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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3-8
대환이; 잘 생기고 반듯하며 공부와 더불어 어릴 때에도 유머가 있었던 풍성한 삶의 소유자... 한 반은 아니었지만,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환이 같은 호탈한 성격의 소유자도 부인과 소원(?)할 때도 있다니 오히려 위로가 된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여동생이 무척이나 예뻤었다는 기억... 이후에도 대환이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지만 (서운해 하지 마라, 머슴애들이 다 그렇지, 뭐! 너는 나 생각했겠냐?), 여동생은 그 미모로 인해 떠오르곤 하더라... (미영 동기의 이야기대로, 나의 어릴적 그 "내숭"만 아니었더라면 대환이한테 아첨과 더불어 졸라보기라도 했을텐데..아쉽다....하 재훈 정도의 용기(?)만 있었어도....) 이로 인해 이미 연로(?)하신 부모님께 그런 여동생을 나달라고 조르던 생각이 난다 (나 진짜. 너의 동생 이름을 이 site (은주)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제는 아내와 이번에 한국에서 입양할 아기를 위해 건강진단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금년 중후반에 한국에 나가서 데려올 아기를 생각하며 우리가 소유한, 그리고 나눌수 있는 것에 대해 밤 늦게까지 (that means, until around 3:00 a.m.!)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긴 우리 둘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 지 공식 reception 자리에서도 둘이만 이야기한다고 간혹 staff들이 주의를 상기시키곤 하지...(얼빠진(?) 남편의 전형). 하긴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남자가 세상에서 할 위대한 일이 많다지만, "한 여자만을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남자에게 있어 가장 위대하고 멋진 일이라고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 (또다른 푼수의 이야기?) 요사이엔 너무나 바빠 소식조차 올리지 못해도, 남의 글을 읽기만 하는 재미도 꽤 괜잖터라. 이젠 한 Reception 공식 스케줄(갑자기 한국 대통령이 방문하셨다니, 예의상 안 갈 수도 없고....그래도 난 빠진다)만 지나면 끝! 지난 2월말 하와이에서 친구들이 보고파 한국에 잠깐 들릴까 하다가 이 곳 일 때문에 어려웠고, 아마 4월 말 서울 회의때나 (하긴 그때는 본 회의중이라 더욱 바쁠텐데)......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실은 비행기를 싫어함) 해외여행에는 동행하지 않던 아내가 왠일인지 이번 3월 하순의 유럽 이사회 출장에는 같이 나서주니 고맙기 그지 없다 (하긴 선물 사주는 것에 대한 조건부 교환. 이로 인해 나의 3월 한국행-하루 머무는 것이지만-도 물 건너갔음). 마드리드/파리만 들려 업무 마치면 바로 돌아오려고 했는 데, 아내가 연애 시절 만나던 곳을 같이 "여유롭게(?)" 단둘이 거닐자고 제안하니, 아예 이태리나 스위스까지 둘러보기로 예정을 잡았다. 영국에서 강의도 있고.... 오래 전 서로의 추억의 그림자를 한잔의 cafe con leche (뜨거운 우유에 섞는 원두커피/ Latin 방식-이전에 내가 쓴 "아리송"차의 전형)에서 찾을 까한다.(둘이서만! 8살짜리 아들놈도 안중에 없다! 무정한 아빠....) 요사이는 학문에 대한 갈증이 심해져서, 늘 하고 싶던 마지막 분야의 공부 (국제법)를 금년 하반기에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4-5년 걸리는 또다른 학위과정이지만, 최선을 다해 앞으로의 보람있는 삶을 위해 쓰기를 원한다 (업무와 병행하는 것이 어렵지만, 어차피 상호 보완적인 일이고 또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실력없음과 부족함을 절감하기 때문.). 이를 위해 Boston으로 가려고 몇번 마음먹고 준비했었는 데 딸들이 Washington, D.C.에서 고등학교까지는 남겠다고 하니 아빠가 양보해야지.... 하루 하루가 너무나 바쁘지만, 우리 모두는 살아 같이 숨쉬고, 또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늘 기쁘다. 삶은 여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 En verdad, la vida es bonita en la que mis amigos estan compartiendo unos a otros ("삶은 우리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서로 공유하는 한 진실로 아름답다.") P.S. 실은 지금 Reception 마치고 다른 모임에 가기 전 머리도 쉴 겸 두서없이 적어 본다. 난필을 이해해 주기 바라고, 동기들의 소식과 글을 통해 언제나 신선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우리 은주의 아름다운 봉사(?)에 작은 격려가 되었기를 기대한다
2001-3-9
친구들 바로 이전에 마음아픈 이야기를 써서 미안, 미안..... 동화작가인 중학 동창이 중남미 문학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이에 꼭 필요한 "선물"을 주려고 하다가 모든 동기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재작년 여름에 Dominican Republic에 갔을 때의 일 입니다. 휴가기간을 이용해 그 곳의 빈민촌을 돕기로 했는 데 특히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있던 이 곳은 옛날 Columbus가 노년을 보냈고 노예무역의 중심지로도 대단히 악명높은 곳입니다. (영화 "Amnesty"에도 나왔던 지역). 특히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이웃 하이티의 난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와,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지요. 생활 여건이 아주 열악한 지역이라 저는 이후 현지 열병이 발병해 미국에 돌아와서는 병원에 실려갔었지요. 어쨌든 예정했던 기간동안 현지 선교사님들과 봉사를 끝내고 떠나던 그날 저녁, 한 한인 목사님을 만나 이분의 한탄(?)