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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당에서 열린 국화축제, ‘범국회’ (1)
프롤로그
‘황금 빛 국화의 반란이 시작되다’
2006년 ‘황후화’란 중국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Curse Of The Golden Flower’. 어떻게 ‘Curse Of The Golden Flower’가 ‘황후화’로 번역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냥 ‘황국黃菊[황금빛 국화]의 저주’로 번역했다. 주윤발·공리·주걸륜 같은 유명배우로도 유명했지만 엄청난 스케일과 막대한 제작비로도 한때 이슈가 됐던 영화다. 중국 당나라 말기를 시대 배경으로 중양절 축제일 벌어지는 당나라 황제와 황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다룬 영화다.
당나라는 서기 618년부터 907년까지 존재했던 중국 통일왕조다. 당나라 말기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1,200년 전 쯤 된다. 당나라 황실에서도 즐겼다는 중양절 축제. 그 축제의 중심에 황금빛 국화 ‘황국’이 있었다.
술잔에 황금 빛 국화를 띄우다, ‘범국회’
‘범국泛菊’은 글자 그대로 국화주에 국화를 띄운다는 뜻이다. 이는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 중구일·범국신이라고도 한다] 세시풍속이자, 국화밭에서 국화주를 마셨다는 중국 시인 도연명[365-427] 고사에 연원한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였다. 범국회에서는 국화잎을 띄운 국화주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국화를 소재로 한 여러 형태의 행사가 겸해졌기 때문이다.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국화주를 마시거나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황화범주黃花泛酒’,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짓는 ‘시주詩酒’ 등이 있었다.
범국회 실제 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용산 범국회’라는 것이 있다. 이는 1636년[인조 14] 9월 9일, 동계 정온, 오계 조정립, 임곡 임진부 등 5개 고을 19명의 선비들이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용산마을 낙모대에서 결성한 범국회다. 하지만 1641년 정온이 세상을 떠나자 범국회는 중단됐다. 그로부터 2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조선 후기 고종 때, 용산 범국회 일원의 한 후손에 의해 용산 범국회 관련 기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후손들은 다시 계를 결성, 낙모대에 기념비를 세우고, 관련 기록물인 용산범국회록을 만들고,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용산 범국회를 계승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옛 글에 나타난 ‘범국’
범국 관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일성록·개인 문집 등에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국화는 예로부터 은자隱者[재주를 숨긴 채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시골에 사는 사람]의 덕을 갖췄다 해서 세상을 피해 물러난 선비들이 가까이 한 꽃이었다. 또 국화는 수확과 풍요의 계절인 가을에 피는 꽃이라 많은 이들이 가을이 되면 국화를 가까이 두고 가을을 만끽했다. 옛 선비들이 국화를 즐기는 방법 중 가장 멋스러웠던 것은 국화를 띄운 국화주를 마시면서 시를 짓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범국은 옛 글 중에서도 주로 시에서 많이 나타난다. 과연 옛 사람들에게 있어 범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옛 글에 나타난 범국을 통해 그 옛날 범국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한 번 가늠해보기로 하자.
먼저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범국 사례 몇 가지를 알아보자.
기로耆老 재추宰樞들이 어제 이미 술을 마셨으나 금일 나도 또한 경들과 더불어 범국하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6년 경진 9월 10일]
세조 6년[1460] 음력 9월 10일 기사다. 하루 전날인 9월 9일 중양절. 조정에서 고관과 원로들이 범국회를 열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세조는 참석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루 지난 9월 10일 세조가 그들과 함께 범국회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기로’는 나이 많은 원로, ‘재추’는 2품 이상 벼슬아치를 말한다. 다른 사례도 한 번 보자.
