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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世尊, 昔在靈山會上, 拈花示衆. 是時衆皆默然. 惟迦葉尊者,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無門曰, 黃面瞿曇, 傍若無人, 壓良爲賤, 懸羊頭賣狗肉, 將謂多少奇特. 只如當時大衆都笑, 正法眼藏, 作麽生傳. 設使迦葉不笑, 正法眼藏, 又作麽生傳. 若道正法眼藏有傳授, 黃面老子, 誑謼閭閻. 若道無傳授, 爲甚麽獨許迦葉.
頌曰, 拈起花來, 尾巴已露, 迦葉破顔, 人天罔措.
본칙 옛날 영취산의 한 집회에서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셨다. 이때 모두 묵묵히 있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의 미묘한 법이 있는데,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방편)으로 마하가섭 그대에게 전하노라.”하고 말씀하셨다. 무문 화상이 평하시기를, 누런 얼굴의 고타마가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 양민들을 억눌러 노예로 삼고, 양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다. 좀 기특하다 했더니 이 무슨 짓거리인가? 그때 대중들이 모두 웃었다면 정법안장은 어떻게 전할 것이며, 또 만약 가섭이 웃지 않았다면 누구에게 전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정법안장이란 것이 전수되는 것이라면 그 늙은이가 순박한 사람들을 속인 것이 되는 것이요, 만약 정법안장에는 전수라는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가섭 혼자만을 인가하였는가?
게송으로 가로되, 꽃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모두 드러났는데도, 가섭은 웃는데, 다른 이들은 어쩔 줄을 모르네!
I. 배경
삼처전심三處傳心 부처님께서는 말을 통한 가르침뿐 아니라, 말을 떠난 가르침, 즉 심법心法을 전했다고 하는데, 가섭 존자에게 세 곳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했다는 것이 ‘삼처전심’이다. 선종에 있어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전통은 이 삼처전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삼처전심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다.
1)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영산회상이란 부처님께서 설법하던 인도 영축산靈鷲山의 법회장면을 일컫는 말인데, 그 법회에서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셨다는 것이 ‘영산회상거염화’이다.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 존자 홀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이고 영화미소가 전심傳心의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즉, ‘범천이 부처님께 여쭈어 의심을 풀다’라는 제목의 경에 실려 있다.
이 때 대범천왕이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사십년이 넘는 동안 갖가지 법을 베푸셨습니다. 이 어찌 희유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는 법이라 하겠습니까? 원컨대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하늘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주시옵소서.”라고 말을 마치고 금색으로 된, 천 개의 잎이 달린 연꽃(바라화)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리고 물러나 몸으로 법상을 만들어 중생들에게 설법해 주실 것을 진실로 간절히 청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법상에 앉아 갑자기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인천人天의 백 만 억 대중은 아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 중에 오직 한 존자 마하가섭만이 얼굴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하고 바로 서서 온화한 모습으로 침묵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에게는 깨달음의 눈(正法眼藏)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涅槃妙心)과 모습 없는 참 모습인 묘한 진리(實相無相)가 있다. 이것은 문자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교 밖에 별도로 전한 것이니(不立文字 敎外別傳) 지혜가 있든 없든 인연이 되면 증득할 것이다. 오늘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니 미래세에 모든 부처의 수기를 받아 성불하게 될 것이다.” 1
이에 대한 무문화상의 평과 송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2)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이는 초기 경전인 본연부本緣部 『불설중본기경佛說中本起經』에 실려 있다.
세존께서 사위성 기수급 고독원에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말씀하실 때였다. 천룡, 귀신, 사부대중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때 마하가섭이 남루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다가왔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멀리서 보고 찬탄하시기를, “잘 왔구나. 가섭아” 하시고, 미리 법상의 반을 나누셨다가 앉으라고 명했다. 가섭이 물러나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저는 바로 여래의 끝줄 제자인데 자리를 나누어 앉으라 하시니, 어찌 그 뜻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 대중이 생각하기를 ‘이 노장에게 무슨 기이한 덕이 있기에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으라고 명하실까? 이 사람이 뛰어난 분일까? 오직 부처님만이 밝히시리라.’하였다. 이때에 부처님은 대중들의 생각하는 바를 살피시고 의심하는 바를 해결하고자 “가섭의 큰 행이야말로 성인과 같음을 논하리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셨다. “나는 사선四禪의 선정을 닦아 마음을 쉬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손실된 것이 없는데, 가섭 비구 또한 사선이 있고 선정으로 인하여 정의定意를 얻었느니라.” (중략) 부처님께서 본생담을 말씀하시며 더욱 성스러운 덕을 나타내어 “비구 가섭이 일체 해탈하여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으며, 법의 가르침과 이름이 널리 퍼지니 즐거움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2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 가섭 존자가 그 곳에 왔는데 아무도 가섭 존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가섭 존자를 부르시어 함께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다는 것이다. 이에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부처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섭이 수제자임을 인가하는 동시에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소주蘇州 정혜사定慧寺 정혜초신定慧超信 선사는 다음과 같이 송했다.
秘傳分半座 비밀히 전하고 자리를 나누었다니
正好驀面唾 얼굴에 침을 뱉어 줄 것을,
不伊麽且放過 그러지 않고 놓아두었으므로
子孫未免遭殃禍자손들이 앙화를 면치 못했네.3
원오근圓悟勤이 승勝 수좌首座에게 설법하셨다.
석가모니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주셨으니 이미 이 법인法印을 비밀히 전해 준 것이고, 그 뒤에 다시 염화拈花하시니 이는 제2의 공안이다. 마침내는 금란가사를 전해 주어 계족산鷄足山에서 미륵彌勒부처님을 기다리게 하니, 이 무슨 군소리인가?4
3)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일’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발제하跋提河5’라는 강가 언덕에 있는 두 그루의 사라수沙羅樹(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열반하신 뒤 가섭 존자가 오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미셨다는 내용이다.
