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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다, 벌. 어서들 피해”
퉁이 너머에서 열심히 제초기로 벌초하던 친척분의 외마디 소리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산 밑으로 모두들 냅다 뛰기 시작했다. 집안 어르신들의 여러 의견을 거쳐 올해 새롭게 만든 납골당 주위를 추석을 맞아 벌초에 나선 나와 여러 친척들 중 누군가가 벌집을 건들렸나 보다. 한 바탕의 줄행랑을 끝내고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그 조그마한 벌들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들에 웃음도 짓고 한숨도 지은 우리들은 벌들이 아직도 한 귀퉁이에 모여있는 벌집을 찾았다. 정교한 육각형의 모습을 하고 조그마한 꿀벌들이 아직도 들락거리는 벌집에는 보기에도 탐스러운 달콤한 꿀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사업과 나의 모습이 벌집을 만드는 부지런한 꿀벌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
1. I can be the best in my field.
금속공학을 전공한 나는 1994년 말 L사 사업부의 엔지니어로 입사를 하게 되었고 2003년 말까지 거의 10여년의 청춘을 회사와 함께했다. 생산팀, 생산기술팀, Task팀 등을 두루 거쳐 2003년에는 반도체부품인 LF생산의 책임자인 LF생산팀장을 맡게 되었다. LG그룹의 가장 큰 장점은 시스템에 의한 업무 관리와 지속적인 교육훈련이었다. 근무기간 동안 개인적인 욕심과 회사의 지원으로 산업대학원을 수료하였고, 회사의 꾸준한 교육훈련으로 미국에서 부여하는 CPIM(美공인 생산재고관리사) 자격증과 원가전문가 자격증 등을 획득하게 되었다. 나의 모토인 ‘ I can be the best in my field' 와 같이 나의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회사 생활을 통해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2002년 말에는 ’올해의 LG마이크론 대상‘ 은상까지 수여하게 되었다.
2003년 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의 시작을 고하는 때였다. 2003년 초 LF생산팀장을 맡게 된 나는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LF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큰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해서일까. 생산 공정관리시스템인 MES를 완료 후 생산관리 시스템인 APS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사업부장님과 다소 의견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최적의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시점과 유능한 관리인원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APS 시스템의 도입 연기와 기존 생산관리 사원을 그 당시 적자사업부의 인원 증강 요구로 차출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일 이후로 스스로에 대한 비젼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0여년 동안의 대기업 생활에서 내가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한 동안의 방황동안 LF생산팀의 실적은 다소 주춤했고, 하반기가 되어서는 공정 CAPA의 부족으로 외주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여야만 했다. 사업부장님께서는 LF생산팀의 업무보다 더 중요한 외주부문의 관리를 담당할 TASK팀을 만들어 최적의 관리 시스템을 만들라는 주문을 하셨지만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던 나로서는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지난 10년이 아닌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제러미 리프킨이 쓴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는 물질적 소유가 아닌 접속과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얻게 된 나에게 처남이 진지하게 같이 일을 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대구에서 프로덕션을 하고 있었던 처남은 지금의 프로덕션을 좀 더 키워 광고대행사를 해 보고 싶어 했으나 관리와 영업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몇 달간의 숙고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2003년 말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나의 마음 속에는 나의 모토가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같이 새로 시작하는 나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분야에서도 성공하리라는 자심감!!
2.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장대하리라.
대기업에서 조직원으로서의 생활과 스스로가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처음 회사를 시작하는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2004년 1월 대구시 중구에 자본금 5천만원의 (주)봄커뮤니케이션즈를 창업하였다. 창업과 관련된 모든 부문은 법무사 사무실을 통해 해결하였고 세부적인 부문은 관련 책자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자본금은 퇴직금 3천만원과 저축한 2천만원으로 충당하였으나 회사의 운영을 위해서는 운영자금이 다소 부족하였다. 그 당시 처남의 프로덕션 인원4명과 신규 AE 및 디자이너 2명을 충원한 상태였으나 처음 광고대행사를 운영하던 입장으로서는 신규 광고주를 확보하는 것과 신규 매출을 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먼저 운영자금 부문에 대한 대출이 절박해졌다. 대기업 생활을 하면서 대출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나로서는 어떻게 대출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을 푸는 해답은 엉뚱한 데에서 다가왔다.
