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지리환경, 기후조건, 생활방식 및 종교 신앙 등의 개별적 요소에 따라 서로 영향을 끼쳐왔으며, 각 민족의 복식 또한 자기 민족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발전되어왔다. 교통의 발달과 문화욕구 증대, 이민족의 침입과 통일 과정의 반복은 한민족(漢民族)과 각지소수민족 간의 접촉을 증대시켰고, 생활방식과 생산기술, 사상문화 방면에 상호영향을 미쳤으며 복식 또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중국전통 복식문화를 형성해왔다.
1) 다민족 융합의 산물 - 중국 전통 복식
전국시대의 분열을 수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형성한 秦王은 왕의 칭호를 개칭하여 <황제(皇帝)>라 칭하였다. <煌煌한 上帝>를 뜻하는 것으로, 종래의 왕과는 구별되는, 적어도 이념적으로 천상의 上帝와 같은 반열의 절대적 권력자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중국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하여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20여년 만에 멸망하였다. 유방(劉邦)에 의해 건설된 한(漢)나라가 대규모 농민반란인 황건난(黃巾亂)을 계기로 멸망한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 916-1125)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金 1115-1234)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元 1271-1368)나라를 거쳐 만주족이 세운 淸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는 異민족간의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 中原지역에서 살던 한족은 타지방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에 대해 ‘호인(胡人)’, 혹은 ‘호지(胡地)’라고 표현하였고, 그들의 고유의상을 ‘호복(胡服)’이라 칭하였다. 호복이 한족들에게 영향을 미친 최초의 시기는 전국시대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때이다. 조나라 무령왕이 호복을 받아들인 이유는 군사들의 기능성을 배가시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원지역의 복장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나는 상하의상이 구분된 형태였고, 두 번째는 위아래가 하나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이 두 가지 복장은 말을 타고 활을 쏠 때 서로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소매가 너무 커서 화살을 당겨 쏘기가 불편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하의가 너무 넓어서 말을 타기에 불편하였다. 그러나 북방유목 민족들이 즐겨 입던 호복(胡服)은 옷의 소매가 좁고 짧은 상의와 몸에 꼭 달라붙는 하의 형태였다. 소매가 좁고 짧은 상의와 몸에 꼭 달라붙는 바지는 말을 타기에 매우 편리한 복장이었다. 이에 북방유목민족들은 한 사람이 한 마리의 말을 타고서 손으로 활을 잡고 신속히 쏘면서 이동하여 매우 공격적이고 사나운 용병들이었다. 이에 부국강병이 국가의 절대목표였던 전국시대에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호복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수용하였던 것이다.
호복이 한족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胡人들이 착용하던 요대(腰帶)와 발목이 긴 장화(靴)를 들 수 있다. 북방소수민족들이 착용하던 요대는 가죽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면이나 실을 사용하여 만든 한족들의 것에 비해 질기고 다른 물건을 매달거나 착용하기 편해서 수용되었고, 발목이 긴 장화 또한 말을 타기 편리하여 한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북재(北齊)때에 이르러서는 胡服이 곧 일반백성들의 보편적인 복장이 되어 대다수의 한족들도 거리낌 없이 호복을 입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에서 거처할 때 뿐 만 아니라 조회나 예를 행할 때에도 착용하였고 황제를 알현할 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때부터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치빠오(旗袍)가 유행하였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때에는 기동성과 활동성이 뛰어난 옷과 긴 장화 그리고 동물의 털과 가죽을 이용한 옷들이 보편화되었다.
그렇다고 소수민족의 복식 형태가 모두 한족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나라를 건국한 후 한족 뿐 만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을 복속시킨 소수민족 정권은 절대적으로 많은 숫자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초기에는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강요하는 강압적 정책을 사용한다. 그러나 언어와 사람들의 생활습속이 나라가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수의 지배계층이 다수의 한족을 동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에 따라 오히려 한족에 동화되는 역수입 현상이 나타낸다. 말을 타는데 용이하고 유목생활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유목민족들의 의상이 점차 한족에 동화되어 활동하기에 조차 불편할 정도로 소매나 폭이 넓어지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렇듯 중국 전통복식은 한족의 복식형태와 소수민족의 고유의상이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정착되어 왔다.
