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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해석의 길라잡이
최영식 목사 (경산열방교회)
우리는 지난 칠 개월 동안 일곱 번에 나누어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으면서 계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동안 공부한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은 부족할 수도 있겠다. 이 번 신앙강좌에서는 이러한 점을 해소하고, 한 자리에서 책의 전체 내용을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사실 계시록의 상세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 많은 학설과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성령께서 아직은 이 책을 완전히 열어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열린 만큼만 계시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독수리가 높은 창공에서 아래 세상을 조망하듯이, 이번 신앙강좌를 통해 계시록의 큰 그림을 조망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이 책을 해석하는 중대한 방향성을 제공한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 책의 기록 연대를 AD 95년경 도미티안(Domitianus) 황제 때로 주장한다. 그것은 “그 예언이 도미티안 통치의 말경(약 AD96년)에 나타났다”는 이레니우스(AD 120-202)의 진술 때문이다. 반면에 소수의 학자들은 이 책이 AD 70년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기 전 68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AD 95년 저작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기본적으로 교회와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제국간의 영적 투쟁으로 본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기 때문에, 제국의 흉포한 핍박 가운데서도 굴하지 말고 믿음에 굳건히 서라는 그리스도의 권면을 핵심 메시지로 본다.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은 오늘 날의 ‘세상 나라’를 투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최후 승리를 주실 때까지 교회는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본서의 말씀을 적용한다.
반면, AD 68년 저작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하는 옛 언약 공동체인 유대교에 대한 심판으로 본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40년 동안(AD 30~ AD70)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살전2:15-16). 그래도 끝까지 불신을 굽히지 않자 그는 유대교의 거점인 성전과 예루살렘에 언약적 심판을 퍼부으셨다. 로마 장군 디도(Titus)는 로마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토벌하면서 AD70년에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이 견해는 이러한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배도한 유대교에 행하신 그리스도의 언약적 심판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을 본서의 저작 배경으로 이해한다. 오늘의 교회는 AD 70년에 있었던 옛 언약 공동체의 심판을 돌아보며 새 언약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옛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뒤돌아보며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교회의 영광에 현재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그 교회의 완성을 미래적으로 소망하는 것으로 본서를 적용한다.
요한계시록의 해석방법
계시록의 해석방법에는 크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이는 각각 미래주의, 역사주의, 이상주의, 과거주의이다. 미래주의(futurist interpretation)란 계시록의 내용이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내용들과 그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본다.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 볼 때 계시록의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다. 역사주의(historicist interpretation)는 계시록이 세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펼쳐 놓은 예언이라는 것이다. 즉 계시록은 역사 가운데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한 시간표인 것이다. 이상주의(idealist interpretation)는 상징주의(symbolic interpretation)라고도 한다. 이 견해는 계시록의 내용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고 본다. 과거주의(preterist interpretation)란 신약성경의 예언이 AD70년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내용은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이다. 이러한 과거주의 안에서도 완전 과거주의(full preterism)와 부분적 과거주의 (partial preterism)의 두 주장이 있다. 완전 과거주의는 신약의 모든 예언들이 이미 다 성취되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부분적 과거주의는 아직 결정적인 사건은 남아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우리의 해석방법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AD68년경으로 본다. 그 이유는 후기 저작 설의 기초가 되는 이레니우스의 증언 “그 예언이 도미티안 통치의 말경(약 AD96년)에 나타났다”에서 “그 예언”을 요한계시록으로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요한계시록 책 자체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내적으로 강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AD 70년에 역사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저작을 그 이전인 AD68년경으로 보는 것이다.
계시록의 저작을 AD 68년의 이른 연대로 보기 때문에, 우리의 해석 방법은 과거주의 입장을 따른다. 그 중에 부분적 과거주의 입장을 따른다. 하지만 이 한 입장만으로 이 책을 완벽히 해석할 수는 없다. 이상주의, 역사주의 및 미래주의의 관점이 필요에 따라 차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분적 과거주의를 기본 입장으로 하고, 여타 다른 해석입장을 적절하게 차용하는 역동적 해석방법을 채택한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이중적인 성취를 가진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티끌과 같은 자손”의 약속은 일차적으로 출애굽 당시 육십 만 명으로 불어난 유대민족의 형성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이차적이고 궁극적인 성취는 그리스도를 믿는 천만 성도의 교회 형성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도 곧 있을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예루살렘 멸망을 통하여 그리스도 재림 시에 있을 종말의 심판을 궁극적으로 예언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도 원근통시(遠近通時)의 선지자적 관점을 가진다.
