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6탄
('68 사학. 홍광택)
호미회 나그네가 들려 드리는 기막힌 야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다들 휴가 잘 다녀 오시고 휴가철이 중간에 끼어
봄에 시작한 야그가 가을의 문턱에까지 이르렀군요
가끔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아사리판 같은 사바세상을 벗어나 자기만의
호젓한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가를 가는 것 아닐까요
어떤 선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 마음 속 보다 고요 한곳은 없다
사람들은 가장 호젓한 곳을 옆구리에 끼고 살지만 더 좋은 곳, 더 좋은 곳만을 원하죠"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소로우'라는 사람은 하바드를 나올정도의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매사츄세츠주의 보스턴 근교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시쳇말로 초야에 묻혀 호젓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 소로우라는 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간소하고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데 그대의 일을 두가지나 세가지로
줄일 것이며 그대의 일을 백가지나 천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 명료 해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요즘 TV 프로는 구매력이 크다는 어린이 젊은이들 위주로 편성되어 천박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래도 가끔 볼만한 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한국의 미" "현대 인물 전" 참 좋은 프로 입니다
로드 다큐 "그곳에 가보고 싶다" 가끔 제가 좋아서 보는 프로입니다
얼마전 콧수염 있는 유명한 성악가와 강원도 정선인가에서 찍은 프로였는데
거기에는 매주 좋은 시가 한편씩 소개 되었는데 기록을 하지못해 자세히는 전달 하지 못하나
우리 회원님 들께 꼭 들려 드리고 싶어 최면 상태에서 어렵사리 기억한 시의
내용은 대강 이렀습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인적이 끊긴 그 역에 내리고 싶다
그 산골 그 계곡에 가보고 싶다
누구를 몹시 그리워 하고 증오 하는 것은
자기를 태우는 일이라 했거늘 ...........
이시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부군"이라는 소설 영화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죠
주인공중 한 사람이 지리산에서 총을 맞고 높이 솟구쳤다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윗주머니있던 수첩에서 사진이 튕겨 나오면서 풍지박산되는데
그사진 속에는 이런 난리는꿈도 꾸지 못했던 평화시에 남녀 고향 친구
들과 여럿이서 웃고 찍은 사진과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친구들은
아무도 없는 비참한 이 산속에서 죽는 이주인공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군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이 골짜기에서 따뜻한 체온이 그 체온으로서
공부도 하고 사랑도 하고 사색도 했을 그 체온이 서서히 식어 이세상을
떠나는 한 인간의 종말을 말입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역사는 해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버린 것을 날줄로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을 씨줄로 하는 교직이라는 옷감이다
서화회 야사라고 많은 회원님의 성원속에 쓸려고 보니까
고기만 먹으면 음식으로서 품위가 없어 서양 음식중 코스요리를 먹다 보면"엥뜨랑스"라는게
나오는데 고기 먹는걸 엥뜨랑스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시작이라는 소린데 요리 코스 중 시작이 중간에 나오는지 의아해
하신 회원님 계셨다면 그분 굉장히 예민한 분입니다
원래는 살기 바빠 고기라는 단일 품목을 후적후적 먹다가 어느정도 삶의
여유가 생기자 음식 요리 코스도 동양 중국 요리의 영향을 받았슴인지
하여튼 고기요리 앞에 전채 요리 엥뜨랑스 후에 데져트등 후식 요리를 붙여
과일 포도주 등도 곁들여 음식 코스를 품위있게 정격화 했다는 야그 아닝가요
그래서 처음 고기요리가 중간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건데 그래도 계속
"엥뜨랑스"라고 불린거죠
뜬금없이 요리코스 얘기가 나온 것은 서화회 야사도 서화회 스토리 일부와
재미있는 야그를 매취 시켜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는 의욕이 있었다는