초기 경전인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에 실려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뒤늦게 도착한) 가섭 존자가 더욱 슬퍼하면서 제자들과 더불어 오른쪽으로 일곱 번 돌고, 눈물을 글썽이며 장궤 합장하고 게송으로 슬프게 탄식하였다. “괴롭고 괴롭습니다. 대성인 존자이시여! 저는 지금 가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멸도滅度하심이 어찌하여 이렇게 빠르십니까? 대비하신데도 저를 잠깐 기다리지 못하셨습니까?”
(중략)
가섭이 목메어 슬피 울며 이 게송을 끝내자,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두 발을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 모양으로 나타내어 관 밖으로 내보이시고, 그것을 돌려가며 가섭에게 보여 주셨다.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에서 천 가닥의 빛이 나와 사방의 일체 세계를 두루 비췄다. 이때에 가섭과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발을 보고, 일시에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 모양의 발에 예배하였다.6
이에 대해 해인신海印信이 송했다.
음광飮光7이 늦게 이르렀는데
관에서 두 발꿈치를 내보이셨네.
비밀히 전했다고는 하나
억지로 얼버무림을 당하셨구나.
누가 얼버무렸는가?
당시에 졸장부가 우습기만 하구나.8
설봉 요종雪峰了宗 선사는 다음과 같이 송했다.
“이 일을 알았으면 그만두라”
다시 말하였다. “금색두타(金色頭陀)7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더욱 심하게 속을 뻔 했다. 황면 노자를 보려는가?”
그리고는 선상을 치면서 말하였다.
“산산조각이 났구나!”9
경전에 전하는 부처님의 ‘삼처전심’의 이야기는 나중에 조사선문에 와서는 모두 화두로 발전한다. 후에 선사들이 이 화두에 대해 선사들이 평이나 송을 붙였는데, 그중 역설적인 것들을 뽑아 같이 살펴보았다.
불경이란 대부분 후세에 쓰이거나 윤색되어 삼처전심의 이야기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선종이 성립하면서 전승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더 강조되는데, 이는 사자전승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경전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부처님 탄생과 출가, 성도成道10, 부처님의 입멸 등 대체적인 골격은 대부분 인정되고 있다.11 그리고 윤색된 부분도 그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산회상거염화’의 경우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부분이 있는데, 왜 브라만교의 주신主神인 대범천왕이 당시 신흥종교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했느냐는 것이다. 이는 성도 후 환희에만 젖어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지 않았을 때(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12, 범천梵天을 등장시켜 설법을 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범천의 설법권청도, 인도의 전통종교인 브라흐만교의 주신主神인 범천이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설법을 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구 종교와 신종교가 각자 지니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교체, 이제부터는 불교가 브라흐만교 대신 인도 종교의 주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13
불경의 성립 배경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각색되었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똑 같은 일이 일어나 불교의 신까지 섭렵한 힌두교가 이어 불교의 자리를 대신, 현재 인도 종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II. 사설
이심전심의 후계자
삼처전심의 주인공인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란 칭호를 받은 제자이다. ‘두타頭陀’란 두다杜多, 두수抖擻라고도 하는데, 찢어진 옷과 망가진 삿갓의 뜻을 담고 있다. 또 ‘먼지를 털어내다’라는 뜻으로, 가섭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검소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였고 철저하게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그의 이런 수도정신은 수행자에게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부처님 시대 가섭은 그리 뛰어나거나 유명한 제자는 아니었고, 폐의를 걸치고 더러운 고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부처님 사후 오백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법을 결집하여, 제각각이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일하는 등 불교 교단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선종에 대립하는 경전의 기초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교종을 최초로 확립한 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석가모니의 수제자는 지혜제일 사리부다(사리불舍利弗)14와 『목련경目連經』의 주인공 신통제일 못가라나(목건련目犍連)였다. 사리불舍利弗은 그 이름에 이미 ‘불’이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제자였다. 자이나교의 성전인 『성선聖仙의 말씀』에 의하면,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고 사리불의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에 필적하는 인물로 신통력이 뛰어났던 목련 존자를 꼽을 수 있는데, 목련 존자의 지옥순례기인『목련경目連經』은 무거운 업장으로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려는 아들 목련 존자의 효성과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가르치는 내용의 경전으로 유명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의 당시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금강경에 등장하는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도 공空에 대한 설법으로 유명하였고, 25년간 석가를 모셨던 아난다는 만년에 부처님 곁을 지켰던 가장 중요한 제자였다.
