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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 7 | |
남편의 역할
혼인 예식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하여 심오한 비밀의 중대성을 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혼인에서 남편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심오한 비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셔서 교회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남편도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혼인 의무
신랑은 하나님이 자기 아내의 머리가 되도록 세우셨음을 아십니다. 신랑은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를 인도하고 보호하고 위로하십시오, 아내는 함께 영생을 상속할 자이기에 지혜롭게 아내와 함께 살며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의 소명 가운데서 성실하게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십시오.
혼인 서약
신랑은 거룩한 복음에 따라서 아내를 신실하게 사랑하고 돌보며 아내와 더불어 거룩함 가운데서 생활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주십시오.
혼인 예식서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서구 사고방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위의 인용문의 위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에게 주신 역할에 대한 계시를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로 떨어짐으로 인한 영향이 혼인에 미치는 바를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혼인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존중받은 두 역할
바로 앞에서 반복해서 말한 바와 같이, 인류의 두 성은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창조되었으며, 두 사람은 또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입지는 동등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공히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공히 죄인이 되었고, 공히 구속받았고, 공히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로 떨어짐으로, 남자 여자 모두 공히 타락의 결말을 겪습니다(창3:16∼24). 다시 구약성경에서 구속의 복음이 여자에게 적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적용되었습니다(레1∼4장).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죄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남자와 여자 공히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공히 죄인이 되었고, 공히 구속받았고, 공히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불평등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한 입지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에게서 서로와 관련된 동일한 기능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위계질서를 마련하셔서, 이로 전자를 후자의 지도자로 임명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돌보고 지키라는 위임명령은 여자가 아닌 남자가 하나님에게 받았습니다(창2:15). 에덴동산에서 그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돕는 자”(창2:18)를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동산에서 일할 책임이 남자에게 맡겨졌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머리와 지도자의 위치를 받았고, 반면에 여자는 창조주에게서 돕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능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이런 관계를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라고 말했습니다. 좀 뒤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11:8∼9)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3장에서 주목받았습니다.
이 현실은 혼인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심오한 비밀”(엡5:32)로서 중요합니다. 바울이 설명한 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습니다.”(엡5:23) 아니면 죄 가운데로 떨어지기 전의 현실과 일관된 용어로 이를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사람과의 그의 언약 관계에서 머리이며 지도자였듯이, 아담은 하와와의 혼인 관계에서 머리이자 지도자였습니다.
뒤바뀐 역할
죄 가운데로 떨어짐으로 인해서, 피해가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죄 가운데로 떨어지는 일이 남녀의 역할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사단은 남자의 조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남자에게 접근했고, 금지된 실과를 먹도록 여자에게 도전했습니다. 성경은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도전받았을 때, 여자는 최소한 하나님이 자기 위에 두신 남자로부터 지도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그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비록 남자가 “그녀와 함께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먹도록 놔두었고, 지도자로서의 책임에 태만했습니다. 사실상 “그도 먹었고,” 그래서 그는 지도자로서의 그의 과업에서 더 많이 실패했습니다.
두 사람이 죄 가운데로 떨어진 뒤에, 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과를 인류에게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확고한 표현은 놀랍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나님은 여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도 부르지 않으시고, “그 남자”만 소환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가 낙원에서 세워놓으신 법령을 계속 유지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세워놓은 대로, 남자가 지도자이며, 그래서 책임이 있고, 여자는 돕는 자라는 사실을 계속 유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한 남자를 통해서 들어왔고”(롬5:12), 한 여자를 통해서도 들어오지 않았고, 남자 여자 두 사람을 통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죄를 지은 자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하와는 거명하지 않고, 아담만 거명합니다(롬5:14).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와가 첫 범죄자였다고 할지라도(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 14절에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죄 가운데로 떨어짐에 대한 책임은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지도자와 권위자의 입지를 받았기에 아담에게 있습니다.
형벌
창세기 3장 15∼19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신 벌이 아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관점에서입니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사항을 생각해보십시오.