야그를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사실 나그네 야그는 단발로 끝날 얘기였습니다
어느날 영천으로부터 호미회 소식 전해 듣다가 자기의 홈피에 나의 사진도
많이 들어 있으니 들려달라고 해서 광고를 하지않아 홈피가 있는 줄
잘 몰랐고 들어가 보니 공들여 만든 홈피에 방문록에 홈피 주인이 방문록을
쓰는 경우가 많아 개똥도 가끔 약에 쓴다고 내가 몇 자 수고하면 홈피가
풍부 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자 갈긴건데 역시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이
고루 어울리면 자연 풍부해진다고 생각 됩니다
똑같은 사람만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으며 발전이 있을가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처럼 텃세가 쎈 곳도 없다는군요
화교가 발 붙이지 못한 곳이 우리나라 뿐이라는 야그 아시지요
가끔 굴러 온돌이 박힌돌 뺀다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결국
굴러온 돌도 어느덧 박힌돌이 되어 또 굴러 온돌에 뽑혀 역사는
발전하는 것 아닌가요 영원한 승자는 없습니다
우리 호미회 홈피도 똑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으며 풍부 하지도 않고
발전도 자극도 없겠죠
색다른 사람이 들어오는걸 싫어 하는것 같은 배타적인 슬픈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이해관계만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해마다 휴가철이면 TV 나 신문 화면에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꼭 나옵니다
수만 명의 해수욕객이 물반 사람반 70년대 대통령 선거 유세때 청중들 모습과
왜 그렇게 흡사한지 우리나라 인구 밀도가 세계적이라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선진국의 피서지 예를 들면 호주 ‘골드 코스트’ 등과 다른 모습입니다
스트레스를 풀러가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오지 않을지 염려 되고요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의도적으로 사람 많은 곳에 사람구경 하러 갔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피서 문화도 이제 바뀔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유원 화백의 홈피에 올린 휴가 작품은 한가로워 보기 좋았습니다
내가 열여덟 나이에 객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아무 것도 모를 어린나이였습니다 남들은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나는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게 몹시 괴로웠습니다
해가 설풋 넘어가는 해질녁에는 아랫녁 말로 본병이 도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객지 생활 오래 하고 혼자 오래산 남자 또는 여자들은
독특한 버릇 한가지 쯤은 갖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하숙집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초저녁에 본병이 도져 갑자기 일어나
공부는 고사 하고 어디론가 쏘다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를
덜어 내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무렵에 나에게 다가 온 것이 서화회였습니다
구세주였죠 내마음의 뻥 뚤린 허전함을 어느 정도 메꿔 주었죠
학교와 하숙집만 있는 단조로운 루트에 중간에 서화회가 있어
부모 역할도 하고 형제 역할도 하고 룸메이트 역할도 하고 애인 역할도 하고
그래서 나는 서화회를 잊지 못하고 정도 남보다 각별합니다
이해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음악도 그렀습니다 처음엔 시계추와같이 똑딱 똑딱 이박자의 단순한
음악이 있었지만 삼박자의"왈쓰 쿵짝작 쿵짝작하는 율동적인 춤곡이 나오면서
음악 혁명이 일어나 그 경쾌함이라니 덕분에 많은 건전한 가정이
깨지는 불상사가 있기는 했지만 하여튼 학교 집 직장 가정 이러니
너무 단조럽더란 얘기죠 그래 교회도 생기고 사교 클럽도 생기고 호미회도
생기고 호미회 홈피표지에 보면 분명히 그림과글씨를 사랑하는 고대 서화회
졸업생들의 모임입니다 하고
사랑 밑에 줄긋고 분명 사랑을 강조하면서 시작 하고 있지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국시로 생각하고 5.16 혁명공약같이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호미회 홈피는 정치 하는곳도 아니고 학술 발표회도 아니고 문단의 등용문은
더욱 아니고유니셒같이 국제구호 기구도 아니고 회원들의 친목 도모하는 단순 모임...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핸들을 잡고..
