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두산동(斗山洞),
들판 가운데 홀로 우뚝 산이 있는 마을
개관
두산동은 과거 대구부 수동면(守東面) 지역으로 ‘말뫼’, ‘말미’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존 두산동과 ‘묵넘어’가 있었던 두천동을 합쳐 달성군 수성면 두산동이 됐다. 1938년 대구부 두산동이 되었다가, 1963년 동구 두산동을 거쳐, 1980년 지금의 수성구 두산동이 됐다. 두산동 남쪽에는 법이산(334.3m)에서 용지봉(633.8m)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있다. 북쪽은 두산오거리 일대 구릉지를 제외하면 평지로 이루어져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 지세를 보인다. 법이산 아래에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된 대구 최고의 위락지인 수성못이 있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수성고등학교, 대구들안길초등학교, TBC 대구방송국 등이 있다. 대구 최고 유원지로 손꼽히는 수성유원지와 전국 최대 먹거리골목인 들안길 먹거리타운도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감나무정, 묵넘어, 불미, 새터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고분군과 유물 등이 발굴되었으며, 수성못 인근에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인 국조단군성전이 있다.
지명 유래
두산동이란 지명은 ‘말뫼산·독메산·동막산·동묘산(洞墓山)·두산55)’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러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말뫼산은 두산오거리 남쪽에 있는 해발 97.2m의 작은 야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침 일찍 한 여인이 빨래를 하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움직이던 산이 들판 가운데 멈췄다. 이때 멈춘 산이 들판 가운데 홀로 서 있어 ‘독메산’ 또는 ‘불뫼’, ‘말뫼’로 불리게 됐다.56) 다른 설로는 동네가 콩처럼 생겼다고 해서 두산동이란 설57), 동네 앞에 됫박 모양의 산이 있어 ‘됫박산’을 한자로 두산(斗山)이라 했다는 설 등이다. 예전에는 두산동을 ‘물넘이·묵너머’라고도 불렀다. 이는 지산동에서 두산동 쪽을 바라보면 범어천이 이 지점에서 두산을 돌아서 흘러간다. 이를 물이 돌아 넘어간다는 뜻에서 물넘이라 부른 것이다.
한편 말뫼를 지금의 두산오거리에 있는 말뫼가 아닌 수성못 남쪽에 있는 법이산과 용지봉 전체를 가리키는 유래설도 있다. 대체로 수성못에서 지산동까지를 법이산, 그 너머 범물동 쪽을 용지봉이라 부른다. 이 산을 수성들에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말이 갈기를 늘어뜨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산 전체를 말뫼라 했고, 말뫼 아랫마을을 말뫼 마을이라 했다는 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말뫼는 두산으로 바꿨다. 말뫼를 한자로 바꾸면서 ‘말 두(斗)’, ‘뫼 산(山)’의 음을 취해 두산동이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독뫼’는 홀로 우뚝한 산이라는 뜻으로 불린 것 같고, ‘물넘이’는 신천이 만들어낸 충적평야라는 뜻으로 보이며, ‘불뫼’는 수성 들판에 있는 산이라는 뜻인 것 같다.58) ‘불’과 ‘벌’은 우리말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수성들에 ‘두산’이라는 글씨와 함께 ‘△70’이라는 표시가 있다. 이는 높이 70m의 두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말뫼산이나 독매산은 산을 뜻하는 ‘뫼·매’가 산과 함께 중첩되어 사용되고 있다. 말뫼산, 독매산 보다는 말뫼, 독매로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말뫼산의 ‘말’은 ‘머리·마리’의 줄임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말뫼산은 지역이나 마을의 으뜸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2003년 영남문화재연구소에서 말뫼산을 발굴 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를 비롯한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고분군이 발견됐다. 고분군을 보통 ‘말무덤’이라고 부른 예가 많은데 이 산에 예로부터 고분이 많아서 말뫼로 부른 것으로 추정되며, 말뫼를 한자로 차자 표기하면서 두산(斗山)이 된 것 같다.
55) 두산오거리와 수성못 사이에 있는 야산이다.
56) 향토사교육연구회, 『대구역사기행』, 도서출판 나랏말, 1996. 35쪽.
57) 위키백과.
58) 홍종흠, 『대구의 뿌리, 수성』, 수성문화원, 2019. 248쪽.
감나무정
감나무정은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 붙은 지명이다. 지산동에서 대구어린이대공원 방향 두산오거리 오른쪽 지역으로, 2024년 연말 준공된 더파크 수성못 아파트 북쪽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 10호 규모의 감나무정 마을이 보인다.
