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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손누트 공항의 눅눅한 열기
남한산성 인근 미군부대 앞에 <형제 목공소>를 차려놓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려니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사는 느낌이 들었다. 63년 제대 이후 마음이 들뜬 상태에서 의정부에다 목공소를 차려놓고 몇 개월 일을 하다가 운천으로 옮겨 양키 물건 운반책으로 신나게 번 돈을 하루아침에 날린 일들이 어느 새 까마득한 옛날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만 같았다.
<형제목공소>는 의정부 때와는 달리 장사가 잘 됐다. 솜씨가 그럴듯했던지 소문이 꼬리를 물어 많은 일감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미군부대 장교숙소에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일감을 주문 받았고 또 때로는 그 안에서 일을 할 때도 있었다. 형제 목공소 손님 중에는 그 부대 대대장도 있었는데, 나는 자유롭게 부대를 출입하려면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마음 먹고 그가 이것저것 만들어 달라고 일을 맡기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친해졌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그 일만 해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힘들지 않느냐”며 혹시 월남에 가서 일해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목수라는 직업은 항상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기술 중에서도 배고픈 기술이었다. 오죽하면 미군 대대장이 보기에도, ‘저래가지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 미군 대대장은 내가 먹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해서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월남이란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심코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지만 6.25를 체험한 나는 전쟁터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참한 비극들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평상시엔 기대할 수 없는 기회도 많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대대장의 허리춤을 움켜잡는 심정으로 그가 던진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미군 사물함이나 짜면서 일생을 마칠 수는 없었다. 월남이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왠지 좋은 기회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해외에서 일할 기회는 정말 드믈었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선택된 사람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선뜻 해외취업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까짓 것,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내가 적극적으로 달라붙자 중령은 마지 못한 듯 방법을 알려주었다. 부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국배라는 사람의 케이비 킴사(k.b. kim & co.)가 월남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거기 가서 일할 생각이 있다면 소개를 해줄 테니 잘 생각해보고 원서를 내라는 것이었다. 그가 ‘잘 생각해 보라’고 단서를 붙인 이유는 당시 월남에 있던 rmk라는 회사에 폭발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중령은 아무래도 말을 너무 쉽게 꺼냈다는 생각이 드는지 조건을 꺼냈다.
“원서를 내기 전에 먼저 당신 부인에게 승낙을 받아 오시오.”
사고가 발생한 rmk에서 한국인 파월 기술자가 많이 희생당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민간인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은 전쟁터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동의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 허락도 아니고 아내의 승낙을 받아오라는 게 우스웠지만 혹시나 싶어 나는 아내에게 사전에 다짐을 받아두었다.
“혹시 미군 대대장이 와서 뭔가 물으면 무조건 ‘오케이, 오케이’ 하라구.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영어를 못해서 대화를 나눌 때 손짓 발짓 다해야 겨우 뜻을 알아듣는 판국에 아내가 영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대대장이 찾아가서 물어봐야 의사소통이 될 리 없었다.
좌우지간 나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케이비 킴은 지원자들 중에서 1차 서류 심사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태원 중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실기 시험을 실시했는데 목수만도 40여명이 몰려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대학 나온 실업자들이 즐비할 때였다.
대학을 졸업해봤자 한국전력, 충주 비료 아니면 산업은행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문이 좁았다. 케이비 킴 응모에 5, 6대 1의 경쟁율을 보인 것은 당연헀다. 나는 미군 부대 대대장이 “미스터 캉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니 잘 좀 봐 주라”고 김 사장에게 부탁을 해선지 제일 먼저 뽑혔다. 그래서 잔뜩 꿈에 부풀어 월남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극장영화를 시작하기 전 돌려주는 <대한 늬우스>에서 짠,짠,짠, 짜안-, 정글 속을 누비는 파월 장병들의 전투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군인의 신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전쟁터로 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부산에서 군인들을 가득 싣고 수송선이 떠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았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그땐 배 위에서 부두에 서 있는 가족이나 애인이나 친구들에게 테이프를 쏴대며 손을 흔드는 군인들을 보고 괜히 내 코끝도 찡해졌었는데 막상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었다. 당시 월남에는 십자성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 정도가 파병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처음 월남에 도착한 것은 1966년 봄이었다. 50여명의 파월 기술자 가운데 목수는 여섯 명이었다. 그중 하나로 뽑혔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비록 미군 대대장의 빽으로 뽑혔을 망정 비행기를 타고 월남에 간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김포에서 중화항공(air china) 전세기를 타고 대만에 기착하여 점심을 먹고 난 후 다시 월남을 향해 떠났다. 새로운 세계, 그것도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이 나를 희망에 불타오르게 했다. 도대체 월남이란 어떤 나라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봉급뿐 아니라 뭔가 새로운 길이 뚫릴 것 같아 마냥 꿈에 부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모두 긴장과 함께 기대감들이 잔뜩 서려있었다.
