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지금이 몇 신데…나 학교 가는 길인데 그 책에 점 다 찍었으면 내놓게!” “아이고, 그리 급한 일이신가요?” “그 책이 전집 중에서 하나 가져온 거라 없어지면 큰일나네. 불안해서 바로 찾아가려는 거야. 점 다 찍었나?” “네, 찍었습니다.” 이 양반이 ‘이 젊은 아이가 어떻게 이런 공부를 했나’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더군요. 한번은 글씨 시간이었어요. 나중에는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서예를 가르쳤는데, 그때는 근원 선생이 서예도 담당하셨죠.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며 글씨를 쓰시는데, 초서(草書)도 있고 전서(篆書)도 있어서 다른 학생들은 모르는 글자가 많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근원 선생께서 갑자기 “서군!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서 자만심 가지면 안 돼. 알았어?”그러시지 뭡니까. “아닙니다, 알긴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무슨 글자라는 것 정도 밖에는….” 학생들이 왜 야단을 치시나 하면서 쳐다봤어요. 그런데 이게 사실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하시는 얘기였죠. 근원 선생은 내가 그림에 눈을 뜨도록 해주셨어요. 동양예술에서 대상을 놓고 그리는 것을 사실(寫實)이라 하고, 대상 밖의 것을 그리는 것을 사의(寫意)라고 하는데, 사의의 정신에 예술의 위대함이 있지요. 사실에서 그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말초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에요. 사의의 정신은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갈 길이 무궁무진한데, 그걸 나한테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근원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 거죠. 근원 선생은 작가로서 창작을 하는 데 가장 소중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네, 내 말 똑똑히 듣게.” “예.” “자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환쟁이가 되고 싶은가, 분명히 말해보게.” “….” “환쟁이가 되고 싶어, 예술가가 되고 싶어? 왜 대답이 없어?” “그야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거야, 환쟁이가 되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얘기를 안 하셨는데, 유독 나한테는 많은 애정을 갖고 얘기해 주셨어요. 내가 근원 선생의 주변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던 게 매우 짧은 기간이었습니다만 그 시간이 짧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선생과 나는 예술에 있어서 깊은 세계를 가지고 만났던 것 같아요. 선생도 나에게 예술의 깊은 세계를 보여주거나 말씀해 주셨고, 나도 여느 학생과는 다르게 그 분의 예술정신이랄까 삶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걸 참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서울대를 그만두신 후에「대한민국미술전람회」-줄여서「국전」이라 불렀죠-가 생겼어요. 제1회「국전」이 1949년에 열렸는데 내가 거기에 출품을 했죠. 그때 나는 근원 선생의 가르침을 곱씹으면서 ‘일본화적인 냄새를 벗어야겠다.’ ‘자유롭게 붓을 써야겠다.’ | | ‘대상을 철저하게 바라보고 그림을 그려야겠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림을 그렸죠. 그렇게 그려서 출품한 것이 <꽃장수>라는 작품입니다. 한 노인이 받쳐 놓은 지게에 꽃을 잔뜩 실은 채 팔고 있고, 그 옆에 젊은 아가씨들이 한복을 입고 꽃을 보면서 사려고 하는 그림이었죠.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어요. 큰 붓을 들고 획을 긋는 연습을 수없이 했어요. 몇 달 동안을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고서 연습을 했죠. 그런데 그 그림이 동양화부 특선으로 뽑혀 국무총리상을 받게 됐습니다. 뜻밖이었죠. 그때 근원 선생이「국전」에 오셨어요. “선생님 오셨습니까? 작품 보시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잘 그렸어. 그런데 신문사에서 나더러 평을 써달라는데, 욕을 실컷 해줄 생각이야.” 나중에 신문에 난 선생님의 평을 보니, 내 그림의 어느 부분은 잘 그렸는데 어느 부분은 실패다. 그런 식으로 쓰셨더군요. 그 다음에 선생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평 쓰신 것 잘 읽었습니다. 많이 공부하겠습니다.” “그건 말야, 자네가 상 받았다고 우쭐댈까 봐 그렇게 쓴 거야. 그림은 좋았어. 거기서 상 받은 학생은 자네밖에 없었다면서?” 그때 선생님의 애정 어린 말씀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 서울대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동국대 사학과에서 근원 선생한테 미술사 강의를 담당해 주십사 초빙을 했어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죠. 근원 선생 하면 여기저기에서 초빙해 가려고 하는 위치에 계셨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1948년에 『근원수필』을 내셨죠. 『근원수필』은 한 번에 쓴 게 아니고 젊어서부터 쓴 것들을 뽑아서 간추려 낸 책입니다. 내가 선생을 알기 전에 쓰신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 후에 쓰신 것도 몇 편 있습니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이 「승가사의 두 고적」입니다.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들과 학생들이 승가사(僧伽寺)에 답사를 간 적이 있어요. 근원 선생, 수화 선생은 물론이고, 손재형 선생, 장발 선생도 갔죠. 승가사 뒤쪽의 마애불(磨崖佛)을 보고 나서, 근원 선생하고 나하고 두세 명 정도가 산을 더 올랐습니다. 산꼭대기에 바위 봉오리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비석이 서 있었어요. 신라 진흥왕(眞興王) 순수비(巡狩碑)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그 경계비를 찾아 올라가 비문을 읽고 그 비석 모서리에 ‘비문 몇 자를 읽을 수 있었다.’ 하는 글을 새겨 놨다는데, 우리가 가서 보니 비문이 마손되어 추사 선생이 읽었던 글자를 못 읽겠더군요. 두 고적을 보고 내려와서 같이 갔던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근원 선생이 마애불과 비석에 대해 강의를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아주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오늘 아주 실망했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하고 같이 왔는데, 몇 사람 외에는 관심도 없고 다들? 노래나 부르고 있으니, 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미술을 어떻게 지켜 나갈 건가!” 그랬던 생각이 나네요. 얼마 후 승가사에 관한 수필을 발표하시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