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도 노산 산행기
2006년 2월 7일 화요일
아침. 어제 내리던 눈이 아직도 계속 내린다. 이제는 함박눈으로 변했다. 집으로 전화했더니 한국도 대설주의보가 발령되고 폭설이 내려 걱정을 많이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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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가 지나 청도(靑島)에 가까워지자 눈은 그치고 도로에 눈이 녹고 있다. 청도가 어제 우리가 묵었던 烟台보다 따뜻하다는 뜻이다. 멀리 왼편으로 노산(嶗山)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워낙 넓은 평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때문인지 1133m의 높이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저 600~700m 정도밖에 안되어 보인다. 기다랗게 누운 거대한 산맥이다. 巖山이다.
곳곳에 ‘創建文明城市’ 등 비슷한 내용의 개발을 독려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는 중국은 한국의 60~70년대 새마을운동이나 국가재건운동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이 거대한 나라 중국이 긴 잠에서 깨어나 무서운 동력과 무서운 속력으로 개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퇴보를 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한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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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 후 산행 기점으로 이동. 오후 4시 20분에 산행을 시작하다. 烟台에서 靑島까지 오는데 폭설을 뚫고 거북이걸음으로 기어오느라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버렸다. 워낙 늦은 시각이고, 며칠째 계속 내린 눈이 많이 쌓여 있고, 영하의 기온이 차디찬데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등산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탓도 있으리라. 여하튼 매표소는 이미 문을 닫아 근무하는 직원도 없다.
겨울 오후 4시20분. 벌써 저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추운 날씨, 하산을 완료해야 할 시각에 우리는 반대로 등산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왕 이국만리를 왔는데 산 중턱까지라도, 아니 갈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서 이 명산의 맛이나마 직접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발걸음을 서두른다. 눈 덮인 길은 얼어 빙판을 이루었고, 바람은 매서워 잠시라도 후드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귀와 볼이 얼어 떨어질 것만 같다. 몇 명은 아예 처음부터 등산을 포기하고 기점 버스 속에 남았다. --- 대장은 잠시 잠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짧은 순간에도 손가락이 얼어붙어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고 엄살(?)이다. 내 등산복의 지퍼 손잡이도 얼어서 깨져버렸다. 정말 대단한 추위다.
듣던 대로 嶗山은 역시 크고 아름다운 산이다. 점점 걸어 들어갈수록 큰산이 주는 중량감과 깊이가 느껴지고 멀리 암봉들이 절경을 이룬다. 일몰이 멀지 않았으니 날이 저물기 전에 명산의 승경(勝景)을 조금이라도 더 감상할 욕심에 저마다 발걸음이 바쁘다.
九水十八潭 이라 했는데 四水를 겨우 지나 첫 정자가 있는 곳에서 이제 그만 아쉽지만 산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쪽 아름다운 산봉우리 위로 찬란한 석양이 잠시 여운을 남기는가 싶더니 이내 사위가 어두워져 온다. 아쉽기 짝이 없다. 해드랜턴을 켜고 야간 산행을 하자는 극성파도 있지만, 초행인데다가 많은 눈에 덮여 등산로도 잘 분간이 되지 않고, 길이 너무 미끄러워 위험하기도 하고, 너무 늦어지면 걱정하며 기다릴 기점의 다른 대원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둘러 하산길에 접어드는데 깊은 산이라 어둠은 빠른 속도로 짙어지고 길은 미끄럽게 얼어붙은 빙판이라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반달이 채 못 되는 달빛이 사방을 뒤덮은 눈에 반사되어 그나마 하산길을 훤히 비춰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맞바람을 안고 걷는데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내리막길인데도 몸이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눈 위를 지나쳐 불어오는 雪寒風이 매섭기 그지없어 마스크를 착용했는데도 볼이 얼어붙는 것 같다.
半 登 嶗 山
我來萬里登嶗山
冬日半許遲客入
暮山落照一片情
月下歸路寒風多
노산을 반밖에 못 오르고
노산을 오르고자 만리길을 왔는데
겨울해 늦어 나그네 입산 반만 허락하네
저무는 산 낙조에 아쉬운 정 한 조각 남겨놓고
달빛 밟으며 돌아오는 길 찬바람만 매섭더라.
