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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산군 조망대
뮌히요호 산장~콩코르디아 빙원~북서릉~정상 왕복
베르너 알프스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핀스터라르호른(Finsteraarhorn·4,273m)은 이 산군의 최고봉이다.
북서쪽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쐐기 모양으로 우뚝 솟은 이 봉우리는 4,000m급 주요 봉우리 중에서 15위 봉우리로서,
같은 산군에 위치한 융프라우나 아이거 못지않은 위엄을 갖추고 있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봉우리들의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4시간 이상 걸려 마침내 북서릉 아래에 도착했다. 뒤로 피셔 빙하와 알레치 빙하가 보인다.
더구나 피셔호른(Fiescherhorn)에서 발원해
핀스터라르호른 앞으로 굽이돌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피셔 빙하를 등반 내내 지켜볼 수 있다.
베르너 산군 심장부에 위치해 있어 접근로가 길고 힘들지만,
일단 산 아래의 산장에 도착하면 등반은 수월한 편이다.
이 당당한 봉우리는 많은 산악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산악스키로 접근이 수월한 봄철의 맑은 날에는 산장이 붐빌 정도다.
지난 여름에 찾았을 때 보니 9년 전 필자가 이 봉우리를 오를 때 이용한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은 크게 개보수한 상태였다.
바로 이 베르너 산군의 최고봉을 오르기 위해 뮌히요호 산장(Monchsjoch Hut·3,657m)을 일찌감치 출발했다.
동행한 이는 임덕용 선배와 후배 나현숙이다.
한낮의 열기에 빙하 위의 눈이 젖어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설피가 있었다.
하지만 설피를 신었는 데도 발걸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다.
잠시 급경사 설사면을 걸어 내린 후부터는 드넓은 눈밭이다.
한동안 그로스 피셔호른과 힌터 피셔호른 방향으로 걸으며 빙하 왼편 가장자리로 접어든다.
빙하 중앙과 오른편 아래쪽으로 크레바스 지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빙하 오른편에 솟은 트루베르그(Trugberg·3,933m) 북동사면에서 연신 눈사태가 발생한다.
그만큼 한낮의 열기가 정점에 달해 있었다.
콩코르디아 플라츠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일행 위로 그룬호른 고개가 보인다
뮌히요호 산장에서 출발
이제 우리는 피셔호른을 뒤로하고 그로스 그룬호른(Gross-Grunhorn·4,044m)을 왼쪽에 두고 걷는다.
모두 4,000m가 넘는 봉우리들로서 우리가 오를 대상들이다.
하지만 우선 목표는 핀스터라르호른이다.
이제 빙하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융프라우쪽에서 곧바로 내려오는 알레치 빙하와 만나 형성된 거대한 빙하의 평원,
콩코르디아 플라츠(Konkordia-Platz)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빙하 왼쪽으로 끼고 내려가는데도 크레바스들이 산재해 있다.
이제부터 안자일렌을 하며 걷는다.
차츰 경사가 심해져 더는 설피를 신고 걸을 수 없다.
양손에 설피를 들고 급경사의 설사면을 걸어 내리니 마침내 콩코르디아 빙원이다.
크기와 모양새가 파리의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을 닮았다며 이름 붙은 곳이다.
뮌히요호 산장을 출발한 지 2시간 반 걸렸다. 800m 표고차를 걸어 내린 셈이다.
2,800m 고지라 빙하 위로 여러 물줄기들이 흘러내렸다.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마냥 반갑게 시원한 빙하 물을 들이키며 한숨 돌린다.
그리고 보온병에까지 차디찬 냉수를 가득 채운다.
이제부터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빙하 좌측의 모레인 지대를 따라 가니 저 멀리 언덕 위에 콩코르디아 산장(Konkordia Hut·2,850m)이 보인다.
까마득한 벼랑 위에 새 둥지처럼 위치한 산장은 잠시나마 가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빙하 바닥에서 적어도 100m 위에 있기 때문이다.