대학교 수업이라는게 계속 연달아 있는게 아니어서 중간에 빠지는 시간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때는 4층 서화회가 딱이었습니다
다방이나 당구장도 요즘처럼 자주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그 당시 한학번의 서화회 회원이 현재 주소록을 보면 3-4명이면 많은거죠
74-75 학번 쯤되니까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76학번정도 가면 한학번의
서화회 동기가 많은 경우는 20명도 넘는 양적 팽창을 하게 됩니다
학교도 단과 대학을 늘려 발전하고 정부의 경제개발의 열매를 어느 정도
따는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서화회 회원도 여러찔인 것이 날마다 들리는 골수분자 중독된 남녀 회원들
2-3 일에 한번 나오는 중독 전단계에 있는열심 당원들
7일에 한번 나오는 주일 학교 파 15일에 한 번 나오는 뭐 재밌는 일 없나파
굿::을 한다고 광고를 하고 전화를 해야 겨우 나오는 6.25 직후에
또는 크리스 마스 때 구호 물자 탈 때만 교회 나오는할렐루야 파
내가 재학중엔 회장만 겨우 있고 서로 회장도 안할려고 미루는
역사 책에 나오는 삼황 오제 또는 요 순 시대같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회원이 많아 지면서 회원 관리를 위해 부득히
회장 부회장 홍보실장 화실장 서실장 중전 마마 분파가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때는 중전마마 같은 것은 없었고 혹 터주대감은 있었어도 말입니다
얼마전에 나하고 같은과를 졸업한 친구가 사업상 오랜만에 만나 우연히
호미회 홈피를 본 모양입니다
재학중에 많은 써클이 명멸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모임은
그렇게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호미회 홈피 주소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호미회 회원은 그래도
대단한 끈기의 사람이라고 생각 되는군요
한국의 TV 드라마가 진부한 것은 똑같은 배우에 똑같은 얘기에
세속에 지친 사람들에게 너무 세속적인 얘기만 한다는 것이고 가끔 양념으로
헛소리도 필요한 것이고 환상적인 얘기도 가끔 필요한 법인데.....
한때 유홍준교수라는분이 쓴 문화유산 답사기란 책이 초 베스트 쎌러가
된 적 있는데 그 분강의나 글쓰는 비결을 보면 사람이 강의를 듣거나 글을 읽을때
긴장하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20분정도 지나면 긴장이 풀려
초등학생같으면 옆 친구를 건드린다든지 장난을 한다던지 그래서 중간에
다시 긴장을 하게 하거나 재미있는 혹은 쓸때없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나 하여튼 비슷한
얘기가 계속되는 지루함을 개선시켜주는게 필요 하다는거죠
자칫 잘못하면 쓸데없는 야그를 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고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초보자가 고수 고단자를 잘못 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쓸데 없는 것의 위대함 '노자나 장자‘가 수천년전에 이미 갈파한 대목이 아닙니까
회원중에는 글씨를 잘쓰는 사람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 그림과 글씨는 별로지만
잡기에 능한 사람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악기 잘 다루는 사람 이도 저도 아니지만
서화회의 끈끈한 정에 미쳐 심취한 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 서화회는
재미도 있었고 정도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김영명의 클라식 키타 아람브라 궁의 추억을 한번 듣고 넘어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군요 김영명은 그때 법대 재학생이었고 아람브라궁은 아랍족
무어인들이 지금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을때
그 무어인들이 지은 궁인데 유럽대륙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아랍풍의 건물인데 그정원이 그렇게 환상적이랍니다
새가 울지 않는 숲은 얼마나 적막하겟습니까
새중에도 참새 뜸북새 봉황새 머슴새 소쩍새 꿩 노란부리새 온갖 잡새들이 날아와
숲은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며 작은 우주의 오케스트라가 되지 않을까요
얼마전 전철을 타고 가는데 초등학교 4-5학년쯤 되는 대여섯명의 남녀 아이들이
한강변 수영장에라도 방학이라서 가는지 어른들 눈치보지 않고 떠들썩 얘기 합니다
한아이가 재미있는 얘기라며 말을 꺼냅니다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어떤 남자가 떨어졌는데 약간 다치고 죽지는 않았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남자는 제비족이었다는거야
같은장소에서 어떤여자가 또 떨어졌는데 찰과상만 입고 안죽었다는거야
알고 보니 그여자는 평소에 날라리 였다는구만
얼마후 그장소에서 중학생 여러명이 떨어 졌는데 역시 팔만 조금 부러지고
멀쩡하드래 알고보니 그네들은 비행 청소년이었다는거야 폭주족이었으면 죽었을거야
썰렁한 전철간도 이런 천진한 아이들이 있어 탈만 한건지도 모르죠
어린 아이들도 시사성있는 야그를 하면서 자연스레 세상을 배우는거죠
미국에서도 한때 돈때문이 아니고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때문에 추락하는 아이들이
많아 추락신드럼이 있었다는 야그 아시나요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 하여 슈퍼맨 흉내내며 추락하는 사고가 빈발하자
어린이 옷만드는 회사에 비상이 걸려 옷에 이런 문구를 표기하기에 이르렀다는군요
이 옷을 입고는 절대로 날 수가 없음 임의로 날다가 사고가 날 경우 본사는
