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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朝鮮 太祖 조선의 초대 국왕 | |
![]()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 | |
본명 | 이단(李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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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 |
대관식 |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개경 |
별명 | 초명은 이성계(李成桂), 자는 중결(仲潔) 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
종교 | 불교 |
출생일 | 고려 충숙왕 복위3년(1335) 음력 10월 11일 |
출생지 | 고려 함경도 화령군 영흥 흑석리 |
사망일 | ![]() |
사망지 | ![]() |
매장지 | ![]() |
왕비 | 신의왕후 신덕왕후 |
자녀 | 총 13명 중 대군(大君) 8명, 공주(公主) 2명, 옹주(翁主) 3명, 아래의 "가족 관계"참조. |
부친 | 환조 |
모친 | 의혜왕후 |
이전 왕 | 공양왕 |
다음 왕 | 정종 |
왕조 | ![]() |
묘호 | 태조 (太祖) |
시호 | 고황제 (高皇帝)[1] 태조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 대왕 (太祖 康獻 至仁啓運 聖文神武 大王) |
이성계 李成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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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 복위3년(1335) 음력 10월 11일 ~ 조선 태종8년(1408) 음력 5월 24일 | |
태어난 곳 | 함경도 함흥 |
별명 | 자(字)는 중결(仲潔), 군진(君晋), 신궁(神弓) |
복무 | 고려 도평의사사 |
최종 계급 |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
지휘 | 고려 삼군도총제부 |
주요 참전 | 쌍성부(영흥)탈환(1356, 21세) 개경의 홍건적격퇴(1361년), 나하추(몽고족) 격퇴(1362년), 기황후(몽고족) 격퇴(1364년), 김삼선·김삼개(여진족) 격퇴(1364년), 동녕부(평양) 탈환(1370년), 개경의 왜구토벌(1377년), 지리산의 왜구토벌(1377년), 황산대첩 왜구토벌(1380년), 호바투(여진족) 격퇴(1383년), 길주의 왜구토벌(1384년),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제2차 요동 정벌(1392년) |
기타 이력 | 조선의 제1대 국왕, 고려의 문하시중 (종1품) |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함경도 영흥 출신이며,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고려에서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
식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2]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
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3]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조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3년) 음력 10월 11일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관리를 지내던 환조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
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환조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채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4]
그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여, 증조부 익조 이행리, 조부 도조 이춘, 지방관리를 지냈으며,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
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년)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환조 이자춘이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어린 시절 고향인 함경도 영흥과 함주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
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 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1356년(공민왕 5년) 유인우가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서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공민왕 1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함주 지방(함경도 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한국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한국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 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 (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한국 정부에서는 이성
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崔濡)를 시켜 몽고족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평양의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정치적 연대가 필요하던 그는 개혁성향이되 무장능력이 없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동북면에 있을 때 정몽주가 그를 수시로 찾아왔고, 그를 통해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하기도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만나서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친명 세력이자 반원 정책을 하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세력을 숙청할 때는 최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5]
한국의 왜구토벌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꼽히는 지리산의 황산대첩은 변안렬전에 수록되어 있다. 우왕은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량씩, 왕복명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량씩을 주었으나, 모두 다 사퇴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한국을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왕조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우왕 6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 阿其拔都)라고 하는 소년 장수가 왜구를 이끌고 한국을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
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한국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
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들어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한국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
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한국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한국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요동 정벌 반대와 출정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6] 본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6]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해 4월,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6]
“ | 소로서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이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6] | ” |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6]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병력 4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7]
1388년(우왕 14년)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중국이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한국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이에 한국에서는 우왕을 비롯한 몇몇 친원파들이 요동 정벌을 논하였는데 이는 진정 요동을 한국 영토로 복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전쟁을 명목으로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한 정치적 행위에 불과했다. 또한 당시 원이 몰락하고 명이 중국대륙의 강자로 부상하던 시점에서 이는 국제정세를 거스르는 도발적 행위에 불과했으며 당시 전란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현실상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신료들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성계가 진군하다가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하기 전에 장맛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위화도회군은 이성계가 혼자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신진사대부가 신흥 무인 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5]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 덕에 내부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구세력의 대표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두달 후 처형했다.[7] 이성계는 최영이 역모를 꾸몄다고 우왕에게 고하였고, 그 시신을 길에 내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7]
그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를 이끌고 신 왕조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자 그를 지지했던 이색, 정몽주는 모두 그의 적으로 변신한다. 그는 정도전을 통해 이색과 정몽주 등의 구세력들을 하나둘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쿠데타를 주장하였다. 점차 쿠데타가 시작되고 있었다.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들을 줄기차게 탄핵하는 한편, 기회를 봐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성계가 병을 칭하여 은신해 있자, 정몽주는 그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말을 타고 왔는데, 이때 다섯째 아들 방원이 정몽주를 추격하여 선죽교에서 타살한다. 그 뒤 신하들은 공양왕에게 선양할 것을 청하였고, 공양왕은 스스로 부덕함을 탓하며 1392년 7월 이성계에게 선양한다.
역성 개혁파는 이성계와 연결하여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었다. 1388년의 1차 요동 정벌 당시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하였지만, 이들 혁명파는 그해 어린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차지했다. 1392년(공양왕 4년)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뒤이어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8]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의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즉위 초반의 집권기반은 취약하였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민심을 수습할 방안을 마련케 한다.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경기도 개풍군)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9] 결국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것을 명한다. 바로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이색은 한양의 왕궁에 온 뒤에도 그를 임금이라 하지 않고 그대, 송헌이라 불러서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반발하기도 했다. 개국공신인 남은의 동생 남재와 숙부 남을진 역시 이성계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개국공신을 책록하면서 고려의 구신들에게도 원종공신의 칭호를 내려 회유, 포섭하려 하였으나 일부만이 협력하고 대부분 고려의 구신으로 남겠다며 요청을 거절한다.
제일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11]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11]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한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11]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11]'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11]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11]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11]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11]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음력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13]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울러 구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왕씨 일족과 구신(舊臣)들을 숙청하였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14]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14]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종마저 곧 물러나고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민정중이 쓴 《노봉집》(老峯集)에 나오는 박순의 시장(諡狀)[15],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함흥차사 고사는 태조와 태종이 왕자의 난 이후로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7년을 더 살고 1408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73세였다. 바로 명나라의 영락제는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왔다.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그가 죽자 태종은 그가 수시로 신덕왕후의 능을 보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렸다. 1408년 8월 7일, 묘호를 태조(太祖), 존시(尊諡)를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으로 정했다.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의 칭제건원 직후 황제로 추존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가 되었다. 이때 고종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은 삭제하였다.
한씨 소생의 다른 아들들은 불평이 심했는데, 특히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며 정몽주 등을 제거한 실질적인 건국의 공신인 다섯째 이방원의 불만이 제일 심했다. 그의 강씨 소생 아들들에 대한 편애는 후일 정안대군에 의한 방석, 방번 살해되는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된다.
태조 이성계에 대한 설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고려의 무신이면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 관한 설화로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상세하게 전하는 신화이다.
'추강냉화(秋江冷話ㆍ남효온의 한문 수필집)'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 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19]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 왕(王)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 남았다고 한다. [20]그러다 제5대 왕인 문종(文宗)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그리고 이후 정조 때는 탕평책에 따라 관직에도 등용되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년)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는 1394년에 정도전(鄭道傳)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5] 또한 요동정벌 실패 후 최영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의 의연한 죽음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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