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거리 두기
朴埰同 (2020.04.09.23:03)
1980, 90년대 한국 교회에 이른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이 운동이 ‘그 악한 자의 팔에 누인 정치’와 거리 두기를 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명분으로 ‘인간들만의 유토피아(바벨탑)’를 세우는 일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복음과는 동떨어진 ‘이념(이데올로기)’이 되는 일이다.
‘0% 악인 정당(정치인)’이 있다면, 그 정당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고 확장하는 ‘메시아(그리스도) 당’이겠지만, 그 정치인은 ‘흠 하나 없는 순결한 메시아’이겠지만, 그래서 우리 선택은 쉽겠지만, 우리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높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악한 자 팔에 누인 세상’에서 하는 우리 선택은 이른바 “차악”을 선택하는 투표, ‘차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60% 악惡인 ‘너’ 정당(정치인)과 40% 악인 ‘나’ 정당(정치인)이 있을 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나’ 정당(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높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악한 자 팔에 누인 세상’에 사는 우리는 ‘흠 하나 없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와 ‘나 정당(정치인)’과 사이에 ‘40%라는 무척 먼 거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나’ 정당(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나’ 정당(정치인)에게 ‘40% 거리’를 두고 표를 던져야 한다.
이 ‘40% 거리’를 ‘100% 순결하신 그리스도, 그분 열심으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와 ‘무척 먼 거리임’을 인식하지 못할 때 나오는 우리 행동은 ‘순결하신 그리스도’, 여호와의 영광을 찬탈하는 ‘우상숭배’다. ‘부패한 사람’을 ‘흠 하나 없는 메시아’로 여겨 ‘용비어천가’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 여호와의 영광’을 찬탈하는 ‘우상숭배’다. 지난 대선에서 이른바 “좌파 목사들”이 {페북}에서 보여준 대로, 하나님의 입 노릇을 해야 할 그들 입에서 나온 ‘용비어천가’가 보여준 대로, 사람의 주구走狗 노릇을 했던 그들에게 ‘나’ 정당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메시아 정당’이자 ‘나’ 정치인은 ‘흠 하나 없는 메시아’였다.
‘메시아(그리스도) 세계관’으로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세우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그리스도 왕국)는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나라’가 아닌 ‘바리새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 바리새인들만의 유토피아’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명분 삼아, ‘기독교 세계관’을 ‘이데올로기’ 삼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탈하지 말자.
40% 멀리 있는 정당(정치인)과 입맞춤하는 ‘용비어천가’를 부를 때, 40% 멀리 있는 정당(정치인)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40% 멀리 있는 정당(정치인)에게 다가갔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오염’됐음을 알아야 한다.
그 악한 자를 이기셔서 ‘높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악한 자 팔에 누인 정치’와 ‘거리 두기’를 해 우리를 지키자.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그 악한 자를 이긴 것’을 뜻하는 게 이 ‘정치(적) 거리 두기’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일 5:21)
정치(적) 거리 두기 ②
朴埰同 (2020.04.11.08:38)
흰색에 검정색 40%가 섞여 흰색에 가까운 회색이 있는데, 이를 흰색으로 착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물론, 이들은 흰색에 검정색 60%가 섞여 검정색에 가까운 회색을 흰색으로 착각하는 기독교인들보다는 나은 기독교인들이다. 아무튼 그들 모두는 우리 발이 ‘그 악한 자의 팔에 누인 땅’에 닿아 있을지라도 눈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좌정하신 하늘’에 둬야 하건만, 정치와 거리를 두지 못한 나머지 눈마저 땅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 정치가 곧 신앙이 된 사람들이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 말을 빌리자면, “정치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이 정치종교인들 가운데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정치종교인들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검찰 포토라인에 서셨을 때 ‘대통령 재임 시 김대중 전 대통령 등에 비수를 꽂았던 노무현 대통령 배은망덕, 토사구팽의 정치, 호남 멸시 영남 패권 분열의 정치’를 생각하지는 못한다. ‘전임 대통령에게 배울 것이 따로 있지, 전임 대통령 등에 칼을 꽂는 이명박 대통령 패륜의 모습’에서 ‘호남 비하 영남 우월 인종주의에 따른 패륜을 저지른 노무현 대통령 과거 모습’을 보는 눈이 없다.
