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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 좋은 명당에 자리한 ‘T’자형 정자
프롤로그
가게 하나를 열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전작업을 거쳐야 한다. 비전이 있는지, 해당 상권에 맞는 업종인지, 주변에 동종업종 가게가 몇 개나 있는지, 투자금이 얼마나 드는지, 가게 세는 또 얼마인지 등등. 하지만 가게 오픈에 있어 ‘목’ 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다. 물론 ‘목’과 상관없는 업종도 있지만, 대개는 ‘목’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이는 정자를 포함한 누정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의 풍취를 마음껏 누리고자 세운 것이 정자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되 이왕이면 내가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될 수 있는 곳이 정자가 들어설 수 있는 최적의 목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모든 산수는 오로지 명당을 위해서만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목정은 목도 목이지만, 풍수적으로도 어디 하나 나물랄 때 없는 최고 명당에 자리한 정자다.
구봉산 형제봉이 물을 만나 멈춰선 곳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는 전통시대에 사람들에게 지리와 인문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준 분야였다. 풍수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갈무리 한다는 것은 필요 없는 바람은 막고, 필요한 바람은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땅 속을 흐르는 생명 에너지인 생기生氣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기는 물을 만나면 멈춰 서고, 바람을 맞으면 흩어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생기가 뭉쳐 있는 ‘혈穴’ 자리를 찾기 위해 바람이 잘 갈무리되고, 물 흐름이 좋은 곳을 찾는 것이다.
풍수에서 터를 살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이기론理氣論과 형국론形局論이다. 이기론은 패철佩鐵이라고 하는 나침반을 무기로 터의 방위를 동서남북, 씨줄·날줄로 사정없이 쪼개가며 분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형국론은 좀 다르다. 방위보다는 터와 주변 지형지물의 형국이나 형태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익히 들어본 바 있는 금계포란형, 옥녀탄금형, 행주형, 회룡고조혈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명리학이나 관상학에 대입해보면, 이기론은 사주팔자를 놓고 인수분해 하듯 분석하는 사주명리학이요, 형국론은 ‘척보면 압니다’ 식의 관상학 정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풍수에서는 산맥을 ‘용龍’으로 표현한다. 이 산 저 산 이어진 산맥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는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또 풍수에서는 산을 격格에 따라 구분한다. 태조산太祖山·중조산中祖山·소조산小祖山·주산主山·현무봉玄武峯 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유하자면 태조산은 광역시 정도를 대표하는 산, 중조산은 시나 군, 소조산·주산은 읍·면, 현무봉은 동네 정도를 대표하는 산이라 할 수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백두산과 연결된다고 본다. 어떤 산이든 물을 건너지 않고 산맥만 따라 걷다보면 결국은 백두산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다. 하목정은 뒷산 형제봉[현무봉], 구봉산[소조산]을 거쳐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러 산을 만나게 된다. 하빈 금무산, 왜관 자봉산·소학산·유학산을 거쳐 구미 천생산까지. 물론 천생산 너머로도 계속 산들이 이어진다. 어쨌든 구미 천생산을 중조산으로 보면 혈처穴處인 하목정까지 이어진 용맥 길이는 100리 정도 된다. 이 같은 용맥의 흐름을 풍수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천생산[526m]의 한 용맥이 남동쪽으로 행룡行龍을 시작했다. 용은 왜관읍 유학산[836m]에서 고개를 높이 쳐들어 한 번 용트림 한다. 물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살피는 것이다. 용은 서쪽에 있는 낙동강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다시 남진南進한다. 소학산[624m], 좌봉산[427m]을 지나면서 낙동강과 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하빈 땅으로 넘어와 금무산[279m]에 이르자 서쪽으로 바로 낙동강이 보인다. 용은 이제 자신이 머리를 묻고 쉬어야 할 자리가 가까워졌음을 직감한다. 하산리에 이르자 용은 낙동강과 거의 한 몸이 된다. 자신의 오른쪽 몸통이 낙동강물에 닿았기 때문이다. 용은 구봉산에서 아홉 봉우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거친 기운을 다 털어냈다. 이제 머리를 묻고 편히 쉴 일만 남았다. 용은 하목정에 이르러 낙동강물을 만났다. 더 이상 남하할 수 없게 된 용은 비로소 그곳에 머리를 묻었다. 하목정 뒷산 현무봉이 용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용트림한 흔적이고, 하목정에서 낙동강 중심부를 향해 튀어나간 모래톱은 용의 마지막 남은 기운의 흔적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천생산에서부터 100리를 달려온 용의 목표는 오직 하나. 자신의 머리를 묻고 쉴 자리, ‘혈’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하목정이 바로 그곳이었다.
