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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에세이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
홍일표(시인)
신현정 시인
죽어서도 살아 있는 그는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육체는 이미 흙이 되었겠다. 양평 소나무숲의 솔새 한 마리 되었겠다. 그가 남긴 몇 권의 시집이 내 곁에 가까이 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몸이다. 생전 그는 무명의 시인이었지만 유명한 시인이었다. 동료 시인들이 이런저런 감투를 쓰고 행세를 할 때 그는 변방에 홀로 있었고, 발 빠른 시인들이 언론의 잦은 조명을 받을 때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인이었다. 주위 시인들이 번갈아 가며 곗돈 타듯 문학상을 받고 있을 때 그는 늘 열외였다. 그래서 그는 유명했다. 아는 이들은 안다. 그가 얼마나 고독하게 시와 더불어 살아왔는지를. 제자도 든든한 동료도 없었지만 그의 시가 금강석 같이 오래 빛날 거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우리는 그의 이름을 ‘신현정’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 신현정 시집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가 있었다. 그의 유고시집을 내기 위해 부인 이정휘 여사와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지만 모두 거절당한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세계사>에서 시집을 내주어 간신히 빛을 보게 되었다. 『화창한 날』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10년 1주기 행사를 출판문화회관에서 가졌고, 많은 시인들이 참석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어느덧 10년 너머 저쪽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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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에서 신현정 시인의 ‘사루비아’에 대한 단평을 읽었다. 이영광 시인이 쓴 글을 읽으면서 10년 전 일들이 떠올랐다. ‘사루비아’는 신현정 시인이 작고 직전 『현대문학』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인데 대구에서 급히 문병 온 문인수 시인이 침대 옆에 앉아 낭송하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었다.
숨을 놓기 며칠 전 객혈 중에도 링게르병에 소주를 넣어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하면서 특유의 웃음을 짓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그도 사람인지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법도 한데 옆에서 보기에 그는 이미 죽음 밖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특별한 학연이나 지연도 없고, 이렇다 할 제자도 없는 그의 시가 작고한 지 10년이 되는 지금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호명되고 있는 것은 신현정의 시에 대한 가장 정직한 평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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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이 된다면 「신현정시인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싶다. 상금이 수천만 원이나 되는 크고 화려한 문학상이 아닌 아주 소박하고 조촐한 상을 제정하여 문단의 무명시인에게 건네고 싶다. 좋은 시를 쓰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주목받지 못하고 변방에 있는 시인들이 있다. 김종삼, 박용래가 그랬듯이 당대에 조명을 받지 못하고, 쓸쓸한 생애로 일관한 시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작은 위로의 꽃다발을 전하고 싶다. 그때 꽃은 꼭 야생의 들꽃이었으면 좋겠다.
주부 S
초등학교 때부터 뭐 하나 잘 하는 게 없었어요. 늘 뒤처져 있었어요. 공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운동회 때 달리기도 항상 꼴찌였어요. 소풍 가서 남들 다 찾는 보물찾기에서도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구요.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서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어요. 부모님은 다행히 그런 저를 윽박지르거나 야단치는 일은 없었어요. 없었던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던 거죠. 두 분이 시장에서 식당을 하셨는데 새벽에 나가서 밤 12시 다 되어 집에 오셨어요. 얼굴 보기가 힘들었어요. 졸업식 때도 저 혼자였구요. 부모님이 한 번도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랬어요. 직장 생활을 하다가 친척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부모님은 시댁이 큰 부자라고 엄청 좋아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어요. 예전에 잘 살긴 했었지만 그건 오래전 일이더라구요. 막상 결혼하니 아무 것도 없었어요.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남편 월급만 갖고 살아요. 늘 쪼들려요. 다른 집 아이들은 영어, 수영, 피아노, 태권도 등 다 가르치는데 저는 엄두도 못 내요. 친구들 sns 보면 아이들도 잘 키우고, 살림도 잘하고, 여행도 자주 다니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저만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 같아서 많이 우울해요. 다들 잘 사는데 모든 게 뒤처져서 나만 불행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앞으로 잘 살 것 같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구요. 박봉인 남편 월급으로는 꿈을 꿀 수가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대출 상담을 위해 은행에 갔다가 비치된 잡지를 보게 됐어요. 거기에 ‘뒤처진 새’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더라구요. 저는 시를 모르는데, 그 시를 읽다가 가슴이 울컥했어요. 꼭 제 얘기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남들과 발맞추지 못하고 뒤처져 사는 제 모습이 거기 있더라구요. 눈물이 나면서도 위안이 됐어요. 경험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거였어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라이너 쿤체 「뒤처진 새」
노숙자
서울역에서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30여 분 정도 시간이 남아 대합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담배 한 대만 얻을 수 있을까요?”
고개를 들어보니 꾀죄죄한 행색의 노숙자였다. 시커멓게 때가 전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웁니다.”
그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고린내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수수한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즘은 담배 안 피우는 사람들이 많네요.”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듬지 않은 콧수염이 지저분해 보였다. 숨 쉴 때마다 밖으로 삐져나온 코털이 흔들렸다.
