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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투어 씨나리오입니다.
忠․孝․烈이 살아있는 마을 이야기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지변마을-
생태환경안내자교육생 정근욱
함평 생태환경 안내자 정근욱입니다.
생태환경의 고장 함평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호남가 첫머리에 ‘함평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되는 咸平은 높은 산과 계곡, 그리고 忠孝烈이 살아서 움직이는 평온한 작은 농촌지역으로 1965년에는 인구가 약15만정도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4만이 못되는 사람이 평화롭게 생태환경 속에서 장수 생활하며 행복스럽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잠시 歷史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해 봅니다.
地名의 역사로는 함평현(咸平縣)과 모평현(牟平縣 )이 600년전인 조선조 太宗 9년인 1409년에 합하여 咸平郡으로 改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東西의 폭은 26km요 南北의 길이는 29km로
군 전체의 모형이 인간의 몸통과 비슷하여 왠지 정겹고 포근한 감을 느끼게 하고, 동경 126°22′에서 126°40′사이와 북위34°58′에서 36°14′사이에 位置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1邑 9個面이 있으며 232개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서쪽은 영광군과 북쪽은 장성군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무안군과, 동쪽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접하고 있습니다. 면적은 368.7㎢로 남한 면적의 0.4% 비율과 전남 면적12,059㎢의 3.2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文化面에서는 세계적인 ‘나비축제’가 열리고 있는 지역, ‘미래를 만드는 작은 세계’라는 주제로 2008년에 ‘세계나비 곤충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130여만명의 관광객이 咸平을 다녀 가므로
100억여원의 입장 수입도 올려 명실공히 세계속의 咸平이 되었습니다. 고막천 석교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1372호로 지정되어 있고, 등록문화재 3점과 천년기념물 2개소가 있지만 엑스포공원과 자연생태공원, 그리고 月也에 있는 달맞이 공원은 生態學習場으로 훌륭한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지역의 발전과 경제 활성화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상으로 큰틀에서 함평지역을 간략히 소개해 드렸으며 문화 유산을 골고루 소유하고 있는 월야면 池邊(못갓)마을을 소개해 드립니다.
못갓 마을은 東萊鄭氏가 99%, 晉州鄭氏 3가구, 崔氏 1가구가 거주하는 벼농사와 잔디농사 위주의 농촌마을이며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 크게 세갈래 길이 있는데 가장 많이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은 월야 초등학교에서 진입하는 1.2km거리의길과 월야중학교에서 진입하는 1km거리의 길이 있습니다.
월야초등학교 방향에서 진입하는 길이 보통 80%이상 이용되는 길이므로 이길을 따라 口傳의 전설과 꺼리를 소개해 봅니다.
<구렁길과 홍살문>
마을로 들어서는 1.2km의 길중에서 300m정도의 길이 양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붉은 황토 사잇길로 비만 오면 신을 신고 다니기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고무신을 신는 시절이라서 비만 오면 어찌나 고무신과 황토흙이 좋아하는지 만나면 떨어질줄 몰라 신과 황토를 떼어내느라 종지와 허벅지가 뻐근할 정도로 힘이든 오솔길이 지금 지나는 구렁길 이었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 사람들 종단지가 유독크고 건강해서 보통 타 마을사람보다 장수하신 분이 많이 계시며 제 어머님께서도 백살에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보통 이곳을 지날 때는 염치불구하고 맨발로 걷는 것이 수월했습니다. 2000년도에 아스콘으로 포장하여 지금은 오고가는 길이 편리 하지만 옛날처럼 낙엽을 밝으며 명상에 젖을 여유가 사라져 버려 추억이 있는 그 시절이 무척 아쉽답니다.
구렁길 중간 l점에 세워진 ‘홍살문’을 보시겠습니다.
홍살문은 보통 열녀각이나 효자각 앞에 세워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위해 보여주는 상징의 표식인데 여기는 팔열부의 숭고한 뜻이 서려있는 장소이므로 2차선 도로에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못갓 마을분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보다 더 큰 홍살문을 보시거나 아시는 분 있으시면 제가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손들어 보세요? 없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홍살문 이랍니다. 기념촬영 하셔도 후일에 자랑거리가 됩니다.
<못갓마을 유래 전설 한토막>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다하여 붙여진 ‘못갓’마을 이름인데,
국도 22호 도로에서 1,20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된 먼 옛날의 마을 이름에 대한 전설 한토막을 소개해 드리면 마을 배산 역할을 하며 정기를 주는 월악산 산신과 영광군의 불갑산 산신이 불화관계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인근의 산신들이 불갑산 산신편을 들어 월악산 산신이 패배함에 따라 산이 허물어져서 연못이 메워지고 산의 높이도 164m로 낮아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1971년과 1972년 한해때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관정을 개발하면서 마을앞 논을 굴착해보니 아람드리 소나무가 뭍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口傳으로 전해오는 마을의 유래를 믿게 되었답니다.
