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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참회시 : 51편
1. 시편 51편의 특성 :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회개(참회)하는 시
시편에서 51편은 장르의 구분에서 ‘참회시’로 분류하는 것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시편 51편은 일찍이 ‘7개의 참회시’(6, 32, 38, 51, 102, 130, 143편)의 하나로 분류되었다. ‘7개의 참회시’에 대한 장르는 6세기의 라틴 교부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의 주석서에 처음 나타나지만, 어거스틴에 의해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7개의 참회시’에 대한 전통은 중세와 종교개혁시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장르 구분에 의한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닌 교회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장르별 구분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양식비평가인 궁켈(H. Gunkel))에서 비로소 보게 되기 때문이다. 궁켈은 시편을 찬송시, 개인 탄원시, 민족 탄원시, 제왕시, 감사시, 지혜시의 6개 장르로 분류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축복과 저주의 시, 순례자의 시, 등극시(대관식), 예언시, 승리의 시를 포함하여 보다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1)
그런데 시편 51편이 전통적으로 ‘7개의 참회시’의 하나인 ‘참회시’로 다루어져왔으며 궁켈 또한 시편 51편을 참회시의 가장 좋은 표본으로 보지만, ‘7개의 참회시’ 모두를 참회시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고 다른 견해를 갖는다. 그는 다른 시편들은 탄원시로 분류하고 시편 51편은 그 탄원시의 하위 개념으로 보았다. 베스터만(C. Westermann)도 시편 51편처럼 죄의 고백이라는 주요 모티브를 가진 참회시는 매우 적다고 하며 참회시로 보기보다는 탄식시의 마지막 단계의 발전적인 변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편 51편은 참회시의 성격상 탄원시와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이 시에는 탄식과 그에 따른 탄원이 있기는 하지만, 험난한 상황에 처하고 고난을 당하기도 한 자신이 당하고 처한 상황에 따른 탄식과 탄원에 있은 것이 아니라, 우리야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함에 있은 죄를 왕의 권력에 의해 영원히 묻힐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감출 수 없었으니 선지자 나단에게서 책망 받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에 있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심각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그 죄의 고백에 있으면서 죄 사함의 용서를 간구함에 있는 분명한 ‘참회시’로 탄원시와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한다. 따라서 탄원시에 속한 하위 개념이 될 수 없다. ‘참회시’는 시편 51편 하나이든, ‘7개의 참회시’의 하나이든 시편의 유형으로는 비중 있는 ‘참회시’란 장르이다.
이렇게 참회시에 해당하는 시편 51편은 1절에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붙인 표제와 함께 시의 내용이 구구절절이 참회와 함께 용서를 구하는 것에서 저작자와 함께 이 시가 지어진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표제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의 절정기에 있었던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일로 나단 선지자에 의해 그 죄악이 드러나는 위기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회개하며 이 시를 썼다.
이러한 시편 51편은 우리 한글성경(개역개정)은 19절로 되어 있으나, 원문은 21절로 되어 있어 2절 더 많다. 이는 원문의 1절부터 3절까지가 한글성경에서는 1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구분에 의해 단락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1-2절 /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간구
․ 3-6절 /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죄인식
․ 7-12절 / 죄의 용서에 의한 회복을 구하는 시인의 간구
․ 13-19절 /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시인의 서원
(1)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주께 돌아오게 할 것임(13절)
(2)주를 찬송하여 널리 전파할 것임(14-15절)
(3)주의 제사의 회복에 있을 것임(16-19절)
2. 시편 51편 해설
2-1.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간구(51: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편 51편은 첫 절에서의 표제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에서 (1) 시의 저작자가 ‘다윗’인 것과 함께 (2) 이 시가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곧 지휘자의 인도로 연주된 제의 음악으로 쓰였으며 (3)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인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본 시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있으면서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지의 전투에 그를 몰아넣어 전사케 한 파렴치하고 흉악한 범죄(삼하 11장)를 선지자 나단에 의해 지적을 받고 회개하며 지은 시이다. 따라서 본 시는 참회시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시는 참회로만 내용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회개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와 그로 말미암은 소성된 영혼이 하나님께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에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 기도에서 보듯이,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은 자신의 죄악을 없애주시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시인은 먼저 “주의 인자를 따라 은혜를 베푸실 것”을 구하였는데 ‘주의 인자를 좇아’는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는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로도 표현이 되고 있는바 여기서의 ‘긍휼’은 원문의 단어가 지닌 의미가‘(주의) 인자’로 ‘언약적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따라서 시인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를 구함에 있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과 그리고 또한 자신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그 언약에 뜻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것을 바람에 있은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시인의 처신에 영향을 받으며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시인의 죄악 중에서 성취되니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있게 해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를 시인의 믿음에 일으켜 그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게 하며 그가 지은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함에 있게 하시니,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간구에 있은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에 있으신다. 