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6. 왜적(倭賊)의 방화(放火)도 비껴간 박팽년 사당
560년 내력의 묘골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많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묘골의 스토리는 소설이나 영화처럼 대단히 드라마틱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묘골 스토리의 가짓수는 몇 개쯤이나 될까? 필자가 대충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것만 골라도 거의 50꼭지 이상은 될 것 같다.
‘다양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묘골의 스토리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필자가 묘골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묘골 이야기를 수집하게 되었으며, 묘골 이야기를 정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이번에도 박팽년 선생의 사당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귀신 없단 소리 못한다, 묘골 육신사’에서 사당 이야기를 이미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 역시 만만치가 않다. 마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나 나올법한 ‘사찰·암자’ 전설 같기 때문이다.
1. 서인(西人)의 거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조선시대에 ‘윤두수(尹斗壽)[1533-1601]’와 ‘윤두서(尹斗緖)[1668-1715]’라는 인물이 있었다. 윤두수는 해평 윤씨로 호는 오음(吾陰)인데 선조 때 재상을 역임한 서인의 거두였다. 반면 윤두서는 해남 윤씨로 호는 공재(恭齋)이며 숙종 때 문인화가로 이름이 난 인물이었다. 사실 이 두 인물은 이름 때문에 좀 헷갈리기는 한다. 어쨌든 윤두수는 임란 때 선조(宣祖)의 몽진(蒙塵)을 호종했던 거물급 정치인이요, 윤두서는 ‘윤두서의 자화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문인화가이다.
2015년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懲毖錄)」에서 윤두수는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와 맹활약을 했다. 그는 임란 직전까지는 잦은 파직·복직·유배 상태에 있다가, 임란 직후에 선조에 의해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어영대장·좌의정·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젊은 시절에는 성수침과 이황의 문인이었으나, 1575년[선조 8] 을해당론(乙亥黨論)에 의해 조선이 동·서로 분당될 때 서인 측에 가담했다. 이후 성혼·송익필·정철 등과 함께 서인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채 보름도 안 되어 선조는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평양·의주 등지로 몽진을 했다. 이때 윤두수는 어영대장·우의정·좌의정 등의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했다. 임란 초기 전황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조정 내부에서는 선조의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윤두수는 선조의 말고삐를 부여잡고 ‘이는 한갓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목숨을 내놓고 선조의 망명길을 막은 일이 있었다. 또한 함흥으로의 몽진은 위험하다며 선조를 의주로 피난시킨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함흥은 왜적에 의해 함락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는 동·서 분당에 따른 당쟁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런 만큼 당시의 인물을 평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임진왜란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윤두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류성룡 ≒ 이순신’, ‘윤두수 ≒ 원균’
2. 태고정에 남아 있는 윤두수의 시 한 편
지금으로부터 약 540년 전인 1479년[성종 10], 박팽년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손자 박일산에 의해 이곳 묘골에 99칸 묘골 박씨 종택이 지어졌다. 그러나 이때의 종택은 임진·정유 양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고 만다. 그런데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던 것일까? 선생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만큼은 병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사당 이야기가 지금까지 묘골 박씨 문중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거의 전설 수준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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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묘골은 왜적에 의해 큰 화를 당했다. 당시 박팽년의 5세손인 부총관공 박충후는 무과 출신이었는데, 그의 두 딸은 왜적을 피해 구봉산 탁대 위에서 낙동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한편 박충후의 동생 소학 박충서 역시 무과 출신의 무인이었다. 고향인 묘골에서 항쟁을 펼치던 그는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선조인 박팽년의 사당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를 본 왜적은 그를 잡기 위해 사당의 기둥에 도끼질을 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도끼는 번번이 기둥을 찍지 못하고 왜적의 다리를 찍었다고 한다. 그러자 왜적이 이번에는 사당에 방화를 하였는데 이내 하늘에서 뇌성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져 불을 껐다. 이에 왜적은 두려움을 느껴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 틈을 타 박충서는 탈출할 수 있었고, 수하의 병사 수십 명을 이끌고 인근의 마천령에서 왜적을 물리치니 적들이 다시는 묘골에 범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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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병화(兵禍)도 피해간 묘골 박팽년 선생 사당에 얽힌 스토리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사찰이나 암자의 전설을 보면 이와 거의 유사한 스토리가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박팽년 선생 사당 스토리가 과연 진짜일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묘골의 박팽년 선생 사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한 유명 인물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증하는 ‘인증샷’을 태고정(太古亭) 마루에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태고정은 현재 묘골 육신사 경내에 있는 정자로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는 묘골 순천 박씨 99칸 종택에 딸린 부속정자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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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후인가백부존(亂後人家百不存) 난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 남지 않았는데
수간사우의산근(數間祠宇倚山根) 두어 칸의 사당이 산기슭에 서 있네
신명자시창천우(神明自是蒼天佑) 신명도 감동하여 하늘도 도와주시니
노화하능진묘혼(虜火何能震廟魂) 오랑캐의 불이 어찌 사당의 혼을 두렵게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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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오음 윤두수의 시로서 현재 육신사 태고정 대청에 시판(詩板)으로 제작되어 게시되어 있다. 윤두수는 임진·정유 양란이 모두 평정된 후, 이곳 묘골을 방문하여 박팽년 선생의 사당을 직접 봉심(奉審)[예를 표하고 살핌]한 적이 있었다. 이 시는 그 당시 윤두수가 사당에 남아 있던 왜적의 도끼 자국과 방화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참고로 윤두수의 선대는 박팽년 선생과 인척관계에 있었는데 박팽년 선생의 동생인 박대년의 부인이 윤두수의 증대고모였다.