가야산, 금오산, 비슬산, 십리명사
우리나라 땅덩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답사를 많이 다니다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대구 달성을 기준으로 합천이니, 성주니, 구미니 하면 꽤나 먼 곳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대구 달성에서도 성주 가야산이나 구미 금오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 달성에는 비슬산[1.084m]은 물론이요, 성주[요즘은 합천 가야산이라고도 한다] 가야산[1,433m]과 구미 금오산[977m] 같은 영남 명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뷰포인트가 있다. 바로 달성 하목정이다. 이른 봄이나 가을 철 날씨가 좋은 날. 하목정 서편 뜰에 서서 낙동강 너머를 바라보면 좌에서 우로 비슬산·가야산·금오산이 죄다 보인다. 어떤 때는 이 산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날도 있는데 이때는 산정상부가 다 보일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하목정과 비슬산·가야산·금오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하목정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길과 세상은 많이 변했다. 특히 대기질은 산업화·도시화 영향으로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이 나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정이 좋은 날이면 지금도 하목정에서 비슬산·가야산·금오산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지금도 이러한대 400년 전에는 어땠을까? 아마 현대인은 상상도 못할 만큼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뒤에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하목정 누정시樓亭詩 중에서 하목정에서 바라보이는 가야산·금오산·비슬산 영봉을 노래한 시구만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자.
○ 가야산 빛 앞 물가에 떨어지고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노을 한 모양 가을일세
晩鶩孤霞一樣秋 伽倻山色落前洲 [서파 오도일]
○ 다시 멀리 가야산 빛 가리키니 긴 안개 걷힌 곳에 봉우리 몇 개 나타나네
更指伽倻山色遠 長烟破處數峰生 [창강 김택영]
○ 뿌리는 대지에 두고 하늘 남쪽에 솟았으니 / 가야산 절경 세상 모두 말하네 / 아지랑이 걷힌 해질녘 산봉우리 그림처럼 밝은데 / 최신선(최치원) 떠난 뒤 다시 누가 찾으랴
根盤大地聳天南 絶景伽倻世共談 嵐捲晩岑明似畵 崔仙去後更誰探
[하목당 16경 중 제5경 가야청람伽倻晴嵐, 전양군 이익필]
○ 맑은 기운 사람을 울림은 헛되지 않아 / 금오산 푸른 빛 예나 지금이나 같네 / 문 닫고 살던 선비가 남긴 터가 있어 / 만세청풍 매양 나를 일으키네
淑氣鐘人信不虛 金鰲翠色古今如 閉門居士遺墟在 萬世淸風每起余
[하목당 16경 중 제6경 금오취잠金鰲翠岑, 전양군 이익필]
○ 막 오르는 붉은 태양 새벽 빛 가르는데 / 비슬산 먼 봉우리 구름에 반쯤 잠겼네 / 용연사 종소리 귀에 들리는 듯 / 어느 때 돌아가 참선하는 무리와 짝을 할까
初升紅旭曙光分 琵瑟遙岑半沒雲 龍寺鐘聲如在耳 幾時歸伴坐禪群
[하목당 16경 중 제7경 비슬요운琵瑟曉雲, 전양군 이익필]
하목정 풍경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경물은 10리에 걸쳐 길게 펼쳐진 고운 모래사장 ‘십리명사十里明沙’다. 그 옛날 낙동강 700리를 따라 곳곳에 산재해 있던 십리명사는 낙동강 상류에 안동댐·임하댐 등이 건설되고, 낙동강 전 유역에 제방이 쌓이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하목정 앞도 마찬가지다.[하목정 앞 십리명사는 1990년대 초까지도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하목정 앞 낙동강변 하산유원지는 맑은 물과 십리명사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물놀이와 모래찜질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1970년대까지도 낙동강물을 그냥 마셨다고 한다] 특히 해질녘 노을이 질 때면 하늘, 낙동강, 십리명사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목정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하목정 명물 십리명사가 다 사라지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하목정 누정시 중에서 ‘십리명사’를 노래한 부분만 한 번 감상해 보자.