이는 곧 이와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는“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의 응답에 있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2절에서는 1절에서의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라고 구함에 있는 간구가 어떻게 응답되고 있는지를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의 말씀을 통해서 알려준다. ‘죄악을 말갛게 씻으신다’2)는 1절에서의 ‘은혜를 베푸시고’에 있는 ‘죄악을 지워주신다’는 것을 또 달리 표현한 것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죄를 깨끗이 제하신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이 모두는 다 제의적 표현을 사용하여서3) 같은 뜻을 반복함으로써 죄 용서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구함에 있을 수 있는 실상은 죄인을 용서하여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절대적 사랑이 하나님의 언약에 기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2-2.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죄인식(51:3-6)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죄의 고백과 죄 용서의 구함에 있은 시인은 3-6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그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죄인식’을 드러낸다. 이 죄인식이 있음으로 해서 앞절에서의 죄의 고백과 죄 용서의 구함에 있은 것이었다. 이는 죄 용서의 간구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는 것으로 3절이 개역개정의 한글성경은 ‘무릇’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원문은 ‘왜냐하면’을 뜻하는 단어로 서술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그는 “무릇(왜냐하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원문에 의해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왜냐하면 나의 죄과(허물)들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이다. 시인은 자신의 죄과를 알고 있으며, 그 죄가 항상 자신 앞에 있음을 인식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앞에서의 ‘내 죄과를’은 시인이 하나님을 거부 또는 거역하는 악을 저지르는 행위에 있은 잘못(허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내(나의)’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뒤의 ‘내 죄가’는 ‘과녘을 벗어나다’를 뜻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서 시인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거역하는 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악을 행하는 죄를 범함에 있었다. 시인은 그러한 자신을 알고 있었으니,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아는 것, 또한 경험적인 앎인 분명한 지식을 의미하는데,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는 것에서 이다. 그러므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는 “바로 제 자신이 저의 범죄를 알고 있으며”라고 사역할 수 있다. 시인의 이 자각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물으시는 하나님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에서 보게 되는 죄인식의 몰지각에 있은 가인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시인은 마치 “나는 내가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나이다. ‘내가 알지 뭇하나이다’(창 6:9)라고 가인이 말한 것 같이 나는 말하지 아니하나이다. 내가 이전에 수치스럽고 어리석게 핑계하고 내 죄를 가볍게 말했던 사실을 나는 지금 이 회개의 시 가운데서 당신과 당신의 선지자와 온 교회 앞에서 시인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알 것이옵니다. 혹은 시인할 것이옵니다’라고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자기의 죄에 대한 겸손한 지각을 계속 갖고 있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시인은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죄를 원문에서는 복수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에서의 ‘(내) 죄과’는 하나의 죄가 아닌 그 이상의 죄를 의미하고 있다. 시인이 자각하고 있는 그의 죄는 한 뿌리로부터 솟아난 것이지만,간음,반역,잔인 등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가지 죄 안에 쌓여 있었던 많은 죄악들이다. 시인의 이러한 죄 인식에 대한 자각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충신 우리아 장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전사케 하는 악함에 있은 것으로, ‘간음하지 말라’하시고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율법의 계명에 의해 그의 죄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 굴레 씌워진 주홍글씨가 항상 눈앞에 어른거리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시인은 그 죄를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지은 죄가 눈에 선하니 항상 눈에서 떠나 있지 않고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4)
그런 시인은 4절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는 표현은 그가 가진 죄의 인식이 그가 죄를 범함에 있은 대상인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아 장군, 그리고 다윗 왕과 이들 사이에 있은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신하들, 그들 모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만 의식하고서 하나님께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시인인 다윗이 저지를 죄악이 하나님께만 알려져 있어 하나님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여 알려주셨듯이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삼하 12:12) 하나님께도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 악한 죄에 시인인 다윗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하는 죄의 자각에 있은 것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이를 감추기 위하여 그의 남편이요 충신인 우리아 장군을 사지의 전장에 보내어 전사하게 계획을 꾸민 죄악과 그에 따른 죄책을 밧세바에게도 우리아 장군에게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시인은 ‘피 흘린’죄가 자기를 무겁게 누르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구원받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가 율법의 계명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에 있은 하나님을 향하여 죄악을 저지름에 있었다는 깊은 자각에서 토로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의 원문 분석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개역 개정 한글성경에는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히브리어 성경 원문(맛소라 본문)은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범하였다고 강조 형태의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께만 범죄하여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함에 따라 죄의 자각의 깊은 인식에 있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번역성경에서 보는 대로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또한 현대어성경에서 보는 바인 “내가 정녕 주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며 주께서 번연히 보고 계시는 줄 알면서도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이것의 잘잘못을 가리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에게 벌 내리시는 것은 백 번 옳으신 일입니다.”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머리를 꼿꼿이 할 염치가 없다. 하여,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벌하실 하나님께 몸을 낮추어 바짝 엎드리게 된다.
