가 발달하여 물질문명物質文明이 향상向上함에 따라서 나의 이익, 나의 욕망에 치달아 다른 사람을 되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자본주의를 배척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다. 이보다 더욱 발달해도 좋지만, 사회가 이미 상호적 관계에서 자기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이상 서로가 상조相助하여 화합하는 것이다. 이는 곧 종교의 본체本體이며 불교의 본체라 하겠다.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어렵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종교학자 혹은 불교학자의 입장에서 연구된 것은 과연 어려운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자기가 어떠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참회하고 일상생활을 선화향상善化向上할 만큼 정진하면 그만이다. 백은白隱 선사禪師가 이르기를, ‘중생衆生은 본래 부처로서 물과 얼음 같다. 물을 떠나 얼음이 없고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으며, 중생이 가까이 있음을 알지 못함으로써 멀리에서 찾는 것은 물속에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가짐 하나로 보살도 되고 부처도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종교적이며 부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 참회懺悔
우리는 과거생활을 반성하고 그 사악邪惡함을 참회懺悔하지만 그러한 자격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보리심을 발하여 10선계를 지키면 보살菩薩이 되고, 그렇게 해서 보살이 덕을 닦은 결과 부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참회의 염念을 일으켜야 한다. 참회는 불교신앙자가 되는 최초의 입문의 길이다. 자신을 행복으로 이끄는 기초 행동은 참회다. 참회하면 죄과罪果는 바로 소멸된다고 한다. 마음속에서 죄를 멸했다고 하는 대안심大安心이 장래 덕행선도德行善導에 나아갈 수 있는 기인基因이 된다. 참회하면 마음이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이다.
7. 상호부조相互扶助
사회는 화합和合의 생활이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이 화합의 정신이다. 불교는 화합의 사상을 강조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자가 범하지 말아야 할 역악逆惡 가운데 ‘화합승和合僧을 깬다.’는 죄악罪惡을 들 수 있다. 사회가 이미 공동생활인 동시에 우리는 현재 공존共存⋅공영共榮하는 자리에 있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로운 주장이 허용된다면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은 채 미완성未完成으로 끝날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무아無我’가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나’란 자기를 중심으로 한 방자한 사상이다. 이 ‘나’란 생각을 버리고 상호부조의 정신에 의해 서로 화합하고 서로 양보하며 서로 도우면 사회생활은 원만히 이루어질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무有無를 서로 보완하고 마땅히 탐내거나 아껴서는 안된다.’고 한다. 오늘날 자본가資本家가 아무리 큰소리치더라도 資本家의 대對는 무산자無産者, 정치가政治家의 對는 민초民草인 것처럼 자신이 혼자가 아니다. 때문에 유무有無를 떠나 서로 화합해서 줌으로써 자신을 이롭게 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즉 自利利他의 보살행의 정신으로 행하면 사회는 평화⋅평등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을 쫒고 다른 사람을 털끝만큼도 바라보지 않는다. 이것이 종교가의 유감遺憾이다. 물질문명에서 과학적 사회시설은 크게 발전해도 좋다. 현재의 몇 십 배라도, 그러나 어느 때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이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사회를 조성하는 데에 제일第一의 강령綱領으로서 앞세워야 한다.
8. 사물事物에 대한 경애敬愛
비예산比叡山의 깊은 산속에 있던 어느 스님이 시냇물에서 한창 채소를 닦고 있던 중 한 조각의 채소를 흘려버렸다. ‘기다려라, 이 한 조각의 채소를 좇아 일리一里 남짓 아래로 내려가서 주워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설령, 한 포기의 채소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되기까지에는, 한편 상상이 불가능한 정도의 시간과 수고가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중요한 식물食物이 아닌가, 이것을 함부로 시냇가에 흘리는 것은 실로 아까운 일이기 때문에 그는 한 조각의 채소를 좇아 一里 남짓 달린 것이리라. 현대의 인간으로부터 보면 ‘그는 바보다. 시간관념이 없는 놈이다.’라고 폭소할 것이다. 시간은 경제적 관계로부터 해서 물론 거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종교에서 존중하는 바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랑스럽다면 다른 사물事物도 사랑스럽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우리는 사물에 대해 한시도 감사의 생각을 버려서는 안된다.
