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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철학의 문제점과 불교의 업사상
남궁선(동국대 박사 수료)
Ⅰ. 서 론
미국의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1962년에 펴낸『침묵의 봄(silent spring)』에 농약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생생하게 고발되면서 과학문명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 울리게 되었다.『침묵의 봄』으로 불을 당기기 시작한 생태운동은 인류중심적인 자연관에 대한 회의와 생태중심의 자연관을 모색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수많은 서적과 논문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생태혁명의 시대”라 한다. 이러한 반문화운동(counter-cultural movement)의 일환으로 생태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생태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철학적 바탕 위에서 태동한 것이 아니고, 생물학의 한 분야로서 시작되었다. 생태철학은 생태계 파괴가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옴에 따라 생태위기의 근원이 되는 문제점을 밝히려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생태위기는 종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지금까지 진행된 종의 소멸 상황을 보면 인간에 의해서 멸종된 생물이 1900년대 초에는 1년에 1종,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까지는 1년에 1000종,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하루에 100~150종씩 연간 4~5만종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20~30년 안에 전체 종의 5분의 1정도, 100년 안에 2분의 1정도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보고는 1972년의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적절한 제동이 걸리지 않고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100년 안에 지구는 파멸될 것이다’라고 이미 경고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심각한 생태위기를 초래하게 한 현대문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것은 서구인들이었고, 또한 이에 대한 대책을 가장 먼저 강구한 것도 서구인들이었다. 따라서 생태문제의 근원에 대한 진단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인 바탕과 사고의 한계에서 도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있는 공통적 학설로 받아들여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생태철학설에 문제점이 없는지 고찰해보고, 발견되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불교의 업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생태위기의 원인 및 해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Ⅱ. 기존 생태철학의 개요 및 문제점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 출현하는 데는 그의 밑받침이 되는 사상적인 연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이 유독 서양을 근원지로 하여 발달한 데는 서양인들이 다른 지역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산업화로 인한 생태위기의 근원도 인간의 어떠한 사고방식에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생태철학이다. 생태철학의 근원지인 서구에 주류로 형성되어 있는 생태철학을 분류는, 마이클 짐머만(Michael Zimmerman)에 따르면 급진적 생태철학(radical ecophilosophy), 보수적 생태철학인 인류중심적 (환경)개량주의와 환경윤리론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급진적 생태학은 다시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으로 나눌 수 있다. 보수적 생태철학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밑바탕에 두고 생태위기의 문제를 과학기술의 진보와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단순한 대증요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급진적 생태철학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태중심적(ecocentric) 차원에서 그 근원을 밝히려는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급진적인 생태학자들 사이에도 생태위기의 근원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 즉 그 근원을 심층생태학자들은 인류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하며, 생태여성주의나 사회생태주의에서는 서구의 전통 속에서 그 근원을 찾으려 한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patriarchy)적인 지배구조가 그 원인이 된다고 강조하고, 사회생태학자들은 사회계층구조(social hierarc hy)를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초창기인 1970년대 초만 해도 심층생태학이 중심이 되어 이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았으나 1980년대 말부터는 이들 사이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3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인류중심적 개량주의는 환경문제의 근원은 인류중심적인 사고나 지배구조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무지, 탐욕, 그리고 근시안적인 사고에 기인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염규제를 강화하고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고 환경교육을 확대하고 미래세대에 대한 현세대의 도덕적 의무가 강조되어야하고 자연의 현명한 이용과 공평한 분배를 추구하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생태철학이라 하면 급진적인 생태철학을 일컫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 사회생태학만을 다루고자 한다.