요한계시록의 문학구조
요한계시록은 네 개의 환상 군(群)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환상 군을 구분하는 언어적 표시는 “성령 안에서”라는 뜻의 “엔 프뉴마티” (εν πνευματι)이다. 계시록 1장, 4장, 17장, 21장에서 시작되는 각 환상 군은 각각 ‘성령에 감동하여(1:10)’, ‘성령에 감동하였더니(4:2)’,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17:3; 21:10)’이다. 이 네 경우 모두 ‘엔 프뉴마티’의 번역이다. 이를 중심으로 머리말과 맺음말을 배치하여 다음과 같이 여섯 단락으로 계시록을 구분한다.
(1) 머리말 (1:1-8) (2) 첫째 환상 군 (1:9-3:22)-일곱 교회 (3) 둘째 환상 군 (4:1-16:21)- 일곱 심판 시리즈(인, 나팔, 대접)및 용과 여자 (4) 셋째 환상 군 (17:1-21:8)- 바벨론의 멸망과 천년왕국 (5) 넷째 환상 군 (21:9-22:15)- 새 예루살렘 (6) 맺음말 (22:6-21)
요한계시록의 위와 같은 문학적 구조는, 이 구조 자체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총괄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환상 군의 일곱 교회는 현존하는 지상의 교회이다. 안팎의 원수와 힘겹게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반면 넷째 환상 군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은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일곱 교회 환상과 새 예루살렘의 환상이 서로 연관된다. 둘째 환상 군은 배도한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심판 시리즈이다. 그리고 셋째 환상 군에 나타나는 바벨론의 멸망도 옛 언약의 거점인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일곱 심판 시리즈와 바벨론 멸망의 환상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종합하면 계시록의 네 환상 군들은 다음과 같은 교차 대칭구조(chiastic structure)로 배열되어 있다.
A 첫째 환상 군: 일곱 교회- 전투하는 새 언약 교회 B 둘째 환상 군:일곱 심판 시리즈-배도한 옛 언약 교회에 대한 심판 B’ 셋째 환상 군: 바벨론의 멸망 - 배도한 옛 언약 교회에 대한 심판 A’ 넷째 환상 군: 새 예루살렘- 승리하는 새 언약 교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숫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1:1).” 계시록을 열 때 만나는 이 첫 문장에서 “알게 하신”은 헬라어 ‘에세마넨’(εσημανεν)의 번역이다. ‘에세마넨’은 상징 또는 표(세마, σημα)를 가지고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 뜻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숫자나 기묘한 묘사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것들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의 용어들은 거의 대부분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전문적인 계시 용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 중에 계시록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숫자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자.
