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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기독교의 부일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구한 말과 일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초기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단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따라서 그 교단에 속해 있던 한국인 신자들의 행동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교단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들의 평가는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는 우호적이다. 근대적인 학문을 들여왔으며 그러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고, 병원도 만들었으며 서양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맞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분명 그 당시 한국에게는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리고 배워야만 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한 번 뒤집어서 다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구한 말과 일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 보면 아쉽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많은 미국인 선교사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는 미국의 외교 정책과 선교 정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친선교사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수습하는 단계였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대군주 폐하 탄신일 경축회 등의 민족적 행사등 정치적인 사안 등은 자발적으로 거행하였다기보다는 포교를 우선시한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거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행한 업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근대화 운동이다. 하지만 그들의 근대화 운동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선교 수단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등의 행동을 그들이 한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세웠다기 보다는 대체로 자민족 우월주의에 빠진 가난한 동양의 한 나라를 자기들에게 교화시키려는 차원의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를 들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배포하여 민족 언어인 한글을 보급하고 그로 인해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모든 선교 지역에 해당된다. 기독교는 항상 선교 지역에서 맨 처음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 기독교가 세계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민족들의 민족 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각 민족의 민족 의식 형성에 기여했다기보다는 복음을 폭넓고 확실히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학교의 운영에서도 그들의 행동은 민족 교육에서 멀어진다. 사실 각 선교회는 기독교계 학교에 무엇보다도 종교적 교화의 기능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입신 출세와 학문 습득을 위해 영어를 포함한 일반 교과의 교육을 기대하였다. 즉 학생들이 일차적으로 희망하였던 것은 기독교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 또는 국가와 결부된 근대적 학문이고 근대 교육이며 근대 문명이었다. 하지만 교회 측에서는 영어를 정규 과목에서 빼는 것을 골자로 한 개편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고, 이에 배재학당은 교사진의 대부분이 미국인 선교사이고 학생들에게 고등 지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예비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교재와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교육 제도 및 사회 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근대 학교에 어울리는 고등 교육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기독교계 학교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창출해내는 기능을 일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친미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의 반일적 측면을 곧바로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학 이전의 친명배청론이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육의 반일·친미적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반 봉건이라는 측면에서만 살피고 기독교 활동을 전반적으로 민족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기독교의 반 봉건, 즉 근대화 운동에 의해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상실되었고, 나아가 서구 문화에 대한 종속성을 조장해 주었다는 이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보다는 단지 그들의 선교가 우선이었다. 즉 일제의 정교 분리 원칙을 그들은 철저히 따르는 자세를 가지는 데, 그리하여 장로교 선교 위원회 총무인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당시 선교사들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일본의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둘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오로의 교훈인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저 복종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 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그리고 피셔(J.E.Fisher)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인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신에 대한 죄가 된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 정책이란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 정책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을 비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가 부분적으로 종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교 분리 정책이 확립되면서부터는 전반적으로 민족 구원의 신앙 형태보다는 비정치적 개인 구원의 신앙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따라서 근대 기독교의 정교 분리 정책은 결과적으로 기독교로 하여금 민족 의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어 내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부터는 이러한 사상을 가졌던 기독교가 일제 말기 어떻게 부일 행동을 하는가를 살펴 보겠다.