1. 아담과 하와가 경청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너와 여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라”(창3:15)라고 뱀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전쟁이 뱀과 아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뱀과 여자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남자의 후손은 뱀을 박살낼 수 없지만, 여자의 후손이 박살낼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자를 통해서 그의 독생자를 데려오시는 것처럼 남자를 통해서도 데려오실 정도로 전능하셨습니다. 하지만 뱀과 “여자” 사이의 대립을 선언하시면서, 죄와 사단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남자를 간과하셨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마주하여 필요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암묵적인 심판이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신 뒤에,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3:16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에서 선언된 저주는 모성의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그날에 하나님의 법령의 일부(창1:27∼28)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는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특징이 될 고통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제에 대한 더 큰 관심은 여자를 향한 클로징멘트, 즉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b)에 있습니다. 여기에 “원하고”라는 관련어는 일부 독자들로 하나님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성적인 욕구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죄 가운데로 떨어지기 전이나 후에도 성욕은 전혀 죄가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성욕은 죄가 아닙니다. 요지는 이 성욕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본문의 결론 부분의 “…하려고 할 것이다”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하려고 할 것이다”라는 단어가 명령을 반영합니까? 다시 말해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려 하는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는(반드시 다스려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아니면 “하려고 할 것이다”라는 단어가 예언을 반영합니까? 파산된 세상에서, 남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여자를 다스리려고 합니까? 만일 후자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이 그리스도인 남편이 어떤 유혹도 뿌리치고 자기 아내를 다스리고자 할 것이고, 또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의 지배를 조용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나중에 가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 금방 분명해집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호의적으로 보시지 않자 화가 났을 때, 주님께서 가인에게 죄가 그의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b) 창세기 3장 16절과 4장 7절에 나오는 히브리어는 인칭과 성의 적합한 변화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같습니다. 가인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이 분명합니다. “죄가 너를 가지기를 원하고, 통제하기를 원하지만, 너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 말은 죄의 욕망 때문에, 가인이 죄를 저항하고 다스릴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통제하고자 하지만, 남편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는 여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합니다. 여자는 남편을 통제하고자 하지만, 남편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주신 입지에 따라 여자를 다스려야 합니다. 죄 가운데로 떨어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타락 자체를 특징짓는 역할 반전이 역사의 과정에서 계속 인류의 삶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여자는 계속 남자를 다스리고자 할 것이지만, 남자는 여자의 노력에 계속 저항하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자의 지도력이 타락으로 인해 너무 자주 유약하거나 폭력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두 사람 모두 차례로 남자에 대한 증가된 분노와 그 지도력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여자에게서 일어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이 싸움은 인류 역사의 많은 슬픔을 초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중생 사역을 통해서만, 남편은 아내에게 선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중생 사역을 통해서만, 아내는 남편을 주관하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남편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 주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신 뒤에, 이제 남자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담에게 두 가지 범죄를 비난하십니다. 두 번째 범죄는 우리가 죄 가운데로 떨어짐을 상기할 때, 즉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따먹는 범죄를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첫 범죄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부여하신 지도자의 역할에 따라 처신하지 않은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의 아내의 말을 들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실패를 언급하시는 것은, 이만 먼저 언급하는 것은 차치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담이 지도자라는 사실과 그래서 궁극적으로 죄 가운데로 떨어진 일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십니다. 비슷하게, 하나님이 땅에 선언하시는 저주는 “너 때문이라”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너”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아담을 분명히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류의 노동을 특징짓는 땀과 눈물은 아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 즉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입니다. 물론 하와도 죽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머리가 죽으면 몸의 지체도 당연히 따라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담은 여기 그 남자와 그의 책임에 있습니다. 아담이 무엇보다도 먼저 아내의 지도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일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로 떨어진 일에 응답하시는 방식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우신 위계질서를 유지하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남자는 지도자이자,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습니다.