1. 심층생태학의 이론과 문제점
심층생태학의 시작은 노르웨이의 철학자인 아르네 네스(Arne Naess)가 1972년에 「표층생태운동과 심층적이고 멀리 보는 생태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부터다. 그 논문에서 네스는 심층생태운동의 7가지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후 1984년에 네스와 세션즈(George Sessions)는 15년에 걸친 심층생태운동의 결과를 종합 분석하여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정리된 심층생태이론을 4가지 수준으로 분류하고 제1수준(생태지혜)에서는 궁극적인 전제(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를 말한다. 네스는 스피노자, 간디, 실증철학(logical positivism) 및 노르웨이의 전통적 자연 중심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로부터 도출된 자기의 생태지혜를 ‘생태지혜 T’라 이름 짓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아의 실현(Self-realization)’이라 하였다. 제2수준에서는 행동강령 8가지를 발표하면서 거기에 꽤 상세한 주석까지 덧붙여서 자기들의 견해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제3수준은 제2수준으로부터 일반적인 결론과 사실에 입각한 가설들이 도출된다. 그리고 제4수준에서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도출된다.
그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생태파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원인은 인류중심적인 사고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1)생물권은 평등하며(biocentric egalitarianism), 모든 생물체는 상호연관성이 있고 내재적 가치가 있으므로 인간의 유용성에 의해서 평가받을 수 없다. (2)생물권은 다양성과 공생이 추구되어야 한다. (3)반계급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4)오염과 자원고갈에 대한 투쟁 (5)지방자치와 탈중앙집권화 (6)생명에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고 살며, 경제성장정책의 수정과 삶의 질을 추구 (7)인구의 감소 등을 부르짖고 있다.
심층생태학에서 주장하는 이러한 내용 중에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들은 생태위기의 근원을 인류중심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천 항목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생태계의 다양성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은 각각 다른 종들의 특성에 의해 서로 다른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서 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나 공생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특성을 격하시키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각 종들의 특성이 배제된 다양성은 다양성으로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 종들은 나름대로의 특성에 의해서 그들 중심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양성은 내재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만을 중요시 한다면 내재적 가치간의 충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인간들은 사소한 일상생활도 어려울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생태계의 파괴가 유발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염려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도 인간이다. 그러나 심층생태학자들은 인간의 특성을 무시한 채 생태위기의 근원을 인류중심주의에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을 문명 이전의 시대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을 생태피곤주의에 빠뜨려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서야 할 인간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또한 네스가 주장하고 있는 ‘대아의 실현’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높은 차원의 수행자가 될 때나 실현 가능한 경지이다. 따라서 생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모든 인류가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실현불가능한 대전제를 설정하는 것은 생태문제의 초점을 스스로 흐리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추상적인 표현 때문에 북친과 같은 사회생태학자들한테 신비주의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특징인 이성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이 고려되지 않은 채 실현 불가능한 사항들을 나열하면서 인간을 생태문제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내쫓아 버린 이론이 아닌가 싶다. 생태위기의 문제는 인류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해결될 수 있다고 심층생태에서 주장하지만, 생태문제는 결국 인간이 인간의 사고 한계 내에서 해법을 찾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인간중심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사회생태학의 이론과 문제점
사회생태학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재도 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사회생태학에서는 일종의 생태적 무정부주의(anarchism)를 주장한다. 1982년 저술된 『자유의 생태학』(Ecolgy of Freedom)에서 기원된 사회생태학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생태파괴의 근원은 위계구조(hierarchy)에 있다고 주장을 한다. 사회생태학의 사상적인 배경은 변증법적 자연주의이다. 변증법의 현실관은 발전적 존재관으로 모든 존재(Being)를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되어감(Becoming)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자연주의는 생태적인 사유에 진화론적인 관점을 부여한다. 변증법적인 자연주의는 유한성과 모순을 ‘자연적인 것’으로 즉 사물과 현상들은 발전과정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며 동시에 실체화된 것도 아니란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라 이해한다. 북친은 자연을 1차자연, 2차자연, 자유자연(free nature)으로 나눈다. 협동과 상부상조를 특징으로 하며, 무의지적으로 발전되어 온 자연을 1차자연이라 부른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개입된 자연을 2차자연(문화적 자연, 사회적 자연, 정치적 자연)이라 하며 2차자연이 거의 모든 일차자연을 흡수했다고 본다. 