태고정 대청에 걸려 있는 오음 윤두수의 시 ‘난후인가백부존’

오음유고 권2. 붉은 표시 안에 ‘난후인가백부존’으로 시작되는 시가 보인다.
[출전: 한국고전종합DB]

박팽년 선생의 초서 천자문 맨 마지막 장에 첨부되어 있는
윤두수의 시 「난후인가백부존」
3. 해장재(海藏齋) 신석우(申錫愚)도 보았다네
윤두수가 선생의 사당을 찾아 봉심을 하고 시를 남긴 것은 임란 직후였다. 그로부터 다시 250여 년이 지난 1857년[철종 8], 또 한 명의 유명인이 박팽년 선생의 사당을 찾았다. 그 역시 사당 기둥에 남아 있는 도끼 자국과 불탄 흔적을 돌아본 후, 위 윤두수의 시에 대한 차운시를 한 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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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류사묘백년존(天留祠廟百年存) 하늘이 사당을 유지케 하여 백년을 보존하고
우죽연계호수근(虞竹連階護數根) 우죽이 섬돌에 이어져 사당을 지켰도다.
검결염소신혁혁(劒缺炎消神赫赫) 칼 이지러지고 불 꺼지니 신명은 밝아
각영포구치여혼(却令逋寇褫餘魂) 도리어 도망치는 왜적의 혼마저 빼앗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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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남긴 이는 해장재(海藏齋) 신석우(申錫愚)[1805-1865]로, 그가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에 남긴 것이다. 그는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신으로 주로 헌종·철종 조에서 활약했다. 조선 실학파의 계승자로도 알려진 그는 ‘이조참판·한성부 좌윤·경상도 관찰사·대사헌·형조판서·예조판서·사은 겸 동지정사’ 등의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고종 때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받았다. 참고로 그의 행적에 있어 경상도와 관련해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경상도 관찰사[1855-1857]로 있었던 1856년[철종 7] 경상도에 큰 재해가 발생하자, 철종에게 건의하여 피재전(被災田) 10,000결을 허락받아 경상도 백성을 구제한 일이다. 참고로 신석우의 이 차운시도 현재 묘골 태고정 대청에 시판으로 제작되어 게시되어 있다.

태고정 대청에 걸려 있는 해장재 신석우의 시판
4. 에필로그
현재 묘골에는 위 두 시의 소재가 된 박팽년 선생의 사당은 남아 있지 않다. 선생의 종택과 함께 불천위(不遷位) 사우(祠宇)[충북 기념물 제27호]의 형태로 현재 충주시 신니면에 있기 때문이다. 역대 묘골 박씨 종손들의 묘소 위치를 참고해볼 때, 아마도 종택이 먼저 충주로 옮겨가고 뒤에 사당이 옮겨진 것 같다. 왜냐하면 역대 종손들 중에서 충주에 묘소를 쓴 이는 박팽년 선생의 9대 종손인 박경여(朴慶餘)[1651-1715]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가 졸한 해인 1715년은 숙종 41년이다. 반면 위에서 살펴본 신석우의 시를 참고하면 묘골의 사당은 1857년[철종 8]까지도 묘골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어느 때인가 묘골의 사당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그 사당이 어떤 사당이었던가.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병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당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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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묘(家廟)의 변고(變故)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가승(家乘)에 실어서 후세(後世)에 전(傳)할 일이나 기록(記錄)은 없고 흔적(痕迹)만 있을 뿐이나 세월이 경과(經過)한 뒤에 이 시(詩)만은 증거(證據)가 될 것이다. 총관공(摠管公)이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에 승서(陞敍)되고 판관공(判官公) 또한 군공(軍功)으로 진무위원종일등훈(振武衛原從一等勳)에 올랐다. 난(亂)이 평정(平定)되매 옛 터에 정자를 고쳐지어 광해(光海) 갑인(甲寅)[1614]년에 준공(竣工)하였다.
순천박씨충정공파보 권지1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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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늘~~평안 하십시요..
고맙습니다.
어...
오랜만이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