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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강요독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장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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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성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성례로 여겨지던 나머지 다섯 가지는 성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뒤, 그러면 그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한다.
<서론>
1. 성례에 관한 앞의 논의는, 가르침을 잘 받고 건전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호기심을 품지 않게 하고, 또 주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두가지 외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성례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의 담화나 모든 학교 강의나 설교에 흔히 등장하는 7성사의 관념은 먼 옛날부터 자리잡기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따라서 내가 일반적으로 참되고 진정한 주님의 성례로 간주되어 온 나머지 다섯 의식들을 개별적으로 더 면밀하게 검토하서 모든 자식을 제거하고, 여태까지 성례로 간주되어 온 것이 사실은 어떤 것들이며,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폭로한다면, 어떤 가치있는 일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앞에서 빈틈없는 논증에 의해 명백히 못박아 두었던 것, 즉 성례를 설정하는 결정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사실 성례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하여 신자들의 양심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는데, 그러한 확실성은 사람에게서는 결코 얻을수 없을 것이다. 성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한 뜻의 증거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나 천사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모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사 40:13,롬 11:34). 주님만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 관하여 우리에게 증거하신다.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이나 약속이 보증되었다는 인침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형성되고 계획되지 않았다면, 물질적인 것들이나 이 세상의 요소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신비들을 그처럼 초라한것들 속에 감추어 둘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례를 성례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행되어야 한다.
A.견신례
2. 소위 견신례라는 것은 인간의 경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례로 지정된 최초의 표식이다. 더우기 사람들은 견신례가 세례 때에 죄의 결백을 위해 주어졌던 성령을 수여해서 은혜를 증가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세례를 통해 중생했던 사람들에게 싸워나갈 힘을 더해 주는 능력이 잇는 것처럼 꾸며왔다. 또한 이 견신례는 기름바름과 일정한 선언으로 행해진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에게 거룩한 십자가의 표를 치며, 구원의 성유(聖油)로 그대에게 견신례를 베푸노라."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게 이루어지는지!
그러나 여기서 성령의 임재를 약속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있는가? 그들은 일점 일획도 보여줄 수 없다. 그들의 성유가 성령의 통로하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확신시켜 줄 것인가? 우리에게는 기름이 조악하고 불쾌한 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물질에 말씀을 덧붙이라. 그러면 그것은 성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을 성례의 시행자들로 자인(自認)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논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명령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사역자의 제 1수칙이다. 그러면 이제 그들에게 이 사역을 뒷받침하는 어떤 명령이 있는지 제시하게 해보라. 그러면 나는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단 하나의 명령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뻔뻔스러운 신성모독을 변명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왔는지를 물으셨다. 그들이 "사람에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는 그것을 헛된 것으로 증명했을 것이고, "하늘에게서"라고 하면 그들 편에서 요한의 가르침을 인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너무 심하게 비방하지 않기 위하여, 그것이 사람에게서 왔다고 감히 말하려하지 않았다(마 21:25 - 27). 그러므로 견신례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았다면, 그것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그것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한다면, 얼마든지 증명해 보도록 하라.
3. 정말이지 그들은 사도들을 예로 들어 자신들을 옹호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무 것도 경솔하게 행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렇다. 그들이 사도들의 추종자임을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무엇을 했던가?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을 그 쪽으로 보냈다고 전한다. 두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아무도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성령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이 안수를 통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8:14 - 17, 참조. v.g). 그리고 누가는 이 안수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행 6:6, 8:17, 13:3, 19:6).
나는 사도들이 했던 것, 즉 그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듣는다.
주님은 당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 주셨던 그 눈에 보이는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을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수여하고 통하여 나뉘주시고자 하셨다. 나는 안수의 이면에 무슨 깊은 신비가 깔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들이 안수한 그 사람을 하나님께 위탁했다는 것, 이를테면 드렸다는 것을 몸짓으로 사용했다고 해석한다.
그때에 사도들이 수행했던 이 사역이 아직도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이 안수도 같이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아 중단되었는데도, 안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확실히 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지도가 없으면 존속할 수 없으므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계심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목마른 자들이 생수를 마시도록 그들을 자기에게 부르신다는 영원불변하게 확정된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요 7:37, 참조 사 55:1, 요 4:10, 7:38).
그러나 안수를 통하여 주어졌던 그 기이한 능력들과 두드러진 역사(役事)들은 중단되었다. 그런 일들은 적절하게 잠시 동안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복음전파와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은 경이롭고 기이한 이적들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확산되어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이적들을 중지시키셨을 때, 자신의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반면 그의 왕국의 위대함과 그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고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이 배우들은 어떤 점에서 자신들이 사도들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성령의 분명한 능력이 즉시 나타나도록 하려면, 그들은 안수로써 이것을 실현 해야했다. 그들은 이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째서그들은 사도들이실제로 사용하기는 했으나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던 안수를 자신들의 임무라고 자랑하는가?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을(요 20:22) 성령을 받는 하나의 성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주께서 일단 이렇게 하신 것이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그 후손들이 이 원숭이들처럼 그저 흉내로 아무런 유익도 없이, 냉랭하고 공허한 표식을 모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께서 사도들의 기도로써 확연한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때에 안수했던 것이다.
4. 만약 그들이 안수하는 것에서 사도들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그릇된 모방 외에는 그들이 사도들과 유사한 점은 전혀 없지만), 그들이 "구원의 성유"라고 부르는 그 기름은 대체 어찌된 것인가? 기름에서 구원을 찾으라고 누가 그들에게 가르치기나 했는가? 누가 기름에 확신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는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고(갈 4:9), 또 이렇게 유치한 관습에 구애받는 것을 심히 배척한(골2:20) 바울이 가르쳤는가?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감히 이렇게 단언한다. 기름을 "구원의 성유"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완전히 부정하는자들이다. 그들은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나라에 들지 못한다. 기름은 배를 위한 것이요 배는 기름을 위한 것이나, 주께서는 두가지를 모두 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6:13참조). 또 사용하면 소멸되는 이 모든 무력한 물질들은 영적이며 결코 썩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신은 우리가 세례받은 그 물과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똑같이 판단하는가?"라고 누군가 질문할 것인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의 성례에서는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제시되는 물질의 본질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물질 위에 부여된 형태이며, 물질의 원동력은 이 형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들이 그 본질을-성례에서 우리 앞에 놓이는 빵과 포도주와 물-보완하는 한에서는, 바울의 말이 항상 타당하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께서는 이것 저것다 폐하시리라"(고전 6:13). 왜냐하면 그것들을 우리를 육신 안에 묶어주 않고, 진정 영적으로 우리를 가르치게 된다.
5.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먹이며 키우는가를 더욱 자세히 조사해 보자. 이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성령이 세례에서는 죄의 결백을 위해 주어지고, 견신례에서는 은혜의 증가를 위해 주어지며, 또 우리는 세례에서 거듭나고 견신례에서 전투를 위해 무장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세례는 견신례가 없어도 충분히 완성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얼마나 사악한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롬 6:4 - 5)? 더불어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생명에의 동참을 우리의 육을 죽이며,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며(롬 6:6),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기 때문이다(롬 6:5). 이것이 바로 전투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인용한 귀절에서 누가는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고(행 8:16)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누가는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들이 어떤 성령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을 단순히 부인하지 않는다(롬 10:10).
다만 그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뚜렷한 능력과 확실한 은혜를 받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반면(행 2:4), 그리스도는 이미 오래 전에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안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아버지의영이시라"(마10:20)고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사탄의 흉악하고 위험한 기만을 알 수 있다. 사탄은 경솔한 사람들을 은밀히 세례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세례에서 참으로 주어졌던 것이 그의 견신례에서도 주어 진다고 속인다. 이것은 원래 세례에 대한 약속들을 세례로부터 잘라내어 그것들을 다른 데로 옮기고 이전시키는 사탄의 책략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제는 이 멋진 기름 바름이 어떤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찾아냈다고 나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는 것이다. 기름 바르는 자들의 말은 이렇다. "세례에서 우리는 전투준비를 시켜 주는 약속을 받지 않았다" 전자는 진리의 음성이지만, 후자는 허위의 음성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지금까지 이 견신례를 정의한 것 보다 더 바르게 정의할 수 있다. 즉 견신례는 세례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세례의 기능을 무색하게 하거나 폐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거짓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또 그것은 마귀의 거짓으로 더럽혀진 기름이며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서 암흑 속으로 던져넣는 것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6. 뿐만 아니라,그들은 모든 신자들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받은 후에도 안수받음으로써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주교의 견신례를 통해 성유를 바르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는 말 그대로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속한 것은 모두성경에 규정되어 있고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교의 참된 형태를 성경 이외의 다른 데서 찾아 배울 수 있다고 하는것 같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한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전부는 그리스도인들의 초보에 불과하고, 기름이 그들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으로 인하여, 대부분이 분명히 성유를 받지 않았던 모든 사도들과 많은 순교자들이 -왜냐하면 그 때는 기독교의 아주 세부적인 점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들에게 쏟아 부어질 기름, 아니 아직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정죄 받는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놔두어도, 이 사람들의 잘못은 저절로 드러난다. 그들은 얼마 만큼이 신자들에게 세례 후에 기름을 바르는가? 그리고 그들은 불완전함을 쉽게 고칠수 있었는데도 왜 그들의 회중 가운데 있는 그런 반쪽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 생략하면 엄중한 유죄선고를 받게 될 일을 회중들이 하는데도, 그들은 왜 비겁하고 나태하게 방관하는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상실한 사람 이외에는 구원의 획득에 그렇게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을 그들은 어째서 더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즉 그들은 견신례를 아무렇게나 멸시받는 채로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언 중에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7. 마침내 그들은 이 거룩한 기름바름이 세례보다 더욱 존중되어햐 한다고 단정짓는다. 왜냐하면 세례는 보통 사제이면 누구나 행할 수 있지만, 견신례는 오직 주교들의 손으로만 행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조작품에 푹 빠졌으므로, 비교한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들을 함부로 경멸하는 미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오, 신성을 모독하는 입이여, 악취만 풍기는 너의 입김과 중얼거리는 몇 마디 주문으로 더럽혀진 기름을 감히 그리스도의 성례에 맞서게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별된 물과 비교하려는가?
그러나 너의 뻔뻔스러움에 비하면 이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고, 심지어 너는 이것을 좋아하기까지 했다. 이런 말들이 바로 거룩하다는 교황청의 응답들이며, 사도적 삼각좌의 신탁들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신체 중에서 더 가치있는 부분 즉 이마에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더 적합한 반면 견신례는 덕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첫번째 이유를 말함으로써, 성례의 효력을 사역자의 가치로써 평가하는 도나티스트파와 같은 사람들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주교의 손의 가치로움으로 인해 견신례가 더 가치있게 여겨질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누군가가 주교들의 이 굉장한 특권의 원천에 대해 그들에게 묻는다면, 자신들의 변덕 이외에 무슨 근거를 내놓겠는가? 사도들만이 성령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도들만이 그 권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주교들만이 사도인가? 정녕 주교들은 사도들인가? 좋다. 우리가 이것도 받아주자. 그들은 왜 동일한 논법으로 주교들만 성찬에서 피에 손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주께서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는 이유로 그들이 평신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면 어째서 주교들에게도 주셨다고 추론하지 않는가?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사도들을 단순한 사제들로 만들고, 여기서는 현기증리 나는지 다른 방향으로 가더니, 갑자기 사도들을 주교들로 둔갑시켜 놓았다. 결국 아니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울이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도록 하기 위해 바울에게 보내진 것이었다(행 9:17-19). 나는 또한 이 한 가지를 첨가하겠다. 만일 이 직책이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주교들에게 속했다면, 교황 그레고리의 서신에도 나와있듯이, 왜 그것을 일반 장로들에게 함부로 넘겨 주었는가?
8. 견신례를 하니님의 세례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데 대한 그들의 다른 이유도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우둔한지 모른다. 견신례에서는 이마에 기름을 바르고 세례에서는 정수리에 바른다고 한다. 마치 세례가 물이 아닌 기름으로 행해지는 것 처럼! 이 불한당들은 그들의 누룩으로 성례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자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의 여부를 증명하도록 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내가 이미 다른데서 말했듯이, 인간의 고안품들이 난무하는 성례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비쳐질 틈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 때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지금 그 자신의 선생들을 믿으라. 보라! 그들은 세례에서 물을 경시하고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기름만을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 이마에 적셔지는 것은 물이라고 반박한다. 우리는 물과 비교해서 당신들의 기름에 대해서는 -세례에서든 견신례에서든- 한푼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누가 기름이 더 비싸게 팔린다고 주장 한다면,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당신의 판매는 사기이고 절도이며 무익하다.
견신례가 세례보다 덕을 더 많이 증진시킨다고 지껄이는 세 번째 이유로 그들은 자기들의 불경건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사도들은 안수로써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들을 나눠 주었다. 이 사람들의 기름바름은 어떤 점에서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다수의 모독행위로 하나의 모독행위를 덮어 버리는 이 연출가들과는 작별하라. 고르기우스의 매듭은 억지로 풀려고 애쓰는 것보다 잘라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9. 그러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증명할 수 있는 논거까지 빼앗겼음을 알게 된 때도, 그들은 상습적으로 견신례는 아주 오래 된 의식이며 수세기 동안의 관습에 의해 확실시 된 것인 양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아무 이득도 없다. 성례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고, 인간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견신례가 성례로 인정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정하셨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의 저술가들이 어디서나 두 가지 성례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을 보면서도 왜 그들은 견신례가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만약 인간에게서 믿음의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 자들이 성례라고 사칭하는 것을 고대인들은 결코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난공불락의 성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도 안수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것을 성례라고 칭하던가? 어거스틴은 안수는 단지 기도일 뿐이라고 명백히 규정한다. 이제 그들은 어거스틴이 이 안수를 견신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유나 화해를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는 가증스러운 구별을 가지고 나에게 덤벼들 필요는 없다. 그의 책은 남아있고 두루 읽히고 있다. 만약 내가 어거스틴이 책에 썼던 의미를 곡해하고 있다면, 여느때 처럼 그들이 나에게 욕하고 침뱉아도 괜찮겠다.
10. 나는 이 기형적인 성례의 망령이 출현하지 전에 옛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종재했을 그 관습을 우리가 지켜왔더라면 참으로 좋겠다! 그것은 세례를 부당하게 만들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는 견신례를 말함이 아니라,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교회앞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하는 교육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최선의 교육방법은 이 일을 위하여 교리문답을 작성하는 것이다. 이 교리 문답은 모든 기독교회가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신조의 대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포함시킨 것이어야 한다.
열살 된 아이는 교회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또 신조마다 질문받고 대답할 것이다. 무엇을 모르거나 이해가 불충분하면 가르쳐 줄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보는 데서 가르쳐 줄 것이다. 그 아이는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바로 그 하나의 참되고 진지한 믿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 규율이 지금 시행된다면, 자녀교육을 전혀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필경 각성시킬 것이다. 이제 자녀교육을 등한시하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신앙상의 일치가 더욱 깊어질 것이며, 편만해 있는 무지도 줄어들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신기한 사상들에 무분별하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두가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B. 고해
11. 그들은 고해를 그 다음에 두고서 어지럽고 번잡스런 방식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양심은 그들의 교리로부터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회개에 관하여 성경에서 배운 바를 간단히 설명하고나서, 우리의 논적들이 가르치는 것과 어불성설의 이유를 가지고 결국 고해를 성례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12. 먼 옛날에도 고해에 대해 정통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규율에 따라 단순하고 진지하게 말하기를, 회개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즉 자기를 죽이는 것과 새로 사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죽이는 것을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영혼의 슬픔과 공포라고 설명한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죄를 인식하게 될 때, 그는 진실로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며,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서 자신이 비참하고 망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의식에 부딪히게 될 때, 이것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는 공포에 질려 고꾸라지며, 벌벌 떨면서 쓰러진다. 결국 낙담하고 절망하고 만다. 이것이 회개의 첫 부분인데, 보통 '통회'라고 부른다. 그들은 다시 사는 것을 믿음으로 부터 일어나는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은 죄를 의식함으로써 좌절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그의 긍휼, 은혜, 구원을- 바라봄으로써 기운을 북돋우며 마음을 잡고 용기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이킨다는 것이다.
