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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이 그녀를 살펴보니, 고려처자들이나 당나라 여인들과는 색다른 품위를 보이고 있었는데, 가히 절세가녀라 할만 했다. 화장술로 새롭게 꾸며서인지는 모르나, 엊그제 사냥터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면모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는 여전히, 고려처자들이 즐겨 입는 흰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니, 또 뵙다니?”
그녀의 부친 이진영이 놀라 묻자 고승이 며칠 전 일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닌가봅니다. 허허허.”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린 후 곁에 앉은 삼십대 중반의 건장한 장정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나의 처남이고 현재 귀성주歸誠州 자사刺史인데 내 손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귀성주는 일종의 기미주羈縻州(당나라 국경지대 또는 국경 밖의 지역에 사는 이민족 집단의 거주지로서, 당나라가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자신의 통치지역에 포함시킨 곳)로서 당나라 변경의 거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손만영孫萬榮이라고 합니다.”
그가 자기 이름을 댔다. 손만영은 거란의 한 부족의 부족장이었던 손오조孫敖曹의 증손이다<신구당서>.
“이대인은 정말 호랑이 같은 장수를 두셨소. 한 나라를 보필할 만한 빼어난 영웅인 것 같소.”
고승이 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마지막으로 이진영은 동행한 젊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저의 조부를 모시던 시위대장侍衛隊長이었는데, 이 아이가 참으로 용맹하고 무예가 출중한데다 총명하기 짝이 없어, 저도 이 소년을 내 머리 지키는 자로 삼고 있습니다.”
청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진영을 바라보다가 좌중에게 겸손히 인사했다.
“이해고李楷固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굵고 힘이 있었다.
‘이해고? 거란팔부八部의 모든 무예를 평정했다는 천하고수 이해고와 동명이인인가?’
거란팔부는 거란 민족의 전 부족들을 의미한다.
조영은 속으로 궁금해 하며 그의 자태를 살펴보니,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더 들어 보이고 얼굴이 용맹하며 씩씩하고 준수하게 생긴데다, 두 눈이 번갯불처럼 번득이는 게, 깊은 내공內功을 쌓은 것 같았다. 조영은 그의 섬광 같은 눈빛과 마주치자 심장이 약간 설레며 어떤 위압감을 느꼈다.
그는 그제 사냥터에서 만난, 보라매를 어깨에 앉히고 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고승이 그를 추켜세웠다.
“오, 영웅의 기상이 있군요. 귀공은 무슨 무예를 익혔는고?”
“예, 창술과 올가미 던지기를 좀 배웠으나 천학비재라 어르신들의 뜻에 몹시 미달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상위에 푸짐하고 풍성한 음식이 차려지고 즐거운 담소가 오갔다.
“제가 대인을 초청한 것은, 이국에서 적적하게 지내는 이 몸이 평소 대인을 흠모하고 또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은 제 손주 녀석의 생일이기도 하죠. 이 아이의 어미는 오래 전에 죽고 아비는 난리(고구려 멸망) 전에 고려 변경을 지키는 장수였는데, 아마 아시겠지만, 지금은 저 동북지방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 녀석이 좋은 색시라도 얻어 우리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소.”
이렇게 말하며 고승은 이루하를 흘끗 바라다보았다.
“무슨 말씀을요? 대인께서는 원래 고려의 왕족이 아니신가요? 게다가 이곳의 고관대작들이 앞 다투어 대인께 줄을 대려고 하는 것은, 모두 대인의 탁월한 학식과 명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송막도독 이진영은 고승의 말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그저 고려거사高麗居士 고승을 은근히 치켜세우기만 했다.
“다 지나간 옛날 일입니다. 이제는 망해버린 나라의 한낱 유랑객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 황실은 고승의 학식과 명망을 아껴 그를 조정에 초빙하고자 애썼으나, 지금까지 고승은 고사해왔다.