처음 기독교인들이 신사 참배를 처음 거부하였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민족적인 저항의 형태의 논리가 아니라 단지 십계명에 위배되는 우상 숭배죄에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 신사 참배를 하였던 것을 정교 분리의 형태의 종교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친일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행했던 행동들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첫째로 신사 참배를 국민의 의례라고 강요하고, "신사 참배를 이교라고 거부하는 것은 불경 죄에 가깝다." 고 주장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계속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의 목적인 종교적인 변절보다는 친일화로의 유도에 더 주력하여 아시아 대륙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마련하고 그 거점으로 신사 참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신인 태양의 여신과 일본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들인 전열장병에 참배하는 것인 바, 일본인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 행위, 국가 의식이라기보다는 보양을 하는 즐거운 행각이었다. 따라서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주 사변은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본 정부 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게 하였고, 아시아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 이어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키므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충성과 헌신이 긴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인을 보다 더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한 가지 수단으로써 일본은 모든 한국인들이 신사에 참배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신사 참배 정책의 목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국민 정신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 의례로서의 신사 참배가 천황 중심의 침략 전쟁을 위한 사상 통합이었고, 이것을 군국주의자들이 주체가 되어 소위 대일본제국이라는 것을 건설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 파시스트의 정신적 상징인 신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세워진 것은 1925년 10월 남산에 건립된 조선 신궁이다. 일본은 1919년 제국 의회에서 조선 신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한 후, 이 신사를 약 4년의 기간과 157만원의 돈을 들여 완공하였다. 그 후 조선 신궁은 총독의 공적 신사로써, 또는 국가 행위에 사용하는 목적을 가졌기에 천황에 대한 충성의 장소가 되었다.
그 후 1933년까지 신사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1935년 11월 평안남도 지사(知事) 안무직부(安武直夫)가 기독교 학교들에게 신사 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기독교는 대체적으로는 거부하였다. 이 때 정면으로 거부한 평안 숭실 전문 학교 교장인 맥퀸은 1936년 1월 20일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숭의 여학교 교장인 스누크 여사는 추방되었다.
이러한 강열한 저항에 부딪친 일제는 1936년 1월 29일 윤치호와 양주삼이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 갔을 때 국장인 도변(渡邊)은 "신도 의식은 종교 의식이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이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라는 설명을 통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해시켜 주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신사 참배가 계속해서 교인들 사이에 문제화 될 때, 감리교 통리사(通理使) 양주삼은 감리교보 제 39호에서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으로부터 통보받은 내용을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1. 신사의 봉사(奉祀)는 종교가 아니다.(신사와 종교의 주관부서가 다르다. 종교는 문부 대신이 관장하고 신사는 내무 대신이 관장한다.)
2. 각 개인의 신교는 자유다.(신사 참배는 신앙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인 바, 양통리(梁通理)는 신사 참배가 신앙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示唆)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37년 그 해 10월 모든 학교와 기관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신사참배와 <황국 신민 서사>를 호창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신도 의식에 참가시키기 위한 일제의 강요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고도의 제국주의적 정책인 신사 참배가 강요되자 기독교 내에서는 신사 참배에 대한 의견의 분열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신사 참배가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써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 또 설사 종교적 행위라 할 지라도 굳이 교회를 폐쇄시키면서까지 참배에 거부할 까닭이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사 참배가 애국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제의 회유 때문에 한층 더 깊어 갔다. 선교사들의 태도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는 바,
ㄱ.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표명
ㄴ. 미국 북장로교회 선부 소속 선교사들은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
ㄷ.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 결의는 당연한 것이다." 라는 표명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그리스도교와 시국>이라는 글에서는,
"조선의 기독교도는 황국의 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황국의 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국의 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 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신사 참배를 지지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총리사가 <신사 문제에 대한 통첩>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공문으로 신사 참배를 묵인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은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 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는 국가 의식이라 하여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가장 강하게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 참배 수용을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 기독교 친목회> 지도 인물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 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를 초청하여 평양 시내에 있는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 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를 통하여 신사 참배 결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또한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들을 사전에 검속(檢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 외교회에서 열렸다. 회무중(會務中)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 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 참배는 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결의를 하였다.
"우리는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하고 추이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통후(統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成)을 다하기로 기함."
결국 한 번 굴복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져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 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 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들이 신사 참배를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 참배 결정과 행동에 대해 강한 반발이 일어났는 바, 장로교 총회장 크로더스 목사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헌법에 위배된다." 는 항의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7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검거한 수가 2,000여명이나 되었고, 50여명이 죽어버리고 나머지는 해방 후 풀려났다.
감리교에서는 목사직을 파면, 면직, 정직, 강제로 사임케 된 목사들이 50여명 있었다.