13.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성경에서 여러가지 의미들로 파악한 때문인지 회개를 두 가지 형태로 상정했다. 이 둘을 적절히 구분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는 율법적인 회개라고 칭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인은 죄의 화인을 맞아 상처를 입고 졸아들어, 이 불안한 상태에 사로잡힌 채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복음적인 회개라고 부른다. 이것을 통하여 죄인은 실로 심각한 고통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올라가 자신의 상처를 위한 약으로, 자기의 공포에 대한 위로와 비탄의 피난처로서 그리스도를 붙잡게 된다.
율법적인 회개의 실례들로는 가인(창 4:13)과 사울(삼상 15:30)과 유다(마 27:4)가 있다. 성경이 그들의 회개에 관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죄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복수자와 심판자로만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바로 이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이미 들어가 있던 지옥의 관문 정도에 불과했고, 위엄에 찬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형벌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찌르는 침 때문에 쓰라리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신뢰함으로써 일깨워지고 생기를 얻어 주께로 돌아 온 모든 사람 안에서 복음적 회개를 발견한다. 히스기야가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공포에 짓눌렸다. 그러난 그는 울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되찾았다(왕하 20:2, 사 38:2).
니느웨 백성들은 무시무시한 파멸의 경고를 받고 떨었지만, 베옷을 밉고 재 가운데서, 주께서 그들에게로 돌이키셔서 그 맹렬한 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다(욘 3:5,9). 다윗은 백성을 계수하였으므로 크게 죄지었다고 고백했지만, 곧 이어 "오 주여, 주의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삼하 24:10)라고 기도했다. 나단에게서 책망받았을 때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자인했고, 여호와 앞에 엎드린 동시에 용서를 기다렸다(삼하 12:13,16)
14.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내가 성경으로부터 배운 바에 의하면 회개라는 말 자체는 믿음과 다르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 안에 믿음을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고 한 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회개와 믿음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믿음과는 별개인 진정한 회개가 있을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불가분의 관계는 지녔다해도, 구분되어질 수 있다. 믿음은 소망이 없으면 안되지만 믿음과 소망이 다르듯이, 회개와 믿음은 영구적인 결속으로 밀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혼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 쌍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근거로써 내가 판단하건대, 회개는 우리의 육신과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순전한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옛 선지자들이나 후 시대의 사도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했던 모든 설교를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왜나하면 그들은 이 한가지, 즉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를 낮추고 바른길로 돌아와 참회해야 한다는 이것을 놓고 씨름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주께로 돌아오라" 또는 "회개하라(마 3:2)와 같은 의미로 상호 전용될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 참조, 행26:20, 롬 6:4)고, 즉 이러한 종류의 회개와 갱신에 어울리는 생활을 영위하라고 말했다.
15. 뿐만 아니라, 복음의 대의는 회개와 죄사함이라는 이 두 가지 요강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시키기 위해 그가 오시기 전에 보냄받은 사자로서(마 11:10, 말 3:1),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마 3:2, 4:17).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들이 죄인임을 기르고, 그들의 모든 죄상은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육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를 갈망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들에게 믿으라고 권고했다. 왜냐하면 그가 가까웠다고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 구원, 영생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도 요한이 이르러 죄사람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막 1:4, 눅 3:3)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죄짐에 눌리고 지친 사람들이 주께로 돌이켜서 죄사함과 구원에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인가?
그리스도 역시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심으로써 전도를 시작하셨다. 먼저 그는 보배로운 하나님의 긍휼이 자기 안에서 열려지기 시작했다고 선포하시고, 이어서 회개를 촉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전체의 대요를 요약하셨을 때, 그는 “그가 이런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4:26, 46-47). 그리고 그의 부활 후 사도들도 이렇게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회개케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를 살리셨느니라”(행 5:30-3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전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생각과 성향과 노력이 부패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듣게 된 때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데, 회개는 거듭남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욕망들도 죽고, 그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의 무덤 안에서 우리의 죄의 몸도 장사된다(롬 6:6). 죄사함을 전하는 때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구속함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생명이 되셨다(고전 1:30)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그들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 보시기에 무죄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된 때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회개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회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도록 이끌어 준다. 그리스도는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지고 주리고 목마르며 슬픔과 비참으로 죽어가는 가난하고 애통하는 죄인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다(사 61:1-3, 마 11:5, 28, 눅 4:18).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회개를 지향하여 분투하며, 그것에 몰두하고, 전 생애를 투입하여 추구해야 한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삶이란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肉)이 완전히 사멸할 때까지, 육을 죽이는 일에 계속 노력하고 연단하는 것이라고 더욱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에 대해 심히 불만족해 하도록 배운 사람은 크나큰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이 곤경에 푹 빠져서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죽음안에 접붙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달려가며 갈망함으로써, 회개에 관해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단순하여서 내게는 성경의 진리에 가장 잘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16. 이제 나는 스콜라학파의 궤변가들이 회개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를 논의 해야겠다. 나는 가능한 한 이것은 간략히 훑어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추적하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니며, 소책자 정도의 분량으로 하려는 이 작은책이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하려는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이 문제를 방대한 서적들 속에 끌어 넣었기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빠져들면 그 시궁창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정의한 것을 보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않은 고대 저작자들의 책들에서 케케묵은 상투어구를 따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회개한다는 것은 이전에 지은 죄들로 인해 슬피우는 것이요, 울어야 할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것은 과거의 악행에 대하여 통회하는 것이요, 통회해야 할 행위를 다시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또 그것은 자기가 범죄했다고 뉘우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응징하는 일종의 서글픈 보복이다. 또 그것은 자신이 저질렀거나 동의했던 악행에 대한 영혼의 쓰라림과 마음의 슬픔이다. 이러한 것들은 교부들이 말한 것일 것이라고 동의하기로 하자.(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부정하기란 어렵잖을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회개를 정의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구출받았던 바로 그 범죄에 다시금 빠져들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회개를 교묘하게 정의하여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그리고 행위릐 속죄로 구분한다. 그들이 일생을 삼단논법 연구에 바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해도, 이 분류는 논리적이지 않고 정의에 불과하다. 가령 그들의 정의로부터-변증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그런 증명인- 누구든지 자신의 입으로 고백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자신이 범죄했다고 스스로를 징벌할 수 있다는 등등을 누가 추론해 보라.
그들은 이 구분을 대체 어떻게 고수할 것인가? 왜냐하면 진정으로 참회는 해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고 하면, 고백없는 회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이 구분은 성례Dls 경우나 또는 회개의 완성에 관하여 이해되어지는 범위에서만 -이는 그들의 정의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고해성사에 적용된다고 대답한다면, 나를 나무랄 이유는 없고, 더 정확하고 명료하게 그것을 정의하지 않은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라. 나는 어떤문제에 관하여 논란이 있을 때, 우둔하게도 정의 자체로 돌아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나로서는 이것이 전 토론의 중심점이며 토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학자들의 특전이라고 여기라. 이제 그 여러 부분들을 차례대로 검토해 보자.
17. 나는 여기서 이것이 나귀의 그림자에 대한 논쟁(역자주-이솝우화:세를 받고 나귀를 빌려 준 주인이 나귀를 탄 사람을 따라 걸어가면서, 대낮의 뜨거운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그 나귀의 그림자 밑에 쉴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세 번 시비했다는 이야기)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가장 진지한 문제 즉 죄사함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에는 세 가지 -양심의 가책과 입의 고백 그리고 행위의 속죄- 가 있어야 한다고 하며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종교 전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고 하면, 그 첫째는 죄사함이 어떤 근거에서 어떤 규정으로써 어떤 조건에서, 또 어떤 용이한 점과 곤란한 점이 있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하고 정직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양심은 전혀 쉼을 누릴 수 없고,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어떤 신뢰나 확신을 얻을 수 없고, 마음 졸이고 동요하고 흔들리고 괴롭고 고민하고 떨고 미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피하려 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가 그 보다 더한 비참과 절망은 없다.
18. 그들은 동회를 용서를 얻는 첫 단계로 간주하고, 그 통회가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고, 즉 올바르고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통회가 합당한 방법으로 행해 졌는가를 언제 확인할 수 있는 지에 관하여는 정해두지 않고 있다. 여기서 실로 비참한 양심들은 죄에 대한 합당한 통회가 자신들에게 부과되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가책을 받고 괴로움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빚진 것을 갚았다는 것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갚아야 할 한도를 모른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 오고 만다. 누가 어느 때에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죄를 애통해 했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양심들이 오랫동안 자기 안에서 고투하고, 투쟁가운데 오랫동안 빈민했을 때에도, 여전히 안식할 수 있는 항구는 발견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을 진정시켜 보려고, 짐짓 슬픔을 만들어 억지로 눈물을 짜내어서 통회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그릇되게 비난한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통회의 교리에 의하여 절망에 빠지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꾸민 것이 아닌 진실한 슬픔을 보인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실제로 내놓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는 죄의 용서는 다른데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죄를 자각함으로써 괴로워하고 상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회개가 사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부언했다. 더불어서 그들이 우리에게 의무로써 행하라고 했던 영혼의 고뇌 같은 것들도 폐지해 버렸다.
죄인은 자신의 회한이나 눈물에 머무르지 않고, 두 눈을 하나님의 긍휼에만 고정시킨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셨다는(마 11:28) 것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단지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를 풀어 주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냄 받았기 때문이다(사 61:1, 눅 4:18, 異文융합).
그러므로 자신들의 의로움에 만족해서 자신들의 궁핍성을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의 진노를 잊고 자신의 악에 대한 구제책을 찾지도 않는 멸시자들의 두 부류는 제외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수고하지 않고 무거운 짐도 지지 않고 마음이 상하거나 눌리지도 않으며 포로도 아니며 애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의 용서는 올바르고 충분한 통회에 의해 받아진다고 하는 당신이 결토 이행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또는 당신이 죄인에게 그의 비참과 동요와 피곤과 사로잡힘을 인식함으로써 소생과 평온과 해방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어서, 요컨대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가르쳐서 하나님의 긍휼을 좇아 주리고 목말라 하도록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중대한 차이를 만든다.
19. 고해에 관해서는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 늘 심한 논쟁이 있었다. 후자는 고해가 하나님의 계율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전자는 그것이 교회의 제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논쟁을 보면 신학자들의 파렴치함이 역력히 드러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인용한 모든 성경 귀절들을 와전시키고 억지로 곡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총명하다고 인정받기를 바란 저들은, 고백은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서 유래되었고 후에 실정법에서 그 형태를 빌어 왔다고 구실을 댄다.
물론 엉터리 법학자들 중에서 가장 무능한 자들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는 귀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인용이라고 한다. 또 아담이 "당신이 내게 주신 그 여자가"(창 3:12) 등으로 마치 이의를 제기하듯 대답했으므로 예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그 형식은 민법에서 온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증거를 들어서 이 고해를 -유형이든 무형이든 간에-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하는지 보자.
주께서는 문둥병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고 그들은 말한다(마 8:4, 막 1:44, 눅 5:14, 17:14). 무엇이라고? 그라 그들을 고백하라고 보내셨는다가? 도대체 레위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 지명되었다고(신 17:8-9) 한 말을 누가 듣기라도 했는가? 그래서 그들은 비유라고 하면서 도피한다. 모세법에는 제사장들이 문둥병의 정도를 판별해야 한다는(레 14:2-3) 규정이 있다. 그런데 죄는 영적 문둥병이므로,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제사장들의 의무라는 것이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내킨 김에 묻는다. 이 귀절에 근거해서 그들이 영적 문둥병을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연적 신체의 문둥병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가? 마치 이러한 추론이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것 처럼 그들은 말한다. 즉 율법이 레위 제사장들에게 문둥병의 진단권을 맡겼으니 우리가 이것을 떠 맡자! 그리고 죄가 영적인 문둥병이니, 또한 죄에 대한 심판관도 되자! 라고.
이제 나는 대답한다. "제사직분이 변역한 즉 울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라고, 모든 제사직분은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으며, 그안에서 완성되었고 종결되었따. 그러므로 제사장직의 모든 권리와 명예는 오직 그에게로 옮겨졌다. 그들이 그렇게 비유하기를 좋아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유일한 제사장으로 하고, 모든 문제에 대한 무제한적인 관할권을 그의 재판석에 집중시키도록 하라.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허락할 것이다.
더우기 그들의 비유는 의식(儀式)들 가운데서 단지 민법만을 고려하므로 적당치 않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는 문둥병자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는가? 그것은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제몸을 바쳐서 속죄 받도록 명한 율법을 어겼다고 제사장들이 그에게 추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깨끗케된 문둥병자에게 율법이 명한 대로 행하라고 지시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그리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4)고 그는 말씀하셨다. 진실로, 이 기적은 그들을 위한 증명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한 때 그 사람들을 문둥병자들이라고 선고했었으나, 이제는 나았다고 그들에게 선언한다. 그들의 의지를 거스른다해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기적을 검사해 보라고 하신다. 그들은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회피하려 하므로, 이 사역은 그들에게 하나의 증거로써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귀절에서도 이와 같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 24:14)라고. 마찬가지로 "너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저희들에게 증거가 되게하려 하심이라"(마 10:18). 즉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때에 더욱 강력하게 죄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같은 근원에서, 즉 비유들이 어떤 교의를 확립하는데 매우 유익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비유에서 두 번째 이론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내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그럴듯하게 바로 그 비유들을 적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비유들이 가치있을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살아난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다고 말한다(요 11:44).
첫째로, 그들은 이것에 대해 거짓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을 거기 있던 유대인들에게 하셨고 하는 편이 훨씬 더 타당하다. 그의 기적이 속임수라는 의식을 주지 않도록 선명히 부각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손대지 않고 음성만으로도 죽은자를 살리신 그 권능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께서는 유대인들을 사악한 의심에서 구제해 주기 위하여 그들이 돌을 굴리고 악취를 맡고 학실한 죽음의 형적을 관찰하고서,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능으로 일어나는 나사로를 보고 다시 산 그를 처음으로 만져 보도록 하신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제자 들에게 하신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의 논적을 무엇을 주장할 것인가? 주께서 사도들에게 풀어 줄 능력을 주셨던가?
이 상징을 통하여 주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교훈하시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다시 살린 자들을 풀어주도록 할 것, 즉 그들로 하여금 그 분 자신이 잊어버리셨던 그 사람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말라는 것, 그분이 용서하셨던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분이 친히 묵과하셨던 것들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또 비난하지 말 것, 그분이 자비를 베푸시고 아껴 두시려고 하셨음에도 가혹하게 헐뜯어 징벌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면, 훨씬 더 적절하고 세련되게 이것을 비유로 취급할 수 있었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그들의 비유를 팔아 먹도록 하라.
20. 이제 그들이 명백한(그들 생각으로는) 증거들, 즉 요단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다(마 3:6)는 말씀과 야고보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약 5:16)고 우리에게 명한 말씀을 가지고 무장하여 싸움을 건다면, 더 숨막히는 전투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세례받기를 원했던 자들이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막 1:4)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로써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던 자들 외에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겠는가? 세례는 죄사함의 상징이다. 죄인들과 또 스스로 그러하다고 인정하는 자들 외에 누가 이 상징에 합당했겠는가?
야고보가 우리에게 "서로...고하라"(약 5:16)고 명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곧 이어지는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것 역시 조금도 그들을 지지해 주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즉 그는 "서로 죄를 고하여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약 5:16)고 말한다. 그는 상호 고백과 상호 기도를 합쳐서 말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제들에게만 고백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들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무엇이라고? 사제들만이 고백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야고보의 말을 결론지으면 어찌되는가?
그는 우리가 서로 고백하기를 바라면서도 서로의 고백을 "서로","상호간에","번갈아 가며" 혹은 더 좋다면 "상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따위의 쓸모없는 것들은 집어 치우자! 명백한 사도의 관점을 취하자. 즉 우리는 우리의 결점들을 서로의 흉증에 털어놓고 우리들 가운데서 서로 서로 조언하고 동정하고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들의 약점을 알고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스들은 우리가 그렇게 강력하게 하나님의 긍휼에 의거한 고백을 주장하는데고 불구하고, 우리를 반대하여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비참함을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긍휼을 고백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천사들 앞에서, 교회 앞에서, 요컨대 모든 사람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모든 입을 막고"(롬 3:19)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를 자랑치 못하게(참조, 롬 3:20, 고전 1:29)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셨기"(갈 3:22) 때문이다. 다만 그 분만이 참되시고(참조 롬 3:4) 높임받도록 하라.
