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의 시>
목성에 가다 외 4편
4시간을 자고 4시간을 자고 2시간을 자고 당신에게 갑니다 가는 사이 나는 늙고 당신은 젊습니다 가는 사이 나는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당신을 활활 타오르는 불을 뿜어냅니다 가는 사이 나는 똥을 밟고 당신은 똥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는 사이 별은 어쩜 그렇게도 은은한 안개꽃인지요 가는 사이 달은 어쩜 그렇게 달달한 슴새인지요 오늘 아침 자고난 풀섶에 눈동자 연둣빛인 새 한 마리 이슬처럼 맺혀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인지요 진실은 애당초 처음부터 앵두꽃처럼 없는 꽃이었겠지요 거짓이라는 비말꽃이 없던 것처럼 말입니다 비대면과 대면 사이 층층이 나누어진 당신의 꽃을 이해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릅니다 감히 제가, 감히, 그랬습니다 당신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얀 감꽃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낙화의 밤을 알기 전의 일이었지요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요 얼마나 발뺌을 많이 하였는지요 이제는 압니다 뱀 숲에서 디디던 발을 뺀 자가 당신이 아닌 나라는 것을, 어리석음의 울퉁불퉁 한 길을 달려온 자가 당신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한 번 어리석은 자가 영원히 어리석을 뻔 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별이 왜 은은한 눈빛으로 밤마다 나의 파란 눈덩이를 어루만졌는지 우리의 강쥐가 왜 눈망울에 그렁그렁 초록빛 눈물이 고여 있었는지 바나나 간식을 줄 때면 왜 웅- 웅- 웅- 바람 부는 소리를 내었는지 이제 알았으니 이제 실천합니다 4시간 자고 당신의 U동물병원에 갑니다 4시간 자고 당신의 반려묘에게 먹이를 줍니다 두 시간 자고 당신의 운동화를 빱니다 나는 감정을 가진 노동자입니다
임랑
임랑 바닷가, 모래밭에 파라솔이 펼쳐져 있고 파라솔 아래에는 동그란 흰 테이블이 놓여 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소연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빈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가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캔 맥주를 딴다 한 모금 마시고는 소연을 힐끔 쳐다본다. 소연은 휴대폰을 흰 테이플 위에 놓고 대나무 느낌이 드는 여름가방에서 시집을 꺼낸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계속 들으며 황인찬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는다. 한 남자가 캔 맥주를 마시다가 캔 맥주를 손에 들고 일어나 모래사장으로 걸어간다. 점점 소연과 멀어진다. 긴 단발머리에 흰 셔츠와 무릎 위로 올라간 까만 미니 치마를 입은 한 여자가 소연에게 다가와 비어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소연은 힐끔 한 여자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시집 책장을 넘긴다. 한 여자는 플라스틱 의자를 흰 테이블 앞으로 한손으로 질질 끌고 와 앉는다 손에 들고 있던 일회용 투명 아이스커피를 테이블 위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리더니 노트북을 꺼낸다. 소연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한 여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음ㅡ음 ㅡ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 하더니 말없이 시집 책장을 넘긴다. 한 여자는 노트북을 열더니 키보드를 힘차게 친다. 소연은 약간 의아한 듯 한 여자를 쳐다본다. 한 여자는 계속 키보드를 빠르고 힘차게 친다. 소연은 시집 책장을 넘기다 다시 한 여자를 쳐다본다. 그렇게 힘차게 키보드를 치는 사람을 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여자는 키보드를 치다 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비비더니 한 올 쭉 당긴다. 조금 있다가 또 키보드 치다 머리카락을 한 두 올씩 길게 당긴다 끊임없이 왼쪽 오른쪽 머리카락을 정신이 없을 정도로 쭉 당긴다. 왼쪽 머리카락을 당기다가 키보드 치다가 또 오른쪽 머리카락 당기다가 키보드 치다가 팔꿈치 긁다가 키보드 치다가 오른쪽 머리카락 당기다가 키보드 치다가 아예 키보드 치는 걸 멈추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당기다가 키보드 치다가 왼쪽 목 줄기를 긁다가 키보드 치다가 바다를 바라본다. 그를 지켜보던 소연도 시집 넘기는 것을 그만두고 바다를 바라본다. 점점 두 사람의 모습은 점처럼 작아지고 파도소리는 점점 커진다.