2) 陰陽五行思想과 服飾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은 성장과 변화, 쇠퇴의 순환을 규제하는 五行과, 상호 보완적인 陰陽의 원리 그리고 거기에 道의 원리를 결부시켜 우주만물의 성장과 소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중국인의 의식 세계와 전통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행사상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5행에 색깔을 대비시켜 목(木)은 청색, 토(土)는 황색, 금(金)은 백색, 수(水)는 흑색으로 규정하고서 이들 중 청색과 적색을 양(陽)의 색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오행설은 오행에 방위를 대비시켜 동, 남, 중앙, 서, 북으로 규정하였고,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원리에 따라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相生, 木剋土, 土剋水, 水剋火, 火剋金, 金剋木-相剋) 우주만물의 생성원인을 설명하였다.
≪呂氏春秋≫의 應周篇에는 고대 중국역대왕조의 성쇠를 相勝說의 원리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전설적 시조인 黃帝는 土氣가 勝한 시기라면서 土德에 맞추어 행동하였고 土色인 黃色을 숭상하였으며, 禹는 木氣가 勝한다고 하여 靑色을, 湯은 金氣를 숭상하여 白色을, 그리고 文王은 火氣가 勝한다고 믿어 赤色을 선택하였다. 이후 주나라를 대체할 나라는 水氣가 勝할 것이니 黑色을 숭상하고 水德에 맞추어 행해야 한다는 이론적 전개를 하고 있다. 즉 우(禹), 탕(湯), 문왕(文王), 진(秦)나라를 위에서 설명한 오행의 덕과 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왕조의 번창이 오행사상에 입각해 반복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상극의 원리에 따라 각국의 숭상색을 대비시키고 있다.
주나라 때는 화기가 승한 시기라고 믿어 붉은 색을 숭상하였다. ≪예기≫<단궁>편에 의하면 ‘주나라 사람들은 붉은 색을 숭상하여 초상 때 염을 해돋이에 하고 군대에 붉은 말을 이용했으며 희생의 제물로 붉은 소를 썼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붉은 색이 숭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나라는 20여년 만에 멸망하여 복식에 관련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나라 초기 의복이 대부분 진나라를 계승했기 때문에 한나라 초기 복식을 통해 진대 의복을 미루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대 초기에는 문무백관 등이 착용했던 균현과 저복같은 제복이 모두 흑색이었고 황제 또한 흑색의 조포(粗布)를 걸치고 있던 점으로 보아 흑색의복이 숭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한(東漢) 말 봉기를 주도한 농민들이 머리에 황색띠를 매었던 이유가 火德에 해당하는 한나라를 무너뜨리면 土德에 해당하는 黃色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 의관을 갖춘다.
중국 전통 복식의 특징 중 하나는 옷과 모자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의관(衣冠)을 정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옷과 모자가 분리될 수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모자를 착용 하지 않은 의복은 복장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없었다.
한 고조 유방이 초나라의 제도를 본 따 만들었다고 해서 유씨의 관, 혹은 초관(楚冠)이라 불려졌던 모자는 종묘와 제사와 같은 의례행사시 의복과 함께 착용되었다. 천지명산에 제사지낼 때나 책봉, 왕의 혼례시 사용되었던 면관(冕冠)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의례행사를 진행할 때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행하였던 복두는 복건을 기본형태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흑라(黑羅)로 만든 것이 계급의 구분 없이 폭넓게 활용되었다.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관리나 문인들은 주로 경각복두를 착용하였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일할 때 편한 연각복두를 착용하였다.
요(遼)대에 이르러서는 황제와 대신만이 모자를 쓰고, 하급관원과 평민 백성들은 모자를 착용하지 않았다. 이에 일반백성들은 정수리 부분은 깍고 머리 양쪽과 이마부분에만 머리를 약간 남겨 놓는 곤발을 하였기 때문에 독두(禿頭-대머리)인체 그대로 생활하였다.9)
4) 효도의 또 다른 표현수단-喪服
상복은 망자를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입는 의례복이다. 슬픔과 비통함을 옷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망자와의 친소(親疎)에 따라 착용하는 복장의 형태가 달랐다. 망자와의 혈연관계가 가까운 사람은 슬픔이 매우 크기 때문에 거친 재질의 옷을 입었고 촌수(寸數)가 먼 사람은 고운 재질의 옷을 입었다.