책임을 절대 지지 않음.... 날라리 췰드런 크로스 컴 패 니
달포전에 재익형이 '호미회야사 편집진'에게 수고한다고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사동'하얀김 푸른네'에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조담이도 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독일 갈일이 생겼다고 안왔고 두일이 내외도 오기로 했었는데 사업상 바쁜일이 생겨
영천 문기 터줏대감 강진환 건수 재익형 나 등등이 참석한 자리였는데
문기는 터줏대감과 한집에 사니 날마다 호미회 모임이니 부럽기도 했고요
재익형이 회상하는 예날 문기 얘기가 나와 한바탕 웃었습니다
문기는 술을 굉장히 즐기는 편이고 잘먹어 선배들이 시내에서 술자리가 있을 경우
자주 참석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선배들 따라 시내에서 늦게까지 술을 들고
안암동 하숙집으로 오는데 깜빡 졸아 눈을 떠 보니 미아리 종점이더란 얘기죠
그래 다시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안암동으로 오는데 또 깜빡하여 눈을 떠 보니
청파동인가 어딘가 하여튼 좀점이더라는거죠
몇 번 그러다 날 샛다는 야그
한번은 학교 앞에서 술을 잔뜩 먹고 구불구불 골목길을 지나 제기동 하숙집까지
갈 자신이 없어 학교 코앞 재익형 자취방으로 엎혀가다 싶이 했는데 재익형이 자다가
낙수물 소리가 하도 크게 나서 꿈에 박연폭포에라도 왔나 싶어 방문쪽을 보니
집이 하도 작다보니 문기가 취중 비몽 사몽간에 문턱에 서서 생리적인 방사를 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 물길이 주인집 나들 창문에 집중적으로 부딪히면서 폭포소리가
났다는 야그 아닙니까
재익형은 자취집에서 방빼라고 할까 겁먹었는데
한참 후 주인아줌마가 그 밤중에 소낙비 오는줄 알고 빨래 걷으러 나오드라는
야그 아닙니까
고대 연대 서화회 합동 쪼인트굿 사건 이후에 연대 대강당에서 라트라비아타 공연이
있었는데 연대 서화회에서 초청이 있었는지 하여튼 재익형 문기 터줏대감 등등
신촌 나들이를 모처럼 하였는데 문기는 그전날 건축과 투시도 찐한 숙제가 있었는지
하여튼 피곤한 상태였는지 공연중에 잠깐 졸았던 모양이라
오페라 라는게
관심이 많은 사람을 제외 하면 썩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기도 하지만
재익형이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 캄캄한 밤이었지만 문기에게 공연 관람 소감을 묻자
자기는 우체부가 편지를 갖다주는 소리 편지요.... 하는 대목만 기억날뿐이라는거죠
그러면서 하는 얘기 오페라 구경은 이것이 재미없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하더랍니다
요즘 경제가 무척 안좋아 사람들은 IMF때 보다 더 나쁘다고 걱정들 합니다
사회적인 모순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더욱 어수선한 것 같습니다
흡연률 세계 최고수준 음주량 세계 최고 수준 이혼률 세계1위 이민 희망자
세계 수준 출산율 세계최저 수준 고령화 진행속도 세계수준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 일견 하면 희망이 안보이는 것 아닌지 걱정됩니다
한마디로 스트레스 세계 최고 수준이고 살기 어려운 나라라는 야그아닙니까
옛날얘기이긴합니다만 광화문 어느외국의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을 잘 아는
한국에 오래 살아 지한파이기도한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용비어천가에 능통할 정도로 한국 말도 잘했습니다
그분이 출근하다 보면 이해 하지 못하는 장면을 가끔 본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탈 때 한국사람은 그 차를 못 타더라도 5분정도만 기다리면
다음차가 도착하면 그 차를 타도 될텐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타는걸 이해를
못하여 자기 나름대로 연구 한 결과 한국 사람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6.25 때
흥남 철수 1.4 후퇴같은 막차의식 이 차 놓치면 나는 죽는다는 위기 의식이
자나깨나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얼마나 서글픈 얘기입니까
어떤 학자가 계산해 보니 9개월에 한번씩 외적의 침입이 있어 난리가 났다는 얘기 아닙니까
보따리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야그 들어 보셨나요
피난갈 때 쓰는 세계적인 발명품 아닙니까
임진 왜란때 충주 어디께쯤 5열 종대로 행군하여 왜놈들이 쳐들어 오고 있을때
중앙 정부 건물인 경복궁은 이미 불타고 있었씁니다
왕을 비롯한 정부 고위관료는 수도권 방위 계획 결사 항전은 고사하고 이미
황해도 어디께쯤 도망가고 있었씁니다 이것이 지도자 지배자들의 모습입니까
민초 백성들의 배신감이 하늘을 찔럿습니다 흥분한 백성들이 자기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우리를 착취하고 뺏어가고 할 때는
유사시에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줄지 알고 그 혹독한 아픔을 참은 것 아니냐
단물만 빼먹고 너희 한목숨 살자고 도망가면 너희들의 존재 이유가 뭐냐
이부분이 서양 중세 영주들이 착취는 했지만 자기 백성은 굳건히 지킬려고 애쓴 전통과
일본의 영주들이 세금도 걷고자고나면 전투도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크게 다치지 않게
노력한다는점이 많이 다른것같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특권을 누린만큼 비겁하지않게 의무를 다하고 백성들 앞에서도
추한 모습 보이지 않게 남자답게 떳떳하게 우리 역사에는 그런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1차 2차 대전때 전사한 장교들의 3-40%는 귀족 출신이었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얘기..