북친은 자연의 내재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란 개념을 구성할 수 있고, 오직 인간만이 이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부여받고 있다. 사실 인간의 내재적 가치란 예외적이고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자유자연은 2차자연에 대한 대안자연으로 2차자연이 유기적인 협력체계로 이행한 결과 1차자연과 2차자연의 고통이 극복된 의식적, 윤리적, 생태적인 사회를 말한다. 즉 사회생태학에서는 자연 진화에서 사회와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에 대한 관점을 포착하여, 사회적인 것은 결코 생태적인 것에서 분리될 수 없고 더 나아가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태문제는 사회문제에서 나온 것이라 진단한다. 생태의 위기는 사회가 생물계에 등장하는 과정의 위기이며 이와 더불어 나타난 지배·위계조직·가부장제계급·그리고 국가의 위기라 주장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서 비롯하며, 인간의 인간에 의한 지배는 위계질서에 의한 지배에 의해 이루지기 때문에 이들의 해체가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사회문제와 생태문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북친의 의견은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모든 생태위기의 원인을 위계조직에 의한 계급적 지배 때문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생태문제는 수많은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계질서 해체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위계질서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제도이다. 어느 누구의 폭력이나 억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제도가 아니다. 만약 인위적인 강압에 의해 생긴 제도라면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두고 존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제도는 인류사회를 합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간이 결정한)사회적인 합의사항인데 마치 사회의 독버섯 같은 존재로만 취급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혐오주의나 인간불신주의(북친이 생태중심주의인 심층생태를 비난하면서 사용한 용어)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위계질서가 산업사회에서 더 강화되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산업사회가 오게 된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 훨씬 이전부터도 사회의 계층구조는 유지되어 왔었다. 만약 위계조직에 의한 지배구조만이 생태문제의 원인이라면 부족사회가 역사에 등장할 당시부터 생태위기문제가 함께 했어야 했다. 위계질서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해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위계질서의 해체는 곧 인간사회의 해체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자연에 대한 지배가 있게 되었다는 주장도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바가 없는 북친의 주장일 뿐이다.
3. 생태여성주의의 이론과 문제점
기존의 여성주의에는 자유주의적 입장(liberal feminism), 마르크스적 입장, 사회주의적 입장, 급진적 입장(radical feminism)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생태여성주의의 출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급진적 여성주의이다. 이 생태여성주의에서는 고대에 근원을 둔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밑바탕이 되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게 했다는 가치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세상을 상호 대립적이고 위계구조적인 서열화 된 사회로 만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기원된 가부장제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의 근원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생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성차별, 위계구조, 호전성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부장 문화를 대체할 여성적 대안문화를 창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문화적 여성주의라고도 하는데, 이를 다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여성만의 특징(출산능력, 여체의 신비로움과 미묘함)으로 인해 여성은 남성의 육체보다 자연에 더 잘 조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성들은 여체가 지닌 신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여체를 남성의 육체보다 열등하다는 가정을 고수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구성주의’로 신체적인 性(sex)과 개념적인 性(gender)은 분명히 다르며 여성 억압의 빌미가 되는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인 차이가 아닌 개념의 차이로, 이것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변용의 결과로 사회적인 구성물이라 주장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생태여성주의의 근원으로서 커다란 기여를 한 문화적 생태여성주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문화적 생태여성주의는 생태위기의 근원은 지배의 논리(logic of domina-
tion)를 신봉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라 한다. 워렌(Warren)에 의하면 이 논리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중구조적인 가치관으로 한 쌍의 가치가 상호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인식의 틀을 가진 가치관이다. 예를 들면 여성-남성, 감정-이성, 육체-정신, 자연-문명 등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계층 구조적 가치관으로 앞의 것이 뒤의 것보다 열등하다 생각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배열하는 인식의 틀을 말한다. 셋째는 우월한 것은 열등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가치판단이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지배논리는 이를 벗어나지 않으며 가부장제하의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도 또한 마찬가지라 한다.