흔히 상복을 소복이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상복의 재질로 소마(素麻)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상복을 ‘소복(素服)’이라 칭하게 되었다. 『禮記』「교특생」에 ‘소복은 망자를 보낼 때 입는 옷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주대에 시작된 상복제도는 이후 斬衰, 齊衰, 大功, 小功, 緦麻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졌고 ‘五服’ 혹은 ‘五衰’로 불려졌다. 五服중 斬衰는 가장 중하게 여겨졌다. 어린아이나 시집가지 않은 딸이 아버지를 위해서 입었고, 장손이 할아버지를 위해, 처가 지아비를 위해, 신하가 임금을 위해 입는 服이다.10)
이승에서 맺어진 인연 중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입었기 때문에 착용 기간도 가장 길어서 3년 동안11) 입었다. 상복을 입고 있는 기간동안은 죄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좋은 음악이나, 좋은 옷, 기름진 음식을 접할 수 없었고 부부가 동침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전통사회 중국에서는 상복기간을 매우 엄격히 적용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이로 인해 분쟁의 소지가 자주 발생하였다. 혹자는 부모나 친척의 죽음을 편의에 따라 이용하는가 하면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아 처벌되는 사람도 있었다. 현재 관직에 있으면서 승진 일수를 채워 곧 승진하려던 사람이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승진 대상에서 제외 될 것을 우려하여 부모의 죽음을 고의로 숨기는 경우가 있었고, 역으로 자신이 정치적 탄핵을 받을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상을 핑계로 하여 화를 모면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관이 발급하는 증명서를 첨부토록 하였고, 허위 신고자에 대해서는 엄한 벌로 처벌하였다.
晋代에는 ‘부모가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자’를 극형에 처하였고, 당률에서는 조부모자 부모가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자를 徒 3년형에 처하였다. 또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휴직하고 복상하지 않은 자에 대해 당률에서는 도 1년형에 처하였고 송, 명, 청률에서도 모두 처벌하였다. 당률에서는 ‘조부모나 부모 또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곡을 하지 않은자’를 十惡의 범주에 포함시켜 流 2000리의 刑에 처하였다.
부모의 상중에는 결혼을 하는 것도 허가되지 않았고, 이미 결혼한 자라도 이 기간 중에는 자식을 낳아서도 임신을 해서도 안됐다. 즉 27개월 내에 집안에서 아이가 출산되면 불효자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의 喪期인 27개월은 해석상에 있어 억울한 범죄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었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법 조항을 잘못 해석하여 3년 내 출산한 부부에 대해 모두 처벌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여 사회 문제가 되었다. 만약 상복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의 부모를 모두 처벌하려 한다면 1월 1일 사망한 부모의 자식이 12월 30일 동침을 하여 수태된 아이가 상복 기간 중에 태어났다고 하여 처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부는 실제로 상중에 동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처벌은 부당한 것이 된다. 한편 3년 상이 올해 2월 10일로 끝나는 집안에서 6월 30일 아이가 출생하였다면 이미 상복을 벗었다고 하여 처벌을 하지 말아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부부는 상복을 벗기 전에 동침하여 아이가 수태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처벌 기준은 어떠해야 하는가?
‘3년喪 기한 내’라는 법조문은 부모 사망 10개월 후부터 시작하여 탈상 10개월 후까지의 27개월을 적용해야 올바른 법 집행이 가능해진다. 이에 후대로 내려가면 점차 이러한 법 집행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齊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위해서나 계모를 위해서 입는 3년 喪과 아버지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杖期1년, 남자가 백숙부모나 형제를 위해서 입는 不杖期 1년, 그리고 증조부모를 위해서 입는 3개월의 4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똑같은 어머니 喪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의 어머니 복이 1년 喪으로 치러지는 것은 살아 계신 아버지와 똑같이 어머니를 대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공은 남자가 이미 혼인한 자매를 위해서 9개월 동안 복을 입고, 소공은 외조부모를 위해 5개월 동안 입으며, 시마는 비교적 먼 친척에 대해 3개월 동안 복을 입는다.
3. 음식
중국의 음식은 넓은 국토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 그리고 기후조건의 차별성에 따른 여러 가지 음식 재료, 강과 넓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의 풍부 등을 바탕으로 세계음식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러 민족들의 교류 확대가 증대되면서 각 민족의 전통 음식이 서로 영향을 주었고, 실크로드 개척과 몽고제국의 대원정은 동서간의 문화와 경제 교류를 활성화 시켰다.
정복왕조 시대의 이민족 복속은 문화를 전파시키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때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회회(回回)요리가 중국인 사이에 전래되었다. 馬思答吉湯이라는 肉湯과 紅花로 알려진 향료, 청량음료인 舍利別(果汁), 高昌에서 나오는 포도주 등은 대표적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음식물들은 한반도에도 전래되어 우리나라 식문화가 다양화되는데 일조를 하였다.
