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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2:1-13:18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보호하신다 찬송: 2, 19, 377장 교독문: 골 3:1-11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의 삶에서 가장 안타까워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배우면서 가장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멸망과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거부하며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사는 성도의 삶이란 계 10장에서 배운대로 두 증인으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계 6:9-11에 기록된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성도들이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삶이다.
계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성도의 삶이란 잠깐 박해를 받으며, 고난을 받는 삶이지만, 이후에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쉬는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바이다. 하지만 성도의 삶은 언제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박해와 고난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언제 이 삶을 끝내주실지에 대해 간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성도의 안타까움이 더욱 커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기뻐하게 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을 보면 멸망의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인하여 성도의 마음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 요한계시록에 가득하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과거를 지나 현재와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복 주심과 심판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의 삶에 어떤 일들이 있으며, 거기에서 어떤 보호를 약속하고 계시는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성경 곳곳에서 주셨으며, 또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이에 대한 더욱 큰 그림을 그려주고 계신 것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계 10-11장의 내용을 통해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박해를 겸하여 받는 교회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는 교회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어서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될 것임을 배웠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사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시간적인 순서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곱 인 심판, 일곱 나팔 심판, 그리고 앞으로 배우게 될 일곱 대접 심판은 모두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한 심판이라는 사실이요, 일곱 인 심판이 끝나면 일곱 나팔 심판이 오고, 이어 일곱 대접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데, 여섯 번째 나팔이 불린 후에 막간의 부분이 계 10-14장이 이어 나오고 있으며, 이 내용은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이 끝난 후 새롭게 시작되는 내용이 아니라, 나팔 심판 시리즈와 함께 이 내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을 읽으면서 언제나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현실의 삶을 요한계시록의 권면에 따라 증인으로서의 삶을, 그리고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 받은 본문은 두 번째 막간에 해당하는 12-14장 가운데 앞 부분이다. 이 부분의 핵심은 사탄의 세력에 박해를 받고 미혹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교회를 가르쳐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계시록을 시간순으로 읽으면 어느 때는 교회가 보호를 받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넘겨 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앞에서부터 계속 배웠지만,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불신자를 향한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극렬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해주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놓치지 않도록 가르쳐주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2-14장의 내용 가운데 우리가 받은 부분은 12-13장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등장 인물이 있는데, 한 부류는 붉은 용이요, 또 다른 부류는 붉은 용이 보낸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이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임신한 여자와 출산한 여자, 그리고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직후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진다.
여기에서 붉은 용은 사탄이요,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흉내낸 사탄적 삼위일체를 보여주며, 임신한 여인은 구약의 교회를 의미하고, 출산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신약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남자 아이가 하늘 보좌로 올려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 보좌에 앉으심을 의미한다. 이 밑그림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면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보호를 받고 있음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
계 12:1-6은 용과 여자의 전투가 나온다. 한 여인이 나오고, 해를 옷 입었고, 발 아래에 달이 있고,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쓴 것은 요셉이 꿈을 꾼 것을 배경으로 한다. 이것은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의 큰 민족, 즉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여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 땅을 심판하기 위해 광야를 지나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따라서 이 여인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열두 별의 관은 바로 열두 지파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여인이 곧 출산하게 되는데, 이 남자 아이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다의 계보에서 오실 것이 예언이 되었다(창 49:10). 그래서 이 여인이 남자 아이를 낳은 것은 구약의 교회가 메시아를 낳은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여인을 대적하는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요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 계 12:9을 보면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탄은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로 온 천하를 꾀는 자요, 거짓의 아비이다. 그리고 욥을 참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는 자이다.
일곱 머리, 일곱 왕관의 ‘칠’은 완전수로 하나님의 주권을 모방한다.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고대 사회에서 뿔은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였으며, 열 개는 많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붉은 용은 많은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꼬리로 하늘의 별 1/3을 끌어다 땅에 던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의 능력으로 괴롭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용이 임신한 여인이 낳은 아이를 삼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하늘로 올리워진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심을 의미한다.