<마을 공동 우물인 벌샘 유래 전설>
그리고 마을앞에 위치한 공동우물(가로,세로 4m 규모)은 벌샘이라고 부르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던지 임금님께서 물맛을 보려고 물을 갖어 오라하자 몇날을 걸쳐서 운반하다보니 물이 변했는데 임금님께서 물맛을 보시고 그 샘의 물맛이 좋지 않으니 ‘벌샘’이라고 하라는 명에 의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솟아나는 물이 많아 3인치 양수기의 양과 동일하게 물이 쉬지 않고 솟아나고 있어 70년도 한해 때에도 샘물로 인근 200여두락의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답니다.
아마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지하수 물이 풍부한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름날 밤에 3바가지 이상의 물을 몸에 끼얹지 못할 정도로 물이 차거웁고, 겨울철 아침에는 김이 모락 모락 오르기에 많은 주민들이 물을 길으며 세수를 하였답니다.
<마을 당산 나무 전설>
마을 앞이 연못이던 시절 못갓마을 처녀와 연못건너 괴정마을 총각이 서로 友愛하였으나 연못을 건너기가 힘들어서 마음데로 만나지 못하자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두 남녀가 정분을 나누자 월악산 산신께서 이를 노여워 하시어 평생 만나지 못하도록 벌을 주시며 마을 앞 연못가에서 마주보고만 있도록 정자나무로 변신시켜 버렸는데 소시절에 정자나무를 보면 못갓 마을 앞의 정자나무는 여성성이 있었고 괴정마을의 정자는 남성성이 있어서 전해오는 전설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어 마을의 처녀나 총각들은 이성 교제를 함부로 하지 않는 관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은 괴정마을의 정자나무가 고사되어 없어진지가 20여년이 되었고 못갓마을의 정자도 늙어서 고목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팔열부 정려각>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마을의 主將格인 정운길(鄭雲吉.東萊人)이 아들과 노복및 마을의 청년들을 이끌고 왜놈들이 진을치고 있는 영광 우치(現 장성군 삼서면 우치)에 쳐 들어가서 전투를 하다가 순절하자 部將格인 정함일(鄭咸一.晉州人)과 동생 정주일(鄭主一.晉州)이 1597년9월10일 긴급히 마을회의를 개최하여 경성으로 피난을 가기위해 영광군 법성포에서 배를 빌려타고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앞 칠산바다를 지나다 왜선 5척을 만나 전투를 하였으나 패배하자 피난을 가던 일행중에서 정운길의 부인 함양 오씨께서 ‘왜놈에게 잡혀가 어떤 굴욕을 당할지 알수 없고 가문의 지조를 지키자’며 바닷물에 투신하자 11부녀자가 뒤를 따라 순절하시었답다.
1597년 9월27일, 한날 한시에 12열부가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신동국삼강행실록에 12열부의 이름과 순절하신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言文으로도 적혀있어서 당시의 역사적 관심이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신동국삼강행실록에 의하면 12열부중 2분은 경도분이요, 2분은 무장현이요, 8분은 함평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함평 팔열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순절하신지 84년후인 숙종7년(1861년)에 순절하신 8열려분들의 손자4분들이 상소를 올려 國褒命旌되고 1682년에 함평현감이 3칸 맛뱃집으로 현재의 旌閭閣을 건립 하였습니다.
4열려분도 각기 거주지에 정려각이 건립되어 추앙받고 있습니다.
8열부 정려각 건물 왼편에 보면 ‘哀八烈婦辭 (팔열부를 애도함)’漢詩가 게시되었는데 첫줄만 해석하면 ‘어느 시대인들 열부가 없으리오만 함평땅 여덟 열녀 한날 한시에 바다에 뛰어든 이런 일은 없으리. 슬프고 슬프도다...’로 이어지는데 지은 시기가 팔열부 정려각을 세운 이듬해인 숭정 계해 늦봄(1683)에 침랑 남천 서봉령이 지은 漢詩가 있어 보는 이로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답니다.
영광군 백수면 대신리 묵방포 바닷가에는 ‘함평팔열부도해 순절소’라는 석정비가 8열부의 순절지를 바라보며 서있답니다.
팔열부정려각전경 신속삼강행실록열부편글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해변 암벽에 새겨진‘유명만력함평월야양정씨도해순절소’(좌) 음각글씨와 각인때 현장에 계셨던 양정씨의 문중 대표 이름이 1871년 3월(辛未年)에 새겨진(우) 암벽글 사진.