원래 사리불과 목건련은 당시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유명한 사상가 산자야의 제자였다. 산자야는 당시 인도 최대의 강국인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서 활약하던 사상가로 왕사성은 학문과 기술이 가장 앞서 있었던 첨단 도시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 사상사에서는 처음으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쟁의 중지를 주장하였던 대표적인 사상가였는데, 그의 제자였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가 왕사성에 등장하자 동문 250인을 이끌고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새로이 등장한 불교가 산자야의 회의론을 뛰어 넘는 혁명적인 사상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경험에 의해 확증된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형이상학의 여러 학설은 모두 그릇된 입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어떤 수행자, 바라문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에 집착하고 있다. 단지 일부분만을 보는 사람들이 이것을 논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다.15
다른 모든 유파에 속하는 수행자들이 진리의 부분 부분만을 보고 입씨름을 하고, 논쟁을 하며 ‘날카로운 혀로 타인들을 찌르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부처는 진리 그 자체를 직접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같다’든가 ‘훌륭하다’ 혹은 ‘뒤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그 생각으로 인하여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같다든가, 같지 않다는 것이 없어진 사람은 누구와 논쟁을 벌일 것인가?16
진리는 하나이고 제 2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17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나 세간이 나와 다툰다. 법을 말하는 사람은 세간의 어느 사람과도 다투지 않는다. 세간의 모든 현자가 ‘없다’고 승인한 것을 나도 또한 ‘없다’고 말한다. 세간의 모든 현자가 ‘있다’고 승인한 것을 나도 또한 ‘있다’고 말한다.18
‘나는 이것을 말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이 집착임을 확실히 알고, 모든 견해에 있어서의 과오를 보고, 고집하는 일 없이 성찰하면서 내심의 평안을 나는 본다.19
문자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이 쓸데없는 일들에 대하여 논쟁에 빠지지 말라.20
불교는 모든 분별을 넘어서므로 그들을 초월할 뿐 아니라 무논쟁의 경지를 안온한 것으로 보고 이른바 ‘무 입장의 입장’에 섰다. 자기만이 훌륭하다는 생각과 편견에 빠지는 일을 경계하였고, 되도록 형이상학적 학설을 배제하고 실천적 인식을 가르쳤다.
그 ‘법’은 뭔가 특수하거나 기이한 실천의 수행이 아니었다. ‘여래가 가르치고 보인 법과 율律은 공명하게 빛을 발하며, 비밀로 덮이는 일이 없다.’ 그것은 ‘일륜日輪’21
, ‘월륜月輪’과 같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것이다.
‘여래의 법에는 스승의 주먹이 없다.’ 즉 스승으로서의 인격 완성자가 뭔가의 가르침을 주먹 속에 감추고 숨겨두는 일이 없는 것이다. 고타마는 진리인 법Dharma을 깨치고 그것을 단지 사람들을 위하여 드러내 보이는데 지나지 않는다.22
이러한 불교의 입장과는 달리 종래의 우파니샤드23 철학은 보편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파니샤드란 ‘비설秘說’, ‘가까이 앉는다’는 뜻으로 사제 간에 은밀히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가 자기의 장자長子 혹은 신뢰할 수 있는 제자에게만 전하였는데 이에 반해 불교의 진리는 공개된 것이었고,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이 행해졌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전수되던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에게 비밀히 법을 전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원시 교단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못가라나가 “부처님은 입멸 전에 누구(특정한 사람)를 멸후에 있어서의 의거할 곳, 즉 교단의 우두머리(上首)로서 정하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한데 대해서, 석존의 시자였던 아난다는 “세존께서 ‘이 사람이야 말로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의거할 곳이 되리라’고 추천한 수행승이 한 사람도 없으니 너희들이 오늘날 귀이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거할 곳이 없는데 모두가 협력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아난다는 “우리가 의거 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거 할 곳이 있습니다. 즉 ‘법을 의거할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24”라고 단언하고 있다. 즉 특정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도는 석존의 입멸에 의하여 의거할 곳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법’이야말로 우리들의 의거 할 곳이라는 것이다. “법에 의하라. 사람에 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귀착한다.25
석가모니 부처님은 임종하면서 오직 ‘자신에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라,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고 하는 말씀만을 남기셨다. 후에 불교도들에 의해 이 말은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依法不依人’으로 정리되었다.
즉, 부처님 시대, 원시 불교 시대에는 교단도 형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두머리라고 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고타마 부다의 시대에도 제자들과 그와는 떨어져서 따로 생활하고 행동했었는데, 저 광대한 지역에서 스승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란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의 사후에는 전 교단을 지배 통솔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했고, 그가 설파한 가르침과 계율이 의지처가 되고 길잡이가 된 것 같다. 최고 권위를 가진 전 교단의 통솔자가 차례로 대를 이어가는 현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26
원시 불교에서는 교단의 우두머리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고 대를 이어가는 현상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덕이 높은 수행승에 대해서는 존자尊者라고 부르고, 교단의 연장자를 장로 또는 장로니長老尼라고 불렀다. 이는 불교 뿐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남방에는 아직도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인도 불교에서는 ‘삼처전심’이란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었다. 가섭이 삼처전심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첫째, 사리불이 부처님 보다 먼저 입멸하여 전승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 부처님 사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십부파’로 파가 갈라지며 부파불교시대로 접어드는데, 이때 소승불교 중의 가장 유력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가섭을 후계자로 세웠고, 그 파가 오랫동안 교단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현양두매구육懸羊頭賣狗肉, 양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다는 무문 화상의 평은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역사적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선적인 깨달음으로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자전승의 허虛와 실實
육조 단경에는 5조 홍인(五祖弘忍, 601~674)의 7백 제자 가운데 상수 제자인 신수(大通神秀, 606?~706)와 혜능(六祖慧能, 638~713)이 마치 법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하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거기다 신수는 돈오는 전혀 모르고 점수만 알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근래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등 둔황문서敦煌文書가 발견되고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것이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역사서를 통해 보더라도 중국 당나라의 정사인『당서唐書』「열전」에는 불교도로는 유일하게 현장(玄奬, 600(602)~664)과 불공(不空金剛, 705~774), 그리고 신수 대사 이렇게 3인이 올라있다.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은 서역西域(지금의 印度 북부, 티베트)으로 부터 최초로 중국 땅에 불경을 들여온 사람으로 유명하고, 불공 또한 밀교 경전의 역경자로 혜초慧超의 스승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리고 신수 대사는 측천무후를 비롯한 세 명의 황제로부터 국사國師로 추앙받았던 인물로 신수 대사가 현장과 불공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사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당시 혜능은 신수보다 그리 유명한 선승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제치고 혜능이 적손이 된 데는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의 노력이 컸다. 신회는 한때 신수의 제자였는데, 국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신수 밑에는 기라성 같은 선배 제자들이 많아 신회가 7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정통 7조가 되기 위해서는 혜능을 6조로 세울 필요가 있었고 육조단경은 이런 배경에서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회의 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배경도 한 몫을 하는데, 장안에서 활동하던 신수계의 사람들이 안사의 난27으로 흩어져 교단을 유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승의 임의성은 이후에도 이어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고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부식一日不食,으로 유명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도 실은 마조도일(馬祖道一, 707~786) 당시에는 그렇게 뛰어난 제자가 아니어서 십대제자 중에는 꼽히지 못했다.