21.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우리의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고해가 하나님의 법으로 제정된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데, 참 놀랍다. 물론 우리는 이 관례가 먼 옛날에도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지만, 그것이 전에는 자유로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의 기록까지도 이노센트 3세 이전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법률이나 법령도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역사서들과 다른 옛 저작자들을 살펴 보아도, 이것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법이 아니라, 주교들에 의해 제정된 조직상의 규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이 문제를 명백히 증거해 줄 이 많은 증거들 중에서 한 가지만을 제시하겠다.
소조멘(Sozomen-역자주:교회사가 중의 한 사람)은 주교들이 제정한 이 법이 서방교회들, 특히 로마 교회들에서 충실히 지켰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곧 그것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또 그는 사제들 중의 한 사람이 이 직임을 위해 특별히 지정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열쇠가 전체 사제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다고 이 자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철저하게 반박해 준다. 사실 그것은 모든 사제들에게 공통된 기능이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주교로 부터 선택된 사제 한 사람의 독점적인 기능이었다.
여기다가 소조멘은 첨언하기를, 이것은 또한 어떤 가정부가 고백하는 척하면서 어떤 보제(deacon)와 관계하고 있었던 것을 고해로 위장하여 숨겨왔음이 발각되었던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행해진 관습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죄악 때문에, 유명한 경건과 학식의 소유자인 그 교회의 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는 고해의식을 폐지해 버렸다.
자, 이 나귀같은 바보들이여, 귀를 바짝 들고 들으라! 비밀고해가 하나님의 법이라면, 어째서 넥타리우스가 감히 그것을 폐지하고 근절시켰는가?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모든 교부들의 동의로써 임직된 넥타리우스를 이단이나 분파라고 비난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교회를 비난할 것이다.
소조멘이 진술하기로는, 이 교회에서 고해의 관례는 일시적으로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실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교회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 모두들-그들이 진실을 말한다면- 모든 기독신자에게 부여된 신성불가침의 법을 경솔히 여겼다해서 의무불이행 죄로 고발할 것이다.
22. 그러나 문제 전체를 더 명백하고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종류의 고백을 배웠는가를 충실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고백에 관하여 그들이 꾸며낸 것들을 -사실 모든 것은 아니다. 누가 이 방대한 바다를 비워 낼 수 있었겠는가- 다만 적어도 그들이 말하는 고백의 대요를 포괄하고 있는 것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이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시 42:4, 41:5)라는 귀절을 가지고 고백은 마음을 기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경우 처럼, 그들이 그런 귀절들로써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을 만큼 모자라지 않는다면,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보통 "고백하다"를 "찬양하다"의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을 내가 여기서 상기시킬 필요가 없겠다. 단순한 사람들이 그와 같은 거짓된 외관에 속지 않도록 이 의미를 새겨두고, 조심스럽게 저들이 말하는 의미를 구분하도록 하라.
23. 죄의 고백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죄를 사해 주시고 기억지 않으시며 씻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우리는 용서를 얻기 위해 그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자. 그는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내보이자. 그가 해와 손상을 입으셨으므로, 그에게서 평강을 찾자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고 모든 생각을 통찰하시므로(참조. 히 4:12),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자. 결국 그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분이시므로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다윗이 “내가 이르시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31:5)라고 말했다. 다윗이 직접 한 것 중에 비슷한 성격의 고백이 또 있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 51:1, 50:3). 다니엘이 한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단 9:5). 그리고 또 다른 고백들이 성경에 자주 나온다.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뱍하면, 주는 미쁘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고백해야 하는가? 단연코 그 분께 한다. 즉 우리가 고통스럽고 경비한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리면, 그 앞에서 전심으로 자책하고 뉘우치면, 우리는 그의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용서받는다. 이 고백을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라도 고백하기 위하여 말을 준비하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더욱이 그는 자기 마음의 비밀을 어떤 사람에게 한 번 귀속말로 속삭이고 마는 것이 아니고, 종종 공개적으로 온 세상이 듣도록 진심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주님의 위대함을 아울러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윗이 나단에게서 책망받았을 때, 그는 양심에 찔림을 받고, 하나님과 사람 모두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했다. 그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노라”(삼하 12:13)고 말했다. 즉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만민에게서 죄인으로 심판받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숨기려 했던 것이 사람들에게까지 드러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성경은 두 가지 형태의 사적인 고백을 인정한다. 그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으로, 우리가 서로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약 5:16)한 야고보의 말과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약점을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 조언과 위로로써 돕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 형태는 우리 이웃을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것으로, 누군가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손상당했다면, 그를 달래고 우리와 화해 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형태에 관하여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왜냐하면 우리의 과실 때문에 깨어진 사랑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구함으로써 회복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밖의 다른 방법이나 형태의 고백은 전혀 말한 바 없다.
24. 우리의 논적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모든 “남녀”가 분별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면, 즉시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담당 사제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죄를 고백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고하게 품지 않으며 자신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포고한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의도를 실행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가는 입구는 이제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윽고 그들은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매면...”(마 18:18)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유효하므로, 사제가 죄인을 매거나 푸는 열쇠의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권한에 대하여 그들 자체 내에서도 격렬하게 싸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열쇠 -즉 매고 푸는 권한-가 있을 뿐이고, 지식은 실로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지만, 단지 부속물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권한에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반증이라고 보았으므로, 두 가지 열쇠 즉 분별과 능력을 제기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억제에 의해 사제들의 부패가 제지되는 것을 보았으므로, 다른 열쇠들 즉 분별하는 권위(결정내릴 때 쓰는)와 그들의 선고를 집행하는데 행사하는 권능을 꾸며내었으며, 지식을 상담역으로 부가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매고 푸는 것을 죄를 사하거나 도말해 버리는 것으로 감히 해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아, 나 곧 나는 데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고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하기를, 누가 매이고 풀릴 것인가를 선언하는 것, 누구의 죄가 사해졌고 또 그대로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나아가서 사제가 고백을 통하여 죄를 용서 하거나 그대로 둘 경우에나 또는 판결을 내려 출교시키거나 다시 성례전에 참가하도록 받아들일 경우에 이것을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임무라고 한다.
결국 그들은 아직 이 난문제를 제거하지 못하였다는 것, 반면 항상 자기들이 반격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 하찮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제들에 의해 매이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므로 하늘에서는 자기들이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도피책으로써, 열쇠의 위임에는 이 한가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적에 따라서 사제들이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결은 그의 재판석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고 한다. 이제 그들은 이 열쇠들을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제들에게 주셨고, 승진의 때에 주교들이 그들에게 수여하지만, 이것들의 사용재량권은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만 속한다고 하며, 열쇠들은 파문되었거나 정직(停職)된 성직자에게도 실제로 남아있지만 녹슬어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장간에서 열쇠들을 만들어 내어 교회의 보고가 이 열쇠들로써 잠겨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꽤 조심성 있고 근실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사도들, 베드로, 바울, 순교자들의 공적을 “교회의 보고”라고 칭한다. 이 보고에 대한 최고관리권은 바로 이 위대한 특혜들의 분배를 통괄하는 로마 주교에게 위임되었으므로, 그는 자의로 그것들을 배분할 수도 있고 분배의 최고관리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할 수도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교황으로부터는 완전 사면권을, 때로는 수 년간의 사면권을 받게 되며, 추기경들로부터는 백 일간의 사면권을, 그리고 주교들로부터는 40일간의 사면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25. 나는 각 문제점마다 몇 마디로 답변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법으로써 신자들의 영혼을 맬 수 있다는 권리가 무엇이며, 또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절한 곳에서 다룰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죄를 열거해야 한다는 법을 정해 둔 것, 고백하려는 의도를 확고하게 품은 경우 외에는 죄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고해의식을 경시한다면 낙원에 이를 가망은 없다고 지껄이는 것에는 정녕 참을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황당무계하다.
모든 죄를 다 열거해야 하는가/ 내가 믿기로는 스스로 지의 고백에 간해 올바르게 숙고했던 다윗이 “오 주여!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부르짖었다. 또 다른 곳에서도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 참조. 시 37:5)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죄의 수렁이 얼마나 깊으며, 죄의 양상들이 어떠하며, 이 기물 구두사(九頭蛇)가 얼마나 많은 대가리를 갖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긴 꼬리를 질질 끌고 있는가를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죄악의 목록을 작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악행의 심연에서부터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내가 눌렸으며, 묻혔으며, 숨이 막혔도다 지옥 문이 나를 둘러싸고 있도다”(시 18:6, 참조. 시17:6). 나는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시 69:2-3, 15-16), 연약하여 죽어가는 나를 당신의 손으로 끌어내어 주소서라고. 다윗이 자신의 죄를 헤아리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는데, 하물며 어느 누가 자기 죄를 열거해 볼 생각을 하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깨달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 도살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찢겨진다. 우선 그들은 죄를 상세히 설명하기로 자청하고, 그들의 형식에 따라서 죄를 큰 가지, 작은 가지, 갈대 가지 및 잎들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질과 양과 상황을 저울질했으며, 따라서 문제는 약간 진척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앞으로 진전했을 때는 사방에는 하늘과 바다 뿐이었고 아무런 항구도 정박지도 없었다. 그들이 건너가면 갈수록 그들의 눈 앞에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덩어리는 더욱 커져서 실로 높은 산들처럼 부풀어 올랐고, 오래 돌아 다녀 보아도 어떤 도피의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먹이와 칼 사이에 꽂혀졌다. 결국에는 절망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거기서 이 잔인한 도살자들은 그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떤 요법을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 힘 닿는대로 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걱정이 기어들었다. 참으로 새로운 고뇌가곤경에 빠진 영혼을 옭아낸다. “나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나는 그것에 자신을 충분히 헌신하지 않았다.”“나는 많은 것들을 무관심으로 소홀히 했으며, 나의 부주의로 인한 망각은 변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덜기 위하여 다른 요법들이 시행되었다. 당신의 태만을 참회하시오. 아주 부주의한 것이 아니라면 용서받을 것이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상처를 싸매 줄 수 없으며, 병에 대한 진정제라기 보다는 달콤한 것으로 위장한 독약이어서 처음 맛보아서는 쓴 맛을 알 수 없고 그 맛을 느끼기 전에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의 소리는 항상 귓전을 울려 괴롭힌다. “너의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이 두려움은 확실한 위로가 아니면 진정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그러한 치명적인 독약과 잘 배합된 아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을 달랜다해도,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아첨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거나 아니면 진실로 자신들을 만족시킨다는 것까지도 믿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결과는 깊은 바다 위에서 닻을 내려 항해를 멈추고 잠깐 쉬는 것과 같은 것, 또는 탈진해서 늘어져 있는 나그네의 노변 휴식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직접 이것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법인가를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로 그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파괴하고 비난하고 혼돈시키고 파멸과 절망에 빠뜨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죄인들에게 자기 죄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위선자로 만들고 하나님과 자신들에 대해 무지하게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죄를 열거하는데 몰두해 있는 동안, 그 반면에 특별히 그들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저 숨겨진 죄악의 늪, 즉 그들의 은밀한 범죄와 내면의 불결을 잊어버린다.
26. 고백을 시작하는 가장 확실한 규범은 우리의 악의 수렁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리의 고백이 이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얼마나 지독하고 기가 막힌 죄인입니까. 나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나의 죄가 얼마나 막중한지 내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도 없으며, 내입으로 다 털어 놓을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심원한 긍휼이 이 끝없는 내 죄를 삼키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죄를 일일이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고백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이 두 마디로 구성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전심을 쏟아 놓을 수 있는 만큼 힘을 다해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뿐 아니라, 참으로 진정으로 그렇다는 것을 자인해야 한고, 우리의 죄의 얼룩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양한가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하며, 우리는 불결할 뿐 아니라 그 불결이 어떠하며 얼마나 크고 각양각색인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는 빚진 자들일 뿐 아니라 얼마나 막대한 빚을 짊어졌으며 얼마나 많은 빚에 묶여있는가를 인지해야 하고, 단지 상처 받았을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치명적인 타격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이렇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쏟아 놓을 때에라도, 더욱 더 많은 죄들이 남아있으며 죄악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이 깊다는 것을 그가 진지하고 정직하게 숙고하도록 하라. 결국 그는 다위과 같이 부르짖게 될 것이다. “오 주여!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죄는 고백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고하게 품은 때에만 용서받으며, 고백하도록 주어진 기회를 등한히 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이 닫힌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결코 찬성하지 말자. 죄의 용서는 이전에 있었던 것보다 지금 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언제 읽더라도, 그들이 사제 같은 사람의 귀에 고백했다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러면 분명히 사제 같은 고해신부도 없고 고백 자체도 없었던 데서는 고백도 있을 수 없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이 고백이 있었다는 말이 없었는데도, 그 동안의 모든 죄는 이러한 조건 없이도 사면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치 않은 문젱 대해 쓸데없이 길게 논쟁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하며 영원불멸하다. “죄인이 자기 죄를 슬퍼할 때에는 언제나 그 모든 불의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겔 18:21-22). 이 말씀에 감히 무엇이라도 덧붙이려는 자는 죄가 아닌 하나님의 긍흉을 억제하는 것이다.
27. 그러면 교회에 대해 그렇게도 유해하고 또 각양으로 해를 끼치는 이 비밀고해를 우리가 정죄하고 우리 가운데서 추방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 자체는 관련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무익하고 헛되고 게다가 그렇게 많은 불경과 신성모독과 과오를 유발한 것인 만큼, 누가 그것을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아주 이득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 정말 어떤 효용이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들은 거짓되고 전혀 무가치하다.
그러나 특권에 의해 그들은 이것들 중 하나만을 존중한다. 즉 고해자의 수치감 자체가 무거운 징벌이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은 이후로 더욱 조심성 있게 됨과 아울러 스스로를 응징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비켜가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심사받도록 저 지극히 높은 심판정으로 부를 때에도, 그 사람을 충분히 겸비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수치감으로 인해 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을 우리의 악한 양심의 증인으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굉장한 이득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자체는 완전히 거짓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제에게 고해하고 난 뒤, 스스로 자신의 입을 닦을 수 있고,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노라”(잠 30:20)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대담하고 제멋대로 죄짓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년 내내 죄짓는데 대담해져 있을 뿐 아니라, 일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고해했으므로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지도 않고, 자기 반성 따위는 생각조차 않으며, 도리어 그들이 상상하듯이 한꺼번에 모든 죄를 토해낼 때까지 죄 위에 죄를 쌓는다. 더군다나 그들이 죄를 토해낼 때, 자신들의 짐이 벗어진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옮겨서 사제에게 그것을 넘겨버렸다고 생각하여, 사제에게 그들의 모든 것을 고하면서 하나님은 그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누가 고해의 날을 즐거이 기대하는가? 누가 열렬한 마음으로 고해하려고 서두르는가, 오히려 억지로 감옥에 끌려가듯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마지 못해서 거기 오지 않는가? 예외적으로 아마 젊은 사제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듯이 자신들의 악행의 일화들을 교환하는 것을 낙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비밀고해에 들끓는 가공스러운 추행들을 언급하기 위해 많은 종이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 다만 저 거룩한 사람이 하나의 소문이나 간음 때문에 그의 교회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고해를 제거해 버린 것이 경솔한 짓이 아니었다면, 지금 무수한 능욕과 간음과 근친상간과 뚜장이들이 있는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경고 받게 된다는 것만을 나는 말해 둔다.
