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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이동하(李東河)
신복룡(건국대 교수)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동하를 만난 것은 1970년 대 초의 어느 해였을 것이다. 그나 나나 모두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시간 강사라는 이름의 보따리 장사를 하던 시절, 나는 가끔 교내 신문에 잡글을 썼고, 그때 동하는 건대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시절, 문단의 이런저런 인연으로 그는 우리 학교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인상은 다소 어두웠다. 그 교내 신문사라는 건물이 워낙 우중충했고, 동하라는 사람이 그렇게 깔끔하게 책상을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어서인지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 편집국장 자리는 어수선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람이 핍진(乏盡)해 보였다. 하기사 그 시대의 우리 모두가 그랬을 터이고, 밥술이나 먹는 동하가 그렇게 보였다면 그의 눈에 비친 내 보따리 장사의 모습은 오죽이나 했을까?
그는 연신 담배를 갈아 피웠다. 내 기억 속의 동하는 늘 심한 줄담배와 그로 인한 수전증이었다. 글씨를 쓸 때는 수전증이 더욱 심했다. 그의 글씨는 독특했다. 약간 누운 글씨에 도안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데 속도는 몹시 느렸다. 글씨를 쪼듯이 찍어서 썼다. 우리는 그런 글씨를 속칭 과두(蝌蚪)문자라고 불렀다. 올챙이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저 속도의 글씨로 어떻게 장편소설을 쓰나... 여하간 그는 골초였고, 구순(口脣) 욕구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러던 그가 그 후 어느 날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뿐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겠지만 동하가 주는 첫인상은 우울함이랄지 잘 설명하기 어려운 그늘짐이다. 그의 초기 작품에 <우울한 귀향>이라는 것이 있다. 피곤한 도시의 삶에 지친 ‘나’가 반겨주는 이도 없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장편소설이었는데, 그 주인공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도 늘 그렇듯이 그 작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 ‘윤’인데 그것은 동하의 아명이다.) 그는 늘 도시의 고단한 삶을 얘기했다.
우이동 하숙방으로 당장 기어들 필요야 없다는 생각에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코피를 한 잔 들고 또 담배를 입이 써질 때까지만 태우기로 작정하고서 앉아 있었다. 꽤나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몸이 으스스 떨리기 시작했다. 뱃속은 훈훈한데도 몸은 떨리기만 했다. ... 담배를 사서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연기를 한 모금 들이켰다. 비로소 입 안이 썼다. 그래도 불을 물고 있다는 심사로 계속 뻑뻑거렸다. 몹시도 쓸쓸했다. 몸도 여전히 떨렸다.(<우울한 귀향>, 1978, pp. 294-295.)
그의 소설은 늘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그렇게 유복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는 고향 얘기를 그의 작품의 중요한 테마로 삼았다. 우리와 늘 한 패로 놀고 있는 조남현(曺南鉉)은 이를 ‘귀향 의식’ 또는 ‘탈출 의식’이라고 설명하면서(<도시의 늪>, 1979, p. 234), 어렸을 때의 외상(外傷, trauma)에서 그런 감정이 출발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받은 회상은 다시 결핍 경험(Erfahrung der Negation)의 개념으로 풀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동하를 잘 아는 사람이 조남현이고 보면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의 삶과 소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무척 추워 보인다는 점이다. 눈여겨보신 독자들은 눈치챘겠지만, 그의 작품의 계절적 무대는 단연 겨울이 많다. 그리고 늘 바람이 분다. 그는 <바람의 집>이라는 소설을 쓸 정도로 바람을 소재로 삼았다. 그는 겨울 풍경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동하는 여름에도 추워 보이는 사람이다. 나잇살이라도 좀 붙었으면 좋으련만 체중도 늘 변함이 없다. 피둥피둥한 이동하는 격에도 맞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수척함이 늘 안쓰럽다.