두산·말뫼·독뫼·불뫼·불미·동묘산(洞墓山)·동막산(洞幕山)
두산(97.2m)은 두산오거리와 수성못 사이에 있는 야산이다. 들 가운데 홀로 있는 작은 야산이지만 두산동 지명유래가 된 산인만큼 다양한 지명유래설이 전한다. 1980년대 지도에는 동묘산(洞墓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마을 공동묘지 산’이란 뜻이다. 두산은 산 전체가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두산동 고분군이 있었던 곳이다. 1990년대 이후 몇 번의 발굴 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은 물론 72기의 고분과 각종 유물 등이 확인됐다. 지금도 두산 정상부 일대에는 50기가 훨씬 넘는 분묘가 있다.59) 최근 지도에는 동막산이란 표기가 보인다. 이는 ‘묘(墓)자’를 꺼려 비슷한 글자인 ‘막(幕)’로 바꿨거나 아니면 ‘묘(墓)’ 자와 ‘막(幕)’ 자를 혼동한 데서 나온 오류로 보인다.
59) 대부분 이 지역에서 오래 세거한 중화 양씨 문중 묘다.
묵넘어·묵넘이·물넘이·불막
묵넘어는 두산오거리에서 지산·범물동으로 가는 지범로 초입 좌우 야산 사이에 있었던 마을이다. 묵넘어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현풍에서 이곳으로 온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묵넘어에도 몇 가지 지명유래설이 전한다. 묵넘어라는 동명은 가마를 타고 이 마을을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간다고 해 '묵넘이'라고 했는데, 발음이 바뀌어 '묵넘어'가 됐다고 한다.60) 다른 설도 있다. 지산동에서 두산동 쪽을 바라보면 범어천이 이 지점에서 두산을 돌아서 흘러간다. 이를 물이 돌아 넘어간다는 뜻으로 ‘물넘이’라 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새터 마을에서 묵넘어를 보면 그 가운데로 범어천이 흐른다. 그래서 물 너머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물넘이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옛날에 이곳에 부처가 있었다고 해 ‘불막’으로 불렀다고도 한다.61) 대구부읍지에는 두천동(斗川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에서는 20여 가구가 묵넘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불미’ 사진 참조)
60)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51쪽.
61)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불미·불매·불뫼
두산동 일대를 다른 말로 ‘불미’라 부르기도 했다. 불미를 어원으로 보면 들판에 있는 산으로 볼 수 있다. 불은 ‘들·벌’ 같은 들판을 의미하며, 미는 ‘뫼·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불미가 ‘부처가 태어난 산’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과거에는 불미를 웃불미, 중간불미, 아랫불미로 나눠 불렀다. 웃불미는 ‘새터’로 지금의 두산오거리 일대, 중간불미는 ‘감나무정’으로 현재 더파크 수성못 아파트 일대, 아랫불미는 ‘아랫말’로 지금의 동대구로와 상화로가 만나는 일대다.62)
62) 향토문화전자대전.
새터
새터는 TBC 대구방송국 서쪽으로 2003년까지 두산동 186-3번지에 있었던 두산동사무소 일대다. 새터란 이름은 묵넘어에서 건너온 일부 주민이 이곳에 새 터를 얻어 살았다는데서 유래됐다고 한다.63)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에서는 1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일설에는 수성못 북쪽 못둑 아래 일대를 새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새터에 있었던 두산동사무소는 두산동 499-4번지 지산하수처리장 관리동 1층으로 옮겼다가 2023년 수성못 북쪽 못둑 아래 현 위치로 옮겼다.
63)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1쪽.
국조단군성전(國祖檀君聖殿)
국조단군성전(두산동 산13-7)은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으로 수성관광호텔 남쪽 법이산 기슭에 있다. 단군을 기리는 단군성전은 본래 달성공원에 있었다. 달성공원에 있었던 단군성전은 일제강점기 달성공원에 있었던 일본 신사를 광복 직후 개조한 것으로 처음에는 ‘국조전’이라 불렀다. 1966년 달성공원을 동물원으로 조성할 때 국조전을 철거해 현 위치로 옮겼다. 이후 종교적 이유로 철폐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뜻있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남게 됐다. 제11대 대구시장 태종학과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대종교 최고 지도자인 총전교을 지낸 안호상이 일대 산을 매입해 새 건물을 짓고 ‘천진전(天眞殿)’이라 이름했다. 그 뒤 1981년 안호상과 초대 수성구청장 김재완이 국조 단군 동상을 모시고 ‘국조단군성전’이라 명명했다.64)
64) 향토문화전자대전.
법이산(法伊山·法尼山) 봉수대(烽燧臺)·봉화산
수성못 남쪽에 법이산(法伊山)(334.3m)이 있다. 법이산은 조족산(鳥足山)으로도 불렸다. 대구부읍지(1899)에 “조족산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일명 법이산이라 한다. 봉수대와 기우단이 있다. 팔조령에서 뻗어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족산이라는 이름은 산세가 새의 발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법이산의 한자 표기는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법니산(法尼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법니산을 봉화를 올린 산이란 뜻에서 봉화산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이산 정상인 두산동 산26 일원에는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봉수란 고려·조선시대 군사통신 수단으로 변방에서 일어나는 긴급한 상황을 중앙이나, 다른 곳으로 알리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인근 고을과 연락을 취했다. 법이산 봉수는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직봉(直烽)65)에 연결된 간봉(間烽)66)이었다. 대구부읍지에 소개된 법이산 봉수를 보면 “부(府)에서 남쪽으로 10리가 되는 수동면(守東面)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청도의 팔조령봉(八助嶺烽)에 답하고, 북쪽으로는 경산 성산봉(城山烽)에 알려주니 거리가 20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성구에 있는 법이산 봉수와 성산 봉수는 발굴 조사 결과, 간봉임에도 규모가 매우 큰 봉수였음이 확인됐다. 조선시대 봉수는 5개 경로를 가지고 있었는데,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칙명으로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법이산 봉수와 성산 봉수는 제2로 간봉 노선의 11번째와 12번째에 해당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67)다. 즉, 한양으로 연결되는 직봉에 딸린 간봉이다.
