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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복기(柳復起, 1555-1617)
* 류복기(柳復起, 1555-1617) 무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아버지는 유성(柳城, 1533- 1560)[스물여덟] 무실(水谷, 수곡)입향 시조.
외삼촌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사사 받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 조선시대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학자.
기양서당(岐陽書堂)[1615]을 설립하였다.
[족보상으로 습(濕)을 1대로 치면] 임란의 의병장은 유습의 9세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로 이어질 것이다.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 등 6형제를 두었다.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를 근거지로 임동면 박곡리·마령리·고천리와 예안면 삼산리 등지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이어졌다.
첫째 1592년 음력 6월 1일에 안동에서 가장 빨리 배용길(裵龍吉), 김용(金湧), 류복기(柳復起)는 거의(擧義)할 것을 공모(共謀)하고, 곽재우와 협력하여 진주성에서 싸웠다.
전란후 1598년 안동에는 기민이 가득했다. 이에 류복기는 가마솥을 길에 걸고 죽을 끓여 구휼하였다. 가문의 어린 후학을 양성을 위해 1615년 ‘기양서재(岐陽書齋)’라 제액(題額)하였으며, 후학을 교육하는 장소로 삼았다.훗날 기양서당이 된다. 만년인 1617년 2월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56PLA)
* 참고: 영가지(永嘉誌):권기(權紀)가 1602년(선조 35)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지시에 따라 편찬에 착수. 永嘉誌 卷4, 書堂.
#1. 기산 충의원(2012년 설립)
전주 류씨 수곡파 종회가 설립한 충효사상을 연구하는 법인이다.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산 62, 63-2번지 귓골
(사) 사무실: 경북안동시 영가로 10 운흥동 .
기봉의 의병활동
“신사하석(身死何惜, 내 한 목슴 나라에 바친들 무엇이 아까우랴!)
#1-2
- 기산충의원(岐山忠義院) 참례,
- - 전주류씨 수곡파 화수회의 길을 따라서, 2023 06 01.
강당에 총회장(지휘),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분헌관(다섯분), 이외에도 여러분들이 준비 중이었다.
총회장의 옷은 붉은색 관복(당상관), 나머지 헌관들은 청색 관복이며, 각 후손들 중에서 참례자들은 제관과 삼베로 된 제복을 입었다. 나머지 참례자들은 정복이거나 평상복이었다. 제관과 제복을 입지 않는 분들은 잔디 위에서 부복하고 절했다.
참례자들이 많아서 사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분들은 사당과 강당 사이에서 낮은 마이크 소리에 따라 집례를 따랐다.
차례(순서)가 중요한 것은 똑 같은 자리에 둘이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순서를 따르는 것은 시간이 지나야, 다음 순서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홀기(笏記)의 글을 접은 종이 쪽이 10면이 넘는 것 같다. 행사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서툰 점이 있었는데, 주변에서 예행연습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옆에서 이 정도의 행사는 리허설이 필요하다고 한다.
200인분의 잿밥(비빔밥)이 모자랐단다. 밥을 준비하고 비빈 찬방 식구도 다음 밥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참예자들의 음복은 종택에서 한다고,
교육장(강당)에서 기산충의원의 연원, 그리고 안동의 독립운동에 대한 시청각 교육이 있다. 중요하다. 나중에 들르시는 분들 보시기를.
기산충의원에서, 만장과 피킷을 들고, 기봉 종택으로 ...
기봉 종택에서 문어, (안동)식혜, 술, 떡, 수박 등으로 대구, 안동, 서울 등에서 온 류가들과 참례한 다른 문중들이, 복기 종가 마당에서, 뒷풀이(후식)를 하였다.
서울 화수회 버스 차량에서 자리 삼등분하면, 앞부분은 80대와 집행부, 중간은 70대, 뒷자리에는 60대라 한다. 평일이라 연차내고 참석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들 한다. (56QKA)
* 수애 류진걸과 필란드 언어학자 람스테트 이야기가 노래방 같은 버스 속에서 간간히 흘렀다.