그리고서 시인은 5절에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그 죄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된 것인지에 인식을 하고 있다. 한글성경에서는 번역하고 있지 않아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은 “보라”’ 또는 “보소서!”라고 구절을 시작하고 있어서 시인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깊은 탄식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다. 시인이 이처럼 깊은 탄식에 있은 것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주목하도록 주의를 이끄는 ‘보라’, ‘보소서’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참으로’ 또는 ‘그래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차학순은‘ 시 51편 – 사죄의 기도와 미래의 소망’이란 글에서“그는 의미의 비약적 강조를 위해 사용하는 ‘참으로’를 사용한다. 참으로 자신은 죄악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하였기에 자신이 죄에 관해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시인이 이처럼 ‘참으로’라고 강조하며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죄악이 무엇에 의해서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출생하였다’에서의 ‘출생하다’는 ‘몸을 꼬다’, ‘몸부림을 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출산 시 수반되는 고통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출생이 ‘죄악 중에서’라고 함으로써 인간이 날 때부터 고통스런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동의적 대구의 표현인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출생하기 전인 모태에서부터 이미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어머니에 의해서 죄가 전가되었다거나(모태 전가설) 어머니가 부정하게 아이를 가졌다는 것(모태 부정설)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원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이 거듭하여 말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롬 5:12, 18, 19)에 있는 것이다.
죄악의 뿌리를 언급한 시인은 6절에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보소서,당신은 내면들 안에서 진실함을 갈망하십니다. 그리고 숨겨진 부분 중에 당신은 나에게 지혜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은밀히 지혜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이다. 여기서도 5절에서처럼 구절의 시작이 ‘보라’, ‘보소서’가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한글성경이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인이 자신의 마음의 진실 – 죄로 오염되어 부패한 본성 - 을 알 것을 갈망하신다. 그러기에 내면의 은밀한 깊은 곳인 그의 마음의 본성을 차지하고 있는 죄를 자각함에 있는 지혜를 그의 마음에 가득 채움에 있게 하시는 것으로 시인으로 하여금 그 탄원에 있게 하시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나타나는 내적인 진실이며, 사실 그와 같은 것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그 이해를 다음과 같이 가졌다.
이 구절은 다윗이 자기 죄를 자기가 잉태된 시간에까지 찾아 내려갔을 때,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구실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어린 시철부터 자기는 영원한 죽음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온 생애가 정죄를 받아야 할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읽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부패와 대립시키어 다음과 같은 점올 암시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설 빼마다 하나님은 거룩함과 정직을 즐겨하시는데,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온갖 간사함올 깨끗이 씻고 순결하게 되지 않는 한, 우리의 생활이 그가 주신 율법의 일점일획에 부합이 되더라도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께서‘중심에’있는 진실을 원하신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은밀한‘내 속에’지혜가 은밀하고 심오한 방법으로 자기 마음에 알려지게 되면 그의 죄는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된다.
시인의 마음속에 은밀한 곳에 주어진 지혜는 그의 마음 속 깊은 본성에 차지하고 있는 은밀한 죄를 숨김없이 끄집어낸다. 그에 따라서 시인은 참으로 죄악 중에 출생한 죄를, 어머니가 죄악 중에 잉태한 죄를, 그 죄에 의하여 자기 과오가 참으로 큰 것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본성이 완전히 썩었다는 감정을 갖기까지 이르고 더욱 깊이 뉘우치고 있다. 그런 그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대로 자기의 생각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서 그는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한 가지 죄에 딸려 있는 많은 무거운 죄악된 행동들을 깨닫게 됨으로써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깨달아 자신을 깊이 낮추는 중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함에 있었다.