이와 같이 남성의 여성지배와 자연지배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회의 위기의 근원은 서양의 남성중심적인 사회경제체제(가부장적 지배체제)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이론들을 통해 볼 때 발견되는 문제점은 이분법적인 인식의 틀을 자의적으로 만들어서 ‘여성들 스스로가 열등하다’는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감정, 육체, 자연을 여성과 동질화시켜서 그들을 원군으로 만든 후에 여성이 억압당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 이성, 정신, 문명을 동질화하거나 동격화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렇듯이 그들이 설정한 나머지 개념들도 한 덩어리로 묶여서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가부장제도만 해도 여성들을 젖혀 놓고 남성들이 강제적으로 시행한 제도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문명이 현대의 모든 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세계체제’의 확대에 여성이 얼마나 기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 생태여성주의자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극동지역의 전통문화 역시 철저한 가부장제임이 틀림없지만 자연은 정복과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존중과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다른 지역에도 가부장적 체제가 있지만 서양의 가부장제처럼 억압적이고 지배적이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가부장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도 생태위기는 동시대의 동일한 화두인 것이다. 그리고 소비지향적인 문화가 현생태위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현재의 소비주도 세력이 남성인지 아니면 여성과 여성의 보호를 받고 자라는 아이들인지는 쉽게 판단될 수 있는 문제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존 생태철학은 생태위기의 근원을 서양의 인간중심적인 사고, 위계조직으로 구성된 사회체제, 가부장적 지배체제에 있다고 각각 주장한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복잡한 이론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 가지 원인만으로 모든 생태문제가 전개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복잡한 현상을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현 생태위기는 서양과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가진 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생태위기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은 복잡한 원인에 의하여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대안으로 불교교설이 탐구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불교의 교설 가운데서도 심층심리적인 접근과 인간의 행위인 업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을 통해서 종전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중심적이 사고나 사회체제 이외의 다른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도 생태파괴는 자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이유는 인간의 심층 심리적인 문제와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Ⅲ. 불교의 業思想의 생태철학적 적용
1. 불교의 業思想
업이란 짓다(kṛ)를 어원으로 하는 개념으로 범어 karma의 의역으로 일, 작업, 노동, 작용, 업적 행위 등을 의미한다. 즉 업은 유정의 행위나 행위 후 남아있는 잠재적인 힘을 말한다. 이러한 업에 의해 남아있던 세력들이 인이 되어 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구태여 업의 어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어떤 행동을 하면 그에 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누적된 행동이 상승작용을 하여 미래의 과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업사상은 인도 재래의 사상으로 우파니샤드 시대부터 있었다. 우파니샤드 시대의 사상은 有我主義였다. 따라서 현상적인 육체적 我는 멸한다 할지라도, 영혼이나 정신적인 我라 할 수 있는 불멸의 자아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마치 탄환과 같은 불멸의 자아가 있어서, 그것이 업이라는 화약의 폭발력에 의하여 일정한 곳에 송치되며, 다시 그로부터 새로운 화약의 힘에 의하여 또 다른 곳으로 송치된다는 것이 유아주의에 입각한 업과 윤회사상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그와 달리 무아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업을 논하고 윤회를 말한다. 자아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면, 자아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되고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의 모순점을 개선한 것이 불교의 업사상이다. 불교의 모든 교설은 연기설에 근거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상의 상관성이나 상호 의존성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므로, 상주불변의 자아는 성립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나(仮我)는 존재하게 된다. 이를 경전에서 보면 “업보는 있으나 짓는 자는 없다. 이 내가 멸하고 나면 다른 나로 상속된다.”라 하여 고정불변의 我가 있어서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자유 의지나 창조적 노력 등의 衆緣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나는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불교의 업사상은 尊祐化作論, 宿命論, 偶然論을 거부하고 있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로 다양한 미래가 전개될 수 있음을 역설하는 교설이라 할 수 있다.
출가자 위주로 편집된 불교경전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물론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업사상을 고찰해보면 불교에서 결코 사회적 현실을 등한시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일상적인 생활(業)이나 사회생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한 『六方禮經』의 내용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세속적인 생활 즉 사회생활 속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가르침이 바로 업사상인 것이다. 업과 윤회세계에 대한 분석은 그것의 초월이 진정한 목적이지만 세속적으로 보면 업의 교설은 무명으로 시작된 현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답해주는 현실론이라 할 수 있다.
