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진 병영성지

다산초당에서 출발해 사의재 그리고 영랑생가 거치며 강진 - 남도답사 1번지를 둘러보고 있는데요.
저는 교육역사여행을 주테마로 하기 때문에 아이들 데리고 가면 교과서 적인 내용을 가미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강진을 가면 가급적 코스에 집어넣는 곳이 있습니다. 강진 병영이요.
행정구역상으로 강진군 병영면이고 강진읍내에서 10킬로미터 동쪽으로 달리면 나옵니다.
지금은 시골 면단위인 병영면이지만
병영이란 이 이름이 시골 면 단위의 규모를 넘어서는 이름이거든요.
먼저 조선 팔도라는 말 들어봤지요.
전국을 8도로 나누었지요. 지금은 전라도 하면 남북으로 나눠져 전라남도 전라북도 하지만,
조선시대엔 전라도였지요.
그렇게 해서 팔도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함경, 평안도 였거든요.
각 도엔 중앙에서 파견한 관찰사를 두고 관찰사가 근무한 곳이 감영입니다.
병영 할 때의 그 영자 돌림이예요.
하나 더 예를 들면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의 직책이 전라좌수사 였지요.
그래서 그 전라좌수사가 근무한 곳이 전라좌수영 - 수영입니다.
후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수군을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지요.
삼도수군통제사가 근무하는 곳이 삼도수군 통제영입니다.
줄여서 통영이지요.
지금 경상도에 있는 도시이름의 통영도 병영처럼 영자 돌림이잖습니까.
수영 통영 병영 끝에 붙어 있는 영자는 군대주둔지를 말합니다.
수군 - 지금의 해군이 머문 곳은 수영
육군이 머문 곳은 바로 병영입니다.
조선시대 8도의 감영은 8개가 있었고, 병영은 전체 16개가 있었습니다.
각 도에 병영이 1개 있는 곳도 있고 2개, 함경도엔 3개가 있었어요.
1개 있는 곳은 관찰사가 병영의 장인 병마절도사를 겸하고, 2개 있는 곳은 한곳은 관찰사가
그리고 다른 한 곳은 병영의 장인 병마절도사가 있게 됩니다.
그 병마절도사 있는 병영이 지금의 강진 병영면입니다.
전라도 관찰사가 종2품이고, 병마절도사가 종2품입니다.
종2품이면 장관급입니다.
원래 전라도 병영은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안 있어 태조 6년인 1397년 광주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광주공항인근이예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있었다는 표지판은 놓여 있습니다.
그러다가 남도 해안가에 왜구가 자주 나타나다 보니
20년 후에 태종 1417년 해안이 가까운 강진의 병영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지금은 건물들이 모두 사라져 폐허로 남게 되었지만
1997년 사적 지정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성곽, 남문, 동문 등을 복원하였으며,
나머지도 점진적으로 복원을 할 계획 이라고 한다.
올 가을에 갔더니 여전히 복원 공사중이더군요.
지반 문화재 조사와 더불어 진행하다 보니 더뎌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여행을 떠나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공간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거든요.
저는 강진 병영성에서
두가지 인간 이야기를 하려 합니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 병영에는
정군(正軍) 498명, 수성군(守城軍) 51명, 조역군(助役軍) 163명, 장인(匠人) 141명이 소속돼 있었다고 합니다. 병영성안에 필요한 인원이 약 800명, 상시 근무했다는 겁니다.
강진 병영성은 단순히 군사업무만 관장했던 것은 아니고 인근 57개 마을의 행정까지 직접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마을을 관장하고 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하니 물품이 필요하고 그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의 활동이 많아지겠지요.
장사수완하면 “북에는 개성 상인, 남에는 병영 상인”이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지역 5일장에선 “병영 상인이 없으면 장이 서지 않는다”고들 했다고 해요.
병영 상인은 개성 상인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상인이라고 했지만,
정작 병영 상인의 면모를 확인하는 연구는 전무했는데
2011년에 강진군 주최로 ‘병영 상인 학술대회’가 열려 병영상인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이후 이야기를 조명하는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병영상인
개성상인에 버금간다고 하는 병영상인의 뿌리는 어딜까?
해상왕 장보고까지 연결된다고 합니다.
사실 강진은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군까지 포괄하는 행정구역으로 관할하던 적이 있었거든요.
장보고가 개척한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무역루트가 당시의 상인들에 의한 이뤄지지 않았을까?
조선시대엔 1417년 병영성이 축조되고 군수용품과 생필품의 수요에 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병영성이 갑오경장 그러닌까 1895년에 폐영이 되는데,
이때 이지역 상인들이 전국 각 지역으로 진출해 상권을 장악하고
심지어는 1930년대엔 만주까지 무명과 베를 팔러 다녔다고 합니다.
병영에서 제가 두가지 인물이야기를 보자고 했습니다.
하나 더 인물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병영성을 둘러보려 주차장에 주차를 하게 되면
병영성 보다는 이국적이 풍차와 함께 기념관 그리고 낯선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에는 하멜 동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하멜.
대한민국 - 코리아를 알린 서양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히딩크 감독.
2002년 여름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직도 뛰잖습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 코리아를 유럽에 알린 최초의 사람이 바로 하멜.
히딩크와 하멜이 바로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그럼 하멜의 동상이 왜 병영성 앞에 있을까?
하멜은 네덜란드 무역회사인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1653년 7월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하던중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류합니다.
60여명의 일행중 36명이 살아서 제주 바다에 표류되었지요.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우리가 눈이 파란 외국인을 만나면 신기해 하고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데 당시 17세기엔 어땠을까?
그리고 제주 바닷가에 엎어져 있는 머리 노랗고 코오똑하고 눈이 파란 사람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충격은 어땠을까 하는.
제주에 표류하여 한양, 강진, 여수 등지에 13년 동안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들 일행을 필요에 의해 억류시켰을 터인데,
하멜기록에 보면 풀 뽑은 이야기가 많이 보여요. 그냥 외국인 노동자 취급정도 인 듯 싶어요.
이곳 강진 병영에서는 7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해 네덜란드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가서 조선에 억류된 13년간의 밀린 임금을 청구한 보고서가 하멜표류기입니다.
1668년 하멜보고서가 출판되자 동양의 조선이란 나라에서 하멜일행이 경험한 이야기는
신비와 재미에 인기를 끌었고, 이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번역판이 발간될 정도로
유럽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해설하다 보면 재미난 얘기꺼리가 하나씩 있어야 하는데
하멜은 62세까지 평생 독신으로 삽니다.
조선에서 결혼을 했을 것 같아요.
20대에 들어와 13년을 조선에 살면서 가정을 꾸렸고,
그 여인을 못잊어 네덜란드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뭐 그런 소설.
그는 조선에서 13년을 살다갔고 350여 년이 흘러 지금은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그를 기리는 기념공간이 있습니다.
제주에도 있고, 여수에도 있으며 이곳 강진에도 이렇게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념관 외에도 아직까지 하멜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병영성에서 삼백여미터 떨어진 다리 홍교에는 석장승이 있는데
특히 오른쪽의 장승은 이국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구요.
병영면의 돌담을 쌓는 모습이 우리 전통모양과는 다른 지그재그식 쌓기입니다.
네덜란드식이라고 합니다.
하멜은 그걸 알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