드디어 전세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착륙했다. 눅눅한 열기가 확 느껴졌다. 한국에서 들이마시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였다. 딴 나라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야자수도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한낮이면 비가 한줄기씩 쏟아지는 것도 신기하게만 보였다.
사이공을 거쳐 퀴논에 도착하자 이미 우리보다 앞서 온 사람들이 일을 시작해서 시멘트 블록으로 기초공사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막으로 된 식당도 만들어 놓고 한식으로 식사까지할 수 있게 준비해놓고 있었다.
막사 앞쪽 개울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갈대나 서 있어야 할 개울가에 큼지막한 용설란이나 선인장들이 우거져 있어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 돈푼께나 줘도 들여놓을 수 있을까 말까한 큼지막한 것들이었다. 길이가 사람의 키만 했다. 그러나 선인장에 대한 감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작업을 하면서부터 선인장 가시가 거추장스러워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후 선인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월남의 나이든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빨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어서 마치 무덤 속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 같은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월남의 전통적인 관습으로 산후 칼슘이나 철분이 부족해서 생기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무슨 풀을 씹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물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나 외국인과 상대하는 젊은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희한하게 느껴진 것은 변소가 귀한 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열대성 기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들이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는 것이었다. 쫓기던 꿩이 급하면 머리만 틀어박는 것처럼 월남 여성들도 자기 머리만 돌리면 남들에게도 제 모습이 안 보이기나 하는 것처럼 길섶에서도 고개만 돌린 채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소변을 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아무리 전쟁통이라 할 지라도 그런 여자들은 볼 수 없었다. 그런 여자들을 볼 때마다 왠지 월남사람들이 한국사람들보다는 미개하다는 편견이 내 머리 속에 자리 잡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쟁터여서 두려운 생각에 한국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몰려 다녔는데 한 달쯤 지나자 전쟁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따로 따로 나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혼자서 여기 저기 구경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술집도 가보고 식당에도 가보았지만 막상 가보면 별 신기할 것도 없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그 때 같이 일하던 동료들 가운데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넓디넓은 세계에서 한국에 태어나 월남과 미국, 그것도 뉴욕에까지 건너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미국 생활이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다. 황재훈 뉴욕 봉제협회장도 월남서 알게된 사람이고, 또 플러싱에서 살다가 최근 유명을 달리한 권종태씨도 월남에서 만났다. 권씨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무직으로 일했었는데 아주 재주꾼이었다.