고승은 형형한 눈빛으로 이진영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 늙은이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대인 같은 천고의 인물을 제가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천행이고 감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손주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송막도독 이진영은 들어오면서 조영을 보는 순간부터 바람 앞의 촛불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위 장수 이해고를 자신의 딸 이루하의 사윗감으로 일찍부터 점찍어두었었다.
하지만, 고승의 은근한 칭찬과 부탁을 받자, 아까부터 고조영의 영묘한 풍채에 남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그는, 고조영과 이해고 사이에서 마음이 오락가락하며 자신도 모르게 두 젊은이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대인께서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소중한 부탁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손令孫을 잘 키우셨습니다. 제가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힘이 닿는 한 곁에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조영의 후견인이 되어주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 변변한 친인척 하나 없는 조영으로서나 그의 조부 고승으로서나 아주 반가운 말이다.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제 저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승은 이진영에게 사의를 표하고 조영에게 말했다.
“영아야, 내가 이 세상을 떠나거든 너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평안할 때나 언제든 이대인께 너의 일을 여쭙고 중대사는 반드시 이대인과 상의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조영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젊은 장수 이해고는 눈빛이 몇 차례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해고는 심성이 굳은 장부답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음식 먹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이루하는, 두 볼이 약간 발갛게 상기된 채 역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는데 열중하고 있었으나 가끔씩 눈을 들어 조영과 이해고를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식후에 다과를 나눌 때, 송막도독 이진영이 가볍게 물었다.
“요새 젊은이들 가운데는 정말 쓸 만한 인재가 별로 없는데, 오늘 저는 저의 시위장 이해고 외에, 또 하나의 놀라운 재목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젊은이는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제가 늙은 몸으로 직접 몇 가지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는데, 스승이 몹시 우둔한지라, 아이도 영 신통찮습니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제가 사람 볼 줄 아는 눈은 좀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가슴 속 포부가 대단히 큰 것 같고 또 깊은 학문과 무예를 감추어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조영의 얼굴을 한 차례 쓱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고려 용사들의 기이한 무예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는데, 어렵지 않다면, 저도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고려의 무예를 보고 안목이라도 좀 넓히고 싶습니다. 대인, 괜찮을런지요?”
이진영은 고조영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은근히 알고 싶었다. 자신의 시위장 이해고와 견줄 수 있는지도 궁금했고, 또 그의 말처럼 고구려 무사들의 전통 무예도 보고 싶었다.
중원中原 무림武林에서 신창神槍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이해고는, 거란팔부契丹八部(거란의 전 부족) 무예대회에서 약관의 나이에 혜성처럼 나타나 긴 창 한 자루로 뭇 군웅들을 제압한, 고수 중 고수다. 특히 그의 비삭술飛索術은 천하의 전설적인 신기神技 비술秘術로서, 일찍이 피해 벗어난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해고의 명성을 들은 장강남북長江南北의 숱한 고수들이 그에게 도전해왔으나, 그의 창날 아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자는, 그의 비삭飛索 올가미에 걸려 굴욕을 당해야 했다.
조영도 예전에 거란팔부의 전설적인 무예영웅 이해고의 얘기를 들은 바가 있었으나, 어제와 오늘 눈앞에 본 이 새파란 젊은이가 그 유명한 이해고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괜찮다마다요? 조영아, 너의 무예를 이 분들 앞에서 선보여줄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 고승이 속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네, 할아버지. 부끄럽지만, 고려 무사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조영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좌중은 따스한 봄볕이 내리 쬐는 연무장으로 나왔다.
고승과 후고구려 조정의 사자들, 이진영, 손만영, 이해고, 이루하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조영은 검을 잡고 마당에 섰다.
이해고는 무예 고수답게, 엊그제 사냥터에서 보여준 거만한 자세와는 아주 다른, 매우 진중하고 겸허한 태도로 조영의 무예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 이루하는 아름다운 눈망울을 크게 뜨고 조영의 모든 동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약간은 살 시린 이른 봄의 바람이 살랑거리고 한낮의 태양 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환꽃나무와 모란에 둘러싸인 아늑한 고가장의 정원 연무장에는, 모란화가 얼굴을 내밀기 전, 환꽃은 언제 나올지 모르고 아직 꼭꼭 숨어 있을 때, 화려한 검 꽃이 피기 시작했다.