1877년 그곳에 산장을 지을 때만 해도
산장 바로 아래 몇 미터까지 빙하가 흘렀다고 하니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긴 꽤나 녹은 셈이다.
산장 앞, 게양대 높이 펄럭이는 붉은 십자가의 스위스 국기로 보아 산장지기가 상주하는 모양이다.
이미 6월 말에 접어들었기에 모든 산장이 문을 여는 시기였다.
물론 뮌히요호 산장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묵을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은 며칠 후에나 문을 연다고 했다.
이제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질펀한 눈밭 군데군데가 마치 눈의 늪처럼 푹푹 빠진다.
곧 돌밭이라 설피를 신지 않았더니 발목 이상 빠진다.
방수가 잘 된다는 등산화라도 차디찬 빙하 물에 젖어버렸다.
반면 임 선배는 돌길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설피를 신고 오른다.
배낭을 벗어 설피 끈을 묶는 것만도 고역이기 때문이다.
두 번 더 번거로운 절차를 마치고서야 돌밭길을 벗어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눈밭이다.
설피를 단단히 조여 신고 그룬호른 고개(Grunhornlucke·3,286m)로 향한다.
드넓은 사면에는 우리뿐이다.
콩코르디아 빙원서부터 다시 오르막
사방에 펼쳐진 풍경은 선경이나 다름없다.
그룬호른 고개 위로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뒤따르는 이들 뒤로는
콩코르디아 플라츠와 그 너머의 알레치호른이 한눈에 보인다.
오랜만에 맛보는 한적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표고차 500m의 고갯길은 힘겹기만 하다.
한낮의 열기에 잔뜩 녹은 설사면은 설피를 신었는 데도 발을 잘못 디디면 뒤로 밀리곤 한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 한 발 두 발 위로만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고갯마루다.
우리의 목표인 핀스터라르호른이 드디어 보인다.
살짝 고개만 내밀더니 넓은 눈밭을 지나 내리막에 접어들자 웅장한 산세가 한눈에 건너다보인다.
비록 9년 전에 오른 봉우리지만 이 고개에서 보니 기가 질리고 만다.
아직 비시즌이라 우리는 자그마한 동계산장(윈터룸)을 이용했다.
콩코르디아 플라츠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일행 위로 그룬호른 고개가 보인다.
이제 한동안 완경사 설사면을 걸어 내린다.
피셔 빙하에 내려서기 위해서다. 빙하 건너편 언덕에 위치해 있는 산장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힘이 솟지만 고갯마루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빙하가 꽤나 넓다.
한동안 경사진 설사면을 횡단한다.
설피가 자꾸 밀려 발걸음이 불편하다.
이윽고 피셔 빙하 바닥에 내려서서 산장으로 향한다.
작은 모레인 지대를 지나 쿨와르를 따라 오른다.
약 100m 위에서 바위언덕으로 돌아 오르니 마침내 산장이다. 7시간 걸렸다.
산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라 통나무로 지은 작은 윈터룸만 열려 있다.
독일 산악인 둘이 먼저 와 있다.
그들은 그림셀 고개(Grimsel Pass)에서 출발해 이틀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산장 앞 나무바닥에서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그들 옆에 주저앉는다.
우리도 신발을 벗어 양말이며 옷가지를 말리며 쉰다.
산장 주변 돌밭 사이의 풀밭 여기저기에 야생화들이 만발해 있다.
해가 기울자 빙하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찼지만
융프라우요호보다 고도가 낮은 곳이라 훈풍처럼 느껴진다.
호젓한 산장에서 맞이하는 알프스의 오후를 즐긴다.
① 피셔 빙하를 가로지르는 일행 위로 핀스터라르호른이 솟아있다. 등반선은 11시 방향으로 올라 왼편 능선을 따른다.
② 시즌 초반이라 아무도 오르지 않은 북서릉의 설사면을 조심해서 오르고 있는 일행.
③ 칼날능선의 북서릉 구간구간은 하산시 더 위협적이었다.
