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르네상스 미술 (Renaissance)
우리는 문화가 발달한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부흥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는, ‘다시re’, ‘태어나다naissance’라는 뜻입니다.
중세에 죽었던 문화가 15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를 내포한 이 명칭에서 우리는 15세기 문화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원형은 그리스·로마의 고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라파엘로(마돈나)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이라 하였으니
고전을 통하여 신(神) 중심의 중세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하고자 함입니다.
이 시대는 또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결과로 지리상의 발견이나 지동설을 밝힌 시대이기도 합니다.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등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천재로 칭송되는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인류역사에 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순수 미술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였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정부가 시청앞에 놓았던 주문한 상입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돈을 들이는 사업에는 특정한 목적과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
7-1
도나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
1412-13년, 나무, 높이168×173㎝ |
피렌체, 산타크로체 |
7-2
도나텔로 <성 죠르지오> |
1416년경, 대리석, 높이214㎝ |
피렌체, 바르젤로 박물관 |
7-3
도나텔로 <막달라 마리아> |
1457년경, 나무, 높이188㎝ |
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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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라고 하면 우리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시대에는 다빈치 못지 않은 훌륭한 예술가(장인)들이 많이있었습니다.
도나 텔로는 중세이전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을 한단계 더 성숙시킨 거의 완벽한 8등신과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을 발휘한 대가중 하나입니다.
그가 죽기 9년전 제작한 마리아 상을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그상을 보면 마리아상이라는것을 인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마리아상을 제작한 겁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추한면도 감추지 않고
미화시키지도 않은 인간 마리아. 우리안의 진정한 나를 마리아상으로 표현한것이라 할까요?
마사치오(Masaccio: 1401-27 또는 28년)
7-4
마사치오 <세금을 바치는 예수>, 1426-27년, 프레스코, 높이255×598㎝ |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의 브랑카치 예배실 |
세리가 와서 예수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자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성전세를 바칠 의무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유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렇게 하여라.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그 속에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이 들어있을 터이니 그것을 꺼내서 내 몫과 네 몫으로 갖다 내어라" (마태복음 17장 인용)
마사치오는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
물고기 입에서 은전을 꺼내(왼쪽) 세리에게 주는 (오른쪽)장면을 곁들이면서 중앙에 제자들로 둘러싸인 예수를 그리고 있습니다.
화면은 오른쪽에 대각선으로 놓인 건물로부터 산을 지나 점점 작아지는 나무로 이어져 후경으로 사라지는 공간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화면중앙엔 제자들이 원통형을 이루며 예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딱딱하고 기계적인 붓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로마시대 벽화에서 보던 자유로운 선과 색채가 되살아났고
오히려 더욱 세련되어지고 인물들의 개성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7-5
보티첼리 <봄>, 1477-78년, 패널, 315×205㎝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르네상스가 고대의 재부흥이라 하지만, 대부분의 미술품은 여전히 기독교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미술은 대부분이 세속적인 목적의 주문이라 해도 사회조직 자체가 기독교라는 틀에 흡수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주제를 빌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고 작품들도 대부분 성서의 내용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대 신화를 다룬 아름다운 그리고 세속적이고 로맨틱한 그림들은 대부분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들도 물론 주문에 의한 제작이었지만 공공장소에 과시의 목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보다 개인별장에 걸기 위한 소수 엘리트층의 수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7-6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패널에 템페라, |
172.5×278.5㎝,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아마도 서양미술사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작품일 것입니다.
조개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는 바람의 신이 보내주는 장미꽃의 미풍을 받으며 해안에 이르고, 님프는 망토를 준비하여 그녀에게 입히려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흰 녹색과 하늘의 연한 푸른색, 그리고 비너스의 살색과 자주빛 망토가 이루어 내는 색조는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아름다움의 전형이라고 여겨지는 비너스의 인체는 아주 비현실적입니다.