조영의 동작은 처음에 매우 느렸으나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검과 몸은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기 시작했는데, 그의 신체 전체도 연무장 주위를 강강술래 하듯 둥글게 질주했다. 때로는 그의 몸이 삼태극의 방향으로 이리저리 돌기도 했다.
이것은 오래 전 다물 임금이 완성하신, 팔괘검법의 묘미였다. 다물 임금의 <행심록>을 통해 팔괘검학八卦劍學 절예를 습득한 대부여 해모수 임금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삼극三極팔괘무예를 창시해 후세에 전했는데, 그 중의 검법을 삼극팔괘검학이라 했다.
삼극팔괘검은 팔괘검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으나, 한 가지 차별 면은, 검법의 운용에서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 일컫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 하나님의 기운을 더욱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전의 다양한 난관에서 쉽게 응용할 수 있도록 수백 가지의 상황에 맞춘, 실용절학絶學이 가미되어 있었다.
조영의 검법이 점점 무르익고 화려 영묘한 춤을 선보이고 있을 때다. 고승이 뒤에 서 있는 하인에게 눈짓하자,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대금大笒을 가지고 나와 고승에게 공손히 바쳤다.
고승은 조영의 연무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대목에 이르자, 대금을 입으로 가져갔다. 때 아닌 대금성大笒聲이 봄바람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조영의 검법 시연 도중 갑자기 대금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주위의 군웅들은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대금의 가락은 차츰 높아졌다 낮아졌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맑아졌다 탁해졌다, 굵고 강렬해졌다 가늘고 미세해졌다를 반복하고, 이에 따라 조영의 검법도 역시 완속경중緩速輕重이 달라지곤 했다.
조영의 몸은 마치 대금의 소리를 타고 솟아오르는 가랑잎처럼 하늘로 솟구치는가 하면, 죽적 음향이 저음으로 흐를 때는, 그의 몸과 검이 육중한 무게로 바다를 헤엄쳐가는 듯했다. 대나무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칠 때면 조영의 검과 몸도 맹렬하게 회리바람을 만들며 한바탕 솟아오르곤 했다.
몸과 검, 대금성의 이 절묘한 조화를 난생 처음 구경한 거란인들은 손에 식은땀을 쥐고 악기 연주를 감상하랴, 검술에 몰두하랴, 넋을 빠뜨리고 있었다.
거란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동북지방의 동모성東牟城에서 온 후고구려국 사자들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대금성과 검술의 합주는 고승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는 조영에게 검술과 대금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대금성의 흐름에 팔괘검의 연무를 맞출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둘을 병합하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럴 경우, 검의 움직임이 대금성을 맞추거나 대금성이 검의 동작을 따라야 하는데, 만약 검술의 수법이 대금성을 좇게 되면, 검법의 흐름이 일정한 박자에 따라 나타나므로, 이건 검법이라 보기 어렵고, 일종의 검무劍舞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금의 소리가 박자를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마치 검술처럼 허공에 드날리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송막도독 거란인 이진영이 자세히 청음聽音하고 관찰해보니, 처음에는 악기 소리가 검술의 시연에 장단고저를 맞추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조영의 검법이 음악성에 따라 장단 고저 강약 완속을 달리하는 것 같았다.
검법과 대금연주의 이 아름다운 예술을 감상하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이진영 일행은, 대금소리가 잦아들고 조영의 검법 시연이 끝나자 한동안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다음 순간 우레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긴 시간이 지나고 검법 시연이 끝났을 때, 조영의 얼굴은 가볍게 상기되어 있었으나, 숨은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거란고수 이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영의 검법을 칭찬했다.
“고형高兄의 무예는 내가 이 땅에 들어와 처음 보는 신기였소.”
“이 동생의 잔재주를 그토록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영이 겸허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이루하가 이해고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조영 공자님은 무예도 얼굴만큼이나 기개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것 같아요.”