중국인들의 음식 문화는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가 거듭 되면서 여러 민족의 음식문화가 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북방소수민족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유목민의 전통음식인 양고기나 유제품이 한족과 서방세계에 전달되었고, 이후 한족 정권이 들어서면 한족 음식문화를 중심으로 이전 지배 민족의 음식 문화를 수용 발전 시키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늘날의 중국 음식으로 발전되었다. 못 먹는 것이 없고 사용하지 못할 재료가 없다는 중국, 산골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지만 굶주린 자가 없는 곳, 이민족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국화’ 할 줄 아는 민족, 그들의 음식 문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차별에서 평등으로
전통사회 중국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사는 장소와 입는 옷, 먹는 음식이 제한 받았다.
황제는 황제에게 맞는 예가 있고 제후에게는 제후로서 지켜야할 예가 있으며 서인은 남을 먹여 살려야할 의무가 있었다. 자신의 본분을 뛰어 넘는 행위는 非禮로 취급되어 처벌되었다. 관리와 귀족 등 지배계층은 특권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대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었고 평민이나 하층민들은 신분적 제약과 가난의 대물림으로 인해 굴종적 삶을 영위하였다.
중국에서 문명이 발생한 이래 계속되어온 신분 차별의식은 예(禮)라는 개념으로 포장되어 위정자들의 통치 이념으로 활용되었고 그 근간이 되고 있는 충효(忠孝) 이념은 동아시아 제국 백성의 의식 세계를 수직적 명령과 복종이 당연시되는 가치체계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황제와 지배층의 음식 문화는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고 고급스러웠지만 시중을 드는 하층민들은 그러한 현상에 대해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아니 당연시하고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차별적 삶을 살았다. 물론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왕조가 몇 차례 교체되기도 하였지만 하층민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인민은 평등하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형성된 이후 중국의 음식 문화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국가 주석으로부터 일개 인민(人民)에 이르기 까지 입는 옷과 착용하는 신발 주거환경과 먹는 음식이 대동소이하였다. 이러한 현상들 중 특히 음식문화는 당 관료와 일반 백성, 지식인과 노동자가 차별 없이 똑같은 음식을 지급 받게 되면서 기존의 차별의식이 동등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 사유화가 인정되고 지식인 양산의 필요성이 제기 되면서 점차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만한시(滿漢席)’ 식탁위에 내포되어 있는 음식문화의 평등성이 식탁 밖의 변화 요인에 의해 차별성이 부각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2) 디엔신(點心)과 우리의 점심(點心)
디엔신(點心)이란 중국인들이 가볍게 먹는 음식, 즉 우리나라의 간식에 해당한다. 튀기고 볶고 면으로 말은 것 등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고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이 늘 휴대하고 다니는 차와 함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 메뉴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중국인들은 아침과 점심을 간단하게 먹는 경향이 있다. 아침은 대체로 출근하던 길에서 먹거나 주변 식당에서 간단히 먹고 점심 또한 직장이 숙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사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사로 만두나 찐빵, 야채가 섞인 국수, 튀김 등을 애용한다.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디엔신(點心), 바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디엔신(點心)을 이용하는 인구 또한 증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점심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가?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점심은 아침과 저녁 중간에 먹는 정식식사이다. 그러나 1일 2식조차 먹기 힘들던 전통사회에서의 점심은 ‘마음에 점만 찍고 넘어가는, 즉 먹었다고 자위하는’ 위안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침에 굴뚝에서 연기나지 않은 집이 많아 권분이 강조되던 시절, 둘이 먹다 혼자 죽어도 모르던 시절(나라에서 죽을 배급해주던 設粥所에서 죽을 먹다 돌아보니 남편이 죽어있었다는 데로 비롯된 말), 일년 내내 흉년이 따로 없던 사람들에게 점심이란 말조차도 사치스럽지 않았을까?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살이 찔까봐 안 먹는 요즘 점심의 의미가 새롭게 닦아오는 것은 왜일까?
3)먹고 먹어도 계속 나오는 중국음식
음식의 배열 방식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 음식 배열 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님을 대접 할 때 큰 상에 진수성찬을 차려서 상채 들고 들어와 먹는다. 즉 한번에 모든 음식을 차려놓고 담소를 즐기고 음악을 들으면 즐겁게 먹는다.
그런데 중국음식은 어떠한가? 차와 함께 입맛을 돋우는 간단한 메뉴부터 시작하여 차가운 음식이 먼저 나오고 이후 더운 음식이 나온다. 어느 정도 먹었다 싶으면 본격적으로 생선요리와 탕과 밥 등 주식이 나온다. 이렇듯 중국음식은 차가운 종류에서 더운 종류로 그리고 마지막에 주식이 차례차례 상에 오른다.
그렇다면 중국요리와 우리나라 식사의 배열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용하는 기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먹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지만 중국음식은 동물성 기름을 주로 사용 하기 때문에 음식이 식으면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중국음식은 시차를 두고 차례차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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