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시 이야기(8)
삼정三政문란과 백성들의 핍진한 삶
조해훈(시인, 고전평론가)
갈밭마을 젊은 아낙 우는 소리 길어라(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관아 문 앞에서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지아비 출정 나가 돌아오지 못할 수는 있다 해도(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자고로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애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관가에 호소하려 해도 호랑이 같은 문지기 때문에 못 하고(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지아비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더니 자리에 피가 흥건하고(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스스로 한스러워하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누에치던 방서 불알 까는 벌 받은 사람 어찌 죄가 있었으랴(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閩囝去勢良亦慽·민건거세양역척)/ 자식을 낳고 또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곤도여)/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 것인데(騸馬豶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況乃生民思繼序·황내생민사계서)/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하고(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그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粒米寸帛無所損·입미촌백무소손)/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객지 창 아래서 ‘시구’편을 거듭 외노라.(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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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7언 20구로 된 한시 「哀絶陽(애절양·양물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으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절양(絶陽)’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것이다. 42세 다산이 1803년(순조 3) 봄에 유배되어 있는 전라도 강진 동문 근처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이 1803년(순조 3)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군정(軍政)의 횡포에 저항하여 한 사내가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일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이 시를 지은 동기에 대해 “이 시는 가경(嘉慶) 계해(癸亥, 1803)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보(軍保)에 올라 이정(里正)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가자 남편이 칼을 뽑아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라고 설명하였다.
1∼4구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인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사건과 그것에 목 놓아 우는 아낙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5∼10구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인 세상을 버린 시아버지와 갓 낳은 자식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는 기막힌 현실을 고발하였다.
11∼16구에서는 남근을 자른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다시 따져 묻고 있다. 소나 돼지가 그런 일을 당해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 일을 스스로 행한 슬픔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관의 횡포가 얼마나 지나쳤으면 그 사내가 그리 하였을까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7∼20구에서는 백성들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오히려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한 톨의 세금도 내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다시 고발하고 있다.
당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병역을 대신하여 군포(軍布)를 내게 되는데,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은 자신의 생식기가 문제라며 잘라버린 기막힌 현실을 그린 것이다. 위 시는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하는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조선후기 삼정문란의 한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다. 삼정문란이란 알다시피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세 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을 일컫는다.
전정은 공정하고 정확한 전지(田地)의 조사와 측량을 바탕으로 1년에 소출되는 양을 검사하여 균등한 전세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소출량에 대한 조사도 담당자인 수령과 토호들의 농간에 의해 공정한 세금부과가 어렵게 되었다. 실제 소유하지 않은 토지에 세금을 징수하는 백지징세(白地徵稅), 실제 세액의 몇 배를 징수하여 착복하는 도결(都結)과 방결(防結), 각종 부당한 명목의 잡세 등이 있다. 이를 전정의 문란이라 한다.
군정은 군적에 따라 번상병(番上兵)을 뽑고 보포(保布)를 정급(定給)하여 주는 제도였으나 15세기 말부터 군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관례가 생겨난 뒤 양반이나 돈 있는 백성들은 군포를 내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군포 면제를 받는 편법이 등장하여 군포가 줄어들자 지방 관아에서는 이웃에게 군포를 강제 징수하는 인징(隣徵), 가족에게 강제로 징수하는 족징(族徵), 마을 단위로 전체의 군포액수를 부담케 하는 동징(洞徵), 어린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과 같은 불법징수가 성행하였다. 이를 군정의 문란이라 한다.
환정은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아 농업의 재생산을 도모하고 군자미를 매년 새로운 곡식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모곡이라 하여 1/10을 이자로 더 돌려받게 되었다. 이후 아전들의 횡포가 늘어나면서 모곡의 양이 1/10에서 1/2로 늘어나는가 하면 빌려주는 원곡에 모래나 겨를 섞어 실제 양을 줄이고 후에 거두는 모곡은 원곡대로 받는 등 다양한 편법이 자행되었다. 이에 환곡 받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하거나, 이자를 돈으로 내도록 하여 아전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를 환정의 문란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전정·군정·환정의 문란을 합하여 삼정의 문란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결국 이러한 삼정문란은 1811년 홍경래의 난이나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농민항쟁 등 19세기 크고 작은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애절양」와 비슷한 중국의 이야기가 있다.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사지로 모는 당나라 지배층을 비판하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자른 비극적인 사실을 백거이가 「절비옹(折臂翁)」이란 시를 통해 비판하였다. 결국 다산의 「애절양」과 백거이의 「절비옹」은 모순적인 현실을 시로 형상화 한 점에서 서로 맥락이 닿아 있다.
「절비옹」이란 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두들 말하기를, 전후하여 남만 땅으로 전쟁 나간 사람(皆云前後征蠻者·개운전후정만자)/ 천만 명이 나갔으나 돌아온 사람 하나 없다고 하였소.(千萬人行無一廻·천만인항무일회)/ 당시에 노인의 나이는 스물넷 살 청년이었다오.(是時翁年二十四·시시옹년이십사)/ “병부의 명단에 내 이름이 있어(兵部牒中有名字·병부첩중유명자)/ 밤이 깊어지자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고서는(夜深不敢使人知·야심부감사인지)/ 몰래 큰 돌을 가지고 내 팔뚝을 쳐서 꺾어버렸다오(偸將大石鎚折臂·투장대석추절비)/ 활 당기고 깃발 흔드는 일을 모두 못하여(張弓簸旗俱不堪·장궁파기구불감)/ 이때부터 비로소 운남 땅으로 원정 가는 일을 면하였소.(從茲始免征雲南·종자시면정운남)”
여기에 등장하는 노인은 여든 여덟 살로 고향이 신풍인데, 왼팔이 어깨에 달려 있고, 오른 팔은 꺾여 있어 백거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다. 노인의 사연을 들은 후 ‘절비옹’ 즉 ‘팔뚝 부러진 노인’으로 시를 지은 것이다. 조선연산군 때의 시인인 어무적(魚無迹·생몰년 미상)은 「작매부(斫梅賦)」란 시에서 관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 매화나무를 쪼개 버리는 현실을 목도하고, 그 참담함을 노래하였다. 어무적 역시 당시 피지배층이 당하던 삶의 힘듦과 관의 횡포를 고발한 대표적 작품이다.
어무적의 아버지는 사직(司直) 어효량(魚孝良)이다. 성종·연산군 때에 벼슬이 높았던 어세겸(魚世謙)과 어세공(魚世恭)과는 재종형제(再從兄弟) 사이다. 아버지는 사대부였으나 어머니가 관비였으므로 어무적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관노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인으로서는 드물게 한문을 익힐 수 있었고 특히 시에 뛰어났던 것이다.
<참고자료>
=『목민심서』
-박석무, 『 목민심서,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 』, 현암사, 2021.
-심경호, 『한시의 세계』, 문학동네.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