동산 유인식은 삼산에서 야학을 세웠고 이어서 지역 야학들을 병합하여, 유인식, 김동삼 등과 함께 내앞(천전)에 협동학교를 세웠고(1907), 그리고 한글의 전파(1919년까지) 하였다. 이들 협동학교출신들 중 아나키스트들은 한글과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가졌다. 단주(旦洲)유림(柳林, 1894-1961)은 중국에서 수애(水涯) 류진걸(柳震杰 1899-1950)은 일본에서. 이 시기에 주시경은 1926년 서울에서 “가갸의 날” 그리고 1928년 “한글날”로 정했다.
수애(水涯) 류진걸(柳震杰 1899-1950)은1923년경에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 1873-1950)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민중 속에서 산다고 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인민의 언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고다마 싯달다의 대중을 위한 첫 설법은 민중 언어인 팔리어였다고 하며, 이 설법은 “아함경” 속에 “염처경”으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사대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번역본이 있다고 한다. (56QKB)
# 2. 기양서당(岐陽書堂, 161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537-1번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기봉 유복기 관련 서당. 교육시설.
시도민속문화재.
내용
기양서당은 회헌(檜軒) 유의손(柳義孫, 1398-1450) 선생과 기봉(岐峯) 유복기(柳復起)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곳이다. 처음 설립할 당시인 1615년에는 유복기가 서재로 건립하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1716년에 후손들에 의해 서당으로 중창하였고, 그 후 추원사(追遠祠)를 세워 1780년에 유복기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806년에 유의손의 위패를 추봉(追奉)하였다.
매년 세초 정월 6일에 후손들이 사당에 정알(正謁)의 예를 갖추며 봄·가을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享祀:제사)를 지낸다. 유의손은 조선 초기의 학자로 세종때 이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유복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바 있다.
사당인 추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인 역락당(亦樂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房)이 딸려 있다.
‘역락(亦樂)’이라는 강당명은 논어의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며, 강당에 딸린 양쪽 방에도 각각 ‘숭덕재(崇德齋)’와 ‘광업재(廣業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밖에 전사청과 고사가 현존한다.
기양서당은 안동 입향 전주유씨가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장소이다. 임하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건물로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지금도 춘추 향사는 물론 하계교양강좌 등을 통해 조상의 유덕을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1979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회헌일고(檜軒逸稿)』
『안동(安東)의 서원향사(書院享祀)』(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6)
『18세기(世紀) 서당연구(書堂硏究)』(정순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안동(安東)의 문화재(文化財)』(서수용, 영남사)
*** 연관 참고 논문 ***
오용원(吳龍源, 1965-)의 「삼산 류정원의 삶과 사유세계(2020)」 - 후기 중에서 <천야 글, 2021년>
류습(柳濕,[?-?])과 그 아들들의 행적은 설화와 같다고 여긴다. 유습의 다섯 아들 중의 하나(류극서)는 정몽주보다 4년 전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습이 이방원과 동갑계라는 것은 나이 상 맞지 않는다. 영주로 그리고 안동으로 온 이야기들은 설화로서 그칠 것이 아닐 것이다. 임하 천전동에서 임동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무실류가(수곡)가 성립한다. [족보상으로 습(濕)을 1대로 치면] 임란의 의병장은 유습의 9세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영조때 활동한 삼산문중의 삼산 유정원(1703-1761)은 유습의 15세손이다. - (54LLF에서)
# 우인수(禹仁秀, 1958-), 「영조대 영남 남인 류정원의 관계 진출과 관직 생활」(2020):
인용문 둘.