28. 이제 우리는 고해자들이 그들의 왕궁의 모든 배를 -옛 속담과 같이 “뱃 머리와 배꼬리”인- 정박시켜 놓은 열쇠의 권한에 대해 알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는 아무 이유없이 주어졌는가? 라고 그들은 묻는다. 또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라한 말씀은 근거없는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만드는가? 라고 묻는다. 나는 이에 대해 열쇠가 주어졌던 것은 중대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주께서 입증하신 것에는 그가 친히 땅에서 매고 푼 것은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릴 것이라는 두 구절이 있다. 이 돼지들은 이 구절들을 무미건조하고 무식하게(그들이 보통 모든 것을 하는 방식인) 약간 다른 의미로 혼돈하였다. 하나는 요한복음에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복음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실 즈음에 그들에 숨을 내쉬시고(요 20:22),“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고 말씀하셨다. 전에는 베드로에게 주어지리라고 약속된(마 16:19) 천국의 열쇠가 지금은 그와 함께 있는 다른 사도들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지금 그가 나머지 사도들과 동등하게 받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네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그는 들었다. 주께서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나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들을 열어주고, 반면 이 길에서 빗나간 사람들에게는 문들을 막고 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이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 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이고, 푸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죄사함 받음으로써 양심은 가장 참혹한 속박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한편, 죄를 그대로 둠으로써 양심은 가장 단단한 굴레로 결박당하고 조여드는 것이다.
29. 나는 이것에 대해 난해하지 않고 억지로 꾸며대지 않고 왜곡하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물흐르듯 알기 쉽게 해석하고자 한다. 죄를 사해주거나 그대로 두는 것에 관한 이명령과 매고 푸는 것에 관한 이 명령과 매고 푸는것에 관해 베드로에게 주어진 저 액속은 오직 말씀의 사역에만 관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신의 사역을 사도들에게 위탁 하셨을 때, 그와 동시에 그는 또한 그들에게 매거나 푸는 직임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노예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참조, 롬 3:24), 그러나 그리스도를 자신의 해방자와 구속자로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받고 영원한 결박에 얽매인다는 것(참조, 유 6)이 복음의 총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께서는 이 사명이 모든 족속에게 전해지도록 하기 위하여(참조, 마 28:19), 즉 이것이 그 자신의 것이며 그로부터 왔고 그가 명하신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들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을 때, 그는 이 고귀한 천명으로써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 그리고 그는 사도들과 또한 이 사명에 접하여 들은 사람들 모두에게 특별한 위로가 되게끔 이렇게 하셨다. 사도들로서는 자신들의 전파를 위하여 견실하고 완전한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전파하는 중에 그들은 끈임없는 수고와 염려와 고난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들의 피로써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확신을 허식적이거나 공허하지 않았고 오히려 능력과 힘으로 충만했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들로서는 그러한 근심과 방해와 위험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또 온 세상이 그들을 대적하고 공격해도 하나님께서 그들 곁에 서 계심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가진 교훈의 창시자인 그리스도가 바로 지금 그들은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그가 하늘에서 그 진리를 굳게 하심을 아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복음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땅에서 생겨난 음성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그들의 청중들에게 확실하게 증거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것들 - 죄의 용서, 영생의 약속, 구원의 복음-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전파에서 사도들이 사역 외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의 도구인 그들의 입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이는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그는 그들이 직접 전파한 죄사함은 하나님의 참된 약속이었으며, 그들이 선포한 저주는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더욱이 이 선언은 모든 시대에 다 주어졌으며, 사람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전파하든지간에 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최고심판석에서 공포되었고, 생명책에 쓰여졌으며, 하늘에서 인준받고 확정되고 견고히 되었음을 모든 사람들이 더욱 확신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견실하게 존속되고 있다. 우리는 열쇠의 권한이 단지 복음전파이며, 사람들과 관계시킬때는 그것을 권한이라기 보다는 사역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한을 실제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으로 사람들을 사역자로 만드신 것이었다.
30. 우리가 말한 또 하나의 구절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형제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7 - 18)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두 구절을 서로 다르게 여겨서, 이들 사이에 있는 관련성과 유사성까지 놓쳐서는 안된다.
첫째로 양자는 각각 객관적인 진술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둘에는 항상 똑같이 매고 푸는 권한과(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똑 같이 매고 푸는 명령과 약속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이 점에서 다르다. 전자는 특히 말씀의 사역자들이 행하는 전파와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교회에 위탁한 파문징계에 적용된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파문하는 사람을 맨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의 생활과 도덕성은 나무라고, 또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죄받을 것이라고 미리 그에게 경고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를 영원한 파멸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아니다. 성찬에 참여시킴으로써 교회는 그를 풀어 주게 된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연합을 그에게 공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아무도 교회의 판결을 완고하게 업신여겨서는 안되며, 그가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 처벌받은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는 안되며, 신자들에 의한 그러한 판단은 단지 그에 대한 처벌 선언인 뿐이며, 신자들이 땅에서 하는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인준된다는 사실을 천명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빗나간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회개한 사람을 은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는 말씀을 가지고 있고, 회개한 사람을 은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는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확실하거나 세상적인 견해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신성한 말씀인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만 판단하므로, 하나님의 판단과 틀리거나 다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교회를 체발하고 면도하고 린네르 옷 입은 극소수 사람들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모인(참조 마 18:20)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칭하셨다. 온 세상에 퍼고 흩어져 있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시비가 생길 수 있었겠는가? 라고 하면서 논쟁하는 저 비웃는 자들은 이를 듣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교회들이 독립된 장소와 지역에서도 설립될 수 있다고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회중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바를 이미 충분히 보여 주셨다. 그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다.
31. 내가 간결하고 친근하며 올바르게 해석했다고 생각하는 이 두 구절을 근거로 하여, 이 미친 사람들은(그들 자신의 경솔함 때문에 넋이 빠진 것 같다) 무분별하게 이제 고해와 파문과 심판과 법 제정의 권리와 그리고 사면을 설정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모든 요구의 구실을 단칼에 잘라 버린다면, 즉 그들이 젊은 사제들은 사도들의 대리자도 계승자도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데서 다룰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을 강화하려는 것이 지나쳐서 포위공격용특수장치를 건립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만든 모든 고안품들을 넘어뜨리고 만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전에는 그들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열쇠의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령이 먼저 임하셔서 그를 가르치시고 그가 해야 할 바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 없어도 누구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부인한다. 그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지껄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부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성령이 무익하고 하찮은 어떤 것 이라고 상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로 이러한 술책에 의해 그들은 완전히 전복된다.
그래서 그들이 열쇠로 열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문이 어떤 문이든 간에, 그들이 열쇠의 심판관이요 관리자인 성령을 가졌는가를 그들에게 꼭 물어 보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성령을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그 다음에는 성령이 실수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들에게 물어 보야야 한다. 그들이 가르칠 때 간접적으로 암시할 수는 있어도, 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하지 않고 단지 반복적으로 주께서 매라고 하신 것은 풀고 풀라고 명하신 것은 매는 사제들은 아무런 열쇠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결론지어야 한다.
그들이 자격있는 사람이나 자격없는 사람을 분간하지 않고 풀어 주거나 매는 죄를 범했음은 아주 명백한 증거들을 통해 직접 보면서도, 그들은 지식도 없이 권한을 횡령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권한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히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권한 자체가 사악한 행사자에게도 부여되었다고 쓴다. 그러나 권한이란“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리리라”(마 16:19, 18:18)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말이든지, 아니면 이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이 올바르게 매거나 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이 매거나 풀리는 당사자의 공적에 따라 제한된다고 말함으로써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역시 풀리거나 매일 자격이 있는 자들만이 풀리거나 매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의 사자들과 교회는 이 자격을 측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 이 말씀으로 복음의 사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을 약속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그들에 대해 멸망을 선언할 수 있다. 이 말씀으로 교회는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도적이나 살인자나 탐색하는 자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가장 확실한 끈으로 이런 자들을 묶는다. 그리고 같은 말씀으로 교회는 회개하는 자들을 풀어 주고 위로한다. 그러나 무엇을 매고 풀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게다가 모르면 매거나 풀 수 없다면 이것은 어떤 권한이겠는가! 그러면 왜 그들은 그들의 사죄가 불확실한데도,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로써 용서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이 쓸모없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 가상적인 권한은 무엇인가?
이제 나는 이 한 귀절로써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혹은 너무 불확실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제들이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며, 권한은 합법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한 이상, 나를 풀어 준 그가 열쇠를 잘 사용하는 자라는 것을 누가 나에게 확신시켜 줄 것인가? 만약 그가 악하다면, 그는 이 허망한 사면 외에 다른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열쇠의 정확한 사용법을 몰라서 그대에게 무엇을 매야 할지 풀어야 할지 모르겠오, 그러나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면 용서해 주겠오.” 나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참지 못할 것이므로, “평신도”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회교도나 마귀도 꼭 그만큼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 즉 푸는 것에 관한 확실한 규준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당신의 공로가 훌륭하다면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권위는 내게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열쇠를 분별하는 권위와 실행하는 능력으로 정의 할 때, 즉 선한 용도를 위해 지식을 상담자로서 또 상담자처럼 덧붙일 때, 그들이 목적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없이 기운 좋게 제멋대로 판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그들이 자기들의 열쇠를 그렇게 많은 자물쇠와 문들에 끼워맞추는가를, 즉 때로는 그들 자신의 재판권에 때로는 고해에 또 때로는 조직과 의식에 합당하도록 맞추었는가를 몇 마디로 진술하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거나 유보하는 것에 관하여 명하실 때, 그는 입법자와 고해 사무관과 관리들을 임명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의 사역자들로 삼으신 자들을 진귀한 선언으로써 돋보이게 하고 계신다.
마태복음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매고 푸는 직임을 인수하실 때, 그는 어떤 임명받은 성직자나 두 뿔 달린 사람이 그 권위로써 풀어 주지 않기로 한 불쌍한 사람들을 심벌즈 부딪히는 소리와 양초 심지를 자르는 것으로 배제하고 파멸시키는 것과 또 온갖 위협으로 저주하는 것은 명하시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나쁜 사람들의 사악함을 파문의 징계로써 정정시키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말씀의 권위와 교회의 사역에 의해서 완수 되어야 하는 것이다
32. 그러나 교회의 열쇠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적을 분배하는 것이라고 공상하고, 교황이 그의 교서와 면죄부를 통해 이것을 분배한다고 하는 저 미치광이들과는 더불어 논쟁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병자용 약으로 치료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그들의 면죄부를 논박하는 데에 크게 애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파성추의 맹공으로 현재 그것은 점차 노화되어 부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면죄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그토록 완전히 제멋대로 인채로 그토록 지속적으로 혐의를 받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 세기 동안 깉은 오류의 흑암에 빠져 있었던가를 충분히 증거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의 교서 시행자들에 의해 공공연하고 거침없이 계속 조롱받아 왔으며, 자기들의 영혼 구원은 이윤좋은 매매의 대상이며, 구원의 가격은 몇 푼 동전으로 계산되었고 거저 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런 속임수 때문에 자기들이 낸 헌물에 스스로 속았음을 알았다. 그 현금은 매음부들과 포주들에게 그리고 주색잡기에 불결하게 탕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면죄부를 가장 잘 선전하는 자가 그들을 아주 업신여기며, 이 괴물은 부단히 더욱 방탕 스럽고 음탕하게 굴고 끝도 없으며, 새 납덩이를 쉬임 없이 내다 놓고 새로이 금전을 걷어간 것도 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최상의 존경심을 가지고 면죄부를 받아들였고, 그것들을 숭배했고 또 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분별력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을 경건한 사기로 생각하여 약간의 은전을 써서 속아 넘어갔다.마침내 세상이 조금 현명해지려고 하자. 면죄부는 냉랭해지고 점차 얼어붙어서 결국에는 죄다 소멸된 것이다.
33.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면죄부 판매자들이 지금까지 우리를 조롱하고 기만해 온 비열한 계교와 사기와 절도와 탐욕은 보면서도, 바로 그 불경의 원천 자체는 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면죄부의 성격 뿐 아니라, 모든 오점을 제거한 후에도 일반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지적해 두어야 한다. 이제 올바르게 표현하자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사탄의 비웃음과 같은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부터 끌어내어 구원의 참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말라서 없어진 것으로 여기고, 부족 된 만큼 다른 방식으로 보충되고 채워지지 않으면 죄사함과 화해와 속죄를 이루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 어떻게 더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율법과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그를 통하여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행 10:43)고 말하고 있다.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하여 죄사함을 준다고 한다. 요한은“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한다. 반면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깨끗케 한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즉 죄의 만족)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 21)고 말한다.
반면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에 속죄를 맡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으셨다고 천명했다(고후1:13).반면 면죄부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단언한다. 또 다른 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 28)고 말한다. 반면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또 다른 댓가를 치루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될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 14)고 사도는 말한다. 반면 면죄부는 “성화는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모든 성도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 14)고 말한다. 반면 면죄부는 그들이 성도들의 피에 그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틀림없이 그들의 모든 교리는 엄청난 신성모독에서 연유한 임시미봉책인데,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신성모독인 것이다.
34. 다음의 것들이 그들의 판단인가 아닌가를 그들이 알아보도록 하라: 즉 순교자들은 순교로써 그들에게 요청된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바쳐서 공적을 올렸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아주 넉넉히 공적을 가지고 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위대한 미덕이 남아돌아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고 그 두 피로부터 비롯된 교회의 보고는 죄사함과 속죄를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 24)고 하는 바울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 남겨두고, 무리들 가운데 있어서 거의 분간할 수도 없는 다른 보통 성인으로 그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직 그 분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 분만이 드러나고 지명되어야 하고, 죄사함이나 죄의 보상, 사죄를 얻고자 하는 문제가 있을 때는 그 분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끝을 잘라 줄이는 그들의 논법을 들어 보자.
순교자들의 피가 보람없이 쏟아져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이 교회의 공동 이익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들의 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그들의 현세에 대한 멸시로써 보다 나은 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들의 절개로써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완고함을 꺾으면서 동시에 교회의 신앙을 굳건하게 한 것이 그들에게 무익했던가?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만이 화해조정자이시고,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 분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드려졌다고 한다면, 사실 그들은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고(골 1:24) 말한 그 귀절을 그들은 얼마나 나쁘게 곡해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그 부족이나 보충을 구속이나 속죄의 사역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들 즉 신자들이 이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번에 친히 받으신 것을 매일 그의 지체들 가운데서 받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생각하실 만큼 우리에게 영예를 주신다. 바울이 “교회를 위하여”라고 덧붙였을 때도, 이는 교회의 구속과 화해 혹은 속죄를 뜻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설립과 진보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가 다른 데서도 말하듯이, 그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딤후 2: 10).
바울이 의와 구원과 생명의 완전한 충만과 관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했다거나, 아니면 그가 무엇을 보태려고 했다는 사고방식은 집어 치워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명백하고 당당하게, 은혜의 부요함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무도 풍성하게 쏟아 부어져서 모든 죄의 세력을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참조 롬 5:15).
베드로가 웅변적으로 증언하듯이, 모든 성도들은 자기의 삶이나 죽음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것에 의해서만 구원받았다(참조. 행 15:11).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 이외에 어떤 성도의 공적에 의존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괴한 오류를 폭로함으로써 그들을 패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호한 무엇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여기서 더 오래 지체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면-그런 추행들을 관대히 봐 준다고 하더라도 - 하나님께서 복음의 말씀에 의해 분배되어지도록 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납과 양피지 안에 봉해 넣도록 누가 교활하게 가르쳤는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음이나 아니면 면죄부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천상의 가장 풍성한 은총과 자기의 모든 공로와 모든 의와 지혜와 은혜를 복음을 통하여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그들은 면죄부 중에서 얼마만큼을 교황의 창고에서 꺼내어 납과 양피지와 그리고 어떤 장소에 결부시키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단절시킨다!
35. 그들은 고백에서 보속교리를 세 번째에 둔다. 우리는 이것에 관계된 그들의 쓸데없는 공론을 단 한마디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참회자가 과거의 죄악들을 끊어버리고 보다 선한 생활을 위해 자기 행위를 고치는 것으로는 그에게 충분치 않으므로, 그는 자기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눈물, 금식기도, 자선 그리고 여타의 박애 행위와 같이 우리의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구제법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로ㅆ 우리는 주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써 우리는 범죄에 대한 보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대한 자비로 죄를 용서하셨으나, 심판의 징계로써 징벌을 보류하고 계신다고 한다. 보속에 의해 속량되어야 하는 것이 이 징벌이라는 것이다.