업은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중생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善·惡·無記나 福·非福·不動로 나누고, 행위의 종류에 따라 身·語·意 삼업으로 혹은 이를 더 세분하여 十業로, 업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不共業과 共業으로 나눌 수 있다. 불공업은 다른 유정들과 공통되지 않은 업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결과를 미치는 업이다. 이에 반하여 공업은 다른 유정들과 공통되는 업으로, 모든 중생들이 공유할 器世間의 果를 감응하게 하는 업이다. 그러므로 유정 각각은 자신의 불공업으로 인한 것이고, 器世間은 공업으로 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大毘婆沙論』권134에서는
(문)어째서 일체세계가 함께 무너지지도, 성립되지도 않습니까? (답)모든 유정들의 업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유정들이 이 곳에서 공업이 증장하면 세계가 문득 이루어지고, 공업이 다하면 세계가 문득 무너진다. 또 유정들이 저 곳에서 淨業이 증장하면 이 세계가 문득 무너지고 정업이 줄어든다면 이 세계는 문득 이루어진다.
라 하였으므로, 이 세계가 생성되고 무너지는 것은 중생이 공동으로 짓는 업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유정이라 함은 육도 윤회를 하면서 생사세계를 헤매는 모든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유정의 세계는 과보의 세계이다. 자유 의지에 의한 행위로 업을 짓는 세계는 인간계 밖에 없기 때문에 유정의 업이라면 인간들이 짓는 업을 말하는 것이다. 불공업이 인간의 특징을 이루게 하는 자기 개인적인 업이고, 공업이 기세간을 이루게 하는 업이라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 제도와 문화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공업을 논할 때는 이러한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인간의 행동이 절대적이라면 우리는 생태를 논함에 있어 사회현상을 등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 사회제도적인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생태문제의 발생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태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한 구절로 생태적 苦樂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재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大般涅槃經』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모든 중생들이 현재에 4대와 시절과 토지와 인민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나니, 그러므로 온갖 중생이 모두 과거의 본업만을 인하여 고와 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노라“
라는 『大般涅槃經』「憍陣如品」에서 우리의 즐거움과 고통은 (1)4대로 이루어진 육신(不共業의 결과)의 상태, (2)사회, 정치, 문화 등에 의하여 결정되는 시대적인 상황(共業)인 시절, (3)토지로 대표할 수 있는 기세간(共業의 결과)으로서 자연환경, (4)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행동(不共業으로서의 十業)하는 인민 등의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개인 차원의 선악에 의해서만 고와 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이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생태문제는 인간의 업의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이다. 생태문제가 인간의 업에 의해서 발생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업에 대한 불교적 사유와 고찰을 통해서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고 기존 생태철학적 사유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업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므로 업에 중심을 두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란 연기설에 의해서 도출되는 동체대비사상에 입각한 대자비 정신을 의미하므로, 신의 대리인인 인간이 모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와 다른 것이다.