2-3. 죄의 용서에 의한 회복을 구하는 시인의 간구(51:7-12)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인은 본 시의 첫째 단락인 1-2절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있었으며, 둘째단락이 3-6절에서는 그 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다루었었다. 그리고 이제 셋째 단락인 본 7-12절에서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있은데 따른 회복을 구하는 시인의 간구를 다룬다.
먼저 시인은 7절에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은 이 구함에 있는 간구를 통해서 자신에게 일어날 회복 불능에 있었던 죄의 상처로부터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신뢰하고 그 의존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묘사하여 표현하고 있는 두 가지인 ‘우슬초’와 ‘흰 눈’을 들어 정결의 회복에 있을 것을 말하였다.
여기서 ‘우슬초’는 담장 밖에서 자라는 작은 관목을 가리키는데(왕상 4:33), 무성하며 그 잎은 향기가 진하고,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며, 약초로 사용되었다. 이 우슬초는 이스라엘의 제의에 쓰여 정결 의식에서 피와 물을 바르는데 사용되어 유월절에 문설주에 피를 뿌릴 때(출 12:22), 나병 환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레 14: 4, 6, 49 , 51, 52), 시체와 접촉해서 부정하게 된 사람을 정결케 하는 데(민 19:6, 18) 사용되었다. 시인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라고 구함으로써 우슬초에 묻힌 피에 의한 정결 의식에 있는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봄에 있다. 이는 “(그러면) 내가 정하리이다 …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정함’을 ‘흰 눈’을 들어 표현하는 것에서 우슬초의 피를 통해 진홍빛 같이 붉은 것으로 묘사되는 죄(사 1:18)를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은 ‘깨끗함’ - ‘거룩함’으로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피 뿌림에 있는 속죄의 정결 사역이 메시야의 구속 사역으로 있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다. 그 성취로 있게 된 십자가의 도를 온 세상에 전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죄 용서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는 ‘만유의 회복’에 있으신다. 그에 따라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3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이는 로마서 8:1, 34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말한다. 정죄함이 없는 ‘깨끗함’, 곧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됨에 흠과 점이 없다. 그러므로 주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감에 있는 천국 백성이다. 시인이 하나님께 구하여 죄 용서를 바라봄에 있은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결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8절에서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어성경에서 “이 몸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펄펄 뛸 그 소리 듣게 하소서. 비록 주께서 이 몸을 꺾으시고 뼈 부러뜨리셨어도 또 다시 이 몸이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징계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의 뼈마디가 모두 꺾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하였을지라도 징계 받는 자신이 즐거워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니, 죄 사함을 통해 죄책감으로 인한 심적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시인이 죄의 무게로 인하여 그의 육체조차 심하게 상함에서 벗어날 것이었다.5)
그러므로 시인은 9절에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하였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에서 ‘돌이키시고’에 사용된 단어는 ‘숨기다’, ‘감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직역하면 “주께서는 나의 죄들로부터 주의 얼굴을 숨기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나의 모든 죄악들을 지우십시오.”이다. 시인이 “주께서는 나의 죄들로부터 주의 얼굴을 숨기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의 얼굴을 자신의 죄로부터 숨길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인데, 시인의 죄들로부터 주의 얼굴을 돌려 외면함으로 못 본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으로 훤히 꿰뚫어 통달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시인의 죄들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질 수 없다. 그런데 그 주의 얼굴을 돌이키심에 있을 것, 곧 주의 얼굴을 숨기심에 있을 것을 구함에 있는 것은 드러낼 죄가 없게 하실 죄 용서를 구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하반절에서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간구에 있다. 죄악을 지워달라는 것은 죄를 없애달라는 또 다른 표현이며, 이는 곧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죄 사함의 은혜를 간구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 사함에 있을 때 시인은 재창조에 있다. 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6)라고 간구에 있는 것은 이것의 직역인 “하나님이여,주께서는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는 내 안에 견고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에서 알 수 있듯이 주께서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는 것은 견고한 마음으로 새롭게 하시는 재창조이다.
이 사실을 아는 시인은 11절에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구함에서 ‘성령의 내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을 중생시키면서(요 3:5)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보증자가 되어(고후 1:22; 5:5) 그를 성전 삼아(고전 3:16) 그의 안에 계속 계시며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시작하면 그분께서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않으신다. 이러한 사실이 시인의 간구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는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의 과오에 있었으나, 그런 그의 마음을 재창조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주 앞에 있고자 하며 항상 주의 성령과 함께 하고자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11절의 간구가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에 의해 너무나도 잘 알며 이를 큰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며 의존하기에 11절의 간구가 나온다.