광고대행사를 시작한 후 광고주의 입장을 먼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 나는 2월에 장기적 광고주가 될 만한 프랜차이즈업체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계명대학교에서 실시하는 ‘프랜차이즈 전문가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프랜차이즈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실제 프랜차이즈 본부를 운영하기 위한 세부적인 내용까지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여기서 창업과 관련된 부문을 강의하던 김** 소상공인지원센터 상담사를 만나게 되었다. 창업과 관련된 소상공인지원센터의 자금지원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 듣게 된 나는 김** 상담사에게 소상공인지원센터의 활용방안을 문의하게 되었다. 소상공인에게 경영과 자금 등 운영에 필요한 모든 상담을 해주는 소상공인지원센터가 있다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대구남서부소상공인지원센터를 소개받게 되었다. 창업을 원하는 소상공인에게 신용보증으로 정책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과 관련된 여러 지원업무를 안내 받게 되었다. 그 덕택에 운영자금으로 필요한 3천만원을 대구신용보증재단의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아 지원받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운영자금을 확보한 후에는 영업이 가장 중요한 업무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프로덕션의 업무인 영상물 및 CF 제작 등에 집중해온 까닭에 광고대행이나 인쇄 광고물 제작에 대한 광고주 확보가 되어 있지 않아 신규 광고주의 확보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처럼 영업의 시작은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프랜차이즈 전문가 과정을 통해 김** 상담사와 인사를 하게 된 나는 명함을 건네받게 되었다. 김**상담사의 명함은 다소 엉뚱하게도 OHP 필름에 이름을 복사한 것으로 독특한 면은 있었으나 세련된 맛이 없었다. 김** 상담사로 부터 앞으로의 영업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기로 약속한 나는 회사의 디자이너에게 명함을 신규 디자인하여 방문선물로 건네주었다.
‘사소한 명함이지만 일의 시작은 명함에서 시작된다’라는 김** 상담사의 인사와 함께 영업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듣게 되었다. 사소한 시작으로 먼저 두드리면 언젠가는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김** 상담사의 조언은 내가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행동강령이 되었다.
1주일 쯤 지난 후 나보다도 더 기뻐하는 목소리로 김** 상담사께서 전화를 주셨다. 전시컨벤션센터 행사직후 당시 홍** 대구경북지방 중소기업청장님을 뵙게 되어 명함을 건넸는데 세련된 명함디자인에 관심을 가지신 홍**청장님께서 신규로 추진하고자 계획중이셨던 ‘나누미 서비스’ 명함 디자인의 시안을 제출해 보라는 제의를 하셨다고 했다.
관공서 영업은 인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온 나로서는 파격적인 제의였다. 성심성의껏 디자인 한 시안을 보신 청장님께서는 명함 디자인과 함께 포스터 디자인까지도 같이 해 볼 것을 제안하셨다. 지금까지의 관공서 형태의 디자인과는 다른 광고적인 냄새가 나는 우리 회사의 포스터 디자인에 청장님은 대만족을 하셨고 이를 계기로 대구경북지방 중소기업청과는 지속적인 디자인 관련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사소한 시작과 열정적인 김**상담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김** 상담사를 통한 인적 네트워크의 형성은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계명대학교 창업보육센터를 비롯한 여러 창업보육센터와 소상공인 여러 업체들이 새로운 광고주로써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게 되어 초기 영업에 큰 힘이 되었다.
하반기로 들며 거래업체가 늘어남과 함께 유동자금의 소모도 함께 커졌다. LG마이크론의 조그마한 영상물들을 만들던 우리 회사는 LG마이크론 전체 홍보영화를 수주하게 되었으나 금액이 큰 관계로 유동자금의 부족이 예상되었다. 다시 대출이 발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소상공인 지원센터와 중소기업청을 통해 회사 실적과 업무 계약서가 있다면 쉽게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신용보증기금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신용보증기금에서는 서류심사와 방문심사를 통해 우리 회사의 세부적인 사항과 사업계획서를 평가하여 2천만원의 신용보증을 해줘 일시적 유동자금의 필요를 해소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청의 여러 지원 체계를 알게 된 나는 열렬한 중소기업 담당기관의 홍보자가 되었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만나게 되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에게는 여러 지원 체계를 설명하고 지원기관의 담당자와 연계시키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소상공인지원센터의 창업도우미로 선정되어 예비창업자나 업체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 한 예로 경일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주)몬도미오의 경우 판로와 마케팅에 애로를 겪고 있는 상황을 보고 김**상담사와의 소개를 통해 대구에 유통업체를 소개받게 되어 하나의 판매루트를 확보한 경우라 하겠다.