<류정원[柳正源, 1703-1761]의 직계는 류복기[유습9대손] – 우잠(友潛) – 숙(橚) – 익휘(益輝) – 상시(相時) – 석귀(錫龜, 석구) – 정원[유습 15대손]으로 내려오는 가계이다. 류정원의 직계 선조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배출되지 못하였으나, 방계친족에서는 문과급제자나 생원·진사가 대대마다 끊이지 않고 배출되고 있었다. 종고조인 직(㮨)은 진사로서 효종대에 성혼과 이이의 문묘종사에 반대하여 안동지역 유림상소를 이끈 소두(疏頭)로 활약한 인물이었고,...>
<당시 전주류씨 가문 전체는 퇴계 이황 학맥의 자장 속에 있었다. 류정원의 6대조인 류복기[1555-1617]가 의성 김씨가의 외손으로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상태에서 외가의 도움으로 성장하였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외숙인 학봉 김성일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권유로 안동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활약할 때부터 확정되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류정원의] 종고조인 류직(㮨, [1602-1662])은 효종대에 성혼과 이이의 문묘종사 논의가 서인 중심으로 일어났을 때 영남의 남인 유생 90명이 서명하여 올린 반대 상소의 소두로 활동한 바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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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 회헌(檜軒) 유의손(柳義孫, 1398-1450)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세종조(世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이 되었고, 또 1436년[丙辰年] 승진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세종(世宗)이 그 사람됨을 알아서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삼아, 드디어 도승지(都承旨)를 제수하였다. 세종의 대우가 심히 후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였으나, 잘못한 일이 있어 벼슬이 떨어졌다.
1555 기봉 류복기(柳復起, 1555-1617) 무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족보상으로 습(濕)을 1대로 치면] 임란의 의병장은 유습의 9세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로 이어질 것이다.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 등 6형제를 두었다.
1602 백졸암 류직(柳稷, 1602-1662), 자(字)는 정견(庭堅), 호는 백졸암(百拙菴), 기봉의 손자. 전주 류씨 수곡파 11세 류직(柳稷) / 인조11년(1635) 황해도 유생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문묘에 배향하려는 논의를 일으키자, 일부 조신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함께 배향하기를 소청하였는데 효종 초에 성균관에서 또한 거기에 찬동함에 내외가 호응하여 선비의 여론이 모아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남선비들이 이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릴 때 공을 영수(領袖)로 추대하므로 천여명의 선비를 거느려 예궐하여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저지시켰기 때문에, 반대편의 미움을 사게 되어 공은 황첨(黃籤)에 붙여서 유적(儒籍)에서 빠지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잃게 되자 향리에 서채를 지어 백졸암이라고 하고 학문에 전심(專心)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바쳤다.
1703 삼산 유정원(柳正源, [1703(숙종 29)~1761(영조 37)] 그리고 삼산문중의 삼산 유정원은 유습의 15세손이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다.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32). 본관은 전주. 자 공회(公晦). 호 호고와(好古窩). 할아버지는 류정원(柳正源), 아버지는 류만휴(柳萬休)]
*** 7의사 소개*** *** ***
# [사단법인] 기산충의원(岐山忠義院)
http://www.adgisan.or.kr/sub1/sub1-4.html
- 애국헌신 충의원 7의사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의병 활동.]
* 류복기(柳復起, 1555-1617)
류성(柳城)의 장자, 자 성서(聖瑞). 호 기봉(岐峯)
외조부는 청계 김진(靑溪 金璡). [외삼촌]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생질이자 문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6월 초1일 안동지역세어 제일 먼저 동지들을 모아 창의하였는데 당시 나이 38세였다. 공이 기록한 임란창의록에 임란 초기의 중요활동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향중에서 죽기를 각오한 선비(死士)를 모집하였는데, 장남 우잠과 차남 득잠이 배행하겠다고 나서자 3남 지잠, 4남 수잠, 5남 의잠 등도 어린 나이임에도 분기하여 참전하였다. 이에 따라 아들 5형제를 모두 대동하고 창녕군 화왕산성의 방어사 곽재우 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수성하였다. 전후에는 흉년이 겹쳐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였는데, 길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쑤어 많은 사람을 구휼하였다.
*류복립(柳復立, 1558-1593)
자 군서(君瑞). 호 묵계(墨溪). 류복기의 아우.