시인은 주 앞에 있으며 주의 성령과 함께 함으로 얻는 은혜를 잘 알고 있다. 12절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구함에 있는 죄의 용서에 의한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령, 회복과 붙들림은 시인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이다.
2-4.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시인의 서원(51:13-19)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죄의 용서를 통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시인의 서원을 다루는 이 구절은 (1)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주께 돌아오게 할 것임(13절) (2)주를 찬송하여 널리 전파할 것임(14-15절) (3)주의 제사의 회복에 있을 것임(16-19절)을 서원하는 내용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2-4-1.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주께 돌아오게 할 것임(13절)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새로운 내용으로 전환하는 본 절 초두의 ‘그리하면’에 해당하는 단어는 원문에는 없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본 절 이하의 내용이 앞에서의 죄의 용서에 의한 회복을 구하는 시인의 간구가 성취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역은 타당하다. 대다수의 영역 성경 또한 이러한 문맥의 의미를 감안하여 ‘그러면’ 내지 ‘그때에는’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해서, 시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될 죄의 용서에 의한 회복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에 품은 결심인 서원을 아뢴다. 이는 세 가지로 되어 있는데 그 첫째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 가르치리니’에서의 ‘가르치리니’는 ‘배우다’, ‘가르치다’, ‘훈련(시행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시인은 이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여 죄에 대한 용서와 정결한 마음의 창조를 간절히 바라는 간구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체험한 바인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인하여 자신 스스로 죄인들을 향한 교육자가 되어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죄 용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서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자신이 받은 바인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공유하여 누림에 있게 하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다윗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품으신 선하신 뜻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시인이 서원하고 있는 주의 도를 죄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있게 될 결과인‘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2-4-2. 주를 찬송하여 널리 전파할 것임(14-15절)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인이 서원한 두 번째는 주를 찬송하여 널리 전파하겠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죄 용서에 의한 회복의 은혜를 누릴 것을 확신하였기에 여기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여 전파할 것을 서원하였다. 시인이 이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할 것에 갖는 찬송의 내용은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실 것’이기에 시인의 혀(tongue)는 그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다는 서원을 밝혔다. 여기서 ‘피 흘린 죄에서’는 원문대로 번역하면 ‘피들로부터’이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죄’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피(들)’은 밧세바와의 동침에 의한 간음과 함께 그의 남편이요 충신인 우리아 장군을 죽게 하여 피를 흘린 사건을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에 있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피 값을 짊어지고 있음도 함포하고 있는 까닭에 죄라는 말을 보충하여 ‘피 흘린 죄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죄인인 자신을 용서하여 회복에 있게 해 주심으로 그동안 상한 심령에 있어 굳게 닫혀 열 수 없었던 자신의 입술(lips)을 열어 주시면 그 입(mouth)으로 주를 찬송하여 전파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렇게 회복된 마음에 의해서 있게 되는 서원은 무릇 그 마음에 내주해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품고 있는 주와 그 주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아름다운 일의 전파에 있는 것이다.
2-4-3. 주의 제사의 회복에 있을 것임(16-19절)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이 서원한 마지막인 세 번째는 주의 제사의 회복에 있을 것임을 서약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18, 19절)는 죄인들이 너무도 당당하게 제물로 쓰일 짐승을 들고 들어와 안수하고, 도살하며, 피를 제단에 뿌리고, 희생물을 불태움으로 사죄가 이루어졌다고 돌아가 또 다시 죄를 짓는 그러한 형태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 난 모습 그대로를 부둥켜안고, 가식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옷을 찢지 않고 마음을 찢게 될 때 완성되는 것임을 본문이 밝힌다. 여기서 ‘제사’,7) ‘번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원하시는) 제사’의 표현은 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삼중적 표현으로,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이것으로 드려지는 제물이기에 이렇게 드려지는 제사의 제물 그대로를 받으시며, 멸시하지 않으실 것임을 시인은 깊이 신뢰하여 의존에 있다.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 또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무엇을 나타낼까? ‘상한 심령’의 원문이 의미하는 바는 제의적 표현인 것으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기름 등을 분리시키는 것(레 1:12)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그같은 제물처럼 자신의 마음을 찢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자기 죄의 문제로 두려워하고, 고민하며, 죄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 존전에서 애통해 하는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다(사 66:1-4 참고). 시인은 그러한 자신에 대하여 “주께서는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결코 멸시하지 않고 받아들이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풍성한 자비의 은총에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나서 시인은 자신의 참회시를 끝내는 결론으로 마지막 두 구절인 18-19절에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라고 간구하여, 자신의 죄 용서에 의한 회복으로 주의 제사의 회복에 있을 것을 자신의 문제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것으로 비약시키며, 속죄의 문제와 자기 민족의 장래와 결부시켜 언급한다. 시온과 예루살렘 성은 비유적 상징적 의미로 예루살렘 성안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시인인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기에 그 자신이 죄로 허물어지는 비참함에 있는 것은 그와 함께 묶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무너짐에 있어 황폐함에 있는 것이기에 그 자신에게 있는 용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용서로 이스라엘을 회복에 두시게 되는 것이 된다.