인체는 거의 9등신이며, 너무 긴 목과 늘어진 어깨, 그리고 창백한 살색과 표정은 슬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가 그려낸 아름다움은 신비합니다.
과학적인 원근법
7-7
마사치오 <성 삼위일체> |
1425-28, 프레스코 벽화,
667×317cm |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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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평평한 벽에 그려진 벽화이지만 마치 우묵히 들어간 감실에 실제 인물들이 있는 것 같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양쪽의 마리아와 요한, 그 뒤에 하느님이 계시고 둘 사이엔 비둘기 모양의 성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소실점을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 원근법을 우리는 선 원근법이라고 부릅니다.
거슬러 올라가서는 원시동굴 벽화에서 표현되었던 이러한 원근법은 이집트 미술에서 평면으로 사라지더니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다시 부활하고, 중세미술에서는 다시 사라지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또다시 과학적 기반을 다져 원숙하게 표현되기 시작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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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근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지요. 변호사와 농촌여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8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굴의 성모> |
1483-86년, 패널에 유화, 199×122cm |
파리 루브르박물관 |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소위 명화라고 지칭하는 레오나르도의 작품들보다
그의 관심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은 드로잉 또는 스케치들입니다.
교황에게 허가를 받아 인체 해부를 하며 그린 인체의 그림들도 그중 일부입니다.
그는 팔, 다리의 근육과 뼈, 동작에 따른 이들의 변화 등을 아주 상세히 관찰하고 묘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정확한 인체묘사를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지만 그의 해부학은 그러한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내의 내장이나 신경조직, 뱃속의 태아까지 연구한 것을 보면
그의 탐구는 바로 생명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하는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9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체 드로잉> |
1510, 잉크스케치, 29×20㎝ |
윈저 궁, 왕실도서관
7-10 |
레오나르도 다 빈치 <태아연구> |
잉크스케치, 30.14×21.25㎝ |
윈저 궁, 왕실도서관 |
우리는 다방면에 재주 있는 사람을 르네상스맨이라고 부릅니다
.
시대의 양식을 이끈 화가이며, 근대적인 경험과학을 시작한 과학자이고,
또 용도에 맞는 기구를 창안한 엔지니어이고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야말로 르네상스맨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업적들은 단순한 재주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통찰과 탐구의 소산이었습니다
7-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8년, 높이 460×880cm |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찌아 |
예수께서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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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는 이 최후의 만찬을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렷습니다.
원래 프레스코화는 젖은 회벽에 수성물감을 투입시켜서 말리는 기법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시도하려 했던 레오나르도는 마른 회벽에 유성물감을 사용하였습니다.
제작한 지 2년도 안 돼서 물감들이 벗겨져서 현재도 매우 보기에 어려운 상태입니다.
7-12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
1503-05년, 패널에 유채 |
76×53.3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
그림을 신비의 베일로 신화화시키는 것은 감상의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 본 레오나르도의 관심들을 상기한다면 이 그림도 그 관심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실제 여인이며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다(Francesco del Gioconda)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주인공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림이 아름다운 건 아니지요.
눈이나 머리카락, 옷, 손등 등의 모든 세부들은 윤곽선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사용해 온 스푸마토기법을 더욱 섬세하고 우아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법이 아마 <모나리자>를 신비하게 느끼게 한 주 요인일 것입니다.