마조도일의 전기 자료로는 권덕여(權德輿, 759~818)가 찬술한 <홍주개원사석문도일선사탑비명병서洪州開元寺石門道一禪師塔碑銘幷序>가 1차 자료이다. 이는 마조가 열반한지 3년만인 791년에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마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십대제자로 혜해慧海 지장智藏 등만 나온다. 뒷날 마조문하를 대표하는 백장, 남전 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마조문하의 수제자는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의 저자로 알려진 대주혜해大珠慧海와 서당지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28
수행자의 노동정신을 직접 실천한 선승, 백장이 마조의 제자로 부각된 것은 송 대에 이르러서다. 송 대 초기 송본宋本 『전등록傳燈錄』에 마조, 백장, 황벽, 임제로 이어지는 선종 법맥이 성립되면서 부터로, 이는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위산과 앙산은 위앙종)와 황벽희운(黃壁希運, ?~850, 황벽과 임제는 임제종) 등 선승 들이 당시 선종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도 같은 경우로 마조의 십대제자 중에는 이름이 올라있지 않았는데, 그의 문하에서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나오면서 명본『전등록』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본인보다는 제자에 의해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각파마다 자파自派의 스승을 중심으로 전등사傳燈史를 재편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는 오백나한 중에 한 분이시고 실재로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알려진 신라승 무상선사가 중국 선종사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
신라新羅의 선을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한다. 중국 선과는 달리 한국은 같은 계열의 법을 받아왔음에도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선문은 크게 북산계北山系와 남악계南岳系로 나뉘는데29, 북산계는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道義, ?~825) 선사를 초조로 하고, 남악계는 남원 실상사 홍척(洪陟證覺, ? ~ ?) 선사를 초조로 한다.30 도의와 홍척은 함께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수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이은 선사이다.
도의 선사는 가지산에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옮긴 후 15년간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세속에 초탈한 선풍으로 선 우의사상인 순선純禪으로 발전, 사굴산闍崛山의 범일梵日(梵日, 810~889) 선사와 성주산聖住山의 무염(無染, 799-888) 선사 등으로 이어져 북산계를 형성하였다.
반면 남악계 홍척 선사는 국사의 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흥덕왕興德王과 의강宜康태자의 귀의를 받아 지배적인 권위를 유지하며 도시 불교적인 성격을 띠었다. 선과 교학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하려고 노력하여 그의 사상을 융선融禪이라고 하는데, 동리산桐裏山의 도선道詵 선사와 쌍계산雙溪山의 혜소慧昭 선사 등으로 이어져 남악계를 형성하였다. 이런 경향은 후에 우리나라 불교계의 두 줄기의 큰 흐름으로 발전하는데, 융선 사상은 고려사회에 영향을 끼쳐 선교 쌍립시대를 열었고, 순선은 조선시대 조사선풍으로 이어져 한국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고려 시대 선과 교가 함께 화회和會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은 그의 제자 혜심(慧諶, 1178~1234)에 이르러 기본사상이었던 화회사상보다는 지눌의 경절사상徑截思想만을 강조하는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 말에 오면 선의 우위성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1206~?)은『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등장시켜 조사선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소위 범일(梵日, 810~889)국사31가 선禪과 교敎의 뜻을 밝히면서 말씀하셨다는 ‘진귀조사설32’이다.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설법을 하였다. 그 뒤에 성을 넘어 출가하여 설산 중에서 공부를 하다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는데 이미 깨달은 이 법은 지극한 깨달음이 못되었다. 그래서 수십 개월 동안 다시 유행을 하여 진귀眞歸 조사를 심방尋訪하고서 현묘하고 극진한 사무친 도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33
북산계인 범일 국사는 마조도일의 제자 염관제안鹽官齋安의 제자로, 9세기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조開祖가 된 스님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력으로 보아 진귀조사설은 범일 선사가 스스로 저술한 것은 아니고, 400여년 뒤에 진정국사 천책이 조작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진귀조사설은 한국 외에는 없는데,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徹底시켰다는 지금 보면 다소 허황된 이야기를 유포시켜, 석가가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나아가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부처와 범부를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는 서산西山대사의『선교석禪敎釋』으로 강조되기도 하였고, 조선 후기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선문수경禪文手鏡』에도 이어져 150년간의 선문논쟁으로까지 표면화되었다.35
III. 참구
종달 노사님께서는 ‘세존께서 꽃가지를 든 경지와 꽃장수 아주머니가 꽃가지 드는 경지는 천양의 차가 없다. 즉 꽃가지를 든다는 데 있어서는 세존이나 꽃장수 아주머니나 조금도 차가 없지만, 꽃가지를 들 때 그 꽃가지와 자기가 일체되는 경지에 이르렀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뿐이다.’라고 착어하셨다. 그럼 사람들이 꽃을 드는 것과 부처님이 꽃을 드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겠다. 꽃을 들었다. 왜 꽃을 들었을까? 거기에 대한 의심이 사라질 때 세존염화의 화두는 풀린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각자 가지고 있는 오랜 세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 나름의 해석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그 행위를 한 사람과 해석을 붙이는 사람은 사고방식이나 축적된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행동에 대한 의도나 해석 또한 달라 질 수 있다. 오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무 선입견 없이 오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또는 상대방의 행동을 볼 수만 있다면 좀 더 그 의도에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입견을 없애는 방법이 ‘화두 참구’의 핵심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 본다.