. 둘(2)-이것은 최소 증인의 숫자이다(신17:6).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계 11:4)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의 증인 역할을 의미한다. . 셋(3)-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수이다. . 넷(4)-생명수 강이 에덴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갔듯이, 넷은 동서남북의 온 세상을 의미한다(창2:10). . 일곱(7)- 육일 간의 창조와 칠일 째의 안식으로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종결되었다(창1:1-2:3). 이 후에 칠(7)은 계시의 기본 수단이 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 모든 절기는 칠(7)을 주기로 한다. 따라서 칠(7)은 완전함 또는 하나님 앞에 대표하는 개념을 지닌다. 일곱 영은 완전하신 성령을 의미하고, 일곱 교회는 온 세상의 교회를 대표한다. . 열(10)-하나님이 결정하신 기간을 의미한다. 십일 간 환난을 받는다(계2:10)는 것은 핍박이 영원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통제 아래, 그가 정하신 기간 동안에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열(10)의 반 토막인 다섯(5)은 정하신 기간의 반을 말한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다섯(5)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다섯 달(계9: 5,10)의 환난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환난을 받는 다는 표현이다. . 열둘(12)-열두 지파(계21:12), 열두 사도(계21:14)에서 보듯이 열둘(12)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이다. . 백사십사(144)-백사십 사는 12 x 12 로써 신약과 구약의 성도들로 구성되는 교회의 수이다(계1:17). . 천 (1,000)-10x10x10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10)이 삼중으로 겹친 수이다. 충만하고도 완전한 기간을 의미한다. 천년 왕국은 하나님이 정하신 충만한 기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 천육백(1,600)-(4x10)x(4x10)으로 세상의 4와 충만함의 10이 결합되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미친다는 뜻이다. . 만 이천(12,000)-하나님의 백성의 수인 12와 충만하고 완전함을 의미하는 1,000의 결합이다. 교회의 충만한 범위를 상징한다. 계시록 7장에 기록된 각 지파의 만 이천 명은 성도의 충만한 수를 상징하며, 21장의 새 예루살렘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인 만 이천 스다디온도 택함 받은 성도의 충만한 수로 완성된 교회를 의미한다. . 십사만 사천 (144,000)-12x12x1,000으로 역시 신약과 구약의 모든 성도들로 구성되는 완성된 교회의 총수를 상징한다. . 한 때 두 때 반 때 (삼 년 반, 마흔 두 달, 천이백육십일): 일곱의 반 토막으로 배도의 때 또는 고난의 때를 의미한다. 아합을 피하여 이방 땅으로 도망 다닌 엘리야의 삼 년 반을 기억하라(왕상17:1-9; 약5:17). . 이 만만: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시편68:17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만만’(계9:16)은 셀 수 없는 무수함에 대한 상징이다.
요약 주해
I. 머리말 (1:1-8)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는 천사를 보내어 사도 요한에게 그 계시의 말씀을 상징의 형태로 전달하게 하셨다. 요한은 자기가 본 계시의 말씀과 환상을 전 세계 교회의 대표인 일곱 교회에게 전한다. 계시의 전달 순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천사, 사도 요한, 그리고 교회 순이다.
II. 첫째 환상 군 (1:9-3:22)
예수 그리스도 (1:9-20) 요한은 본서의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본다. 그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일곱 별로 표현된 일곱 교회의 목사들을 붙잡고 계시며, 일곱 촛대로 표현된 일곱 교회에 출입하신다. 그는 자신의 몸인 교회에 지금 출입하시며, 세우신 직분자를 통하여 지금도 통치하고 계신다.
일곱 교회 (2:1-3:22) 그리스도는 일곱 교회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각 교회에 칭찬과 책망과 경고와 권면이 이어지고, 이기는 자에게 보상을 약속하신다.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은 곧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우리는 일곱 교회를 읽으면서 칭찬받은 점은 우리 교회에서 강화하고 책망 받은 것은 버려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개혁해나가야 한다.
III. 둘째 환상 군 (4:1-16:21)
본 단락의 문학구조는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 양 (4-5장)이 배도한 옛 언약 백성에게 일곱 인(6장), 일곱 나팔(8-9장), 그리고 일곱 대접(15-16장)의 심판을 퍼붓는 장면이다. 심판을 행하시는 중에도 회개하도록 요청하는 삽입 막간(intermezzo) 계시가 7장, 10-11장, 그리고 12-15장에 걸쳐 나타난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1/4에서 1/3로 그리고 전체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곱 번째 인이나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전에는 반드시 막간 계시를 통해 회개를 요청하신다. 마지막 심판인 일곱 대접 심판 전에는 아예 12장에서 15장 전체가 막간 계시이다. 이런 사실은 일곱 시리즈의 심판 계시의 주 목적이 회개를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곱 심판 시리즈의 구약배경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이 장들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순종할 때 받는 엄청난 복들을 나열하시면서 사람들을 유인하신다. 반면 언약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저주를 퍼부으실 것을 경고하신다. 그는 심판을 행하시되 경고 없이 갑자기 행하시지 않는다. 그의 심판은 점진적이다. 징계를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일곱 배의 저주를 내리신다. 일곱 배의 저주를 받고도 계속 불순종하면 또 일곱 배로 징치하신다. 그의 점진적인 징계는 회개를 유도하시려는 그의 오래 참으시는 성품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축복의 유인과 저주의 위협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언약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늘 보좌 (4:1-4:11) 요한은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늘보좌에 둘러선 이십사 장로는 신약과 구약 (12+12)의 성도를 대표한다(4:4).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인데 완전하신(7) 성령을 지칭한다(4:5). 보좌 주의에 있는 네 생물은 그룹천사와 스랍 천사를 합친 것 같이 보이는데 천사의 대표이다(4:6). 하나님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뜻이다(4:8). 계시록 16:5에서 물을 차지한 천사가 하나님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라고 부르며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을 뺀 것은 그 때에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양 (5:1-14)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인을 뗄 자가 없어서 요한이 울고 있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인을 능히 떼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에게 소개한다. 어린 양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여 열방의 민족을 자기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들은 교회인데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땅에서 왕 노릇한다. 왕 노릇이란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존재(엡2:5)로서 그의 통치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령과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으로 이루어 진다.