우리는 치사하게 절대 공밥 먹지 않고 특권도 공짜로 누리지 않고 제값을 치룬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우리 역사에서는 양반자제는 군대에 가지않았씁니다 좋은 쇠로는 못을 만들지 않는다든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던가
80 년대의 아픔에서도 이런 역사는 반복됩니다
임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이라는 책이 있는데 16권 7책으로된
임란 야사입니다 이 책이 너무 중요하여 국보 132호로 지정될 정도 책입니다
이책에 보면 평소 단물만 빼먹던 양반들은 거의 왕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압록강 넘어
도망갔을때 왜놈에게 죽고 겁탈당하고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싸운 사람은 무지렁이
민초들이었는데 그통에도 중앙 정부의 군인들이 하는 일이란 의병이나 승병들이
분발하여 아무런 보급이나 후방지원 없이 싸우고 있는 그 사람들을 조정을
전복할려는 위험이 있는 불순 분자라며 처형하고 다녔다고 그 당시 국무총리는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적에게 한없이 약하고 백성에게 한없이 강한 이 지배자들을 보세요
오늘 우리의 아픔은 이렇게 뿌리가 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자살했다는 얘기 들어 보셨나요 고의로 권총으로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투중에 함대 사령관이 방탄 갑옷을 입지 않고 철릭이라는
얇은 전투복만 입고 조총 탄환이 빗발치는 함교에 서있었다면 자살로 봐야 한다는
많은 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학설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전투에서 죽었고 요즘말로 하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므로 대통령이라도
출마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그 전투중에 압록강 넘어 도망간 정부로부터 모함을 받고
간신배들의 탄압과 가혹행위 조정이 수복되면 공을 시기한 간신배들의 농간을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패 신화의 이위대한 장군도 쥐새끼같은 간신배 들에게는 재간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일제시대 친일 분자들이 광복후에 갑자기 애국자로 돌변하여 독립군은 3대를
빌어 먹어도 떵떵거리고 살도록 내버려둔 역사는 조선시대나 그제나 오늘이나
계속되는데...