임란 당시 35세에 참전. 계사년 1593년 36세로 진주성에서 순국. 행장에 의하면, 1588년 무렵 큰집(류윤덕)으로 출계한 류복립은 임란이 발생하자 생가인 무실에서 형님 류복기를 따라 창의하였다가 이어서 외숙인 학봉 김성일을 따라 참전하여 사천 고성 등을 수복하였다. 1593년 4월 29일 학봉이 진주성에서 순국하자 학봉 휘하에 있던 박성 이노 조종도 오운 류복립 등이 상사를 주관하여 지리산에 가장하였다. 이후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우병사 최경희 등과 회합을 갖고 서로 힘을 합하여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60여일의 항전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 최경희 등은 모두 강물에 투신 자결을 하였고, 주부 수문장 류복립은 오직 단신으로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어 분전하다 36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1719년(숙종45) 이조참관에 추증되었고 1892년(고종29) 이조판서에 가증되었다. 1729년(영조5)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1802년(순조2) 진주 창렬사에 추향되었다.
*류우잠(柳友潛, 1575-1635)
류복기의 장자. 자 상지(尙之), 호 도헌(陶軒)
1592년 임란시 부친 류복기가 6월 초1일 안동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고 8월 20일 안동열읍향병의 참모로 참전하자 당시 1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상주 예천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활약하였고, 1594년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의 화왕산성을 수비하였다. 한편, 숙부인 류복립이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군관민 6만 여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자 류우잠은 진주로 달려가 촉석루에서 초혼하여 숙부 류복립의 제사를 지내고 왜적의 무자비한 학살로 시신을 수습할 길이 없어 경기도 고양군 선영하에 의관장을 지내고 돌아왔다.
이후 1636년 인조의 강화도 피신 소식을 듣고 후금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였고, 삼전도굴욕 이후 후진을 양성하면서 의기를 실천하였다. 1606년 永嘉誌를 만들 때에도 權紀와 함께 안동 선비 10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글은 생애와 맞지 않는다]]
* 류득잠(柳得潛, 1578-1652)
류복기의 차자. 자 열지(悅之) 호 연암(燕巖)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5세의 나이로 부친 류복기와 형 류우잠을 따라 창의하였고, 팔공산 회맹에도 참가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때에도 부친을 좇아서 화왕산 수성에 참가하였다. 전후에는 부친과 함께 기민들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 류지잠(柳知潛, 1583-1653)
류복기의 3자. 자 회지(晦之) 호 용암(龍巖)
정유재란에 부친이 사사(死士)를 모집하고 두 아들 우잠 득잠을 이끌고 창녕 화왕산성으로 향하였다. 류지잠은 당시 15세의 나이로 떨치고 일어나 함께 따라가기를 주장하여 부형의 허락을 받아 화왕산성 수비에 참여하였다. 당시 진중에는 도내의 창의명사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 참전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였다.
* 류수잠(柳守潛, 1585-1644),
류복기의 제4자. 자 양지(養之)
정유재란 당시 13세 나이로 부친과 백형 류우잠 등 제형을 따라 창녕 화왕산성 수성에
참여하였고 전후에는 부형들을 도와서 기민규휼에 힘을 썼다
* 류의잠(柳宜潛, 1588-1644)
류복기의 제5자. 아명 락잠(樂潛). 자 의지(宜之)
정유재란 당시 10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부친과 백형 류우잠 등 제형을 따라 창영 화왕산성 수성에 협찬하였고, 전후에는 부형들을 도와서 기민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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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산충의원 – 연혁(沿革)
2012. 9. 1 (사)기산충의원 설립발기인총회
임원선출 이사 11인 선임
2012. 9.15 이사회개최. 초대 류목기이사장 선출 (주)풍산부회장
2012.11.20 사단법인 기산충의원 설립허가신청 (경상북도)
2012.12.12 사단법인 기산충의원 설립허가 (경상북도)
2012.12.26 사단법인 기산충의원 법인등기등록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
2012.12.30 사업자등록(안동세무서)
2013. 6.30 지정기부금단체 지정(기획재정부)
2015.12.26 2대 류목기 이사장 중임
2017. 2.26 3대 류하성 이사장 선출
2018.12.26 4대 류희붕 이사장 취임
2021.12.26 5대 류희붕 이사장 중임(21. 10. 20. 선임)
[2023, 06 01(목) 제13회 의병의 날 기념행사. ]
- 전주류씨 수곡파 서울화수회장 류종호 배상
### 참조: 이광우 논문 {논1971이광우21기봉류복기}
“전주류씨(全州柳氏) 수곡파(水谷派)의 안동 정착과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의 생애”
- 이광우(李光宇, 1971-), 국학연구, 한국국학진흥원, 2021.03, 301-336쪽.