36. 이러한 거짓말에 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어지는 죄사함을 대조시켜 놓는데, 성경만큼 더 명로하게 제시하는 것은 없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첫째로, 용서는 순전한 관용에서 주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돈을 받고서 영수증을 써 주는 채권자를 용서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돈을 받지 않고도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빚을 말소시켜 주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보속에 관한 모든 생각을 말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값없이”란 말을 덧붙이는가? 그러면 그들은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강력한 노호에 의해서 쓰러져 버린 보속교리를 여태까지 고수하는가? 더욱이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행 10:43)- 그 밖의 모든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죄사함이 보속의 이름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가? 그리고 어떻게 보속이 관계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보속의 이름을 통하여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아무것도 우리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위임에만 의존한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라고 바울이 선언한 그러하다.
나는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까봐(그들은 심피 해악하므로)우려된다. 즉 죄사함과 화해는 우리가 세례 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 때 단 한 번 이루어지는 것이며, 세례 후에는 보속을 통하여 재기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의 열쇠들에 의해 나누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러나 요한의 말은 훨씬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 2:1-2). 또 그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는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죄의 대속물로서 제시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 화해시킬 수 있는 다른 보속 - 범죄했으며 -은 없다고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번만 당신과 화해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 스스로 다른 화해의 수단을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재하시면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성부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영원한 변호자로, 또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제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참조 1:36)라는 세례 요한의 말은 정녕 진리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고 말한다. 즉 그 분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고, 그분만이 죄를 위한 제물이며, 유일한 화목제물이며 유일한 보속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명예가 온전하게 지켜져야 하고 손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한 양심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성부께서 우리 모두의 죄과를 성자에게 담당시키시고(사 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고(사 53:6,7)말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다른 말로 반복하기를,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다(벧전 2:24). 바울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있는 육신이 되어 죄의 저주를 받으셨다고(갈 3:13, 롬 8:3의 융합)쓰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시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짐을-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의 벌을 - 지웠을 때에, 그의 육신에서 죄의 세력과 저주는 도말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또 바울이 구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언급할 때는 항상 습관적으로 ‘아포루트로신’(απολυτρωσιν) 즉 구속이라고 불렀다(롬 3 : 24,또 고전 1: 30, 엡 1:7,골 1:14을 보라). 이것이 그가 다른데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 2:6)라고 논증한 이유이다.
이제 시행되고 있는 죄사함을 입증해 보자 - 이미 언급된 이러한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소유로 고스란히 남게 될 것인가? 우리의 죄과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속량하기 위하여 죄과들이 그에게 맡겨졌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써 이것들을 속량했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만약 그것이 양심을 평온케 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면, 죄가 보속으로써 속해졌다고 할 때 이 평온함은 무엇이 될 것인가? 사람이 보속의 표준에 대해 충분히 확실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그 때까지 그는 자신이 자비로운 하나님을 소유했는지의 여부를 항상 의심할 것이고, 항상 괴로워할 것이며 또 흔들릴 것이다. 헛된 보속교리에 연연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업신여기고, 우리가 다른 데서 밝혔듯이 막중한 죄짐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자들이다. 또 그들이 적당한 보속으로써 다소간 죄를 속량한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백 사람의 목숨이 전적으로 보속을 위해 바쳐져도 다 씻을 수 없는 그 많은 죄악들에 그들이 압도당했을 때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37. 여기서 그들은 어떤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어떤 죄는 죽을죄라는 어리석은 구분을 하여 도피해 버린다. 죽을죄에는 중한 보속이 필요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더 쉬운 구제책들로써 - 주기도와 성수뿌림과 미사에서 받는 사면에 의하여 - 일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 그들이 끊임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죽을죄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마음속의 불경과 불결을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어림잡아 놓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이것과 저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의와 불의에 대한 기준인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선포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 그러나 신자들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잇는 것은, 죄가 사망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 나리아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롬8:1) 때문이며, 죄가 전가되지 않고 용서받아 씻겨 지기 때문이다(참조.시32:1-2).
38. 나는 그들이 우리의 이 교리를 죄의 동등성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파라독스로 간주하여 얼마나 부당하게 중상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입으로 쉽게 논박 받을 것이다. 그들이 죽을죄라고 하는 죄 중에서 다른 것 보다 가벼운 것이 있는지 내가 물어보겠다. 그렇지만 죽을죄는 동시에 같은 것이라고 즉각 결론지을 수는 없다.
성경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율법에 대한 순종은 생명의 길이며(참조, 레18:5, 겔18:9, 20:11-13, 갈 3:12, 롬10:5, 눅 10:28), 율법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참조. 롬6:23, 겔18:4,20) 정확하게 언급하므로, 그들은 이 판정을 회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거대한 죄 무더기 속에 있으면서 그들은 보속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만약 한 가지 죄를 보속하는데 하루가 걸린다면, 그들이 이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7배로 죄를 짓는다(나는 아주 공정하게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7번의 보속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그들은 49가지의 죄를 쌓는 셈이다(참조.24:16). 이제 자기들의 죄를 보속할 수 있다는 확신이 꺽였는데도, 왜 그들은 늑장부리는가? 어떻게 여태까지 감히 보속하겠다고 생각하는가?
실로 그들은 자신들을 구출해 내려고 하지만, 속담에 있는 대로 “물이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벌과 죄책을 구분한다. 비록 그들이 우리는 눈물과 기도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다고 가르칠지라도 죄책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면제된다고 실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죄가 면죄된 후에도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벌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속은 순전히 형벌의 면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 사함에 관하여 성경에서 배운 모든 내용은 이 구분과 정반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새 언약이다.(렘31:31, 34).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미하셨던 것을 우리는 다른 선지서에서 배운다. 거기서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그 행한 의로운 일을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9겔 18:24),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면, 그 범죄 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9겔18:21-22, 참조 27절).
그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기억 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사실상 이것, 즉 그들에게 상 주기 위해서 그것들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의 죄악을 기억 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꼭 같은 것이 다른 데도 있다.“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참조. 시32:1-2). 만약 우리가 주의 깇에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면, 성경은 그러한 표현들로써 분명하게 그의 취지를 우리에게 설명하셨을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면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계산하시며, 벌을 주신다면 죄를 기억하시고, 재판에 붙이신다면 죄를 덮어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주께서 어떤 율법에 의거해서 죄를 용서하시는지 다른 선지서로부터 들어보자. 그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고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주석들에 주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를 간청한다.
나는 만일 죄에 대한 벌이 여전히 요구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묻겠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모두 자기 몸에 지셨다고(벧전2:24)말할 때, 우리는 단지 그가 우리 죄에 해당하는 징벌과 보응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지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말하기를, “그가 징계를 믿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53:5) 라고 했다. 이”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라는 것은 만약 그가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반드시 받았어야 하는 죄에 대한 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당신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컨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충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나를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8:1)고 단호히 선언함으로써 이 약속을 확증한다.
39. 그들은 내가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징벌과는 다른 심판과 정죄를 취급한다고 하면서 틀림없이 나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보속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은 현세적 징계로서 보상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성령을 거스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들 안에 큰 능력이 있음을, 즉 신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위 저주로부터 실로 자유로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흠 없고 순전한 것처럼 보신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서 따온 증거들로 무장하고 있는데, 어떤 논거를 제시하는지 보기로 하자. 그들은 간음과 살인 때문에 나단 선지자에게서 책망 받은 다윗이 그의 죄에 대한 용서는 받았지만, 간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그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나중에 징벌 받았다고(삼하12:13-14)말한다. 우리는 죄가 면제된 이후에도 받아야 하는 이런 징벌은 보속으로써 배상한다고 배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자선을 해서 자신의 죄를 보상하라고 권했(단4:27). 그리고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0:12, 벧전4:8)고 썼다. 누가 복음에서 주께서는 죄 있는 여인에 대해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7:47)고 말씀 하셨다.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를 판단하는 저들은 얼마나 완악하고 사악한가!
40.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면-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다윗에 대한 이 책맹에서 죄의 심판이나 보응과는 아주 다른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응과는 아주 다른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응의 심판 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징계의 심판이라 칭하겠다.
보응의 심판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들에게 진노하시고 보응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고 흩뜨리시며 좌절 시킨다. 정확히 말해서 이것은 죄를 처벌하고 보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형벌”혹은“보복”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징계의 심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지 않고, 노하시지 않으며, 보응하시지 않지만,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훈계하시며 응징하시고 일깨우신다. 그것은 형벌이나 보응이 아니라, 교정이나 훈계이다. 전자는 재판관으로서의 행동이고, 후자는 아버지로서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행악자를 벌할 때는, 범행을 책망하고 범죄에는 벌을 가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바로잡으려 할 때는, 아들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나 아들의 범행에 대해 학대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가르치고 이후로 더욱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요컨대, 벌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다. 징계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사랑의 증표이다. 성도들은 모두 항상 진노를 거두시기를 기도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징계를 받았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운운(렘10:24). 이러한 죄의 징벌을 “징계”라고 하는 것에 내개 반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이해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징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울로부터 왕국을 빼앗으셨을때는 징벌하시기 위한 것이었다(삼상15:23). 그가 다윗의 갓난 아들을 다윗에게서 빼앗으셨을 때는(삼하12:18),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는 바울의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햐아 한다. 즉 위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더라도, 이것은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한 형벌이 아니고 다만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징계인것이다.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는 신자는 반드시 이러한 생각으로 굳건해져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니”(벧전4:17),...그의 이름이 일컬음을 받는 때에(참조.렘25:29).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가혹함이 하나님의 복수라고 믿는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손에 얻어맞은 사람은 하나님을 징벌하시고 심판관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진노하시는 적대적인 분으로만 상상하고, 하나님의 징계 자체를 저주와 정외로 여기고 몹시 싫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아직도 자신에게 벌주려 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다. 징벌이 영구적인 것인가 또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전쟁, 기근, 전염병, 질병은 바로 영원한 죽음의 심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저주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41. (내가 속지 않았다면) 다윗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의 목적을 모두 다 알 것이다. 그것은 살인과 간음은 하나님께서 대단히 미워하시는 것임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대해 심히 노하신 것은, 다윗 스스로가 이후로는 그와 같은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친히 언명하신 것이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치르도록 하기 위한 형벌은 아니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교정에 관하여도 동일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즉 다윗이 그의 백성을 계수함으로써 저질렀던 불순종 때문에, 여호와는 극심한 전염병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혼이 나게 하신 것이다(삼하 24:15). 왜냐하면 여호와는 다윗의 죄과를 값없이 사해 주셨지만, 그것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의 공적인 본보기로써나 또한 다윗 자신의 겸비하여, 여호와는 채찍으로 그를 준엄하게 징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의 예(例) 하나에만 시선을 집중시켜 놓고, 왜 값없이 받는 죄사함을 얼마든지 숙고해 볼 수 있었던 그 많은 다른 예들에는 감흥이 없는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고 성전을 나와 내려갔고, 아무런 징벌이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다(눅 18:14). 베드로는 자기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얻었는데(눅 22:61), 여기서 우리는 그가 눈물 흘린 것은 읽지만 보상을 치루었다는 말은 발견하지 못한다고 암브로우스는 말한다. 그리고 중풍병자는 “일어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 : 2)는 말씀을 들었을 뿐, 어떤 벌도 받지 않앗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모든 사면은 값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구범은 좀 유별난 특징을 지닌 한 가지 예에서 찾기 보다는 이와 같은 흔히 있는 예들에서 찾아 내어야 한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의로써 자신의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으로써 자신의 불법을 보상하라고 권유하며 설득했던 것은(단 4:27), 의와 긍휼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또 형벌에 대한 보상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어떤 다른 속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그러나 “보상하다”라는 말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을 가리켜 말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았다. “ 오 왕이여, 당신은 부정하고 포악하게 지배했으며, 비천한 자들을 억압했으며, 가난한 자들을 약탈햇고, 당신의 백성들을 가혹하고 부당하게 다루어 왔읍니다. 이제는 당신의 부당한 강제징수와 포악과 압제를 긍휼과 의로움으로 바꾸십시오.”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상호간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구절 전체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고 되어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그의 습관대로 대조법으로써 증오에서 발생하는 악한 것들과 사랑의 열매들을 대비시킨다.
그가 뜻하는 것은 이러하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서로 헐뜯고 유린하고 비난하고 중상하여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많은 것들을 가리워 주고, 눈감아 주며, 관대히 보아 준다. 즉 다른 사람의 결점들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들을 너그럽게 봐주며, 비난하며 그것들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일러서 치유해주는 사람이다. 우리가 베드로에게 성경을 격하시키고 교묘하게 변조시켰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는 이 구절을 동일한 의미에서 인용한 것이다(참조.벧전 4:8).
누가복음에 있는 말에 관한 한 (눅 7:36 - 50),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건전한 판단으로 읽은 사람은 누구도 그것에 관해서 우리와 논란하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께서 그렇게 기꺼이 받아들였던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주님이 모르고 있다고 혼자 생각했다. 만약 그리스도가 그녀가 어떤 죄인인가를 알았더라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이 정도로 속을 수 있었으므로 선지자가 아니라고 추론해 내었다.
주님은 이미 그녀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그녀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은 탕감받은 자이니 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러므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1 - 43, 47).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은 그가 그녀의 사랑을 죄사함의 원인으로 삼지 않고, 그 증거로 삼고 있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5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았던 빚진 자의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바리새인에게 빚진 자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탕감받은 것이 아니라, 탕감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비유에 적용해야 한다. 즉 당신은 이 여자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죄는 사함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녀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인정했어야 했다.
그녀는 사랑으로써 그가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그 사랑은 이제 당신에게 그녀의 죄가 사함받았음을 확신시켰어야 했다. 이것은 경험에 의거한 논증이요, 뒤따라 일어나는 증거로써 증명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는가를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눅 7:5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용서를 받으며, 사랑으로써 주님의 호의에 감사하고 이를 증명한다.
42. 나는 고대 저작자들의 책들에 광범위하게 표출되어 있는 보상에 관한 견해들에도 별로 감흥이 없다. 나는 사실 그들 중의 일부는 - 나는 단순히 그들의 저서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를 말하고자 한다 - 이 점에 관해서는 과오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보상에 관한 새로운 해석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정도로 그들이 졸렬하고 조야하게 그런 책들을 썼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이 보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배상이 아니고, 파문 처분을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친교에 들기를 원할 때 교회 앞에서 자기의 회개를 확증하는 공적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개자들은 진심으로 정녕 자기의 이전 생활을 싫어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니 오히려 자기의 이전의 행동들에 대한 기억까지 지워버리기 위하여 그들은 얼마간의 금식과 다른 의무들을 부과받았고, 하나님께가 아니라 교회에 대하여 보상을 치루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옛 관례로부터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고해와 보상이 발단되었다. 이들은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며(참조.마 3:7,12:34). 이들로 말미암아 좋았던 옛 형태의 그림자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옛 저서들이 때로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방금 말했듯이 나는 그들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의 오점들이 보이는 저서들이 이 사람들의 불결한 손을 거치면 완전히 더럽혀지고 만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교부들의 권위에 의거해서 논쟁한다면, 오 하나님, 이 사람들은 어떤 옛 저자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돌진하겠읍니까? 이 저서들 중에 상당 부분은 그들의 지도자인 롬바르드가 주워 모아 꿰어 맞춘 것들로서, 암브로우스•제롬•어거스틴 그리고 크리소스톰의 이름을 오용한 몇 명의 수도사들의 몰지각한 헛소리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또 당면문제에 있어서 거의 모든 증거는 그가 어거스틴의 「참회록」에서취한 것이며, 그 증거는 훌륭한 저자들이나 열등한 저자들을 막론하고 무차별하게 즉흥적으로 서투르게 변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어거스틴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평범한 학자라도 아무도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고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43.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연옥”설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이 도끼에 찍혀 넘어졌고, 또 그 기초마저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점을 못 본 체하고, 연옥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듯이, 이 연옥 문제로부터는 격렬한 다툼이 일어날 뿐이고, 교회는 거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 자신도 그들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쓸모없는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옥설은 숱한 신성모독에서 비롯되어 구성되었고, 나날이 신종()의 신성 모독으로지지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중죄를 짓도록 자극하므로, 이는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이것이 괴상하고 외람된 경솔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고안된 것이며, 사람들은 사탄이 간교하게 날조한 모종의 “묵시들”로 알고 믿으며, 또한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의 어떤 구절들을 무리하게 끼어 맞추었다는 것을 일시적으로는 은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주께서는 인간에게 자기의 심판의 은밀한 곳까지 파고 들어오는 뻔뻔스러움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사자(死者)에게 진실 여부를 문의하는 것을 (신 18:11) 단호히 금하셨다. 또한 그는 그의 말씀이 그렇게 불경스럽게 변질되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
44.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당분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용인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죄의 보상을 그리스도의 피 이외의 다른 데서 찾는다고나, 보상이 다른 데로 전이되는 경우에도, 침묵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리 높여 목청껏 폐부를 짜서 연옥설은 사탄의 극악한 고안품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을 전복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외쳐야 한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이 연옥은 사자들의 영혼들이 죄에 대한 보상으로 겪고 있는 징벌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피는 신자들의 죄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요 유일한 갚음이요 유일한 정죄(淨罪)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명백히 한다면, 연옥은 단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날마다 이것을 옹호하는 신성모독, 또 이것이 종교적인 면에서 만들어 내는 사소한 과오들, 그리고 불경의 근저로부터 곧잘 나타나는 무수한 여타의 것들은 생략하겠다.