이러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강하게 나타나자 「청년」지 주필인 강백남은 <조상 숭배는 우상 숭배가 아님> 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근래에 국가 의식 즉, 신사 참배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에 막대한 동요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 이라고 전제한 후,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배함이 당연할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 애지심국(愛之心國)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그런 즉 신사 참배하는 일을 우상 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 죄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라고 신사 참배를 지지하였다.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 총회에서의 신사 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 대표), 김기찬·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함으로 신사 참배 논쟁은 일단락되고 이후부터의 기독교는 집회나 행사 때마다 신사 참배를 국가 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고로 교회의 최고 상회 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 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 참배를 하므로 한국의 기독교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 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일제의 개가 되는 모순을 낳았다.
이후, 새로운 단계의 신사 참배의 형태로 변하는 바,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 참배자의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 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 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郞)는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 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 동조 동근론>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 천황, 제명 천황, 천지 천황, 신공 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
이 신궁 건설에 기독교를 동원케 하는 일제의 의도는 노력 동원으로 작업의 큰 진전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을 노렸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 노회총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 이름으로 부여 신궁 근로 봉사 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 대표 앞으로 보냈고 동년 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 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 봉사 대원은 경성노회 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회 73명이었다.
감리교 또한 1941년 10월 9일 경기 교단을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노동 봉사 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 연맹 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단과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 교단 외 다른 교단의 목사, 신도 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 봉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노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 기독교 제 1회 총회에 참석하여 윤세 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 참배를 떠나므로 기독교의 신사 참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상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정리를 해 보면,
1. 신사 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회유되고 매수되었던 기독교의 의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2. 신사 참배는 신앙의 양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행위가 곧 일제에 투항, 친일을 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이유는 신사 참배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후 갖가지 친일 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식된다.
3. 흔히 신사 참배 거부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항거라고 하지만 일제의 계속적인 회유로 인하여 부일의 밑거름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지배국의 식민지 민족에 대한 사상적 세뇌는 토착민의 민족적, 문화적 독자성을 멸시 내지 말살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 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통치 정책을 소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한 전쟁 정책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일을 위해 철저한 사상 통합을 진행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사상 통합의 정책을 조직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제 7대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였다. 그는 1936년 8월 조선의 총독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었고 일본 정부 내 군국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는 바, 1938년 2월 22일 도지사 회의 중 말한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완전한 황국 신민화에 의한 내선일체를 한반도 지배의 근본으로 하고 그것에 의하여 한반도를 대륙 병점 기지화하여 아시아 침략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에 그는 더욱 황민화의 실질적 집행을 위하여 광분하였다. 미나미(南次郞) 일명 <조선 통치 5대 지침>의 정강을 발표하였는 바, 이 지침은 국체명징, 내선일여, 교거진작(敎擧振作),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별신(庶政刷新) 등으로 일제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실천 방법으로 신사 참배, 궁성요배(宮城遙拜), 국가 국기의 존중, 일본어의 보급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8년 7월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을 조직하여 황국 정신의 현양(顯陽),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 생활 혁신, 전시 경제 정책에 협력, 근로 보국, 생업 보국, 군인 원호 강화 등을 부르짖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조직 강요에 1939년 9월 8일 장로교는 신의주 제 2 교회에서 국민 정신 총동원 장로회 연맹 결성식(궁성요배, 국가 봉창, 황국 신민 서사, 황군 장병 및 동양 평화를 위한 기복)을 갖고 선서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정부는 종교를 대함에 있어서 정책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ㄱ. 종교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종교로 하여금 기존하는 정부의 기본적 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킨다.