나트랑에 도착하자 한국군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세탁공장 부지를 닦을 때도 한국군 공병대에서 와서 밀어 주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우리를 도와주는 한국군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쟁터이긴 하지만 우리들은 전투 요원이 아니었으니까 전선이 따로 없는 월남이라고는 해도 전쟁으로 희생되는 이들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같이 일하던 군인 한 명이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세탁소 터를 닦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는데 중장비 조수 일을 하던 군인이 불도저 운전을 해보고 싶었던지 휴식 시간을 틈타서 고참 운전병이 앉았던 운전석 위에 올라타고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처음에는 구릉구릉 곧잘 굴러 나갔는데 불도저가 나무를 향하여 똑바로 굴러가더니 방향을 제대로 꺾지 못하고 어, 어, 하는 순간 나무둥치를 그대로 쳐버렸다. 물론 불도저가 나무둥치를 들이받았다고 그 병사가 목숨을 잃을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데 있었다. 불도저로 나무를 들이받자 가지 위에 걸치고 있던 뱀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진 것이었다. 별로 크진 않았는데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그 사병의 어깨 위로 굴러 떨어지면서 목 근처를 물어버렸다. 아무도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씨가 무더워 윗통도 벗어놓고 있었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어깨죽지가 시퍼렇게 변색되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그를 바닥에 눕히고 말을 시켜보았지만 맥이 빠졌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은 있었지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십자성 부대에 급히 연락을 해서 앰뷸런스로 그 사병을 병원으로 실어갔다. 목수 두 명과 불도저를 운전하던 사병이 함께 따라갔지만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불과 반시간만에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월남은 열대지방이라 뱀이 많으니 주의하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옆에서 사람이 뱀에 물려 죽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월남에서의 첫 충격이었다. 그런 일을 목격하자 왠지 순조롭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들어 맞았다. 퀴논에 도착하여 공사를 하고 나트랑을 거쳐 캄란으로 옮겨갔지만 그 사이 서너 달이 지나도록 열심히 일했는데도 월급은 한 푼도 안 나왔다. 자체 세탁공장 건물을 지으려고 시작했는데 돈이 나오질 않았던 모양이었다.
달이 바뀌어도 급여가 나오지 않자 기술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퀴논의 회사 사무실 앞에서 농성도 벌여보았만 별 진전이 없었다. 사장이 있는 사이공으로 몰려가서 거세게 항의도 하고 그래도 안 되자 주월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어떻게 주선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월남에 나와 있던 현대건설과 손을 잡게 되어서 일을 계속하면 밀린 임금까지 현대건설에서 주겠노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오늘날과 같은 거대 재벌이 아니었던 현대는 당시 군대 막사 따위를 짓는 건설공사로 월남에 진출해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김국배라는 여사장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혼자서는 힘이 부치는 것을 깨닫고 현대와 합작으로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태원에 사무실을 두고 미8군 영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의복 수선 등의 사업을 하던 여성이었다. 60년대 중반 경기도 하삼공리 남한산성 인근 미육군 미사일 부대가 들어오자 그 부대의 피엑스 컨세션도 맡아 사업을 키우던 중 월남까지 진출하게 된 모양이었다. 용산과 남한산성에서 짭짤한 재미를 본 경험을 살려 월남까지 진출했지만 세탁공장을 세우고 기계를 돌리기까지는 벅찼던 것이었다. 취업자들에게 급여를 주고 또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의 운영자금이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세탁소 건설을 위해 데려간 목공만 하더라도 나를 포함하여 6명이나 됐고 일반 사무직까지 합하면 수십 명의 직원이 있었으므로제법 큰 액수의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사정이었고 우리들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희망에 들떠서 찾아간 월남에서 수개월 동안 임금도 못 받고 있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술자들은 그 동안 일한 보수를 못 받은 터에 또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선지 쉽사리 회사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회사측은 사이공에서 기다렸다가 일을 하든지 그게싫다면 귀국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돌아갈 경우 월남에서는 급여를 줄 수 없고 서울에 있는 현대건설에 가서 청산해 주겠노라고 했다.
결국 절반 정도가 월남에 남았고 나는 귀국을 택했다. 돈도 못받고 일할 바에야 한국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포에 도착하자 회사에서 나와 여권을 모두 회수해 버렸다. 기분이 씁쓸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전선도 없는 이상한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 월남까지 갔는데 몇 달만에 실패 아닌 실패로 1차 파월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여기서 ‘1차’라고 굳이 덧붙인 것은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월남 땅을 밟았기 때문이다.
몸은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음까지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첫 번째 월남행이 실패로 끝났지만 내게는 또 다른 큰 수확이 있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전쟁터라는 게 으레 그렇듯 어딘가 돈벌이를 할만한 구석이 있을 것만 같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교동에 있던 현대 본사에 가서 타낸 밀린 급여도 한 달쯤 지나니까 어디론가 다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몇푼 안되는 돈은 금방 바닥났다. 그렇다고 마땅하게 할 만한 일도 없었다. 자연 살림살이도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지내는 생활 자체가 갈수록 답답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다
월남서 돌아온 지도 어느 새 반년이 휘딱 지나갔다. 거리는 제6대 대통령 선거전이 무르익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게 없이 모두 들떠 있었다. 내 마음도 거리처럼 잔뜩 바람이 들어 몸뚱이만 서울에 있었지 마음은 더위에 늘어져 있는 야자수 그늘에 가 있었다.