왕세자가 바야흐로 심제心制 중에 있었는데 작년 중양重陽에 장원서에서 범국을 춘방春坊에 올리므로 물리쳐 보내기를 명했고··· [조선왕조실록 숙종 29년 계미 1월 7일]
심제는 전통상례에 있어 대상과 담제 사이에 입었던 상복이며, 춘방은 세자교육을 담당했던 부서다. 왕세자가 상례기간 중이었는데 중양절이라고 장원서에서 춘방에 국화를 띄운 국화주를 올렸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상중에 술을 올렸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숙종이 범국을 물리쳐 보냈다는 내용이다.
9월에 치렀어야 할 과시課試는 ‘국화를 띄우다.[泛菊]’로 칠언율시의 시제를 삼았는데, 부사정 이홍달이 삼하로 수석을 차지하였다. [일성록 정조 17년 계축 11월 3일]
위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과 더불어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관찬사료 중 하나인 일성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과시는 문신 관료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치던 시험이다. 1793년(정조 17) 9월, 시를 짓는 시험에서 시 제목으로 ‘범국’이 주어졌고, 이 시험에서 이홍달이 수석을 차지했다는 내용이다.
황국이 때를 앞당겨서 피어 / 黃菊趁前期
벌써 동쪽 울타리에 가득하건만 / 已滿東籬
함께 앉아 금잔에 띄울 사람 없더니 / 無人也與泛金巵
다행히 시 친구 찾아왔기에 / 賴有詩朋來見訪
간소한 주연에 시름이 풀리누나 / 小酌開眉
그 옛날 소년 시절엔 / 伊昔少年時
술에 취해 꽃가지 꽂고 / 醉揷芳枝
미친 듯 노래하고 춤추며 업신여김도 아랑곳없었지 / 狂歌亂舞任人欺
지나간 일 곰곰이 생각하니 슬프기만 하며 / 往事追思袛自悵
꿈만 같기도 하네 / 似夢疑非
[동국이상국후집 제5권]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 이규보의 사詞다. 중구일[중양절]에 심심하고 무료하던 차에 때마침 친구 노동년이 찾아와 범국을 하면서 느낀 감회를 읊은 것이다.
누가 이 늙은이 방문하랴 / 誰訊堂中華髮老
아직도 문 밖에 백의인 없었는데 / 尙無門外白衣人
공의 초대 받아 함께 즐기며 마시니 / 賴公喚與開歡飮
올해는 국화 띄운 때 저버림을 면했네 / 免負今年泛菊辰
[동국이상국후집 제6권]
역시 이규보의 시다. 이 시는 중구일 박 상공으로부터 범국에 초대 받은 이규보가 국화주를 마시면서 즉석에서 마치 달음질 하듯 빠르게 지어 박 상공에게 바친 시다. ‘백의인’[흰 옷 입은 사람]은 술을 가져온 하인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특별히 도연명 관련한 고사가 있다.
은자의 삶을 살던 시인 도연명이 한 번은 9월 9일 중양절이 되었는데 자신의 집 술독에 술이 떨어졌다. 술 생각이 간절하던 도연명. 때마침 도연명 집 사립문 앞에 흰 옷차림에 술병을 든 한 심부름꾼이 나타났다. 평소 알고 지내던 강주 자사 왕홍이 중양절에 맞춰 술을 좋아하는 도연명에게 술을 보낸 것이었다.
여타 옛 선비들 문집에 나타난 시 몇 편만 더 감상해보자.