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인즉, 한국에서는 가히 Spain어 사전을 만드는 데 있어 1인자라 할 수 있는 김 충X교수님 (민중서관 발행 사전 등)이 약 4년전 언어 연구차 이 곳을 들리셨는 데, 개인적인 어려움이 겹쳐 있던 이분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갈급한 심령으로 예수님을 믿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묻기를 "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더랍니다. 이에 목사님께서 "나는 이 곳에 20여년을 머물렸지만 언어 소통이 안돼니 만일 한국어-스페인어로 된 성구사전만 있다면 중남미 현지 모든 선교사가 설교도 하고 소원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선교사에게 있어 "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사전의 중요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사전 만드는 것이 그 것도 한국어를 먼저 색인하는 한-서사전의 집행은 어느 언어학자도 10여년이 걸리는 피말리는 작업이라 엄두로 못내는 것이지요. 그것도 돈을 벌 수 없는 성구사전을... (대부분 선교사님이나 신학생들이 필요로 하니까). 그러자 이 분이 "알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바로 그날부터 한 구석방에 들어가, 귀국도 포기한 채 만 2년동안 약 2,000페이지에 이르는 사전을 그 것도, 한국어-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영어까지 포함하는 한-서-영 성구사전을 완성하셨답니다 (한마디로 "기인"이지요). 한편 각 중남미 각처의 한인 교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십시 일반 원조하여 2년동안 이 분의 생계를 지켜드렸답니다. (참, 자랑스러운 의지의 한국인들!). 책이 완성된 후 이 목사님은 너무나 기뻤고, 그 출판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이 소식을 전하니 모두가 마음은 동일했지만 마침 한국에 IMF가 불어닥쳐 어느 누구도, 특히 단가가 너무 높은 사전류 발행에 나서주지 않더랍니다. 이에 백방을 노력하신 후 지칠대로 지친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생겼고 결국 하나님과 직접 결판내기로 결심, 40일을 작정하시고 현지에서 기도하시는 데 ("하나님, 이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외지에 그 누구를 보낼려면 보내시고, 말라면 마시고요"하시면서...참 배짱도...)저희를 만난 날이 마침 그 마지막 기도일이건만 하나님은 전혀 응답이 없으시다며 한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분이 제 이름이 "(희)돈"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보시고, 작은 기대(?)라도 하셨겠건만 초라한 옷차림에 그 것도 못사는 섬나라의 빈민촌에서 만난 저를 안중에라도 두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법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제가 당연히 하겠지만, 사랑스런 제 아내에게 먼저 그 기회를 자신의 힘(헌신)으로 하도록 양보(실은 "test")해 주기로 했지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제가 우선 사전 원고를 보자고 하니 목사님께서 반신반의하셨지만 (설마 한국인이 사전류를 검색할 만한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의심하시면서), 당신이 직접 뉴욕 제 사무실로 전화하셔서 저의 position을 확인하신 다음에야 "할렐루야!" 하시더라요. (원, 내 외모가 그리도 형편없나....) 이어진 아내와의 통화에서, 그녀는 나의 말에, 정확히 단, 1분의 대화에, "O.K!" (이런 여자를 누가 사랑 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기의 적금을 그대로 (보통 봉급 생활자의 1년치 수입)을 흔쾌히 보내주더라구요 (나한테는 그렇게 짠 여자가, 세상에!) 작년에 이 사전이 쿰X 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모든 선교사님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으며, "기독교 출판대상" 마지막 순번에까지 nomination 되었답니다. 물론 아내 자신의 이름은 어느 한 곳에도 나타나지 않게 하고요.... 수정판과 더불어 CD도 금년에 발행될 것입니다. 마침 지금 제 책상위에, 어떤 분이신지 이 사전을 갖고 유카탄 반도에서 봉사/선교를 하신 후, 이 책을 현지 선교사님에게 전해 드렸다면서 보내온. 어제 받은 감사편지가 놓여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서반아어 성구 사전은....사랑 안에서 하나된 우리에게....크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중략.... 고XX 드림" 아,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성이 크고 작던 간에 전혀 상관없이, 그 것에 우리의 진실된 마음만 담겨져 있다면, 이러한 서로의 "위로"를 통해 인생은 풍성해 지고 우리의 삶은 더욱 밝아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추신: 중남미로 여행을 떠나는 동기뿐만 아니라, 다른 필요한 동기들 혹은 주변의 아는 중남미권 선교사님에게 전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제가 "한-서-영 성구사전을 보내드리겠사오니, 필요한 분은 "김 광욱 상무" (나의 한국 수행담당이고, 서울 WTC 방계회사 사장 겸임.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음)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대표 회사 전화: (02) 3295-4500 Cell Phone. (016) 403-3203) 방금 전 제가 전화로 지시해 두었습니다. 정가는 미화 $50불 상당이지만, 동기들/관련자에겐 무조건 무료이며, 꼭 Pay하고 싶으면 자기 주위의 선교사님에게 큰 사랑과 함께 무명으로 "위로"의 헌금을 하여 주세요! 샬롬.