<<이광우(李光宇, 1971-)의 “전주류씨(全州柳氏) 수곡파(水谷派)의 안동 정착과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의 생애”(2021)의 논문은 역사학의 논문이다. 논자는 류복기에 대해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는 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출신의 사족으로서 퇴계학맥(退溪學脈)의 학통을 계승했다. 그는 향촌에 머무르며 학문에 침잠하고 후학 양성에 힘쓸 뿐, 관작(官爵)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처사형 선비였다.’고 평한다.
<“류복기는 향촌에서의 위상을 바탕으로 중앙의 일족과 수령으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했으나, 관작에는 뜻을 두지 않은 채, 가문의 번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교화 교육 활동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류복기의 행적은 16~17세기 재지사족 가문이 향촌사회에 정착하는 과정과 처사형 선비의 존재 양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된다.” - (이광우 논문 마지막 문단)
<이 논문은 류복기에 대한 학문적인 검토이라기보다, 가문과 세력의 연관 속에서 안동에 정착하는 선대의 과정과 당대의 전개를 그려놓았다. 임란 7년을 겪는 시기라 변역기(變易期)에 자신과 가문을 보존하며,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통한 규율을 심으려 노력하였다. 관직보다 향토의 터전 보존을 더 중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617년에 별세하였기에 병자호란과 정묘재란에 대한 과정은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55LKC)>>
(6:01, 56PLA) (7:09, 56QKB)
* 논문 원문 참조: {논1971이광우21기봉류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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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자료41QKF *************족555LBG08QKF
류복기(柳復起:1555∼1617)
류성(1533~1560)과 내압 의성 김씨 사이에서 난 두 형제 중 맏이 류복기이다. 복기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615(광해군 7년)년에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양서당'을 건립하였다.
기양서당[岐陽書堂, 1615]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
지정번호 경북민속자료 제17호 / 지정연도 1979년 12월 18일
소장 류승우 / 소재지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537-1번지
시대 조선시대 / 분류 가옥
1979년 12월 18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유의손(柳義孫)과 유복기(柳復起:1555∼1617)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전주유씨 수곡파의 세덕사(世德舍)이다. 앞쪽으로 임하댐이 보인다. 원래는 안동군 무실 남쪽 산록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보수하였다.
처음에는 유복기가 1615년(광해군 7) 서재로 건립하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으나 1716년(숙종 42)에 후손들이 서당으로 중창하였다. 그후 사당인 추원사(追遠祠)를 세워 1780년(정조 4) 유복기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6년(순조 6)에 유의손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였다. 매년 정월 6일에 사당에 참배하며 매년 3월과 9월 첫 정일(丁日)에 향사를 치른다.
추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당인 역락당(亦樂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의 방이 딸려 있다. 역락이라는 강당명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강당에 딸린 양쪽 방에도 각각 ‘숭덕재’와 ‘광업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의손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 또는 농암(聾巖)이며, 세종 때 이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냈다. 유복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성서, 호는 기봉으로,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배용길(裵容吉) 등과 함께 예천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다.