어느 날 머리도 식힐 겸 남산에 올라갔다. 그 때만 해도 하릴없는 사람들이 많아선 지, 아니면 워낙 정치열이 높은 국민이라 그런지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사람들로 빽빽했다. 대통령 선거 유세를 들으러 가는 인파였다.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박정희 후보를 표독스럽게 공격하는 윤보선 후보의 유세를 듣고 있었다.그러나 나는 마음이 땅에 닿아 있지 않아선 지 연설 내용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카랑카랑한 박대통령의 연설도 귀에 들어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얘기로만 들렸다. 하기는 유세를 들으러 왔다기 보다는 산 위에 올라가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뚫릴는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인파는 이른 바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았는데 나만 냉랭했다.
산밑을 멀리 건너다보며 한눈을 팔고 있으려니 산 밑 필동에 있는 허연 수도 경비사령부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박 중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래 박중사를 만나보자. 지난번 양키물건 장사 때도 신세졌지만 한 번만 더 신세를 지자꾸나. 박중사라면 나를 월남으로 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박중사는 당시 수경사 20중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수경사가 제법 힘을 쓸 때라 별 볼 일 없는 나 같은 서민에게는 유일한 ‘빽’이기도 했다. 가기만 하면 한 다발 돈을 거머쥘 것만 같은데 월남까지 갈 방법이 없어 안절부절못하던 참에 대통령 선거가 길을 뚫어줄 줄은 몰랐다. 남산에 잘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는 줄 테니까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원망 안 할 거지?”
박중사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내 다짐부터 받았다.
“보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박 중사가 무슨 하나님이냐. 그 나라 가서 일하는 것까지 책임지게?”
“일이 문제가 아니라 전쟁중인 나라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어. 괜히 보내주고 나서 삐끗하면 가족들한테 원망 들을까봐 그러지.”
“내가 언제 그런 거 저런 거 겁내는 거 봤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네, 원. 가게만 해 줘.”
“정말 한번 해볼 테야? 비행기를 타는 것까지는 방법이 있어.”
나는 박 중사의 도움을 받아 제2차 월남행을 결심했다. 어떤 방법이든지 가릴 것이 없었다. 그때까지의 나의 삶이란 게 방법을 골라잡을 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것이기도 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몸이 부숴지더라도 일을 만들어야할 판이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항상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방법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여권을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려울 때라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박중사는 부재자 투표용지를 월남까지 수송하게 되는데 슬쩍 태워주겠다고 했다. 정식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몰래 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게 떠나버리고 나면 월남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혀버릴 것 같았다.
“그래, 태워만 줘. 그 다음은 둔갑술을 쓰든지, 하여간 부딪쳐 보자고. 막말로 안 되면 돌아오지, 뭐.”
박중사도 나처럼 성미가 불같이 급했다. 내 결심을 확인한지 사흘만에 다방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벌써 군복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내일 새벽에 비행기가 뜨는데 오늘밤은 공항 근처 허름한 여관에서 자는 게 좋겠어. 늦지 않을래면 말이야. 어떤 놈들처럼 팔자가 좋아서 여객기 타고 할랑하게 여행가는 것도 아니고 이번 비행기 놓치면 다음 편이 또 있는 게 아니잖아.”
요즘처럼 김포공항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도 없게 자동차가 막히는 것은 아니지만 꼭두새벽에 나오느니 오히려 그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어딜 가든 복잡하게 짐 뭉치를 꾸려 가지고 다니는 성미도 아니었다. 물론 짐을 챙길 겨를도 없었지만 나는 치약과 칫솔만 가지고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김포공항 근처의 여관에서 밤을 샜다. 잠이 올리 없었다.
