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핵전쟁, 대재앙 이야기의 킬러 컨텐츠?
대재앙 이후 이야기 (21)
“이 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 트루먼 미대통령,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지구 자체가 불과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것 같았으며 불꽃은 땅 속으로부터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솟아올랐다. 하늘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웠고 땅은 주홍빛이었다. 그 사이를 노란 색 연기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 원자폭탄 투하 당시 나가사키 병원에 있던 다츠이치로 아키즈키 박사의 증언1)
인류 전체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갈 대재앙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이 하위 장르가 대중의 깊은 관심을 끌어 모으며 소설과 영화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 계기는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미소 냉전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핵무기가 실제 현실적인 위협수단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 1950년대는 특히 냉전의 심화로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가중되었다. 위 그림은 당시 SF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 Amazing Stories] 1952년 12월호 표지로, 핵폭발을 소재로 하고 있다. ⓒAmazing Stories
외계천체와의 충돌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천문학적인 확률이라서 우리 피부에 잘 와 닿지 않고2) 치사율 높은 역병이 인류 다수를 사망에 이르게 한 예는 아직까지 중세유럽에 횡행한 흑사병 정도밖에 없지만 (물론 앞으로는 실험실에서 흘러나온 미지의 바이러스가 조류독감은 저리가라 할 만큼 얼마나 치명적인 독기를 뿜어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핵폭탄은 국가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누구든 스위치만 누르면 바로 대도시 하나쯤 순식간에 날려버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86년에는 온 나라 병기고에 쌓아둔 핵탄두를 다 터뜨리면 지구를 7번 반이나 가루로 만들 수 있다는 예측까지 나온 바 있지 않던가.3)
요약하면, 현대에 와서 대파국을 불러일으킬만한 자연재해의 위협은 전보다 줄어들고 있는데 반해 국제 사회에서 국가 간의 알력과 이해상충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미국과 러시아를 위시해서 세계 권력의 패권다툼에 초연할 수 없었던 이해관계국들에서 핵무기의 오용과 남용이 낳을 비극4)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폐해를 그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표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뿐 아니라 태평양의 바나나 제도에서 입증된 핵무기의 살상력은 어지간한 상상을 초월했기에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다수의 나라들이 이 가공한 파괴수단을 손에 넣었기에, 핵무기로 세상이 극심한 피해를 입거나 심지어 인류가 멸망하는 이야기는 상상과학에 의존하는 면이 많았던 과학소설의 전통과 달리 실제 현실 과학에 근거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 이 가족의 미소는 무슨 뜻일까? 대피소에 몸을 숨기는 참인가, 아니면 다 끝났다고 여기고 나오는 길인가? 실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잠시 직격을 피했다 해도 방사능 탓에 결국 죽은 목숨이다. 설사 안에서 버틴다 해도 그저 죽음을 한동안 유예할 뿐이다. 1940~1950년대에 선진국들 곳곳에서 이처럼 엉성하기 짝이 없는 핵공격 대피시설이 유행했다. 존 클루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일부 중산층이라면 으레 하나씩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지하창고나 뒤뜰을 파고 설치한 대피소 안에는 통조림 식량과 물, 침구, 전원용 배터리, 라디오 그리고 가이거 계수기 등을 저장했다. 실제 쓰일 기회가 없었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이러한 날림 가림막 정도로는 별 쓸모가 없었을 테니까. 다만 마음의 위안을 얻는데에는 기여했으리라. ⓒJ. Clute
그렇다면 이러한 공포를 직접적으로 다룬 주요 과학소설들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미국에서는 네빌 슛(Nevil Shute)의 <해변에서 On the Beach, 1957>5)와 팻 프랭크(Pat Frank)의 <아아, 바빌론 Alas, Babylon, 1959> 그리고 월터 M. 밀러 2세(Walter M. Miller, Jr.)의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A Canticle for Liebowitz, 1957> 같은 수작들이 1950년대 말에 나왔고 폴란드 출신 유태인으로 미국에 정착한 모오데카이 로쉬월드(Mordecai Roshwald)의 <지하7층 Level Seven, 1959>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전에 언급했다시피 로벗 크로미(Robert Cromie)의 장편 <운명의 붕괴 The Crack of Doom, 1895>와 H. G. 웰즈의 장편 <해방된 세계 The World Set Free, 1914>처럼 20세기 전후 원자폭탄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한 고전적 작품들 뿐 아니라 세계 1, 2차 대전 사이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J. 레슬리 미첼(Leslie Mitchell)의 <사냥꾼 게이 Gay Hunter, 1934>6)가 그리고 1950년대에는 피터 브라이언 조지(Peter Bryan George)의 <적색경보 Red Alert, 1958>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1954>이 주목을 받았다.
단편집 중에는 월터 M. 밀러와 마틴 H. 그린버그(Martin H. Greenberg)가 편집한 단편집 <최후의 날 그 후 Beyond Armageddon, 1985>7)이 20세기 전후반을 총망라하여 기라성 같은 영미권 작가들의 핵전쟁 이후 이야기들을 수록하였다. 이 선집에는 발표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단편 <소년과 그의 개 A Boy and His Dog, 1969>가 수록되어 있다. (이 단편에 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적색경보>는 소설보다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나는 어떻게 하여 원자폭탄에 대한 근심을 멈추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1964년>의 원작으로 유명세를 치렀으며, <파리대왕>은 핵전쟁 자체에 대한 직접적 언급보다는 그러한 위기가 살아남은 인간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8) 한편 <적색경보>의 저자 피터 조지는 이보다 몇 년 후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소설가 유진 L. 버딕(Eugene L. Burdick)과 헨리 휠러(Henry Wheeler)가 공저한 장편소설 <안전 확보 실패 Fail-Safe; 1962년>에 대해 저작권 침해소송을 낸 바 있다. 일부 내용에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인데 결말은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안전확보 실패> 또한 영화화되었다.
▲ 핵전쟁에 대한 공포는 카드게임 상품을 팔아먹는 상술의 명분으로도 이용된다. 해외에서 판매되는 이 핵전쟁 카드게임은 2~6인용으로 1세트당 140장이 들었으며 가격은 $29.95다. ⓒDouglas Malewicki
미국 작품들이 주로 공산권에 철의 장막이 내려지며 미소 냉전이 격화되던 1950년대 말에 나왔다면, 영국 작품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같은 위기에 대해 진지한 우려를 표명해왔다는 점에서 훨씬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발표된 핵전쟁 이후 세계를 그린 미국 소설 가운데에는 러셀 호밴(Russell Hoban)의 <리들리 워커 Riddley Walker, 1980>가 주목할만하다. 독일에서는 청소년 문학작가 구드룬 파우제방(Gudrun Pausewang)의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Die Letzten Kinder von Schewenborn, 1983>9)이 발표되었고, 러시아에서는 2000년대 발표된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Dmitry Glukhovsky)의 <메트로 2033 Metro 2033, 2005>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속편은 물론이고 영화와 컴퓨터 게임으로까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