전주 류씨 현세사적 - 전주류씨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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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류씨 수곡파(삼가정파) 가문2008.05.22 20:34:36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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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류씨 수곡파(삼가정파) 가문
최근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는 데 보람을 찾는 관계 지향적 리더십과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리더십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선조 명문가의 교육철학을 보면 이미 5백 년 전에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느 명문가 못지않게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주 류씨 가문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류복기가 1615년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기양서당*
지식시대를 맞은 요즘 기업경영에서는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적 리더십이 퇴조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리더십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리더십의 권위자인 진 리프먼 블루먼은 인재를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들고 있다. 관계 지향적 리더십은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는 데 보람을 찾는다. 특히 이 리더십은 사회가 경쟁 지향적으로 되면서 실종되다시피한 덕목인 상호의존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엄마형 리더십' 실천한 선조들
관계 지향적 리더십에는 협력형, 헌신형 그리고 성원형 스타일이 있다. 협력형 스타일의 사람은 팀을 구성해 협력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헌신형 스타일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데서 만족을 얻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데서 진정한 만족을 찾는 것이다. 성원형 스타일은 사실 다른 사람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성취감을 북돋워 주거나 고무한다. 그들은 스승처럼 조언을 하거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자신이 동일시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업적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다. 기업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리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고도의 조직 통합력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은 특히 창업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성장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하겠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고 자녀교육에 앞장선 가문의 기획자들은 바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성 김씨의 청계 김진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요즘 글로벌시대에 국가나 기업에서 기획형 인재가 필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문 또한 청계와 같은 헌신적 리더의 존재여부에 따라 명문가로의 도약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글로벌 인재를 만들어내는데 보람과 진정한 만족을 찾는 교육자들 또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교육현장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다른 요인들이 있지만, 교육현장에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은 가문의 기획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남성적 리더십이라기보다 여성적 리더십에 가깝다. 퇴계 이황의 경우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고기를 보내는 등 조언과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섬세하게 보살폈다. 일찍 아내를 잃은 청계 또한 아내 역할을 손수 하면서 자녀들을 교육하며 뒷바라지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선조들은 가부장적 권위와 질서가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500년 전 신분사회에서 이미 여성적인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요즘 지식위주의 감성시대에 요구되는 '엄마형 리더십'을 이미 500년 전에 도입했던 것이다.
핵분열 하듯 폭넓은 인재 배출
진성 이씨의 퇴계 이황과 의성 김씨의 청계 김진에 이어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지닌 가문의 기획자에 의해 명문가문으로 부상한 경우로는 안동일대의 전주 류씨 수곡파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안동 일대 전주 류씨의 경우에는 좀 특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수곡파와 그 지파인 삼가정파 후손들은 퇴계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여느 명문가들에 못지않게 수많은 인재들을 낳았고 문집 또한 많기로 유명하다. 전주 류씨는 조선시대에 의성 김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반남 박씨와 함께 문집이 가장 많은 '빅5 가문'으로 꼽힌다.
전주 류씨 수곡파는 16세기 초 안동시 임곡면 수곡리 무실에서 시작돼 박실, 삼산 등으로 분가하면서 지손(支孫)들이 퍼져나갔다. 전주 류씨 가문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다름 아닌 청계이다. 전주 류씨가 안동에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강릉판관을 지낸 류식의 손자인 류성(1533~1560)이 청계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청계는 8남매를 키워 5형제를 과거에 합격시키는 등 의성 김씨를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만든 자녀교육의 '원조 CEO'라고 할 수 있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전주 류씨 수곡파는 안동 무실에 살기 시작하면서 청계의 사위가 된 류성이 처가의 가풍을 흡수했다. 전주 류씨는 무실마을에 살면서 고개 너머 '내앞 마을'의 의성 김씨와 수백 년간 혈연과 학연을 이루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청계의 관계 지향적 리더십이 전주 류씨 가문에 접목된 것으로 청계의 영향력이 자신의 가문을 넘어 전주 류씨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류성이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28세에 요절하자 부인은 친가의 예법에 따라 어린 아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편의 3년 상을 마치고 자결했고 두 아들(류복기, 류복립 형제)은 외할아버지 청계가 데려가서 양육하였다. 또 외숙부 학봉 김성일은 외조카를 자기자식처럼 대하며 지극 정성으로 가르쳐 이들 형제는 문장과 덕행으로 존경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615년에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양서당'을 건립하였다. 기양서당은 한양에서 안동에 내려와 정착한 전주 류씨(수곡파)가 의성 김씨의 학문적 영향을 받고 학문토론과 교육을 담당하는 정신적 전당의 역할을 했다. 전주 류씨는 벼슬에 크게 나아가지 못했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하지만 학문에 힘쓰며 가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 집안마다 서당이나 초당을 지어 앞다퉈 후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전주 류씨는 다른 가문과 달리 인재가 마치 '다핵분열'하듯이 폭넓게 배출되었다.