ㄴ. 종교를 통해 그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게 하려는 기능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한다. 일제는 이러한 종교 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활천」(성결교 신앙지) 지는 1939년 12월 <팔굉일우의 대원리>이란 사설에서 "팔굉일우의 대이상은 대일본제국의 건설 정신이요, 이상이다." 라고 정의한 후, 청일 전쟁, 러일 전쟁과 만주 사변을 이 사상을 사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미나미 조선 총독이 강조하는 내선일체도 바로 이 정신을 고조하는 것으로서 이 정신이 황도 정신이요, 동시에 성경 정신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1940년 2월 호 <황기(皇紀)이천육백 기념식년에 당하여>란 사설에서는 "우리는 황기이천육백년을 당하여 황조 황가의 성덕을 흠향(歆饗)하며 천황 폐하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봉축하는 동시에 더욱 조국 정신을 발양하며 황운부익(皇運扶翼)의 실을 거함으로써 국운 무한의 발전에 진할 것을 맹서하자!" 고 하였다.
「청년」(감리교 계통의 신앙지) 지는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사견>이란 글을 실었다. 이 내용은 "현재의 내선일체는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가히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신적인 내선일체는 아직 미흡한 바, 황국 신민 서사의 2조 '우리들은 합심하여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친다.' 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며 또 하나는 천황 폐하의 적자가 된 형제 의식을 갖고 서로 믿는 일이 필요하다." 라고 강조하였다.
「그리스도 신보」(장로교 신앙지) 지는 1937년 10월 12일 <기독교인의 국가 봉사>라는 사설에서 "기독교인은 여력이 다하도록 황실을 봉재하며 10,000분의 1이라도 황은에 봉답하며 국운을 유성하게 함이 의무이다." 라며 황운(皇運)을 부익(附益)하자고 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각 기독교 교파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들을 강제 폐간시키고 일제의 정책을 전시하 지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로서 <기독교 신문>을 창간케 하였다. 동년 4월 18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회의실에서 기독교 신문 협의회 창간 제 1회 이사회가 열렸다. 창간 이사회는 총독부 경무국 이사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동과 검열계 주임이 참석한 가운데 장로교에서 3명,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구세군(救世軍)에서 1명 등이 참가하여 1942년 4월 29일 창간호를 냈다. 창간된 신문의 강령에서 발행 취지와 목적을 열거하고 있는 바, 황민화적 내용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들은,
1. 한반도 내 기독교의 국민 총력 운동의 강화
2. 종교의 국민 정신 진흥과 국민 사상 계도
3. 필승 체제의 확립에 관한 계도
4. 내선일체 완성과 일본어 생활의 철저
등이다.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서도 황국 신민화적 내용이 포함되어 가는 이질적 현상이 나타난다.
예배에서는 황실 융성을 위한 기복, 전승 기원 예배 등으로 이질적 내용으로, 행사에서는 주로 궁성요배, 황국 신민 서사 제창, 천황 폐하 만세, 그리고 시국 강연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예배와 회의도 단축 또는 간소화 형태로 진행되었는 바, 제 36회 전북로회에서는 성탄절은 대정천황제일이므로 24일로 변경하여 간소한 축하 예배만 드릴 것이며, 매주 3번의 집회는 단축하여 당분간 1회만 할 것을 소속 교회들에게 제시하였다. 감리교회는 '교단 규칙 제 108조와 114조에 의한 상임 위원회는 총회를 대신하고 구성 임원회는 교단 회의로 하고, 금년 2월 개최하려던 정기 교단회 및 금년 4월에 개최할 정기 총회는 무기한 연기한다.' 고 발표하였고 예배 시간 단축 실시에 관한 이유를 "1시간이라도 더 노동 시간을 늘여 생산에 매진하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방법론으로 주일 밤에 모이는 예배를 1회로 단축하고 기타 예배는 그 교회의 사정에 따라하고 당국의 요청에 따라 시간을 변경하는 조치를 교회주관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1907년 6월 20일에 발행된 「찬미가」는 15곡이 수록된 기독교의 성가였다. 이 성가 중에는 애국 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일제의 생각에 의해 3장의 성가가 있었는데, 1장 4절, 10장 2절, 그리고 14장이었다.