에덴동산 이후
인류가 죄 가운데로 떨어진 뒤에, 주 하나님은 태초의 법령을 신속하게 유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머리지 여자가 머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말씀으로 상고해보십시오.
창세기 5장과 10장의 족보는 남자의 이름만 열거합니다. 분명히 여자들이 다음 세대를 낳은데 관여했지만, 성령께서 남성이 지도자이기에, 여자들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언급하는 것은 동시에 남자가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 사래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남자 아브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창12:1).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자 원하셨다면, 사래에게도 명령을 내리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래가 주도권을 잡고 우르에서 아브람을 포함하여 가족을 거느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바는 의도적이었고, 창세기 2장에 표현된 남자의 머리됨의 원리에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위해 제정하신 표인 할례는 오직 사내아이에게만 주어졌습니다(창17:10∼11). 하지만 소녀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에 대단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주셨을 때인 시내산에 남자와 여자와 늙은이와 젊은이도 마찬가지로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출19∼20장). 하나님이 소녀들에게 별도의 표징을 주기를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오직 남자들에게 제사장직에 임명하셨고, 또 장로가 되도록 지정하셨습니다(출28:1;18:21,25). 하나님은 주재자이시며, 고로 지도자의 입지에 성별 차이가 없이 자유롭게 지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만 지도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그분의 결정은 하나님이 태초에 남자와 여자 각자에게 주신 자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남자가 주님 앞에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지, 여자는 받지 않았습니다(출23:17;신16:16). 이 말은 여자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남자와 여자 각자의 위치를 설명합니다.
질투하는 남편에 대한 하나님의 공식적인 명령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제사장은] 여인에게 맹세하게 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민5:19) 여기에서 새국제역은 히브리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대부분의 역본이 다 가지고 있는데) 새국제역은 “네 남편에게 혼인한”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 남편의 권위 아래 있는”으로 번역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의 교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공식구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즉 그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 일반적으로 말씀하실 때, 일관되게 대명사 “그”를 사용하셨습니다(예를 들어, 레1:4을 보라). 이 용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가 아니었고, 문화적으로 제한된 어법도 아니었고, 오히려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구도로부터 직접 유래된 공식구였습니다. 창조주의 이목에는 남성 대명사가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의 일부이며, 따라서 남성 대명사가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현실의 참된 척도로 남아 있는 만큼, 현대인들은 “그”와 “그녀”라는 대명사를 섞거나, 심지어 “그/그녀”라는 어구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법령에 부당함을 준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성 중립적인 번역은 하나님의 계시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규범이 인류의 표준으로 여전한데, 즉 남자가 머리이고 여자가 그의 돕는 자라라는 사실을 더 많은 실례를 들어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와 훨씬 더 많은 실례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가 인류를 위한 표준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동등하지만, 생활 속에서 그 역할은 다릅니다. 지도력은 남자의 특징이며, “돕는 것”은 여자의 특징입니다.
문화에 제한받았는가?
위에 언급된 본문에 반영된 남자와 여자의 제각각의 입지는 당시 문화적인 기대치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 시대의 문화적인 현실에 제한하여 일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 시대 문화적인 현실과 더불어 일하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날 평등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에 남자만을 택하셨기에, 오늘날 남자만이 직분을 맡을 수 있다는 뜻으로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응하여,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가 인류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재하시는 주권자이시며, 지금도 여전히 주권자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문화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바와 사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포함하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르에서 그 가정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나 사래를 언급할 것인지, 아니면 제사장직에 남자를 지명할 것인지 아니면 여자를 지명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시대의 문화가 하나님의 결정을 주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문화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각각의 입지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했을 때, 특정 문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지역민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동성애적인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행위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령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창19:1∼29;레18:22;20:13;신23:17∼18;삿19:22∼30). 하나님과 그 교회의 가치관이 어떤 민족의 문화에 의해 제한된다는 가정은 전혀 성경의 근거가 없습니다.