이루하의 어투는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아 머리를 어지럽히는 우회적 표현이 아니었으며, 갓 피어오른 꽃봉오리의 수줍음이 전혀 없이, 남성처럼 허심탄회하고 곧은 검처럼 직설적이었다.
이해고가 이루하를 돌아보며 다소 언짢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저는 실로 오늘 하늘이 높고 땅이 넓은 줄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고승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이 장군은 매우 겸손하군요. 우리 조영이가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자만할까 두렵소. 내친 김에 이 장군이 인구에 회자되는 신기를 한 수 보여주면 어떻겠소?”
고승은 이렇게 말한 후 얼굴을 돌려 이진영의 동의를 구했다.
“이 대인, 두 귀가 울리도록 들어오던 신창 이해고 공자의 비술이 몹시 궁금합니다.”
“하하하! 조영 공자의 신기만 구경하고 해고의 기예를 선보이지 않는다면, 큰 실례가 될 것입니다. 아무렴요.”
그가 이해고에게 눈짓하자 해고는 기다렸다는 듯 마당으로 나섰다. 하인이 그의 무기인 장창을 가져왔다.
이해고가 크게 기합을 지르며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과연 조영은 그토록 창을 자유자재로 잘 쓰는 이를 본 적이 없었는지라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해고의 창은 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대단한 위력이 있어 보였다.
이해고가 몸을 날리거나 두 발로 땅을 구르면 마치 호랑이가 날뛰고 사자가 울부짖는 것처럼 바람이 크게 일고 지면이 요동했다. 그도 역시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창술 기예를 보였는데, 숨이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고 자세가 호리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영이 몹시 궁금하게 여기던 오라비술飛術은 이해고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연무가 끝나자 일동은 요란한 박수로 이해고의 무예를 칭찬했다. 조영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사람들이 이해고, 이해고 해서, 도대체 신창 이해고가 누굴까 하며, 신창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내 평생 오늘에야 이런 신기를 구경하다니, 이李형의 무예를 보지 못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가 우물 밖으로 나온 느낌입니다.”
조영은 진심을 담아 그를 치켜세웠다.
“과찬이오, 과찬이오.”
이해고가 흡족한 얼굴로 사례했다.
이루하도 진심으로 그를 높여주었다.
“이 장군의 창술은 우리 백성들뿐만 아니라 대강大江 남북의 화인華人(중국인) 무술가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기애애한 얘기가 오가고 삼월의 춘풍은 점점 따스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그 때 한 하인이 달려오더니 고승 앞에 와서 아뢰었다.
“나리, 바깥에 귀한 손님이 당도하셨습니다.”
“오, 그래?”
고승은 잠깐 양해를 구한 후 일어나 직접 대문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고승이, 한인漢人 복장에 나이가 오십 여세 쯤 되어 보이는, 한 군자풍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의 뒤에는 몇 명의 수행원이 따르고 있었다.
그의 긴 수염과 옷자락이 봄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고승의 인도를 받아 점잖은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 건물을 돌고, 몇 개의 건물을 더 지난 다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진영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영주도독營州都督 조趙 대인이 아니십니까?”
이진영은, 영주도독과도 친분을 맺고 있는 고승의 넓은 교유관계에 속으로 놀라 마지않았다.
“그렇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제가 좀 늦었소이다. 양해해주시기 바라오. 제 눈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귀공은 송막도독 이 대인이 맞죠?”
“네, 그렇습니다. 조대인의 풍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진영은 송막도독으로서 관등 직위가 영주도독과 동등했으나, 그는 당나라에 귀속한 거란인의 후예에 불과했고 영주도독은 한인이었다. 더구나 거란인들이 사는 송막지역은 당시 당나라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거란인들의 명목상 수장 송막도독 이진영은 영주도독 앞에서 심적으로 많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송막도독인 이진영 일가와 그의 주거지, 그의 신원은 영주지역을 통치하는 영주도독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가 거란족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조처였다. 따라서 국가의 벼슬은 양자가 동등했으나, 사실상은 둘 사이에서 모종의 상하관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조 대인, 식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고승이 물었다.