2001-3-20
내 진정 귀한 친구 대환 군에게; 아, 대환군! 본인에게 한 말은 아니고, 그 글을 쓴 사람이나 즐기는 우리 자신의 세대에 대해 던진 말이니, 정말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자네가 어린 "친구의 우정과 사랑으로 담백하게 받아주는" 그 도량과 성품에 다시 한번 "역시나" 감탄합니다. 실상 쓰려고 한 내용은, 이러한 상황에 그냥 순응해 살아가며 웃어 넘겨야(?)만 하는 한국의 "분개하지 않는" 일반적 여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하튼간에 이렇게 서로 솔직하고 진지하게 한 세대의 문제를 30년만에 만나-얼굴도 보지않고- 서로 논의해 볼 수 있으니, 40대의 무서운(?) 아줌마들 앞에서조차 겁도 없이 "주제"를 제공한 그대의 솔직함에 마음이 더욱 푸근해 지고, 과연 영훈으로서의 만남은 우리의 삶에 참으로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고 자부하게 됩니다. 추신: 만일 여건이 허락되면, 그 원래 글이 게재된 란에 "어느 남자의 의견"으로 대신 게재해 주는 것도 부탁하고 싶은데요? 게재자를 "김 대환군의 친구 이희돈"으로....
2001-3-19
"여자의 性에 대하여..." 나는 여자의 性에 대한 어떠한 상품화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이는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요, 누이들의 이야기요 딸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이웃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자기 스스로의 성을 보호하지 않을 때 여자의 성은 더욱 유린되어 진다. 훌륭한 아버지는 훌륭한 어머니가 존재할 때 진정으로 만들어진다. 인격적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의 미래 속에서야말로, 진정으로 남과 녀라는 "우리"의 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 훌륭한 어머니만을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해, 아버지들은 사회적 회한과 남성적 책임을 통감해야만 한다. 아내의 성을 인정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남편은 아버지로서도 인권 유린자이다. 미혼 남녀간에 성의 개방화란 이름으로 결혼의 순결함이 유린되는 것보다도, 돈으로 성을 사고 파는 매춘행위는 여성의 삶의 권위를 짓밟는다는 면에서 더욱 비인간적이며, 인간적 연린으로 이끌려진 불륜보다도, 자녀를 가진 가정끼리의 불륜은 아이들의 정서적 파괴라는 면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성을 유린한 부모의 아이, 더욱이 모친의 성이 문란하여 자기 아버지의 존재가 흔들리고, 또한 성을 상품으로 유린당한 아이가 어떻게 정상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의 모친이 성의 도덕적 관점에서 멀어질 때,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성장기의 아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순수를 기치로 지녀야만할 젊은이들마저 창녀와의 금전적 성행위를 통해 비로서 어른이 된다고 상식화시켜주며, 남자의 동정은 무시하면서 여자의 순결만을 요구하는 사회는 차라리 미개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어린 여자아이들의 성을 젊음으로의 회귀 방편으로 삼는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여성들의 사회는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자신들의 성 유린에 대해 침묵하는 외면이 바로 1년에도 1억여명이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 때문에 낙태되고 버려지고 죽어가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적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아내를 창녀처럼 생각지 아니하여도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성의 환희에 이른다. 혼외정사의 환타지아가 아니어도, 서로를 인정하는 부부의 성은 매일 매일 서로의 육체에서 뜨거움을 찾을 수 있다. 아내의 육체에 대한 성을 이해하려하지 않고, 여자로서의 아내를 존중하고 연구하지 않는 남자는 남편의 자격을 포기하여야 한다. 부인은 여자의 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편과 당당히, 그리고 단호히 헤어질 권리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창녀도, 값싼 주점의 접대부도, 추문의 여자 연예인도 우리의 누이이며 우리 삶의 일원이며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여자의 성일지도 여성의 이름으로 보호되어져야 하며, 이에 대해 감히 논할 수 없다. 여하한 모습일지라도 여자의 성에 대해 도덕과 추문과 연예를 명분으로 희극화하는 것은 사회 소속원들의 도덕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집단적 성적 열등감의 발로이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 인정하고 주창하지 않는 성의 존중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같은 여자의 성에 대해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자신들의 성의 유린에 대해서 조차 분노하지 않는, 그 침묵하는 여성들의 지성을 존경하지 않으며 그 양심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 교양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 가정에서의 여자의 행복을 말하면서, 이웃 여성들의 성 유린에 대해서 진정으로 분노하지 않는 현모양처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가정은 우리 미래의 산실이며 사회의 기본 유기체이다. 가정은 저절로 태어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자의 성은 남자의 성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쾌락의 단순 수단이나 노리개가 아니며, 우스개 소리.희극의 주제가 아니며, 또한 사고 팔 수 있거나 조롱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고귀한 삶 자체이다. 여자의 성은 보호되어져야만 하고, 주창하여야 하며, 선언되어져야 할 우리 모두의 당당한 원래적 공동 가치라고 나는 믿는다.