법이산 봉수대는 전체 둘레가 106.5m인 ‘배 주(舟)’ 자형 초대형 봉수 유적이다. 조선 전기에 축조돼 1895년(고종 32)까지 사용됐다. 대구시 최초 봉수 지정문화유산으로 2020년 대구시기념물로 지정됐다. 2024년 6월 수성구청이 대구시와 함께 국가지정문화유산 승격 및 국제학술대회 개최를 위해 법이산 봉수대 학술조사 용역을 착수했다. 연구 결과 법이산 봉수대는 경상감영과 대구부에서 관장하던 봉수대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폐봉까지 기록이 존재한다. 발굴 조사를 통해 방호벽, 계단시설, 출입시설, 내부 건물지 등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 문헌 기록을 통해 봉수대에 기우제를 지낸 제단이 있었음도 확인됐다. 특히 기우제단을 갖춘 봉수대가 발굴된 사례는 드물다는 점에서 법이산 봉수대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모당집에 모당 손처눌이 지은 「기우제문」이 남아 있다. 기우제문에 “조족산 기우문, 방백을 대신하여 짓다.”는 기록이 있어 법이산 기우제문임을 알 수 있다.
수성구청은 2024년 주민 공감대 조성을 위해 4천여 명이 참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순환전시 4회와 주민설명회 및 유적답사 등을 진행했다. 같은 해 10월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일본 성곽 전문가 등이 참여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고, 10-11월 대구도시철도2호선 범어역 대구아트웨이 등 4곳에서 ‘한국의 봉수와 법이산 봉수대 사진전’을 열어 법이산 봉수대의 역할과 가치를 알렸다. 2025년 상반기 국가유산청에 국가사적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도 법이산 봉수대가 보인다.
65) 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간선로 상의 주요 봉수. 한반도에서는 1149년(고려 의종 3)에 본격적으로 봉수제가 시작되었으며 1895년(조선 고종 32)까지 운영되었다.
66) 직봉 사이에 있는 보조 봉수.
67) 서울과 변경에 있는 봉수를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 지역에 설치한 봉수.
수성못과 수성들
수성못은 두산동에 있는 못이다. 수성못 일대는 범물동 용지봉에서 북서부로 뻗어 내린 법이산 북쪽 산 아래 수성못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수성못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가 축조했다. 당시 수성들은 넓지만 물이 부족해 농사짓기가 힘들었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수성들을 옥토화하기 위해 자기 재산과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1924년 9월 27일 착공해 이듬해 10월 30일 수성못을 완공했다. 1939년 사망한 미즈사키 린타로는 그의 유언대로 수성못이 내려다보이는 법이산 자락에 한국식으로 묻혔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미즈사키 린타로의 자손들이 그의 묘를 찾았다고 한다.
과거 수성못은 여름철이면 뱃놀이로,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각광을 받았던 시민공원이었다. 수성못 일대가 농업용 저수지에서 지금처럼 유원지로 개발된 것은 1983년경이다. 동대구로와 연결되는 유원지 진입로를 확장하고, 상가와 주변 불량건물을 정비하면서 모습을 일신했다. 1986년 6월 빗물 및 오수 분리시설을 설치했으며, 그해 12월 수성못 바닥 준설공사를 했다. 현재 수성못 주변에는 데크길, 가로등, 벤치, 음수대, 파고라, 체력단련장 등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보트와 각종 유기시설이 있어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과거에는 수성못에서 북쪽으로 지금의 달구벌대로 너머까지 넓고 길게 이어지는 들을 ‘수성들’ 또는 ‘한들’이라고 했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들안길’이라고 했다. 본래 수성못은 수성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농업용 저수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성들이 모두 도시로 변해 수성못은 본래의 목적 대신 대구시민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식당가로 유명한 ‘들안길’은 전체 들안길 중에서 수성못-상동에 이르는 구간으로 ‘수성들 한 가운데로 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68)
수성못은 대구 출신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상(詩想)이 나온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인은 수성못둑을 거닐다가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성들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탄식했다고 한다.69)
68) 권오현 등저,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251쪽.
69) 일설에는 남구 대명동 영선못 아래에서 명덕네거리에 이르는 넓은 들이 시의 소재가 됐다고도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