잠시 후에 끝맺을 수 있도록 이제는 고해성사(마지막에 언급하기로 한 주제) 자체를 살펴 보자. 그들은 여기서 성례를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들은 갈대에서 옹이를 찾으려 하므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문제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결 상태로 불확실한 채로, 또 다양한 견해들 때문에 혼돈스럽고 난처하게 된 채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외형적 고해는 성례이고, 또 그렇다면 그것은 내면의 회개 즉 마음으로부터의 뉘우침의 표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부터의 뉘우침의 표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부터의 뉘우침이 성례의 본체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면 양자가 합하여 성례일 것이라고 한다. 둘이 아닌 하나의 완전한 성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 고해만이 성례이고, 내면의 회개는 성례의 본체임과 동시에 성례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죄 사함은 본체일 뿐이지 성례는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제시한 성례의 정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로마법학자들이 말하는 성례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라. 그러면 그들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께서 제정하신 외형적 의식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의 정의가 그들도 복종해야 할 법칙이 아니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그들이 신성불가침으로 받들고 있는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라.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보이는 성례들은 육체를 가진 인간들을 위하여 제정되었다. 이는 성례의 계단을 통하여 인간들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음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그들이 소위 “고해 성사”라고 하는 것에서 그들은 어떤 유사한 것을 발견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다른데서 이렇게 말한다. “성례는 그 안에서 하나는 보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되므로 실로 그렇게 일컬어진다. 보이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를 지녔고, 이해되는 것은 영적인 결실을 갖는다.” 이 말은 결코 고해성사와(그들이 고해성사를 생각하는 것과는)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영적인 결실을 의미하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그들의 투기장에서 이 짐승들을 죽이기 위하여) 만약 어떤 성례가 여기 있다면, 내면적이거나 외면적이거나 간에 사제의 사면 선언을 고해라고 하기 보다는 성례라고 하는 것이 더욱 그럴듯한 자랑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은 죄 사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예식이라고 말하기는 쉽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릴 것이라”(마 18:18, 참조. 16:19)는 말씀을 외치고 있듯이 “열쇠들에 대한 약속”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에 따라서 새로운 성례법이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틀림없이 성취한다 할지라도, 사제들에게서 사면 받아도 많은 사람이 그러한 사면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이 성찬에서 이중의 먹음 즉 예전적인 것(선인과 악인에게 균등히 주어지는)과 영적인 것(선인에게만 한정되는)을 가정한다면, 그들은 왜 사면 또한 두 가지 방식으로 얻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지금까지 나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저 논증을 특별히 다루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여기서 나는 단지 이 의심 때문에, 그들이 사제의 사면을 성례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서 보이는 성례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면적 성화가 없는 보이는 성례가 있다고 답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택함 받은 자들 안에서만 성례는 그 의미하는 바를 수행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 전자는 선인과 악인에게 동등하게 해당되지만, 후자는 선인에게만 해당된다”고 한다. 확실히 그들은 유치하게도 속았을 뿐 아니라, 햇빛 속에서도 눈이 멀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힘겹게 분투했음에도, 누구나 그렇게 명료하고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성례를 어떻게 가정하든지 간에, 그들이 과대선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그것을 성례로 여기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첫째는 성례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우리가 이미 성례식들은 하나님께서만 제정하실 수 있다고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전개되는 모든 의식은 그야말로 인간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해성사에 관해 날조한 것은 거짓이며 사기이다. 그들은 이 가짜 성례를 “난파선 주변에 있는 두 번째 판자”라는 적당한 칭호를 붙여 돋보이게 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가 세례 때에 받은 결백의 의복을 죄지음으로 더럽혔다면, 그는 고해로써 그것을 깨끗게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롬의 말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것이 누구의 말이더라도, 불경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세례가 죄로 인하여 효력이 상실되어서, 죄인이 죄사람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사실 죄인은 세례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얻고,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인은 세례에서 그에게 약속된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세례를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위로로써 주어졌기 때문이다.
C. (세칭) 종부성사
45. 세 번째의 거짓 성례는 종부성사이다. 사제만이 이것을 수행하며, 또 이것은 임종 시에(그들이 말하듯이) 주교가 성별한 기름과 다음과 같은 문구로써 수행된다. “이 거룩한 도유를 통하여 그대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거나 맛보면,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자비로써 그대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지니라.”
그들은 종부성사가 때가 잘 맞으면 죄를 사하고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두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고, 때가 맞지 않으면 영원은 구혼한다고 한다. 더우기 그들은 이 제도가 야고보에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이러하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5:15).
이 도유는 우리가 위에서 안수에 대해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여, 이유도 없고 유익도 없이 그저 사도들을 본따려는 것이었다. 마가는 사도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서 전도할 때에,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귀신들을 내쫓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병자를 고치며 병자를 치유할 때, 기름을 사용했다고 알려준다. 그는 “그들이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3)고 말한다.
야고보는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주라고 자신이 명했던 것과 이것을 관련지었다. 이런 의식 이면에 달리 깊은 신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주님과 사도들 모두가 이 외형적인 면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행동했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 하셨을때, 침을 진흙에 이겨 바르셨고(요9:6), 어떤 소경은 직접 만지셔서 고치셨고(마 9:29), 또 어떤 소경들은 말씀만으로 고치셨다(눅 19:42). 같은 방식으로 사도들은 말만으로 어떤 병을 치료하거나(행 3:6, 14:9-10), 어떤 병은 만져서 고치거나(행 5:12,16), 또는 기름을 발라서 치유했다(행 19:12).
그러나 다른 모든 방법들처럼 이 도유도 무분별하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이것을 인정한다 해도, 도유는 치유의 도구가 아니라, 오직 상징일 뿐이었다. 이 상징을 통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그런 위대한 능력의 원천을 잘 알아서, 그것을 사도들의 공로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기름이 성령과 그 은사들을 상징한다는(시 45:7) 것은 진부한 상식이다.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 처럼, 신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전차가 계속적으로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졌다.
46. 그러므로 도유가 그 당시에 사도들의 손을 통해 수여되었던 그런 능력을 지닌 성례라고 우리가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수여하는 권한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성경에 있는 다른 상징들은 다 제쳐 두고 유독이 도유를 성례로 지정하는가? 그들은 왜 실로암 못과 같은 목욕할 곳을 지정해서(요 9:7), 일정한 시간에 병자들이 몸을 담글 수 있도록 하지 않는가? 그것은 소용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실 도유 보다 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리지 않는가? 침과 흙이 섞인 진흙은 왜 성물이 아닌가?
그러나 다른 예언은 개별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야고보가 명한 것이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 말하자면, 야고보는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었던 바로 그 때를 대표해서 말했다고 한다. 실로 그들은 지금도 동일한 힘이 그들의 도유에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바는 그와 다르다. 그들이 이렇게도 무모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조롱해 왔는가에 대해 놀라지 말라. 그들이 사람의 영혼이 생명이요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게 되면, 무감각해지고 무분별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의 살아있는 감각을 속일 만큼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주님은 실제로 어느 시대에나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같이 필요할 때 마다, 그들의 병들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그는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주시던 뚜렷한 능력들과 이적들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해서, 그들이 받은 신유의 은사가 그들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올바르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반면에 이들은 역겹고 무효한 기름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성령을 모독한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그렇게 부른다 해서(요일 3:20,27) 모든 기름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부르며,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나타났다고 해서(마 3:16,요 1:32) 모든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그들이나 생각하도록 하라.
47. 지금 우리로서는 그들의 도유식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니며 어떤 약속도 없으므로, 그것은 성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면 된다. 사실 우리가 성례에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점을 요구할 때, 동시에 우리는 그 의식이 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 약속이 적용될 것을 요구한다.
현재 할례를 기독교회의 성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제정하셨고 또 명시된 약속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시지도 않았고, 그와 관련된 약속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맹렬하게 주장하는 종부성사에 관한 약속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명료하게 밝혔고, 그들 스스로도 경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이외에는 이 의식을 행해서는 않되며, 치유 보다는 오히려 죽이고 난도질하는 것에 더 능한 이 백정들은 이것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그들이 야고보가 도유에 관하여 처방한 것은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고(그들이 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주장하여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실행해 온 것으로는 도유를 증명하는 데 큰 진전이 없을 것이다.
48. 야고보는 모든 병자들이 기름을 바르기를 원하는데(약 5:14), 이 사람들은 병자에게가 아니라,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있거나 임종 직전에 있는 이미 시체 같은 사람에게 시름을 바른다. 그들의 성례에서 질병의 고통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적어도 영혼에 약간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 특효약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면, 적시에 치료하지 않는 것은 잔인한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기름바르도록 했으나, 이 사람들은 젊은 사제만을 도유자로 인정한다.
그들이 야고보서에 있는 “장로들”을 “사제들”로 해석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장식으로 거기 있으므로 -마치 그 당시의 교회들이 제물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더라도 했던 것 처럼- 그들은 가마에 성유를 담고서 긴 행렬 사이로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다. 야고보가 단순하게 병자에게 기름바르라고 명한 것에서, 나는 보통 기름과는 다른 것을 말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마가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발견할 수 없다(막 6:!3).
이 사람들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숨을 많이 불어 넣거서 데워진 기름이며, 긴 주문으로 중얼거리면서 9번 무릎 꿇어 인사한 기름이다. 세 번은 “평안할 지어다 거룩한 기름이여”라고 하고,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성유여”라고 하고, 그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향유여”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푸닥거리를 끌어 내었는가? 야고보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할 때, 만약 그가 죄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이라고(약 5:14-15), 즉 죄책이 사해지고 형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기름 때문에 죄가 씻긴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형제를 하나님께 위탁하는 신자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신성한”, 즉 가증스런 도유를 통하여 죄가 사해진다고 사악스럽게 거짓말한다. 야고보의 말을 제멋대로 악용하였던 그들이 얼마나 좋은 유익을 얻었는지 보라!
D. 성직의 계급 - 신품성사
49. 신품성사는 그들의 목록에서 넷째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곱 성사를 번식시켜 놓을 만큼 다산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7 성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헤아리면 열 셋까지 계산하게 된다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또 그들은 이 모두가 한 사제직을 지향하며 이에 이르는 단계들이므로, 한 성례를 형성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일곱 가지라고 선언하고 있는 때에, 왜 우리는 뭔가 의심스러운 듯이 이에 대해 논의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일곱 가지 신품 또는 성직계급에 이름을 붙여놓았다. 이 일곱은 수문품(守門品) ․ 강경품(講經品) ․ 구마품(驅魔品) ․ 시종품(侍從品) ․ 차부제품(次副祭品) ․ 부제품 ․ 사제품(司祭品)이다. 정말 그들은 이 일곱 서품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에 해당된다고 말하며, 이 직위들에 오른 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반드시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들이 승진할 때 마다 증대되고 더욱 후하게 쌓인다고 한다.
50. 숫자 자체는 성경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정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실제로 여섯 가지 이상은 언급하자 않았는데도(사 11:2), 그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능력에 대해서 이사야서에서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지자는 여섯 가지 모두를 그 논쟁에 국한 시키려 하니 않았다. 성령은 다른 데서는 “생물의 신”(겔 1:20), “성경의 영”(롬 1:4), “양자의 영”이라 부르고, 떠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사 11:2)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총명한 자들은 소위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본따서 일곱이 아닌 아홉 신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충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체발을 첫 계급으로 하고 주교직을 최하로 간주하며, 다른 사람들은 서품에서 체발식은 제외시키고, 대주교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이사도레(Isidore)는 다르게 구분한다. 그는 성가대원과 강경사를 구분해서, 성가대원은 성가부르고, 강경사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성경을 낭독한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법에는 이 구분대로 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 중에서 그들은 우리가 어느 것을 따르거나 또는 피하기를 바라는가? 우리도 일곱 신품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스콜라 학파의 대가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가장 유식한 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역시 그들도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 더욱이 가장 신성한 교회법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이것은 확실히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신학적인 문제들을 논의할 때, 그들이 응하는 방식인 것이다!
51.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서품의 기원에 관하여 논쟁할 때, 그들 역시 이 동료들처럼 자신들을 우습게 만드는가? 그들은 추첨으로, 혹은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추첨으로 뽑혔기 때문에, 혹은 주님의 추첨 때문에, 혹은 하나님을 분배자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라고 한다. 그러나 온 교회가 가져야 할 이 명칭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 이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 그 유산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참조.벧전 5:3).
베드로는 소수의 체발한 사람들을 가리켜(그들이 사악하게 상상하는 것처럼) “성직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것이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즉 정수리가 왕의 위엄을 상징한다고 해서, 성직자는 정수리 부분을 체벌한다. 성직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왕 같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신자들에 대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밷전 2:9)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다시 그들이 거짓말 한다고 밝힌다. 베드로는 온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이 말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짜 맞춘다. 마치 그들에게만 “거룩하라”(벧전 1:15-16, 레 20:7, 참조.레 19:2)고 한 것 같이,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받은 듯이(벧전 1:18-19), 또 그들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국과 제사장이 된 것 같이(벧전 2:5,9)!
그러면 그들은 또 다른 이유들을 제시한다. 즉 정수리를 드러내 놓는 것은 마음을 주께 열어 보여서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18) 하나님의 영광을 들여다 보기 위하여, 혹은 입과 눈으로 범한 과실들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체발은 세속적인 것들을 물리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정수리 밑에 남아 있는 머리카락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보존하는 좋은 것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것을 상징으로 표시하는 이유는 확실히 그들에게는 “성소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7:51).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정수리로써 이러한 것들을 상징했으므로, 자기들의 직책들도 잘 이행했다고 자인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언제까지 이런 속임수와 사기로써 우리를 조롱하려는 것인가? 성직자들은 머리카락 좀 자른 것으로써, 자신들이 풍성한 세속적 유익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눈과 귀의 정욕을 죽였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 보다 더 탐욕스럽고 우둔하도 정욕적인 사람들이 또 있는가? 어째서 그들은 가식적이고 거짓된 표식들로써 거룩의 외형은 꾸미면서 참된 거룩은 나타내지 않는가?
더구나 그들이 성직자의 체발은 나실인들로부터 비롯되었고 유래되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예전들은 유대의 의식에서 생겨났거나 혹은 아니면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바울도 서원을 하고 정결을 위해 머리를 깍았다고(행 18:18) 그들이 덧붙여 말한다면, 스스로 지독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브리스길라에 대한 기록은 아무데도 없으며, 아굴라의 경우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체발은 바울과 아굴라 어느 편에도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바울의 예를 드는- 묵인하지 않아야 하며 , 순진한 독자들은 바울이 결코 무슨 성결을 위해 체발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약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보통 이런 서원을 경건의 서원이 아닌 사랑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로써 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동등으로(고전 9:20) 말한 것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의 무지를 너그럽게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맞추기 위해 잠시동안만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이 무의미하게도 나실인의 성결식을 모방하고자 노력한다면, 이는 또 다른 유대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민 6:18, 6:5참조)?