2. 업 · 과보 · 윤회로 본 생태문제
육도 윤회로 표현되는 세계는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을 말한다. 생사의 세계는 육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시작과 끝의 개념이 아니고 업에 대한 과보의 무한 연속 개념이다.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지은 복이 소멸되고 나면 그 곳에서 물러나야한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과보를 받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는가(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미래를 개척할 수도 있고 내세를 결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업과 과보와 윤회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사상이다. 업에 의해서 과보의 결과로 윤회의 세계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윤회는 또한 업을 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윤회를 통한 내세가 없다면 업이 반영될 과보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常樂我淨의 常存을 의미한다면, 윤회는 생로병사의 무한한 순환의 의미이다. 즉 생사 세계의 무한성이다. 사후, 동물이 된다거나 신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쉴 새 없이 변화 운동해가는 인간 생명의 무한성을 상징적으로 설한 것이다. 생명의 무한성은 우리 행위의 무한성과 그 영향력의 무한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의 업은 他者인 자재천이나 혹은 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은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과정의 출발점인 것이다. 즉 업은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가 전개되어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윤회사상은 시간적인 과보의 개념이다. 유정세간과 기세간이 단멸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까닭은 유정이 항상 새로운 업을 지으면서 그것이 새로운 인과관계를 형성하여 유전 상속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설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신이 되어 천상에 태어나거나,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짐승은 과거의 인간일 수 있다. 따라서 나와는 뿌리가 같은 공업중생이므로 착취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가 보호해야 할 또 다른 나다. 따라서 미래의 인간도 오늘의 나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세간(지구)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내가 공유해야 할 터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간만을 위해서 이 세상이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지구의 자원은 현세대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현세대만을 위한 일회용품이 아니라는 것을 윤회사상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생태철학은 이런 시간적인 관념과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업사상의 의의는 언젠가는 과보를 받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의 불공업과 공업의 결과는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업력이 과보를 불러 오는 시기에 따라서 定業과 不定業으로 나눌 수 있다. 과보를 받는 시기가 확실한 것을 정업이라 하고, 확실하지 못한 것을 부정업이라 한다. 정업은 세력이 강성한 업으로 이에는 順現業, 順生業, 順後業이 있다. 순현업은 현생에 지은 업으로 현생에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순생업은 현생에 업을 짓고 과보는 다음 생에 받는 것을 말한다. 순후업은 현생에 업을 지은 과보를 차후생에 받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개 업력의 강약에 의하여 결정된다. 부정업에는 현생에 업을 지었으나 과보를 받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구체적 표현으로는 順不定受業이라고 부르며, 정업과 같이 강성한 세력의 업이 아니다. 이에는 과보는 정해져 있으나 받을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報定時不定과 과보와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報時俱不定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가하는 우리행위는 강약의 정도에 따라서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을 지라도 언젠가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 생태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생태철학에서는 과보의 시간적인 개념이 배제된 채 논의되고 있다.
3. 업의 주체와 결과론적 생태문제
이러한 윤회는 업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업을 있게 하는 그 체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中阿含經』권27, 達梵行經에 “무엇이 업을 아는 것 입니까? 두 가지 업이 있으니 思業과 思已業 이것이 업을 아는 것이다.라 한 것을 보면, 업의 발생은 의지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俱舍論』13권에도 일체 업은 오직 뜻으로 출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즉 思는 意에 의해서 일어나므로 意業이라 한다. 이에 의하여 보면 의업이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두 가지 업이 사업과 사이업이라 하므로 업도의 주체는 마음인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3업으로 분류하면 정신적인 업인 意業과, 육체적인 업인 語業, 身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 『중아함경 』권32에서는
“나는 의업이 가장 중하다고 시설한다. 의업은 악업을 행하지도 않게 하고, 짓지도 않게 한다. 신업과 구업은 그렇지 않다.”
라 하여 자유의지를 뜻하는 의업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모든 업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업사상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에 따라서 이 세상이 펼쳐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이 펼쳐지는 모습이 달라질 수 있음을 업사상은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생각이란 개인의 숙업과 경험, 사회적 제도나 문화환경에 크게 좌우되므로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야기된 생태문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업에 대하여『中阿含經』3권, 思經에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에는 貪伺와 嫉恚와 邪見이 있다 한다.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위 세 가지와 같은 의미로 貪瞋癡 三毒心으로 설해진 경우도 많다. 사견은 인과와 도덕을 부정하는 견해이므로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癡와 같은 뜻이다. 貪과 瞋의 근원은 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잘못된 행위의 근원은 어리석음(癡)에 있다 할 것이다. 환경이 오염되고, 기상 이변이 일어나고 생물들이 멸종되는 근본원인은 인간들이 현대 산업문명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푹 젖어서 그 부작용의 폐해에는 눈을 돌리려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마치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 정신 팔려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어린이와 같은 것이 현대인의 모습인 것 이다. 그러나 기존의 생태철학에서는 생태위기의 근원을 말하면서 심층심리적 접근이 결여되어 아쉬운 점이 있다.