<군내 유일의 범죄 없는 마을 3번 지정>
못갓마을은 1989년,1990년,1992년 3회에 걸쳐서 광주지방검찰청과 전라남도에서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을 받아 常樂亭을 8칸 정자로(팔열부 정려각 옆에 세우며 팔열부 의미) 건립하였고, 敬老堂을 건립하여 효친사상을 실천하고 있으며 마을 광장 200坪을
아스콘 포장하여 영농기에는 건조장으로 평시에는 주차장으로 활용하여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함평군내에서는 범죄없는 마을을 3번 지정 받은 유일한 마을로서 준법정신에 대해 주민들의 자긍심이 아주 높답니다.
주민들은 5회까지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 받기위해 서로 합심하여 노력하고 있답니다.
겨울철과 봄철에는 부녀회가 주관하여 경노당에서 주민 모두가 점심을 먹을수 있도록 봉사하고 있는 미덕도 자랑 거리입니다.
<100여 세대가 한날 제사일 : 음력9월27일>
6.25가 발발한 해인 1950년9월28일 아침.
마을이 아비규한과 아수라장이 되고 하늘은 연기로 가득찼답니다.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한 국군11사단(최덕신 준장) 20연대(박기병 대령) 2대대(유갑열 소령) 5중대(중대장 권준옥 대위) 중대장의 지휘하에 7개마을(지변.내동.성주.순촌.송계.동산.괴정) 주민을 남산뫼에 집결시켜서 집단 학살을 시키려고 작정을 하여는데 당시 동삼면(나산,해보,월야면의 약칭)의 선무공작대장인 윤인식(후에 도의원과 국회의원 역임)씨가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은 살려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15세미만과 45세 이상의 사람들은 죽음의 경계선에서 벋어나 살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집단 학살시키는 슬픈 사건이 있는 마을입니다.
그때 가옥과 벼농사 수확물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살림살이도 모두 소실되는 쓰러림이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체 죽음의 길로 들어선 200여명의 원혼들을 지금도 달래지 못하고 있답니다.
집집마다 제사가 있어 그날은 슬픈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여 매장하였고 가족이 없는 분은 현장에 매립하였다가 지금은 공동묘지에 ‘무연고 묘’로 이장하여 관리중에 있습니다.
저도 그때 중학교 5학년 졸업반이신 형님(정동기)이 희생되시어
독자가 되었고, 대부분의 유족들은 지금도 그때의 아픔 때문에 고통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5중대 군인들이 학살한 양민 숫자는 나산면이 46명, 해보면이 128명 월야면이 350명으로 총 52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고 가옥 1,454동(나산5동.월야1,449동)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함평양민집단학살희생사건’이라 부르고 있으며 도지사의 승인을 받아‘함평사건희생자 유족회’사단법인을 설립하여 매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희생자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에 의하여 국군이 258명(신고자 한하여) 학살한 것이 분명하다고 2007년7월3일 진실이 규명되었고, 고인들에게 이를 알리는 ‘고유제’도 봉행 하였지만 위령탑건립과 호적정정은 진전이 없는 실정이랍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은 남산뫼에는 ‘함평양민학살합동위령비’를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 2006년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三綱碑>
마을 앞에 삼강비가 크게 자리를 하고 있어 이 마을을 오고가는 모든이에게 충효열의 중요성에 대해 묵언의 교훈을 주고있답니다.
이 삼강비는 정유재란때 장성 우치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신 鄭雲吉(忠)어르신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위해 왜군이 주둔한 우치를 찾아가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신 아들 鄭燉(孝), 절개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영광 묵방포 칠산바다에서 순절 하신 咸陽吳氏를(烈 )기리기 위해 세운 碑로서 當代에 忠孝烈이 되었답니다. 다른 가문과는 다르게 아버지(忠)와 어머니(烈) 그리고 아들(孝)이 삼강을 이루었다는 것이 의미가 매우 크답니다.
<忍睦齊와 御史花>
마을 중앙에 한옥건축물로 인목제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 서당이며 공부하던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공부하신 鄭東後(東萊人.28世孫) 어르신이 숙종 31년(乙酉)문과과거에 장원 급제하시어 제주목사와 동부승지 벼슬을 하시었고 이분이 받으신 어사화가 지금도 보존되어 후손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는데 마을 출신중에는 대학교수와 의사들이 많이(50여명 정도) 배출되었고 면장도 4분이나 배출되었답니다.
여러분들이 운이 좋으면 오늘 어사화를 보실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신분 손을 높이 들어보세요?
함께 덕좀 볼까요?
충효열이 살아서 숨쉬는 못갓마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설명중에 보충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질문이 있으신지요?
없으시면 못갓마을 안내를 마칩니다.
항상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생태환경 지역인 함평을 기억해 주시고, 친환경 농산물도 판매합니다. 연락 주시면 구매토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과의 만남에 감사드립니다.
* 사진은 별도 사진파일로 올렸습니다.
첫댓글 준비하신 자료가 대단하십니다. 저희들도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선생님께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