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 삶 속에서도 예배하라!
-영화 <천지창조>, <킹 아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설교-
본문 : 롬 12:1-2, 창 4:2-5, 마 5:16
미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강의를 하던 강사가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홍보하는 동영상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소개하는 첫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월요일에 출근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일터에서 일하는 모습들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도 보여주고 나자 동영상이 끝났습니다. 그 후에 그 교회의 목사님은 교회의 교우들이 주일에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코멘트를 하고는 교회 소개를 마쳤다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삶의 예배를 잘 표현한 교회 홍보 자료였던 것입니다. 통상 교회 소개 영상이라고 하면 우리 교회에 어떤 부서와 조직이 있는지 소개하고 온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담임목사의 인사말을 연상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삶의 예배를 잘 표현한 교회 홍보 자료였던 것으로 ‘모인 교회’보다는 ‘흩어진 교회’를 더 강조한 것입니다.
1. 참된 예배는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냐?”고 질문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조금 구체적으로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습니다.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주일에는 틀림없이 교회당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교우들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토요일에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흩어진 성도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이름 붙여 “흩어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성도들은 무엇을 합니까?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 부분을 설명한 후 구체적인 삶을 설명할 때 처음에 꺼낸 선언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바로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영적 예배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인식의 전환 혹은 확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의 비중을 결코 약화시키면 안 됩니다. 중요성을 따지는 것이야 무의미하지만 모인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흩어진 교회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더라도 월요일부터 시작된 삶의 예배를 제대로 못 드리는 이원론적 크리스천들이 많아서 오늘 어지러운 우리 사회를 바로 잡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이동파출소’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전에 경찰차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경찰차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을 지켜주고 치안을 유지하는 파출소의 기능을 한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런 정체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각각 교회의 역할을 합니다. 모인교회입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세상으로 나가면 또한 여전히 교회들입니다. ‘이동교회’로서 각각 우리는 삶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2. 믿음으로 드리지 못한 가인의 예배 : 탐욕 때문!(영화 <천지창조>)

창세기 4장이 인류가 드린 첫 예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예배를 상상해 보겠습니다. 존 휴스턴 감독이 그의 작품 <천지창조>에서 아벨의 예배와 대비되는 가인의 예배를 잘 묘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아담의 가족들의 모습이 그럴 듯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는데 추수 때가 되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 과정이 나옵니다. 아벨은 양의 첫배의 새끼와 그 기름으로 좋은 것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존 휴스턴 감동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명성답게 이 장면을 재미있고도 의미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묘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준비를 합니다. 과일과 곡식들이 담긴 자신의 바구니에서 제물로 드리는 바구니로 곡식을 옮겨 담다가 아깝기라도 하다는 듯 담았던 곡식을 다시 자신의 바구니로 옮겨 담습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신(창 4:5상)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고 평가하는데(히 11:4), 그것을 휴스턴 감독은 ‘탐욕’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이 어땠을까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영화를 보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상상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적인 욕심이 하나님께 바람직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이 지적은 한편의 훌륭한 설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대,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들어야 할 적합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돈을 신으로 섬기며 탐욕을 드러내는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섬기는 진정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의 방법과는 분명하게 달라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삶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과는 다르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돈과 하나님 중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는 당연히 돈 대신 하나님을 고를 것입니다. 이런 약삭빠름을 아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아닌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3. 크리스천, 왜 진정한 삶의 예배를 포기하는가? (영화 <킹 아더>)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년 여름을 보내면서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랜드 사태나 아프간 인질 사태를 통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반감이 어느 정도로 큰지 실감했습니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당연히 우리의 반성도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종교성’을 많이 보였지 일상 속에서 진정한 ‘삶’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원인 분석이 가능합니다.