게다가 옆방에선 여인네 끙끙 앓는 소리도 들려오고, 취객들이 복도에서 떠들어대는 소리 때문에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공연히 가슴이 뛰고 전기 불빛이 눈동자를 찔렀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벼라별 생각이 다들었다.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을는지, 또 월남에선 자리를 잡을 수 있을는지, 흡사 덮고 있는 이불이 걱정의 이불처럼 느껴졌다.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계급장 없는 군복차림으로 여관을 나선 나는 공항을 향해 걸어갔다. 새벽녘이라 그런지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으슬으슬 추웠다.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근히 긴장이 됐다. 공항 정문 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돌아 부천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지금은 주택이 꽉 들어차서 어디가 어딘지도 분간하기 어렵지만 그 때만 해도 활주로 바깥은 논밭이었다.
철조망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비상시에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을 거라는 박중사 말을 되새기며 밭둑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걸으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새벽부터 공항 울타리를 따라 걷는 나의 모습을 보고 혹시 누군가가 수상한 사람으로 몰아 신고를 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근히 불안했다.
한 1킬로미터쯤 걸어가자 철조망으로 된 문이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폭이었다. 박중사는 그 문앞에 서 있으면 사람이 데리러 온다고 일러주었었다. 그 앞에 서 있을 때 왠지 다리가 떨려오는 것 같았다.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또 경비원에게 들켜 끌려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풀밭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바짝 귀를 세웠다. 잠시 후였다. 비행장을 경비하는 순찰차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가 접근할 때까지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혹시 그 차가 약속된 차가 아닐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프차가 대여섯 발자국 앞 철조망 너머에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군인 한 명이 내려와서 문쪽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그 사람이오?”
“네! 맞습니다.”
그 사람이냐고 묻는 그 군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랬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군인은 철조망으로 다가와서 샛문에 매달려 있는 쇠불알만한 자물쇠를 철커덩 열어주었다. 이제 막 동이 터 오는 새벽이었다. 아직도 공항 주위에는 불빛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고 활주로 한쪽 끝에 군용 쌍발기 c-46 두 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어깨를 폈다. 박중사의 부탁을 받아 나를 데리러 왔다면 내가 꿇릴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쨋든 박중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흡사 상부로 부터 명령을 받고 비행기에 오르는 군인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떳떳이 트랩을 올랐다.
내가 탄 비행기 안에는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다른 다섯 사람을 포함하여 여덟명이 타고 있었다. 아마 기장이나 부기장 등 한두 명은 내가 비공식으로 탑승한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나머지 승무원들은 박중사의 빽으로 철조망을 통해 비행기에 올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특수임무를 띤 군속이나 아니면 어느 신문사의 특파원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자 되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사히 월남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내 한쪽 편에 박중사 말대로 부재자 투표용지가 담긴 것 같은 우편 행낭 자루가 여러개 실려 있었다. 김포를 떠난 뒤 두어 시간 지나자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코를 낮추고 내려앉은 곳은 오끼나와에 있는 미공군 기지였다. 급유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정비를 하는지 꽤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한 일분이 아쉬운 심정이었지만 같이 탔던 군인들은 노닥거리면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다시 이륙하더니 너댓 시간이 지나 이번엔 마닐라에 도착했다. 역시 미공군 기지였는데 하루 저녁을 쉬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한다고 기장이 말했다. 하루 거리도 되지 않건만 군인들이어서 그런지 쉬엄쉬엄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도 혹시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기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지만 출입이 허용되었어도 마닐라 구경을 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불안의 연속이었고, 하루빨리 월남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월남에 가면 누가 날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이제나저제나 월남에 발을 디딜 때만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우리 일행은 활주로 끝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대의 수송기에 나눠 탑승했다.
“이제 월남으로 가는 겁니까?”
주머니에 남은 돈이라곤 10달러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또 기착을 한다면 소다 한병이라도 사먹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랄 것 같았다. 또 아까운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럼요.”