일곱 인 심판 (6:1-17)-첫 번째 인에서 여섯 번 째 인까지 심판의 인이 떼어질 때마다 말들이 등장한다. 붉은 말은 전쟁을, 검은 말은 기근을, 청황 색 말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레위기26장과 신명기 28장의 언약적 저주를 요약하는 것이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는 것(6:8)은 구약 성경에서 언약적 저주를 표현하는 전문용어(렘15:3)이다. 다섯 번째 인이 떼어질 때 순교자들은 주를 위하여 흘린 자신들의 피의 정당성을 신원해달라고 탄원한다. 그 탄원에 대한 응답으로,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질 때 공의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해 달 별이 빛을 잃고 떨어진다(6:12-13). 이것은 천체가 물리적으로 붕괴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지도자들의 몰락과 한 나라의 붕괴를 표현하는 선지자적 언어이다(사13:9-11). 여기에선 옛 언약 체제를 붕괴를 말하는데, AD 70년의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성의 몰락으로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누가 설 수 있는가? (7:1-17) 이러한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겠는가? 7장은 그들의 진노에서 능히 설 수 있는 자를 보여준다. 그들은 십 사만 사천 명(7:1-8)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차출되었다. 만 이천 명은 성도의 수인 12와 삼중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1,000을 곱한 수이다. 십 사만 사천 명은 연이은 환상의 셀 수 없는 큰 무리(7:9-17)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어린 양 예수의 피에 죄 씻음 받은 성도들이다(7:9,14). 십사만 사 천명은 구원 얻은 신 구약의 교회 성도들을 말한다. 참된 성도들은 진노의 큰 날에 능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일곱 번째 인 (8:1-5) 일곱 째 인을 뗄 때 일곱 천사가 나팔을 받았다(8:1-2). 인 심판이 나팔 심판으로 승계된다. 이 땅의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될 때 일어난다(8:4)
일곱 나팔 심판 (8:6-9:21)- 첫 번째 나팔에서 여섯 번째 나팔까지 네 나팔이 불려질 때 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의 일월성신이 타격을 받는다. 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은 온 우주를 의미하는 성경적 용어이다. 이것은 자연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다. 자연이 무엇을 했길래 자연의 세계에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다는 말인가? 심판은 배도한 백성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한 사람들에게 내려진다. 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에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다는 것이다. 그의 진노에서 피할 자가 없다. 1/3이 타격을 받은 것은 일곱 인의 1/4보다 재앙이 심화되었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황충이 나와서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을 헤친다(9:4). 황충들의 두목은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이다(9:11). 이 단어들은 “파괴자” 또는 “파멸”을 의미한다. 바로 마귀이다. 따라서 황충들은 마귀의 부하인 귀신들이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다. 그리스도를 반역한 이스라엘이 마귀와 귀신들에 의하여 공격받고 괴롭힘을 당한다. 이들에 의해 “귀신의 처소와 각 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 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계18:2)”이 되어 버린 성전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유프라테스 강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을 받는다(9:13). 이들은 이 만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사람 1/3을 죽인다. 이 군대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로마의 군대로 보인다. 이 재앙 가운데 죽지 않은 자들은 회개는커녕 오히려 죄악에 더 깊이 몰입한다(9:2-21).
