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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도, 남이 해도 로맨스인 채석장
다리가 여느날과 달리 부드러운데다 맑은 날씨의 아침이라 그랬을까.
9월 9일 아침의 출발은 기억에 남을 만큼 상쾌했다.
그러나 곧 언짢은 장면을 목격했다.
22번도로가 된 헨로미치가 코마쓰시마시에서 카쓰우라군(勝浦郡)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는 지역을 지날 때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작은 동물이다.
선혈이 낭자한 것으로 보아 새벽에 변을 당한 듯 하며 종류를 분별할 수 없도록 두부
(頭部)가 심하게 손상되었다면 머리부분을 역살한 것이다.
바로 옆이 거창한 절개지다.
왜 터널을 뚫거나 에코브리지(ecobridge/야생동물생태통로)를 가설하지 않았을까.
일본인은 우리보다 동물 애호가라는 평판이 와전된 것인가.
동물들의 세계를 무참히 짓밟아 놓고 통로마저 만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건
횡단을 하다가 당한 것이다.
이 길은 윤회환생을 믿는 자들이 대부분인 나라의 길이다.
저 역살당한 동물의 전생과 환생은 ?
곧 언짢은 기분을 풀어주는 노파를 만났다.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고이 넣은 휴대용 휴지를 나눠주는 노파.
차로지만 주변에 인가도 드문 시골길 아침의 출근시간이라 차량만 많을 뿐 가뭄에 콩
나듯 지나가는 헨로상에게 오셋다이(お接待)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 헨로상이 되지는 못해도 헨로상을 대접함으로서 이승뿐 아니라 내세에도 복을
받는다는 전래의 소박한 믿음.
이 노파도 현세의 복보다 자신의 내세를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일까.
종교에 어떤 형태로든 내세의 담보가 없다면 믿고 따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터무니없는 사기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카쓰우라타운에서도 산 하나가 절단나고 있다.
돌 먹는 불가사리는 지구촌 전체에 서식하며 특히 선진국일 수록 더 왕성한 것 같다.
자연 사랑도 구두선에 불과하고 하나같이 아전인수식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할 때는 스캔들로 몰아붙이는데 놀랍게도 예외가 있다.
내가 해도 남이 해도 모두 로맨스라는 예외가 바로 채석장이다.
돌의 땅 이베리아반도 까지도 묵은 돌 두고 새 돌 캐느라 산이 작살나고 있으니까.
16번도로로 바뀐 헨로미치는 카쓰우라강과 거의 동행하며 이쿠히나(生比奈)소학교를
지나 서서남행을 계속한다.
출발이 상쾌했던 것 처럼 진행도 순조로워 어제 차선으로 점찍었던 카쓰우라 코야에
당도한 시각이 아침 8시 30분쯤.
어제의 악몽과 달리 시속이 4km를 넘었으나까 헨로상이 된 이래 최초로 정상 궤도에
오른 것이다.
코야는 야숙 리스트에는 누락되었으나 지도에 기재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화요일이
정기휴일이라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오헨로상접대소(Free Rest Space for Pilgrims)'
순례자가 자유롭게 쉬는 공간이라는 곳이 화요일에는 쉰다?
헨로상도 화요일에는 이 구간을 통과하지 말아야 하나.
희한한 접대소다.
그러니까, 이 큰 집은 헨로상을 위한 코야가 아니고 영업용 종합식당(일, 중, 양 등)의
작은 부분을 순례자를 위해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미치노에키(道の驛/franchise?)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장거리 산 또는 길에서의 내 식습관은 1주에 한번 꼴로 육류로 포식하는 것이다.
걷기를 마친 저녁때가 좋지만 산길이 많은 헨로미치에서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기로 영양보충을 하고 싶었는데 간단한 메뉴로 하자는 니시오.
이 때만은 그가 나의 선배였다.