그리움이 그렁그렁한 남자
귀향 얘기가 나왔으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그의 작품집 연보를 보면 책마다 그의 고향(출생지)이 다르다. 어느 책에는 경상도 경산이라고 되어 있고, 어느 책에는 일본 오사카(大板)으로 되어 있다. 세상에 고향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은 나는 그에게 고향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뜬금없이 오사카를 꺼내지 않았을 터이니 그의 고향은 아마도 오사카가 맞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왜 일본으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무슨 대단한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동하는 그 얘기를 평생 하지 않았다. 일제 시대에 그의 부모님이 일본에 가셨고 거기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징용은 아닐 터이고 아마도 유학생이었거나 있는 집 자제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말, 즉, ‘나의 아버지는 고향 N읍에서 유일하게 일본 유학을 할 만큼 신식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작중 인물의 고백(「파편」, 1987, p. 367)이 아마도 자신의 얘기가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이 이동하의 이름이 본명이리라고 알고 있는데, 실은 그의 이름은 용(勇)이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일제 때 이름은 용의 발음 그대로 이사무(いさむ)였다고 한다. 이사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용기 있다’는 뜻인데, 아마도 그의 부모님은 갖 태어난 아들이 식민지 시대에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는지, 아니면 태생이 소심하고 착한 줄을 미리 아셨는지,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신 것을 보면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동하의 모습에는 늘 실향의 그림자가 있다. 언제인가 왜 필명이 ‘동하’(東河)냐고 물었더니 ‘동’ 자는 동리(東里) 선생을 그리는 것이고 ‘하’ 자는 고향의 개천이 그리워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 그는 늘 뭔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학자 가운데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소위 켐브릿지 학파의 창시자인데, ‘젊은이여,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살라.’고 말한 분이라면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것이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식자(識者, intelligentsia)의 심성에 관해서 언급한 것이 있는데, 그 첫째가 우수 낀 표정(hypochondria)이다. (참고적으로 말을 이어간다면, 두 번째는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이고, 세 번째는 육체적 즐거움에의 탐닉을 거부하는 것이다.)
동하에게는 늘 그런 우수가 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어머니 때문일 거라고 가끔 생각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인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랄지, 회한 같은 것을 말하기 마련인데 동하는 그 어머니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편부 슬하에서 큰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
고작 코흘리개 중학생에 지나지 않던 그런 나이에 나는 이미 인생사의 보다 깊은 곳을 지나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 단지 여기에서는 그 소박한 믿음이 전쟁과 실향과 굶주림, 헤어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어머니의 죽음 같은 것에 근거한 것이었다고만 말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내 작은 우주의 붕괴였다. 우리의 삶이 지닌 근원적인 비극에 대해 눈을 뜬 것도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였고, 아직도 코흘리개 중학생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인생의 보다 깊은 곳을 지나온 듯한 느낌을 심은 것도 바로 그 죽음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야만 살 것 같은, 참으로 절실한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밝고 따뜻한 날>, 1987, p. 11.)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 그리움을 잠시도 놓지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 어두운 시기에 우리의 곁을 떠난 한 여인의 모습이 거짓 없이 담겨 있기를 아울러 소망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본질적 허무에 대해 나로 하여금 눈뜨게 한 것은 그 시대와 그[의] 죽음이었고, 내가 매번 절망적인 상태로 굴러떨어지면서도 한사코 소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 또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작업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장난감 도시>, 1996, pp. 242-243.)
우리에게 어머니는 누구인가?
내가 동하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대를 살아간 친구로서 그를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다. 내가 미국 유학 시절에 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외아들이 보고 싶어 눈을 감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듯 울었다. 그리고 효도 한 번 해보지 못한 그 죄의식으로 인하여 지금도 울면서 잠자리에 드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그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방학 때면 엄마가 보고 싶어 고향에 간다는 친구의 설명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들이 귀한 집안의 늦둥이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헌헌장부였고, 사랑방의 스타였고, 젊었을 적에는 돈도 가졌던 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줄줄이 딸만 낳았다. 그 핑계로 우리 동네에서는 과부가 수절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한이 되었고 나를 낳으신 후로는 나도 아들을 낳았다는 당당함과 지난날의 설움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이 나에게는 성장기였고 사춘기였다. 어린 눈에도 그 복수는 처절했고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어머니가 보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저토록 그리워하며 소설을 쓰는 동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동하의 소설을 보면 늘 자기의 얘기였다. 인생을 살면서 체험보다 더 진한 얘기는 없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애기를 묻어내는 것이 어찌 동하만의 경우일까만은 그는 자전적인 얘기를 많이 썼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데 비해 자서전을 쓴 작가는 흔치 않다. 작가는 자서전을 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까지도 남의 이야기처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상 사는 일을 뒷전에 밀쳐둔 채 한결같이 소설 쓰는 일에만 매달려 온 이유의 상당 부분은 아마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장난감도시>, 1996, p. 242.)
나는 언젠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옛날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들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밝고 따뜻한 날>, 1987, p. 11.)
인간은 누구나가 다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그 진한 얘기들, 가슴속에 끓고 있는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누구나가 그런 소설 같은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누구의 얘기는 진하고 누구의 얘기는 재미가 없을까? 아마도 그것은 삶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얘기의 솜씨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설가들은 할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행복하다.