요한이 두루마리 책을 먹다(10:1-11)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지기 전에 사도 요한은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다. 그리고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할 것을 명령 받았다. 이것은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사명을 의미한다(10:11).
두 증인 (11:1-14) 그리스도는 두 증인인 두 감람 나무와 두 촛대에게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할 것을 명령하셨다. 두 증인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여러 재앙으로 땅을 치는 모세와,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않게 하는 엘리야(11:6)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한다. 곧 교회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 즉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 일천이백육십일은 삼 년 반으로 ‘한 때 두 때 반 때’이다. 이 기간은 마흔두 달이다. 이방인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다(11:2). 이 숫자들은 모두 악인들이 득세하는 잠정적인 기간을 나타낸다. 이런 환난의 시기에도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여야 한다(11:3).
하나님께 보냄 받은 두 증인은 무참히 살육을 당하여 그 시체가 큰 성 길에 있게 된다. 큰 성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신 곳인 예루살렘이다 (11:7-8). 예루살렘은 역사 이래로 선지자들을 죽인 곳이고 마지막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인 곳이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죽임 당했던 두 증인이 삼일 반 후에 다시 살아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11:11-12).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 승천하셨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도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결국은 악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일곱 번째 나팔 (11:15-19)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자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영원토록 왕 노릇 하신다(11:15).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한다(11:16~18).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인다. 모세의 중보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울 때 나타난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새 언약이 체결되면서 재현된다(11:19). 이제 옛 언약을 가고 새 언약이 주어졌다. 옛 언약 공동체인 유대교가 무너졌다. 그리스도와 맺은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가 태동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는 완성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여자와 용(12:1-17)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은 영광스러운 (구약)교회이다, 교회는 아이를 출산하려 하고, 붉은 용은 그 아이를 집어 삼키려 한다.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시2편) 예수님이다. 용은 옛 뱀이요 사탄이요 마귀(12:9)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방해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이제 마귀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다(12:13). 물을 강같이 토하여 교회를 쓸어버리려 한다(12:15).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건짐을 받고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보호받고 양육을 받는다(12:6, 14).
바다와 땅에서 나온 두 짐승(13:1-18)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온다(13:1-10). 그리고 땅에서 또 다른 짐승이 올라 온다(13:11-18).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13:1). 그것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마귀(12:1)와 결탁되었다는 것이다. 이 짐승을 표범, 곰, 사자와 같은 능력을 가졌다. 다니엘은 이런 짐승들로 상징된 제국의 흥망성쇠를 환상으로 보았다(단2;7장). 따라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마귀의 사주를 받아 교회를 핍박하는 짐승 같은 로마이다. 실제로 AD 64~68년에 네로에 의한 잔인한 박해가 교회에 있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새끼 양 같다. 그는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다(마7:15). 따라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언약을 배반하고 거짓 선지자역할을 하는 배교한 유대주의자들이다. 배교한 유대주의자들은 로마의 당국과 결탁하여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래서 땅에서 사는 자들로 로마에 경배하도록 하였다(13:14). 당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한 기도와 희생제사를 드렸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숫자는 666이다. 당시에는 게마트리아(gematria)가 유행했다. 이것은 알파벳에 매겨진 숫자를 조합해서 뜻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네로 황제 (네론 케사르,Neron Kesar)를 히브리어로 표기해 숫자로 환산하면 666이 된다.
r 200 s 60 q 100 n 50 w 6 r 200 n 50 네론 케사르 rsq nwrn =666
또는 666을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부패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상징의 수로해석하기도 한다. 6은 완전 수인 7에 하나 못 미치는 수이다. 666은 불완전 수인 6의 삼중 중첩이다. 게마트리아로 해석하든 상징 수로 해석하든 666이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적 세력을 상징함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는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있는 성도들(7:3)과 666이 찍혀 있는 불신자 두 부류가 존재한다. 성도들의 이마에 찍혀 있는 하나님의 도장이 보이지 않듯이, 불신자들에게 찍혀있는 666도 보이지 않는다. 666을 바코드로 해석하는 신학은 정말 우스꽝스런 것이다.