2001-4-2
유럽으로의 추억여행 I 마드리드, 내 아내와 인생의 첫 번째 만남의 장소, 그리고 가장 가난했던 시절의 행복이 깃든 곳.. 아내에게 있어서는 17년만의 방문이라 더욱 많은 의미를 주는 듯 하다. 스페인 무역협회장의 특별 배려에 따라 마련된 Zurbano가의 100년된 아름다운 꽃의 호텔 (사진 오른쪽 상). 3층으로 된 거실과, 고색 창연한 식탁과, 그리고 아내와 나만을 위해 준비된 한밤의 Swimming Pool..... (사진 왼쪽 상) 추억의 장소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교정과 왕궁 호숫가에서의 한잔의 카뻬꼴레... 한밤에 같이 즐기는 플라맹고의 축제... 그리고, 17년만의 금의환향이라며 스페인 무역협회장이 마련해준 자택에서의 만찬이 더욱 고맙다. 아내의 눈가에 비치는 희미한 눈물 자욱.... 파리, 내가 유학시 여행할 때 가난하여, 노숙을 마다하지 않던 곳... 개선문 앞 광장에 마련한 그녀를 위한 17세기풍의 아름다운 호텔. 한 밤에 에펠탑을 바라보며 세느강에서 같이 나누는 저녁 만찬. (사진 오른쪽 하) 한 잔의 포도주에 마음은 취하고 그대와 가로수등 밑을 늦도록 산책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그대에게 바치는 내 사랑의 밀담. 96년 Grand Prix 프랑스 최고의 chef가 마련해 준 특별정식. (사진 왼쪽 하) 아내는 그래도 한국의 김치를 찾는다. (Continued...)
유럽으로의 추억여행 II 쥬리히, 아직도 눈이 덮힌 쥬리히 호수와 그 아름다운 강가를 이슬비 속에 그대와 거닐다. 알프스의 추위를 위해 그대 목에 스카프를 사서 걸어주고. 하이디의 전설을 따라가며, 하늘과 호수와 산과 백설과 신록의 조화를 만끽하다 (사진 왼쪽 상). 스위스의 아기자기한 삶이 무척이나 정겹고, 나이 듬직한 아줌마가 마련해준 전통음식이 더욱 정감을 어리게 한다. 리히텐스타인, 유럽 오지의 조그만 공국 산 위에 지여진 아름다운 백작의 집을 바라보며, (사진 왼쪽 하) 그대와 같이 하는 그 곳이라면 나는 언제나 왕자며, 그대는 공주이다. 로잔느, 레만호수를 바라보는 120년된 Castle형 침실에 마련된, 같이 나누는 식사. 서로의 고생했던 시절을 회고하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를 통해 남편의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 아내.(사진 오른쪽 상) 알프스 횡단 열차를 통해 이태리로 향발하기 전 아내에게 15주년 결혼 기념 선물을 선사하다. 그대의 사랑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와 금을 어우려 만든 스위스의 아름다운 시계. 밀라노.. 세계 유행의 중심이며 첨단 디자인의 집합체. 패션거리를 방문하여, 디자이너 앞에 그대를 세우고 나 역시 미를 배우다. 밀라노 광장 앞에서 한잔의 생맥주에 축배하고 그대 앞에 시를 읊다. (사진 오른 쪽 하) 늦은 밤, 밀라노 성 앞의 장대한 분수 물줄기와 이에 비춰진 찬란한 조명 속에 나, 그대에게 입맞춤하다. 아름다운 우리의 집. 들어서는 곳에 미리 나와있는 7살짜리 아들놈의 그렁그렁 눈물어린 큰 포옹과 환영글이 마음을 따사롭게 하다. "I love you, Mom and Dad!" 가족 모두 같이 손잡고 한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다.