한편 이 시에 의한 제의적 용서와 회복은 종말론적인 관점에 의해서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상황들을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계시해 오신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그를 그동안 성전의 제단에 드려져왔던 수소(수송아지)를 비롯한 제물이 예표해 왔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희생제사의 헌신제물로 받으심으로써 그 제물에 의해서 있게 되는 피의 속죄를 통해 자신의 백성들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영원한 회복에 있게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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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켈의 시편 장르별 분류의 6개의 유형에 대해서는 찬송시, 대관시, 민족 탄원시, 제왕시, 개인 탄원시, 감사시로 보는가 하면, 또는 찬송시, 개인 탄원시, 민족 탄원시, 제왕시, 감사시, 지혜시로 보기도 하여 번역 및 학자들 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궁켈의 시편 분류를 큰 분류와 작은 분류의 구분 없이 전체를 장르별로 구분하여 보기도 한다.
2) 예레미야는 2:22에서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라고 말함으로써 시인이 표현하는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시인은 더러운 옷을 잿물을 사용하고 많은 비누를 사용하여 세탁할 때처럼 철저하게 죄로부터 깨끗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3)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에서의 ’씻으시며‘는 원문이 ’더러운 것을 제하다‘, ’의복을 빨다‘를 뜻하는 것으로, 레위기에서 정결 의식과 관련해서 많이 사용된 표현이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복을 빨아 부정함을 제거했다. 시인은 레위기에서의 이 정결 의식에 있는 제의적 정결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에 의한 죄 사함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었다.
4) 현대어성경
5)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의도적으로 전사케 하는 죄악을 범함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악을 책망하며 징벌로 다윗의 후손들에게서 끊임없이 재앙이 있게 될 것과 다윗의 아들이 죽음을 당할 것의 예언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것에 있지 않고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는 죄에 있은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다윗은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반란을 겪기도 하였으며, 그의 왕위를 잇는 후손은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왕국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열되는 국난을 겪었고, 남왕국 유다의 왕조에서 무서운 질병으로 죽고 문둥병에 걸리고(여호람, 웃시야), 살해되어 죽고(아하시야,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 아몬), 아들을 불살라 죽이고(아하스, 므낫세), 폐위 및 포로가 되는(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등 B.C. 931-586년에 걸친 제20대에 걸친 유다 왕국에서 정상적 왕국으로 평온한 시대에 있은 때는 히스기야 왕(B.C.716-687)과 요시야 왕(B.C. 640-608) 때인 단 두 시대 밖에 없었다. 다윗이 구한 죄 용서에 의한 회복의 기도에 따른 즐거움은 그가 바라본 주이신 메시야에 의해 있게 될 회복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을 인해 주를 경외함에 있었다(시 130:4).
6) 10절에서의 ‘정한 마음’은 ‘정직한 영’과 동의적 대구를 이룬다. ‘정한 마음’은 하나님의 영 - 성령 - 에 의해 지배 받기 시작한 깨끗한 마음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직한 영’에서 ‘정직한’에 사용된 원어의 뜻은 ‘견고한’, ‘안정된’, ‘고정된’이다. 그리고 ‘정직한 영’에서 ‘영’은 ‘정한 마음’에서 보는 ‘마음’을 일컫는다. 따라서 ‘정직한 영’보다는 ‘견고한 마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깨끗한 마음으로의 창조인 재장조에 있음은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임하여 계시며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거룩에 두고 거룩한 자는 계속하여 거룩하게 하시니, 이 마음으로의 재창조에 있음은 참으로 견고한 마음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은 것이다.
7) 여기서의 ‘제사’에 사용된 단어는 ‘도살’, ‘희생’, ‘희생제물’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