○ 중양절에 술잔 위에 국화 송이를 띄우다[重陽泛菊酒杯] [동명집 제2권]
중양절의 가을 되자 국화 떨기들 / 菊到重陽節
여기저기 꽃망울을 막 터뜨리네 / 花開或不開
금년에는 가을 윤달 들어 있거니 / 今秋有閏月
금술잔에 국화 송이 흠씬 띄우리 / 爛熳泛金杯
○ 진사 이개립의 양졸당 팔경 [송암집 속집 제5권]
서리 온 뒤 온갖 꽃보다 뒤늦게 국화가 피니 / 霜下孤芳殿百花
꽃잎 먹는 것이 노을 먹는 것보다 좋구나 / 餐英眞是勝餐霞
하인은 어찌하여 청주국을 가지고 와서 / 白衣幾帶靑州信
동쪽 울타리의 많은 흥취보다 좋게 하였나 / 惹作東籬勝致多
[위는 국화주를 마시는 작은 동산 ‘小園泛菊’을 읊은 것이다]
○ 9월 15일 밤에 유항이 술 마시자고 부르기에 달을 마주하며 국화꽃을 잔에 띄우다. [목은시고 제30권]
중구일 같기도 하고 중추절 같기도 하고 / 如重九又似中秋
국화 띄운 술잔 속에 달그림자 흐르누나 / 泛菊杯深月影流
아스라이 못 위에 떠 있는 황금 물결이요 / 渺渺金波浮池面
둥그렇게 가지 끝에 가득한 옥 이슬이라 / 團團玉露滿枝頭
형체를 잊으려면 열 섬의 술쯤은 있어야 / 忘形政籍千鍾酒
한껏 바라보려면 백 자 누각에 기대야지 / 極目聊憑百尺樓
예로부터 시절 따라 광음을 아꼈나니 / 自古隨時愛□□
늙어서도 고인의 병촉유에 마음 끌려 / 老來猶欲古人游
○ 구일에 용천 미곶 마을에 있으면서[九日在龍川彌串村] [상촌선생집 제17권]
구일까지도 나그네 신세 되어 / 九日長爲客
무심코 술잔에 국화 띄워 보네 / 無心泛菊盃
타향이 이리도 쓸쓸할까 / 殊方正搖落
망향대엘랑 오르지 말자꾸나 / 莫上望鄕臺
○ 순부에게 부치다. [용재집 제4권 조천록]
남산에 자리한 청학동 / 終南靑鶴洞
그 빼어난 곳이 그대의 집이지 / 勝處是君家
미리 중양절 술잔을 잡노니 / 預把重陽酒
서로 만나면 국화 띄워 마시세 / 相逢泛菊花
○ 관물당에서 우연히 읊조리다 [약포집 제1권]
앞에는 연꽃이요, 뒤에는 대나무 숲 / 前有蓮兮後有竹
중간에 높은 누각 티끌 없이 맑구나 / 中間高閣淨無塵
내가 와서 바라봄에 맑은 흥취도 많으니 / 我來臨眺多淸興
국화주를 마시는 구월의 상순이네 / 泛菊九秋之上旬
○ 늦가을 국화 띄워 쇄사 박희립을 보내며 [금계집 외집 제6권]
이슬 맺힌 황국을 따서 / 露摘黃金菊
향기로운 백옥 같은 막걸리 기울이네 / 香傾白玉醪
늦가을에 멀리서 온 손님 맞아 / 殘秋逢遠客
세한의 사귐 맺고자 하네 / 要結歲寒交
○ 삼가 원릉을 배알하고 운자를 뽑아 배향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연구체를 채워 이루게 하니, 이 해 이 달에 선왕을 감모하는 회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홍재전서 제6권]
객사의 접대 줄이어 도시락밥 가져다 먹고 / 廚傳供減持苞飯
제육 향기는 국화 띄운 술잔에 나누어졌네 / 宮胙香分泛菊醅
[이상은 신臣 남공철이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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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범국회 관련 인용문은 모두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의 시·전傳·설·서書 등을 수록한 시문집.
○ 17세기 조선 유학자인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1597-1673]의 시문집.
○ 고려 말 목은 이색[1328-1396]의 문집.
○ 조선 중기 문신인 상촌 신흠[1566-1628]의 문집.
○ 조선조 연산·중종 연간의 문호 용재 이행[1478-1534]의 시문집.
○ 조선 중기 문신 약포 정탁[1526-1605]의 문집.
○ 조선 전기 문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시문집.
○ 조선 제22대 국왕인 정조[1752~1800]의 시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