“아, 도중에 간단히 하고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가 감사를 표하며 상석에 앉았을 때 고승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심심파적으로 지금 젊은이들의 무예를 구경하며 옛날 혈기 방장하던 시절 강산을 떠돌던 추억 속으로 잠깐 상념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좋은 구경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오, 그랬군요. 아깝습니다.”
그가 고조영과 이해고, 이루하 등 젊은이들의 얼굴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젊은이들이 차례로 그에게 인사했다.
“내 이럴 줄 알고 쓸 만한 무사 하나를 데려왔습니다.”
그는 수행원들 가운데 스물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건장한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친구의 무예도 알아줄 만합니다. 대인들께서 흥이 있으시다면, 그가 시연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좌중의 인물들을 훑어보다가 고려인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고승에게 물었다.
“이 분들은······?”
“아, 제가 미처 소개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멀리 후고구려 땅에서 온 저의 종친들입니다.”
그들이 영주도독 조문홰에게 인사하자 고승이 한어로 통역했다.
계성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오고 있는 고승과 조영은, 후고구려 사자들의 신상을 조문홰에게 알릴 수 없었다. 물론 고승이 당나라에 투항한 고구려 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송막도독 거란 사람 이진영은 고승과 조영의 구체적인 신분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이루하 역시, 그녀의 부친 이진영으로부터 고승, 고조영 조손祖孫이 후고구려 고중상과 가까운 친척이라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전 날 사냥터에서 이루하가 조영의 이름의 의미를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도 실은, 그의 신분을 부친 이진영으로부터 들어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승은, 후고구려 땅에서 온 사자들의 정체를 숨긴 채 그들을 대충 소개한 후 말했다.
“실은 오늘 두 분 대인을 모신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서로 화해협력하며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친선을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승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 나이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가 사는 이곳에서 한인들과 우리 삼한三韓의 백성인 고려, 백제, 신라인, 그리고 거란인, 말갈인, 돌궐인, 해인 등등이 충돌 없이 우호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제가 죽기 전 하늘이 제게 맡기신 저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승은 앞의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덧붙였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의 수령들께서 서로 우의를 돈독히 다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영주와 송막은 서로 이웃해 있었다. 송막도독부는 황수潢水(현 서요하 상류) 지역부터 서쪽으로 사막까지, 서남쪽으로 수천 리 소나무 숲까지 이르고(“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 참조) 그 남동쪽이 영주도독부다.
영주 지역은, 다양한 종족이 함께 거하는 곳으로서 유혈충돌이 잦고 불안한 기운이 쌓여 있었다. 당나라의 동북지방인 이 지역의 안정은 외환外患 특히 돌궐의 침입에 대한 당 조정의 근심을 적잖게 덜어줄 수 있었다.
송막과 영주, 유주幽州, 연주兗州 등 당나라 동북지역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질적인 수장이나 다름없는 고승의 명망에, 계성의 고가장까지 달려온 이진영과 조문홰는 평소의 서먹서먹하던 감정을 누르고 인사를 나누었다.
고승은 표면상 당나라 동북지역의 평화를 도모한다고 했으나, 그의 이면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지역이 평화를 유지하는 사이, 고려인들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고 손자 조영이 세력을 키울 모판이 형성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이종移種할 때가 되면 마침내 고려의 백성들이 거란이나 말갈 백성들과 연대해 대당對唐 항쟁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말이다.
고승은 부드러운 눈길로 이진영과 조문홰를 번갈아 바라보며 부탁했다.
“두 분 대인들께서 우리 고려인들이 한인들이나 거란인들과 더불어 평화로이 살 수 있도록 협력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이르다 마다겠습니까? 저 파란 하늘 아래 각 민족이 한가히 공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황상 폐하의 크나큰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조문홰와 이진영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곁에서 입을 비쭉거리고 있던 이루하가 돌연 입을 열었다.