내 좌석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월남 땅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앞서 출발한 비행기가 하늘로 솟아오르자 내가 탄 c-46기도 털털거리며 활주로를 구르기 시작했다. 뒤뚱거리던 기체가 부웅-, 땅을 박차고 떠올랐다. 짙은 안개처럼 보이는 구름들이 창 밖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휙휙 지나갔다.
기체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탑승자들이 기내에서 곤두박질을 쳤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흡사 차가 전복되는 것처럼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이마가 까지는 정도로 그칠 사고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어이쿠!” “억!” 하는 비명들이 들려왔다.
여기 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제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부기장이 객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엔진이 고장났다며 다시 마닐라 공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항에 다시 돌아오자 모두들 다들 목숨을 건진 게 천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늘은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시 미군 기지에서 하룻밤을 더 묶게되면 서로들 말문이 터져 이것 저것 물어보게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신분이 탈로날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 고장 수리가 안되어서 다른 비행기로 인계를 한다면 월남을 코앞에 두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군인이었으므로 급할 것도 없고 기착한 곳이 미공군 기지였기 때문에 시설도 좋고 식사도 푸짐해서 휴양이라도 온 것 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기지내 극장을 찾아 공짜 영화를 관람하며 불안감을 지우려 했었으나 허사였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마나 초조했던지 공연히 다리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그 다음날에도 수리되지 않았다. 불안을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이틀을 더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이틀씩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사고 비행기를 수리중이란 뜻도 된다 싶어서 다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여기까지 타고 온 비행기를 그대로 타게 된다면 인원파악을 새로 할 까닭이 없었다. 그만큼 내신분이 탄로날 확률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활주로 끝에 서 있던 c-46기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
딱 만 이틀이 지난 아침 나절, 같은 비행기를 탔던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결국은 기체 수리를 못하고 서울에서 다른 비행기를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나도 부지런히 짐을 챙겨들고 군인들을 따라 나섰다. 과연 활주로에는 서울서 새로 보내왔다는 엔진이 네 개나 달린 커다란 비행기가 서 있었다. 다소 불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탑승자들이 종전 두 대의 비행기에 탑승했던 일행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나는 일행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다들 자리에 앉아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는 것을 보고는 그 와중에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질겁한다더니 한 번 사고가 나자 비행기 타는 것이 겁나는 모양이었다.
두 대에 나눠탔었던 탑승자들이 한비행기를 타게되자 여기저기서 수인사들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예상외로 컸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리에 앉고도 남은 자리가 많을 정도로 널직했다. 엔진고장이 난 c-46기와는 딴판이었다. 우선 고급스러웠다. 겉에서 볼 땐 군용기가 틀림없었는데 좌석이 푹신푹신하고 내장도 잘 돼 있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인원점검을 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드디어 아무런 사고 없이 월남으로 갈 수 있게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비행기가 이내 하늘 높이 떠올라 안정된 고도를 유지한 듯 흔들림이 없어졌다. 한숨을 돌리고 나자 주위에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쪽 조종석 뒤 천장에 붙여놓은 글씨가 나의 시선을 휘어잡은 것은 그 때였다. - 대통령 전용기.
대통령만 탄다는 비행기였다. 이 강신목이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다니! 꿈 같은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얼얼해지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전용기가 틀림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사람들도 대통령 전용기는 처음 타보는 모양이었다. 부재자 투표용지를 싣고간다더니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전용기까지 동원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부재자 투표 개표 결과 90% 이상이 박정희 후보표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대통령 전용기까지 동원하여 만든 표인데 오죽하겠는가”라고 중얼거렸었다.
화장실로 숨어든 월남
땅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 구름을 뚫고 오른 비행기가 고도를 잡은 듯 안정되고 날아가고 있는지 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전벨트 표지등도 꺼지고 금연 표지등도 꺼지자 조종석에서 기장으로 보이는 나왔다. 객석 쪽을 점검하려는 듯 중앙 통로를 걸어나왔다.