수곡파는 다시 삼가정파로 분가를 거치면서 번성하게 된다. 삼가정파의 기획자로는 류봉시가 꼽힌다. 1674년에 류봉시는 승현과 관현 두 아들을 데리고 자신이 살던 무실 종가에서 분가해 인근의 위동이라는 한적한 곳에 터를 잡았다. 류봉시는 당장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서재를 지어 이를 '삼가정'이라 하고 세 그루의 가죽나무를 심었다. 자녀교육에 필요한 회초리로 삼기 위해서였다. 두 아들은 부친의 바람대로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때 류봉시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장남 류승현(1680∼1746)은 숙종 때 문과 급제해 종성부사 등에 올랐다. 동생 류관현(1692∼1764)도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에 올랐다. 그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그의 치적이 기록될 정도로 목민관 재임 때 선정을 베풀었다.
두 형제는 위동에서 다시 분가를 해 각각 지금의 박실과 한들에 자리를 잡아 삼가정파라는 새로운 지파를 이루었다. 특히 류승현의 가학은 류도원-류범휴-류정문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문이 깊어져 '3대 도천(道薦)' 가문에 오를 수 있었다. 또 류관현은 4대만에 퇴계학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1777~1861)을 배출하게 된다. 도천이란 그 지방의 감사가 도내의 유능한 인물을 천거하는 것으로 그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주로 천거돼 자연히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벼슬길에 나가는 길은 크게 과거에 합격하거나 벼슬을 지낸 조상 덕에 관직에 나가거나(음직) 도천(道薦) 받는 3가지 방법이 있었다.
부모의 솔선수범 교육법 실천
현재 전주 류씨를 대표하는 재계인사인 류목기 (주)풍산 부회장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형수 등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류 회장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형수(정봉순)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인자하고 특히 이웃과 나눔의 정이 대단했다. 공부를 위해 안동읍(현재 안동시)에 살았는데 때마침 형님이 막 결혼을 한 신혼 때였다. 안동 단칸방에서 신혼 살이를 했는데, 그때 류목기는 형님의 단칸 신혼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정봉순 씨는 "풀을 뜯어먹더라도 시동생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자신의 신혼 단칸방에 시동생을 기거하게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형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시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요즘에는 단칸방에서 신접살이를 하려는 여성들도 별로 없겠지만 더욱이 한방에서 시동생과 함께 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형수의 이런 배려 덕분에 류목기는 안동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솔저축은행 대표이사를 거쳐 (주)풍산 부회장으로 6년째 재직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류목기를 있게 한 것은 자식도 아닌 시동생을 함께 재우며 등록금을 대주며 공부시켜준 형수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류 부회장의 친형은 김천교육장을 지낸 류직기로, 자녀교육을 성공시킨 대표적인 집안으로 꼽힌다. 4형제 가운데 3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남 류영석은 종양내과 전문의로 현재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이다. 류영석은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 앰디앤더슨 캔서 센터 등에서 오랫동안 암 연구를 해온 이 분야의 권위자로 통한다. 2남 류광석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외무고시(7회)에 합격해 현재 싱가포르 대사로 재임하고 있다. 3남 류화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영정보학박사를 받았고 한솔텔레콤 대표이사로 있다. 또 4남은 프랑스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4형제를 키운 자녀교육 방식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솔선수범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항상 책을 읽었는데, 늦은 밤 자녀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함께 책을 읽었다고 한다. 특히 류광석이 외무고시를 공부할 때에는 직접 일본어 책을 번역하며 아들의 고시를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70년대 초에는 외무고시 시험과목인 외교사에 대한 책이 별로 없었고 일본어로 된 책이 필독서로 꼽혔는데, 일본어에 능통한 어머니가 직접 번역해주었다는 것이다. 류 부회장은 "옛말에 '아이들은 어른 등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어른들이 솔선수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녀교육은 없다"고 말한다. "옛말에 '매끝에 효자난다'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이는데도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행동이 바르지 않으면 회초리로 따끔하게 해야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요즘에는 너무 자식을 위한답시고 매를 안드는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선 필요하다면 체벌을 해야 합니다."