세상의 창조주는 사람의 문화와 하나님이 이 문화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바를 포함하여 인류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권자이시며 여전히 주권자로 계십니다. |
신약
신약성경은 창세기 2장에 제정된 남자와 여자의 대인관계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오셨습니다(마1:25;계12:5). 하나님께서 여자의 희생을 통해서 사단을 박살내실 전능자이셨지만, 그는 남자의 희생을 통해서 이 일을 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들이 아닌 남자를 그의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막3:16∼18).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 가운데 여자를 원하셨다면, 여자를 제자 역할을 하도록 부르셨을 것이고, [필요하셨다면] 이를 문화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여 120명으로 구성된 제자들에게 말한 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인들이 한 것처럼 그의 설교를 “남자들과 형제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비록 베드로의 말이 의심의 여지 없이 120명 제자들에게 의도되었다고 하더라도, 베드로는 청중의 남성 부분, 즉 지도자들을 언급하여 그 모임에서 설교함으로써 창세기 2장의 원리를 반영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이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창세기 2장의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구도가 시간이 흘렀지만, 구원역사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 직분자로 봉사할 자격요건을 제시할 때, 직분 후보자의 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4;12)라고 명시합니다. 나중에 요구된 사항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처럼, 남자를 자기 가정의 지도자이자 치리자로 묘사합니다.
바울의 교훈으로, 교회의 여인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5)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 지점에서 복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악평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이 눈에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질서가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패턴이기에 그렇습니다.
남자의 머리 됨의 원리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죄 가운데로 떨어진 뒤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접근 방법이 온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규범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런 자료들과 또 더 많은 자료가 더 분명하게 합니다.
오로지 혼인 생활에만 유효한가?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위계질서가 오로지 혼인 생활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습니까? 남자가 혼인 생활에서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지, 사업계나 교육계나 정치계는 아닙니까?
삶이 다양한 영역으로 분열된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에 반영되지 않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분열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이를 경작하고 지키라”(창2:15)라고 위임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담은 그의 존재의 모든 측면의 지도자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로 그의 삶에 아내를 더하셨을 때, 아담의 지도력을 발휘하라는 사명은 가정에서 보내는 그들만의 시간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일하는 그들의 시간에도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사단과 대화하는 일과 아담이 이에 지도력을 태만하게 발휘하는 것은 분명히 혼인생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경제와 사업, 정치와 교육, 주일 등의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은 한 조각이며,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아내와 관련하여 실패한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장로와 제사장직에 남자를 임명하셨을 때나,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의 직분에 남자를 임명하셨을 때, 바울이 장로와 집사는 남자여야 한다고 암시했을 때, 남자의 머리 됨의 적용은 집과 교회 밖의 삶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머리됨에 관한 하나님의 법령은 모든 삶의 영역에 타당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으로 남자가 지도자입니다. 성경이 드보라(삿4장)와 같은 예외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여자가 지도자의 역할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폐기하지 않습니다(삿4:9에서 바락에게 했던 드보라의 말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내리신 벌에서 명하신 대로, 남자는 지도자이고, 여자는 지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타락한 인류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법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또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양성 간의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죄 용서하시는 은혜를 즐거워하며, 성령 안에서 그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참으로 남자의 머리 됨과 관련하여서도,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은 경이롭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머리 됨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는지를 생각할 때 분명해집니다.