이후 계 12:7-12에서 하늘 전쟁이 있는데, 이 전쟁은 예수님의 대리인인 미가엘 천사와 사탄 사이의 하늘 전쟁이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은 천사장과 선한 천사들을 의미하고, 용과 그의 사자들은 사탄과 악한 천사들을 의미한다. 이 큰 전쟁은 다니엘 10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다니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는데, 21일 동안 바사 왕국의 군주로 인해 가는 길이 막혔을 때,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가브리엘을 도와 주어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이 미가엘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대리 천사로서 하늘의 전쟁을 통해 사탄에게 승리를 취하고, 사탄은 그 결과 땅으로 내쫓김을 당한다. 그리고 이 쫓겨난 시기는 창조 이후 타락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 패배한 때를 말한다. 사탄은 이미 땅으로 쫓겨났다. 그래서 하늘의 성도들은 이제 안식에 들어가게 되고, 땅으로 쫓겨난 사탄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만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무저갱에 갇혀 있으며 그의 대리인을 통해 성도들을 박해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땅으로 쫓겨난 사탄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한다. 여기에서 출산한 여인은 이제 신약의 교회가 된다. 그리고 여인은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는데, 이 시기는 3년 반으로 마흔두 달이요, 1,260일이다. 이 시기는 요한계시록이 계속 말하여 온 대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이 여인은 광야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 광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과 임재를 체험하는 장소이면서, 시험을 받는 장소요, 영적으로 전투를 치러야 할 장소이다. 그리고 계 12:17의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가까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제 13장으로 넘어가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이 나오는데, 이 둘은 갇혀 있는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용에게서 권세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붉은 용이 성부 하나님을 모방한다면, 이 바다 짐승은 성자 하나님을 모방한다. 이 바다 짐승은 붉은 용보다 왕관이 더 많다. 붉은 용은 일곱이요, 바다 짐승은 열 왕관을 갖고 있다. 이것은 용으로부터 능력, 보좌, 그리고 큰 권세를 받았으며, 죽게 되었다가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모방한 것이다. 이 바다 짐승은 예수님께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다스리는 것처럼, 계 13:7을 보면 “성도들과 싸워 이기에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바다 짐승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박해하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받은 성도들에게 이 바다 짐승은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를 상징했다. 아마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네로 황제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네로는 죽었지만, 부활하여 유브라데 강 건너편의 파르시아 왕국을 이끌고 로마 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 바다 짐승은 예수님 시대처럼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박해하는 국가나 국가의 통치자들에 대한 상징이다.
다음으로 계 13:11-18을 보며 땅의 짐승이 나오는데, 어린 양 같은 두 뿔과 용처럼 말을 한다. 마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닮은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용처럼 말을 한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모방한 거짓 선지자를 의미한다. 계 16:13을 보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계 19:20을 보면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혔으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둘을 보면 땅에서 나온 짐승은 바로 거짓 선지자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바다 짐승을 경배하게 한다. 이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모델로 한다. 거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할 때 이에 맞추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짐승을 경배하도록 속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여 서슴없이 죽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아 박해를 받으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 땅의 짐승은 바로 신격화를 조장하는 종교나 이념들을 전파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역할은 13:16-17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표가 없으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 즉 경제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짐승의 수가 나오는데, 이 수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17절은 말한다. 그리고 그 숫자는 ‘666’이라고 18절은 알려준다. 이 ‘666’에 대한 많은 속설들이 있지만, 우리가 받을 만한 학설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이름을 숫자로 표현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의 각 알파벳은 숫자 하나를 의미하는데, 이름의 철자를 숫자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어떤 수가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666’이란 숫자가 ‘그 짐승의 이름의 수’라는 설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에 대입하여 한 사람을 지목하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현대 사회의 알파벳을 가지고 게마트리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숫자와는 맞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소련의 스탈린이다, 독일의 히틀러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파는 컴퓨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컴퓨터에 게마트리아를 적용하면 666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고대 사회의 알파벳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할 수 없으며, 또 어떤 학파는 기독교를 처음 박해한 황제 네로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제 네로를 히브리어로 바꾸어 게마트리아를 적용하면 666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면 616이 나오는데, 어떤 요한계시록 사본에는 ‘666’ 대신에 ‘616’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네로 황제를 라틴어로 적용했을 때 나온 숫자를 기록한 것이다.
계 15:2("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을 보면 이 짐승은 첫째 짐승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을 이 짐승의 이름이나 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다 짐승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를 박해하는 국가나 통치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를 박해한 나라들이나 통치자 모두를 이 ‘666’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한 사람이나 한 국가를 지정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사는 이 시대,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성도의 삶이란 모든 곳에서부터 박해를 받는 시대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때 매매하기도 힘들고, 그 안에서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함을 알려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계 12-13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승천까지의 사건을 보았고,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인 임신한 여인과 출산한 여인을 박해하는 사탄적 삼위일체인 붉은 용과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을 보았다. 하지만 붉은 용인 사탄은 이미 무저갱에 갇혀 있고(계 9:1-11, 땅에 떨어진 별 하나), 두 하수인인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을 통해 성도들을 박해하고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하늘의 교회에 참여하여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삶이 고단하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으로 심판을 받아 땅으로 떨어졌고,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는 완전한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여 불못에 떨어질 것이며, 그의 두 하수인인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도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살후 2:8, 12). 그래서 하나님은 계 7:15-17의 말씀으로 먼저 위로를 주신 것이다.
계 7: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처럼 아름답고 귀하고 복된 삶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계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슬픈 내용이긴 하지만,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을 수는 없다. 물론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 말씀 그대로 사로잡히기도 하고, 칼에 죽기도 하고, 짐승에게 먹히기도 했다(히 11:33-38).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렇게 힘으로 누르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하여 이것과 저것 둘 다를 취하도록 유혹한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역할이다.
엡 6:10-12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도들이 사는 현재의 삶은 사탄의 하수인들로 인하여 성도들이 박해와 죽임을 당하는 삶이다. 이런 곳에서 성도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욥기를 통해 배웠다. 사탄이 아무리 욥을 참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욥을 건들 수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성도는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사탄이 교회를 박해한다 할지라도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는”(계 12:16) 것처럼, 사탄의 의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교회를 물리적으로 박해하게 허락하시지만, 친히 교회를 영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계 13:10)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3장을 통하여 사탄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하며 감격해 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