○ 한 굽이 이름난 호수 십리에 펼쳐진 모래밭 一曲名湖十里沙 [일휴정 이숙]
○ 모래밭 비 갠 뒤 무지개 나타나고 沙邊霽景虹初斷 [계촌 이지익]
○ 눈에 가물가물 흰 모래 십리에 밝아 / 바라보니 서리 눈처럼 평평하네 / 비록 어두운 밤이라도 도리어 낮같아 / 항아에게 말을 전해 비교도 다투지도 말게 할지니
眯眼白沙十里明 望中霜雪一般平 雖當昏夜還如晝 傳語嫦娥莫較爭
[하목당 16경 중 제9경 십리명사, 전양군 이익필]
초가집 처마선을 흉내 낸 방구매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목정 해설을 할 때는 크게 두 방향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하나는 하목정에 얽힌 스토리요, 다른 하나는 하목정 건축양식이다. 그런데 스토리 해설에 비해 건축양식 해설은 정말 힘들다. 왜냐하면 먼저 해설사 스스로 전통건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눈높이 해설’이 가능해야하기 때문이다.
전통건축을 이해하고 전달하는데 있어 제일 큰 난관은 ‘전통건축용어’다. 한자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100% 한글도 아니다. 어떤 말은 한자, 어떤 말은 한글, 또 어떤 말은 용어 하나에 한자와 한글이 뒤섞여있기도 하다. 한자용어도 어렵지만 어떤 때는 한글용어가 더 어려울 때도 있다. 한자용어는 어느 정도 한자 지식이 있으면 추측이라도 해 볼 수 있지만, 한글용어는 도무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전통건축에 사용되는 건축용어는 기본적으로 과거 일상에서 흔히 쓰던 말을 건축용어로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겐 거의 암호 수준이다. 세상이 변했고, 건축양식 또한 한옥에서 양옥으로 대부분 바뀐 탓이다. 그래서 이제는 사전이 없으면 용어 해독 자체가 안되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건축양식은 고사하고 용어부터 너무 낯설다보니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통건축물을 해설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힘든 일이다.
혹시 ‘방구매기’, ‘영쌍창’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아마 대부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전통건축용어다. 하목정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에 있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부연이고, 그 다음이 방구매기와 영쌍창이다. 방구매기는 한옥 처마구성 양식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전통 기와집은 처마선 네 꼭지점을 날렵하고 뾰족하게 처리한다. 꼭지점에 접해 있는 양쪽 처마선이 안쪽으로 휘어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통기와집 처마선 네 꼭지점에 걸려있는 긴 서까래를 추녀라 한다. 추녀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추녀 좌우로 서까래가 마치 부채살 펼친 듯 걸려 있다. 이런 처마서까래를 부채살을 닮았다 해서 ‘부채 선’ 자를 써, 선자扇子 서까래 또는 선자연扇子椽이라 한다. 선자연은 지붕 모습을 날렵하게 만들어 준다.