이런 종교적인 의혹 때문에 성직자들에게(사도를 본받아)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하고 공처럼 깍으라는 교서가 작성된 것이다. 모든 남자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 가르친(고전 11:4) 사도가 마치 성직자의 공 같은 깍은 머리에 관심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52. 이로부터 독자들은 그 외 다른 서품들이 어떠한 것이며, 어떤 것이 이것들과 같이 발생되었는지 판단해 보자. 그러나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어서 각각의 서품에서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동료로 만들어 버린다. 무엇 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을 때(요 2:15, 마 21:12융합), 그는 문지기의 직분에 충실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양의 문이라”(요 10:7)고 말씀하셨을 때는, 자신을 문지기로 지칭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가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셨을 때는 (눅 4:17), 강경사의 기능을 해내셨다고 한다. 그가 귀먹고 어눌한 자의 혀와 귀에 침을 갖다 대어 그 사람의 청력을 회복시켜 주셨을 때는(막 7:32-33), 구마사의 직책을 행하셨다고 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요 8:12)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시종임을 입증하셨다고 한다. 그가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는(요 13:4-5), 차부제의 직책을 수행하셨다고 한다. 만찬에서 사도들에게 살과 피를 나누어 주셨을 때는(마 26:26), 부제의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십자가 상에서 성부께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을 때는(마 27:50, 엡 5:2), 사제의 직책을 완수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들은 웃지 않고는 들을 수 없으며, 이것들을 쓴 자들이 인간 일진대 웃지도 않고 썼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교활함은 “시종”이란 칭호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때, 더욱 현저히 나타난다. 왜냐하면 헬라인들도 아코루도스(ακολουθοꐠ)란 말을 단순히 “하인”으로 해석하는데, 이들은 이 칭호를 어느 나라 어느 언어에서도 전혀 들어 볼 수 없는 작은 양초를 가진 사람이라는(추측컨대) 마술용어로 부르기 때문이다.
53. 그러나 내가 이 견해들을 진지하게 반박하는 데 지체한다면, 나 또한 정말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들은 아주 쓸모없고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여자들 조차도 이런 말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그 허구성을 폭로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들은 강경사와 성가대원과 수문사 그리고 시종들을 휘황찬란한게 만들어 내어서, 그들이 지명한 소년들과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평신도”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이 임무들을 맡겼다. 이 일로써 자신의 생계를 꾸려가는 파산한 평신도들이나 소년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자주 촛불을 켜고, 제단의 병에 포도주와 물을 붓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이 교회 문들을 열고 닫지 않는가? 교회에서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시종이나 수문사를 본 사람이 있는가?
오히려, 소년 때에 시종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시종사의 계급에 들게 되면, 그가 시작할 때 받았던 일을 중단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직함을 취하고 나면, 직무 자체를 고의적으로 저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보라, 왜 그들이 성례로써 성별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작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임무를 저버리고 태만히 하는 것은 시대가 잘못된 탓이라고 핑계한다면, 그와 동시에 그들은 오늘날 성직들이(그들이 굉장하게 치켜 세우는) 교회에서는 아무런 유익이나 이득이 없으며, 또 그들의 전체는 저주로 가득찼다고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종으로 성별되지 않고서는 만질수도 없는 촛대들과 제단의 병들을 소년들이나 범속한 사람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또 오직 봉헌된 입만이 불러야 하는 성가를 소년들에게 맡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구마사를 성별하는가? 나는 유대인들에게 구마사가 있었다고 들었고, 그들은 귀신을 쫒아 내었다고(행 19:13) 해서 그렇게 불려진 것으로 안다. 이에 대해 들은 사람은 이 가짜 구마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한번이라도 실행해 보여 줬다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정신병자와 초심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에게 안수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마귀들은 그들이 이런 능력을 받았다는 말에 설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귀들은 이들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마술쟁이들에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 중에서 악한 영의 지도를 받지 않는 사람은 1/10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급계급에 관하여 -다섯 가지인지 여섯 가지인지- 지껄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식하고 역겨운 거짓 잡동사니이다.
더구나 하급계급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차부제를 고급계급으로 옮겼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이 하급계급에 포함시킨다. 이런 계급들은 확실히 성례의 수준에서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적들이 이 계급들이 초대 교회에는 없었고, 여러 시대가 지난 후에 고안된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포하므로, 사람이나 천사들은 제정할 수 없고, 약속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만 제정하실 수 있다.
나머지 두 계급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특별히 이를“거룩한 직분들”이라고 불러서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부당하게 오용해서 자기들의 변명거리로 삼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4. 우리는 장로 혹은 사제계급부터 먼저 논할 것이다. 그들은 이 두 이름이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하며, 그 임무에 따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 임무는 제단 위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드리며, 하나님의 선물등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품식에서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는 권한이 있다는 표로써(참조.레 5:8) 성찬용 빵에 덧붙여 성찬배(杯)와 성찬용 접시를 받는다.
그리고 봉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표로써 이들의 손에 기름을 바른다. 그들은 하난미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이런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위를 더 사악하게 곡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지난번 논의에서 주장했던 것은 공인된 사실임이 분명하다. 즉 속죄제물을 드리는 사제라고 자칭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히 5:6, 6:20, 7:17, 참조.시 110:4) 제사장으로 지명하여 성별하셨으며 (히 7:20f), 끝도 없고 상속자도 없게 하셨다(히 7:3). 그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화목제물을 바치셨으며(히 7:23, 8:3), 이제는 똰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히 9:24),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히 7:2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계 1:6, 참조.벧전 2:9). 그러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즉 우리 자신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자신을 바쳐 죄를 대속하는 것은 오직 그긔 직책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사제직은 불경한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55. 그러나 그들은 부끄럼도 없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직무들을 수행하는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신임을 얻고자 한다면, 자기들 사이에서는 일치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주교들과 탁발승들과 초라한 제물봉납자들이 사도들의 계승권을 놓고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 주교들은 열 두 사람이 대권에 의해 사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들도(이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명예도 높으므로) 사도들의 지위와 서열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장로들은 예수께서 나중에 임명하신 70인(참조.눅 10:1)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터무니 없는 추론이어서 길게 논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법전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교회에서 악마 같은 분열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나는 게바편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편이다”(고전 1:12)라고 말하기 전에는, 장로들과 주교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 이런 구별은 이교도로부터 흘러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썩 타당하게 추론한 것이다. 이교도들도 서열에 따라 분류하여 제주들과 분과 사제들과 사교들 및 기타 품급을 두었다.
탁발 수도사들은 여기저기로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켜 주기 때문에, 비교해 보면(실제로는 완연히 다를 뿐인데도) 자기들도 사도들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방랑자들이 하는 것과는 달리 쓸떼없이 이곳저곳을 지나다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복음의 열매를 전파하라고 주께서 명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갔으며, 남이 수고한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게으름은 피우지 않았다. 오히려 주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사용해서 그들이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쳤다.
그리고 탁발승들은 마치 증거가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좋은 옷으로 자기 몸을 감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아주 분명하게 그들의 칭호에 대해서 묘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하니”(살후 3:11)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 다른 데서는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6-7)고 한다. 나는 그들이 성사(聖事) 금지를 통해 이 명칭들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그들은 하늘 만큼이나 거리가 먼 사도들의 직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직이 사도들의 직위와 어떻게 잘 조화가 되는지 일반적으로 이에 관하여 살펴 보자. 아직 교회의 형태가 잡혀지지 않았을 때에, 우리 주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시기를 ,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마 28:19-20, 막 16:15). 또한 그 전에 그는 자기를 본받아 자기의 살과 피가 지닌 성스런 상징들을 나누어 주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눅 22:19). 제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지 않은가!
여기에는 사도들을 계승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거룩하고 침범할 수 없고 영속적인 법이 있으며, 이 법에 의해서 이들은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따라서 복음 전파와 성례 집행에 역점을 주기 않는 저들은 사악하게 사도들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제물을 바치는 자들은 사도들이 했던 일반 사역에 대해서도 속여서 자랑한다.
56. 사도들과 현재 교회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명칭이 다르다. 단어의 의미와 어원상, 그리고 양자 모두 주께서 보내셨기 때문에(롬 10:14f, 눅 6:13), 둘 다 “사도들”로 부를 수 있다 해도, 전자는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주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열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이 “사도들”이라고 특별하게 불려지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아직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사명에 대해 확실히 자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후자들은 오히려 “장로들”이나 “주교들”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둘째로는 직위가 다르다. 말씀과 성례를 섬기는 것은 양자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 열 사람은 일정한 제한없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고(행 1:8), 후자는 지역 교회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교회를 담당하는 사람이 다른 교회들을 도와도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종의 방해로 인하여 그가 출석지 못했거나 결석했을때, 그는 문서를 통하여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이 품급은 꼭 있어야 한다. 즉 모두가 한꺼번에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 모두가 혼란에 빠지거나 과제도 없고 목적도 없이 일시에 달려들거나 성급하게 한 장소에 모여들어서 마음대로 자기 교회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각각 임무가 배당된 것이다.
바울도 이것을 구분지으면서, 디도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똑같은 것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언급했을 때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아킵보 감독을 상기하며(골 4:17), 또 다른 데서는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을 상기하기도 한다(빌 1:1).
57. 이러한 문제들을 적절히 고려했다면, 이제 우리는 장로의 직분을, 즉 장로의 자격이 무엇인가, 혹은 아니면 그 직분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정의해 볼 수 있다. 그 소임은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다(나는 여기서 장로들이 올바른 행실 면에서 얼마나 월등해야 하며, 이들이 개인으로서 서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의도는 훌륭한 목사의 자질들을 전부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목사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고백해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에 부름받은 사람이며, 신실한 믿음으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감독들과 장로들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교회의 사역자들”이라 일컫는다. 직분은 바로 사명 자체인 것이다.
58. 이제는 사명의 의미를 설명할 차례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누가 감독들이나 장로들을 임명하여, 또 그들의 장립식 때 어떤 예전이나 의식으로 하는가이다. 이 제도의 합법성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제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사도들은 인간의 요청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만 임무 수행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그 구절에서 보았듯이, 각 성에서 감독들을 임명하기 위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놓았다고 말한 바울 외에는 이 지위를 보유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데서도 그는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함부로 안수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딤전 5:22).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임명한 장로들을 언급한다(행 14:22-23).
사교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구절들은 모두 주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이 구절들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장로들을 임명하고 성별시키는 권한이(그들이 말하듯이)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추론해 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별을 무식한 사람들에게 경건하고 존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꾸미고, 다채로운 의식들로써 이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별하고 임명하는 것이 한 교회의 감독이나 목사를 지명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만약 그들이 바울의 규칙에 따라서 성별하고 임명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패역하게도 바울이 한 말들을 그들의 상상대로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들은 훨씬 다른 것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독직이 아닌 제사장을 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교회의 사역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 사역은 말씀의 사역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보잘것 없는 자기들의 제물봉납자를 교회의 사역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불러댔는지 내가 안다. 그러나 정신병자라도 이 말은 믿지 않는다. 사실은 성경의 진리가 저들을 굴복시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고자 외에는 다른 사역자가 없다고 한다. 그는 교회를 지도하도록 부름받았으며, 때로는 “감독”으로(행 20:28), 때로는 “장로”로(행 14:23), 또 간혹은 “목자로(벧전 5:4) 불린다.
59. 그러나 이제 교회법에서는 적함도 없이 위탁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로서는 비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직함들을 제시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직함들 중에서 좀 더 나은 부분이 고위 성직자 • 교구신부 • 성당참사회원 • 성직록신부 • 전속신부 • 그리고 심지어 수도사들이 아닌가? 이것들은 대성당과 대학교회와 한적한 성당과 수도원에서 각각 부분적으로 따온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모든 것이 사탄을 위한 요리라고 여기며, 담대하게 이를 증언하다. 저 스튜우요리에 임명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그들은 제물에 대한 것 외에는 아무도 임명하지 않는다. 그것도 하나님께 바치는 거이 아니라, 마귀에게 바친다. 그러나 참된 유일한 임명은 생활과 가르침이 입증된 사람을 교회의 지도체제에 불러들여서 그 사역을 하도록 명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임명을 위한 예식과 의식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사명 자체를 동반한다. 그러나 의식에 관해서는 나중에 적당한데서 말할 것이다.
60. 지금은 교회의 사역자들을 누가 임명하는가, 즉 누가 불러들이는 거라는 당면 문제를 직접 다루어 보자. 그러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현재 최고의 가격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 처럼, 바울도 디모데와 디도에게 성직임명권을 주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그 두 사람 각각에게 당시에 있던 지방교회들을 설립하고 모으라고 명했을 때, 그는 디모데에게는 교회가 폐기되지 않도록 하라고 촉구했고, 디도에게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 외에는 수락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현재 일부 대사교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들의 재산을 주지 않았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더욱이 나는 그들 모두가 교회의 동의 없이 그들에게 좋게 보이는 사람들을 결정해서 교회에 강요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의견을 나누고 난 뒤, 올바른 신조와 흠 없는 생활을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을 그 직위에 임명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교회가 사역자를 선출하기 전에, 선택을 위해 심사숙고하려 할 때,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고 보존되기를 그들이 바란다면, 생활의 경건성이나 신조의 결백성이 탁월한 이웃에 사는 감독 한 둘을 초청해서, 그들과 함께 어떤 사람이 적격인지를 의논할 필요가 있다.
감독을 결정하는데 전 교회가 모여서 할 것인가 아니면 책임을 진 몇 사람의 투표나 치안판사와 결정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정법(definite law)으로 결정 할 수 없다. 그러난 협의는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서 채택할 수 있다. 역사를 보면, 그 당시에 많은 지역에서 이 관례가 널리 유포되었음이 확실하다.
61. 그러나 많은 지도자들이 만장일치하여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므로, 또 “불확실한 다수는 상반되는 관심사에 따라 나누어지는”것이 일반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나로서는(내가 말한 대로) 건전한 신앙과 청렴으로 존경받는 감독 몇 사람을 항상 고문 자격으로 대동한 가운데, 치안판사나 평의원이나 원로들이 이 선택의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심에 신성함을 간직한 제후들이나 자유 도시들이 긴급한 사정에 따라서 이 방법을 취할 수 있으면 더 좋다. 확실히 고위성직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성직임명권, 추천권, 선출권, 임명권, 그리고 기타 포악한 권력을 사용해서 건전한 임멍을 철저하게 부패시켰다.
62. 그러나 그들은 시대가 타락했기 때문에, 즉 감독은 뽑는데 있어서 사람들과 치안판사들 사이에는 올바르고 건전한 판단 보다는 양심과 당파심이 더 작용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결정권은 몇몇의 최고 감독들에게 위임해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가망없는 상황에서 극단적 악을 치유하기 위한 구제책이었다. 그러나 치료약이 질병 자체보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났는데도, 이 새로운 악은 왜 다시 치유하지 않는 것인가?
63. 그러나 교회법에는 감독들이 교회를 파멸로 이끌 만큼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가 아주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 자체는 건전한 규율을 절도있게 지키라는 경고라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전면적인 파괴를 위해 불붙여진 나무토막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넘어가겠다. 그래도 이 교회법들은 나에게 무엇을 쑤셔 넣는다 -그것은 교회법이 시종 그 저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어도, 그 저자들 마저 교회법을 비웃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 일반 신자들이 감독을 뽑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제정된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최고의 거룩한 법들에 의해 그들이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우리가)의 심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신자들은 다 셀 수소 없는 수 만 가지의 소소한 교회법들보다, 단 한 줄의 하나님의 말씀을 훨씬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아주 천박한 정열에 의해 부패되었으며, 법학이나 형평법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작성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 최상의 법률들이 작성되었다 할지라도, 이 법률들은 기록들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만다. 반면에 공공도덕은 거의 독립적으로 이발사 • 요리사 • 노새몰이 • 사생아 그리고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목자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묵과해 주었다. 나는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직은 뚜장이 노릇과 간통 주선에 대한 보답품이다. 왜냐하면 감독직이 사냥꾼들과 매부리에게 주어지는 때는, 일들이 썩 잘 되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무례가 교회법에 의해서 아전인수 격으로 옹호되고 있다. 내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한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된, 즉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고, 가르치기를 잘 하며, 다투자 아니하며 탐욕이 없어야 한다는 등(딤전 3:1-7, 참조.딛 1:7-9)의 우수한 교회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역자를 선출하는 책임이 일반 선지자들에게서 이 관리들에게로 전가 되었는가?