산장에서 7시간 걸려 정상에 서다
다음날 산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은 탓에 모두 곤히 잔다.
알람시계의 울림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4시다.
2층 침상에서 자고 있는 독일 산악인들에게 미안해하며 조심해서 아침을 챙겨 먹고 장비를 착용한다.
출발준비를 하고 산장을 나서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헤드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경사진 설사면을 오르기 시작한다.
크레바스의 위험이 없어 서로 줄을 묶지 않고 오른다.
각자 자신이 편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남서면의 긴긴 설사면을 오르고 또 오른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다.
기온이 차지 않아 오히려 걱정이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정상부 능선까지 줄곧 설사면을 타고 올라야 하기에 발이 빠지면 그만큼 힘이 든다.
급기야 몇몇 구간에서는 벌써부터 푹푹 발이 빠져 여간 힘겹지 않다.
가능한 한 단단한 설사면을 골라 오른다.
사각사각 거리는 아이젠 소리를 즐기며 2시간 이상 오르자 남서릉 중간의 안부다.
3,616m 지점으로서 ‘아침 먹는 자리’라는 지명 말대로 새벽에 출발한 산악인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우리도 바람을 피해 쉬어간다.
이제 해가 떠올랐다.
하지만 동쪽 하늘에 드리운 구름에 가려 햇볕의 세기는 미미했다.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피셔 빙하를 타고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혹시 날씨가 나빠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가파른 설사면을 조심해서 횡단한다.
또다시 긴긴 설사면을 올라야 한다.
지그재그로 오르고 또 오르지만 끝이 없다.
몇몇 구간에서는 크러스트된 사면이 체중에 꺼져 여간 힘겹지 않다.
그래도 뒤따르는 이들 너머로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빙하 위로 피어나는 구름과 그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들,
구름의 그림자 등등이 한데 어울려 마치 수채화 같다.
이윽고 4,088m 지점의 북서릉 아래 안부(Hugisattel)에 이른다.
4시간 이상 걸렸다. 바람이 세차 옷을 고쳐 입고 장비를 챙긴다.
이제부터 자일을 묶고 피켈을 이용해 오른다.
암빙 혼합구간을 지나 커니스 진 설릉 아래쪽 사면을 오른다.
즉 북서릉의 서쪽 사면이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자칫 잘못해 커니스 진 동쪽 사면으로 추락하면 끝장이다.
살짝 고개를 들어 내려다보니 1,000m 아래의 빙하가 훤히 보인다.
우선 발디딤을 확실하게 만들며 나아간다.
시즌이 일러 우리보다 앞서간 발자국은 없다.
9년 전 이곳을 오를 때에 비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급기야 몇몇 구간은 말안장을 타듯 바위 위에 쌓인 눈에 엉덩이를 깔고 살금살금 전진한다.
그리고 몇 십 미터 깊이의 안부를 오르내린다.
이미 시간은 정오가 훨씬 지났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를수록 세차다.
이러다간 혹 정상에 못 가는 것은 아닌가도 싶다.
묵묵히 뒤따르는 임 선배와 후배도 이제 말이 없다.
급기야 바로 저 언덕만 오르면 정상이려니 여기며 오른 곳에서 본 진짜 정상은 너무 멀어 보인다.
누군가의 발자국이라도 있다면 거리감이 덜하겠건만 아무런 흔적도 없어 정상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마당에 계속해서 전진이다.
뒤따르는 이들이 오히려 더 든든하게 뒤를 밀어주는 것 같다.
몇 번 칼날 능선을 오르내리자 마침내 정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짧았다.
산장을 출발한 지 7시간이나 걸렸다.
9년 전에 비해 2시간 더 걸린 셈이다.
베르너 산군의 모든 봉우리들이 한눈에
정상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9년 전에 비해 눈이 많이 덮여 있었고,
십자가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 셋은 등정의 기쁨을 나누며 굳은 악수를 한다.