이에 반해 초가지붕은 반대다. 처마 네 꼭지점을 연결하는 처마선이 안으로 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바깥으로 살짝 휘어있다. 마치 배부른 한복 소매 선처럼 둥그스름하게 말이다. 이런 처마양식을 ‘방구매기’라 한다. 기와지붕은 네 꼭지점과 모서리를 연결한 선이 마치 날개 짓하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학의 날개를 닮았다면, 초가지붕선은 날개를 둥글게 말며 땅으로 내려앉은 학의 날개를 닮았다. 우리가 기와지붕선에서 날렵하고 세련된 동적미를 느끼고, 초가지붕선에서 투막하고 푸근한 정적미를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목정 처마가 바로 방구매기 처마다. 추녀 아래에 서서 머리 위 처마선을 보면 처마선이 건물 안쪽으로 휘어진 게 아니라 바깥쪽으로 불룩하게 처리됐음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와지붕선은 날렵하게 처리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하목정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럴까? 하목정을 사람에 비유하면 만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온 사대부 선비쯤 될 것 같다. 조정에 있을 때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고향에 내려와서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범부의 삶을 사는 그런 선비 말이다. 하목정은 개인 집에 딸린 정자로서는 대구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이 아닌 점잖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건축부재의 넉넉함과 높이 솟은 기둥 때문이다. 거기에다 하나를 더한다면 큰 날개를 둥글게 말며 지상으로 내려앉는 학 날개를 닮은 ‘방구매기 처마’ 때문이다.
영쌍창欞雙窓
창호窓戶는 창과 문을 통칭하는 말이다. 창은 채광이나 통풍을 위한 것이고, 문은 사람이 들고나기 위한 것이다. 한 지붕 아래 같은 공간에다 대청과 여러 개 방을 조성한 하목정은 일반적인 다른 정자와는 구조가 많이 다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T’ 자형 건물인데 ‘─’ 부분에 방 네 개와 마루[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하나, ‘│’ 부분은 모두 넓은 대청이다. 규모가 큰 마루와 몇 개 방이 한 공간 안에 있다 보니 하목정에는 여러 유형의 창호가 사용됐다. 세살문·판문·광창·들어열개문·여닫이·미서기 등이다.
대청에는 주로 널창이 설치됐다. 널창은 판문의 한 유형이다. 판문은 문 표면에 얇게 가공한 살대를 많이 끼워 넣은 살창과는 달리 한 두 장의 큰 판재를 댄 문이다. 판문 중에서도 한 두 개의 큰 통판이 아닌 몇 장의 작은 판재를 짜 넣은 문을 널판문(창)이라 한다.
대청과 방 사이에는 들어열개문[분합문]을 설치했다. 들어열개문은 문을 좌우로도 열수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문짝을 통째로 위쪽으로 들어서 허공에다 고정시키는 문이다. 주로 대청과 방 사이에 설치한다. 추운 겨울철이나 공간을 방과 대청으로 나눠 사용할 때는 그냥 여닫이문으로 사용하고, 여름철이나 방과 대청을 개방해 함께 사용해야 할 때는 들어열개문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용도의 문이다. 그래서 대청과 방 사이에 이런 들어열개문이 설치된 건물은 필요에 따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넓이거나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하목정 들어열개문 상부에는 좌우로 긴 광창光窓이 있다. 채광을 위한 창이다. 하목정 광창은 창 사이에 끼운 살대의 양쪽 끝을 둥글게 말고 가운데를 두툼하게 처리한 배밀이 기법이 적용됐다. 배밀이 기법은 과거 사찰이나 관아 등 고급건축에 적용된 옛 한옥 창호양식이다.
