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 : 17 - 18절
“시기를 부르는 사람”
시기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단순하게 부러워하는 것하고 차이가 나는 것이 시기는 부러움을 넘어서 그 정도가 지나쳐 시기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악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는 굉장히 위험스러운 마음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속에서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요셉의 형들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로부터 낳은 아들 요셉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이나 부모님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형들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요셉에 대해서 편애를 했던 야곱이라서 요셉의 말을 마음에 두었지만 형들은 전혀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시기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노예로 팔 때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팔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죽이고, 파는 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마음이 시기이기 때문에 시기가 얼마나 위험한 마음인지 분명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탐심이었고, 한 사람의 이름은 시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천사가 나타나서 이 두 사람에게 좋은 제안 하나를 했는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소원을 말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첫 번째 사람이 요구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런 제안이었습니다. 탐심은 당연히 욕심 때문에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었고, 시기도 자기보다 탐심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파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시기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내 한 눈을 빼 주십시오.’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탐심의 두 눈을 모두 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시기는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마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하고 이런 마음은 애초부터 싹을 자르지 않으면 시기가 우리를 어떻게 타락시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였다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것의 속성이 가족도 죽일 수 있고, 팔아 버릴 수 있는 속성이 있고, 타인을 망하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망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가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을까를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가 무서운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P.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행위의 암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해 거금을 벌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으며, 회사원이 같은 동네의 식료품점이 잘된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질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속성으로 보면 시기와 질투는 멀리 있지 않고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질투의 불길이 아주 가까운 인관관계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 불꽃이 사나워진다고 합니다.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이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불길에 화상을 입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질투의 임상학’이라는 책을 보면 이혼한 부부의 30%가 시기와 질투 때문에 갈라선다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사도개인들이 그런 시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8절에 보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죄 없는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은 문제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대형마트에서 무척 예쁜 여자에게 다가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저와 잠깐만 대화를 나누면 안 될까요?” 여자 분은 너무도 황당해서 “제가 왜 그래야 되죠?”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아, 제가 마트에서 아내를 잃어버려서 아내를 찾으려고 그럽니다.” “그거하고 저와 대화를 나누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네, 왜냐하면 제가 예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제 아내는 어디선가 불현 듯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랬다는 것입니다. 시기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가두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도들에 대해서 시기심을 느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단순히 ‘우리는 시기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이 정도 생각에서 그치면 안 되고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사도들처럼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을 정도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겠다. 시기를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이 말씀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까지도 놓치지 않고 듣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시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부러워해서 시기할 정도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세상으로부터 시기를 받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초가삼간에 살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으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세상이 시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눈만 뜨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한숨을 쉬면서 살아가는데 마치 세상을 다 얻는 것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감사하면서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 만큼 잘 산다는 것이 곱지 않게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망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걱정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시기 받는 사람보다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패배할 것이기 때문에 시기하는 사람보다는 시기 받으면서 사는 삶이 더 성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얀마의 전설에 보면 어떤 토기장이가 한 세탁소가 번창 하는 것을 시기했다고 합니다. 토기장이는 세탁소 주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황제를 설득해서 왕실에 있는 검정색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검은 색 코끼리를 세탁을 해서 흰색으로 만들라는 것인데 세탁소 주인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코끼리를 세탁하려면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탁소 주인은 황제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필요하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토기장이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황급히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 세탁소 주인에게 배달을 했는데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릇은 곧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계속해서 고민을 하면서 다른 그릇을 만들었지만 코끼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남을 망치려고 한 토기장이의 계략 때문에 토기장이 스스로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도개인들의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사도들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그만큼 더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시기를 느낄 정도로 하나님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죽도록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지 다른 종교의 종교인들처럼 기본적인 종교 행위나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을 정도의 능력 있는 삶을 절대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시기하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그런 가정도 있고, 그런 회사도 있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런 교회들을 보면서 시기만 하고 질투만 하면서 살겠습니까? 2024년 우리에게 주셨던 첫 말씀이 열등감을 버려야지만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능히 승리하는 인생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복된 인생을 살아야지 열등감에 갇혀서 여전히 그 열등감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는 2024년도 또 영적으로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시기를 받으면 우리의 인생이 고단해 지고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시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기로부터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께서 그런 것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세요. 너무도 지혜롭고 뛰어나게 정치를 잘 하니까 온갖 음모에 시달릴 정도로 많은 시기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자 굴에도 들어가고 다니엘의 친구들은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지만 결국 승리하고 성공한 것은 그런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도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갔던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시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서 그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 발을 붙일 곳이 없어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가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짓도 했지만 결국 다윗의 자손을 통해 메시아를 약속 받는 최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기하는 것보다 시기를 부르는 삶이 얼마나 유익하고 값진 것인지를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시기를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열심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이 시기를 부를 만큼 기쁨 충만한 인생을 살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열등감에 갇혀서 시기하기보다는 시기를 부를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시기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영광을 반드시 누리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