해가 바뀐 2005년은 많은 광고주를 확보한 해였다. (주)호텔인터불고, 한국패션센터, 섬유협회부설 KTC, 영남일보, LG실트론(주) 등 대구, 경북 지역의 굵직굵직한 업체들도 포함되었다. 특히 영남일보의 경우는 적극적인 영업과 참신한 기획안으로 얻게 된 소중한 광고주였다. 영남일보는 10월이 창간 60주년을 맞는 해였다. 기존의 대구매일신문과 쌍두마차였던 지역 대표 신문인 영남일보는 상반기에 IMF 이후 지속되던 법정관리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사주가 취임한 해였으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념비적인 60주년 행사를 원하고 있었다. 영남일보의 영업도 아주 미약하게 시작되었다. 출력물 외주업체인 로얄기획 사장님을 통해 홍보영화 제작 비용에 대한 의뢰를 받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 잘 모르시는 사장님은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셨고 담당자와의 미팅을 통해 홍보영화 뿐만 아니라 60주년 행사 전체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일간 전 직원이 기획회의와 기획안 작성을 통한 결과물은 행사 TASK팀원들과 상무님을 만족시켰고 10월에 치러진 행사는 대통령 영상 축하물 및 4당 총재님들, 시도 지사님 들과 여러 내외빈을 모시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3.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3년차 징크스라고나 할까. 2여년 간의 기간동안 회사는 지속적인 광고주 영입과 기존 광고주를 통한 신규 광고주 네트워크 형성적 꾸준한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06년을 들어서며 우리 회사는 대구산업정보대학 창업보육센터로 이전하게 되었다. 영상팀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 대구산업정보대학에 구축된 영상개발센터와의 연계를 통한 지속적 영업과 영상관련 업무의 협약을 통해 좀 더 영상에 치중하는 정책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상반기에 있는 여러 관공서와 LG그룹 본사의 '스킬 올림픽‘ 프리젠테이션의 참가였다. 관공서의 경우 여러 행사 및 영상물 제작에 대한 입찰이 상반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속적인 광고주 확보를 위한 입찰을 위해서는 기획안 제출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한 기획안 작성이 수시로 진행되었다. 기획안 작성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자료 확보 및 제안을 위해 수시로 밤샘작업이 계속되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장기간의 노력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획안에서는 특별한 감정 요인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실적에서 항상 점수가 낮게 나왔다. 지금까지 수행한 결과물 중 관공서를 상대로 한 실적이 많지 않아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관공서의 경우 STEP BY STEP 형태의 지속적 실적누적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실적을 쌓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결과 내부 인원들의 동요가 일어났다. 몇 일간의 밤샘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는 신규 제안서의 작성은 내부 인원들을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찌들게 하였고 불만은 쌓여만 갔다. 이의 해소를 위해 개인 면담 등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이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LG그룹 본사의 ’스킬 올림픽‘ 프리젠테이션 자료 작성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말작업을 포함한 5일간의 밤샘작업 후 LG그룹 본사에서 가진 프리젠테이션 결과는 내부 직원들의 실망을 예고했다. 기획안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대구에 있는 지방업체라는 점이 업무수행에 감점요인으로 작용했다. 큰 실적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감점요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기존 인원 중 4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그만두는 상황에 까지 간 것이었다. 현실을 무시하고 앞으로의 비젼만으로 직원들을 이끌기에는 명확한 비젼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조언을 구할 데가 없어 다시 김경숙 소상공인지원센터 상담사를 찾았다. 회사가 성장할 때 오는 성장통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신 후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현재의 수주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 놓으셨다.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먼저 현재 수주된 업무들은 주변의 인적 네크워크를 이용하여 하나하나씩 해결해 가면서 경험이 있는 경험사원과 신규사원의 채용을 실시하였다. 신규 채용 후 앞으로의 회사 비젼과 현재 상황과의 차이를 설명하며 이의 해소를 위한 방안들을 충분히 설명하며 직원들을 설득하였다. 1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며 회사는 다시 안정된 모습을 찾아갔다. 여름을 지나며 주춤했던 기존 광고주 영업과 신규 광고주 영입에 있어서 예전 이상의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4. 벌집을 채우는 꿀벌은 행복합니다.
3여년의 기간 동안 오로지 앞만 보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처음 회사를 창업했을 때와 운영해오는 동안의 이런저런 일들을 돌이켜 본다. 내가 힘들 때마다 내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왔고 앞으로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은 튼튼한 6각형의 벌집에 달콤한 꿀을 채우는 꿀벌의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이런 꿀벌에게 꿀을 채우는 집을 꾸미는 것은 꿀벌의 노력도 있지만 주변에서의 많은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벌집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는 중소기업청, 소상공인지원센터, 신용보증재단 등이 없었다면 나는 벌집을 튼튼히 세우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지금의 내 모습이 완전한 벌집을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튼튼한 벌집을 만들어 달콤한 꿀을 채우는 지금의 과정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나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나의 모습. 그것이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자 내가 그리는 자그마한 꿀벌의 바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