한편 하목정에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한때 존재했던 특이한 창호 흔적이 몇 곳에 남아 있다. ‘영쌍창欞雙窓’ 흔적이다. 영은 격자·창틀·문설주를 말하고, 쌍창은 문짝이 두 개인 창을 말한다. 영쌍창은 한 개의 큰 창틀에 좌·우 두 개 문짝이 있고, 두 문짝 사이에 문설주가 있는 창호다. 다시 말해 작은 창틀 두 개가 합쳐져 큰 창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형태다. 이러한 영쌍창은 주로 17세기 이전 사랑방이나 안방의 전면 창호 또는 대청 창에 많이 사용됐던 창호 양식이다. 그래서 옛 한옥 건물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잣대로 사용된다. 현재 하목정에서 영쌍창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윗사랑방 남쪽 창호, 대청 옆면 남쪽 창호, 대청 뒷면 가운데 창호 창틀 윗부분 등이다. 하목정이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영쌍창이었다. 하목정 창건연도 ‘1604년설’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과 한 지붕 아래, 차인방
하목정에는 재미있는 방이 하나 있다. ‘T’ 자형 건물 중 방이 설치된 부분은 머리에 해당하는 ‘─’ 부분이다. 모두 네 칸인데 방이 세 칸이고 마루가 한 칸이다.[본래는 남쪽으로 누마루가 한 칸 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하목정 출입문 가까운 쪽에서부터 순서대로 사랑윗방, 사랑아랫방, 마루방, 차인방差人房이다. 사랑윗방과 아랫방은 주인이 거처하는 방, 마루방은 서고 용도로 사용한 방이다. 그런데 북쪽 끝에 있는 차인방이 흥미롭다. 차인差人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이 장사하는 일에 시중드는 사람’ 또는 ‘옛 관청의 하급관리’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전자는 가게 종업원, 후자는 하급공무원 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조선후기로 넘어 오면서 신분제가 다소 문란해지기는 했지만, 누가 뭐래도 조선사회는 양천제良賤制를 기본으로 하는 신분사회였다. 양천제는 사람의 신분을 크게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으로 구분하는 신분제로 양반·중인·상인은 양인에 해당하고, 노비는 천민에 해당했다.
과거 양반집 구조를 보면 노비가 거처하는 공간은 대문채에 붙어 있는 문간방처럼 주인이 거처하는 공간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한 지붕 아래에 양반과 천민이 함께 기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점은 하목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목정에서 부렸을 노비들은 하목정 대문채나 고방채 등에 그들만의 별도 공간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목정 북쪽 제일 끝 방 차인방.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하인이 거처했던 방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인이 아니라 ‘비서·집사’가 거처했던 방이라고도 한다.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을 집사나 사랑주인의 신분에 따른 부관이나 비서가 거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랫사람이라 불린 하인들이 거처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빈 전의이씨를 전국적인 사대부 반열에 올려놓은 전양군 이익필이 하목정에 거처했을 때를 한번 가정해보자. 아무래도 차인방에는 하인보다는 부관이나 비서 역할을 했던 이가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익필은 무과에 급제한 장수로 무신란 평정의 공로로 양무공신에 오르고 전양군에 봉군됐으며, 사후 조정으로부터 양무라는 시호와 함께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된 고위직 인물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별을 몇 개 단 장군 또는 국방부 차관 쯤 될 것 같다. 이쯤 되면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해 만년을 보낸다하더라도 어느 정도 품위유지(?)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차인방에 몸종에 해당하는 하인을 두었다기보다는, 현역시절 부관에 해당하는 비서급(?) 하인을 두었다는 가설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하목정 차인방은 하목정에서 유일하게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다. 비록 한 지붕 아래에 있지만 두 개의 사랑방이나 마루방, 대청과는 달리 하목정의 아름다움을 100%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대청 뒤편 창을 닫으면 차인방에서는 하목정 대청조차 볼 수 없었고, 신을 신지 않고는 대청이나 사랑방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북쪽 제일 끝에 있는 차인방은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쪽문이 있다. 동쪽 문은 안채 방향, 서쪽문은 하목정 대청 뒤편으로 동선이 연결된다. 서쪽 문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차인방에 머물던 아랫사람들은 서쪽 문을 통해 하목정 대청 뒤편을 돌아 하목정 전면으로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하목정에서 태어나 17세 나이로 출가出嫁하기 전까지 하목정에서 생활한 이정자[이보로李輔魯(1901-1943)씨의 딸]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할머니가 어렸을 때 차인방에는 하인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는 하목당 여러 건물이 이미 해체된 시기였던 만큼 하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방은 차인방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누마루, 싸리나무 기둥
