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군위 엄흥도 묘소, 이젠 말할 수 있다.
진묘와 가묘 ‘C묘→B묘→A묘’
글·사진 : 대구선비 송선비 송은석
(3169179@hanmail.net / 010-9417-8280)
‘무슨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
엄흥도 묘는 진묘로 추정되는 ‘C묘’와 첫 번째 가묘 ‘B묘’ 상태로 오랜 세월 유지됐던 것 같다. 1990년대 중반 두 번째 가묘 ‘A묘’가 조성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6. 군위 엄흥도 묘소 진묘, 가묘 스토리의 출발점, ‘C묘’ 참조) 그렇다면 1990년대 중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랜 세월 엄흥도 묘로 알려진 ‘B묘’를 ‘A묘’로 옮겼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C묘’는 더 숨기고 ‘B묘’는 격을 더 올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C묘는 더 숨기고, B묘는 A묘로 업그레이드’
1984년 영월 엄씨 충의공계 타 문중(A문중이라고 하자)에서 파보를 발간했다. 이듬해인 1985년 충의공계 군위 문중에서도 파보를 발간했다. 그런데 두 파보는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A문중 파보에는 엄흥도의 생몰년이 나타나지 않고, 군위에 은거했다는 내용이 없으며, 영월 엄흥도 묘 사진과 함께 묘가 영월에 있다고 되어 있다. 반면 군위 문중 파보에는 엄흥도의 생몰년과 함께 그가 군위에 은거했으며 군위에 있는 그의 묘(B묘)가 사진과 함께 등재되어 있다.
이 외에도 ‘A문중’와 군위 문중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선조인 충의공 엄흥도 관련 서책을 각기 발간했다. A문중에서 충의공엄선생실기(1937), 군위 문중에서 충의공실기(1935)를 발간하는 식이다. 그런데 충의공엄선생실기와 충의공실기는 책 구성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서로 달랐다. 예를 들면 ‘행장·묘갈명·묘지명’ 등이 두 책에 모두 실렸지만, 정작 해당 글을 지은 인물은 서로 각기 달랐다. 결국 두 문중에서 발간한 ‘파보’와 ‘실기’ 류 등은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만을 담았던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1933년, 1962년, 1979년' 영월엄씨대동보 발간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이런 예는 타 문중도 마찬가지다) 이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군위 문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수백 년 지켜온 엄흥도 할배 묘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진묘 ‘C묘’는 더 깊이 숨기고 가묘 ‘B묘’는 더 격을 갖춘 ‘A묘’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추론일 뿐...’
지금으로부터 552년 전, 1474년 음력 2월 26일. 엄흥도가 71세를 일기로 군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지 17년 뒤요, 세조가 죽은 지 불과 6년 후였으며, 당시 임금은 세조의 손자 성종이었다. 엄흥도의 장남 엄광순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경각에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옛말에 ‘본데 있다’고, 엄광순은 아버지와 함께 목숨을 걸고 단종 시신을 수습했던 아들이었다. 엄광순은 수십수백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최선책이 진묘 ‘C묘’와 가묘 ‘B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520년 세월이 흘렀다. 정확한 내력은 알 수는 없지만 문중 간의 진묘 시비가 격화되자 진묘 ‘C묘’는 더 깊이 숨기고, 밖으로 드러나는 가묘 ‘B묘’는 좀 더 격을 높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B묘’를 ‘A묘’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은 아닐까?
다음 글에서 그간 이어온 군위 엄흥도 묘소 진묘 이야기를 요약·정리 해야겠다.
(다음에 계속)
2026년 7월 30일 목요일 새벽
대구선비 송선비 송은석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