그 후, 1923년에 간행된 「청년 찬송」은 일하러 가세(남궁억), 금주가(임배세) 등이 실려 있었다. 1931년에는 각 교단이 성가 합동 문제를 논의한 결과 장로교, 감리교 두 교단에서 주관하여 「신정 성가」를 만들기로 하고 편집, 발행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교단에서는 기존의 성가를 보완하여 사용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 황민화 현상이 시급해진 일제는 성가를 변형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먼저 '일하러 가세' 와 '금주가' 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신정 성가도 삭제와 가사를 바꾸게 하였다.
1943년 5월에 조선야소교장노회(朝鮮耶蘇敎長老會) 종교 교육부 주관으로 기존의 기독교 성가를 전체적으로 개편하였는 바, 새로 개편하는 이유와 목적을 "복음이 전파된 지 반 세기를 넘어 서면서 대동아 공영권의 획기적 역사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될 때, 본 성가에 대하여도 국체를 중심으로 한 재 검토의 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하기에 당국의 지도 하에 거의 반 년의 세월을 들여 본 성가에 있어도 재삼 검토를 하여 국체에 일치하도록 가사를 수정함은 물론, 특히 권두에 국가(國歌)와 유미유까바, 국경절(國慶節)에 부르는 노래, 국민 서사 등을 실어 특수한 집회 시마다 국민으로서의 필요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라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상식적으로 그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워졌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감리교의 황국 신민화를 위한 지도 노선은 「기독교 조선 감리회 혁신 조항」에 잘 나타난다.
제 1. 사상 지도
①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② 기독교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에서 구현됨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③ 충군애국 정신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제 2. 교학 진작
① 일본어 보급
제 3. 사회 교육
② 황도의양(黃道宜揚)
통리자(通理者) 정춘주가 각 교회 주관자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도,
1. 매월 8일 대동아 전쟁에 관한 봉재식을 거행할 것
2. 예배 시간을 노동 봉공에 지장을 주지 말 것
3. 애국 봉헌금 및 기타 국민의 의무 수행에 성의를 다할 것
등으로 교단 차원의 일로 협조를 요구했다.
장로교의 지도 노선도 「일본 기독교 조선장 노교단 실천 요목」에서 잘 나타나는 바,
제 1. 국가에 봉공
①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달(完達)을 위하여 사상 완벽을 기할 것
② 전시 체제 하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③ 징병 의무 및 정신을 강조할 것
④ 통후봉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실시할 것
ㄱ) 황군 상병 장병(皇軍傷病將兵) 및 가족 위문
ㄴ) 군사 지원 사업
ㄷ) 대대적인 국민 저축 실시
ㄹ) 귀금속류 헌납
ㅁ) 전시 노동 봉사
ㅂ) 매월 일정액 국방 헌금 내기
ㅅ) 신사 참배 및 하느님께 필승 기원 기도를 드림
등을 실천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국 사상을 고취시켰던 일들은 주로 교단의 집행부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한일 합방 이후, 일본 교회 중의 하나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한국에 상륙시켰다.
1913년 8월 15일 서울에서 제 1회 일본 기독교 조합 교회 한국 대회가 개최된 이래 이 교파는 철저한 침략주의에 앞장섰다. 조합교회는 조선 총독부와 일본 재벌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조합교회가 한국 내에서 주로 한 일은 한일 합방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한일 동조론을 내세워 일제의 어용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39년 <종교 단체법>이 군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 국회에 제출되자마자 통과되었다. 종교 단체법의 형식상 내용은 국민 정신의 선도에 종교의 역할을 평가하고 종교의 지위를 명확히 하며, 종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종교가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종교를 탄압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는 일본 교회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상 한국 교회와의 통합을 추진케 하였다. 우선 교회 수 50채, 신도 수 5,000명 이상의 교회만을 문무성에 등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결과 일본의 3대 교파인 일기, 조합교회, 감리교와 일곱 교파만이 문무성에 등록케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교파들에게 한국 교회와의 합동을 추진케 하였는 바, 이렇게 한 의도는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에 예속시켜 침략 전쟁에 순응케 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 감리교 총회에서 일본 감리교와의 합동을 결의한 후,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 학원 안에 있는 해리스 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 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결교는 1940년 「활천」지 5월 호에서 이사장의 일본 교회와의 합동 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에서 "일본 성결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 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 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 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 고 전제 한 후, "도쿄에 가서 일본 성결교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 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 중이다." 라고 보고하였다.