IV. 착어
8언.
V. 재독
1. 마하가섭이 왜 웃었나?
2. 부처님께서 왜 꽃을 들어 올리셨나?
3.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어떤 법을 주셨나?
4.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주실 때에 마하가섭이 “제게는 법이 있습니다.” 하고 사양했더라면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5.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주실 때에 마하가섭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응대하겠는가?
VI. 감상
나무를 심을 때는 삽, 나무를 자를 때는 톱.
삽이 나무를 심고, 톱이 나무를 자른다.
VII. 참고한 책과 글
1.『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염화품拈花品」
2.『불설중본기경佛說中本起經』권하卷下「대가엽여래품大迦葉如來品 제12第十二」
3.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4. 분좌分座」 p. 52
4.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4. 분좌分座」 p. 53.
5. 중인도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에 있는 아시다발제하阿恃多跋提河의 약칭. 석가釋迦가 이 강江의 서안西岸에서 입
멸入滅했다고 하는 강의 이름. 발제跋提.
6.『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이권본二卷本)』권하卷下.
7. 가섭은 금색두타金色頭陀라고 불린다. 가섭은 범어로 번역하면 음광飮光이다. 금색이란 옛적에 어떤 가난한 여인이
하나의 금 구슬을 얻었는데 금세공업자에게 부탁하여 금불상의 안면부분을 보수하여 완전하게 개금불사를 마쳤다. 이에
금불상의 안면이 하늘의 빛을 모두 흡수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빛을 들이마셨다는 뜻으로 음광飮光이라 하였다. 특히 가섭을 ‘마하가섭’이라 부르는 것은 부처님 당시 배화교도였던 우루빈라가섭·가야가섭·나제가섭 등 가섭 3형제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8.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37. 쌍부雙趺」 p. 225.
9.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37. 쌍부雙趺」 p. 226
10. 깨달아 부처가 되는 일. 특히 석가모니가 음력 12월 8일에 보리수 아래서 큰 도(道)를 이룬 일을 이른다.
11. 원시불교의 교의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한역경전과 팔리어 원전이 있는데, 한역은 총칭하여 『아함경阿含經』이라 부르고 팔리어Pali語 원전은 『니까야Nicaya』라고 불린다. 참고로 구모이 쇼젠은 그의 저서 『붓다와의 대화』에서 무엇보다도 『숫타니파타Suttanipata』가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경전이라고 하였다.
12.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 법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는다는 뜻. 부처가 된 싯다르타 태자는 3박 7일간 보리수 아래 앉아 자신의 깨달음을 관조하며 법열法悅을 즐긴다. 이러한 경지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 누린 붓다의 만족감과 한동안의 안도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3. 산구 익(山口 益, 야마구치 스스무) 외 지음 정병조 옮김, 『현대인의 불교학』p. 61.
14. 불교교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리불은 사리부다의 음역으로서 '사리'라는 여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
리불은 부파불교 당시 사리불아비담마라는 분야가 만들어질 정도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도 많이 남겼다. 대승경전에서도 반야를 성취한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는 사리불을 일컫는 말이다.
15. Udana. VI, 4. 中村元중촌원 著 楊貞奎양정규 譯, 『불교佛敎의 본질本質』 p. 61.
16. Suttanipata 842, 843. 앞의 책 p. 62.
17. Suttanipata 884. 앞의 책 p. 63.
18. Samyutta Nikaya III. P 138 f. 『잡아함경』 제2권 37. 앞의 책 p. 63.
19. Suttanipata 837. 앞의 책 p. 64.
20. Suttanipata 832. 앞의 책 p. 64.
21. 태양太陽을 불교에서 이르는 말. 중생의 업력으로 일어나는 바람으로 항상 공중에 떠서 수미산의 허리를 돌면서 차례로 수미
산의 사대주를 비춘다고 한다. 월륜月輪은 둥근 달. 또는 그 둘레.
22. 中村元중촌원 著 楊貞奎양정규 譯, 『불교佛敎의 본질本質』 p. 65.
23.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anta; 베다의 말미•극치)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 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 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 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다. 우파니샤드의 원 뜻은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 문학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도의 정통 바라문 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 종교 사상의 근간•전거가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가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정비되었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만의 제식 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 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의 사상으로서 관념론적 일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4. Majjhima Nikaya 중부中部 108. 앞의 책 p. 67.
25. 中村元중촌원 著 楊貞奎양정규 譯, 『불교佛敎의 본질本質』 pp. 66~67.
26. 앞의 책 p. 166.
27.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산과
그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녹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산의 난〉 또는 〈천보의 란〉(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여 칭제를 했으며, 9년간 지속했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753년 52,880,488명의 인구가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상 최초, 최악의 킬링필드였던 셈이다. 597만 호가 이 전쟁으로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5인 기준을 삼아도 3600만 명이 넘게 죽었던 것이다.
28. 원철스님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서당지장 문하서 신라선문 토대 이룩」, 불교신문 2345호/ 2007년7월21일자.
29. 이는 <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의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이란 기록에서 기인한다.
30.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14~15, pp. 77~78.
31. 신라시대 선승禪僧으로 성은 김 씨이며 계림 출신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를 처음 연 사람으로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831년(흥덕왕 6)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고승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진리를 깨닫고 6년 동안 그를 섬겼다. 범일국사가 주창한 것으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있는데, 이 설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즉, 석가모니가 수행하다가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으나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느꼈으며, 그 뒤 진귀조사를 만나 교 밖에 따로 전하는 선지禪旨를 얻고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명주도독 김 공의 요청으로 강릉에 굴산사를 세우고 40여 년간 주석하면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열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국사성황신으로 대관령국사성황사에 모셔지고 있다. (Daum 백과사전).