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기독교인들, 정치종교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이른바 “멘붕”이다. 사람에게 한겨레사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하건만, 자신이 ‘절대 선’으로 여겨 지지했던 ‘나 후보(문재인)’가 선거에서 짐으로써 ‘너 후보(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ㅡ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연정 제안으로 한나라당과 권력을 나눠 가지려고 하셨던 노무현 대통령 꿈이었을지도 모를 당선ㅡ됐을 때 느낀 ‘허탈감’이다. 물론, ‘너 후보가 나 후보에게 이기는 사전 여론조사’라는 ‘상식’도 무시한 착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던 이 ‘허탈감’은 정치종교를 믿은 ‘우상숭배’에 따른 ‘허탈감’이다.
링크하는 글은 황영철 목사님 글이다. 내가 ‘오래 해 묵은 김장김치와 같은 글’로 생각하는 글이다.
황영철 [김영삼 장로 대통령 만들기, 한국 교회 희망인가?]
http://cafe.daum.net/reformedcafe/IeTx/7
정치(적) 거리 두기 ③ : 투표가 끝나, 참 시원하다.
朴埰同 (2020.04.15.22:09)
돌고 도는 영겁회귀 육사陸史가 직선으로 향해 가는 종국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물론, 영겁회귀 육사에는 하나님의 도성을 소망한 아벨이 있었고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 살인자 가인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도성을 지은 노아가 있었고 노아를 비웃은 고대 인류가 있었다. 노아 후손 현대 인류가 세운 거대한 성城 유토피아가 있었고 바벨탑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다. 동성애 같은 향락을 추구한 유토피아가 있었고 향락의 바벨탑에서 건짐을 받은 롯이 있었다. 하나님의 도성 주인이신 메시아(그리스도)를 낳을 겨자씨 이삭이 있었고 그 겨자씨를 놀리는 이스마엘이 있었다. 하나님의 도성을 꿈꾼 요셉이 있었고 요셉을 유토피아 애굽에 판 형제들이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 종으로서 누리는 자유를 고대한 여호수와와 갈렙이 있었고 바벨탑 애굽으로 되돌아가 사람 종노릇을 하기 바란 이스라엘 민족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주신 사울 왕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성을 조롱하는 골리앗을 ‘하찮은 물맷돌’로 무너뜨린 다윗 왕이 있었다. 하나님의 도성을 지은 솔로몬의 영화가 있었고 하나님 명령을 어겨 유토피아 애굽의 말(馬)들을 신神으로 삼은 배금주의자 솔로몬 왕 배교가 있었다. 솔로몬의 영화로 세운 하나님의 도성을 말발굽으로 짓밟은 바벨론이 있었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있었다. 그리고 골리앗과 같은 바벨탑을 무너뜨려 ‘참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룰 ‘뜨인돌’···.
차악次惡이라는 정의正義(?)를 선택한 내 투표에 악惡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가는 영겁회귀 육사에서 ‘하찮게 보이는 뜨인돌’을 바라봐야 하건만, 하나님의 도성을 상징하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마저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건만, 대한민국이라는 바벨탑에 소망을 두는 삶,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삶은 “바람을 잡으려는”(전 1:14) 참 미련한(골이 빈) 삶이 아닌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전 1:9)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
차악이라는 정의를 선택한 투표는 끝났다. 우리 투표에 악惡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딤전 2:2 하)기 위해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단 4:27)라는 다니엘의 마음으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딤전 2:2 상) 육사陸史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다윗의 하찮은 물맷돌과 같은 뜨인돌’을 바라보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