“고갱이 증권거래소에 다니던 시절에는 여유가 있었어요. 다섯 명의 자녀들과 함께 여유롭게 살았죠. 그러나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실직했고, 서른다섯 살 때부터 전업화가로 나섰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어요. 얼마 전에 고갱의 그림이 3,000억에 팔렸지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노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도 한때 잘 나갔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홍대 앞에서 미술학원을 시작했어요. 수강생만 80여 명이나 돼서 보조강사까지 두고 했어요. 아내는 옆 건물에서 논술학원을 했구요. 돈 버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일했어요. 하루는 대학 동기가 찾아와서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일단 투자만 하면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했어요.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갖고 있던 돈과 은행 대출금을 포함해서 10억을 투자했어요. 대학 동기고 고향 친구 놈이라 무조건 믿었지요. 첫 달에 수익금이라며 천만 원을 주더라구요. 그러면서 5억만 더 투자하면 매달 2천만 원씩 배당이 되고, 1년 후에는 투자금 전액을 돌려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을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후로 연락이 끊어졌어요. 아무리 수소문해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내가 단단히 미쳤던 것 같아요. 결국 이혼을 당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게 된 거죠. 이젠 돌아갈 곳이 없어요. 아내와 아이들한테 제일 미안하구요.”
그가 고갱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타이티에 머물다가 파리로 왔지만 좌절과 절망 끝에 고갱은 다시 타이티로 돌아갔다. 고갱이 꿈꾸던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꿈도 무산되었다. 1901년 마르키즈 제도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던 고갱은 1903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갱에게는 걸작이 남았지만 노숙자인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새카만 손을 내밀었다.
“소주 한 병값만 주실래요? 제가 아침도 못 먹었거든요.”
이경림 시인
가끔 선배 시인들의 시를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적잖은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감각의 예리한 날로 세계와 존재의 안팎을 꿰뚫고 있는 작품을 볼 때마다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대부분 나이가 들면 긴장도가 떨어지고 이완된 시적 정서로 반복과 안주를 거듭하기 마련인데 몇몇 분들은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10년 후 나도 저런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봐라, 신은 텅 비었다”(이시가와 신전에서)고 말하면서 “수 세기의 마루에 내려앉은 늙은 햇빛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 여든을 앞둔 분이지만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탄탄한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 시인의 이름을 이경림이라고 부른다. 그는 뒷전에서 곰방대나 두들기고 있는 뒷방 노인이 아니라 왕성한 현역으로 우리 옆에 있는 이상하고 신비한 매력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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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에 나온 시집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읽는 내내 “역시!”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문예중앙시선으로 나온 이경림 시집 『상자들』이다. 한번 읽고 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게 되는 시집들이 대부분인데 이경림 시집은 매번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세월이 흘러도 변색 되지 않고, 감동의 강도가 여전한 시집이다. 그만큼 내구력이 강하고, 시간의 폭력을 견디는 힘이 있다. 좋은 시집이 갖는 특징이 그렇듯 이경림 시집은 단명하지 않고, 당대를 넘어 문학사의 장으로 편입되어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 한때 반짝 빛을 발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4쇄, 5쇄를 찍던 시집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아우라가 사라지고 감동도 예전 같지 않은 경우를 자주 보는데 이경림 시집은 특별한 예외의 지점에 있다.
남노송동 K
그는 전주에 산다. 몇 년 전에 덕진공원을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제 몇 달 만에 통화가 되었다. 다리가 골절되어 입원 중이라고 했다. 병원 생활이 무료하여 여기저기 전화 중이라고 했다. 아내가 가출하여 아들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 그는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다리 골절도 술 탓이 아닌가 싶었다. 시내에서 작은 화장품 가게를 하던 그의 아내는 지난해 문자 하나 남기고 사라졌다. 멀리 가니 찾지 말라는 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내연남이 있었다고 했다. 인근의 상인들이 증언한 바로는 수시로 젊은 남자가 가게에 들락거려서 연하의 남편쯤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한동안 술에 빠져 살았다. 툭하면 전화하여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는 말을 이어갔다. 어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형님,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요.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어요. 가정도 파탄이 났고, 학교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됐구요.”
“그래도 교수로서 나름 성과를 내고 있잖아. 그동안 출간하여 주목받은 저서들도 여러 권 있고 ---”
“형님, 그거 다 헛짓한 거예요. 개뿔, 제가 무슨 교숩니까? 무늬만 교수예요. 비정년트랙 무기계약직이라 2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해요. 언제 잘릴지도 모른다구요. 정년트랙교수와는 대우 자체가 달라요. 연봉도 70%도 안 되고, 정교수는 아예 꿈도 못 꿉니다.”
“대학이 갈수록 꼼수를 쓰는군.”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저희 대학 교양학부는 모두 비정년트랙으로 채울 것 같아요. 희망이 없어요. 매년 강의 평가, 연구 실적에 대한 압박도 크구요. 대학에서는 재정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아들놈이 대학 입학하면 자연인이나 될까 봐요.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서 책 읽고 글이나 쓰면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친척 결혼식이 있어 전주에 내려가니 그 날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임교원이 되어 축하한다고 난까지 보내준 적이 있는데 비정년트랙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만나면 그의 말을 들어줄 귀 하나를 더 준비해야될 것 같았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시집 『우리는 어딨지?』가 있으며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등을 펴냈다. 지리산문학상,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시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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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습함을 물리칠 문장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