지금의 하목정 모습은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옛날에는 사랑윗방 남쪽으로 한 칸 누마루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랑윗방 남쪽 기둥에 남은 홈자국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누마루는 사랑윗방 남쪽 창틀 하단과 같은 높이로 설치되어 있었다. 또 사랑윗방 서쪽 문 앞에는 차인방처럼 쪽마루가 있었다. 이 쪽마루를 통해 사랑윗방과 대청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누마루와 쪽마루가 없는 지금의 하목정 사랑윗방을 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윗방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청에 올라야 하고, 그 다음 대청과 연결된 사랑아랫방을 통해 윗방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또 누마루 없이 허공에 휑하니 노출된 사랑윗방 남쪽 문을 봐도 그렇다. 이 문은 본래 사랑윗방 남쪽에 설치된 누마루로 연결된 문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사랑윗방 누마루와 쪽마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랑윗방은 지금과는 달리 누가 봐도 하목정에서 가장 격이 높은 공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4)
4) 낙동강 건너 고령군 다산면 상곡에 낙포 이종문의 손자인 장육당 이유가 건립한 장육당이란 정자가 있다. 하목정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건물형태는 거의 똑같다. 장육당을 보면 사랑윗방에 누마루와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옛 하목정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장육당에 대해서는 뒤에 나온다.
하목정에는 모두 20개의 기둥이 있다. 이중 원기둥이 17개, 각기둥이 3개다.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부분 기둥은 원기둥이고, 각기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방 동쪽 벽장 기둥에만 일부 사용됐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가사제한령’에 의해 일반 살림집에서는 원기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각기둥에 비해 원기둥은 건물의 격을 높여주는 고급부재라 할 수 있다. 하목정에 사용된 원기둥은 지름이 평균 360mm로 매우 굵고,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굵은 민흘림 기둥이다. 이처럼 하목정에 사용된 나무 부재는 전체적으로 넉넉하고 두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둔하지 않고 시원스럽고 위풍당당해 보이는 것은 건물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여한 일등공신이 하목정 원기둥이다.
재밌는 것은 문중에서 구전되기를 전면 기둥 중 두 개는 싸리나무요, 후면 기둥 중 한 개가 은행나무라는 것이다. ‘싸리나무 기둥’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주로 사찰 법당 기둥 관련해 싸리나무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잘 알다시피 싸리나무는 아무리 자라도 높이 2-3m, 지름 2-3cm 정도의 작은 나무다. 그런데 이 작은 싸리나무를 어떻게 사찰 법당의 아름드리 기둥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싸리나무 기둥 전설은 이제 대부분 해명이 됐다. 식물학자들이 식물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몇 몇 ‘싸리나무 기둥’에 대해 직접 과학적 조직검사를 해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물 802호로 지정된 마곡사 대광보전 싸리나무다. 조직 검사 결과 기둥에 사용된 나무는 싸리나무가 아닌 소나무로 판명됐다. 여타 싸리기둥으로 알려진 기둥들도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 싸리나무가 아닌 느티나무와 소나무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듯 싸리나무 기둥 이야기가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 것일까? 이를 두고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을 한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은 부처님 진신사리다. 그래서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각종 사리구나 사리함을 만들 때는 내구성이 가장 좋은 나무를 사용했다. 이때 선택된 나무는 대부분 느티나무와 소나무였다. 이 나무들을 사리구나 사리함을 만드는 나무라는 뜻에서 ‘사(싸)리나무’로 불렀던 것 같다.
하목정 명물, 배롱나무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 8월이 되면 어김없이 피는 꽃이 있다. 붉은 색 꽃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분홍·자주·보라·흰색 꽃도 볼 수 있다. 여름 한철 내내,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피고지고를 반복하는 꽃, ‘배롱나무 꽃’이다.
