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貪慾)에 대하여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여간 눈쌀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인터넷이 보급된 후 현실세계와 가상 세계가 마구잡이로 뒤섞이다보니 시간 개념이 무너진 것은 물론, 공간 개념까지도 대혼란이 일으킨다. 그러다보니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사건들이 천방지축으로 층생첩출(層生疊出) 하고 있다. 범죄 유형도 다양하다. 이런 현상을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디로 흘려갈지 매우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상황이 심각한데도 당국에서 내놓는 대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사회안전망이 무너지고 이해충돌이 심화되니 앞날이 걱정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일까. 그러 한 건 사람들이 물신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인명경시 풍조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한다. 그 본보기가 될 만한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고 도끼로 자기 발목을 찍은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돈이 자리잡고 .간혹은 원한이나 치정관계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돈에 팔려서 저질은 짓들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에 목숨 거는 천박한 풍토가 조성되었을까. 생각하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고 쓴웃음만 나온다. 돈문제가 나오니 옛날 이야기가 떠오른다.매품팔이를 하던 사람이 나붙은 방(訪)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매를 일곱 대를 맞으면 돈 열냥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매품팔이를 하면서 장 80대에 한냥을 받아본 것이 고작인데 상상도 안되는 너무나 큰 액수였다. 그는 돈을 받는 다면 함소입지(含笑入地) 하리라 하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형리가 첫 매를 내리쳤다. 예사 강도가 아니었다. 형리는 매번 매타작에 자원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강도를 더하여 내려쳤다. 나죽는다는 비명을 지른 그가 형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손가락을 하나를 펴서 보여주었으나 매질은 스그러들지 않았다. 또다시 손가락을 펴서 보이자 그제서야 매끝이 수월해 졌다. 그는 일어서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구나." 돈의 유혹과 돈이면 통하는 세태를 비꼬는 말이지만, 참으로 돈이란 것이 다 그러하다. 돈을 생각해 본다. 이것은 다른 이름으로는 아도물(阿賭物). 여기서 도'賭’자를 파(破)하면 재미있는 말이 된다. 즉 돈(貝)을 가진 사람(者)이 된다. 한데 이것은 영어로 money이니, 머니 머니 하다보면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뭐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그야말로 눈도 없고 발도 없다. 저 혼자서는 이동하지 못하고 소유상태로만 머무를 뿐이다. 한데, 이 돈은 묘하게도 붙잡으려 하면 달아 나고 어느 날 문득 주머니에 채워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돈에 목숨을 걸고 매달린다. 그렇지만 돈은 살아가며 필요한 것이지, 죽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 앞에서 사족을 못 쓰고 비굴해 지니 무슨 조화이며 마력인지 모른다. 돈은 현실에서 위력을 보인다. 송사(訟事)에서 뿐 아니라, 체면을 세워주는 무기가 된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 붙잡으려고 매달리고 안달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듯 하다. 수년 전, 어떤 죄인이 공판정에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를 외치며 소란을 피운 바람에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있다. 얼마나 돈 없는 설움을 당하고 돈에 의해 유무죄가 결정된다고 믿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하긴 옛말에도 천금이면 사형을 면하고 백금이면 태형을 면한다(千金不死 百金不刑)고 했다. 그만큼 돈은 예로부터 위력을 발휘해 왔다. 그만큼 돈의 위력의 연조는 깊다. 실제로 돈은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한다. 신분을 격상시켜주고 사람을 끌어 모으며 체면을 격상시켜주는 마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도 정의의 편에 서지를 않고 오히려 불의의 편에 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숱한 문제를 일으킨다. 축재(蓄財)는 돈을 무작위로 모으는 것이다. 이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탐욕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한편, 돈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서 이놈이 웅크린 반거는 구렁이 보다 더 음흉하고 이것이 쌓이면 악취를 풍긴다. 청빈(淸貧)과 탐욕을 생각해 본다. 청빈은 지니는 마음가짐이 깨끗한 삶이다. 그리고 탐욕은 물불 안가리는 지저분한 삶이다. 그야말로 돈(貝)을 나누어(分) 쓰고 사는 삶(貧)과 욕심껏 지금(今) 지니고 사는 삶(貪)의 차이는 천양지차의 모습이다. 청빈의 곁에 배려가 있다면, 탐욕의 곁에는 집착이 있을 뿐이다. 두 갈래의 삶은 출발부터 판이하다. 성경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고 가르치는 것은 축재에만 힘쓰지 말고 비록 어렵더라도 분복(分福)의 삶을 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은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끌어 모아 축재를 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으니 이게 문제다. 