일본 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도로 일제 시대 한국 교회 안에서의 교파 합동을 위에서와 같은 목적으로 추진하였는 바, 먼저 1938년 5월 8일 년 후 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기 기독교 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임원을 맡은 사람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이며, 8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 신민 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 바,
"현하 조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 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 사임을 인하고 이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여 동포의 정신 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 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 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 기독교회 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는 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 혁신 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교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이 의장이 되어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는 경성노회에서 혁신 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론이 거론되자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 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여기는 구약 성서의 탈출기 이야기와 신약 성서의 그리스도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위의 내용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요한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4대 복음서들(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에서는 산상수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혁신 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내에서 혁신 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 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해졌다.
1942년 12월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제 2회 정기 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 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 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으로 교단 명칭을 바꾸고 교단 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 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 규칙 실시 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했다.
장로교 역시 혁신 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 학원 내에 있는 장로교 총회 사무실에서 당시 총회장 김응순에 의하여 제 31회 총회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그리고 헌법 개정 위원, 교파 합동 위원들이 모여서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았으나 이본 기독교 조선 교단 안이 나오자 논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김응순이 규칙 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 날 제 2차 회의에서 규칙 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1943년 5월 7일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의 총회 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 바,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가 되었다. 교단 총회 임원에는 의장에 조승제가 선임되었다.
이 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 예배식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 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하였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 합동에 기함」이란 감리교보 사설에서 "교회 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 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 문제가 해결될 것." 이라고 제시했다.
1943년 9월 부전(富田, 일본 기독교단 대표)은 조선 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 기독교의 합동을 강조하였는 바,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 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 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들의 회동 이후, 장로교단은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 외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에서 <조선 내 기독교 교파 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 위원 선정은 중앙 상치 위원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 합동을 가결하였는 바, 합동에 관한 명분을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 기독교 각 파를 합동하여 단일 교단을 조직한다." 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 합동 전권 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월 12일 조선 기독교 교파 각 파 합동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 1회 모임을 중앙 교회에서 가졌는 바, 모인 교단은 다섯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 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다섯 교파들이 합동키로 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 위원 비례 : 장로교(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군(4명)
③ 제 1차 준비 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교회의 예배당
④ 합동 임시 군무소 : 정목 장로교회의 사무실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 1월 26일과 3월 16일에 열린 두 번에 걸친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모였으나,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 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 속에서도 일제는 재차 교파 합동을 요구한 바, 1945년 7월 19일 교파 합동 찰핍 위원회를 정동 교회에서 열어 장로교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 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루워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때 위임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하려 하였으나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동의하였고, 총독부 정무총감 고오도의 치리(治理)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인 청년들을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 특별 지원 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 데 대하여 크나 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인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 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 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 때 주로 강연을 한 유명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교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 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 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기독교 조선 감리회 혁신 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 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 을 각 교회 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들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 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 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 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1941년 12월 10일,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 보국 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 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의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 국가는 분쇄시켜 전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라고 전제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 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인 노예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원정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 띠를 꽉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 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 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한국인들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 표명, 감사 예배, 결의 대회, 감사 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파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 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저희들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저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전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입니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들 연합으로 승동 예배당에서 <징병제 감사 기독교 신도 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 대회 내용은 국민 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 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 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 간 조선 시정(施政) 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 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이 감격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황국 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 전문은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저희는 깊은 감사 감격한다.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 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 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 주임 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 제도 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 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 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 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 전보, 황국 신민 서사 제창, 천황 폐하 만세" 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 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 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 신도 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 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 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들은 무한한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 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 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 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 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 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 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 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 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 제 31회 총회에서 총간사 정인과가 보고를 한 바, "1943년 2월중 본부 주최로 대동아 전쟁의 목적과 기독교도의 의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연사를 파견해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하며 징병령 실시를 철저하게 촉진할 것!" 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신문 이사 박인덕은 <징병제 실시와 반도 여성들의 각오>란 사설을 실었고, 조선 구세군 본부의 회원정의(檜原正義)도 <열혈 남아는 결전장으로 나서자!>란 촉구문을 실었다.