“아버지, 따분한 얘기들을 듣기보다는 신나는 무예를 구경하고 싶어요. 이 분 영주도독 나리께서도 괜찮은 무사를 데려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흐흠, 얘가 어른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진영이 그에게 핀잔을 주며 조문홰에게 얼른 사과했다.
“조 대인, 제 딸아이가 버릇없이 자라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문홰는 이루하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허허, 이 대인도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따님이 천하절색이라 며느리 감으로 몹시 욕심납니다. 내게 걸맞은 미혼 아들이 없는 게 큰 불행입니다.”
그는 덧붙여서 이루하에게 직접 말을 건네었다.
“아가씨의 요청을 따르겠습니다.”
그가 수행원 가운데 한 젊은이에게 눈짓하자 젊은이는 즉시 대답하고 맨손으로 마당 한 가운데에 섰다.
그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팔다리를 움직이더니, 돌연 큰 소리로 기합을 지르며 손발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마치 풍차가 돌아가는 것 같고 검은 호랑이가 동굴에서 뛰어나오는 듯하며 때로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는 듯한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몸집은 큰 편이었으나 몸놀림은 마치 가랑잎이나 솜털이 하늘거리는
것처럼 가볍기 이를 데 없었고 그 쾌속함은 섬광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가 잠시간의 연무를 마치고 뭇 영웅들에게 인사하자, 다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공자님, 너무나 멋져요! 공자님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이루하였다.
젊은이는 이루하를 바라보다가 무예를 시연할 때의 준열한 얼굴빛과는 다른, 약간 계면쩍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서연徐燕이라 합니다. 아가씨의 방명은 어찌 되는지요?”
“어머! 이름이 어쩜 그렇게 예뻐요? 제 이름은 이루하라고 해요.”
그녀가 한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문홰가 가신장수家臣將帥 서연의 무예 시연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은근히 제안했다.
“어떻습니까? 제가 고려와 거란의 두 젊은이 무예를 보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신창 이해고 하면 무술인들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고, 또한 고려 왕가의 전통적인 무예가 어떤지도 몹시 궁금합니다.”
조문홰는 고승과 이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부언했다.
“세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겨루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소. 실력의 우열을 가린다기보다는, 요즘 젊은이들의 기량도 훑어보고 우의와 친선을 돈독히 하는 의미에서 말이오.”
조문홰의 제안에 고승과 이진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친선을 도모하는 것은 좋지만, 자칫 조문홰의 가신 장수 서연이 조영이나 이해고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조문홰의 체면이 구겨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영과 이해고가 서연에게 패배하는 것도, 고승과 이진영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었다.
그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조문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반드시 겨룰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두 젊은이의 헌헌한 풍채만 보더라도 그들의 실력을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소. 으하하하!”
조문홰는 자신의 가신장수 서연이 이미 둘과 겨루어 이기기라도 한 듯 호쾌하게 웃었다. 고승과 이진영은 그의 웃음에 어떤 승리감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때다. 갑자기 이루하가 입을 열어 영주도독 조문홰에게 제안했다.
“나리, 제가 한 번 이분 공자님과 맨손으로 대결해 봐도 괜찮을까요?”
이는, 어떻게 들으면, 조문홰의 가신장수 서연이 조영이나 이해고의 적수가 되지 못하므로, 아녀자인 그녀가 상대해도 넉넉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의 비아냥거림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조문홰의 얼굴색이 변할 듯 말 듯하고 송막도독 이진영과 고려거사 고승이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을 찰라,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마라나타! 자고로 호승심은 평화를 얻기 힘들며, 호기심은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군웅들이 깜짝 놀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어느 사이엔가 멀찍이 연무장 초입에 한 고승高僧이 엄숙한 자태로 서 있었다.
겉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백색 가사袈裟를 걸치고 손목에는 염주를 두르고 있었는데, 나이는 육십세 가까이 되어 보였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인자하고 선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일위一位 백의경사白衣景師(경교성직자)였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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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6. 17.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