미국LA 에서 흑인 폭동 났을 때 한국 교포가 운영 하는 상가가 쑥대밭이 된 적 있었죠
거기서 멀지않은곳에 "리틀 도꾜"라고 재패니스 타운 이 있었는데
거기는 의외로 멀쩡 했다는군요
흑 이들이 거기를 손대면"일본 야쿠샤"들이 즉각 보복을 하기 때문에 흑인들이
두려워 하여 행동에 옮기지 않고 영주권이 없거나 불법조업하거나 하는 한국 사람을
한국사람이 앞장서서 밀고하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것을 흑인들이 잘 알기 때문에
코리아 타운을 목표로 삼았다는 슬픈 야그
반면 중국 교포나 일본 교포는 불법 교포가 있으면 자립 할 때까지 도와 주고
변호사도 무료로 대주고 영주권 딸 때까지 적극 지원 해주는 의리를 발휘 한다는 부러운 야그
독일은 패전하여 독일이 동서로 나뉘어 졌지만 우리는 일본놈 농간에 죄없는
한국이 재물이 되어 이웃 잘못 둔 죄로 남북이 사생결단 동족끼리 피를 흘리고
여야가 사생결단 노사가 사생결단 민족의 저력을 갉아 먹는데
우리는 우수한 민족인데도 무엇이던지 극단으로 치닫는 단점이 많아
사상이 그렇고 유교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고 빈부 격차가 그렇고 지역 갈등이 그렇고
바람잘 날 없으니 어디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하니 백낙천의 주진촌시 34운을 한번 듣고 넘어 갈까요
고을이 멀어 관 청의 일이 적고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재물이 있어도 장사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갈 일이 없네
집집 마다 농사 일을 하면서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죽어서도 주진촌 흙이 되네
밭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서로 쳐다보며 어찌그리 즐거운가
한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대대로 서로 혼인을 한다네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노닌다네
황계와 백주로
열흘이 멀다하고 즐기네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 없고
시집가고 장가 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이런 까닭에 장수 하는 사람이 많아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무릉도원이요 별유 천지 비인간이군요
이런 곳에서 며칠만 살았으면 원 없겠습니다
시름도 걱정도 욕망도 집착도 모두 훌훌 털어 버리고
제대하고나서 직장에 다닐때던가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는때도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들 가지고
쉬는날이었겠죠 인천 차이나 타운있는 높은 계단있는 곳으로
수채화 그리러 간 일 생각 납니다
전철 타고 여러명이 갔습니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인가에 그림 그리러 간 일 있었고
두일 영천 정섭 등과 같이 간 것같고..
졸업하기 전 국어 교양과목 숙제를 도와준 인연으로
군대 있을때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 중국어 첫걸음이라는 책
보내준 원예과 여학생 있었는데 요즘 생각해 보면 핸드폰도 없던
그 당시 어찌 연락을 했을까 짐작이 잘 안됩니다
붓글씨도 열심히 쓰던 서실 여학생이었는데 어찌 어찌 연락이 되어
제대 후에 극장 구경 책 보내 주어 고맙다는 보답 한적도 있었고..
군대 3년이 얼마나 많은 남녀의 결합을 뒤바꿔 놨을지 생각하면
가슴 아픔니다
팔자에 없는 부부가 많다는 야그 꿩 대신 닭으로
고무신 거꾸로 신고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는 신무기도 없던 터에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연락을 방해하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남녀의 결합을 뒤틀리게
했을지 생각하면 시대의 아픔이 너무 큼니다
Y라는 화실 여학생이 있었는데 내가 4학년때 1학년이었씁니다
글도 잘 써 석탑 신문에 가끔 투고 된 내용이 나오기도 했죠
어리기는 하지만 깔끔하고 멋쟁이 학생이었씁니다
졸업식때 노란집 앞에서 전성기 학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내가 군대 제대하고 어찌 어찌 연락이 되어 경기도 양평인가
학교 선생님 하는 곳으로 놀러 간 기억도 나고... 나중에는 인천에서
선생님 한다는 소식만 듣고 볼 기회가 없었군요
원예과 나온 여학생으로 미도파 백화점에 근무하던 서실 후배가
있었는데 우연히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만난 적도 있었고 ..
