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5-11 15:27
[평생학습인] [3호] 내 영혼의 노래 _ 초등학교 졸업에서 상록학교 교장까지 - 정태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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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흥원
조회 : 29 |
내 영혼의 노래 _ 초등학교 졸업에서 상록학교 교장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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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상록학교장 정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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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내게 초등학교 졸업장만 남겨주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나의 치부를 모두 보이는 것 같아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연이 너무 많아 용기를 내어 봅니다. 김천 개령면 서부리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저는 상급학교 진학은 커녕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신문배달, 구두닦이, 술집 종업원, 생선장사 등 닥치는 대로 생을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춥고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설움을 남몰래 삭이고 있던 30대, 제 손을 잡고 야학 구미향토학교에 입학시킨 사람은 사랑하는 나의 아내였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도 수년을 망설일 만큼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찾아간 야학은 모신문사 한 켠에서 자원봉사 교사인 대학생 다섯 명과 어린 학생 두 명, 그리고 저, 전교생 세 명으로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남들이 볼 세라 창피하여 숨어서 다녔습니다. 곱하기 나누기도 잘 못하는 제게 부분집합과 원소나열을 말하다니요? 선생님의 열강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녹슨 저의 머리는 좀체 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생활 곳곳마다 못 배운 열등감에 말 한 마디 못하고 구석자리에 쪼구려 앉아야만 했던 기분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그러기를 몇 달 후 겨우 공부하는 게 신이 날 때쯤 교실을 비워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 학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장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절망에 빠져 있던 중 아내의 권유로 저의 집 옥상에 가건물을 지어서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흩어졌던 선생님이며 학생들이 다시 만나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들떠 흥분했습니다. 칠판도 사고 책상과 의자도 앵글로 맞추고 페인트칠도 하면서 모두 신이 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무허가 건물이라고 주민들의 신고로 구미시로부터 철거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몸으로 저항하다 결국 제 손으로 건물을 부수고는 아내와 학생들을 부둥켜안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울부짖었습니다. “너희들은 부모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하면서 우리들의 배우지 못한 설움을 결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동사무소와 시청을 찾아다니며 애원을 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야학교는 세워주지 못할망정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악을 써대기도 했습니다.
절망은 내 열정을 꺾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원남동사무소 2층을 빌려주어 새로이 학교가 섰습니다. 아내와 함께 포스터를 직접 만들어 몇날 며칠 풀통을 들고 벽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공개 홍보 일주일 만에 50명이 접수해 1991년 6월 동사무소 2층에서 입학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제겐 중학교 졸업장을 꼭 쥐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무속인을 불러 굿까지 했겠습니까? 그만큼 제겐 배움이 크나큰 열망이었던 것입니다. 정규교육을 배운 사람들은 아마 모르겠지요? 그깟 중학교 졸업장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겐 졸업장을 손에 쥔 그날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카드 한도대로 긁어가며 파티하고 공부를 도와준 선생님들 양복 한 벌씩 맞추어주고 난리를 쳤습니다. 아내와 함께 밤새워 합격증을 번갈아 만져보며 울분을 토하느라 밤이 새는 줄 몰랐습니다.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지 않게 하소서. 다음날 당장 저는 동사무소를 찾아가 내 학력기록을 수정해 달라, 중학교 졸업장이 있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리고는 전국곳곳에 현수막이라고 내걸어 실컷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해냈노라고…….
상록학교는 나의 인생! 이듬해 나는 심훈의 명작소설 ‘상록수’ 정신을 본받아 ‘상록학교’라는 교명으로 설립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가도 만들었습니다.
“♪상록의 꿈 안고 배움의 길 향하는 우리 모두 하나되어 못다한 꿈 찾아나서세. 아- 아- 상록, 상록. 희망이 가득찬 미래가 있는 곳. 우리들의 보금자리 언제나 높은 하늘처럼 푸른 곳....”
이름처럼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지금 200여명, 졸업생만 950명이 합격 하였습니다. 자원봉사교사가 50여 명이 되었고, 저는 이제 교장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지만 저를 찾아오기까지 꽤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저는 말합니다. 저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이곳까지 찾아오는데 꼬박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그러면 그 분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저의 두손을 꼭 붙잡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곤 합니다. 이제라도 공부를 하고 싶다고. 제가 어릴 때 옆집에 늘 감히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늘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교장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얼마 전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퇴직 후 이 학교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뜻을 말하며 그 분이 제게 ‘정 교장’이라고 호칭을 불렀을 때 저는 눈물이 왈칵 솟을 뻔 했습니다.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분이 제게 ‘교장’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니요? 저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가 아니라 방법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현재의 상황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나약한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면 된다!’라는 구절을 우리 상록학교 학생여러분들께, 그리고 만학에 불타고 있는 이세상 모든 독학생 여러분들에게 전하며 지금도 남몰래 흐느끼고 있는 이 남자의 눈물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칩니다. 늘 부족함이 가득한 제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부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게 주신 따뜻한 사랑에 힘입어 저는 언제나 시들지 않는 한그루 상록수로 이세상 살아가렵니다. |
본 수기는 「2008년 전국 성인문해교육관계자 직무 연수」에 학습자 본인이 작성하여 제출한 내용을 편집진이 일부 요약하여 편집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 | var md5_norobot_key = '52aaa62e71f829d41d74892a18a11d59'; // 글자수 제한 var char_min = parseInt(0); // 최소 var char_max = parseInt(0); // 최대 |