머리 됨의 참된 모습
머리 됨의 첫 번째 실례는 권위와 통치와 지도력을 포함합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머리”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하자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한 뒤에,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골2:10)라고 했습니다. 머리를 언급한 것은 분명히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상 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높이심으로써 창세기 1장 26절의 의향을 성취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가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실 그 사람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독재적으로 다스립니까?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요구에 냉담합니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불구대천지 원수와 치르는 전쟁에서,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도, 마귀 편을 드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습니까? 비록 주님께서 오늘날도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인내하시지만(롬2:4),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심판은 영원한 정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의 의롭고 신적인 특권입니다. 하지만 그는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는 그의 교회의 유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에서 인용한 위의 인용문이 지닌 강력한 위력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이 신부를 위해 위대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처신이 모든 그리스도인 신랑을 위한 본보기가 됩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됨에 관해 같은 편지에서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3)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구주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갈보리 사역에 대한 그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만, 타락한 인류와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기에, 죽을 수밖에 없고, 병들고 연약해지셨습니다(사53:4).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7∼8)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5∼27) 여기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충분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야와 수건을 허리에 묶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그리스도의 처신은 모든 그리스도인 신랑을 위해 본보기가 됩니다. |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 사랑은 그가 사람이 되시는 일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희생 제사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 그분은 승천하셔서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로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좌정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의 유익을 위해서 신부를 계속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의 성령을 지상에 보내셔서 그의 백성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된 결과는 그의 백성이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였고,”(엡4:19) 이 말은 그저 성적인 것만 말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이기적인 것과 따라서 배우자에 대한 이기적인 통제를 바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래로, 하나님의 자녀는 새로워져서, 여러분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엡4:22∼24) 이 새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5:16,22) 육체의 일,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갈5:19∼21)은 공통분모, 즉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평강, 인내, 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와 통제)(갈5:22∼23)도 공통분모, 즉 다른 사람을 섬김을 가지고 있습니다.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를 위해 보여주신 자기를 비우는 똑같은 처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늘 위에서 돌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역은 에덴동산에서 피조물인 인생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보다 더 풍성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먼지로 만든 사람과 언약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은 분명히 그의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에 이런 처신이 분명히 그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언급은 말하지 않고, 그의 사랑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훨씬 더 예리하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남편들
주님의 축복을 통해서, 중생한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5:25)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죄인인) 남편의 모든 무정한 요구에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로서의 그의 직임으로 실제로 지도력이 어떤지, 즉 자기를 비우는 섬김을 행동으로 증명할 권위와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잠시 이 비유를 바꾸어서 말하자면, 몸의 머리는 몸의 각 지체인 팔과 다리와 손가락과 발가락이 동상이나 기타 질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또 뼈가 부러지는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보호하도록 하기에, 아내의 머리는 실제로 아내를 충분히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정확히 모든 남편이 닮아야 할 특권을 받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이런 유형의 자기 부인과 섬김이 남편에게 어떤 모습을 요구합니까?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며,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5∼27절)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28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섬김의 목표를 기술합니다. 즉 남편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아내를 번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요구와 시련들로 피곤하고 지치는 대신에, 아내는 남편의 보살핌을 통해 행복하고, 빛나고, 활기차고, 감사가 넘쳐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8∼29절)라고 덧붙입니다. 아내는 남편 자신의 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두 사람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편은 자기 몸을 보살피는 것처럼 아내의 몸을 먹이고 보살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신랑이 오실 준비가 될 때까지 신부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처럼, 아내의 모든 필요(신체적, 영적, 감정적, 심리적인 필요 등등)를 남편이 공급해야 합니다.
베드로 서신서를 받아보는 남편들
사도 베드로는 아내와 관련하여 남편의 임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너의 남편들에게 순종하라”(벧전3:1)라고 말했고, 그렇게 남편의 머리 됨과 지도자로의 입지를 함축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여기에서 “귀히 여기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내를 잘 알고 필요에 따라 아내를 대한다는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 암시하는 것은 대화와 개방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아내의 삶, 몸, 기분 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내의 욕구에 대한 남편의 지식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아내와 “동거”하지만, 같은 집에서 사는 일 이상의 일을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야 합니다.