해발 550m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만복이면 되레 지장을 초래하니까.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지팡이(사찰의 지팡이와 119안전지팡이)
우리는 니시오의 말 대로 가볍게 식사한 후 편의점에서 저녁거리를 충분히 준비하여
20번 카꾸린지(鶴林寺/勝浦郡勝浦町)를 향해 떠났다.
카쓰우라타운의 이쿠나(生名)마을 논길을 지나면 바로 오르막 길이다.
가파르다 싶을 때 시선을 끄는 코야가 나타났다.
새(띠)로 지붕을 이은 '카야부키 헨로코야(茅葺き遍路小屋)'
전무는 물론 후무(88영장 일주후 결론)한 독특한 코야다.
"토쿠시마(德島) 문화재명장(meister)연락협의회와 가미야마(神山) 카야부키 그룹이
사라져가는 토쿠시마의 카야부키 기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문화청의 지원을 받아
헨로미치 ボランディア 그룹의 협조로 건설했다"고 안내하고 있다.
'ボランディア'는 영어 'volunteer'(자원봉사)의 일본어 표기다.
우리글 표기 '볼런티어'에 비해 어색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말하면 내가 팔불출일까.
카쓰우라타운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좋은 위치에서 오르내리는 헨로상은 물론 산책
하는 인근 주민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휴식처가 되겠다.
카꾸린지는 해발550m에 불과한 산에 있지만 매우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한다.
산길은 직삼각형의 빗변에 해당한다.
그래서, 산길이 짧다는 것은 된비알을 의미하는데 카꾸린지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선지 카꾸린지는 헨로상들에게 "자유롭게 이용하라" 며 등산로변에 지팡이들을
비치해 놓았다.
이 지팡이들은 엉뚱하게도 호남정맥의 백운산(전남 광양)을 불러왔다.
호남정맥종주의 들머리인 백운산 초입에도 대나무 지팡이가 한묶음 비치되어 있었다.
이 지팡이묶음은 사찰이 아니고 관할(전남광양) 소방서 119구조대의 작품이다.
해발 1.200m가 넘는 높은 산에 오를 때 짚으라는 배려가 담겨있는 지팡이다.
헨로상들이 올라오면 지팡이 값을 충분히 한다.
납경을 비롯해 곳곳에 봉납을 하니까 반갑고 고마운 고객들이다.
그러나 119구조대에게 정맥 종주자들은 결코 반가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줄 것이란 119구조대의 비상출동령 밖에 없으니까.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지팡이다.
여기 카꾸린지(20번)에 오르는 길부터 21번 타이류지와 22번 뵤도지에 이르는 길이
특히'아와헨로미치(阿波遍路道)'라 해서 국가사적(史跡)으로 지정되었단다.
19번 타쓰에지에서 22번 영장에 이르는 길에는 초이시(丁石)와 도표, 순례자 무덤 등
역사와 문화의 전설이 담긴 석조물이 많이 남아있고 옛길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는
구간이라 해서.
또한 산길이 험준해서 제1코로가시 쇼산지 길에 이어 카꾸린지와 타이류지 길을 제2,
제3의 코로가시라 하고.
20번 영장 카꾸린지는 칸무천황(桓武/재위781~806)의 칙명에 따라 코보대사가 창건
했다는 사찰이다.
대사가 이 산에서 수행중일 때란다.
암수 한쌍의 백로가 내려와 작은 황금지장상을 날개로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본 대사는
즉시 근처의 영목으로 90cm 되는 지장보살상을 조각해 그 태내에 작은 황금보살상을
넣어 본존으로 삼았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카꾸린지라 했다는 것.
지장 본존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학의 전설에 따른 사찰 답게 경내에는
도처에 한쌍의 학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경내의 산세가 석가가 설법을 폈다는 인도의 영취산(靈鷲山)과 비슷하다 하여
산 이름을 료주잔(靈鷲山)이라 했다나.
