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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0:6-42:6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찬송: 3, 27, 73장 교독문: 시 74:12-23
욥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욥이 제기한 것인데, 현재를 사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하나님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신분을 가진 것인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고난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고 계시는 것 같은 의문 때문이다. 여기에 어떤 전제조건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결코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돌보셔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강한 불만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늘 갈등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 과연 성도의 모습인 것인가, 왜 하나님은 나에게 다가오는 이런 고난을 해결해주시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여 자신의 신앙하는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욥기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지만, 욥기는 사실 성도에게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공의, 질서와 보존에 대해 말씀하시며, 피조세계의 모든 지역과 그 안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돌보시는 전능하시며 선하신 분이라고 욥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욥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이 피조세계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욥이 원하는 대답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욥의 불만족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분일 것이다.
욥이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욥은 자신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 절대 고난을 받으면 안 되는데, 마치 죄가 있는 것처럼 왜 고난을 당하게 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신 것은 아니냐는 불평을 입으로 토해 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제 두 번째 대답을 주신다. 이 대답을 들은 욥은 42:6에서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쩌면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기 때문에 욥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답을 주셨기에 욥이 만족하고,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일까?
여기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먼저 40:6-14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설명하시기 위한 전제 작업을 시작하신다. 특히 8절을 보면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고 욥을 나무라듯이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로 가득 차 있음에 대하여 인정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에 대해 언급을 시작하신다. 14절을 보면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선언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파괴, 즉 심판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에 대하여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로 드시는 40:15-41:34의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로 베헤못은 하마요, 리워야단은 악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여기에 우리의 의문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짐승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 짐승들의 신체적 특징뿐이다. 이 특징들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어떤 의미일까? 욥은 여기에서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는데, 사실 그가 들은 것은 베헤못과 리워야단 두 짐승에 대한 묘사뿐이다. 과연 욥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 두 짐승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까?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을 고난 가운데 던져 넣으셨다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욥은 이 두 짐승으로 인해 자신의 오해를 풀었는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욥은 주눅이 든 것 같은 느낌이다. 베헤못이나 리워야단 같은 강한 짐승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기 때문에, 욥은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에 회개해야만 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잘못된 해석인 것 같다. 그렇다면 베헤못이나 리워야단은 하마나 악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에 나오는 두 짐승은 전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베헤못을 하마로, 리워야단을 악어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지금까지 많은 주석가들이 가졌던 해석 방법이었다. 물론 본문에서 언급하는 두 짐승의 특징은 하마와 악어를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정확히 닮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마가 아니다, 악어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어색하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욥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난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는가에 대한 부분으로, 계속하여 욥이 제기한 질문이었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행동을 했는데, 왜 하나님은 자신에게 고난을 주셨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욥이 주장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번째로 이 세상의 통치 방식은 당신의 질서를 따라 진행된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언급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로우신 통치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 이 두 짐승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가에 있다. 이 두 짐승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굳이 다룰 필요는 없고, 다만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해석으로 바로 들어가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하여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해석할 때, 이 짐승들은 실제로 피조되어 눈에 보이는 어떤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대상인 초자연적인 혼돈과 악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악이 언제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지에 대해 성경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추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떻게 사탄이 타락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하도록 허락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타락 이후 이 세상은 혼돈과 악이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인생은 이 혼돈과 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마와 악어처럼 묘사되고 있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 혼돈과 악이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초자연적인 혼돈과 악을 사람이 감히 통제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가르침을 의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혼돈과 악을 어떤 큰 짐승으로 묘사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성경에서도 리워야단에 대해 언급하는 몇 구절을 살펴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고대 근동의 문화가 성경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만 욥이 이런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신화적인 짐승들을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일 뿐이다. 베헤못은 땅의 혼돈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요, 리워야단은 머리가 일곱 달린 바다 괴물로 묘사되는 신화의 짐승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될 때에는 혼돈과 악을 일으키는 초자연적 생명체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는 존재로 언급이 된다.