알프스 82좌 중 두 번째로 오른 봉우리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알프스의 한 산정에 선 순간을 즐긴다.
하늘 높이 옅은 구름이 자욱했지만 베르너 산군의 모든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냥 산정에 머물 수 없어 하산을 서두른다.
강한 서풍에 맞서서 조심해서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안전한 하산 후 맞이하는 등정의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기에 바짝 긴장하며 한 발 두 발 내딛는다.
9년 전에 비해 좀더 기울어져 있는 십자가가 있는 정상 너머로 피셔 빙하가 흐르고 있다.
이윽고 북서릉을 안전하게 내려선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불필요한 장비를 배낭에 챙겨 넣는다.
이제부터 긴긴 설사면을 걸어 내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몇몇 군데에는 크레바스의 위험이 있고,
가파른 설사면에서 미끄러지면 위험한 구간도 있다.
임 선배와 후배는 안자일렌을 하고 필자는 따로 걷는다.
한낮의 기온에 설사면은 이제 완전히 녹아 어떤 곳은 심지어 무릎까지 빠진다.
마치 진흙탕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래도 내리막길이라 걷기 수월하다.
몇몇 경사진 사면에서는 판상 눈사태가 발생해 있다.
제발 우리가 오르내리는 구간에는 발생하지 말아주길 기원하며 드넓은 설사면을 가로질러 내려온다.
이윽고 남서릉 안부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수통의 물이 부족하자 임 선배는 젖은 눈을 가득 담아 흔들어 마신다.
얼마 있지 않아 구름이 짙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산을 서두른다. 오를 때와는 달리 작은 쿨와르를 가로질러 내린다.
질퍽한 설사면이 위험했지만 무사히 내려와 크레바스 지대를 우회해 언덕 하나를 내려오니 마침내 산장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까지 한 발 한 발 조심해서 급사면을 걸어 내린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마침내 산장이다.
11시간이 걸린 셈이다. 독일 산악인 둘이 반긴다.
하루 종일 산장 주변에서 해바라기나 했다는 그들에게 임 선배는 약을 올린다.
“느그들은 모를 거야. 정상에 다녀온 우리들만 알 수 있는 이 기쁨 말이야.”
후배와 필자도 웃으며 등산화를 벗어 젖은 양말을 짜 말린다.
그리고 산장 앞 나무바닥에 대자로 눕는다.
구름 사이로 내리쪼이는 햇볕이 따스하게 발바닥에 닿았다.
산행정보
베르너 산군의 최고봉 핀스터라르호른은 접근로가 길다.
주로 3군데서 접근하고 있다.
가장 쉽고 일반적인 출발점은 융프라우요호 전망대쪽에서다.
전망대에서 곧장 알레치 빙하를 타고 내려 콩코르디아 플라츠에서 그룬호른 고개를 넘는다.
물론 우리처럼 뮌히요호 산장에서 자고 에비히슈네펠트(Ewigschneefeld) 빙하를 따라 내려와
콩코르디아 플라츠를 경유할 수도 있다. 두 경우 다 약 5~7시간 소요된다.
한편 베르너 산군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그림셀 고개에서 출발하여 오베르라르요호를 지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고개에 위치한 산장에 자고 접근하는 게 일반적이다.
마지막으로 베르너 산군 남쪽의 피시(Fiesch)에서 출발하는데,
이 경우에도 많은 시간(약 10시간)이 걸린다.
가장 일반적인 루트인 북서릉의 등반난이도는 PD급으로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상부 리지에 얼음이 덮인다거나 선등자의 발자국이 없는 시즌 초에는 등반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리지 상의 커니스를 조심해야 한다.
출발지인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은 봄여름 성수기에 산장지기가 상주하며,
그 외에는 작은 윈터룸만 개방해둔다.
성수기에는 예약 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스위스산악회 소유인 이 산장의 1박 요금은 28스위스프랑이며,
UIAA 가맹단체 산악회원인 경우 1/3 할인받을 수 있다.
글·사진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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