그런데 그가 내 앞에서 멈춰섰다. 내 얼굴을 보자 뭔가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낸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혀를 차는 시늉을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수경사에서 태운 사람이요?”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머뭇거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평소 남들보다 크게 말하는 습성이 붙어 있어서 상대가 소리를 낮추는 것을 보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음성을 낮춘 것인데도 기장의 음성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감색 공군 정복차림인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언뜻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지금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중에 서울시 경찰국장을 거쳐 부산시장과 내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종종걸음으로 조종석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왠지 꺼림칙했다. 잠시 후 기장이 중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중위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 사람은 사이공에 가면 안 되거든. 에이, 참. 진작 알았어야
되는데....”
두 사람은 뭔가 나지막한 소리로 의논을 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 어디다 내려드리면 좋겠소?”
“캄란이면 좋겠는데요?”
기장이 말을 받았다.
“캄란은 안 되고....거긴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니까.”
“그렇다면, 글쎄요....퀴논이나 나트랑 아무 데나 좋습니다.”
기장은 다시 중위에게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듯 자기네끼리 중얼거렸다.
“나트랑에 내려주면 되겠군.”
나는 저으기 실망했다. 캄란에는 ‘비넬’이니 ‘rmk’, ‘알래스카 바지’, ‘필코’, ‘p&a’등, 내가 취직을 할 만한 회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트랑에는 한국인을 채용하는 회사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짜로 비행기를 타고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판국에 행선지에 정확하게 내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나트랑과 캄란이 1백여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급하면 걸어서라도 갈 수 있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통에 몇백리 길도 걸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 까짓 1백여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트랑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급유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연료공급을 받기 위해 기착한다고 핑계를 댔던 모양이었다. 급유를 하는 동안 중위가 좌석 중간으로 오더니 소리쳤다.
“자, 화장실에 갈 사람 즉시 나온다! 시간은 십분이다!”
그러자 좌석이 어수선해지며 여기 저기서 군인들이 통로로 나
섰다. 그 때 아까 기장이 데리고 왔던 중위가 내게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갔다가 거기서 돌아오지 말고 적당히 새쇼.”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선 사람은 전체 탑승자의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열 댓명의 군인들 속에 묻혀 나는 나트랑 공항의 작은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손을 씻고는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걸터 앉았다. 변이 나올리도 없었지만 그런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도 변기에 걸터앉아 같이 간 군인들이 볼일을 보고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대통령 전용기는 급유를 마치는 대로 사이공을 향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하나....”
나는 화장실 속에 혼자 앉아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 것인지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깥 형편도 모르는 처지에 궁리를 한다고 해서 묘안이 떠오를리 없었다. 시끌벅적하던 군인들이 하나 둘씩 화장실을 나가고 조용해지자 나는 변기 위에 올라섰다. 화장실 중앙 벽 사이에 1미터쯤은 족히 될 만큼 공간이 있었고 그 벽 너머에서 월남어로 지껄이는 소리와 함께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기에 올라서서 벽 너머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 쪽도 이 쪽편과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 화장실이었다. 나는 잠자코 숨을 죽이며 기회를 기다렸다. 저쪽 변소에 있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벽에 턱걸이를 해서 기어올라 고양이처럼 사뿐 타 넘었다. 그리고 다시 변기 위에 걸터 앉았다.
월남인들이 서너 명 들어왔다가 볼 일을 보고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나는 태연히 문을 열고 나가서 그들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 쪽은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의 승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었으므로 나는 이미 월남에 무사히 입국을 한 셈이었다. 이민국 대신 화장실 벽을 넘어온 것이었다.