류 부회장은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방목'하는 교육을 해 자립심도 없고 책임감도 부족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잘못을 반복하는 아이에게는 때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적으로 자녀교육을 잘 한다는 유대인도 성경에 근거해 '채찍에서 지혜가 나온다'며 체벌을 용인하고 있다. 류 부회장은 "유대인들은 13세 이후에는 아이가 이미 성장한 상태여서 회초리를 들지 안는다"면서 우리도 유대인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일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면서 "자녀교육에 앞서 '어머니 교육'이 더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교육 못지않게 가정에서의 생활교육이 중요한데, 요즘에는 아예 부모들이 생활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계모임에 나가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돈을 두고 왔으니 자장면을 시켜 먹으라는 어머니들이 있어요. 또 자신은 TV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에게는 공부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대학교육을 받아 지식이 풍부해 직접 자녀를 지도할 능력이 있는데도 아이들을 학원이나 과외로 내몰고 있어요. 귀찮으니까 과외를 시키고 학원에 보내는 거죠. 어머니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아이도 제대로 바로 설 수 없고 자녀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비결은 조상의 정신을 배우는 것
안동 일대의 전주 류씨들은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수재집안'으로 통한다. '주실에 한양 조씨가 있다면 무실에는 전주 류씨가 있다'는 말이 안동 일대에 회자될 정도로 인물이 많이 나는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후기에는 퇴계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류치명(1777~1861)을 배출했으며 해방 후에는 약 20명의 대학교수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공보처장관을 지낸 류혁인을 비롯해 시인 류안진 서울대 교수 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소설 〈영원한 제국〉의 작가인 이인화(본명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도 이곳 출신이다. 요즘 뉴라이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류석춘(연세대 교수)과 류석진(서강대 교수) 형제는 류혁인의 아들이다. 시인인 류안진(서울대 교수)은 3자매가 대학교수로 동생인 류혜령과 류현숙은 각기 영남대, 미국 아이오아주립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보듯이 오늘날 안동의 전주 류씨 후손들은 학자와 시인, 소설가 등을 많이 배출해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어려서부터 경학과 예학을 숭상했던 조상들의 문(文)과 행(行)을 직접 보고 들으며 조상들의 정신이 담긴 문헌을 통해 학습해왔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곡파(삼가정파) 후손들은 문과 행, 충(忠)과 신(信)을 수백 년 동안 실천해 수많은 학자와 독립투사 등을 배출해왔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다른 사람을 돕고 인재로 만드는데 진정한 만족을 추구하는 관계 지향적 리더십의 정신이 수곡파 후손들에게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가풍과 그 구성원들의 품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도 숭고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떠날 제엔 시간의 모래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아마 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
외로이 부서질 때를 만나면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그 발자국을.
전주 류씨 가문의 내력을 보면 롱펠로의 시 '인생찬가'가 연상된다.
최효찬 |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저자, 비교문학 박사
420 전주류씨 수곡파 정재선생의 학덕과 생애가 나타난 논문 18
419 全州柳氏三山柳正源(전주 류씨 삼산 류정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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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류씨 수곡파(삼가정파) 가문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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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16대 종손 류장희(柳長熙)씨, 신도비따라 경북 봉화에서 여주로 이주, 서예에 깊은 조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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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도헌선생일고 41
409 증보문헌비고와 버들류씨 50
408 우암(류준근) 선생 묘지명 46
407 영남사림 전주류씨인물 63
406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 98
405 용와공 집 3대교지 42
404 직제학[극서 공]의 사적 42
403 무실 입향시기 분석 - 인의 할매 박씨의 토지매매 문서에서 50
402 제학공(류식)의 시 62
401 11세 류지(柳榰)의 승정원 일기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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