한데, 당나라에서 수행한 코보대사가 인도는 언제 갔는가.
전혀 기록이 없는데 대단한 친인파(親印派) 같다.
1번 료젠지도 인도의 영산(靈山)에서 차용했고 여기 료주잔도 그러하고.
아와(阿波)일대의 사찰이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는데도 수난을 면하고 번영해 지금은
15말사를 거느린 대사찰이 되었다는 카꾸린지 다운가.
멀리 기슈(紀州), 아와지(淡路)의 산봉과 더 멀리 태평양을 조망할 수 있는 풍광명미
(風光明媚)한 높은 곳에 대형 슈쿠보가 있다.
자료에 의하면 무려 450명을 수용할 수 있다니 대단한 숙박시설이다.
이 시설을 채우려면 대형버스 만으로도 10대 이상이 주차해야 한다.
소형차로는 정원을 다 채운다면 100여대가 머물어야 한다.
자료가 맞나?(45명인데 '0'이 더붙은 것?)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肝心なことは目に見えない)
21번 영장으로 가려면 자동차는 올라온 길을 곡예하며 한동안 내려가야 하지만 도보
순례자는 카꾸린지에서 곧바로 남행하는 산길이 있다.
등산길이 가파르면 특수지형 외에는 하산길 경사도 당연히 심하며 하산이 등산보다
어렵고 위험한 것은 산을 타본 사람에게는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길은 제2 헨로코로가시라 불리는 길 답게 까다로운 내리막이며 니시오가 젊은데도
몹시 힘들어 했다.
산에 익숙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너덜지역에 다름아닌 돌계단들이다.
오래 되어 정비가 필요한데도 방치상태인 통나무 계단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계단 높이가 높아서 관절에 충격을 많이 준다.
이같은 구간에서는 중(重)등산화가 안전한데 니시오의 신발은 보통 운동화다.
나 역시 샌들 조깅화를 신었으나 오랜 세월의 등산으로 적응이 되어 별 문제 없지만.
니시오가 더디 내려오기 때문에 오를 때와 달리 내가 많이 기다려야 했다.
산길에는 다양한 표어들이 나무에 달려 있는데 니시오를 기다리는 동안에 특히 눈에
띈 것은 "肝心なことは目に見えない"(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 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프랑스1900~1944)의 말이다(책'어린왕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볼 때만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
한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헨로길에 걸려있는 하고많은 표어들 중에서 왜 이 말일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은 참말인가.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이 말(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은 거짓말이다.
눈에 보이니까.
그러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은 거짓말인가.
그렇다면 생 텍쥐페리의 말은 참말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니까.
참말도 되고 거짓말도 되는 논리학의 파라독스(paradox) 놀이를 잠시 하려는 사이에
니시오가 내려와서 중단하였으나 이 말은 이 때로부터 일본을 보는 내 시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아난시(阿南市)로 바뀐 산길이 차로를 건너는 지점은 이정표 전시장(?).
헨로미치에는 여러 종류의 이정표가 안내를 담당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초이시(丁石)는 연호 또는 불상과 연번호를 새겨 약 109m
간격으로 세운 이정표석을 말한다.
그러니까, 1초이시는 109m쯤 된다.
카꾸린지 구간에는 이 초이시(丁石)가 다른 구간에 비해서 많이 남아 있는데 세월과
더불어 점점 사라져가기 때문일까.
이 것도 중요한 자랑거리 리스트에 들어있으니.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아주 먼 훗날에는 진귀한 보물 대접 받을 수도 있겠다.
더디게 내려온 니시오를 앞세웠으나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무성한 풀밭 헨로
미치에서는 아예 걷지 못했다.
이런.
마무시(독사) 공포 때문이라는 이 겁쟁이(?)를 뒤따르게 하고 풀숲을 헤쳐 내려갔다.