남편은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방식을 존중해야 하고, 그래서 깨어질 것처럼 세심하게 대해야 합니다. |
다시 말해서, 남편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 속에서 아내가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그릇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질그릇에 해당하는 “그릇”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흙으로 만들어져, 언젠가 먼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인류는 유한하고 유약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두 성별 가운데 유약한 사람으로 창조하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이 말은 체력이나 월경 불순과 또 다른 요인의 조합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남편은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방식을 존중해야 하며, 따라서 아내를 연약한 자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 아내는 남편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 다 은혜로 구원받았고, 하나님께 속해 있고, 현재의 파산된 삶보다 더 나은 삶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남편도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고, 아내의 필요(그러므로 아내의 머리이자 지도자인 남편의 필요도 마찬가지다)를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려면, 그날 일어난 일을 두고 대화하고, 성경을 펼쳐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아내의 머리인 남편의 특권은 날마다 성경을 펼쳐, 성경에 비추어, 일생 생활에 관한 질문과 도전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즐거움과 염려를 함께 생명의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편의 머리가 어떤 모습을 합니까? 한 마디로 머리 됨의 직분은 봉사를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머리 됨은 이기심에 따라 처신할 여지를 남편에게 주지 않습니다. 커피를 내려오라, 설거지하라고 명령할 여지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아내에게 요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내의 몸에 대한 욕구 때문에 아내에게 요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남편은 주님을 섬기면서 아내를 번성하게 만드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하는 강력한 지도력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특권이 있는 자리이며, 이 책임에 대해 주님께서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기를 배운 사람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잘 인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남편을 받은 아내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혼인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심오한 비밀”로 바르게 평가합니다.
생계 부양자인가?
본 장 초반부에 혼인 예식서로부터 인용한 몇 가지 인용문에, 남편에게 “매일의 소명 가운데서 성실하게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십시오”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이 인용문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라고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에게 했던 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가르침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를 돌보고 지키라”(15절)라고 하신 명령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대로 일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하지만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 명령이 남편을 가정의 유일하고 책임이 있는 가장으로 만들어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가족을 자선 단체에 기부할 수 있는 위치에 놓도록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혼인 예식서는 분명히 아내가 아닌 남편에게 이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까? 에베소서 4장의 명령은 남자만 아니라, 온 회중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혼인 생활에서 아내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후에, 남편에게 가정의 생계 부양자가 되는 임무를 올바르게 부과하는지를 잘 고려하게 될 것입니다. 이 주제를 위해, 독자는 다음 장 마지막 단락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토론 사항
1. 남편들에게
a. 당신의 혼인 생활에서 당신의 머리 됨과 지도자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토론하십시오.
b. 당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십시오.
c. 당신의 아내(약혼자)가 당신의 역할에서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십시오.
2. 아내들에게
a. 혼인 생활에서 남편의 머리됨과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토론하십시오.
b. 당신의 판단에 따라 남편이 구체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십시오.
c. 남편(약혼자)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토론하십시오.
3. 하나님이 왜 그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창조하신 부족함을 어떻게 메꾸셨습니까? 이것은 남자들이 독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자들이 여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남자들이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행위가 적합합니까?
4.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남녀에게 창조한 평등과 하나님이 서로의 관계에서 창조한 불평등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로 표현하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부합합니까? 여러분의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도록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5. 머리 됨과 지도자로서의 남자의 역할은 혼인에 제한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삶의 다른 부분으로 확장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영역에서도 그런지, 왜 그런지 이야기해보십시오. 이것이 대중의 찬동을 받아야 합니까?
6.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남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만드셨는지를 토론하십시오. 그렇다면 머리 됨은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합니까? 성경에서 남편이 해야 할 일의 본질을 머리로 포착한 단어들을 찾아보십시오.
7.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의 커리어에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 규범과 어떻게 비교됩니까?
8. 가정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엄격하게 남편의 소관입니까? 수입과 지출에 대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터놓아야 하고, 또 무엇을 구입해야 하는지 합의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설명해보십시오.
9. 혼인 예식서 마지막에 있는 강복에서 주례 목사가 갓 혼인한 사람들에게 “형제자매 _______”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이 빈칸에 신랑의 성을 담습니다. 이런 이해는 신부의 신분과 이름이 이제 남편의 신분과 이름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행습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변화무쌍한 문화 속에서 이 관행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왜 아닌지에 대해서 말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