2001-5-3
만남의 인상 (부록: 이 미영의 작문) 한국... 김 대중 대통령-전혀 무표정한 얼굴. 이 희호 여사조차 감정 표현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음. 말을 꺼내기가 아주 어색한 모습들.... 그러나, 불편한 몸 거동에 마음이 아팠음. 고 건 서울 시장-자상한 모습과 더불어 학자적인 풍김. 외국어 표현에는 미숙. 만찬시에도 사생활을 간혹 비출 줄 아는 가정적인 분. 대통령 비서실장-부드러운 인상과 더불어 자기가 모시는 분에 대한 충성심이 어림. 김한길 문공부 장관-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외국어 구사에는 역시 미숙하며, 정치적 선택이라는 인상을 받음. 산자부 장관 등 기타 관료-모두 의욕은 강하나, 보다 전문성이 필요하고 국제화 감각이 요청됨. 철저한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는 Professional 리더십이 요청됨. 중국.... 강 택민 국가주석-얼굴을 가릴 듯한 안경을 쓴 "오소리"같은 인상에, 유머감각이 아주 돋보이는 할아버지.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과시. 정치적인 언어를 일반 언어화 하여 자연스럽게 주위를 동조케 하는 토론의 조련사. 우 이 국가 부주석겸 통상 담당 국무위원-중국 최고위 여성 공직자(국가 서열 8위) 답게 뱃심과 더불어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춤.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 갈 줄 아는 리더. 친구같은 인상을 줄 줄 아는 지도자. 또한 중국의 강점과 약점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알며, 패션감각이 뛰어난 귀여운 인상의 할머니. 리란칭 경제담당 부수상-해외 경험에 따른 외국어 실력이 발군이며, 국제 경제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소유. 예절을 알고 부드러움을 갖춘 지도자. 국가 정치협상회의 최고회의 부의장 등 각료들 (국가 서열 20위 이내)-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겸허함을 갖춤. 각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겸비하고 있어 앞으로의 중국의 미래에 대해 내가 경외감을 갖도록 함. 특별한 여자, 이 미영... 내 국민학교 동창. 한국 체류시 유일하게 전화 걸어준 친구 (하지만, 내가 학교로 전화하니까 마지 못해서). 글에서는 항상 "열린 아줌마 행세"를 하려하나, 외간(?) 남자의 전화에는 주춤할 수 밖에 없는 미모의 한국 아줌마. 그래도, 내게 한번 전화해준 대가로 본인의 글짓기 원본을 attach하니 감사, 감사하며 살 것! 앞으로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아 (단, 김 은주의 인증만 있으면 O.K!) 해당 개인의 사진.글 등 각종 진귀한 자료을 모두, 모두 공개할 예정. 개봉박두!!!!!!!!!!!
2001-5-6
은숙이의 연극팀... 사진에서 아주 잘 생긴 놈(?)이 나와 은숙이와의 주인공역을 빼앗아간 주인공 (이름이 생각이 안남). 총천연색 본격 연극 사진은 은숙이가 회한(?)의 마음으로 여기에 데뷰 글을 올린 다음에야 공개할 예정. 모두에게 좋은 주말되십시오. 추신: 대환아, 너의 글도 갖고 있는 데, 계속 은둔생활하면서 형님의 속을 아프게 할 것이냐? 어서 화려한 은막으로 복귀하기를 모든 펜들이 학수고대,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헤아려 주시기를 바란다. (일설에 의하면) 은주는 2주간 병까지 낫단다. 건승!
국민학교 4학년때(2반)의 일기를 읽다가, 오늘 비로서 왜 내가 3학년 때 짝이였던 은숙이를 그렇게 사랑의 상처(?)도 없이, 기억도 없이(?) 쉽게(?) 잊어버린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앞 뒷마당에 피어있던 꽃잎까지 곱게 껴 있는 (아마 그 일기쓴 날 받지 않았나 싶은듯..) 이 날의 일기는, 지금은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병색어린 "현숙"이라는 여학생(성도 모르겠음)에 대해 "천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너무나 조숙했었던 것 같아요..)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알면 뭘하게?!)