어린 양과 십사만 사천 (14:1-5) 어린 양 예수님은 십사만 사천으로 표현된 교회성도들과 함께 시온 산에 서신다. 시온산은 옛 언약인 모세의 시내 산과 대조된다(갈4:24). 십사만 사천은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른다(14:3). 이들은 여자로부터 정절을 지킨 자이다. 즉 음녀(17:1)의 음행에 참여하지 않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킨 성도들이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순종하는 자이며, 죄를 속량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께 소속된 자들이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14:6-13) 하늘에 첫째 천사가 열방에 전할 복음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섬기라고 외친다(14:6-7). 둘째 천사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외친다. 큰 성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다. 큰 성 바벨론을 로마로 해석하는 것은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바벨론에 있는 교회로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벧전5:13). 그러나, 요한계시록 책 자체는 큰 성을 분명히 예루살렘이라고 밝히고 있다(11:7-8). 이 성(城)이 무너졌다는 선포는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예언적 과거문법이다. 배도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과거시제로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셋째 천사가 짐승의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넣어야 한다(14:1).
두 개의 추수 (14:14-20) 이어서 예수님의 알곡 추수가 있고(14:14-16), 불신자에 대한 진노의 추수가 있다(14:17-20). 포도주 틀에서 나온 피가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방(4 x 4)에 충만(10 x 10)이 퍼져 그의 심판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14:20).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15:1-4) 계시록은 언약을 배반한 자에게는 심판의 책이지만, 언약을 지키는 자에는 승리의 책이다. 승리한 성도들은 불이 섞인 유리바닷가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15:2-4). 이는 홍해를 건넌 후 원수의 시체를 바라보며 홍해 바닷가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 이스라엘을 연상케 한다(출15장).
마지막 대접심판이 준비되다 (15:5-8) 이제 마지막 재앙을 퍼부을 일곱 천사가 등장한다(15:1).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이 주어진다.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일곱 대접 재앙이 마치기 까지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15:8). 이것은 더 이상 심판을 취소하거나 멈추게 할 중보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영원히 죄를 참으시지는 않는다. 그의 인내가 다하면 자비 없는 심판이 퍼부어질 것이다.
일곱 대접 심판 (16:1-21) 일곱 나팔 재앙과 마찬가지로 일곱 대접 재앙도 땅, 바다, 강, 해에게 부어 진다(16:1-9). 이것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나팔 재앙은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았지만, 대접 재앙은 그 범위가 전체로 확대된다. 심판의 원인은 그들이 성도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16:6).
다섯 번째 재앙은 짐승의 보좌에 부어지고, 여섯 번째에는 용(마귀)과 짐승(로마제국)과 거짓 선지자(배도한 유대교)의 세 더러운 영(靈)이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아 교회를 대적한다. 아마겟돈 (‘Aρμαγεδδών,하르마게돈) 은 ‘므깃도의 산’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르-므깃도[1](הר־מגדו)’의 헬라어 음역이다. 므깃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들이 치러졌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다 왕 요시아와 애굽 왕 바로 느고와의 전쟁일 것이다(대하35:20-25). 요시아의 죽음 이후에 유다의 왕들은 배교와 파멸 속으로 급속히 빠져 들었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대하36장). 따라서 므깃도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 주어진 패배와 황폐를 상징한다.
일곱 번째 대접이 부어지고 큰 성 바벨론이 황폐화 된다. 큰 성 바벨론인 예루살렘은 AD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언약을 배반하고 새 언약에 저항한 대가였다.
IV. 셋째 환상 군 (17:1-21:8)
바벨론의 멸망 (17:1-18:24) 하나님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를 심판하신다(17:1). 이 음녀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17:3). 붉은 빛 짐승은 로마제국이다.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17:6). 음녀의 다른 이름은 큰 바벨론(17:5)이고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다(17:18). 큰 성 바벨론은 배도한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이다. 따라서 음녀는 언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원래 하나님의 정결한 아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였고, 마지막에 그리스도 마저 죽였다. 이런 예루살렘이 음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음녀가 짐승과 처음엔 결탁하였지만, 나중에는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른다(17:16).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로마와 결탁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로마는 그 후에 그 예루살렘을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불로 다 태워 버렸다.