사실 나트랑은 국제공항이 아니라 군용 비행장이었고 또 미국의 경우처럼 월남에 밀입국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붙들릴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어떤 경찰이 내 어깨를 낚아채며 “당신, 어디서 왔는데 어딜 가는 거요? 증명서 좀 봅시다.” 하고 붙잡을 것만 같았다. 등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꼭 삼팔선을 넘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월남은 당시 민간 여객기가 없었다. 민간인들도 군용기를 얻어 타고 여행을 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물론 폭탄이나 무기를 감추고 있을까봐서 몸수색을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 한국 노무자들에겐 특별대우를 해줬다. 몸수색도 한결 수월했고 기술자라며 월남 안에서 출장 다닐 때 군용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나는 공항을 나가자 아무데나 쓰러져 잠부터 자기로 했다. 월남에선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외국인이라 할 지라도 길거리에서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야자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렸지만 끈적지근한 땀이 배어나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어떻게 캄란까지 갈 것인가 하는 궁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여권도 없었으므로 비행기를 얻어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버스가 캄란으로 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또 주머니속에는 먹고 싶은 것 못 사먹고, 마시고 싶은 소다도 안사먹고 아끼고 아낀 10불이 달랑 들어있을 따름이었다. 그 돈을 차비로 쓸 수는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자는둥 마는 둥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자 빈 속이 자꾸만 꼬르륵거렸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으니 뱃속에서 야단이 난 것은 당연했다.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시 월남에는 ‘유 에스 오’(uso)라는 기관이 있어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을 싣고 돌아다니며 무료로 나눠주었다. 미군 장교부인회가 운영하는 봉사기관이었다. 그들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손을 내밀면 커피와 도넛을 나눠주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나이는 들었지만 무척 정숙해보이는 백인 여자가 커피와 도넛을 주었다.
허겁지겁 도넛을 씹으며 커피를 들이마셨다. 그런데 커피가 너무 뜨거웠다. 입천정을 데인 것 같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뱃속에 뭔가 들어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 먹고 머뭇거리자 그 여자가 하나 더 먹겠느냐고 물었다. 마다할 리 없었다. 또 하나를 더 받아든 나는 선자리에서 도넛을 꿀꺽 삼키듯 먹어치웠다.
배를 채우자 또 다른 걱정들이 몰려왔다. 캄란에 가는 여비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트랑 부두에 나가 하역부로 취직을 하려고 기웃거려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풀이 죽은 나는 지나가는 한국군 트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들을 붙잡고 수소문한 결과 캄란에는 보급부대가 있어서 새벽에 길에 나가서 기다리면 보급물자를 수령하러 그곳으로 가는 한국군 트럭들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은 한국 사람이 손을 흔드는데 그냥 지나가는 한국군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가에 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소위 히치 하이킹을 하겠다고 서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미군 트럭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간혹 차를 세우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어딜 가느냐고 물어본 후 캄란이라고 말하자 방향이 틀린다며 훌쩍 떠나버리기 일쑤였다.
또 설 듯 말 듯 브레이크를 밟아 열심히 뜀박질로 쫓아가면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대로 내빼는 차들도 많았다. 역시 동족은 동족이었다. 그리고 이역만리의 동족은 형제나 다름 없이 느껴졌다. 한참 후에 내 앞에 멈춰준 것은 한국군이 운전하는 트럭이었다.
“캄란까지 가는데 좀 태워줄 수 있어요?”
“기술자로 오신 모양이지요? 타세요. 마침 캄란까지 가는 길이니까.”
건강해보이는 젊은 운전병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잽싸게 올라탔다.
“출장 가는 길이면 비행길 타지 그러셨어요?”
운전석 옆에 타고 있던 병장이 물었다.
“네...좀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요즈음 캄란은 사정이 어떻습니까?”
“소강상태지요, 뭐. 어느 회사에 다니세요?”
나는 그 병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기장이나 서울 거리에서 보던 경찰들의 표정과는 달라보였다.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막 도착해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병장과 운전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재차 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여권도 없이 비행기를 얻어타고 왔단 말입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내 얼굴을 번갈아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내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다. 비행기를 타게된 경위와 오는 동안의 일들을 무용담처럼 길게 늘어놓으면서 캄란으로 향했다.
포장은 안 되었지만 자동차들이 다녀서 빤질빤질해진 진흙길을 한국군 보급차량들은 줄을 지어 캄란을 향해 달렸다. 길옆에는 어른 키의 두세 배나 되는 고무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등치의 군데군데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고 거기다 씨 레이션을 먹고 난 깡통을 달아놓아 흘러나오는 고무 액을 받고 있었다. 새삼 내가 월남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깡통을 매달고 서 있는 고무나무 숲을 건너다보면서 나는 “뭐든지 생산이 되자면 고무나무처럼 생채기의 아픔을 견디어 내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며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계속>
** 강목수의 미국 이민수기 더 보기 / 브레이크뉴스 미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