내가 동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동갑의 나이에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같은 것을 체험하고 그는 그 체험을 글로 남길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는 나의 얘기 같다. 나는 전상국(全商國)이나 조정래(趙廷來)의 작품 속에서도 그와 같은 체험의 공유를 느끼며 즐거워한다. 나라고 왜 할 말이 없으랴만은 사회과학을 하는 나로서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은유(隱喩)하면서 할 말 다 하고서도 형무소를 가지 않는 그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아마 명색이 사회과학자인 내가 저 소설가들처럼 하고 싶은 소리 다 했다가는 남영동 대공 분실에 끌려가기에 바빴을 것이다.
언제인가 서귀포 앞 바다에서 창파를 바라보며 나는 동하에게 물었다. ‘나는 당신의 글 중에서 「파편」을 가장 좋아하는데, 당신은 자신의 글 중에서 어느 작품에 가장 애정이 가느냐?’고. 내 기억에 그는 <굶주린 혼>이라고 대답한 것 같다. 그는 그 작품이 초기의 데뷔작이어서 애정이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을 자주 얘기했다. 동하가 원래부터 가난했던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는 늘 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다.
내가 「파편」을 동하 소설의 수작으로 뽑은 이유는 거기에 담겨 있는 작가의 메시지가 너무 절절하고 운명과 같은 것이어서 그렇다. 그 글은 나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안 읽은 독자들을 위해 소개하자면, 얘기인즉슨, 작가의 숙부 얘기인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난리 통에 공비가 되고, 그 와중에 총탄을 맞아 평생 가슴에 파편을 안고 살다가 죽어서 화장을 한 연후에야 그 파편이 잿더미에서 나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파편을 생각하면서 인간에게서의 업장(業障)은 죽어서나 떨어져 나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동하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가끔 그의 소설을 출판해 준 출판사 사장이 참으로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순수 문학이 팔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홍신이가 돈 되는 소설을 써서 잘 나갈 때도 그는 요지부동으로 순수를 고집했다. 언제인가 홍신이와 설악산에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홍신이는 소설로, 텔레비전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등산객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는 등, 반갑다는 등, 사진을 찍는 등 난리였다.
그러나 누구도 동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김]택호가 ‘형의 소설 중에서 재판 나온 책 있으면 대봐.’ 라고 오금을 쥐어박았지만 동하는 부스스 웃고 말았다. 평소에도 그런 일이 있으면 민망하게 생각하는 조남현이 옆에서 이런저런 말로 위로했지만 그라고 왜 속이 좋았으랴. 그래서 택호가 짜낸 아이디어가 있는데, 다음에 나올 소설은 제목을 「재판」이라고 지으면 틀림없이 재판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합의를 보았다.
동하에게서 연민을 빼고 나면...
한 인간이 어떤 길로 접어들기까지에는 운명적인 어떤 힘과 수많은 인연과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겠지만, 아마도 동하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목사나 의사가 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이다. 동하는 참으로 선량하고 연민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어떤 힘에 의해 어이없이 망가지는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삼학도」를 저토록 까뭉개버려 ‘흡사 뇌수술을 한 환자의 머리처럼 만들어놓은’ 공권력이든, 「앙앙불락」에서 등장하는 트럭운전사이든, 깡패이든, 버릇없이 막돼먹은 젊은 녀석이든, 과천의 새를 죽게 만든 개발이든, 저들에게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소시민에게 대한 연민을 그는 잠시도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짓밟힌 무리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무수히 당하고 산다. 그것은 참으로 황당하고 기막힌 일이다. 동하의 눈에는 그러한 아픔의 가해자들이 모두 폭력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언제인가 한때 동하는 폭력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폭력 연구>라는 소설집까지 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이 친구가 논문을 썼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젊은 날에는 정의감도 있고 분노도 있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나이가 들면 그런 억울함이나 어이없음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려나 했는데 웬걸, 최근에는 느닷없이 「우렁각시」가 나타나 또 다시 어이없는 일을 겪고 만다. 그는 늘 그렇게 당하고 손해만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항변하지 않으며 안으로 삭이며 살았다. 내가 고스톱을 치면서 몇 장을 속여도 그는 모른 체해주었다. 그는 군자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참으로 각박하게 살아온 나는 동하를 볼 때면 더욱 미안하고 무안하다. 바깥 남자가 그러면 안사람이라도 독해야 하는데 그의 부인은 더 착하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렇게 푸념하고 있다.