일제가 제 2차 세계 대전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군대의 증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력 또한 청장년의 대량 진출에 인력 난과 군수 산업의 폭발적인 노동 수요 증가는 1942년부터 국민 동원 계획으로 수정, 강화되었고 1943년 10월 8일의 생상 증강 노무 강화 대책 요강은 국민 징용령에 의한 유휴불급(遊休不急)노무의 전면도원의 전용과 근로 보국대의 강화, 군 비 복무자의 노무 동원과 여자 노무의 대체 이용 강화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징용은 현원 징용(現員徵用) 및 친규 징용(親規徵用)으로 대별되며, 친규 징용은 특수 징용과 일반 징용으로 구분되는 바, 한국에서는 일반 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있는 대로 다 끌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연은 상부로부터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면사무소의 노무계 담당자와 마을 구장(區長) 등이 계획을 세워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곧바로 징용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일을 일본인도 아닌 말단의 부일 한국인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다.
강제로 연행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 방법인 국민 동원 계획에 의한 동원을 하였다. 하지만 목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이 조선 총독부 보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최근에 일반 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층 및 유산 계급 중에서 재빨리 도피하거나 혹은 주거를 전전하는자, 그리고 병에 걸리게 하여 자기의 수족에 상처를 내어 불구자가 되어 징용을 기피하는 자들이 생겼다." 는 보고를 한 사실에서도 파악된다.
이 보고서에서 징용의 처참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 민심의 이러한 동향을 외면하면서 친일파들은 국민 개로(國民皆勞) 산업 보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징용 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기독교 내에서도 나타나는 바, 기독교 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 징용령이란 무엇인가?>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라고 징용의 대열에 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1944년 6월 1일자 사설 <징용과 부인(婦人)>에서는 "결혼이 징용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라면 전시 하 국민이 옳치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항문(港門)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후, 국가 봉사를 위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자의 징용 참가를 권유하였다.
일제는 1944년에 접어들면서부터 12-40세 미만의 처녀를 <자녀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로 강제 징용하였는 바, 특히 여학교에 대하여 2명씩의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일제의 강요에 소위 여성 지도자란 사람들이 앞장을 섰는데,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박은혜, 유각경, 황신덕, 임숙재, 모윤숙, 최이권, 서은숙, 배상명, 박승호 등은 민족의 딸들을 강제 징용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동족으로써, 같은 여성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1938년에 물자 동원 내용을 발표하였는 바, 그 내용은,
① 군수물자의 확보
② 비상 시 국민 생활 양식의 확립
③ 주요 물자의 증산
④ 폐품 회수의 조직화
⑤군수 공업의 능률화
등이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해서 강행된 것들은 국방 헌금, 위문 금품, 저축 증대, 금 제품 헌납 강요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하여 국방 헌금을 강제적으로 요구한 바, 제일 먼저 1938년 11월 수원 지구 각 파 교역자들이 수원 읍내 종로 예배당에서 <시국인식좌담회>를 열고 15원 14전을 모아 헌금한 것을 필두로 하여 계속적으로 각 교파 별, 지역 별로 국방 헌금을 하였다. 감리교회는 1942년 3월까지 양덕 교회외 72개 교회들에서 241원 84전을 헌금을 하였다.
이는 국방 헌금이 교단이 주도하여 개교회(個敎會)와 총회 부속 기관에게 협조를 요구하여 이루워 졌으며, 교단 행사에서도 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 하 기독교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 위문품 전달, 출정 군인 가족들을 위한 일들을 하였는 바, 감리교는 황군 위문품을 윤천읍 교회 외 222개 교회들에서 교단의 이름으로 헌물하였다.
출처:네이버 블로그검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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