9. 보은사덕報恩謝德
불교에는 네 가지 은혜恩惠가 있으니, 부모의 은혜, 이웃(중생)의 은혜, 국가(국왕)의 은혜, 스승(삼보三寶: 불법승佛法僧)의 은혜를 강하게 주장하여 보은사덕報恩謝德의 생각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세상 모든 선남선녀善男善女여, 부모의 은혜는 산과 같아 응당히 효경孝敬하여 항상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며,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함은 곧 성도聖道이니라. 생각건대 부모의 정자 몇 억만 내에서 자신 혼자 태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몇 억 정자의 패권자이다. 어찌되었든 행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구는 십만 개의 알 중에 하나 두 마리 밖에 온전히 부화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현재 불행하기 때문에 태어난 사실을 감사해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과연 거지가 되면 완전히 감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살해하겠다.’고 하면 그는 벌벌 떨며 도와달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죽고 싶지 않다. 죽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관념이 최초 생의 애착임과 동시에 감사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에 대한 감사感謝의 생각을 잠깐 동안이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生을 감사함과 동시에 그 생을 온전히 함으로서 생존의 가치를 부여받는 중생의 은혜가 있고 또 사회생활상의 안녕질서와 평화평등을 얻는 중심으로서 국가(국왕)의 은혜가 있으며 또 가르쳐 이끄는 바의 스승(삼보三寶)의 은혜가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사회가 조직되고 한 국가가 성립하여 만민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종교적이 되며 또한 불교의 분위기 속에서 모두 부지런히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를 떠나서는 하루라도 생존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 자기가 자연적으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오직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정도로서 예를 들면 물속에 있으며 목마름을 부르짖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도덕과 경제는 상반된 것처럼 보고 있지만 이는 심한 오해이다. 도덕과 경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리불즉不離不卽의 관계로서 원융화합圓融和合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0. 佛敎의 근본根本
불교란 어떤 것인가. 불교라고 말하면 염세적인 것으로서 원기왕성한 젊은 사람에게는 완전히 필요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활동적인 인간에게는 유해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심한 오해이다. 불교는 가장 강한 적극적인 정신을 갖고 있고 근대인의 실생활에 합리적 가르침이란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 개조開祖이며 또한 본존本尊인 바의 ‘佛’이라고 말하는 것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佛은 범어梵語로 ‘붓타(Buddha)’지만 중국에서는 ‘부도浮圖’ 또는 ‘부도浮屠’라 쓰며 조선朝鮮을 거쳐 일본에 전파됨에 이르러 ‘浮圖家(호또께)’라 읽고 ‘佛’이라는 글자를 쓴다. 그렇다면 梵語의 붓타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붓타를 해석하면 ‘각자覺者’라고 하겠다. 깨달은 사람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물론 인생을 깨달은 것인데 그 ‘인생’에 대해 무엇을 깨닫는가 라고 묻는다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1. 자각自覺
①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② 인생은 기대할 수 없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③ 그러므로 인간은 만족하지 않는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먼저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란 어떤 말인가. 우리의 육체는 진실의 자신이 아니다. 만일 진실의 자신이라면 여하튼 자유로운 일이 가능하다. 또한 마음도 진실의 자신은 아니다. 그 증거로서 병은 누구라도 싫어하는 바이며 나이를 먹는, 죽는 것을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다.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아방궁阿房宮에 삼천 명의 미인美人을 총애하며 불노불사不老不死의 약藥을 찾았던 진시황秦始皇은 51세에 죽고 말지 않았는가. 추한 외모는 누구도 싫어하는 바이며 미녀미남美女美男이 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일까. 추한 얼굴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불구不具이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는 비참한 일은 세상에 없어야 되지만 자주 신문지상新聞紙上에서 이같은 사건을 보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운동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육체는 자유롭지 않은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육체의 자유가 아니라 육체가 행동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음으로 ‘인생은 기대할 수 없다’에서 기대는 목표다. 부모에게 조금 더 효孝를 다하고 싶지만 어느 때인가 죽으며 이별하지 않을 수 없다. 애인愛人과는 백년이라도 지내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자식은 죽는다. 이처럼 여러 가지 현상계는 변화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목표로 하여 이것만 있으면 인생은 마음대로 되기 때문에 안심安心이라 했는데, 천재지변, 환율의 변동에 따라 시종 변화한다. 부모가 엄청난 부를 남기며 말하기를, ‘세상 속에서 돈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낭비하지 말라.’고 부탁은 하지만 부모의 사후 아들은 오래지 않아 재산을 탕진하고 길가를 배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여하튼 재산은 인생에 있어서 큰 목표임에는 틀림없다. 이 목표는 매우 동요하기 쉬운 목표이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 우리가 절대적인 안심을 할 수는 없다.
12. 因緣和合因緣和合
인생은 기댈 수 없고, 생각대로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대하려하고 생각대로 하려는 데에 기대期待와 사실事實의 모순이 생겨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가, 기대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을 구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늘과 땅 사이의 사물들은 모두 무수한 조건이 집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의 근원을 구명하지 않고 돌연 일개의 사물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에 모순이 생겨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겉에는 속이 있고 속에는 겉이 있는 것과 같이 전연 별개의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무상無常해서 전부 생멸변화生滅變化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자아적인 채로 멋대로 세운 목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선종禪宗에서는 무無를 진리로 하여 불교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의 일체 조건을 전부 하나의 형태로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하나 의지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살고 있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에 빠지고 마는 데 이것이 철학과 종교가 구별되는 바로서 이 분기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상은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지만 상대相對 속에도 절대絶對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식한다. 즉, 깨닫는 일에 불교의 깊은 의미가 있겠다.