별장
토스트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렇다고 고단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피규어 가게 안 검은 고양이가 가슴에 가슴보다 더 큰 금빛 큐빅 하트를 박고 손을 흔든다
그렇다고 쓸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붐빈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서가에는 아름다운 손가락들이 도레미파솔 전시되어있다
그렇다고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다
피투성이 손가락이 나를 손가락질 한다
그렇다고 화가 나는 건 아니다
공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뭔가
실체는 없고 늘 허공을 겉도는 것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다
물은 따듯하고 아늑하다
물비누가 솜사탕처럼 사타구니를 타고 흐른다
그렇다고 달콤해지는 건 아니다
나는 네가 아닌데
가끔 네가 되기도 한다
그건 요청이다
예의 없는 요청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건 별장 같은데서 하는 놀이다
복숭앗빛 복숭아
-백도
비프힐의 천장은 과육의 실핏줄들이 엉켜 자라고 있었다 착시 일뿐야 야외용 가위를 든 친구가 놀려댔지만 거위의 옷을 벗고 거리에 나앉은 눈동자를 짓누르니 눈앞이 흐려진다 친구는 어제 사랑하는 동영상과 헤어졌다 더 이상 논문을 착취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폭력이 없는 세계를 구축하느라 일생을 다 써버렸다 C동생이 남들처럼 살지 않아 언니 인생이 다 가고 있어 라고 했다 같은 여자끼리 말이다 의리가 없다는 말에 십 원을 걸었다 소독약으로 뒤덮힌 비프힐의 천장이 흰 마스크처럼 펄럭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친 생각 일뿐이야 야외용 개를 안고 있던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털 복숭 같은 수염을 얼굴에 갖다 댔다 너 이거 성추행이야 말해놓곤 셋이서 ㅋㅋ 웃었다 개가 씨익 웃었다 징그러운 놈이야 ㅋㅋ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개는 늘 상냥하게 꼬리를 흔들며 귀여운 두 귀를 접으며 복숭이빛 속살을 연출했다 설마 개가ㅡ? 설마 걔가ㅡ? 사람 목줄을 손 안에 쥐고 흔들던 빚쟁이가 폭우에 휩쓸려 사라졌다 어젯밤에는 어깨에 유난히 살점이 많은 그의 아들이 나타나 방 한 가운데서 자고 갔다 용서의 그릇들이 차례차례 빗방울을 담았다 말해서 뭐해 돈이 최고지 과일박쥐 목살에 방부제 주사를 놓는 모습을 본 편의점 알바생 최 군은 과일박쥐 목살을 먹지 않고도 통조림이 되어갔다 가릴게 뭐 있어 없어서 못 먹지 그런 시대 같기도 하고 그런 시대 같지 않기도 했다 비프힐의 창밖에 버려진 무지개 도넛들이 일어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처럼 어중간한 노동자의 눈동자의 저녁식사는 나방의 거위에게 알맞은 정식이었다 어제처럼 빗나간 비프힐의 흰 천장은 거위의 알밤에게 알맞은 위로였다 내일의 미지의 태도는 알밤의 알고리즘에게 알맞은 순수였다
* 이 시에는 무의식 오타가 들어 있습니다
만첩 빈도리*
한 첩 반상 차려 올렸소
두 첩 반상 차려 올렸소
세 첩 반상 차려 올렸소
첩 하나 잡았소
첩 둘 잡았소
첩 셋 잡았소
이보시오
단어가 왜 이 모양이오
한 첩은 누기 차리오
두 첩은 누가 차리오
세 첩은 누가 차리오
기이하고 궁금하오
나를 믿고 가야하오
나를 믿고 가야하오
나를 믿고 가야 하오
그러해야 하오
그러해야 하오
그러해야 하오
레몬라임의 당나귀 같은 잎은 연초록의 길을 내고 있소
테이블 야자의 새앙쥐 같은 귀는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엿듣고 있소
이보시오 신음소리 줄이시오
이보시오 발자국 소리 너무 크오
이보시오 떨기나무가 떨고 있소
금성은 금빛 입김을 내뿜고
우주는 지구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오
가오
가오
멀리 가오
내가 나를 믿고
멀리 가오
*장미목 범의귀과 말발도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