2001-5-8
다음 글은 오늘 북한과의 해운 사업에 대한 중요한 책임을 맡고 글을 올린, 중학동기의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좋은 날 되십시오. 추신: 은숙이는 언제나 글올리려나? "은숙이 이 가시나야, 우리가 남이가?!" ************************************* 원백 동기; 북한을 통한 세계로의 길에 축하를 보냅니다. "원"대한 꿈과 기"백"을 갖고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북한은 원래 믿기 어렵고 대단히 다루기 힘드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투자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를 하시기 바라며, 특히 "항로"등은 정치적 문제에 민감한 사안인지라 큰 위험부담을 감수하셔야만 합니다.) 북한에는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데, 특히 김 일성 사망직후 "위기상황"일 때,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CNN과 같이 평양을 간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희 총재님이 국빈초청을 받아, 저도 일행(당시 WTC 아시아 지역 책임자 자격으로)으로 김 일성 별장에서 3일간 머물며, "최고위층"을 만나 "무역을 통한 평화협력"에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당시 제가 김 일성 동상앞에서 경배-저는 기독교인입니다-안한다고 위협적으로 대했으나, 제가 북한을 위해 2000만달라를 지원하는 안에 서명하는 책임자임을 안 후에는 묵인된 사례가 있습니다.) 마침 내 책상앞에 놓인 정무원 총리(당시 총리서리)와의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 평양방송 T.V.에 내가 순안 비행장에 내려 꽃다발 받는 장면이 나와,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아연실색하셨지요. 다음날에는 로동신문 첫면을 장식해서 나도 당황하고....(이후로 저는 절대 한국신문에는 인터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국제 무역기구인 관계로 정치에는 전혀무관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울을 방문해 당시 대통령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위기상태에서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두달에 한번 정도 북한 U.N. 전권대사(리 형철)과 저희 뉴욕세계무역센터 본부 클럽에서 만남을 갖는 데, 부시 행정부에서는 저희에게 자제를 요청하여, 북한은 금번 4월 WTCA 서울 봄 회의때도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라진.선봉 지역 개발시, 김 정우 위원장(이후 실각)과 함께 김 수영 김 일성 대학교수의 경제자문(미국 교수신분으로)을 제가 맡은 적이 있어, 동기님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도울수 있는 분야가 있으면 연락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희 자체도 1997년 부터 평양에 세계무역센터를 건립중(이전 류경호텔자리)에 있으니 동기의 일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www.kwtca.org 평양자료 참조) 늘 명심하실 것은, 북한은 경제 논리보다 "정치적 자존심"을 앞세우며, "체제 수호"를 우선하므로 경제 관계를 맺기 극히 어려우며, 투자 위험이 막심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저희는 현대와 같이 협력해 왔으나, 처음부터 비지니스가 아닌 원조의 성격이며, 또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진행이 빠르지는 않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때도 중국의 지도층과의 이야기에서 느낀 것은-비공개적 사견이라는 전제를 달고 들려준-, 북한의 개방은 중국의 경우와는 다르게 "대단히 어려울"것이라는 의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중략하고....(여자 동기들은 대단히 재미없을 것이므로) 이하 생략..... 건승하십시오.
2001-5-13
김 도관의 글짓기 "우리 집 형제" 송 광섭은 이전 모임에서 만나본 성의를 생각하여 바로 올려주고 (곁다리로), 박 중섭은 신고하는 데로 올려줄 터이다. 건승! 추신: 김 은주의 글은, SysOp의 체면(?)을 살려주려 온갖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상 받은 적이 없는지(최소한 글짓기에는) (우하하하...통쾌한 웃음!), 어느 곳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그림으로 상 받았었다고 하는 데 그 큰 것을 이 곳에 올릴 수도 없으니, 그 누가 알겠습니까? 또 일설에는 공부도 잘 하였다고 하나(자칭), 어디 성적표를 스켄하여 올려보도록 하시지요? 물론 나는 찬란한(?) 성적표 원본을 갖고 있으니 언제나 증명 가능하지요!!! 또한 사진에도 얼굴이 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키가 무지 작았던 모양이예요. (우린 앞줄 5-6번 아이들 코흘리개 하고는 놀지 않았거든요?!-우하하하, 은주의 가려진 과거(?)를 위해 제가 언론의 사명을 다하는 데 왜 이리 즐거울까요?) 또한, 이전 대환이의 글을 보니 은주가 "질투의 화신(?)"이였더구만, 그럼 이전의 자칭 "남자아이 쫓아온 이야기"은 은주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인가요? 아, 오직 우리의 귀한 친구 대환군만이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대환아, 어서 복귀해라!!!!!!!!!)