아흔아홉 개를 가지고도 만족을 못하여 100개를 채울 양으로 하나 가진 남의 것에 눈독을 들이니 어찌 탈이 나지 아니하며, 그래서야 어찌 바른 인생을 살 것인가. 예전에 어느 도시에서 야비한 수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에게 사채를 놓고는 만기가 될 즈음이 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수법으로 연체이자까지를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집의 가정부가 의문사한 변고가 발생했다. 그는 자기의 구속을 피해보려고 유력한 변호사를 선임하게 됐는데 모두 그 변호사를 두고 돈에 팔렸다며 수군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는 수전노(守錢奴)로 소문난 사람인데, 면 소재지에 살고 있어 사람 구하기 그리 어려운 환경이 아닌데도 막상 그가 죽어 출상을 하려고 상여를 맬 상여꾼을 찾아 나서니 도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을 누가 돈에 팔려 그런 걸 매느냐.’라고 외면해 버렸다. 그를 떠올리면 덴마크 속담 '이웃없이 지낼만큼 돈 많은 사람은 죽을때까지 아무도 없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영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근자에 가난한 사람이, 아니 과거 어렵게 살았던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선행을 하여 감동을 안겨주는 사례를 가끔 본다. 평생 삯바느질과 행상으로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기금으로 내놓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숨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의 얘기도 더러 듣는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두 갈래의 인생을 생각해 보게 된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곱씹어 보게 된다. 속담에 돈은 거지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 거지처럼 벌라고 해서 토색질을 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탐욕에 눈먼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부리니 문제다. 고전 속의 대표적 탐욕의 화신은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일 것이다. 박씨를 물어다준 보은으로 부자가 되자 그래도 동생은 형을 생각하여 화초장 하나를 내어준다. 한데, 놀부는 동생이 혹여 변심이라도 할까 봐 자기가 기어이 가져가겠다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지 않던가. 그 꼬락서니라니…. 이렇듯 탐욕이 심한 자는 분수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전교(錢驕)나 일삼으며 남을 업신여긴다. 옛 선비들은 돈이란 그저 구차하지 않게 먹고 입는 정도면 족하다 여기고 살았다. 그런 정신을 좀 배우고 살 수는 없을까. 나는 물불 안 가리고 돈을 모은 사람들이 잘 사는 걸 보지 못하였다. 자기는 수전노 취급을 받아가며 재산을 모았으나, 물려받은 자식이 지키지 못하고 탕진해버리는 것을 많이 보았다. 공자님은 일찍이‘앙부괴어천, 부불작어인(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즉, 하늘을 보나 땅을 굽어보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도 유효하지 않는가 한다. 사람은 어차피 편도의 길을 일회성으로 살다가는 존재이다. 불가역적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도 100년을 채우지 못한다. 그런 마당에 치부에 열을 올리고 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삶일까. 현대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너무나 갈급증에 시달리는 거 같다. 그런 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인문정신의 쇠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여간 딱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다. (2000) |
첫댓글 뭐니 뭐니해도 머니가 치고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돌고 돈다하여 돈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돈 앞에서는 누구나 이성을 잃고 돌게 되니 돈이라는 이름이 생기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나 평생 고생하여 모은 거금을 장학금으로 선뜻 기부했다는 어느 할머니의 소식을 듣는 날엔 감동에 젖어있다가도
자괴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수전노들, 남의 궁핍을 딛고 재물을 취하는 족속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기도 합니다. 경주 최부자가 후손에게 남겼다는 말중에 '어려운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말라'는 말이 대비되어 떠오르곤 합니다.
이관희 평론가의 <창작에세이>목록에 수록된 작품.
돈이 없었다면 여전히 물물교환을 했어야 하니 돈이라는 것이 참 편리한 것이긴 합니다. 지금은 숫자에 불과하고 웬만하면 카드로 결제를 하니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죠. 돈이 많아도 더 많은 돈을 좇아가고 돈이 너무 없어도 돈에 쫓기니 필요한 만큼만 빼고 나누는 삶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게 현실이지 싶습니다.
살면서 수전노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못먹고 아끼면서 움켜쥐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잘못된 생각이지요.자기도 비싼밥 한번 사먹고 남에게 차한잔이라도 사면서 사는 것이 공덛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