큰 성 바벨론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바다에 빠진 큰 맷돌같이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18:1-21). 그 이유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의 피가 예루살렘 성중에 보였기 때문이다 (18:24). 예수님은 언약을 배반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3:35). 이제 그 예언 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새들의 잔치 (19:1-21)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고 정결한 신부가 등장한다(19:17-18). 배도한 옛 언약 중심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 없어진 후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가 세상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보편교회란 사십 년간의 사도 시대 교회 (AD 30~70년)가 막을 내린 후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보편교회에 들어 온 자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복된 자들이다(19:9). 지금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을 통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다른 잔치에 참석한다. 그것은 그들의 살과 피를 먹히는 새들의 잔치이다(19:17-18). 피의 잔치요, 죽음의 잔치이다. 백마를 탄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들 즉 교회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들의 추종자들과 싸워 승리한다(19:19-20)
천년 왕국 (20:1-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마귀가 결박되었다(20:2-3; 마12:28-29).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첫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다. 그들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 천 년은 충만하고도 완전한 기간을 말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천년 왕국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천 년의 통치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다. 천년왕국은 지금 교회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지금 그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른다(벧전2:9).
최후의 전쟁(20:7-10) 천 년이 끝날 즈음에 마귀는 최후의 결전을 실행한다.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16:14-16)일 것이다. 마귀는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인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39장에 등장한다. 마곡의 땅에 있는 곡이란 자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차출된 자이다(겔38:2). 하나님은 곡을 도구로 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후에 곡도 징계하셨다(겔39:4). 따라서 곡과 마곡이란 단순히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의 총체를 지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직전 마귀의 최후 공격으로 교회는 큰 환난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시고, 가공할 만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풍전등화의 교회를 건져내어 승리를 주실 것이다(20:9~10).
대백보좌(大白寶座) 심판 (20:11-15) 재림하신 그리스도는 대백보좌에 앉으셔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신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않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지옥 불 못에 던져진다.
새 하늘과 새 땅(21:1-8)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다는 것은 옛 세상이 새로운 세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새로움을 의미한다(고후5:17).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다. 바다는 괴물 리워야단이 통치하는 악의 세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악이 존재할 영역이 전혀 없다.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 온다. 거룩한 성은 큰 성과 대비되며, 새 예루살렘은 옛 예루살렘과 대비된다. 옛 예루살렘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게 극렬 저항하는 유대교의 소굴이다. 큰 성 옛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하늘에서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인 새 언약 교회를 상징한다.
V. 네 번째 환 상 군 (21:9-22:5)
새 예루살렘 (21:9-17)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 준 어린 양의 아내는 (21:9)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다(21:10). 이 성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21:12)이 새겨진 문들과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이름(21:14)이 새겨진 열두 기초석이 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로 이루어진 교회를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의 측량치가 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것은 교회의 광대함과 완전과 영광스러움을 상징한다(21:16). 성벽의 높이가 백사십사 규빗인 것 역시 12 x 12 즉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의미한다(21:17). 어린 양의 아내는 더러운 음녀(17:3-5)와 대비된다.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만이 그의 정결한 아내가 된다(21:27).
회복된 에덴 (22:1-5) 아담의 범죄로 빼앗겼던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한다. 새 예루살렘의 생명나무는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보다 열두 배 더 풍성하다.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 심지어 잎사귀까지 만국을 소성케 하는 효력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에덴 동산의 성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생명나무의 열매는 떡과 포도주의 성찬이다. 이 성찬의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빛을 비췸 받으면서(22:5)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충만하게 완성될 것이다(22:5).
회복된 에덴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동시에 재림 시의 완성된 천국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VI. 맺음말 (22:6-21)
그리스도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경고대로 예루살렘 성은 AD 70년에 철저히 파괴되었고 성전을 불타 없어졌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는 예언 대로 언약의 심판이 예루살렘 위에 퍼부어졌다. 그리스도는 AD 70년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의 철저한 심판을 통해 그가 재림하실 때에 있을 우주적인 종말의 심판을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속히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그가 오실 때까지 그의 말씀을 힘써 지켜야 한다(22:7).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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