원래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나는 오십 중반의 나이를 살아오는 동안 무례하거나 철면피하게 남의 앞을 가로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편이다. 기름진 고기 토막 같은 것을 놓고 남과 강팔지게 다투어본 적도 없다. 지극히 선량하기만 했던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늘 비켜서는 일에 익숙하였고, 때로는 속이 짠 일도 내색 않고 혼자 삭이는 데 능하였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혹 무능하단 소리는 들었는지 몰라도 경우 없다거나 막돼먹은 인간이란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앙앙불락」, pp. 62-63.)
이것은 어느 작중 인물의 독백인데, 동하는 지금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분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군자’(不慍而君子, 論語 學而篇)라는데, 동하는 정말로 분노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불처럼 분노하는 것을 보고 나는 기겁을 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나는 그와 함께 건대신문사에서 신문을 만든 적이 있었다. 암울하던 그 시절, 검열에 누더기가 된 벽돌 신문(검열로 글자가 깎여나가 마치 벽돌을 쌓 놓은 듯하여 그렇게 불렀다)을 만들 때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낭만도 조금은 있었고, 추억도 있다. 지금이야 전송(電送)하면 되지만, 그때는 학생 기자들을 몰고 신문사에 나가 조판-교열-OK를 놓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의 어느 날 신문사에서 신문을 만들던 한 학생이 삽화로 쓸 사진을 구하다가 신문사에 보관되어 있는 책에서 사진을 잘라내어 가져왔다. 그건 잘못한 일이었다. 신문사 자료실 기자가 그것을 알고 우리 편집실을 찾아와 그 학생을 모독하고 우리를 면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기자가 심했다. 그러자 사과하고 참고 참던 동하가 그 기자를 가로막고 싸우는데 불같이 노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가 그렇게 격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이 달라 보였다. 그 후로 나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동하에게 저런 구석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기왕에 고스톱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 악동들의 세속적 기쁨에 관한 몇 가지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건대신문사의 보직을 마친 후 몇 사람이 더 그 후임으로 왔고, 세월이 지나서도 우리는 옛날을 회상하며 친목회를 만들어 자주 만나고 있다. 우리의 회원으로는 건국대학교 신문방송사에서 보직을 맡아 봉직하다가 서울대학교가 우수 교수 유치 차원에서 낚아채 간 조남현과 변창구, 목포대학으로 떠난 이동하, 그리고 국장을 지낸 김택호와 한종석,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다. 우리는 남한산성 감나무집에도 자주 갔고, 때로는 여행도 다녔다.
유달아파트의 추억
그러던 어는 해 동하가 천리 먼 길 목포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우리는 떼거리로 내려갔다. 우리는 유달산을 바라보며 이난영의 노래도 불렀고, 연륙된 삼학도를 바라보며 분노하기도 했다. 이 여행 중에 우리는 동하네 유달아파트에서 묵었는데 무박 4일 동안 고스톱을 쳤다. 어찌나 바닥을 팼는지 아래층에서 잠 좀 자자고 컴프레인이 왔다. 우리의 추억은 홍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무박 4일 동안 어찌나 얼굴이 상했는지, 서울역에 내렸을 때 우리 중의 한 사람은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역전 파출소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적도 있다.
우리 클럽의 번외 멤버로는 홍신이를 빼놓을 수 없다. 택호 네 집 상가에 문상을 갔다가 또 고스톱이 붙었는데 그때 홍신이는 종석이에게 192점을 맞았다. 흔들어 피박에 쓰리고에 멍따를 맞아 12점에 열여섯 곱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흥분한 종석이가 계산을 잘못하여 96점 값만 받았다. 종석이는 덜 받았다고 툴툴거리고 4만 8천원을 한 번에 터지고 방방 뛰던 홍신이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가상 공간이 아닌 실전에서 192점이 난 것은 아마도 비공인 한국 최고 기록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해인가, 속리산에서 놀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데 바로 우리 앞에 달리던 돼지 운송차의 뒷문이 열리면서 고속도로 위에 돼지가 질펀하게 깔렸다. 돼지들은 바싹 뒤따르던 우리 차에 받혀 허공으로 날아다녔다. 노련한 버스 기사 덕분에 사고는 없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 그때 잘못되었더라면 스타 국회의원도 못 보았을 것이고 재사들의 비보가 지면을 장식했을는지도 모른다.