이문 설렁탕을 아시나요 80년대 우리 호미회의 정기적인 만남의
장소였으며 그 옆에 고대 동문회 회관도 있었고 종로 골목의
피마골 골목처럼 고풍 스러운 것이 설렁탕 술맛은 별로 였으나
분위기만은 괜찮아 한동안 우리 추억의 본부 역할을 했습니다
졸업하고 한참 직장 생활 할 때 시민회관에서 호미회 미전 한일 생각나고
오천선배가 지도하는 글쓰는 학생들 작품과 함께 전시한 기억도
납니다
언젠가 한번은 의명형 아시는 분이 불광동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는데
조담이 나 의명형 그 초등학교에 가서 "환경 미환가 뭔가"한다고
그림을 왕창 그려주고 온 적도 있었죠
86년도 쯤인가 광화문에 있는 시민회관 부근 식당에 오랬만에
호미회 식구들이 많이 모여 재익형을 회장 내가 총무 그렇게 뽑고 잘해
보자고 했으나 그때만해도 나이로 봐서 모두 바쁠때였는지
일이 잘 진척이 없었던 일도 있었죠
호미회 화동미전을 주도한 후배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간판에 보면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어디께 쯤인가
공장을 빌어 화실로 꾸민 것 같은데 부럽기 짝이 없었고
드럼통을 짤라 만든 난로도 너무 멋졌고
내가 대림동에 근무할 때 황건이도 사무실이 가까운 곳이어서
가끔 좋은 소식 전해 주는데 화실 후배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대림역 부근에 사무실 겸 화실을 간소하게 차렸는데
그림그리고 싶을때 가끔 놀러 오라 하여
그림 그리고 싶은 욕심에 몇 번 찿아 갔으나 문이 잠겨
헛걸음만 한 적 있었습니다
나는 명색이 화가 지망생이었지만 변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군대가서 드디어 화가가 됩니다
군대가면 조금이라도 편할려고 요리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편하다면 취사병으로 빠질려고 훈련 안받는다 하니 거짓말 하는 경우 많은데
화가로 뽑혀 사단 예하 100여개 중대를 돌아 다니면서 비록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이긴 하지만 벽화도 그리고 빼치카가 흉물스럽다하여
빼치카 벽에다 벽화를 그렸으니 인류의 그림의 시원 이드롸크로아 동굴
벽화라 하지 않는가 벽화는 원없이 그려 봤으며 그 순간 만은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런대로 행복했습니다
불국사를 짓기위해 징발된 석공같은 심정으로 한동안 살았죠
그 작업이 끝나자 촤트 작업실에 동원되어 탱크 대포등 온갖 무기들은 다 그렸죠
내일 모래 제대하는 고참들에게 불려가 메모리 앨범에 삽화가로서
동원되기도 하고 ...
재익형 한테서 편지가 오면 철책선 앞의 전포대장으로서 한가할때는 사병들에게
노래도 가르쳐 주고 바이올린도 철책선 앞까지 비밀리에 반입하여
들려 주기도 하고 작은 서화회를 이곳에 만들었다는 편지도 오고....
제대 하여 삼성에 입사하여 처음 발령 받은 부서가 건설 경리부여서
초기엔 애로사항 많아 조담이의 개인 교습이 큰 도음이 되었노라 얘기 하시기도 하고...
건축 현장 사무실에 언젠가 밤에 놀러 간 적 있었는데 사무실 입구
현판이 재익형 붓글씨로 일필 휘지 붙었더란 야그
얼마 후 호미회OB 팀 들이 은퇴하여 시간여유가 있으면
작품들을 모아 OB서화회전시회 한번 크게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천마산 사건이후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찍는 사진기인
리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은
35미리 필름하고 달라 명함크기 정도였는데 필름이 조금 남아
노란집에 가서 그겨울 벽난로에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기억 안나는데 69학번 국문과
나온 여학생이랑 7-8명의 후배들을 찍었는데 사진도 전해주지
못하고 졸업하고 말았군요
나는 75학번쯤 되는 후배가 나타나 자기가 겪은 동시대의"야사"를
연결해서 써가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볼만한 야그가 되지는 않을까요
재학중에 보면 대강당에서 저녁에 가끔 외부 합창단 들이와서
요즘 열린 음악회 같은것도 있어 서화회원들 합동으로 구경 간 적도 있었고
가끔 타대학교 교수님이 저녁에 학술강연 같은걸 하는경우 있는데
교수님 이름은 생각나지 않으나"데보노 이론이라고" 그당시 한참 성가를
올리고 있는 학설이었는"에드워드 데보노"라는 분이 제창한건데...
상황이론 우발이론 수평적 사고방식{Lateral thinking}
논리적 수직적 경험 법칙에 의한 굳어 버린 습관을 타파 해야 좋은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당시에는 꽤 감명 깊은 강연이었습니다
성경속의 예수님이 이 이론의 탁월한 실천자라고......
예수가 진리를 설파하고 다닐 당시는 우리 일제 시대와 시대 상황이
몹시 유사 했는데 로마 사람보다 유대인이 더 "예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습니다
바리새파 등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개혁적 생각이 행여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뺏어가는 계기가 되지않을까 해서 어떤 트집을 잡아 죽일려고 광분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헤로데'당원을 보내 예수에게 묻는다
선생님 카이자에게 세금을 바치는게 옳습니까..