*스푸마토(sfumato:이태리어) 색상이나 선의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하여 환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으로 다빈치를 최초의 창안자로 말합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7-13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년, 대리석, 높이 174㎝ |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
마리아의 섬세한 옷주름과 죽은 예수의 시신의 축 늘어진 근육묘사는 대리석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24세였던 미켈란젤로도 자신이 이룬 기술의 완성에 만족한 듯 합니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모두 서명이 없는데, 이 작품에만 그가 싸인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싸인은 마리아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띄에 새겨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세부묘사는 사실적이지만 구조나 도상은 임의의 설정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입니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Julio Ⅱ , 즉위 1503-)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성 시스틴 성당 천장화를 주문하였습니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습니다.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습니다
7-14
이렇게 하여 생긴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습니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입니다 |
7-15
미켈란젤로 <다비드> |
1501-1504년, 대리석, 높이410cm |
피렌체, 아카데미아 |
7-16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
1534-41년, 프레스코, 14.6×13.41m |
바티칸, 성 시스틴 성당 |
7-17
미켈란젤로 <로렌조 디 메디치의 무덤> |
1526-33년, 피렌체, 산 로렌조 |
메디치 가문 :2차례의 짧은 공백기(1494~1512, 1527~30)를 제외하고 1434~1737년에
걸쳐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했던 명문家입니다.
4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피우스 4세, 레오 11세)을 배출했으며,
유럽의 여러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었고 프랑스의 왕비도 여럿 배출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많은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후원하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르네상스를 이끌어갔던 주역이라 할수 있습니다.
결국 메디치 가문의 쇠퇴와 함께 르네상스도 쇠퇴기를 맞이 하게 됩니다.
이를 보면 문화도 경제적 지원과 적극적인 후원자 없이는 발전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7-18
미켈란젤로 <피에타> |
1546-55년경, 대리석, 높이 233cm |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습니다.
<피에타>는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습니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 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를 이렇게 크게, 그리고
그의 얼굴엔 자신의 모습을 새긴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위에서 본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상 처럼 말년의 그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거백하는듯이 보여집니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면 자신의 신앙과 인생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되나 봅니다.
산치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 ~ 1520년)
7-19
교황청의 <서명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바로 여기 서명실안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겁니다.(아래)
7-20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1년, 프레스코 |
폭770cm, 바티칸, 서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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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도 이야기했듯 르네상스미술의 특징은 작가의 순수한 창작 예술이라기 보다는 교회 또는 왕, 명문가들의
주문에 의한 결과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등도 교회가 가장 큰 고객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들 대가들을 이용해 교회의 권위를 세우고 교회의 대부분을 이들 뛰어난 작가의 작품으로 채울수
있었던 겁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습니다.
7-21
The Sistine Madonna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지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릅니다.
7-22
라파엘로 <교황 줄리오 2세> |
1511-12년, 런던, 국립미술관 |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했다고도 할수있는 르네상스의 미술은
이렇게 뛰어난 대가들과 모든권력을 쥐고 세상을 움직이던 교황청과
막강한 부를 움켜진 명문가들에 의해 활짝 꽃피우고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르네상스 이후 메너리즘시기가 도래합니다.
다음은 매너리즘 시기에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르네상스 작가들의 좀더 많은 작품들은 외국작가 편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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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르네상스 미술은 주문 작품들이어서그런지 작품들이 다 비슷한 것 같아요~르네상스 미술이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종교계의 성화들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듣지만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 작품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형상을 나탄낸 것을 보는군요~다들 상상의 하느님만 생각했는데~좌우 옷 색깔을 다르게 나타냄은 천당과 지옥을 의미하시는 건지~정말 섬세하고 세련되어지는 느낌이 날로 발전되어가는 것 같아요~3대 화가를 배출한 시대만큼~잘 감상하고 고마워요~^^
맞습니다,,천당과 지옥,,르네상스 이전 중세시대때부터 현재는 많이 완화된듯 하지만 초기 기독교 사회로 갈수록 하느님은 죄와 벌을 주시는 분,,심판자의 개념이 강하였었죠. 구원자에서 심판자와 하늘의 주인으로 지금은 자비로우신 사랑의 존재로 조용히 살펴보면 하느님의 존재는 여전한데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것도 어찌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편의주의와 이기심에 기인하는것이 아닐런지..
그림 7-14 7-16에서 시스틴 예배실은 시스틴 성당으로 표현함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림7-13 베드로 대성당과 조화되게^ ^ 프로테스탄식 표현 !! 예배당 예배실등____
지적 감사합니다,,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