32.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진다. 고려 때 진정국사가 지은 『선문보장록』에는 『달마밀록』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혔고, 조선 중기 휴정(1520∼1604)은 『선교석』을 저술할 때 『범일국사집』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진성여왕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범일에게 물었을 때 대답한 말 중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뒤에 진귀조사를 만나 무상정등각을 얻은 조사선 경지가 참된 깨우침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오랫동안 진위의 논쟁이 되어왔다.
33. 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唯我獨尊 後踰城住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遊行數十月 尋訪祖師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 乃敎外別傳也 (『선문보장록』은 진정국사 천책이 1293年에 저술).
34.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의 승려로, 12세 때에 “한 자식이 출가出家하면 구족九族이 모두 천상天上에 난다”는 말을 듣고서는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에서 선은사禪隱寺에 들어가 시헌詩憲 스님에게 머리를 깎았다. 23세 때 지리산 영원암(智異山 靈源庵)의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 스님을 스승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율종律宗의 계맥(系脈)을 이었다. 그 뒤 평북平北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道를 깨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선법禪法을 공부하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며 그 이름을 크게 떨쳐 ‘호남 선백(湖南 禪伯)’으로 불렸다. 50세 때『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어 당시 불교계佛敎界에 일대一大 논쟁論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35.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일지사, 1991.
VIII. 참고자료
종달 노사의 법맥(法脈)
종달 노사의 임제종 법맥은 다음과 같다. 잘 아시다시피 인도에서의 傳法은 석가세존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하여 반야다라까지 법이 전해졌고, 중국은 인도로부터 법을 가져온 달마로부터 임제의 후손인 제51세 밀암함걸로부터 52세 파암조선을 통해 56세 석옥청공까지 이어진 법은 57세 태고보우를 통해 한국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52세 송원숭악을 통해 54세 허당지우까지 이어진 법은 55세 남포소명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73세 백은혜학을 통해 일본 임제종의 중흥기를 거치고, 81세 화산대의를 통해 한국의 의현종달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주로 관련된 제47세인 오조법연 선사부터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세존(釋迦世尊) → <인도> 1世 : 마하가섭(摩訶迦葉) → (26代略) → <중국> 28世 : 보리달마(菩提達摩) → (4代略) → 33世 : 육조혜능(六祖慧能) → (4代略) → 38世 : 임제의현(臨濟義玄) → (8代略) → 47世 : 오조법연(五祖法演) → 48世 : 원오극근(圓悟克勤) → 49世 : 호구소륭(虎丘紹隆) → 50世: 응암담화(應庵曇華) → 51世 : 밀암함걸(密庵咸傑) →
52世 : 송원숭악(宋源崇岳) → 53世 : 운암보암(運庵普巖) → 54世 : 허당지우(虛堂智愚) → <일본> 55世 : 남포소명(南浦紹明) → 56世 : 종봉묘초(宗峰妙超)→ 57世 : 관산혜현(關山慧玄) → 58世 : 수옹종필(授翁宗弼) → 59世 : 무인종인(無因宗因) → 60世 : 일봉종순(日峰宗舜) → 61世 : 의천현승(義天玄承) → 62世 : 설강종심(雪江宗深) → 63世 : 동양영조(東陽英朝) → 64世 : 대아단광(大雅耑匡)→ 65世 : 공보현훈(功甫玄勳) → 66世 : 선조서초(先照瑞初) → 67世 : 이안지찰(以安智察) → 68世 : 동점종진(東漸宗震) → 69世 : 용산경용(庸山景庸)→ 70世 : 우당동식(愚堂東寔)→ 71世 : 지도무난(至道無難) → 72世 : 정수혜단(正受慧端) → 73世 : 백은혜학(白隱慧鶴) → 74世 : 아산자도(峨山慈棹) → 75世 : 탁주호선(卓洲胡僊) → 76世 : 묘희종적(妙喜宗績) → 77世 : 가릉서가(迦陵瑞迦) → 78世 : 율해현창(潭海玄昌) → 79世 : 독담잡삼(毒湛匝三) → 80世 : 무해고량(霧海古亮) →
81世 : 협산태우(夾山泰祐) → 82世 : 창내송당(倉內松堂)
81世 : 화산대의(華山大義) → <한국> 82世 : 의현종달(義賢宗達)
81世 : 시산전경(柴山全慶) → 82世 : 승평종철(勝平宗徹)
52世 : 파암조선(破庵祖先) → 53世 : 무준원조(無準圓照) → 54世 : 설암혜랑(雪菴慧朗) → 55世 : 급암종신(及庵宗信) → 56世 : 석옥청공(石屋淸珙) → <한국> 57世 : 태고보우(太古普愚)
***
다음은 위에서 생략된 부분을 추가하였습니다.