바치라 하면 로마와 한 패라고 걸고 넘어 갈 것이고 바치지 마라 하면 로마군에게
잡혀 갈 것이고 진퇴 양난이라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세금으로 바치는"데나리온 동전 한닙을 갖어오게 하여
초상과 글씨는 누구의 것이냐 물으시며"카이자의 것은 카이자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 라고 야그 하시자 그들은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났다는....
위와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예수가 선택한 상황이
수평적 사고 방식이라는 획기적인 야그가 감명 깊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칭찬 하는데 인정하는데 몹시 서툴고 인색하다는 생각이듭니다
노란손수건이란 책이 베스트 쎌러가 된 적 있었죠
샘터사에서 발행했는데 엘로우 리본이라는 팝송이 되어 대유행 한적도 있죠
내용인즉 어떤 죄수가 출감할 시기가 거의 다되어 자기 애인 집을
들릴려고 하는데
전과자이기 때문에 받아줄지가 심히 불안하고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 생각다 못해 편지를 쓰기를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집앞 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집에 들어 가지 않고 지나쳐 가겠다.....
얼마후 출감하여 그녀의 집앞에 이르러 모퉁이만 돌면
그녀의 집인데 그녀 집 100M 앞 유행가 제목 같군요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녀 집 앞 나무에는 수 백개의 노란 손수건이
펄럭이고 있었다는 감동적인 야그 아닙니까
돌고래도 알아주고 칭찬 하면 평소 3M를 뛰어 오르던 돌고래가
10M를 뛰어 오르더란 얘기 아닙니까
가끔TV 이벤트성 광고에 보면 대 낙담하여 터벅터벅 돌아오는 주인공을
친구들이 숨어서 몰래 그 친구의 집에 미리 몰래 들어가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가 실망한 어깨가 쳐진 그 친구가 들어오면 갑자기 불을 켜면서
놀래켜 주면서 주인공에게 살 맛이 나게 해주는 극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너무 등한시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다 못해 축하할 사람 E-mail 폭탄을 PC가 다운될 정도로 보낸다든지.....
재학 중에 아침일찍 교정에 인적이 드물 때 가끔 서화회 4층에 갈때가 있씁니다
아무도 없으리라고 서실 문을 열면 재익 형이 작품 쓴다고
맑은 정신에 써야 한다고 어제 저녁에 먹을 갈아 물이 어느정도
증발해 작품쓰기 좋은 점도의 먹물로 일필 휘지 글씨를 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밤새도록 먹내음이 배었슴인지
먹냄새 좋고....
그때는 지금보다 가난 햿지만 지금처럼 살벌하지않은 그래도
인간미가 남아있던 세월은 아니었나 생각 해 봅니다
지금은 더 잘 산다는데도 더 살벌하니,....
김삿갓 김병현이 허무로 무장하고 조선 팔도를 유랑할 적에 조선시대에
이 분 처럼 멋진 분 많지 않습니다
100년도 못 살 것들이 1000년의 근심으로 살면서 준비만 하다가
끝장난다고 야단친 분이 이 분입니다
또 멋진 분이 성삼문이라고 사육신의 한사람으로서 역적으로 몰려 한참
인두로 지지는 불고문을 받는데 고문 기술자에게 한다는 말이
"야 이놈아 인두가 식었으니 더 뜨겁게 달궈 오너라"라고 호통을 쳐서
고문 기술자가 그 자리에서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유명한 가슴 철렁한 야그
이분 마저 없었다면 조선 역사는 너무 심심 했을것임
지금도 노량진에서 우리를 쳐다 보고 계시며 돌아가실때도
수레에 사지가 묶여 찢어 죽이는 형을 받아 처참히 돌아가신 슬픈 야그
돌아다니는 시인 김삿갓 이 분이 하루는 가난한 동네에서 잠시 유숙하게 되는데
가난하지만 인심은 죽지 않아 주인 아주머니가 죽을 내오면서
손님에게 아주 미안해 하는지라 김삿갓이
시한수를 지어 바쳤겠다
네 다리 소반위에 죽 한그릇
하늘빛 구름이 함께 비치네
주인이여 낯없다 말하지 마오
죽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사랑 한다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호미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올가을에는 덕수궁에서 루우벤스 초대전이 지금부터 11월까지는
있다 하니 가까운 친구분들하고 구경 하심이 어떠신지요
다음을 기약하고 회원님의 건강 가내 제절의 안녕을 빕니다
2003.8.25 홍 광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