세상 사람들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자주 말하지만 전술前述한 회의론懷疑論에서 체념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태한 자 또는 무기력자의 우둔한 말로서 불교에서는 오히려 ‘인연因緣’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라고 적극적으로 해보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사물의 상相을 그대로 보고 옳은 비판을 갖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며 방자하지 않는 극히 자유롭고 불안이 없는 평화적 구원생활이 영위되는 것이다. 즉, 무아無我․무애無礙의 경지境地를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라 하겠다.
13. 각타覺他
불교에서는 천지간의 모든 것은 하나의 조건으로서 존재하고 또한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조건에 놓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결코 고답적이고 동정적 희생심이 아니라 우리가 일부분으로서 존재하는 이상 필연적인 책무이며 그 필연성을 충분히 이식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를 사랑한다면 나를 성립케 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타自他란 대체로 동일조건의 표리表裏, 혹은 결과와 조건의 차이지 결코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은 아니며 실제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부처의 참된 깨달음은 타인을 자기와 같이 존재케 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사랑함은 사회의 성립조건인 자기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좋은 사회가 건설되어 감과 동시에 자기도 이것에 의해 완성된다. 이것이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도리에 철저한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번뇌를 끊고, 일체의 집착을 떠나 무릇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 모두가 없어짐으로 해서 의지할 바 없게 된 것을 관觀할 수 있다면 마음은 진실로 평안해질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면 피는 꽃에도 마음은 끌리지 않듯이, 영화榮華도 영원하지 않고 권세權勢도 영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구하려고 악惡으로써 열중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맺 음 말
이상에 의해서 아마 불교에 대해 어떤 종류의 흥미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과학적 사상에 빠진 젊은 학생이나 청년자녀에게 불교란 그의 생활과 떨어지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조직적으로 이해시키는 일은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라해도 방임할 수 없다. 사상난思想難에 빠진 오늘의 종교가․교육가는 크게 분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난經濟難의 원인은 思想難이고, 사상난을 일으킨 것은 경제난, 사상난과 경제난임과 동시에 정치난政治難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3대 국난으로부터 외교적 국제난國際難에까지 이른다. 지식인 사이에도 경제와 종교는 상반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심한 오해이다. 우리의 생활상에 가장 중요한 또는 큰 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물질 때문에 정복되어서는 안 된다. 물적생활을 끊지 않고 비판하면서 물질을 옳게 살려나가는 것에서 인간생활의 참된 가치가 있다. 인격의 빛이 있어서 자리리타自利利他의 보살행 사회가 건설되는 일이 가능하다.
자력갱생 운동이래 각 농어촌에 있어서 그 위대한 실천을 행하고 있음은 진실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조선민중은 사회적 생활을 하든, 가정생활을 하든 모든 방면에서 신념 없이 무주無柱한 생활상태에서 찰나적刹那的이며 고식적姑息的이다. 환언하면 눈앞의 일에 매달려 일보 전진하는 적극적 항용성恒用性이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그 자력갱생의 기분도 어떤 곤궁 속에서 일시적 자극에 있어서의 발작이며 항구성은 없다. 필경畢竟 응원 소리뿐만 아니라 선도적先導的 자력自力에 의한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까. 또한 단순한 자력갱생을 고취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떨어져 결국은 배타주의에 기울어 계급투쟁으로 격해지는 것은 아닐까.
자력갱생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력이란 무엇인가를 충분히 인식하고 자기를 참회함으로서 보은사덕報恩謝德의 생각을 명심토록 하는 것이다. 이것에 따라 비로소 자기의 생존을 감사하고 사회에 대해 보은할 것이다.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신앙적 생활에 들어가 自利利他의 극히 평화롭고 충실한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일상생활 그 자체가 예술적임과 동시에 종교적 생활인 것이다. 이미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오직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을 뿐이다. 유감스럽지만 사원寺院에 있어서 설법사說法師는 대개 고승대덕의 실행을 부르짖고 왕생론往生論을 설하여 현대의 젊은이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것 같은 존재방식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宗敎의 성쇠盛衰가 물론 종교가宗敎家에 의한 것임은 더 말할 나위없다. 어느 때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종교가 그 시대의 사조思潮와 딱 부합한 합리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옛날에는 그 시대의 思潮에 응해서 설법제도說法濟度하고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시대에 있어서는 그것에 상응한 존재방식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金善淑 옮김,智登 신종원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