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 고경서
고양이, 고양이들
1.
나는 길 위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나를 도둑고양이라고 부른다. 그 호칭은 아무래도 듣기 거북하다. 변변한 거처 없이 한뎃잠을 자고, 일용할 양식을 훔쳐 먹는 비루한 신세지만 요즘은 그 일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풍찬노숙에 문전걸식마저 일삼다보니 끼닛거리가 절실하다.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물통은 이중삼중으로 닫혀있고, 쓰레기더미를 뒤진다한들 마냥 헛걸음이다. 담장을 타고 다니며 먹거리를 구하던 먼 과거가 그리워진다.
이곳에 초고층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먹잇감이 널려있었다. 골목마다 찬반이 담긴 봉투가 내던져졌고, 악취가 나는 그것을 찢어가며 포만감으로 배를 채웠다. 천적이라고 기피하는 야생의 사냥감도 흔했다. 소학교 아이들이 쥐꼬리를 잘라 숙제로 가져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밤낮없이 날뛰어도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다. 까칠한 털로 감싼 몸에 홀짝해진 뱃구레를 새끼들이 보채듯 파고든다. 막상 움막을 뛰쳐 나왔지만 갈 데가 없어 서성거리는 나를 낙동강 칼바람이 냅다 후려친다.
쓰레기장은 깊은 적요에 잠겨있다. 가로등이 흘린 불빛을 밟고 선 그림자마저 남루하다. 고된 노역보다 나를 경계하는 사람들의 눈총이 더 지치게 만든다. 사는 게 뭐라고, 이 말을 곱씹으면 눈가에 물기가 번진다. 어금니로 깨무는 삶이 갈수록 버겁다. 길 안에 갇혀 부랑자처럼 배회하며 악을 쓰고 운다. 밤을 긋는 날 선 울음소리는 배고픔을 면할 간절한 기도다. 가혹한 운명 따윈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한 채 질긴 어둠살만 물어뜯는다. 오밤중에 발바닥 물집이 잡히도록 뛰어다니는 한 나는 허기로써 살아있다. 야옹〜
2.
나는 지금 들쥐를 좇고 있다. 야생의 먹이가 식욕을 돋운다. 마른 풀덤불을 바장이던 해거름이 내 살찐 몸집을 싸고돈다. 하루를 끌고 온 태양도 힘든지 날숨을 몰아쉬며 색색의 잔광을 강물에 풀어놓는다. 불시에 닥친 위기로 생명이 위태로운 놈은 잔뜩 웅크린 채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움직인다. 피식자와 포식자 간에 벌이는 긴장감이 내 눈 속에서 팽팽하다. 엎치락뒤치락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던지 아니면 아우성이라도 쳐야하지 않는가. 한눈이라도 팔면 달아날지 몰라 놈의 행동을 주시하며 바짝 따라붙는다. 처진 어깨를 세우고 가슴을 편다. 산책로가 어둑해지기 전에 맛있는 식사를 해치워야한다.
밥은 곧 실존이다. 먹이사슬은 생명 가진 것들의 생존 방식이다. 따라서 약육강식은 생태계의 엄연한 순리요, 질서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데 따른 그 어떤 공격이나 방어, 맞대결도 용납하지 않는 강자의 제압이며 횡포요, 약자에 대한 지배다. 야성적 본능인 천적관계는 힘이 존재한다. 나 역시 나보다 한수 위인 강자의 밥이 될 수도 있는 법, 모든 목숨붙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밥심으로 연명하지 않는가. 그 누구도 이런 내 행위를 조롱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테다. 거친 세상, 오기라도 악착스레 버텨내어야한다.
사람이 콤플렉스다. 만물의 영장이자 최 상위 포식자인 한 노인이 산책하다 말고 나를 노려본다. 아직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대도 연민과 분노에 찬 눈길로 돌팔매질 시늉을 한다. 왕왕 큰소리도 지른다. 산목숨 앞에서도 먹고사는 일만큼은 당신도 내 삶의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비정하다고 돌을 던져도 내 먹잇감을 빼앗길 수 없다. 놈이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 체념하기까지 내 굶주림 따윈 견디면 된다. 이 급박한 순간에도 대초원을 평정한 맹수의 왕이거나 흙냄새를 맡고 사는 미물이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도 끼어든다. 고깃덩어리 같은 고요에 숨이 막힌다. 야옹 야옹〜
3.
나는 르노와르 작품 <줄리 마네>에 나오는 고양이다. 귀여운 소녀가 내게 무릎을 내주고, 나는 소녀에게 포근히 안겨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꿈을 꾸면서 낮잠에 든 것도 같다. 밝고 따뜻한 집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 사는 데 욕망과 결핍이 없어 행복하다. 도둑고양이나 길냥이처럼 곯은 배를 잡고 삭풍에 휘둘리지도, 시린 갈대숲에서 참새 떼들을 날려 보내지도 않는다. 포근한 잠자리에 사생활이 보장되고, 더구나 삼시세끼 먹이걱정도 없다. 외롭고 심심하면 놀아주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본능이나 야성 따윈 발톱 밑에 숨겨둔 지 오래다. 족보 있는 고양이답게 우아한 면모와 품격은 나만의 자존감이다. 귀티가 흐르는 러시안 블루나 발랄한 태국 샴처럼 꽤나 운이 좋다고나할까.
그러니까 나는 애완 묘이다. 소녀로부터 사육을 당한다. 아니, 소녀가 내게 길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소녀의 감정을 꿰뚫고 있다. 엄마가 없어 슬퍼하면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하품을 한다. 손등을 핥거나 애교를 부리면 내 신비한 눈빛에 반해 미소를 머금는다. 사람들은 이런 습성을 두고, 까다롭고 예민하다지만 나만의 처세술이다. 도도하고 호기심은 많으나 환심을 사기위해 비굴하거나 맹목적인 복종은 없다. 다분히 이기적이라 소녀의 호의를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는다. 내가 소녀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액자 속에서 영원한 반려자로 살아갈 것이다. 야옹 야옹야옹 〜
4.
우리는 태어나 보니 고양이다. 하루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밥벌이를 하지 않는 날이 없다. 갈수록 죄 없는 생이 고역이다. 전생에 사람이었을까. 어차피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업, 눈물에 식은 밥을 말아 먹을지라도 살아가야만 한다. 강물을 할퀸 돌개바람처럼 분연히 일어서 하늘을 본다. 다 늦은 저녁, 온달을 한입 덥석 베어 먹은 초승달이 입술을 닦는다. 어디선가 또 울음소리가 들린다. 야옹 야옹 야옹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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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서(경숙)
2017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수필, 201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됐다. 천강문학상 대상,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감성어 낚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