2001-6-3
I. 성공에의 길- 모세가 죽었으니…” 모세가 죽었으니…”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승리의 대 서사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비극적 선언에서 시작된다. 모두가 믿었던 모세, 하나님을 면전으로 만날 수 있었던 지도자, 갈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제시해 주었던 인도자!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하며 약속된 승리의 날을 구가하리라 믿었던 그 모세가 이제 죽었다! 가나안이라는 그 오랜 염원을 바로 눈앞에 두고 진정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다시는 그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 나를 언제나 전율케 만드는 명제적 상황 설정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가졌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 간다. 그러나 언제나 충분히 멀기만 해 보이던 그 미래가 이제 한 사회의, 한 세대의, 한 시대의 중심 역할을 요구하며 우리 세대 (40대 중견세대)에게 긴박히 도래하고 있다. 내가 진정 오지 않기를 원했던, 그러나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밖에는 없었던 그러한 삶의 도전적 설정이다. 절대적 지도자 모세의 그림자 속에 가리어져 있었고 단지 그를 섬기던 볼품없는 시종이었으며, 어느 것 하나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주어진 자신의 초라한 일에서나 최선을 다하던 조그마한 사람 여호수아! 오히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세와의 함께함 속에 안주하며 그의 그늘 속에서 더 큰 평안함을 느꼈을 평범한 우리의 모습! 그 여호수아에게 있어 “모세가 죽었다”는 절망적 상황 선언과 “이제 모세를 이어 네가 일어나 가라”는 절대적 명령은, 그를 죽음과 같은 두려움으로 몰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위로와 격려와 약속과 감동의 언약은, 강력한 지도자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 “이제 일어나 가라”고 명령하시는 모세의 시종 그 여호수아에게 주어진다. ”너의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제 여호수아에게 다른 선택은 제시되지도 허용되지도 않았으며, 오직 그 세대가 자신들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그 시대의 책임을 걸머지고, “오직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믿음을 갖고 성실히 전진해 가는 것뿐이었다. 우리 세대에게도 이제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II. 성공에의 길-“세계를 그대 품안에! (World in Your arms!)” 세계를 그대 품안에! (World in Your arms!)” 그 보랏빛 청운의 꿈을 안고 나는 혼혈단신 세계무대로 뛰어들었다. 철없던 시절에 나의 가슴에 깊이 보듬었던 “그대”는, 바로 나의 꿈이었으며 야망이었으며 또 하나님과 이웃과 가족과 연인과 내 젊음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드릴 사랑의 예물은, 무한한 가능성의 신천지이자, 넓고 할일 많은 활동무대였던 “세계’ 그 자체였다.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언제나 “미래”라는 평안하고도 느긋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는 감동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바쳐질 뚜렷한 “사랑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지내온 일 자체가 한편의 흥미있는 드라마였다. 나는 “그 삶에 재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리고 그 소망대로 내 전공이요 목표인 “세계무역센터”에 성공적으로 몸을 실었다. Guy F. Tozzoli 세계 총재는 나에게 있어서는 목표였고 꿈이었고 지도자였고 아버지였다. 그 분이 발명한 컨테이너 선과 국제 무역 금융 통합체제는 나를 흥분시켰고, 록펠러와 함께 멘하탄의 바닷가를 간척하여 지금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일으킨 살아있는 역사는, 월스트리트를 들어 설 때마다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무역을 통한 세계 평화 (“World Peace through World Trade”)”라는 WTCA의 궁극적 목표아래 유엔과 노벨평화위원회와 세계 유수기관. 정계.재계 지도자들과 일하는 것은 내 젊은 이상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기존의 hardware 중심에서, 정보통신과 서비스 중심의 software로서의 전환을 주장했고, 이를 위한 “국제 지역개발론(International Regional Development)”이라는 독창적 이론 기반을 제공했으며, 개발도상국들의 국제 무역에서의 역할 강조와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과 정책적 도구를 제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Tozzoli 총재는 이 겁없는(?) 젊은 동양인의 모습에서 가능성 있는 그의 옛 모습을 미래 가운데 발견했으며, 그로 인해 그토록 관료주의적이며 조직 서열적인 국제조직의 경직성과 미국 경제계의 오만한 벽을 넘을 수 있도록 나를 격려하고 가르쳤고, 궁극적으로 나를 “David Tozzoli”라고 불려지게 하였다. 나에겐 언제나 그대를 위한 “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는 나의 하고 있는 바로 그 일 속에 존재했다.
III. 성공에의 길-“만남” 삶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했는데, 내 사회 생활의 시작은 Guy F. Tozzoli라는 세계 경제계의 거목과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러(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 등등)와 같은 갖은 위험을 공유하며, 국제사회의 소용돌이 중심 현장을 직접 수행하면서 쌓여간 일상적인 관계는 여느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에 못지 않다. 그래서 총재님은 공식석상에서도 나를 “아들(son)”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Tozzoli 총재님은 이제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 카리스마적 영향력과 정열적인 활동으로 인해 “80세까지의 총재직 수행 후 추후 2년 임기 연장”을 세계이사회가 최근 논란 속에서도 인준하였다. 실제적으로 WTCA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 세계이사회는 이를 전기로 “후계자 위원화 (Succession Committee)”를 구성하였으며 이의 건의에 따라 이번 10월 브라질 상파울로 정기 총회에서 “후계 방법론”을 최종 인준하게 된다. 