배롱나무는 다른 말로 ‘백일홍百日紅’ 또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나무를 백일홍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알다시피 백일홍이라는 식물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배롱나무를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것은 배롱나무 꽃이 여름 석 달하고도 열흘, 100일 동안 피어 있다고 해서다. 하지만 꽃을 자세히 보면 하나의 꽃이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가지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는 작은 꽃들이 제각각 시차를 두고 피고지고를 반복하다보니, 멀리서 보면 마치 100일 동안 똑같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배롱나무는 재밌는 별칭이 여럿 있다. 붉은 자줏빛 꽃이 핀다고 ‘자미화紫微花’, 가지 표면이 매끈해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미끄럼 나무’, 매끈한 가지 표면을 손바닥이나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면 가지 끝 나뭇잎과 꽃이 간지럼 타듯 파르르 떨린다고 ‘간지럼 나무’라고도 한다. ‘백골나무’라는 별칭도 있다. 나무줄기가 마치 사람의 백골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묘소·사당·재실 주변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다. 이는 배롱나무가 백골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묘소 주변에 있는 백골나무[배롱나무]에 해를 가하면 해를 가한 사람 혹은 백골로 누워있는 이의 후손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말이 있다. 또한 배롱나무는 향교·서원·서당·누정 같은 곳에도 많이 있어 ‘선비나무’라고도 한다. 겉껍질과 나무 속 모습이 같은 배롱나무가 마치 안과 밖이 다르지 않는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는 것에 유래한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아름다움과 시원함을 발산하는 배롱나무. 하지만 알고 보면 배롱나무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나무다. 배롱나무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인 것만 봐도 그렇다.
옛날 어느 바닷가 마을. 이 마을 앞 섬에 머리 셋 달린 이무기가 살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무기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매년 마을 처녀 한 명을 이무기에게 제물로 바쳤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자신이 사모하는 처녀가 제물로 결정되자 처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섰다. 청년은 처녀로 변장해 제단에 있다가 이무기가 다가오자 칼로 머리 둘을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하나 남은 이무기 머리도 마저 자르기 위해 청년은 배를 타고 이무기가 도망간 섬으로 떠났다. 이때 청년은 처녀에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배에 흰 깃발이 걸려 있으면 이무기가 죽은 것이고, 붉은 깃발이 걸려 있으면 내가 죽은 것이오”라고 말했다. 100일 후 마을을 떠난 청년의 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니 뱃전에 붉은 기가 보였다. 처녀는 청년이 죽은 것으로 알고 스스로 바다로 몸을 던져 죽었다. 하지만 배가 도착하고 보니 청년은 살아 있었다. 뱃전에 걸린 붉은 색 기를 자세히 보니 흰색 기였다. 청년이 이무기와 100일 동안 혈전을 치르느라 흰 기가 피로 물들어 붉은 기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다음 해 처녀가 묻힌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고, 핏빛처럼 붉은 꽃을 100일 동안 피웠다. 사람들은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불렀다.
사육신의 한 분인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그가 남긴 시 중에 ‘자미화’란 시가 있다. 유별나게 더웠던 2021년 여름에도 하목정 배롱나무는 어김없이 특유의 붉은 꽃을 피웠다. 달성 하목정은 성삼문의 시 ‘자미화’와도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나네
피고 지고 일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함께 한잔 술을 마시리라
에필로그
구봉산 형제봉이 낙동강을 끼고 구불구불 횡룡橫龍하다, 물을 만나 멈춰선 곳. 뒤는 구봉산이 생기生氣를 불어넣고, 앞은 낙동강이 생기를 갈무리 한다. 강 건너 멀리 비슬산·가야산·금오산 영봉靈峯들이 하목정을 향해 시립侍立해 있고, 가까이에는 작은 산봉우리들이 머리를 조아린다. 과연 천하명당 하목정이다.
명당에 자리한 건물답게 하목정에는 부연·방구매기처마·영쌍창·차인방·누마루·싸리나무 기둥 등 건물 부재 하나하나에도 이렇듯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400년 넘는 세월동안 무너지지 않고 한자리에 당당히 서 있는 하목정. 사람들은 오랜 세월 하목정을 바라보면서 경외심을 키웠고, 그 경외심이 하목정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이 같은 멋진 스토리들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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