사람들이 법석 떨고 파당짓는 와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법률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수치심은 아예 없이 마구잡이로 이기적이며 야심에 가득차서 인간의 산물과 하나님의 것을 뒤섞고 혼동하는 감독들은 왜 현재 그것을 원상태로 옮기지 않는가?
자기 양무라는 하나도 돌보지 않으며, 적의 전리품을 탈취하듯 교회의 재산을 점거했으며, 소송의 수단을 써서 그것을 획득했으며, 돈 주고 샀으며, 비열하게 알랑거려서 얻었으며, 제대로 종알거릴 수도 없는 어린아이들처럼 삼천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일종의 유산으로써 그것을 받았던 자들을 “교회의 목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도 참을 수 있는가~
이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불법적인 평신도들의 방종도 이 정도까지 간적이 있었던가? 우리 시대의 이런 교회의 면모를 사심없는 눈으로 주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회복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등한히하고 모든 잔학상을 간과한다면, 그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사람들인 것이다.
64. 이제 장로들의 임명에서 이차적인 것, 즉 그들의 장립식 때 어떤 의식을 치루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고찰해 보자. 복음을 전파하라고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셨다(요 20:22). 이 상징을 통하여 그는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표현해 보이셨다. 이 수완좋은 사람들은 이 취입법을 존족시켜서, 마치 자기들의 목에서 성령을 불어내는 것처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젊은 사제들에게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중얼거린다.
그들이 터무니없이 위조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나름대로 이유와 뜻이 있는 몸짓을 하는 배우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별하지 않고 마구 흉내내는 원숭이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보이신 모범을 보존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일 중에서 많은 것은 우리에게 본받으라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셨다. 또 나사로에게는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에게는 “일어나 걸어 가라”(마 9:5, 참조.요 5:8)고 하셨다. 그들은 왜 죽은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에게는 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숨을 내쉬어서 그들을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써 자신의 신적 능력을 증거해 보이셨다. 그들도 이것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것이며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효력도 없을뿐더러 무능한 몸짓으로 그리스도를 희롱할 뿐이다. 차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준다고 확언할 만큼 뻔뻔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올바른가 하는 것은 경험이 입증해 준다. 사제로 성별된 사람들은 모두 말(馬 )이었다가 나귀로 변하고, 바보이었다가 미치광이로 변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과 싸우고자 하는 것은 이문제가 아니다. 단지 의식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이적의 상징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이므로, 본받아서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구실은 결코 그들의 주장에 대한 정당한 변호가 될 수 없다.
끝으로, 그들은 누구에게서 도유법을 배웠는가? 그들은 이 사제직의 근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참 끊임없이 해당되지도 않는 선례를 가지고 변명하기를 잘 하여서, 그들이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기들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고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아론의 아들들의 계승자라고 자칭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고대의 모든 제사장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예시하고 예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또 주석을 볼 필요도 없이 히브리서 자체가 증거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제사장직이 포함되었고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모세의 의식법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왜 수소와 송아지와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실로 그들은 고대의 장막과 전체 유대교적 예배 중에서 상당 부분을 고수하고 있지만, 송아지나 수소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그들 종교의 결점이다. 이 도유식을 행하는 것이 할례를 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특히 행위의 가치에 대한 바리새적 관념이나 미신을 첨가 할 때 더욱 위험하다. 유대인들은 의의 보증에 대한 근거를 할례에 두었고, 이 사람들은 도유식에 영적 은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씻을 수 없는 특성을 새기는 거룩한 기름(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이라는 것이다. 마치 기름이 먼지나 소금으로 또는(더 진하게 발라졌다면) 비누로 씻겨지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특성은 영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름이 영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흉내낸 어거스틴의 말을 잊었는가? “물에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단지 물일뿐이다. 그러나 물을 성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이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기름에 덧붙여 내보일 것인가?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기름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할 것인가(출 30:30, 참조.출 28:41, 29:7)? 그 뿐 아니라 모세는 또 아론을 장식할 속옷과 에봇과 관과 거룩한 관에 대해서(레 8:7, 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관에 대해서(레 8:13) 명령을 받았다. 그는 수송아지를 죽여 그 기름을 불사르는 것에 대해서(레 8:14-16), 수양을 죽여 불사르는 것에 대해서(레 8:18-21), 다른 수양의 피로 그들의 귓부리와 옷을 성별하는 것에 대해서(레 8:22-24). 그리고 무수한 다른 의식들에 관해서도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간과하면서, 어떻게 기름바르는 것만을 좋아하는지 참 놀랍다. 그러나 그들이 뿌림받기를 원한다면, 왜 피로 하지 않고 기름으로 뿌림받는가? 확실히 그들은 교묘한 일을 하려고 한다. 즉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교를 한데 묶어서 한 종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는 기름은 소금인 하나님의 말씀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
65. 남은 것은 안수례인데, 이것은 사도들이 항상 어떤 사람에게 교회 사역을 맡길 때 시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디모데가 감독으로 장립받을 때, 장로회가 그에게 한 안수를 “안수식”이라고(딤전 4:14) 칭했던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 있는 “장로회”를 어떤 사람들이 장로회들의 회합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한 그것을 더욱 단순하게 목회자들의 회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판단하건대 이 의식은 히브리인들이 축복받고 신성해지기를 원하는 것에 안수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렸던 이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던(창 48:14) 그런 종류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의미로 율법의 지시에 따라 그들의 제물에 안수 했다고(민 8:12, 27:23, 레 1:4, 3:2, 8:13 ; 4:4, 15, 24, 29, 33등)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사도들도 그들이 안수하고 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이 안수로써 나타내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도들이 율법의 그림자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안수법을 사용함으로써, 아무런 미신적 의미가 없는 이 상징을 채택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이 주께로부터 오셔서 임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있는 사람에게 안수했으며, 성령께서는 그들로부터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강림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령을 이러한 상징으로써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이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청하고자 했던 그 사람을 주께 위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그것은 주를 기쁘시게 했으므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 은사를 나누어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했든지 간에 완전히 그것을 성례로 여겼던가? 사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므로(행 7:60, 9:40, 20:36, 21:5, 26:14), 사람들이 무릎 꿇으면 그것이 성례가 될 것인가? 제자들이 동쪽을 향해 기도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도 동쪽을 보면 성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거룩한 손을 들기를 원하고 있다(딤전 2:8). 이것은 거룩한 사람들이 종종 손을 들고 기도했다는 사실(시 63:4, 88:9, 141:2, 143:6)을 상기시켜 주는데, 그렇다면 팔을 뻗치는 것 또한 성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성인들의 몸짓은 모두 성례가 될 판이다.
일단 싸움은 접어두고, 나는 우리가 이 예식을 어떤 용도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사도들이 했던 그대로 성령의 은사를 수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수법을 사용한다면,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신비는 주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도 아니요. 그가 상징으로써 제정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과 그의 총신들은 부단히 이 돌을 굴린다. 우리가 그들의 견진례를 다룰 때 충분히 논의했듯이, 마치 그들은 그런 표식으로 자기들이 성령을 수여한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주교로 세움 받은 사람이 교회가 보는 주앙에 서서, 이직임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기도받고 장로들의 손으로 안수 받으며(자신을 목자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외에는 아무 의식도 없이). 교회는 공중 기도로써 그를 하나님께 위탁한다고 한다면, 온전한 사람은 그런 안수에 찬성해 마지않을 것이다.
66. 집사직의 기원과 임명 그리고 직책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언급하고 있다(행 6:3).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가난한자에 대한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다고 소문냈을 때, 사도들은 두 가지 역할(말씀전파와 재정출납)을 다 하기란 어렵다고 말하면서, 이 일을 맞글 수 있는 정직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도록 회중에게 요청했다(행 6:1이하). 이것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ㅗ고 그들의 구제를 관리하는 집사직의 직임이며, 이로부터 집사직의 명칭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을 대행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누가는 집사의 제도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뽑고 세운 자들에게 사도들은 기도하고 안수했다고(행 6:6) 그는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집사들을 가지기를, 또 이런 예식 즉 안수로써 그들을 임명하기를 원한다. 이 접에 관해서 우리는 충분하리만큼 말했다. 바울도 집사직에 대해 말하면서 바라기를, 집사들은 단정하고 일구이언 하지 않고 술에 인박이지 않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며(딤전 3:8-9)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들(딤전 3:12)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고안해 낸 집사들과 이 집사직은 비슷한 데가 있는가?
나는 지금 사람들 자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내가 사람들의 결점만 보고 그들의 교리를 불공평하게 판단한다고 그들이 불평할까봐), 우리의 논적들이 그들의 교리에 있다고 내보이는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증거를, 사도 시대의 교회가 집사로 임명한 사람들에게서 찾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부제의 직책이란 “ 사제들을 도우며, 성례 때에 필요한 모든 일 즉 세례와 성유와 성반과 성배의 일을 집행하며, 예물을 가져다가 성단에 놓으며, 성찬상을 준비해서 덮으며, 십자가를 들고 신자들에게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읽어 들려주는 일을 하는 것” 이라고 한다. 여기에 집사의 참된 사역에 대한 말은 한 마디라도 있는가?
이제 그들을 임명하는 절차를 알아보면, “부제를 임명할 때는 주교만이 그에게 인수한다. 즉 주교는 영대(領帶), 즉 피임명자의 왼쪽 어깨에 법의를 얹어서 그가 주의 가벼운 멍에를 받았다는(마 11:30)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왼쪽 편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바치게 된다. 주교는 복음서를 그에게 주어, 그가 복음의 선포자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이 집사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카톨릭 교회는 사람들을 뽑아 놓고는 결국 향을 피우고 성상의 먼지를 털며, 교회를 청소하고 쥐를 잡고 개를 쫓는 일만 시키면서 마치 이들은 사도들로 임명한 것처럼 행동한다. 누가 이런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감히 비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후로 그들은 실속없이 허례로 임명했을 뿐인 이 사람들을 집사들이라고 속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심지어 이 사람들을 레위족이라 부르며, 레위의 아들들을 이들의 근원과 시조로 삼는다. 그들이 레위족의 의식과 모세 율법의 그림자에 복귀하고 있다고 확언한다면(사실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부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7. 이제 신품성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한번 정립해 보자. 위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더 길게 되풀이 할 필요는 없다 . 온건하고 배우기를 잘 하는(내가 가르친 그대로) 사람들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의식이 말씀과 결부되어 있지 않는 곳에는, 아니 오히려 말씀이 의식에서 발견되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의 성례도 없다. 이런 의식에서는 명확한 약속은 한 구절도 찾아 볼 수 엇으므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의식을 조사해 보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의식에 대해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례도 있을 수 없다.
E. 혼인성사
68. 마지막 성사는 혼인성사이다. 모든 사람이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고(창 2:21-24, 마 19:4이하) 인정하지만,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는 이것을 성례로서 집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또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렇게 생각했겠는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의식이며, 농사와 건축과 구두 수선과 이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법적인 것이지만, 이 모두가 성례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야 하는 동시에,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외형적 의식이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에는 이런 거이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69.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신성한 것, 즉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연합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워 두신 상징을 “표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아주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만약 그들이 “표징”을 비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예리하게 설명하는가를 보여 주겠다.
즉 바울은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고전 15:41-42)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사가 하난 생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성사가 하나 생긴다. 또 “천국은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고 말씀하신다. 셋째 성사이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사 40:10-11)라고 말한다. 넷째 성사이다. 다른 곳에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사 42:13)라고 한다. 이것은 다섯째 성사이다. 도대체 어디서 끝날 것이며 어디서 마칠 것인가? 이런식으로 설명한다면, 성례가 아니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있는 비유와 직유의 수만큼이나 많은 성례가 있게 될 것이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임하리니”(살전 5:2)라고 하였으므로, 심지어 도둑질도 성례가 될 것이다. 이 궤변가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지껄이는 것을 누가 참고 있겠는가?
우리가 포도나무를 볼 때 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상하는 것은 썩 좋은 일이다. 양떼를 거느린 목자와 마주칠 때 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라는 말씀을 생각하는 것 또한 좋다. 그러나 이런 비유들을 성례에 포함시키는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70.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로써 우리를 공격한다. 바울이 결혼에 “성례”(=비밀)라는 말을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sacrament)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28-31).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다루는 것을 땅과 하늘을 섞는 것과 같다.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자기 아내를 깊이 사랑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택하신 교회에 거룩한 연민을 쏟으시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엡 5:28)라는 말씀이 곧 이어지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셨는가 , 아니 어떻게 신부인 교회와 자신을 하나되게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아담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했다고 모세가 언급한 바 있는 것을 여기서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하와가 자기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이며 그와 한 살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우리 안에서 영적으로 실현 되었다고 천명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압축하여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아무도 오해하여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가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갈빗대를 떼어서 우리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밀이다. 즉 그가 강하셨을 때에,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기꺼이 약해지셨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그들은 “sacrament"라는 용어 때문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에 대한 벌을 온 교회가 받았던 것이 옳았는가? 바울은 ”mystery"라고 말했다. 번역자는 이 말이 라틴인들이 듣기에는 생소하지 않은 것이므로, 그대로 두든지 아니면 “secret"라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sacrament"란 말을 채용했으나(엡 5:32),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mystery"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부족한 어학실력에 대해 시끄럽게 불평하도록 하라. 그들은 어학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쉽고 분명한 문제를 그렇게 오랫동안 창피스럽게도 속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 한 군데에서는 “sacrament"란 말을 그렇게 끈덕지게 고집하면서, 다른 경우에는 무시하는가? 디모데전서와(딤전 3:9) 에베소서에서도(엡 1:9, 3:3, 9) 라틴역 성경의 번역가는 일괄적으로 sacrament를 ”mystery"로 사용했다.
71. 그러나 그들의 이 실수를 용서해 주라.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기억력이라도 좋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에 성례라는 칭호를 붙여 장식해 놓고, 나중에는 이것을 불결과 타락과 육적인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거망동인가? 사제들을 이 성례에서 제외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만약 그들이 사제들을 이 성례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결합의 탐욕을 막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실수로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적 결합 자체가 성례의 한 부분이며, 그것만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자연에 합치하는 비유라고 그들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육체적 결합에 의해서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성례를 발견했다. 하나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발견한 하나님과 영혼의 성례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발견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례이다. 그래도 성교는 여전히 성례라고 하면서,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그리스도인의 성례는 서로 맞지 않아서, 그들도 일치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대단한 교리에는 또 다른 불합리한 것도 있다. 그들은 성례에서 성령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성적 결합을 하나의 성례라고 가르친다. 그런데도 성적 결합에는 성령이 입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한 가지 만으로 교회를 희롱하지 않고, 이 오유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거짓말과 사기와 비행을 첨가했는가?
그래서 그들이 혼인을 성례로 만들었던 것은, 말하자면 결국 추악의 소굴을 얻으려고 했던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단 혼인을 성례로 만들고 나서, 혼인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떠맡아서 다루었다. 혼인은 영적 문제이므로 세속 법관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법을 만들어서 그 법으로 그들의 횡포를 강화 하였는데, 어떤 법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불경건한 것이었고, 어떤 법은 사람에 대해서 몹시 불공정한 것이었다.
대강 이런 것들이다. 부모의 승낙없이 미성년자들이 혼인하는 것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친척끼리의 혼인은 7촌까지라도 불법이고, 결혼했다면 취소해야 된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민족의 법과 모세의 규례에도(레 18:6이하) 반대되는 촌수를 지어낸다. 간음한 아내를 버린 사람은 재혼할 수 없으며, 대부 • 대모 는 서로 혼인할 수 없고, 사순절 전 제 3 일요일부터 부활절 후 8일 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의 3주간, 그리고 강림절부터 예수 현현 대축일까지는 혼인할 수 없으며, 이 밖에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규정들이 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오래 그들의 진창에 빠져 있으므로, 이제는 빠져나가야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귀들에게서 사자의 가죽을 좀 벗기는데 조금은 성공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