늦은 오후, 총재님의 호출이 있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본부의 77층 총재 집무실은 언제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쪽으로는 국제금융의 중심인 세계재정센터를,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뉴욕항을 넘나드는 수많은 세계각국의 선박들과 함께 안개 낀 브루클린 브리지를 옆으로 끼고 도는 풍경을 가지고 있다. 세계총재라는 직분과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부와 영향력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늘 검소하신 분, 책상 옆에 놓인 커다란 지구본을 손으로 만지시며 항상 이런 말씀을 하신다. “세계 무역은 이 작은 내 손 안에 있어요, David!”. 총재님은 이번 10월에 WTCA 세계 이사회가 인준하는 정식 후계 체제에 따라 내년 4월 유럽 정기 봄 총회에서 세계이사회 부의장(Vice Chairman)들이 새로 설정될 것이며, 내년 10월부터 정식으로 이들에 대한 순차적인 후계자 과정을 실시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현재는 총재/의장 중심의 이원화 운영이지만 전문 컨설팅회사의 용역결과에 따라, 현 총재는 사무총장직으로 전환하며, 이에 따라 앞으로는 세계이사회 의장이 이사회 의장겸 현 총재역할을 병행하는 집중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현 의장은 매우 연로하므로, 두개의 부의장직은 현직 미국.유럽의 부의장이 자동 승계할 것이지만, David도 이번에 새 세대를 대표해 부의장(Vice Chairman)으로 새로 선출될 것이니, 이제 명실상부한 차세대 그룹으로서 “때가 올 때까지 (선임 부의장들의 임기가 끊나는 나의 50세 전후)” 부의장 직책을 가지고 후계자 훈련에 전념할 것을 명령하셨다. (주: WTCA 조직은 세계이사회가 최고 결정기관이며 이 밑에 뉴욕 소재 국제본부가 있음. 총재는 당연직 세계이사이고 이 밑에 3명의 부총재-수석 부총재와 제1, 제 2 등 두 명의 부총재가 있으며, David Hee-Don Lee는 이사회 파견 제 2부총재로서 부총재 들 중 유일하게 선출직 세계이사를 병행함). 내가 바라던 세계 총재의 꿈, 언제나 내 가슴 속을 설레게 하던 세계 총재로의 야망, 그러나 이제 그것이 바로 가까운 현실적 가능성으로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기쁨보다는 오직 “두려움”과 차라리 도망쳐 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Tozzoli 총재가 당시 50세의 나이에 뉴욕 항만청장으로서 록펠러와 같이 세계무역센터를 시작했던 1970년은 고작 5개의 세계무역센터와 소수의 기업체만이 회원이었지만, 현재의 WTCA는 전세계 105개국에 320여개의 세계무역센터와 75만기업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국제 무역기관이 아닌가? 언제나 나에게 방벽이 되어주시고 아버지같이, 또 친절한 개인 교사였던 그 분이 정말 이 곳을 떠나가고, 그러한 직분이 대신 나에게 주어졌을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분의 재임기간이 연장되어 3-5년을 나와 같이 있어준다 한 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준비될 것이며 성장할 것이며 또 그 이후를 나는 어떻게 헤쳐나가야만 하는가? 나는 나의 때에, “모세가 죽었으니…”라는 그 절망적 상황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과연 “일어나 가라”는 그 명령적 부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러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필연적 기반인 “믿음”이 과연 나에게 내재하는 것일까? 나는 비로서 나 자신의 연약함에 소스라쳐 놀랐고, 진실해 졌고, 이에 말할 수 없이 두려움 속에 떨었다.
IV. 성공에의 길-“두려움 없는 내일” 워싱턴 귀가 길을 위해 비행기편을 취소하고 열차 편에 몸을 실으며, 비가 오는 차창 밖의 평화로운 늦은 밤 풍경들을 바라본다. 희미한 바깥 불빛에 반사되어 비쳐진, 또 하나의 내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긴 밤을 끝도 없는 수면 속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내가 심한 몸살기를 느끼며 두통에 시달려 눈을 뜬 것은 아내의 입맞춤을 희미하게 느낀 늦은 오후시간 이었다. 서재에 앉아 성경을 열어보고, 우리와 똑같이 연약했던 사람 여호수아의 글을 찾아가며, 말할 수 없이 가난한 마음으로 무릎 꿇어 기도한다….그 가난은 상대적이거나 비교적인 가난이 아니라 참으로 외부적 도움이 없으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 가난이어야만 한다…나는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제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며, 두려워 않고 놀라지 않으며 주야로 그 것을 묵상하여, 다 지켜 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부터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살아야 겠다. 다음 주에는 다시 학교에도 등록하여 내가 모자란 분야를 더욱 공부하도록 하자….또 다시 4-5년 학위과정이 걸리겠지….그러나 이전의 고생하던 유학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진통하듯 공부하자…..그리고 다시 책을 편다…. 그렇다….우리의 부모들도 스승들도 선배들도 모두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하고, 추억을 떠내보내기도 하고, 정들었던 시절과 장소를 떠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날들을 아픔 속에서 준비했을 것이다. 울며 빵을 떼듯 그렇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했고 아파했고 괴로워 했고 또 외로워 했으며, 고민했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언제나 준비하는 자의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추억은 더욱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문득 어제 뉴욕 사무실을 떠나기 전 Herb (수석 부총재) 책상에 놓였던 작은 경구가 생각난다. “어제는 꿈이어서 눈부시게 아름답고, 내일은 환상(vision)이기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가 꿈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고, 내일이 비젼으로서 빛날 수 있는 이유는,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하는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아, 사랑하는 이여, 말없이 내 가슴에서 빛나는 이여, 나를 주시하며 말없이 나와 함께하는 이여, 여기에 나의 사랑이 있으니, “세계를 그대 품안에” 드립니다. 2001년 6월 2일 미국 Virginia에서 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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