설악산콘도에 갔던 일도 우리의 추억으로 안주가 된다. 아마 30년 전쯤 되지 않았을까...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소매치기가 많던 시절이라 우리는 현금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동하는 속주머니에 돈을 넣고 그것도 부족하여 핀을 꼽고 있었다. 피박을 쓸 때마다 그 핀을 뽑고 돈을 꺼내는 일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그 방법으로 계산했다. 설악산 대첩도 부족하여 우리 집에 도착한 악동들은 다시 2차 대전을 벌였는데, 그 자리에서 동하는 다시 핀을 뽑을 일이 없게 되었다. 평민사 사장 김종찬에게 다 털렸기 때문이었다.
설악산 얘기를 하자면 나에게는 무안하고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나는 본시 술을 잘 먹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가끔은 주흥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설악산에 갈 그 무렵에 나는 가정사로 무척 마음 상해 있던 시절이었다. 속도 울적하던 터에 마실 줄 모르는 술을 통음(痛飮)한 후 나는 일행들 앞에서 울며불며 실수를 했다. 동하가 나를 껴안고 위로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도 무안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먹은 사람이 나에게 실수하는 것도 싫었지만 내가 남에게 실수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동하의 편지
나는 하루의 일과 중에서 편지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학생들에게 온 편지나 크리스마스 카드도 반드시 답장을 쓰자니 자연히 편지 쓰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저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쓰기까지에는 시간, 작문, 소비한 것이 많을 텐데 ... 하는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꼭 답장을 쓴다. 그리고 가급적 그 많은 편지를 보관하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지 중에는 당연히 동하의 편지도 있다. 내가 미국 유학 시절, 그는 단편소설 같은 편지를 보냈다. 외로운 독신 생활에 나는 그의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여전히 그 올챙이 글씨로 작품 쓰듯이 썼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 편지를 버릴 수 없었다. 문인들이 흔히 육필 원고 전시회를 열던데, 그때는 이 편지를 출품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았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오래 소식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약봉지를 늘 지니고 다니시던 것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됩니다. 매사에 건강 제일주의로 임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일 저녁에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프레지던트 호텔 19층에서였습니다. <현대문학> 창간 31주년을 기념하는 뜻을 지닌 식전이어서 하객들이 많았습니다마는, 저로서는 조남현, 조동민 교수를 비롯한 김[택호], 한[종석] 두 국장의 얼굴을 대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마음 흐뭇했습니다. 당연히 신 박사님도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다음 날 어느 자리에서 전상국 씨와 조정래 씨를 만나 거기서도 자연스럽게 신 박사님 얘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작가들에 대한 신 박사님의 각별한 애정에 대해 우리는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하였습니다.
사람은 늘 옆에 있을 때보다 떠나 있을 때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참인 것 같습니다. 불과 몇 개월의 세월입니다마는 우리 남은 패거리들은 자주 신 박사를 입에 올립니다. 얼마 전 저의 집에서 대회전을 한 차례 가졌을 때도 그랬습니다. 신 박사의 그 ‘뿔고’에 대해, 무분별한 열정에 대해, 거칠고 성가신(?) 매너에 대해 우리는 맹렬히 성토하면서, 그러나 참으로 그리워했습니다.
이번 수상 소감에서 저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불혹지년(不惑之年)’이란 것을 나는 꽤나 멀고 또 성숙된 나이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득 되돌아보니 이미 너덧 해나 지난 나이이고, 그런데도 삶의 어설픔, 어리석음은 여전할 따름이다 운운…. 인생의 바닥에 대한 상상력과 경험은 때로 사람을 천진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타인에게는 이 천진성이 곧 ‘철부지’ 쯤으로 비춰지는 터여서 자주 상처를 받아 피를 흘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부득불 이를 갈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세상에서 그것은 하나의 여유-순수성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 받으실 때쯤이면 다시 천리 길 출퇴근을 시작하고 있을 듯싶습니다. 시간과 공간 위를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삶의 본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기로 했습니다. 여름쯤에는 책이 나올 것 같습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1986년 2월 15일
과천에서 이동하
편지의 구절 중에서 ‘참으로 그리워했다.’는 말이 외로운 유학 생활 중인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가끔 이 편지를 읽어 본다.
필자 소개
건국대학교 정외과, 동 대학원 수료(정치학박사)/ 미국 조지타운대학 객원 교수/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및 대학원장 역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1999-2000)/ 현재 건국대학교 정외과 석좌교수
저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말개화사상연구> <한국정치사> <전봉준평전> <한국정치사상사> <한국의 정치사상가>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 <한국사 새로 보기> <이방인이 본 조선> <서재 채워 드릴까요(수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