영향력 있는 말씀 사역을 하는 이재철 목사님이 출판사인 홍성사와 관련된 사업에 관한 수기,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 책의 첫 장을 보면 ‘구두 속의 돌멩이’라는 이범선의 소설 <피해자>의 한 대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최요한은 아버지인 최 장로가 평양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분으로서 자신도 고아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자란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생인 명숙을 사랑해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아버지 최 장로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고아를 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상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요한은 아버지 최 장로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의 소유자로 고아들을 긍휼히 여겨서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고아원을 운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실을 눈치 챈 명숙은 고아원을 나가 도망가고 25 년이 지난 후 술집 마담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작가 이범선은 그 껍데기만의 기독교를 가리켜 ‘구두 속의 돌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돌멩이는 결코 자의로는 꺼낼 수 없기에 일평생 다리를 절고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구두 속의 돌멩이’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못된 돌멩이를 어서 꺼내버리고 활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전설을 그럴 듯하게 할리우드 식으로 각색한 영화 <킹 아더>(안톤 후쿠아 감독)에서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기독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맹한 사마티아 종족 등 용맹한 젊은이들을 모아 15년간 군인으로 복역시키는 로마의 용병대장 아토리우스(아더)는 일곱 명의 용맹한 부하들과 누빈 전장을 회상하며 명예로운 전역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주교는 색슨족이 위협하는 최전선에 있는 로마인 지도자와 그 가족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아토리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최후의 작전을 위해 떠납니다.
아더는 로마와 브리튼의 피가 섞인 로마 군인으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출신 수도사로 5세기 초에 로마에서 인기있는 설교가였던 펠라기우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원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가 들어설 수 없는 합리적 도덕주의로, 은혜보다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를 추종하는 아더는 이 영화에서 다른 어떤 크리스천들보다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전에 앞서서 그가 하는 기도에는 자기가 희생함으로서 부하들을 살리겠다는 리더의 숭고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부하들만이 아니라 전쟁터를 누비는 사람답지 않게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꼈습니다. 색슨족이 추격해올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그들을 보호하면서 위험을 자초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이른바 ‘정통’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탐욕적이고 사악하기조차 합니다. 주교는 교활하고 권위적이며 비열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이 구하러 간 전방 마을의 지도자(그도 아마 주교일 것입니다)는 온 마을 사람들을 쥐어짜 축재하고 이교도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여 죽이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비열한 짓으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고 하다가 브리튼 족 추장의 딸 기네비어가 쏜 화살에 맞아죽었을 때는 아들조차 슬퍼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일상생활에서 보여준 신앙은 그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너무나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주교와 같은 로마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던 신앙은 전혀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생활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모습이야말로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 크리스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전염시키라!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이렇게 크리스천으로서 삶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는 또 하나의 영화가 있습니다. 존 애브넛 감독의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입니다. 1991년에 나왔고 1920년대 미국 남부를 극중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는 이 영화는 참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기도원에 갔을 때 함께 보았는데 이 영화가 너무 좋다고 다시 보자고 해서 제가 아들을 새롭게 볼 정도로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잇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에서 한 우울증에 걸린 여인과 우정을 키워가며 도움을 주는데,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화 끝에 그가 루스(룻)의 친구였던 잇지였음이 밝혀집니다. 어릴 적부터 말썽꾸러기였던 잇지를 잘 돌봐주고 진주조개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상한 오빠의 여자친구가 바로 루스였습니다. 그런데 날아간 루스의 모자를 찾으러 철길로 갔다가 틈새에 빠진 발을 빼지 못한 오빠는 잇지와 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충격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루스는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잇지가 예고 없이 찾아갔다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인 성경 룻기를 오려서 떠나고 싶다는 암시를 담은 편지를 보낸 루스를 잇지가 집안의 남자들을 데리고 가서 데려오는데 루스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지내며 겪는 두 여인의 우정이 아름답습니다.
영화 속에서 잇지는 집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에 올라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루스도 함께 타서 지켜보니 잇지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 곁에서 노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차 안에 있던 음식들을 던져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남의 것을 가지고 선심 쓰는 나쁜 짓이었습니다만 잇지가 말합니다. “이런 일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해낼 수 없어. 교인들은 밤새 기도만 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이후 둘은 함께 살면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전문으로 하는 휫슬스탑 카페를 열었습니다. 그 카페를 묘사하는 한 장면도 멋진 삶의 예배를 잘 보여줍니다. 잇지를 좋아하는 경찰관 그래디가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잇지가 흑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고 알려주었지만 잇지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자유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불의를 참지 못했습니다. 아래에 나오는 이야기는 미국의 크리스천 작가 켄 가이어가 『묵상하는 삶』에서 마치 감격한 듯 길게 기록하는 부분인데 그 부분을 참고해서 소개합니다.