늦은 밤 눈 쌓인 영하의 겨울산. 달빛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기점 버스 속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이 걱정했다며 반겨준다. 밤이 늦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혹 조난이라도 당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을 많이 했단다. 다시 히터가 켜진 버스에 오르니 마치 내 집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하고 아늑하다.
언 몸을 녹여가며 다시 청도 시내로 들어와 저녁 식당인 ‘한국관’에서 오랜만에 삼겹살구이를 겻들인 한식메뉴에 진로 소주로 하루의 추위와 피로를 푼다. 혀가 아리도록 맵고 짠 김치찌개. 역시 우리 한국 음식은 얼큰하고 화끈해서 좋다.
폭설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반밖에 오르지 못한 아쉬운 노산 산행. 그러나 석양과 어둠 속에 매서운 겨울바람 맞으며, 눈 위에 부서지는 달빛 밟으며 용기와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던 이번 노산 산행은 오래 잊지 못할 특별한 맛이었다.
***
2년 전 여행 수첩에 적었던 일기 형식의 글을 감히 산행기라는 제목으로 부끄러움 무릅쓰고 올려보는 것은 우리 1460의 월례산행에 조금이나마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요, 나아가 네팔 안나-행 참여를 위한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 때문이랍니다.
댓글 :
박정대 지교장이 읊은 한시는 언제 읽어도 그 서정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저무는
낙조에정 조각 남겨 놓고. 달빛 밟으며... 하아! 정말 좋다. 2008-09-08
이영주 눈덮인 산을 반밖에가 아니라 반이나 오른 교림씨와 그 일행들의 산사랑이 좋았 니다,
산행기로 1460동기들에게 좋은 글 선사한 것 감사하고요. 한시의 매력은 더 없이 아름
다워요. 이 글 읽고서 안나행에 많은 동참을 기대합니다. 2008-09-08
전용석 교림아 모처럼의 기회를 반밖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컸겠다. 그러나 이젠 정상
정복도 중요하지만 새로움에 도전하는 열정 같은 그 자체가 더 중요 하지 않 을까란 생
각도 들어...교림이의 한시...이걸 좀 어떻게 해봐야 할 텐데... 2008-09-08 19:43:16
이윤주 설한풍 속의 지난한 등산도 대단하지만 저는 한시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저무는 산
낙조에 정 한 조각 남겨 놓고/달빛 밟으며 돌아오는 길 .....
아! 정말 멋이 철철 넘칩니다. . 2008-09-09 09:24:08
장무웅 영문학, 한학, 등산학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의 영역에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지 교장에게서, 멋진 등반곡을 듣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어진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참으로 훈훈해 집니다.
최정자 눈도 깜짝 않고 읽어 내려갔네요. 등산도 놀랍고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글 솜씨 감탄
감탄이오. 교림씨 멋있어 보인다아 ~~~~~ 2008-09-09 17:46:44
이수자 멋진 산행을 숨 가쁘게 따라가니 거기에 아름다운 석양도 있고 달빛이 비치는 한 편의
멋진 한시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2008-09-10 11:06:17
유순자 잔잔하게 물 흐르듯 자연스레 써내려간 글솜씨, 그로인해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파노라마...거기에다 아름답고 운치 있는, 한 가닥 외로움 느껴지는 한시...정 말 대단하
십니다! 2008-09-11 05: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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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추미각에서 추어탕 먹으면서 지나간 해외산행 얘기가 나와 잠시 키나발루며 중국 등 추억여행을 했었었지요? 집에 돌아와 옛 기록 뒤적이다가 08년 사범학교 동기들과 안나푸르나트레킹을 앞두고 망설이는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자 동기회 카페에 올렸던 글이 있기에 옮겨봅니다. 재미를 더하고자 친구들의 댓글도 같이 실어봤습니다. 노년에 친구들과 카페에서 서로의 글 나누어 읽는 재미도 괜찮더군요.
첫댓글 생각납니다 눈내리고 어둑해지는저녁,,,버스속에서 걱정하던,,,5년전에남겨둔추억
등산은 완등해야만 맛이 나는 시절은 소싯적이고 이젠 등산 자체를 즐기고 아쉬움도 또한 남겨두는 즐거움인 듯 합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선하고 매서운 추위속에도 따뜻한 마음들이 느껴집니다.
한시는 볼(?)수록 멋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