생태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生態盲이라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생태장님은 다른 종류의 장님과는 아주 다른 특징이 있다. 장님은 빛을, 색맹은 색깔을, 문맹은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른다. 그렇지만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이 피해를 받을 뿐 남들에게 별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태맹은 자기도 피해를 입지만 남에게도 반드시 피해를 주게 된다. 그리고 생태맹은 형태가 다양하다. 자기가 생태맹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설혹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변명을 한다. 생태문제는 도덕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경제논리로 해결해버린다. 그러나 다행히 생태맹은 불치병은 아니다.
身口意 3업 중에서 의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불교 업사상의 핵심이다. 따라서 고의로 짓지 않은 업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경전에 설해져 있다. 그러나『中阿含經』권3, 思經에 ‘만약 고의로 업을 지었다면 나는 그 사람이 그 과보를 현세에 받거나 후세에 꼭 받는다고 말한다. 만약 고의로 업을 짓지 않았다면 이런 사람은 꼭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니다.’라 한 것을 보면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반드시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한 것으로 보아 불교의 업사상은 원칙적으로는 동기를 중요시하면서도 상당 부분 결과론을 포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에서 동기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四分律』권55의 調部之一와 권56의 調部之二에도 마찬가지로 의도와 동기 없이 행한 행위는 계율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론을 포용하는 경을 보면 『中阿含經』권3, 羅云經에 보면
‘나는 장차 몸의 업을 지으려 한다. 그 몸의 업은 깨끗하다. 그러나 혹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거든 라훌라야, 너는 마땅히 그 장차 지으려는 몸의 업을 버려야 한다. ···· 나는 현재 몸의 업을 짓는다. 이 몸의 업은 깨끗하지 못하다. 그러나 혹은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그것은 선하여 즐거움의 결과를 주고 즐거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알거든 라훌라야, 너는 마땅히 이 현재에 짓는 몸의 업을 받아야 하느니라.
라 하여 결과론을 중요시함을 알 수 있다. 또 賢愚經』권10, 「兒誤殺父品」의 내용 중에 실수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들에 대해 부처님은 악의가 없이 벌어진 아들의 행위에 대하여 꾸짖지 않으시면서 과거세에도 그들 사이에는 부자관계가 뒤바뀌어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려주면서 그 때에도 그들 사이에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고의가 아닌 업이라도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의업인 탐진치를 가장 중시한다. 이것은 탐과 진에 의해 유도되는 의도적인 악한 의지를 경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리석음(癡)은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할 근원이 되므로 이를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태적으로 보면 일단 소멸된 種은 복구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종의 소멸을 가져오는 인간의 행위는 선악의 동기와 관계없이 피해야 할 어리석은 행위이다. 따라서 생태학적 입장으로 본 업사상에서는 동기의 순수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결과론 중심적인 사고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4. 十業의 생태학적 해석
불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짓는 죄업은『阿毘達磨大毘婆沙論』권 제112에 의하면, 생각으로 짓는 의업인 貪瞋癡, 입으로 짓는 口業인 妄語, 兩舌, 惡口, 綺語, 몸으로 짓는 업인 살생, 투도(不與取), 사음 등 열 가지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가운데서 의업이 가장 중요하므로 탐·진·치 三毒心만 없애면 생태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높은 수행차원에서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탐진치 삼독은 중생들이 속세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하위 차원에서 구업과 신업을 닦는 것도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상황에 따라서 개념의 변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十業 중에 口業과 身業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들 개념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불공업차원은 물론이고 사회 문화적인 공업 차원에서 사고의 틀이 바뀔 때 더 큰 영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신업 중에서 살생과 투도에 대한 개념을 생태학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살생의 개념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개체의 생명의 죽음을 유발하는 행위에 국한시키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종의 소멸을 유발하는 무의식적 행위까지 확대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이후로 인류의 행위에 의해 가해지는 과도한 교란에 생물의 종들이 멸종되어 종의 다양성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조류의 11%, 유관속 식물의 12.5%, 파충류의 20%, 양서류와 포유류의 25%, 어류의 34%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불요불급의 행위 중에는 결과적으로 생물의 멸종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인 오염물질 배출행위나 남획, 서식지 파괴행위는 살생의 개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偸盜의 개념도 달라져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지구의 모든 자원은 현재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들에 의해서 가격이 책정될 수 있는 기준이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현세대의 지구인들은 임의로 가격을 정해서 매매를 하고 있다. 경제 논리로 부유한 사람은 얼마를 써도 괜찮다는 도덕적 무감각 논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미래 세대가 사용할 자원에 대한 탈취행위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현 세대에서 통용되고 있는 경제논리로 자원을 과소비하는 것은 자원의 고갈 및 환경의 오염에 직결되는 일이며 미래의 나에 대한 자학증이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생태적인 사유로 투도의 개념이 전환되어야 되리라고 본다.