잇지는 뜨내기 노숙자 스모키에게 튀긴 닭과 으깬 감자와 옥수수를 접시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스모키가 손을 떨며 옥수수를 흘리는 모습을 잇지가 보았습니다. 잇지가 미안해하는 스모키에게 산보나 하자며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스모키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잇지가 가지고 나온 위스키 병을 건넵니다. 스모키는 알코올중독으로 그렇게 수전증이 생긴 것을 잇지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숙자 스모키를 감싸고 잇지가 걸으며 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잇지의 죽은 오빠가 어릴 적에 해준 우스갯소리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움푹 팬 땅은 전에는 오리 떼가 노닐고 있던 호수였다는 것입니다. 11월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자 조지아로 가는 오리 떼가 발에 얼어붙은 호수를 붙이고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루스가 잇지와 스모키를 창가에서 지켜보고 감동받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스모키가 식당 창고 헛간에 누워 있습니다. 물론 잇지가 배려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담요를 들고 나타났는데 그녀는 루스였습니다. 루스는 담요를 스모키의 몸에 덮어줍니다. 놀라 깨어난 스모키가 루스에게 축복합니다. “갓 블레스 유.”
교회에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크리스천들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 영화는 이야기해줍니다.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결코 놓치면 안 됩니다. 사람들과 세상을 향한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잇지가 흑인들이나 노숙자 스모키에게 보여준 그 동정심이 결국 루스에게도 아름답게 전염되었습니다.
5. 삶의 예배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특히 직장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볼 때 삶의 예배가 너무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많은 크리스천 직업인들은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드러내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잠수 크리스천’, ‘비밀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인 줄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굳이 크리스천임을 드러내지도 않을뿐더러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와 같이 보수적이고 크리스천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독특한 문화가 있는 일터에서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면 크리스천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요즘 직장인들 중에는 “비밀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명 ‘잠수 크리스천’입니다. 1세기나 2세기 무렵을 살던 우리 신앙 선배들은 박해를 피해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물고기 그림을 그리면서 미로 같은 지하 무덤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는 비밀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릅니다. 함께 한 직장에서 일을 해도 예수 믿는 것을 동료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밝혀지면 행동에 제약을 받고 좀 불편해서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럴 듯한 이유는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좀 믿음이 부족한데,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하고 전혀 구별되지 않고 할 것 다 하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다고 광고를 하고 다니나요? 창피하게.” 그러니 한 직장에서 일하면서 3년이나 지나고 나서 아무개 부장님이 예수 믿는 걸 발견 당합니다. “어, 부장님도 교회 나가셨어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자네도 예수 믿었나?”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에서 종교적인 티를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어떤 교회에 나가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경건한 삶을 사는지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입니다. 한 직장인이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위탁모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입양되어 가는 아이들을 2,3개월 맡아 돌봐주는 일인데 그 말을 듣고 한 직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크리스천은 뭔가 다르시군요.” 그 분은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직장 동료들에게 그런 평가를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삶은 바로 ‘착한 행실’인 것입니다(마 5:16).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종교성, 즉 세상에서 보여주는 교회생활의 흔적을 보고는 전혀 감동받지 않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착한 행실을 보여주면 반응하고 감동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태도에는 우리 크리스천들을 향한 편견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그런 윤리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 속에도 세상에서 높은 윤리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삶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세상과 일터에서 우리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세우면서 삶의 예배를 제대로 드릴 때 우리는 크리스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목숨 거는 자세로 헌신해야 하지만 그 예배로 끝나서는 안 되고 삶 속에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삶의 예배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예배를 실천하는 간증들이 많아져야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난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사역 장소이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향한 삶의 예배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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