욥 3:8을 보면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이라고 욥이 말하는데, 이는 욥에게 리워야단의 묘사가 익숙했음을 가르쳐준다. 사 27:1을 보면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이란 묘사가 있는데, 하나님은 이 리워야단을 벌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대적에 대한 패배를 이루실 것임과 동시에 이보다 더 큰 대적의 더 큰 패배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 74:13-14을 보면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출애굽 사건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 74:12-17 본문 전체를 보면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 이후 포로로 끌려 갔다가 귀환한 후에 하나님께서 더 큰 승리를 주신다는 약속으로 해석이 된다. 따라서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이 베헤못(여기에서만 나오지만)과 리워야단이 가진 상징성은 현재의 고난에 대한 해결을 넘어서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욥기 본문을 보아도 이러한 부분이 나오는데, 40:19의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는 구절과 41:8의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는 구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베헤못과 리워야단과 직접 싸우시며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을 가져오는 혼돈과 악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욥이 제기했던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행위에 대한 방어가 되며,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 질서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이 유지된다. 그리고 욥이 가지고 있었던 질문, 즉 자신은 의로운데 왜 고난을 겪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된다. 이 세상에 혼돈과 악이 존재하는데, 이로 인하여 욥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잘못으로 인해 욥을 심판하신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욥은 계속 친구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응보의 원리를 따라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죄가 있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고난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이 공격이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지금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의로움이 유지되었음이 증명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음에 대해 만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욥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에 대한 부분만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혼돈과 악으로 인한 성도의 현재의 해결되지 않은 고난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고난 받는 것을 참으로 싫어한다.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고난도 받지 않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고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난은 여전히 있으며, 혼돈과 악으로 인한 슬픔과 아픔과 힘든 일들은 누구에게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기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조건으로 시작하는데, 우리가 불평하는 바는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의 고난을 빨리 해결해주셔야만 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욥과 대화하시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당신의 선하신 방식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은 나의 관심 대상이 아니고, 이 문제만 빨리 해결해주시라는 강요를 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바는 간단하다. 왜 신앙을 갖고 사는가? 왜 하나님을 믿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라. 욥은 자신의 고난 자체에 집중하지 않았다. 물론 고통이 너무 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끝내주시기를 간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의로움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왜 배우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들려주면 그것이 좋은 설교요, 좋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나의 행위를 믿을 뿐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우리의 열심을 요구하며,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것이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고난을 제거해 주신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응보의 원리인 것이다. 잘하면 복이요 못하면 고난이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 이전에 욥의 친구들이 계속 말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우리의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충분히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으며, 무고한 자도 끔찍한 고난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난은 무조건 죄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지금 욥에게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길게 설명하고 계시는 것은 사실 혼돈과 악에 대한 능력을 칭찬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욥의 대적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욥이 어떤 처지를 있는가를 충분히 이해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 40-41장의 말씀은 성도의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괴롭히는 이 악의 세력을 언젠가 무찌르시고, 우리의 고난을 해결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앞의 첫 번째 담화에서 하나님의 통치, 질서, 선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말씀하신 후에, 두 번째로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말씀하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동일한 통제 아래 있으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움에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지금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두 짐승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한다. 모든 고난을 일으키는 혼돈과 악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리심을 받으며 질서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고난이 없는 삶을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욥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지혜인 것이다. 이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현실의 삶에서 자신감을 갖게 하며,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여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즉 아직은 혼돈과 악이 이 세상에 만연되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이 사실로 힘을 얻어 고난을 견디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욥이 생각한 세상은 해결받지 못하는 고난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러운 곳, 회개하고 순종할 때에만 복을 누리는 곳이라고 이 세상을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보실 때 이 세상은 당신의 피조세계로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담의 타락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고 혼돈과 악이 만연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앞에 이 괴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 괴물을 통제하시고 즐겁게 이 혼돈과 악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욥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3절을 보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답변은 욥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만 욥이 알아야 할 것만 알려주셨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했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나님의 통치하시고 다스리심의 오묘함에 대하여 인생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잘못이다.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셨을까, 그 악으로 인해 왜 이 땅에 고난이 오게 하셨는가, 그러한 고난은 어떤 이유에서 우리에게 오는가, 등등 우리가 답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신다. 우리는 이 답을 욥기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바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을 통제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고난을 넘어선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도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고난은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에 대해 경외와 신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고, 욥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42:2-6의 고백을 하며 회개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성도의 신앙은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어떤 조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를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욥기를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시며, 보호하시고, 선하심으로 대하시며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자 되시며, 성도에게 소망을 허락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