석가세존(釋迦世尊) → <인도> 1조 : 마하가섭(摩訶迦葉) → 2조 아난타(阿難陀) → 3조 상나화수(商那和脩) → 4조 우바국다(優婆鞠多) → 5조 제다가(堤多迦) → 6조 미차가(彌遮迦) → 7조 바수밀(婆須密) → 8조 불타난제(佛陀難堤) → 9조 복타밀다(伏馱密多) → 10조 파율습박(波栗濕縛) → 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 → 12조 아나보리(阿那菩堤) → 13조 가비마라(迦毗摩羅) → 14조 나알라수나(那閼羅樹那) → 15조 가나제파(迦那堤波) → 16조 라후라타(羅후羅陀) → 17조 승가난제(僧伽難提) → 18조 가야사다(迦耶舍多) → 19조 구마라다(鳩摩羅多) → 20조 사야다(사夜多) → 21조 파수반두(婆修盤頭) → 22조 마노라(摩拏羅) → 23조 학륵나(鶴勒那) → 24조 사자보리(師子菩堤) → 25조 파사사다(婆舍斯多) → 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 → 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 →
<중국> 28조 보리달마(菩堤達磨) → 29조 이조 혜가(2조 慧可) → 30조 삼조 승찬(3조 僧璨) → 31조 사조 도신(4조 道信) → 32조 오조 홍인(5조 弘忍) → 33조 육조 혜능(6조 慧能) → 34조 남악회양(7조 南嶽懷讓) → 35조 마조도일(8조 馬祖道一) → 36조 백장회해(9조 百丈懷海) → 37조 황벽희운(10조 黃檗希雲) → 38조 임제의현(11조 臨濟義玄) → 39조 흥화존장(12조 興化存奬) → 40조 남원혜옹(13조 南院慧裵) → 41조 풍혈연소(14조 風穴延沼) → 42조 수산성념(15조 首山省念) → 43조 태자원선(16조 太子院善) → 44조 자명초원(17조 慈明楚圓) → 45조 양기방회(18조 楊岐方會) → 46조 백운수단(19조 白雲守端) → 47조 오조법연(20조 五祖法演) → 48조 원오극근(21조 圜悟克勤) → 49조 허구소륭(22조 虛丘紹隆) → 50조 응암담화(23조 應庵曇華) → 51조 밀암함걸(24조 密庵咸傑) → 52조 파암조선(25조 破庵祖先) → 53조 무준원조(26조 無準圓照) → 54조 설암혜랑(27조 雪岩慧郞) → 55조 급암종신(28조 及庵宗信) → 56조 석옥청공(29조 石屋淸珙) →
<한국> 57조 태고보우(1조 太古普愚) → 58조 환암혼수(2조 幻庵混脩) → 59조 구곡각운(3조 龜谷覺雲) → 60조 벽계정심(4조 碧溪淨心) → 61조 벽송지엄(5조 碧松智儼) → 62조 부용영관(6조 芙蓉靈觀) → 63조 청허휴정(7조 淸虛休靜) → 64조 편양언기(8조 鞭羊彦機) → 65조 풍담의심(9조 楓潭義諶) → 66조 월담설제(10조 月潭雪霽) → 67조 환성지안(11조 喚醒志安) → 68조 호암체정(12조 虎巖體淨) → 69조 청봉거안(13조 靑峰巨岸) → 70조 율봉청고(14조 栗峰靑皐) → 71조 금허 법첨(15조 錦虛法沾) → 72조 용암혜언(16조 龍巖慧言) → 73조 영월봉율(17조 詠月奉律) → 74조 만화보선(18조 萬化普善) → 75조 경허성우(19조 鏡虛惺牛)
→ 76조 만공월면(20조 滿空月面) → 77조 고봉경욱(21조 古峰景昱) → 78조 숭산행원(22조 崇山行願)
→ 76조 만공월면(20조 滿空月面) → 77조 전강영신(21조 田岡永信)
→ 76조 만공월면(20조 滿空月面) → 77조 혜암현문(21조 慧庵玄門) → 78조 청봉청운(22조 淸峯淸韻) → 79조 퇴옹성철(23조 退翁性徹)
→ 76조 혜월혜명(20조 慧月慧明) → 77조 운봉성수(21조 雲峰性粹) → 78조 향곡혜림(22조 香谷蕙林)
첫댓글 전에 법장법사님 께서 부탁 하셔서,
노사님 무문관 앞장 법계도와 법경 법사님 지으신 책에 실린 법계일부를 합쳐
a4용지에 법계도를 그려 드린적이 있읍니다.
책마다 조금씩 틀리고, 지금 법사님 쓰신 연도도 노사님 쓰신 연도와도 다름니다
씨받이도 아니고, 적손도 있고 서자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라프 용지에
법계도도 깔끔하게 정리된것도 필요 할것 같습니다,
책에 보면 8대생략, 15대 생략, 이리 표시되었는데, 모르는것을 생략이라고 했는지
아는것을 생략이라고 했는지 아리송 합니다
그 법게도로 본다면 법경 법사님은 석존의 83대손이 되는것 같았읍니다.
위에서도 밝히셨듯이 밀어내고, 세우고 스님들도 정치판과 똑 같습니다. 좀 챙피 스럽습니다
전에 시민 선방에 잠깐 나갔을적이 있었는데,
스님께
"절에서 합동제사를 올려주고 범 불교적인 차원에서 실비로 올려주는 방법은 어떻겠읍니까?"
"안 됩니다, 실비로 해주면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합니다"
그게 이유인가?
그후, 그 스님이 수원에 선원을 차리셨다.
" 스님! 그때 그리 말씀 하셨는데, 이유가 그것입니까?"
" 으~하하하~! 거사님, 절도 사회와 똑 같습니다" 그리 한다면 단번에 "조직의 쓴맛을 보구싶어?"
"종단 차원에서 이루어 져야지요!"
법사님! 우리 선도회 같은 수행처는 세상에 둘도 없읍니다. 득로 합장
그렇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원 합장
작년에 이천 들려, 여수 향일암(불나기전) 다녀오는데 꼭 50만원이 들다
유인, 무인 카메라에찍혀 14만원 벌금 까지.....
(새벽 6시 출발, 새벽 1시반에 집에 도착.)
이 고생하여, 힘들게 절에 도착하니(꼭 10년만에), 무슨 불사하라고 마당에서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더니,
법당, 삼배 끝나기 무섭게, 쪼르르 쫒아와서 무슨 기도 접수하라고......