실은 나도 동물 중에서 파충류, 그 중에서도 뱀을 가장 기피하는데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혐오하기 때문인데 이 젊은이의 공사증(恐蛇症)은 심각한 것 같다.
마음은 믿을만 한가
학령기 아동 부족으로 폐교된 오오이초(大井町)의 소학교를 목표로 내겨갔는데 학교
건물이 다른 용도로 사용중이니 어찌한다?(헨로상의 젠콘야도 구실은 끝났다).
19번도로변의 헨로휴게소까지 내려갔다.
도착한 시각이 오후 2시 50분이므로 21번영장까지 능히 갈 수 있는데도 내려올 때 힘
겨워 하더니 더 진행하기를 포기하는 니시오.
결국, 오후의 황금시간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다른 아무 이유 없이, 단지 동행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88번 오오쿠보지.
냉가슴 앓고 있는 벙어리의 심정이라 할까.
방명록에는 한국인 부부 자전거 헨로상이 지난 5월에 이 곳에서 쉬고 간 기록이 있다.
그들은 다음 영장(21번)에 오르는 로프웨이 값을 아끼려고 여기에 자전거를 두고 20
번에 다녀 왔다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21번에는 차로가 없지만 20번에는 450명이 숙박할 슈쿠보가 있고, 따라서 잘 닦여진
차로가 있는데 왜 자전거헨로상이 걸었다는 건지.
청천백일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이야말로 지루하고 지겨운 일이다.
그래도 어둠이 찾아와 헨로미치 첫 노숙이 막 시작될 때 한 중년남 헨로상이 왔다.
나야 말이 다른 이방인이지만 동족인 니시오도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서먹해
보이는데 그는 혼자 말을 많이 하다가 시들해졌다.
썩 좋지 못한 밤하늘이라 노숙효과도 별로였는데 다행히도 낮에 본 생 텍쥐페리의 말,
니시오 때문에 중단되었던 "肝心なことは目に見えない"가 머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논리 파라독스 놀이는 그만하고, 진지해지는 밤이 시작된 것.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대개의 인간은 중요하지 않고 진지하지도 않으며
지엽적인 것에 놀아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일본, 일본인의 중요하지 않은 것만 보고 판단하고 있는가.
일본에 대해 진지하지 못했으며 중요한 것을 보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인가.
설영, 그랬다 해도 나는 지금 일본에 대해서는 용일의 범위를 확장해 가는 중 아닌가.
그 용일에 좀 더 진지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되는가.
그러나 이 명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 중요한 것인가?
황금이 누렇다 해서 누런 것이 다 황금은 아니지 않은가.
무수한 황금의 조건 중 단 하나를 충족하고 있을 뿐.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가.
생텍쥐페리는 그 존재는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의 눈이란 실재가 아니다.
형이상학이며 유심론자의 주장이다.
실재하는 눈은 사물을 봄으로서 비로소 존재 의의가 있다.
보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눈이 아니다.
눈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한데, 생 텍쥐페리에게 눈은 철저하게 불신받은 몸의 일부였는가.
그에게는 시각장애인이 이상형이었는가.
하긴, 원효대사의 도통도 요약하면 '마음'이다.
돈오의 글귀 "심생종종생 심멸종종멸(心生種種生心滅種種滅)"이 바로 마음 아닌가.
하지만, 그 마음은 과연 믿을만 한가.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다"
베르디(G. F. F. Verdi)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에 나오는 말이다.
여자의 마음만 그런가.
마음을 거창하게 포장하면 사상이다.
사상은 초지일관 변하지 않는가.
그러면 '변절자'라는 단어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도.
"눈은 몸의 등불이다.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예수의 말이다(기독교 신약성서)
생 텍쥐페리는 예수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예수와 다른 주장을 했다가는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던 중세기 이전이라면 아마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자칫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
갈릴레이(이탈리아)도 "지구가 돌고있다"(지동설)고 했다가 하마터면 장작불구덩이에
들어갈 뻔 했으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