구업에 대한 해석도 생태적 시각에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비 충동을 자극하는 말로 과소비를 유도하는 언어행위는 생태적 구업이다.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에 대하여 궁상을 떤다고 표현하거나 수전노나 자린고비와 같은 단어를 동원하여 상대방이 수치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언어적인 행위는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구업 중의 악구에 해당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꽃이라는 광고 산업은 현대 산업사회의 총아이다. 그러나 생태사회에서 본 광고 산업은 전혀 원치 않는데도 태어난 사생아와 같은 산업이다. 좋지 않은 상품을 좋은 상품으로 속이는 선전을 한다. 끝없는 매출 증가로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기수 겸 나팔수로써 역할을 하는 광고 산업은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口業 중의 망어를 범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十業은 하나하나가 공업으로 축적되어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갈 자연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사유를 갖는 것이 생태적 의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생태학에서는 이러한 행위와 생태문제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결 론
생태문제의 근본원인을 주장하는 생태철학의 학설 중 심층생태학은 그 문제의 원인이 ‘인류중심적인 사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사유체계와 실천 강령은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생태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느낌이다. 사회생태학은 생태위기의 모든 근원을 위계질서에 의한 계급적 지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들은 위계조직이 주원인으로 작용하여 복잡한 전개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생태 위기의 상황으로 나타났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현상이든 한 가지 요인만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요인들이 서로 인이 되고 연이 되어서 나타난 결과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존속되는 한 위계질서는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태학이 주장하는 위계질서의 해체는 생태문제의 해법에 긍정적인 대안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생태여성주의는 모든 생태위기의 근원을 가부장제적 지배논리를 가진 사회구조와 남성들에게서 찾고 있다. 모든 생태문제의 책임을 사회체제와 남성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여성들은 생태문제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마치 가부장제만 해체되면 생태적 이상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존 생태철학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 속에 그의 한 방법으로 불교의 업설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대반열반경의 가르침처럼 인간에게 고락을 주는 모든 것은 복합적인 원인이 있으므로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근원도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共業은 기세간을 형성하는 업이므로 공업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제도와 시대적인 사고의 흐름은 중요한 개념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업사상을 생태문제에 적용시켜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생태위기의 근원은 貪瞋癡 삼독심이며 이 중에서도 癡가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입장에서는 이의 단멸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을 고쳐야 한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 업사상을 적용해보면, 윤회사상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생명체들은 연속선상의 동일체적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해법을 위해서 윤회사상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태 문제의 또 다른 해법으로는 十業에 대한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 행위 중에 생태적 사고의 도입이 필요하다. 업의 과보가 확정되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온다는 업사상의 이론을 통하여, 자연에 가한 우리의 업이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결과로 나타난다는 생태적 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생태계의 다양성은 동식물의 갖가지 종들에 의하여 유지되므로 종의 소멸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생태문제에서는 업의 동기 뿐 결과론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모든 생태문제는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의 업이 서로 主伴이 되어 공업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생태문제는 복합적으로 아니라 다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