부처님! 다 보시고 계시는지요? 금강경에, 다 보시고 다 아신다면서요??
다보시고, 다 아시면, 어떻게좀 해 주십시요!(백장 선사님을 보내주시든가)
그래서, 낙산사가 불이났고 향일암이 타 올랐읍니까??
부처님! 저희 선도회같은, 그림 같은곳도 있긴 있읍니다만........! 득로 합
부처님전에 고발 합니다.
제사 한번 챠려주는데 40만원이고(그것도 합동제사), 천도제 지내주는데 500만원, 바라춤이 곁드려지면
800만원도 되고, 천만원도 받습니다.
수능 시험철이 되면, 수능시험 100일기도 푸렌카드가 걸려집니다
사찰에서 영업을 하고 있읍니다
호박에 줄을 그으면 수박이 되는지요??
- 조금전, 식기 보관함에 먹다남은 음식, 먹던젓가락으로 먹고있는 노숙자 를 보다 -
"찐계란 몇개 사드릴까요?"
" 아녀! 나 뭐사줄생각 하지말어! 그냥 이거 먹으면 돼!"
- 불구부정
말씀의 뜻을(그 말씀뜻은 아니겠지만), 실천(?) 하고 있는분도 있다
이것을 고발합니다
선도회(지도법사 법경) 서강대지부 득로합장
_()_
법사님! 읽어 주셨네요!
저, 이글을 , 분한 마음이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써 올렸읍니다.
저도 뭉클하게 읽었습니다.
진실로 온 몸으로 사신다는 느낌입니다. _()_
이번 주말 서울에서 후배들이 찾아와 세상이야기하며 술 한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저의 결론은 "따뜻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습니다만 부끄럽게도
저도 세상속에서 정말 무심히 그럴수 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전원 합장
설악산 영시암에 갔을 때입니다. 법당에 들어가려는데 한 보살님이 등산객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와는 오만원이고 서까래는 얼마고....... 그리고 “이번에 한 번 올리시지. 거기에 이름 다 들어가고.......천만 원이야.” 그때는 웃고 지나왔는데, 조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영시암 터가 영시암이 되고(전에는 터만 있었습니다.), 지금의 백담사가 있고, 지금 봉정암을 보러 올라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로서 기와 만드시는 분 생계가 되고, 기와 올리시는 분 가족의 밥이 되고, 지나가는 등산객 죽이 되는구나(등산객들에게 죽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 활동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세상에 공짜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듯한데, ‘우주에는 공짜 점심이 없다.’라고 하면 확신이 갑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가서 도의 눈으로 보면 “공짜”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주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대상화해서 보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자기는 자기 이외의 일체존재이기 때문에), ‘타자라는 것은 타자라는 모습을 한 자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견성 체험은 신심탈락身心脫落에 의한 자비심의 현현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가 나고 내가 원수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아도 그대로 자비慈悲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쓰신 글을 읽고 어떻게든 위로를 드리려고 아침에 이 글을 써서 들어왔더니 올리신 글을 지우셨습니다. 표적을 쏘려고 화살을 겨눴더니 표적이 없어진 격입니다. 체험하신 진솔한 말씀이라서 제가 생각하고 있던 원론적인 말씀을 올립니다.
전원 합장
법사님! 누어서 침을 밷는것 같아, 그랬읍니다,
제(불교) 치부를 보이는것같아...
- 기와가 오래되어 교체가 시급 합니다, 뜻이 있으신분 동참 하소서!
이리 써붙여 놓기만 해도, 히~야~! 그 얼마나 좋을꼬!
이름석자,
불전 올리며 이름써 올리는 사람 없읍니다,
그 꼭대기에서 죽한그릇 얻어 먹고, 그냥 가는사람 없듯이......
제 작은애 사귀는 여자가 딸만 둘인 집안 입니다
들으나 마나 결혼을 한다면 무슨 얘기를 할까요??
무주상!
마음에서 울어나서 해야지
조건이 걸리면, 하면서도 코가 끼어 하는것 같지 않을까요?
글을 또 올리고 들여다 보니, 계속 앙탈만 부린것 같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니, 그러려니 하십시요^^
기분좋게 잘 살아가려 한다고, 청세고빈 댓글난에 올려드린지
한달도 못되어, 또 발끈 했읍니다
말씀 또 고맙습니다
득로 합장
북한산, 승가사를 들려 사모바위에서 비봉을 오르려다 옆길로 잘못들어 향로봉으로 갔읍니다
법계도를 말씀드리며
지금, 선도회의 정통성을 여쭈어 보려다, 겉잡을수 없이 딴길에서 울컥 했읍니다
법경 법사님 제창하시는글 남전 참묘에서도 밝히 셨듯이,
"각자의 신앙아래 함께 수행 하라!" "종단 종파를 초월 하라!"
" 꿩 잡는게 매!" 라 고 하셨는데
법계도에는 우리 선도회가 그려질수 없는지요?
매우 궁금 합니다. 득로 합장
선도회 법맥은
영하산방 法境 朴英才 법문모음
12 선속에 약동하는 인생: 선도회의 성립과 전개 - 박영재 / 선도회 법사, 서강대 교수
에 정리되어 있으나, 생략된 부분과 함께 조계종 법맥을 추가하여 본문에 올립니다.
알것도, 궁금할것도 없는것을.....
있으자리 제자리에 모두다 있는것을....
찿아보라는 착어나 찿아보면 될것을......
고맙습니다,
올려주신 자료는, 한달정도는 또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연도 표시가 있으면 그라프 용지에 깔끔하게 정리 될터인데
좀 아쉽습니다,^^ 득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